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Your Job doesn't define you.’ 란말이 있다. 그렇다. 직업 따위 같은 구태연한 단어는 나를 완전히 설명하기에 한없이 모자라고 남루하다. 직업이란 내 인생에서 상위 개념이 아닌 철저히 하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커리어(career)란 말은 라틴어 카루스(Carrus), 즉 챗바퀴라는 뜻이다. 계속 굴러가는 반복들을 패턴화 하여 그것을 정형화하는 일, 그 반복적인 일들의 축적을 이르는 말이 곧 '커리어'인 것이다. 직업 예찬론자들은 카루스를 윤활유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업을 의미하는 다른 영어단어 가운데 오쿠패이션(occupation)이란 말이 있다. 이 무미건조한 말은 내가 타국에 방문자의 자격으로 발을 디딜 때 이민국에서 파견된 듯한 무뚝뚝한 수문장들이 제출을 요청하는 입국카드에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단어가 흔히 말하는 직업(職業)과 가장 유사하다. 직업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직분을 지니는 업' 그리고 이를 개념화한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인데, 이 개념 자체가 매우 감옥처럼 느껴진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 곧 직업이라는 것의 목적인데, 사람마다 정한 생계의 기준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적게 또는 많이 획득할 수 있는 종류의 직분을 선택하여 그것을 업으로 삼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오쿠패이션 또한 마찬가지이다. occupy 즉 ‘장악하다’라는 동사가 지배하는 이 단어는 어감 자체도 억압적이고, 본래의 뜻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나의 생계를 연명하기 위해 내 적성보다는 사회가 요구한 학습 능력에 따라 아마도 성실히 납부해온 국민연금을 타 먹기 전까지 종사해야 하는 일, 현재 내가 계속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일은 외교와 관련된 일이다.
외교(外交), 그리고 외교관
외교를 하는 그곳, 대사관. 성벽같이 거대한 담 뒤에 홀연히 고고하게 서있는 콘크리트 건물, 흔히들 말하는 대사관은 나의 비자를 발급해주는 곳,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나라의 동사무소에 불과했다. 그곳은 비자 피(visa fee)란 명목으로 스티커 하나 여권에 붙여주면서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며, 마치 ‘당신 같은 애송이가 우리나라에 관광목적이 아닌 장기 생활을 목적으로 방문하여 살겠다면 내가 돈을 받고 심사를 해야겠소.’와 같은 모습들을 한 뻣뻣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그들은 나를 언제 봤다고 내가 왜 자기 나라를 가고 싶어 하는지 내 생활비를 대줄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신분확인이라는 절차를 위해 거짓 예의를 갖춘 무례함으로 일관하며 연신 물어댔다. 당연히 대사관이라는 곳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다.
나를 한 명의 국민으로서 보호하고 존중해야야 할 외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이란 땅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유학생으로 살아갈 때 불법체류자가 아닌 어엿한 법적 지위를 부여받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권 연장이라는 성가신 일을 정기적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대사관이라는 곳을 가야만 하는 수고를 해야 했는데, 매우 퉁명한 민원 접수인의 목소리며, 불쾌한 태도 그리고 보수적인 분위기는 대사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인자하게 웃는 공관장의 인사말과 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나 같은 어린 학생을 기만하듯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곳에 있다니. 이거 참 아이러니하고 모순된 일이다. 모름지기 외교라는 것은 바깥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종의 사교를 의미한다. 나처럼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 사귀는 것에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란 소리다. 다행히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굳이 만날 필요 없이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자료를 찾아본 후 그래도 정보가 부족해서 필요하면 비대면 방식의 만남을 통해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 불가결한 대면 접촉이 필요할 경우, 상대방의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의 예의와 가식의 탈을 써야만 한다.
나는 그렇다 치고, 내가 신기하다고 느낀 대상은 바로 외교관이라는 집단이다. 남들과 사귀어야 할 직분을 평생의 업으로 지닌 외교관들이라는 자들이 별로 사교적이지 않고 오히려 군대문화처럼 상하 복종에 매우 길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내가 언제나 대체 가능한 외부인의 자격으로 한국 외교관들을 볼 때 드는 생각은 마치 내부 조직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그 조직 내 상부의 고집스러운 결단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와 같다. 그래서 한번 찾아보았다 정말 외교관이라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야 마땅한 사람들인지를. 아주 친절하게도 외교관의 직무를 상세히 설명해놓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Vienna Convention)이라는 것이 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지니는 자들은 나라를 대표하고, 교민을 보호하며, 각종 교섭, 정보 수집 그리고 우호관계 증진이라는 직무를 지닌다. 나는 5개 직무 전체가 다분히 사교적이어야 마땅한 일로 이해한다.
외교라는 틀은 사실 1600년대 유럽에서 30년간 지속된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하고 거룩한 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시대를 알리며 로마 제국 통치 하에 다스려지는 국가 간의 교섭과 교류를 위해 마련된 웨스트팔렌(1646-48년) 조약을 기반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외교라는 직업군은 당시 유럽의 귀족사회의 통용어인 라틴어를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귀족 출신들이 장악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교관이란 뭔가 고고하고 비밀스러운 그런 사교 조직이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들의 잘못도 어느정도 용인해 줄 수 있다는 면책특권까지 부여하게 되었다.
외교관을 형상화한 디플로맷 (Diplomat)
뭔가 비밀스럽고 고고해 보이는 이 직업을 형상하는 칵테일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디플로맷(Diplomat)
How to Mix Them
디플로맷 칵테일은 원래 프랑스어로 외교관을 의미하는 Diplomate에서 유래되었다. 1900년대 초 런던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출신의 바텐더 로베르 베르메이에르(Robert Vermeire)가 집필한 칵테일 서적, 'Cocktails: How to Mix Them'에 처음으로 레시피가 소개되었다. 디플로맷은 스위트 베르무스, 드라이 베르무스, 그리고 약간의 마라스키아노 리큐어(체리맛 리큐어)가 주재료인데, 베르메이에르는 "이 칵테일은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외교관들이 위트를 유지한 채 음미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 칵테일은 프랑스 외교관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술이기 때문에 이름없이 떠돌던 칵테일에게 Diplomate이란 이름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 칵테일은 주황빛이 매력적인데, 내가 아는 외교관들과는 사뭇 달리 멋지고 매혹적이다.
특히 강화주(fortified wine)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베르무스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쓰고 단맛을 더 배가시키는 마라스키아노 체리 한 스푼이 첨가되면 아름답고 고혹적인 한 잔의 칵테일로 재탄생된다. 디플로맷이 처음 세상에 소개되었을 때는 이 3가지 술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이 흘러 비터스와 오렌지 껍질을 넣어 조금 더 맛과 향이 가미된 칵테일이 되었다. 사실 비터스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칵테일의 향과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나는 사실 디플로맷이란 칵테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 칵테일을 처음 맛본 것은 올해 3월 말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외교관이 권해서 마시게되었다. 나와 이 곳 자카르타에서 3년간 같이 일했던 외교관 친구가 2020년 4월 4일 그의 고국으로 귀임하게 되어 3월 한 달동안 거의 매일 붙어 다니면서 자카르타에 있는 바와 술집은 죄다 섭렵했다.
자카르타에도 일명 먹자골목 같은 곳이 있다. 그 곳은 바로 세노파티(Senopati). 이 곳은 한국식당과 술집이 즐비한데, 이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르 까르티에(Le Quartier)가 있다. 이 곳은 바 겸 벨기에 요리 전문식당.
달달한 칵테일을 줄곧 시켜대는 내가 한심했는지, 그 녀석은 내게 디플로맷을 권했다. 뭔가 생김새가 아저씨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위스키 베이스일 것 같아서 처음엔 거부했지만, 억지로 한 모금을 마신 뒤 나의 편견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느꼈다. 네그로니(Negroni)와 같은 고급스러운 알싸함이 조금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런 한 잔이었다.
멋진 베스트를 입고 포마드 기름으로 올백한 헤어스타일이 멀끔한 바텐더가 심혈을 기울여 디플로맷을 만드는 모습도 매혹적이었다. 나의 음주 파트너, 정직할 것 같은 바텐더의 물결 같은 손놀림, 그리고 오렌지 비터스의 강하고 향긋한 아로마, 내 얇은 윗입술을 적신 섹시한 첫맛, 그리고 잊지 못할 달콤함으로 마무리되는 끝 맛. 이것이 디플로맷과 나의 첫 만남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르 까르띠에 바 테이블에 기대 희한한 자세를 유지한 채 술에 취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같이 음악과 여행 그리고 평생 떠돌아야 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 그리고 인생에 대해 새벽 1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교관 M, 넌 잘 살고 있겠지.
르 까르띠에 바 테이블 (Le Quartier, Jakarta) (출처: Venuerific)
디플로맷 레시피
디플로맷(Diplomat)
[디플로맷 재료]
드라이 베르무스 60ml (Carpano)
스위트 베르무스 30ml (Martini Rosso)
마라스키아노 리큐어 5ml (Luxardo Maraschino Liquer)
믹싱 글라스에 재료를 차례대로 계량해서 붓고, 큰 얼음을 3-4개 정도 넣은 후 바 스푼으로 돌려가며 희석한다. 완성된 칵테일을 차가운 잔에 붓고, 오렌지 껍질과 오렌지 비터스(원할 경우) 3방울로 장식한다.
나는 외교관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디플로맷을 마실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교관들 그리고 간혹 정착을 포기하고 떠돌아야 하는 그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약간 짠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들의 고됨이 어느 정도 고급스럽게 승화된듯한 이 칵테일, 디플로맷. 그런데, 정작 외교관들은 본인들의 직업을 기린 칵테일이 있는지나 알까?
외교관님들, 특권만 누리지 말고 사명감으로 나라를 위해 일해주길. 한 나라 한 곳이 아닌 세계 여러 곳을 방랑객처럼 떠돌어야 하는 당신의 떠돎은 고된 희생이 아닌 국민과 나라를 위해 그리고 당신의 비밀스러운 낭만으로 추억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