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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l 23. 2024

편리한 칭찬 보이콧

기득권의 가소로운 인정

도파민 수용체 흡수정도가 매우 낮은 요즘 아무 생각 없이 Pinterest만 스크롤링하고 있다. 그러다가 발견한 한 문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I no longer find comfort in places that only celebrate me when it's convenient."

"나는 더 이상 오직 편리할 때만 나를 축하하는 상황/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철저한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간의 평등성을 무시하고, 학력도 아닌 학벌, 통과시험의 종류 등으로 계급을 나누는 곳이기에 이 두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은 대접과 대우에서 멀어진다. '남', 아니 '나머지'로 분류된다.


그 어떤 틀(mould)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다수여서, "왜 또는 어떻게"란 질문보다는 과정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결과만을 보고 좇는 사람들이 다수다.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가치관과 생각하는 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안 보이는 역학 속에서 필요성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관계로 지내고 있다. EQ가 낮은 사람들과 일한다 생각하며..


내가 이곳에서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언어 능력과 경험이다. 그들보다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월등한데, 이 것을 월등하다고 말하기도 참 웃기다. 그들은 이 두 가지보다는 의사결정을 하는 주체와의 직접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 내가 가진 경험적 지식을 의사결정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아는 체'하는 것이 '업(業)'인 사람들이다. 문제는 출처 없이 '아는 체'하는 것 대부분이 금방 바닥을 보여서, '왜'하는지 근본적 질문을 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시키는 것을 하다 보니, 흥미를 떨어뜨리게 하고 경험적 지식을 제공해야 하는 나로서도 사기진작은커녕 그냥 힘들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야할 문제는 기득권의 형성배경과 구조이다.


기득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생각해 보면 상당히 단순하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보여있는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기득권 형성 과정이다. 즉 비슷한 생각+비슷한 태도에 어느 정도의 인지적 사고능력과 적당한 사회성을 갖추었다면 기득권에 들어갈 수 있는 성격적 측면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그 틀에 들어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과 인내심을 갖춘 사람들이 선착순으로 경쟁하는 구조인 것이다. 해답보다는 정답을 잘 맞히는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리기 해서 냅다 달려 피니시 라인으로 뛰어가는 이 방식을 통해 기득권으로 가는 발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차적으로 이 구조에 들어간 1세대들은 어느 정도의 우쭐거림과 함께 한 세월을 보내다가, 이 비슷한 안락함과 우쭐거림을 그 후손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기 위해 그때부터 울타리를 치기 시작한다. 이 울타리는 자본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그 이외 사회에서는 신분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한국은 이 두 가지 모두 갖추어 마치 성역과도 같다는 울타리를 치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사회는, 심지어 우리가 평등하다고 믿는 북유럽 사회 역시, 족벌주의(nepotism)가 있긴 마련이다.  그런데, 아시아 그중에도 한국의 족벌주의는 '대놓고'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대학원 과제를 위해 17년 만에 다시 읽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도 서구식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삼은 민주주의의 승리는 결국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막스(Karl Marx)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며, 남보다 더 낫고, 더 나아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룬 사회가 결국엔 온갖 역경을 딛고 승리하는 사회가 된다고 그렇게 주장했다. 이것은 모두 나의 존재를 남과 비교해서 돈, 명예, 지능 면에서 '나았다고' 여겨질 때 안도하는 인간의 본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물론, 후쿠야마는 30년 이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다룬 Discontent of Liberalism을 썼지만,  기득권의 성역, 소셜미디어의 조잡한 허세, 인포테인먼트 시장의 확대 등 여러 측면에서 인간은 나의 잘남과 나음을 끊임없이 드러내야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안도하는 것 같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모순적이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빈정거리며 비평하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래서 내가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인정이라는 부분이다. Recognition. 역시 인간이기에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다기보다 동기부여가 되어서, 알아보고 경험적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발판이 된다. 하지만, 인정이 마치 '치하'하는 것이 되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인정을 빈정거림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기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상대방을 도와주지 않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태세를 전환한다.


표면적으로 동등하다고 말하는 이 직장에서 나는 인정을 갈구하지 않은지 오래이지만, 가끔 "모르시는 게 없으시네요." "안 해본 일이 없네요."라든가, "그것도 했었어?"란 소리를 들으면 고깝게 들린다. 담론은 비단 '말' 또는 '글' 뿐만 아니라 대화의 맥락, 표정, 어투 등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는데, 말하는 화자의 담론은 그야말로 '네 주제에 그것도 아니?' 란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단 소리다. 그들은 아니라고, 생사람 잡는다고 잡아떼겠지만, 그렇다.


내가 정말 그들과 동등하다면, 그리고 내 능력과 경험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현명한 기득권이었다면, 저런 오만방자한 소리로 내 기분을 잡치게 하기보다, 그들이 하는 업무의 배경을 충분히 설명했을 것이며, 내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항상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내 당연히 내 시간을 써가면서 나의 이용가능성을 그들 기준에 맞추어야 하며, 배경과 맥락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그냥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개중에 정말 골 때린 인간들은 '알아서 기는 것'까지 기대했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없고 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기에 한 번도 그들에게 긴 적은 없다. 그래서 고까워서 저런 소리를 해댄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그리고 편리할 때만 '내 사람'이라 떠들어대며 그때부터는 속이 빤히 보이는 웃기는 칭찬들을 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언제 이곳을 그만두나. 그런 생각뿐인데, 그렇다고 딱히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지도 않고 있으니, 나 역시 구제불능한 인간이다. 하지만, 나의 이 알량한 자존심이 저따위의 편리한 칭찬에 굴복하지 말라고 나를 부추기면 오늘 하루도 그냥 꾸역꾸역 지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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