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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Sep 06. 2021

나의 해답.

들어가는 말

정답과 해답, 두 음절, 얼핏 비슷해 보이는 이 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모양새와 의미가 매우 다르다. 


받침, 자음+모음이라는 틀에 딱 맞는 듯한 정갈한 정답이라는 단어의 자태와 달리 해답이라는 말의 생김새는 이상하게 내 눈에는 자유로워 보인다.   


의미를 들여다보자면 정답은 말 그대로 ‘정해진 답’인데, 흔히들 우스개 소리로 말하는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처럼, 상대방에게 듣고자 하는 말을 답으로 여기며, 이를 유도신문하는 듯한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들었을 때 놀람 또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한 감탄사보다는 기대할 수 있던 말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인 것처럼 반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답이란 마치 안도감을 선사해주듯 편안함을 지닌 그런 말인 것 같다. 


반대로 해답이라는 것은 ‘풀어가는 답’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은 더 모험심이 강한, 해답을 위해서는 내 머리에서 쓰지 않았던 근육 그리고 곤히 자고 있던 게으른 신경세포들을 서둘러 깨우는 듯한 성가심이 요구되는 행위가 수반되는 과정이자 목적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정답과 해답이 오묘하게 적절히 잘 이루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지혜로운 삶의 표본이 되겠으나, 나는 이상하게도 해답이라는 것에 이끌린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자 '선택의 합'이라고 설파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나 역시 해답이 필요한 인생을 선택하길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으며, 현재도 그러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단한 것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해답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복수성 그리고 다양성을 좋아한다. 내 인생은 여태껏 안정감 있는 정답보다는 주로 모험심이 필요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주류가 아닌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고속도로라기 보다 비포장 도로거나 어떨 때는 풍경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국도와도 같다. 사실 진실을 말하자면 정답을 맞힐 수 없는 두려움이 상당했는데, 어린이 었을 때부터 정답에는 매우 서툴고 뒤떨어진 인간으로 분류되는 것에 대한 절망감 때로는 분노를 느꼈다. '정답이 쉽게 입밖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은 사회에서 외톨이가 될 수 있겠구나'를 정말 많이 느끼며 자라왔다. 내가 하는 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답의 세상 속 정신적 난민으로 살고 있는 나는 표면적으로 상당한 합의를 이루어온 것은 맞지만 아직까지도 물음표가 지우지 못한 채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그나마 정답이 덜 요구되는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내가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상속된 정체성들을 나열하자면 국적 - 물론 이민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기에 바꾸기 어려운 것으로 하겠다. - 나이, 생물학적인 개념의 성, 가족 등이 있다. 국적을 예로 들자면, 상대방이 나라는 피사체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게 된 그 순간부터 정답이 기대하는 연상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 여자들은 다 너 같아?’ ‘한국사람들도 이런 거 좋아해?’ 같은 소리들 말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내가 내거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모두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가 그 조건적 명제이고, 그 뒤에 이어지는 대답으로는 ‘한국 사람 말고 나는 좋아해/ 혹은 / 좋아하지 않아.’라고 억지로라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려 애를 쓰며 대화를 이어간다.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일반화의 오류를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국적이다. 물론 나라마다 관습과 전통 그리고 통용되는 보통의 것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흔히들 생각하는 관습과 전통에 얽매여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한국사람이면 무조건적으로 김치와 떡볶이를 좋아할 것이라는 관념이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이 관념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다. 


국적뿐만 아니라 흔히들 생각하는 일종의 정답 같은 사회생활을 통념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구조화 같은 것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들 생각하는 ‘학업, 취업, 결혼, 출산, 양육, 자가주택 마련 등’과 같은 일종의 정답과도 같은 구조적인  그런 개념들 말이다. 나 역시 이런 개념들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웠던 인간은 아니고, 현재도 완전히 독립된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와 생존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라는 삼각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하나의 개념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려고 하지 완전한 희생과 소외는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정답이라는 그늘 속,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일들에 내가 가담하지 않아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고 상당수는 이해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울 때도 있지만, 이 생활이 나는 실로 행복하고 즐겁기에 자신할 수는 없으나 앞으로도 이러한 삶을 이어갈 것 같다. 


내가 몇 년 전 스스로 다짐한 2가지의 인생 목표가 있다. 첫 번째는 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죽을 때 후회 없이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나를 완전히 묘사할 수 있는 말을 만들거나 혹은 찾을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는 서로 얽혀있는데, 두 번째가 성립될 때 궁극적인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한데, 그것이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다양한 개념 그리고 감정에 대한 나만의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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