2000년 무더운 여름밤, 한일 선풍기를 벗 삼아 대나무 자리 위에 배 깔고 누워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하던 그 어떤 토요일 밤, OCN 채널에서 상영하던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년작)'를 보았다. 부다페스트를 거쳐 비엔나로 달리던 기차 안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미국 청년 제시와 파리로 돌아가는 프랑스 여대생 셀린, 이 둘이 만나, 순간의 선택으로 계획에 없던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비엔나에서 보낸다. 1년 같은 하루를 보내는 이 멋지고 용감한 두 사람은 끝내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하는 셀린의 배웅을 끝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낯설지만 마음이 통한 서로에게 온전히 하루의 시간을 내주었던 남녀. 용감한 선택은 아름다운 순간을, 그 순간은 서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잔상으로 남는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시간 자체를 영화로 다루는 리처드 링크레이터(Richard Linklater) 감독의 영화, 비포 3부작(Before Trilogy). 개인적으로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년작)은 별로였지만 비포 선라이즈 그리고 9년 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년작)은 언제든 다시 봐도 좋다.
내가 비포 미드나잇에 실망한 이유는 서로를 갈구하던 ‘순간’이 아쉬워서 결국 속박하고 영속하려는 인간의 덧없음으로 잠깐이어야 빛을 발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이 철저히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순간으로 아름다운 시간 그리고 관계가 있다. 그게 순간이었기에 아름다웠을 수 있고, 그 인연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기분 좋은 순간을 떠올리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찰나의 첫 만남.
몇 년 전 8월, 싱가포르 출장.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30분 거리인 인구 5백만의 도시 국가, 싱가포르는 실내는 마치 냉동고 같이 차갑고, 실외는 체내의 수분이 모두 증발할 것 같이 더운 곳이다. 창이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마치자마자 오차드(Orchard) 시내로 향했다. 숙소 체크인도 못하고 바로 달려간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포디엄에 거만하게 앉아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말들을 받아 적기에 바빴다. 이해는 뒷전이고, 우선 적고 보자는 심산으로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필이면 S키는 왜 뻑뻑한 건지, 부서질 듯 키보드를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이상행위를 하는 바람에 옆에 있는 사람이 곁눈질을 할 정도였다.
첫 세션 이후 브레이크 타임. 노트북을 의자에 내려놓고 회의장을 나왔다. 스틸레토 힐에 구겨 넣은 엄지발가락은 부어 있었고, 귀는 먹먹했다. 무거운 머리 속이라도 좀 개운하게 해 보자는 마음으로 트와이닝(Twinings) 페퍼민트 티백을 집어 들었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받아 티 백을 위아래로 담갔다 빼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던 찰나, 어두운 베이지색의 매끈한 옥스퍼드 구두가 보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보니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구릿빛 피부의 남성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키보드에 화났어요?”라고 묻는 그. 나는 ‘얜 머냐?’라는 속마음은 숨긴 채, 입가의 억지 미소를 띠며 계속 티백 담금질을 이어갔다. 나의 무례함에 흥미를 잃은 그는 그의 동료가 있는 무리로 이동했고, 나는 에어컨 바람에 식어 텁텁해진 페퍼민트 티를 벌컥벌컥 마신 후 내 자리로 돌아갔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반나절 동안 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정말 띵 했고, 숙소에 들어와 와인 반 병을 들이켠 이후 한 숨 잤다. 밤 11시에 일어나 새벽 3시까지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이틑 날 오후 비행기를 타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후, 자카르타 시내 호텔에서 싱가포르 국경일 행사가 있던 그 날, 연회장 구석에 있는 바 앞에 서서 와인과 진토닉을 번갈아가며 마시고 있었다.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던 그 순간, 누군가 민소매 원피스를 걸친 내 어깨에 손가락 4마디를 얹었다. “오늘도 화나는 날이 있어요?”라며, 묻는 낯선 사람. 그는 내가 싱가포르 출장 때 봤던 사람이었고, 통성명 이후 알게 된 그의 정체는 자카르타로 발령받은 싱가포르 외교관이었다. 그 10분 남짓이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첫 스픽이지(Speakeasy)
그 후 나는 회의, 공식 행사 등 여러 군데에서 그를 보았다.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는 그냥 ‘아는 사이’로 말이다. 그리고 별 일 없이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해서 메일을 접속하니 들어와 있는 생소한 이메일 한 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이메일. 그는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미팅을 요청했다.
며칠 뒤 우리는 자카르타 시내 퍼시픽 플레이스 몰 안에 있는 폴(Paul)에서 만나 관련 업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와의 면담을 끝으로 그 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려던 참이었는데, 나의 행선지를 물어본 그는 자기도 우리 집 근처에 산다며, 자기 차로 바래다준다고 했다. 면담 장소가 택시도 잘 안 잡히는 지역이고 해서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집으로 향하던 그 시각이 자카르타 퇴근 시각과 맞물렸던 것. 시속 20km로 꽉 막힌 수디르만 도로를 지나고 있었을 때, 그는 “혹시 쿠닝안 근처에 No.11라는 스픽이지 바 알아요?"라고 물었다.
내가 말로만 듣던 스픽이지 바(Speakeasy Bar)가 자카르타, 그것도 우리 동네 근처에 있다고? 내가 가본 적 없다고 하자, 그는 교통체증을 피해 잠시 그곳에 가자고 했다. 나의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기사에게 변경된 행선지를 말했고, 그렇게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이 낯선 남자와 간판도 없는 No.11라는 곳으로 향했다.
수디르만을 빠져나와 막히지 않는 뒷길로 한 10여분 가서 내린 그곳은 느닷없는 고층 건물 앞이었다. 나는 여전히 냉소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건물 로비 뒤편에 뜬금없는 빨간색 수화기가 있었는데, 그는 수화기를 냉큼 집어 들더니 암호 비슷한 것을 말했다. 그러자 벽문이 열리면서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바가 나왔다.
No. 11 Jakarta (출처: Mild Spot)
그를 의심했던 눈초리가 사라지고, 시골쥐가 도시에 상경한 듯한 얼굴을 하자 그는 웃더니 바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자카르타에 살면서 그렇게 들떴던 것은 또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스픽이지바를 자카르타에서 그리고 방금까지 업무 이야기했던 사람이랑 오다니.
달콤하고 씁쓸한 커피 리큐어, 패트론(Patron)
내 첫 잔은 톰 콜린스. 그의 첫 잔은 맨해튼.
그는 내가 엄청 무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면담한 날, 나름 친절하게 답변해주어서 그런지) 다시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전임자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나와 그의 전임자가 친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그의 전임자와 상당히 친했다. 내가 자카르타에 처음 와서 한 일이 싱가포르랑 얽혀있는 일이었는데, 그의 전임자인 그녀를 사적으로도 자주 만났다.
그는 자카르타 오기 전 첫 해외공관 생활로 이집트에 있었다면서 카이로에서의 생활 여담을 시작으로 우리의 오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가 근무했을 당시 2011년 아랍의 봄(아랍의 민주주의 혁명) 사태가 지속되던 시기어서 당시 이집트에 있던 싱가포르 교민들을 헬기로 구출해 튀니지로 보내고, 대사관 직원들은 마지막까지 카이로에 남아있었다고 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을 선언했을 때도 과격시위가 심각해서 교민 보호에 애먹은 이야기 등 나름 흥미진진한 그의 썰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 영화, 음식, 술, 여행 등등. 어쩌다 보니 말이 잘 통하는 두 사람이 교통체증을 피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긴 대화 끝에 그는 사실 이혼한 지 반년 정도 지났다고 했다. 오랫동안 연애하고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했고, 자카르타로 같이 발령받아 잘 지냈는데, 업무의 압박 때문이었는지 룸메이트 정도의 사이로 전락하고 말아 결국 이혼했다고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추임새 그리고 편견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의 사적인 독백 끝에 자기가 말실수한 것 같다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려고 했는데,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 어떤 의미 없는 말보다 나지막이 전하는 등 드두림이 그에게 더 필요했던 것 같아서.
교통체증이 나아졌을 밤 11시경, 그는 바 테이블에 있는 패트론 카페 (Patron XO Cafe) 병을 보더니, 왠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마셔보라고 권했다. 숏 잔에 가득 담긴 초콜릿 색처럼 질감이 끈적한 술. 나는 깔루아를 상상하고 마셨는데, 이게 웬걸 패트론 카페는 깔루아 보다 훨씬 더 쓴데 첫맛은 부드럽고 끝 맛은 알싸했다. 또다시 ‘시골쥐의 도시 경험’ 얼굴을 했던 나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상상도 못 한 술값 (거의 40만 원어치)을 담담히 결제한 후 약속한 대로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포옹으로 그 날을 마무리했다. 그와의 순간, 약 6시간 동안의 경험은 뭔가 애잔하면서도 달콤하고, 기약은 없지만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결은 다르지만 마치 비포 선라이즈의 마지막과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였기 때문이 충분히 마음만 먹으면 연락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지만, 나도 하지 않았고, 그도 하지 않았다.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리고 올 초, 그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자카르타에서 생활을 마치고, 싱가포르로 돌아간다고. 잘 지내라고,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보자고. 이렇게 4마디를 남긴 그는 더 이상 자카르타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자카르타에 남아있다.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 시칠리아노
이탈리아 남부의 섬, 시칠리아(Sicilia). 이 곳의 지역명을 따서 만든 시칠리아노(Il Siciliano)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술, 아마로 아베르나(Amaro Averna)와 콜드 브루 커피, 스위트 베르무스와 탄산수를 넣어 만든 칵테일이다. 이 칵테일은 주말 아침 점심 먹기 전 식전 주로 마시기에 제격인데, 재료가 - 물론 아마로 아베르나가 있으면 간편하지만 - 까다로워서 자주 만들지는 못하지만 만들 때마다 낯선 나와 6시간 동안 술 동무를 지냈던 그, 그리고 그때의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이 칵테일의 유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내 짐작인데, 이 칵테일의 주재료인 아마로 아베르나는 - 아마로는 이탈리아어로 비터스(Bitters, 술로 만든 착향제)를 의미 - 시칠리아에서 전통을 이어온 술인데, 마침 이 술은 커피를 연상시키는 맛이 있어서 차가워진 에스프레소와 접목시켜 칵테일을 처음 만든 그 누군가가 별생각 없이 시칠리아노라고 한 것 같다.
아베르나 (출처: Sicily Tour)
아마로 아베르나는 19세기 초 아바찌아 디 사나토 스피리토(Abbazia di Sanato Spirito)라는 베네딕트파의 가톨릭 수사가 비밀스럽게 간직해오던 레시피를 1968년 프라 지롤라모(Fra Girolamo)수사가 시칠리아 공동체 부흥에 힘쓴 직물상 살바토레 아베르나(Salvatore Averna)에게 선물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살바토레의 아들이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이탈리아 전역 그리고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시칠리아노를 만들 때 아마로 아베르나를 쓰지 않는다. 아니 쓸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내가 사는 이 곳 자카르타에서는 이 술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럼 또는 위스키에 비터 오렌지, 시나몬, 클로브를 넣어 만든 커피 아마로를 아베르나의 대체재로 사용한다.
시칠리아노 레시피
시칠리아노
[시칠리아노 재료]
커피 아마로 (Coffee Amaro) 또는 아마로 아베르나 40ml
- (커피 아마로) 럼이나 위스키 200g & 커피 40g (에스프레소 용)을 휘핑크림 기계에 질소 충전하여 만드는 방법
스위트 베르무스(Sweet Vermouth) 60ml (Martini Rosso 사용)
에어로 프레소로 추출한 에스프레소 40ml (실온상태 유지)
시럽 20ml
소다수
오렌지 껍질
소다수와 오렌지 껍질을 제외한 모든 재료와 얼음을 셰이커에 넣고 20번 정도 흔든다. 칵테일 잔에 내용물을 부으면, 부드러운 거품이 생긴다. 그 후 소다수로 잔을 채운 후, 오렌지 껍질을 넣고 마무리한다.
시칠리아노를 보고 있자면 그가 떠오른다. 구릿빛 피부와 시원한 미소가 한눈에 들어왔던 사람, 당신은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겠지.
제시와 셀린이 10년 만에 파리에서 반나절 동안 재회한 것처럼 나도 한 번쯤은 다시 한번 그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다시 만나더라도 여전히 순간의 시간 속에서 짧게 재회한 후 서로에 대한 좋은 기억만 남긴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