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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Oct 29. 2020

#13. 스크루 드라이버 (Screwdriver)

사회생활을 위해

사회생활

몹시나 고리타분한 4음절. 사전적 의미 또한 위계질서 충만하고 고루하기 그지없다. 사회생활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써 집단적으로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하니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사회생활이란 즉, 사회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관계없이 집단에 들어가 이미 정해진 룰,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연히 기득권들이 만들었을 그런 규칙들을 순종적으로 따르며 목숨을 부지하는 공동 생활인 것 같다.


사회생활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숨 막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 하나 건사하려고 이 짓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니, 나라는 인간도 얼마나 어리석은 모순 덩어리인가. 자기비판은 잠시 미루어 두고 이 말, '사회생활'이라는 단어 자체를 찬찬히 보면, 말 자체가 재미있다. ‘사회’ 생활이라니. 그럼 나라는 인격체가 들어가는 각기 다른 사회마다 내 생활이 달라지는 건가? 이 말을 정확하게 개념화하긴 어렵지만, 하나 신기한 점은 사회생활이라는 단어가 ‘직장’이라는 말과 찰떡궁합이라는 점이다.


‘직장(職場)’ 역시 기가 막히게 고리타분하며 권위적이다. '직분을 지닌 장소'라니. 내가 누구인 것과 상관없이 나의 직분에 따라 질서와 위계가 정해지는 이 장소에서 나는 하나의 직함으로 불리는 미물이며, 기성 공동체 부품에 불과한 존재니 말이다.  


내가 이런 말장난을 한들, 나 역시 오장육부가 고루한 직장인이다.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출처: 벅스 뮤직

2011년 11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한 1인 밴드,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나는 한 때 그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귀에 쏙쏙 꽂히는 발음, 그리고 힘들게 하고 있는 사회생활을 대변해주는 듯한 가사. 스끼다시 내인생, 그리고 절룩거리네와 같은 곡을 듣다 보면, 나 혼자 유난히 사회생활을 어렵게 대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용기도 없는 주제에 불만만 가득한 주체하기 힘든 나의 기분은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의 노래와 너무 잘 어울린다. 희한한 공감을 통한 위로라고 해야 할까.


특히 '절룩거리네' 가사 중에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 뿐인 걸’이라는 구절이 있다. 몇 년 전, 2시간 넘는 퇴근길, 3호선 북부 끝자락 원당역에서 내려 마을버스에 몸을 실으며 이 가사를 들었는데, 그 순간 너무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내 몸뚱이가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느낌은 없지만, 나의 육체와 삶이 공장에서 마구 잡이로 찍어대는 참치캔처럼 너무 찌들어버렸다고 해야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고리타분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갑자기 치밀어 올랐었다.


내 인생 처음 ‘회사생활’을 한 그곳은 8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잘 터진 신사역에 있는 미국계 광고회사였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세련된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만든 간판이 붙어있는 10층 건물 안에 들어갈 때까지 나의 기분은 우쭐해있었다. 인위적인 공기와 냄새. 기계적인 웃음과 손짓으로 나를 안내하던 리셉셔니스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닭장 같은 네모칸을 돌아다니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난 뒤, 내가 도착한 곳은 '내가 앉을자리'라는 귀퉁이 었고, 그곳은 어두침침한 0.3평 남짓의 네모칸이었다. 숨소리조차 죽여야 했던 그곳에서 허용하는 유일한 소리는 키보드 그리고 마우스 클릭 소리였다. 사람들은 하관에 집중된 기계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평가와 비판을 연신 신나게 늘어놓았다. 마치 트집 잡는 것이 그들의 업무인 것 마냥. 그리고 ‘썅’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말끝마다 하던 박색인 부사장의 간식인 '적당히 매운 멸추 김밥'을 점심 휴시간 마다 사다 나르기 바빴다. 사회생활은 커피 또는 도시락 심부름 그리고 복사부터 시작한다더니, 그 공식이 정말 나에게도 적용될지 몰랐다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그렇게 몇 개월을 꾸역꾸역 했다.


첫 직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다 이 직장을 갖게 되었다. 세상 고리타분한 직함 - 재외공관 연구직 행정직원. 인간 쓰나미를 방불케 하는 서울의 지하철을 오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곳 역시 인간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너와 내가 소름 끼칠 정도로 구분선이 확실하며 팀워크 자체가 소멸된 이 조직에서 여전히 꾸역꾸역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영위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10년 전처럼 사회생활이 완전히 납득이 안 갈 정도는 아니고,  어느 정도 레버리지를 발휘할 수 있는 꾀가 생겨서다. 내가 정말 진절머리 나게 싫어하는 ‘적당히’라는 템포를 나도 이 직장에서는 악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재외공관이라는 사회생활을 위한 생존의 장소에서 내 직분이 적당한 외부인으로 설정되어있는 한 주인공이 되긴 글렀고, 그리고 이런 곳에서 주인공 따위가 되고 싶지도 않다. 내 성격 자체가 남과의 관계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하거나 경쟁을 통해 뛰어난 사람이 되길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이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수입원 확보를 위한 일종의 합의적 행위인 것이다.  


사시미가 되길 기대했던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과 달리 나는 스끼다시의 묘미를 추구하며, 그렇게 사회생활 중이다.


동료(Colleague)

동료(Colleague)는 친구와는 조금 다른 결의 관계이자 사이인 것 같다. 영어로 컬리그(Colleague)인 이 동료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함께하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콜(Col)과 대리자 혹은 위임자의 의미를 지닌 레가레(Legare)를 합친 조합어인 콜레가(Collega)로 즉 사무실의 파트너란 말이다. 무엇인가 업무를 함께 하는 상대이기에 동지애가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것들 100% 오픈하기에는 조심스러운 관계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동료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때 가장 최적인 것 같다. 내가 10여 년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코드’가 잘 맞아 아직까지도 연락하며 지내는 동료들을 만난 적도 있고, 정말 어떻게 해도 잘 안 맞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동료 가운데 나의 영원한 차장님 한 명이 있다. 그녀의 이메일 아이디는 그녀 자체를 대변하는 투명하고 고급스러운 크리스털(Crystal)이었다.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던, 업무를 진지하지만 위트 있는 자세로 대했던 그녀와는 아직까지도 종종 연락을 하며 지낸다. 내가 존경하는 회사생활 선배이자 과거의 동료인 그녀는 위계질서보다는 평등한 위치에서 업무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어른이다. 그녀는 사내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능력으로 승부수를 걸었지만, 결국 대기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멋진 회사를 설립했고, 그곳을 아름다운 기업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다.


서울을 떠나 자카르타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 곳에서 7년 동안 희로애락을 겪고 있는 한 동료가 있다. 우리는 좋아하는 주종은 다르지만, 서로 술을 좋아하기에 부담 없는 나의 홈바에서 마음 내킬 때 만나 공공의 적에 대한 뒷담화 그리고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대화하는 그런 사이다. 정말 성격이 다른 우리 둘은 처음엔 가치관과 성향이 잘 맞지 않아서 서로에게 서운한 점도 있었고, 결국 그 골이 깊어서 1년 동안 냉각기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을 잘 넘기며 성가시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아는 그 정도로 깊은 관계가 되었다. 재외공관 행정직이라는 희한한 직업군 속에서 우리는 부당함에 맞서 싸워 합법적인 투쟁을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 동지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 곳에서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 헤어지는 날이 올 텐데, 그때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펑펑 쏟아낼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흘릴 그 눈물방울 속에는 우리 함께했던 기억들이 모두 묻어나겠지. 자카르타의 사회생활에서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내 유일한 동지그녀가 나비처럼 자아실현을 위해 떠나는 그 날, 나는 힘껏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않게 되더라도.


회사생활에 어울리는 가장 만만한 녀석, 스쿠르 드라이버(Screwdriver)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또는 이후 근무를 마치고 마음에 맞는 동료와 함께 집으로 와서 가장 만만하게 한잔할 수 있는 칵테일이 있다. 바로 스쿠르 드라이버. 내 최애 시리즈인 미국판 더 오피스(The Office)에 등장하는 종이회사 스크랜튼 지점의 괴짜 지점장 마이클 스콧(Michael Scott)은 이 칵테일을 오렌지 보드 주스 카 (Orange Vod Juice Ka)라고 부른다.

The Office의 한 장면 (스쿠르 드라이버를 만드는 괴짜 매니저, 마이클 스콧) (출처: Pininterest)

스쿠르 드라이버는 ‘만듦’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매우 간단히 만들어 양껏 마실 수 있다. 보드카 1: 오렌지 주스 2, 이 배율이라면 보드카 한 도 둘 이서 거뜬히 끝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2명이상 모이는 회식을 싫어하고 이성을 유지하며 약간의 취기 속에서 진담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즐긴다. 그러기에 스쿠르 드라이버는 약간의 취기, 즉 기분 좋음의 알딸딸함이 유지되며 직장에서는 눈치 보느라 하지 못했던 온갖 소리를 다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완벽한 매직 포션이다.


스쿠르 드라이버는 여러 가지 탄생 유래가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20세기 초 페르시아 만(Persian Gulf)으로 석유 시추를 위해 파견되었던 미국인 노동자들이 고단한 육체노동의 피곤함을 잊으려고 보드카와 주스를 섞어마셨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 당시 보드카랑 주스를 섞을 만한 스푼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있던 스쿠르 드라이버(screwdriver)를 액체에 넣고 섞었다고 해서 ‘스크루 드라이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석유 노동자들이 페르시아 만에서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 칵테일은 그 당시 미국의 주요 도시를 휩쓸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1949년 10월 24일 자 타임지(Time) 보도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파크 호텔(Park Hotel)에 있는 바 - 아마도 뉴욕에 있었던 호텔로 짐작 - 에서
터키 비밀 요원들이 미국인 엔지니어들과 발칸 난민들과 어울리며 당시
유행했던 미국의 혼합주(Yankee concoction)인 스쿠르 드라이브를 마셨다.


이 칵테일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오렌지 주스라고 착각하고 벌컥벌컥 마신 후 확 취해버릴 정도로 마시기 쉬운 술이다.


보드카(Vodka)는 한국에서는 러시아의 술로 알려진 독주이며,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에서 오랫동안 각국 고유의 방법으로 증류해서 마시는 값싼 술로 주 재료는 감자다. 무색무취 그리고 무향인 보드카는 다양한 칵테일의 베이스 술로 많이 활용된다. 물론 그레이 구스(Grey Goose, 프랑스 산)니 핀란디아(Finlandia, 핀란드 산)니 그리고 엡솔루트(Absolut, 스웨덴 산)처럼 시크한 보드카도 있지만 나는 비싼 보드카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내 홈바에는 가격 부담없이 스쿠르 드라이브를 양껏 만들 수 있는 스미노프(Smirnoff)가 항상 구비되어있다. 스미노프는 1800년대 러시아에서 만들어졌지만 러시아를 떠난 Smirnov라는 사람이 프랑스인처럼 위장하기 위해 스펠링을 Smirnoff로 바꾸어 팔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미국 등지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30년대 후반서부터 50년까지 할리우드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헝가리 출신의 여배우 자자 가보(Zsa Zsa Gabor)가 '내 마티니는 스미노프 보드카만 취급한다'라고 하면서 스미노프 보드카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자 가보가 모델로 기용된 스미노프 보드카 광고 (출처: Mad Man Art)

스미노프는 술 값이 비싼 인도네시아에서도 한 2만 원 돈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데, 바로 발리에서 직접 증류를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맞는 동료까지 있다면 부담 없이 보드카 한 병, 오렌지 주스 한 병 놓고 회사생활에서 오는 애환을 허심탄회하게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스쿠르 드라이버 레시피

스쿠르 드라이버

[스크루 드라이버 재료]

스미노프 보드카 45ml

오렌지 주스 90ml

잔에 얼음을 채운 후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넣고 섞는다.


아무런 도구도 필요 없는 스쿠르 드라이버. 만들기도 간편하고, 체질적으로 거부하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사회생활이 유발하는 알 수 없는 알레르기 반응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는 일종의 해독제이다.


불평등과 불합리성은 직장이라는 곳에서 해소되긴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함에 대해 조용한 용기를 등에 업고 문제의식을 지니며, 조금씩 고쳐나가기 위해 합법적으로 행동하고자 노력한다면 그나마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의미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가 항상 복잡한 이런 나와 함께 부조리함에 대해 의견을 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내일도 똑같을 사회생활을 위해,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에게 스쿠르 드라이버를 바칩니다.


참고문헌

1. Business Insider

https://www.businessinsider.com/the-origin-story-of-the-screwdriver-cocktail-2015-3?r=US&IR=T

2. Vinepair.com

https://vinepair.com/wine-blog/the-history-of-the-screwd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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