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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Dec 27. 2020

번외 2. 호커, 촌스러움의 마력(魔力)

길 위의 셰프들: 아시아 - 싱가포르 편.

싱가포르(Singapore)

국명 싱가포르는 '싱가푸라(Singapura)'에서 비롯된 영어식 발음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싱가푸라는 사자(싱가)의 도시(푸라)라는 뜻이다. 이 나라는 별명도 많다. 적도에서 있는 붉은 점, 일명 레드닷(Red dot)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도시국가는 인구 5백만 정도의 서울 크기만 한 도시지만 어엿한 국가의 모습을 자랑한다.  


내가 싱가포르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13년 11월 출장 때문이었다. 자카르타에서 한 달을 지낸 후 갔던 곳이라 그런지 마치 서울에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 나라의 첫인상은 별 것 없이 그냥 쾌적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첫인상 이후, 걷고 싶을 때마다 싱가포르(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90분 소요)로 갔다. 마치 읍내 방문하듯. 2014-19년 동안 여권에 찍힌 싱가포르 출입국 사무소 도장 개수는 거의 30건이 넘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싱가포르 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오차드(Orchard) 거리는 명품 로드샵과 쇼핑몰로 즐비한 도시의 한 복판인데, 이 곳은 인도네시아 자본으로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도네시아 부자, 특히 인도네시아 화인들의 자본이 싱가포르, 정확히 오차드에 집중되어있다. 심지어 인도네시아 대표적인 석유회사인 페르따미나(Pertamina)는 인도네시아가 아닌 싱가포르 주식시장에 기업을 상장했을 정도니 말이다. 경제적 유대관계가 말해주듯 내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간의 사이는 상당히 밀접한 편이다.


싱가포르는 한국에서 '동남아의 선진국', '효율적인 나라', '부정부패가 없고 공무원이 유능한 나라' 등으로 잘 알려진 국제도시인 것 같다. 그리고 식도락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 미슐랭 별을 획득한 레스토랑은 총 44 곳으로(2020.1월 기준) 한국(31곳)보다도 많은 편이다.


내가 난생처음으로 미슐랭 별 받은 곳에서 쫙 빼입고 안 어울리게 근사한 척했던 곳이 바로 싱가포르의 레자미(Les Amis)란 곳이다. 전 세계 미식가들도 호평할 정도로 정통 프렌치와 세계 최대의 와인 리스트를 자랑하는 이 곳은 특히 랑구스틴(langoustine)이 별미이고 버터 소스(Beurre Blanc)가 기가 막히다고 해서 갔었다. 물론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나의 값싼 몸뚱이는 랑구스틴 냄새만 맡았고, 아무리 비싼 제일의 프렌치 버터라고 해도 내 위는 그 명성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쓸데없이 허리를 잘록하게 감싸는 옷을 입고 가서 평소보다 더욱 힘겹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살인적인 더위와 더부룩함을 달래러 한 걸음에 들른 곳이 있었으니, 바로 그곳은 호커 센터 (Hawker Centre).


호커 센터


Maxwell Food Centre (출처: Treksplorer.com)

호커(Hawker)는 일명 이동 가능한 좌판(Mobile cart) 정도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에서 성행하던 길거리 상인들의 생활양식이다. 그런데 이 호커들을 한 데 모아놓은 '호커 센터'라는 개념은 싱가포르에 정립된 단어로 호주머니가 가벼운 초기 이민자들이 돈 걱정 없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 - 주로 아시아 음식 (동아시아, 동남 및 서남아시아) 위주 -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밀집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식사(食事)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대어로는 야외 푸드코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초창기 호커 센터는 주로 공공임대주택(HDB)촌이나 버스 정류장 근처에 조성되어 있었다. 1950-60년대 싱가포르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견인했던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졌을 그 당시 덩달아 호커센터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정부가 위생관리를 철저하게 하지 못했었을 때라 위생관리 겸 깔끔한 도시정비를 위해 호커마다 위생등급(ABCD)을 매겨 일종의 '아시아 전문 패스트푸드 음식촌(村)'으로 발전했다. 


1980-90년대 싱가포르가 '3차 서비스 국가'를 지향하면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호커 센터보다 에어컨이 잘 들어오는 - 멋진 오피스룩을 차마 땀으로 흥건하게 망칠 수는 없었을 테니 - 실내 푸드코트와 레스토랑을 찾기 시작했고, 호커 센터를 운영하며 가계를 일으켜 세운 싱가포르 1세대들의 자녀들은 가업을 잇기보다 다국적 기업 또는 금융분야의 화이트칼라 직업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결국 90년대 초중반 호커센터는 침체기를 겪고 말았다.


싱가포르 정부는 신생국가라서 뿌리가 없다는 외부의 곁눈질과 은근한 무시를 듣기 싫어서였을까. 호커센터의 대대적인 혁신사업을 벌였고, 2011년에는 2021년까지 현대식 신규 호커센터 10곳(약 600여 개의 음식점)을 지을 계획임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16년 호커센터 최초의 미슐랭 1 스타 레스토랑으로 세계 미식계의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차이나 타운(Chinatown) 호커센터에 입주한 홍콩 치킨라이스(Hong Kong Soya Suace Chicken Rice and Noodle, 일명 호커 첸(Hawker Chen).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미식계의 섹시한 배드보이 안토니 보데인(Anthony Bourdain)이 방문한 맥스웰 호커 센터(Maxwell Food Centre)의 텐텐 치킨라이스(Tian Tian Hainese Chicken Rice) 등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호커 센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싱가포르를 방문하면 꼭 경험해야 할 곳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Anthony Bourdain과 치킨라이스 (출처: BBC)


정부의 애정 어린 지원과 입소문 그리고 마케팅에 힘입어 호커 센터는 마침내 2020년 12월 16일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하였다.


유네스코는 호커 센터가 지니는 문화적 가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호커센터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장소로서
아침식사부터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까지 인종, 종교, 배경을 초월하여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곳”


깍쟁이 같은 싱가포르인들의 나름 호탕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이 호커센터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담담하게 관찰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있다.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먹는 거 좋아하는 덕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데이비드 겔브(David Gelb) 감독이 총괄 제작한 또 다른 음식 다큐멘터리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길 위의 셰프들 : 아시아, 싱가포르 편 (Street Food Asia - Singapore)'은 말레이계 싱가포르인 아이샤(Aisha)의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싱가포르라는 국가에게 있어 호커 센터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푸뚜 피링 그리고 남부 중식

아이샤 하심(Aisha Hashim)하이그 로드 푸뚜 피링(Haig Road Putu Piling - putu는 쌀가루, piling은 말레이어/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그릇을 의미하여, 일종의 찜 케이크)을 2대째 이어오고 있는 잘나가는 사장님이다. 그녀의 푸뚜 피링 호커는 싱가포르 호커 센터 5군데에서 활발히 영업 중이다.

주인공 아이샤 하심과 푸뚜피링 (출처: 8days.sg)

그녀는 호커센터에서 푸뚜 피링 판매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유럽식 패스츄리(Pastry) 공부를 하고 나름 미국에서 패스츄리 셰프로 자리를 잡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게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엄마의 전화 한 통에 자신의 꿈과 가족의 생계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20대 전부라고 생각했던 꿈을 포기하고 평생을 답답하다고 느꼈던 싱가포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아이샤는 푸뚜 피링의 현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가게에 기계를 들이기 시작한다. 전통의 맛을 지키면서 시간을 절약하는 제조 방법으로 아이샤의 푸뚜 피링은 싱가포르인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소문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인내들이나 알법한 푸투 피링이라는 한물간 전통 간식을 젊은 세대들도 찾기 시작한다.


아이샤의 이야기 중간중간, 30분 남짓 흘러가는 이 다큐멘터리는 호커센터에서 팔고 있는 완탕면, 하이난 치킨라이스, 칠리 크랩 등을 간간히 소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2015년에 환갑을 넘긴 이 작은 나라의 뿌리는 언어도 인종도 아닌 바로 음식, 그리고 이 음식이라는 뿌리의 핵심은 호커센터에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음식 속에 있다고.


아이샤의 스토리도 인상 깊었지만 내가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이제는 고인이 된 완탕면 마스터, 당 사부(Master Tang)의 짤막한 인터뷰다.

완탕면의 전설, 당 사부 (출처: SGSME.SG)

중국 호이핑이라는 지방에서 태어난 당 사부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15세에 홍콩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 완탕면을 배우고, 싱가포르로 돌아와서 자신만의 완탕면을 만들며 살았다. 고집스럽지만 강직한 이 할아버지는 “나는 은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완탕면을 만들 것이요. 오케이!”라는 강렬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무언의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제는 다시 주방으로 가도 되지, 젊은 양반.'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당 사부는 의자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등지고 다시 유유히 주방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들처럼 최첨단 기계, 흰색 천과 값비싼 재료, 그릇 하나 없이 경쟁과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유명한 요리학교 출신도 아니지만 30-40년 평생 음식 한 가지를 만들어 파는 호커 센터의 장인들은 그야말로 강직하다. 그들의 단순할 것 같고 매우 반복적인 일들은 한결같음이 가장 무섭고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우리는 변화와 빠른 속도를 추구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부추기고 있지만 꼭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인생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 수 있다고, 그들의 오랜 지혜를 스크린 넘어 공유하고 있다. 그렇게 넷플릭스 길 위의 셰프들: 아시아, 싱가포르 편은 싱가포르인들의 애환은 모두 이 곳 호커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 곳 자체가 멜랑콜리하면서도 낭만적인 서사와 역사를 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싱가포르인들의 반응

넷플릭스 길 위의 셰프들 - 아시아 편이 방영되고, 싱가포르인들은 사이에서는 꽤나 논쟁이 있었던 것 같고, 이 논쟁 거리를 싱가포르의 공영매체인 채널 뉴스 아시아(Channel News Asia, 여담이지만 싱가포르는 교과서적인 민주국가라고 보기 힘들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데, 채널 뉴스 아시아가 나쁘게 표현하자면 대표적인 어용 매체이긴 하다.)가 보도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싱가포르 편의 주인공, 아이샤의 푸뚜 피링은 호커센터를 대표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고, 호커센터에서는 정말 무궁무진한 음식을 팔고 있다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들이 제대로 공부를 안 하고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혹자는 호커센터에서 무엇을 파는지가 논점이 아니라 호커센터는 곧 세대가 바뀌어도 싱가포르가 보존해야 할 유산이라는 점이 다큐멘터리의 메시지라고 하며 넷플릭스를 옹호하고 있다.


우선 나는 싱가포르 인도 아니고, 솔직히 기름에 달달 볶은 호커센터의 음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에 이 논쟁에 휘말릴만한 자격이 충분치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보고 느낀 바에 따르면 싱가포르 호커센터에 파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남부 중국 지방에서 온 음식들이다. 완탕면, 차 퀘티아우, 치킨라이스 등 홍콩과 광동 지방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 이 곳에도 즐비하다. 사떼 등 말레이 음식도 있긴 있지만 남부 중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음식들은 대부분 이 흰색 마법가루 MSG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감칠맛의 유혹이란 만드는 사람도 그리고 사는 사람도 쉽게 뿌리치기 힘들기에 호커 주방의 필수품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MSG에 센 불맛까지 가미되면 솔직히 말해 순간적으로 느끼는 맛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 한 편의 러닝타임이 30분이라서 그랬는지, 이번 편에서는 남인도 음식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말레이시아 그리고 인도네시아 즉 해양 동남아로 불리는 아세안 국가에는 인도계도 상당히 많은 편을 차지하고 있고, 타밀어를 모국어로 쓰는 남인도 출신들이 많다. 나는 가끔 인도음식이 미친 듯이 당길 때가 있는데, 싱가포르를 가면 꼭 한 끼는 리틀 인디아(Little India) 근처 호커에서 먹는다. 아직 내가 가보지 않은 인도를 방불케 하는 이 작은 인도 동네를 방문해아무 데나 발 닿는 곳에서 베지테리언 비리야니(Biryani)를 배불리 먹는 행복은 나름 진하다.  

싱가포르 리틀 인디아 지역에서 꼭 맛보는 남인도 비리야니와 도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호커 센터란 싱가포르인들의 추억이 서린 곳이라는 점이다. 맛보다는 차가운 도시 속에서 서슬 퍼런 경쟁에 내 한 몸 던졌다가 집밥 비슷한 음식을 부담 없는 가격에 든든히 먹을 수 있어서, 그리고 그 먹는다는 행위 속에서 영혼이 치유되고 위안을 얻을 수 있어서 싱가포르인들의 호커센터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게 아닌가 싶다. 일부러 촌스러움을 유지하며 그리고 초록색 혹은 주황색 플라스틱 접시에 정성스럽게 음식 하나를 대접하는 호커의 주인장들의 한결같음이 보는 것 그 자체로 치유가 되기에 사람들은 이 곳을 찾는 것 같다.  



호커 센터. 싱가포르인들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이 먹는다는 행위를 집대성한 공간에 대한 랩소디, 넷플릭스 길 위의 셰프들: 아시아, 싱가포르 편은 이 오묘한 곳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의 2/3을 음식재료를 구매하고, 준비하고 조리하는데 활용하는 호커의 장인들에게 경외를 표한다.


2021년에는 부디 싱가포르 호커 센터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잔 할 수 있길 바란다.


참고문헌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centre

https://en.wikipedia.org/wiki/Hawker_(trade)

https://cnalifestyle.channelnewsasia.com/dining/netflix-street-food-singapore-episode-putu-piring-1151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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