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꿈이라는 것을 굉장히 크게 가진 아동으로 분류되곤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아들이 없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구박받았던 엄마가 안쓰러워서 멋들어진 장래희망을 앵무새처럼 말하곤 했던 것 같다.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라는 조모의 희한하고 암묵적인 요구를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어른이 되라는 것으로 인식했었을 수도 있다.어렴풋 나는 기억 속에 가정통신문이라는 것을 담임 선생님이 발행하였고, 이 종이엔 '장래희망란'이 있었다. 내 마음속의 장래희망은 그냥 불안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는데, 직업을 써야 한다길래 글쟁이를 생각했다. 그런데 글쟁이는 돈을 벌기 어렵다고 연장자들이 핀잔을 해대며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가나 소설가 따위의 장래희망은 내가 정말 되고 싶다는 마음속의 희망으로 합의하고 2순위에 적었다. 1순위에는 내가 무엇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눈치를 보며 사회적 명망을 얻을 법한 직업을 1순위로 적었을까'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 명망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명망이라는 말은 명성과 인망을 합친 말로, 영어로는 prestige와 respect의 혼합 개념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히어로 같은 자들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명망이 높은 인사라고 하듯 말이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장래희망 1순위. 그나마 2년 연속 썼던 장래희망은 국제변호사였는데 왜 하필이면 이 직업을 1순위에 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막연하게 근사해 보이는 '국제'라는 단어는 한창 영어를 신나게 배우고 있을 때라 그냥 디폴트였다.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는 뭔가 국제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어렴풋하고도 막연한 그런 마음으로 장래희망을 쓰라길래 썼던 것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장래희망 1순위의 세뇌가 통했는지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주제 파악
지금 생각해보면 변호사라는 직업은 정말 내 성격 그리고 본질과는 완벽하게 불일치한다. 어린 마음에 법정에 서서 법관들을 향해논리 정연하게 주장을 펼쳐 보이는 드라마 속의 변호사가 혹해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잘하지 못하고, 심지어 소름 끼칠 정도로 싫어한다. 선생님이 지목하지 않으면입도 뻥긋 안 하고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고, 지목을 당하는 순간 머릿속에 단어들은 정처 없이 맴돌다 펭귄들의 집단 자살소동처럼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결국 횡설수설의 진수를 보여주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후 심장은 오두방정을 떠는 희귀병을 가졌으니, 변호사든 뭐든 남 앞에 서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혼자만의 시간이 강요되었던 청소년 시절, 이방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그 소중한 시간들 속에서‘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하나하나 파악하기 시작했다. 겉 멋에 잔뜩 취해있고 아들 노릇 하려고 했던 어렸을 때, 으스대려고 썼던 장래희망 1순위들의 직업군들은 나랑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거나 정체성의 혼돈 같은 처참함은 겪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고, 영롱한 종소리가 내 머릿속에 강한 울림을 선사한 것 마냥나는 마치 열반에 오른 석가모니가 된 듯 홀가분했다.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고 야망이라는 단어는 억지로 덧칠한 화장 같은 말이었으니 내 인생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그렇기때문에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 그리고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어울리지 않은 어쭙잖은 야망으로 똘똘 뭉친 내가 사라져 버린 듯 보였는지, 나에게 아들 못지않은 딸이 되라고 은근히 강요했던 집안의 연장자들 특히 아빠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월급쟁이가 뼈 빠지게 일해서 없는 돈 있는 돈 죄다 끌어모아 조기 유학시킨 큰딸이 현재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해버렸으니 말이다. 한 평생 인싸로 살아온 아빠는 내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며 가끔 핀잔을 주긴 했지만,웬만한 소리는 더이상 비수로 꽂히지 않는 방패막이 형성되고 난 이후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나의 방법
하지만, 돈이라는 수단을 벌어야 했기에 결국 비정규직 화이트칼라 업종, 즉 회사원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 과정 속에서 구조적 차별이라는 상황에 노출되곤 했다. 그런데 이 정규직이라는 것은 소속감에 목메는 사회에서나 금지옥엽처럼 여겨지는 지위이지 남의 인식이 성가신 나는 사회적으로 명망을 얻고 타인이 우러러보는 번드르르한 정규직을 길을 걷지 않은지 오래다.
나는 조직의 인싸가 아닌 자발적 아싸(outsider)의 지위를 영위하되 나의 노동과 지식을 고용주와 정규직들에게 제공하여 돈으로 보상을 받는 방법을 선택했다. 내 인생을 살기 위한 수단, 돈만 노동의 대가로 획득하면 그만이었기에 구조적 차별을 눈 앞에서 목도하고 심지어 경험도 했지만 내가 지켜온 대대함은 다치지 않았다. 내가 회사원이기 전에 한명의 사람으로서 지켜온 나의 역사와 고결함 그리고 대대함은 어떻게든 수호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우울했고 어떨 땐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나와 남을 구분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가 나를 존중해주는 것 같지 않아서. 그래도 어쩌겠나, 사회적 명망은 나와 맞지 않는 옷이고, 남이랑 어울리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괴로운데.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19. 이 전대미문의 전염병은 인간의 고통과 나약함을 한꺼번에 노출시켰다. 한국은 K방역이라며 방역도 브랜드화하여 온 세상에 전파하면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은 대단한 나라'라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는데, 나는 이 대단한 나라에 1년 반 넘게 귀국하지 못하고 있고 2021년 2월 기준 백만 명 이상의 확진자와 3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인도네시아에서 노동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이상하게도 코로나 19 기간 동안 재택근무라는 것을 하면서 글도 쓰고, 책도 보고, 보기만 해도 짜증 났던 사람들을 직접 볼 필요가 없어서 스트레스 정도는 낮아졌다.
재택근무는 주 5일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 자발적으로 갇혀 컴퓨터를 마주하고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그리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노동조건은 당연하지 않으며, 내가 그동안 미루었던 감성 가꾸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사회적으로 합의한 노동활동을 하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천천히 체하지 않게 먹고, 남은 시간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느꼈던 감정들이 하나씩 깨어나니, 이 얼마나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인가. 분노와 피폐로 가득 찬 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시간들이 필요했던 게 분명하다. 온갖 자가면역 질환을 앓고 있는 쓸데없이 예민한 이 몸뚱이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확실히 덜 버거워졌으니 말이다.
요즘 이렇게 반 신선놀음을 하면서 나는 강렬한 태양빛을 벗 삼아 책을 머리맡에 두고 마시는 칵테일은 바로 가리발디(Garibaldi)이다. 가리발디는 정말 만들기 간편한 칵테일인데, 캄파리(Campari)와 오렌지 주스만 있으면 된다. 캄파리 45ml와 오렌지 주스 100ml를 긴 콜린스 잔에 얼음을 넣고 섞을 필요도 없이 그냥 부어서 마시면 된다.
가리발디 장군
가리발디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 통일(오늘 우리가 말하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에 일조한 쥬세뻬 마리아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칵테일이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대표적인 술 캄파리 그리고 남부 시칠리아에서 대량으로 수확되는 오렌지를 혼합하여 만든 이 칵테일이 곧 신생국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가리발디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누가 이 칵테일의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뉴욕의 단테(Dante)라는 꽤 유명한 칵테일바의 시그니처 칵테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유명한 칵테일이 그렇듯 이야기로 포장한 마케팅의 천국, 미국에서 널리 퍼진 게 맞는 것 같다.
칵테일의 주인공 가리발디 장군의 인생은 나름 드라마틱하다. 그는 피에몬테 반란(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집권하에 있었다.)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극적으로 감옥을 탈출하여 남아메리카 우루과이에 정착하게 된다. 14년간 우루과이에서 정치망명자로 생활한 후 말년은 이탈리아에서 관절염으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공화정을 꿈꿨던 이상주의적인 현실주의자인 가리발디 장군을 빅토르 휘고, 찰스 디킨스와 사회의 부조리함을 세기의 문학작품으로 남긴 작가들은 물론 쿠바 혁명의 주동자 체 게바라가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과는 달리 칵테일 가리발디 맛은 단출하지만 청량하고 쌉싸름하다. 캄파리 특유의 쓴맛은 미묘한데 오렌지는 혀의 모든 면을 감싸듯 진하고 달다. 당시 다른 유럽에 비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들을 하나의 나라, 이탈리아로 통일시키기 위해 싸운 그의 단순하지만 다부진 신념처럼 인생이란 쓰지만도 그렇다고 달지만도 않다고, 우여곡절 그 자체가 인생이라며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칵테일을 만들 때 가장 화려한 기교를 뽐내며 셰이커를 이용해 섞는 칵테일보다 빌드(Build - 칵테일 잔에 부어서 제조하는 칵테일)가 더 어렵다고 한다. 전문 바텐더가 아니라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집에서 만들 때도 확실히 셰이커를 이용해서 만들면 술 비율이 조금 엇나가도 섞는다는 그 과정 속에서 유화 작용이 일어나 배합의 실수를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다. 그런데 부어서 만드는 칵테일은 정확한 비율로 섞지 않으면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냥 잘못 만든 술을 마시는 수밖에.
배합의 오류로 탄생한 칵테일도 마실만은 하니, 인생은 이렇게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일반 오렌지 말고 쓰고 단 맛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는 지중해가 원산지인 블러드 오렌지 즙과 캄파리를 혼합하면 쌉싸름함이 베가가 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블러드 오렌지로 혼합한 가리발디를 선호한다. 마치 인생의 달콤함은 진작에 거부했기에 조금은 손해보고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대신 삐딱하게 인생을 마주하겠다고 다짐한 이상한 고집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리발디(Garibaldi) 레시피
[가리발디 재료]
캄파리 45ml
오렌지 주스 (가능한 집에서 직접 짠 오렌지 주스) 100ml
얼음을 넣은 콜린스 잔에 캄파리를 먼저 붓고, 오렌지 주스를 넣어 배합한다. 얇게 썬 오렌지 조각을 잔 위에 얹어 장식한다.
가리발디는 내가 살고 있는 자카르타의 날씨와 잘 어울린다. 비록 이 곳은 오렌지가 나지 않는 고온다습한 지역이지만 오렌지만 확보된다면 캄파리 한 병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랏빛 석양을 보면 강렬한 태양이 전사하는 자카르타를 하늘을 벗 삼아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현재라는 시제에 가장 충실하게 사는 사람으로 그렇게 내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해 쓸데없이 골머리를 앓지 않고 몸과 마음을 고문하지 않기로 오늘도 나 자신과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