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부터 현재까지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셰프의 테이블(The Chef’s Table)은요리하는 장인들의 인생을 다룬 작품이다.
라틴어로"De gustibus et colorises non est disputandum"은"맛과 색깔에 대해서는 논쟁할 수 없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선호하는 맛이 다르기 때문에 입맛은 절대 우위를 가리기 어렵다는 말이다.어떤 이는 한식을 어떤 이는 양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입맛에는 정답이 없다.
내 입맛. 인간의 혀는 크게 4가지 맛, 달고, 시고, 짜고, 쓴맛을 느낄 수 있다는데, 나는 그 가운데 단맛을 가장 좋아한다.'A person with a sweet tooth'라는 수식어는 설탕에 이미 포로가 되어버린 내 입맛을 정의하기에 가장 근접하다.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 다큐멘터리 시리즈
출처: 왓챠 피디어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 시리즈는 '스시 장인:지로의 꿈 (Jiro Dream of Sushi, 2011년작)' 감독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겔브(David Gelb)가 총괄 제작을 맡은 음식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음식 다큐멘터리 덕후라면 다들 알만한 '지로의 꿈'은 동경 긴자 어느 지하상가에 10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는 경건한 스시집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로, 평생을 초밥에 바친 85세 스시 요리사 오노 지로와 그의 가게의 역사를 마치 명상하듯 그린 작품이다. 겔브는 지로의 꿈처럼 음식으로 명상할 수 있는 후속작을 만들기 위해 셰프의 테이블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셰프의 테이블은 인트로부터 상당히 압도적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배경음악으로 날카로운 현악의 소리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멜로디와 박자에 정확히 맞춰 움직이는 시퀀스, 그리고 웬만한 갤러리에 걸린 그림보다 아름다운 음식들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보는 이를 압도한다. 연기파 배우, 내레이션도 필요 없을 정도로 손색없는 미장센을 갖춘 상당히 세련된 다큐멘터리라고나 할까.
셰프의 테이블은 불필요한 경쟁으로 난무한 21세기 요리 프로그램들을 점잖게 비웃기라도 하듯 요리라는 행위는 현란한 조리 이상의 예술 그리고 그 자체로서 철학임을 이야기하고 있다.재료 공수부터 요리 그리고 평단의 날카로운 지적까지 '음식=인생'인 주방의 리더 셰프(chef) 한 명 한 명의 삶, 그들이 저마다 음식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올곧은 음식 철학을 교차편집 형식으로 풀어낸다. 셰프의 열정, 성공, 실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겪은 뒤에 비로소 오는 각자만의 철학을 1시간 안에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떠들기 좋아하는 비평가들의 기준이 온전히 셰프의 관점에서 본셰프의 테이블은 천박한 리얼리티쇼와 달리 한 편의 시처럼 감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셰프의 테이블 시즌 4: 패스츄리 편'은 나 같은 디저트 덕후라면 추천할만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디저트라는 주제 자체가 재료의 원색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 그런지 특히나 영상미가 탁월하고 보는 내내 군침이 도니 말이다.
전통의 마에스트로, 코라도 아센자의 디저트 놀이터, 카페 시칠리아
셰프의 테이블 시즌 4 - 2편 카페 시칠리아(Caffe Sicilia)는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섬에 있는 작은 동네 노토(Noto)라는 곳에서 4대째 디저트 전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디저트 천재 할아버지’ 코라도 아센자(Corrado Assenza)의 요리 철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옥한 토양, 바다로 둘러 쌓인 지중해의 보고 시칠리아섬에서 나오는 제철 식재료로 하루 종일 이상이라는 공을 들여 각종 전통 디저트를 만드는 할아버지 코라도. 코라도는 시칠리아섬에서 나고 자란 뼛속까지 시칠리아인으로 20대 농업을 전공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 대학의 도시 볼로냐에서 7년을 산 것 빼고 50년 이상을 시칠리아 섬에서 보내고 있다.
코라도 아센자 (출처: eater.com)
모든 셰프가 그러하듯 창작의 고통은 가끔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맛의 세계로 안내해 손님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코라도 역시 4대째 이어온 전통 레시피가 지겨웠는지 굴을 얹은 아몬드 그라니따(한국의 빙수랑 비슷한 얼음 음료)등 다소 난해한 디저트를 선보여 카페 시칠리아에서 소울푸드를 찾던 단골들의 발걸음이 끊겼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코라도의 음식은 셰프의 테이블에 소개되는 다른 음식들에 비해 투박하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고 혀를 유혹한다. 하루 종일 반죽을 문질러낸 손, 그리고 뭉툭해진 손끝과 움푹 파인 손톱처럼 그의 디저트들은 예쁘다기보다 정성 그 자체다. 그의 정직함이 고스란히 반영된 카놀리를 한번 베어 물면 왠지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울컥 눈물을 쏟을 것 같을 것만 느낌이 든다. 잘난 체 하기로 유명한 미슐랭 셰프들이 값비싼 재료로 선보이는 그 어떤 디저트를 다 포기하고도 선택할 수 있는 코라도의 디저트. 마치 지치고 오염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디저트라고 해야 할까.
비싼 음식이나 남이 맛있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보다 정성으로 무장된 음식을 먹었을 때는 미천한 말로 형언할 수 있는 감동을 느낀다. 음식으로 감동을 받으면 삶의 정처를 잃은 눈동자가 다시 살아나며 인생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다. 아직 내가 맛보지 않았지만 코라도의 디저트가 그럴 것 같다.
아주 사소한거짓말도 못할 것 같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코라도. 카페 시칠리아의 모든 디저트에는 그의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카페 시칠리아 카놀리 (출처: 넷플릭스)
그의 열정 그리고 인생 목표는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가 아닌 그의 고향 시칠리아에 있는 제철 음식 재료가 사라지지 않도록 농가를 살리고, 시칠리아만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진정한 로컬푸드(local foods)를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마치 동요를 연주하듯 귀엽고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은 그야말로 장인(Maestro)이라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의 모습을 보는 1시간 동안 나의 녹슨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시칠리아는 매우 상업화되고 있어요. 원래 밭이 었던 곳이 사라지고 쇼핑몰이 들어서고 있죠. 사람들은 더 이상 자연에서 나오는 식재료를 사지 않고 가공된 재료들을 소비하며 이를 문명(civilisation)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무지한 거죠. (코라도 아센자)”
괴짜 셰프, 윌 고파브(Will Golfarb)의 Room 4 Dessert
코라도 할아버지와 달리 세계 최고를 향해 오만할 정도로 손님들을 농락했다고 혹평을 받았던 뉴욕 출신의 페이스트리 셰프, 윌 고파브(Will Golfarb)의 이야기, 'Room4Dessert'로 셰프의 테이블 시즌 4 - 패스츄리편이 마무리된다.
윌 고파브 (출처: Phaidon.com)
1997-9년, 세계 요식업의 중심지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닌 듯했다. 전 세계 미식가, 셰프, 음식 비평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전설 같은 음식점이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 카탈루니아 지방 로제스(Roses)의 엘불리(El Bulli). 이 곳은 미슐랭 3 스타, 세계 최고 레스토랑 50위에 수차례 1위로 거론된 혁신적인 레스토랑으로 정평이 나 있던 곳으로 지금은 역사 속에 고스란히 잠든 그야말로 전설 같은 레스토랑이다.
뉴욕 외곽 롱 아일랜드에서 중산층 가정으로 자랐던 멀대 같은 소년, 윌은 엘불리의 천재적인 페이스트리 셰프 알베르타 아드리아(Alberta Adria)의 수습생이 되길 자처했다. 윌은 남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듀크 대학(Duke University)에 입학했고, 대학 졸업 이후 로스쿨 입학을 계획했지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지재권 변호사였는지 의구심이 들어 이를 잠시 미룰 핑계로 파리에서 1년을 살기로 결정한다. 파리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 조리학교)에서 1년간 페이스트리(Pastry) 공부를 하면서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등 미국의 대문호들은 물론 그가 좋아하는 컨트리 팝을 음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대중 음식가가 되길 갈구했다.
그는 미국이란 초 강대국의 고정관념이 주듯 ‘(남들이 알아주는) 세계 최고’를 표방했고, 90년대 말 이 미국 청년은 (남들 평가에 따른) 세계 최고의 음식점이라고 정평난 엘불리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자신만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무작정 카탈루니아로 건너갔다.
구름을 보면, 구름을 요리로 만들어버렸던 엘불리의 디저트 총괄 셰프 알베르따 아드리아와 함께 일했던 윌은 기상천외한 음식을 곧 그의 음식 철학으로 삼았다. 유럽이 한창 혁신적인 음식(일명 최고급 요리라고 불리는 오뜨 퀴진(Haute Cuisine), 오마카세식의 서빙)에 것에 몰두하고 있었을 90년대 말 미국, 그리고 뉴욕의 요식업계는 여전히 클래식한 프랑스 또는 이탈리아 음식이 전부였었다.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엘불리에서 경력을 쌓은 거의 유일한 미국인 페이스트리 셰프가 미국에 복귀하였을 때 당연히 레스토랑 오너들이 그에게 수많은 러브콜을 날렸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기상천외한 디저트들에 대해 손님들을 기만했다고 혹평을 하며, 심지어 'Skip dessert (디저트는 먹지 말라)'라는 최악의 평을 내렸다. 윌은 뉴욕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은 듯했다.
그러던 그가 디저트 전문 식당, 온전히 디저트만으로 코스요리를 선보인 Room4Dessert라는 레스토랑을 맨해튼 남쪽에 오픈했고, 그가 추구했던 스타 셰프의 삶이 이어가는 듯하였으나, 이 또한 짧은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재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상실감을 맛본 윌은 세계 최고고 나발이고 모르겠다며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래.'로 정한 곳이 바로 신들의 섬 발리. 이 곳에서 그는 페이스트리 셰프라면 누구나 꿈꾸는 신선한 재료(바닐라, 코코아, 커피, 팜 슈가 등)가 차고 넘치는 발리에서 윌은 뉴욕에서 못다 핀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윌의 음식은 정말 기상천외하고 디저트 하나에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만드는 방법도 전통과는 거리가 멀고, 많은 장비와 테크닉이 필요하기에 집에서 따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도 이 곳을 나도 가봤다. 내가 집에 만들 수 없는 디저트를 맛보기 위해 Room4Dessert를 갔다.
Room4Dessert, 우붓 발리 (2020년 12월)
발리 중부지방에 위치한 우붓은 산지와 밭이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다. 이 곳에 윌 고파브의 식당인 Room4Dessert가 있다. 2020년 12월 10일 목요일 오후 6시 Room4Dessert에 도착하자마자 종업원은 직접 키우는 식재료가 즐비한 레스토랑 텃밭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나는 퍼넬이며, 로젤라며 자카르타 슈퍼마켓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온갖 허브와 식용꽃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 곳은 여느 식당과 달리 자리를 3번 움직여야 하고, 총 21개의 디저트 코스를 3번으로 나누어 제공된다. 7개 스낵은 바 테이블에서, 7개 메인 디저트는 뒤편 식당에서, 나머지 7개 간식 디저트는 야외에서 먹어야 한다. 윌의 디저트는 매우 신박했다. 너무 많은 디저트를 한꺼번에 먹어대서 제일 기억에 남는 요리를 고르기가 힘들긴 한데, 초코 버블(Choco Bubble)이라는 코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발리산 코코아로 만든 초콜릿 튀일(얇은 반죽은 오븐에 구어 만든 얇은 과자, 주로 가니쉬로 활용), 그리고 튀일 뒤에 숨은 초콜릿 무스와 초콜릿 케이크는 정말 완벽한 초콜릿의 향연이었다. 아직도 이 디저트를 생각하면 메마른 내 목젖에 침샘이 고일 정도다.
Choco Bubble (Room4Dessert)
셰프의 테이블을 보고 윌 고파브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갔던 Room4Dessert는 사실 기대보다는 조금 못 미쳤지만, 먹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는 나라는 인간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 것은 틀림없다. 21개의 디저트 코스를 3시간 동안 먹는 경험을 어디 가서 해보겠는가.
'다큐멘터리(Documentary)'는 말 그대로 기록영상을 의미한다. 자극적인 소재와 영상에 길들여져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루하게 느낄 수 있는 장르는 분명하지만, 셰프의 테이블은 여러 번 보면 볼수록 소장 욕구가 솟구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허기짐을 채우기 위한 단순히 ‘먹기’라는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이 세상 모든 셰프들의 인생을 1시간 남짓 심사숙고한 영상에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고를 알리는 셰프의 테이블. 사람들은 단순히 화폐로 셰프의 음식을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 섭취하면서 대가를 지불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부터 찾고,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를 인식해야 하는 압박과 고통을 감내하며 음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다. 그들의 노고를 안다면 과연 우리가 함부로 버리는 음식들이 당연한 것인가 되물어야할 것이다. 소비를 덕으로 아는 인간의 아둔함을 부끄럽게 만드는 매우 고마운 작품이다.
그리고, 언제가 끝날지 모르는 전대미문의 코로나 19 상황이 나아지면 내가 갈 곳은 정해졌다. 바로 시칠리아 섬의 노토 마을 그리고 카페 시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