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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Sep 13. 2021

#1. 교육

유연한 사고 공존을 위한 토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성을 길러야 하고 이 사회성이라는 소양, 아니 기술에 가까운 재주를 갖추기 위해서는 제도적 육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는 ‘교육’이라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으며, 기초교육부터 중등교육까지의 기간을 의무적 교육기간이라고 지정해 놓은 나라들이 많다. 2011년 유네스코가 발간한 교육에 관한 국제표준분류 체계(International Standard Classification of Education)의 정의에 따르면 "기초교육(Primary Education)이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읽기, 쓰기 및 기초수학(글자와 숫자를 이해하는 능력) 역량을 제공하는 것이며, 학습 기초를 쌓을 수 있게 도우며, 지식, 개인 그리고 사회적 개발을 위한 핵심적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개념화하고 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이라는 주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무 교육 기간’이라고 여기는데, 이 12년이라는 제도는 거의 대부분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물론 나라에 따라 10년 또는 11년 의무교육을 적용하는 나라도 있지만, 통상 12년을 표준으로 볼 수 있다.


'가르치고 기르는 것, ' 다시 말해 세상에 태어난 하나의 피조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종의 암묵적 역할을 수행하고 만약 능력까지 닿는다면 공동체 발전에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교육의 사전적 의미이다. 영어로 교육을 의미하는 Education이라는 말 역시 라틴어 Educare에 어원에 두고 있는데, breeding(기르고) Bringing up (키운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로마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 (당시에는 주로 남성들)을 사회의 요구에 따라 기르고 키워서 전쟁에서 이기고 제국을 확대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에듀까레(Educare)란 말이 생겨난 것 같다.  


교육이라는 골조적 단어는 다양한 말을 수식할 수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가정교육을 예로 들 수 있다. 나도 이 자조적인 말을 꽤나 많이 쓰는 사람인데, 밥을 먹을 때 질겅질겅 소리를 내서 음식물을 씹거나 걸을 때 신발을 질질 끄는 불쾌한 행위를 자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애는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저런다.’라는 소리를 푸념처럼 내뱉는다. 정말 모순인 것은 이렇게 푸념하는 것 자체도 그다지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 할 태도는 아닌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학교라는 특별한(혹은 통제적) 기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회인 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데, 나는 교육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어느 정도 무언가 합의가 이루어져야 각자에게 맞는 맞춤식 교육, 유네스코의 정의에서도 말한 '자기 계발(personal development)'에 일조할 수 있다고 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처음 갔던 때만 하더라도 지식보다는 덕목이 먼저 되던 시기였다. 배려심 그리고 같이 사는 공동체를 중시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교과서 제목 역시 '슬기로운 생활', '바른생활'이었다. 매너, 윤리, 지혜라는 딱딱한 한자어를 초등학생 수준에 맞추어 풀어놓은 말로 지어진 교과서를 벗 삼아 거두절미하고 착하게 살라는 것을 글로 배운 세대인 것이다. 짝꿍을 배려하고, 다투지 말고, 양보하라고 초등학교 6년 내내 배우다가 갑자기 이 배움을 전복하라는 시점에 놓인다. 바로 피 말리는 초고도 경쟁사회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중학교에서 말이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무한경쟁이 요구되는 의미와 궁극적 목표를 모른 채 '좋은 대학 가기'라는 종점을 두고 매일을 경쟁 속에 시달려도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교육의 형태와 방향이 순식간에 바뀐다. 일류 사회 진입을 위한 숨 가쁜 달리기,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라던 선생님은 짝꿍이 넘어져도 어쩔 수 없다며 갑자기 모두가 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경쟁사회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일류(一流)가 되기 위함인데, 내가 일류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일류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왜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되는 사람들은 낙오자로 낙인찍어버리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상당히 매정하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이 일류가 되기 위한 교육 코스가 이미 한 가지의 틀과 방식으로 짜여 있어서 실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의 적성과 성향과는 별 관계없이 일류가 되기 위한 뇌구조 만들기 작업을 위해 학교, 학원 그리고 학부모들은 앞다투어 이성을 잃은 다툼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일류의 방식을 고집하는 일종의 선도자들이라고 하는 나이만 많은 인간들은 "일류의 길을 걷지 못한 사람들은 뒤쳐지고, 결국 낙오자가 된다는 악담"을 서슴지 않으며 겁박한다.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쟁이라는 것은 정해진 시간 내 승리와 패배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쟁은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을 제로섬 게임에 내몰기 때문에 결국 얻는 자와 잃는 자가 생기고 만다. 물론 얻기만 하는 게임의 승리자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에 여러 번 놓이는 사람이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렇기 때문에 경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결과 지향적이면 안된다는 소리들을 한다. 결과에 무게중심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사회는 그 과정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폐해지기 때문에 과정도 결과만큼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과연 과정도 결과에 못지않게 인정해줄 수 있는 여건 그리고 그런 분위기 인지, 그리고 그런 교육을 한국사회가 중시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학이라는 것을 개념 조차 이해를 못한 아동이었다. 억지로 리드미컬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데, 구구단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숫자들이 부유하는 카오스가 되어버렸고, 혼돈상태로 정체가 되어버린 내 머리로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입력이 되지 않아 멍해지는 고통을 느꼈다. 느닷없이 이상한 공식을 외우라는데 이 억지로 외우는 게 어려웠고, 이해되지 않음에도 오는 좌절감은 당시로서는 고문과도 같았다. 구구단과의 잘못된 만남으로 나는 수포자로 살아가다 해외에서는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으나, 몇 년 후 아니나 다를까 수학을 마주해야만 했다.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한국 수학은 수준이 높아서 외국에 가면 막 1등 한대.' '다들 구구단 못 외워서 계산기 쓴대.' 이런 소리를 많이 들어서 수학 울렁증은 좀 덜할 줄 알았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영국에서도 A-Level이라는 대입 수능을 보려면 당연히 미적분의 기본은 알아야 했고, 삼각함수니 통계니 내가 한국에서 완전히 손 놓고 있던 징그러운 녀석들을 그것도 영어로 배워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영국의 수학 교육은 '문제를 풀어서 정답을 맞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보다 여러 가지 수학의 이론을 내가 얼마큼 이해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설사 정해진 답이 틀리더라도 - 수학은 정해진 답이 있기에 - 내가 풀어가는 방식과 그 과정이 make sense 하다면 최소한 0점은 아니었다. 그래서 불행 중 다행으로 영국에서만큼은 수학을 증오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누구든 정답을 알면 수학을 대하는 태도 마음가짐이 즐겁겠지만 나는 수학이란 단어만 보면 의기소침하고 자신이 없었기에 피하는 방법만 찾았었다. 어려워도 위축되지 않고 대적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틀려도 괜찮으니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도록 하는 유도했던 영국의 교육 환경은 고도경쟁이 아닌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의 연장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흔히 말해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 부모 밑에 태어난 자녀들은 집안의 화목 성과는 관계없이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할 것이다. 반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아니 엄마의 뱃속에서부터가 고난의 시작일 수도 있다. 경쟁의 결이 경제적 능력에 의해서 달라질 수도 있고, 경쟁을 하더라도 누구는 조금 더 편한 환경 속에서 advantages를 가지고 달려들 것이고,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멘땅에 헤딩하면서 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공정이라는 말은 경쟁 앞에 성립이 되지 않는다. 정말 성립이 된다면 경쟁자들의 조건이 완전히 같아야 할 것인데, 그것도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삶은 애초에 공정하고 공평하기 않기에 불공평함을 인정하되 같은 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나의 경쟁상대여도 적어도 그 조건을 무시하거나 괄시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반대로 나보다 많은 양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다. 각자 가진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경쟁을 하든 협력을 하든 하니면 방관을 하든 그저 남을 헤치지 않으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일류가 될 수 없고 한 개의 방법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Anxiety)'이라는 책에는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짚고 있는데, 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계급사회를 탈피하여 시민혁명을 하여 탈계급사회로 이어지며 더욱 심해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원시시대에는 사냥, 채집 그리고 수렵 생활로 생존해야 했기에 적어도 인간들 간에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글자를 만들기 시작하고 부족사회를 넘어서 문명사회가 되며 계급사회일 때까지만 해도 날 때부터 급과 운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주어진 숙명에 순응만 하면 피 터지게 경쟁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계급사회에서의 비인간적 불평등을 느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사회를 완전히 뒤집으면서 그때부터 성과주의라고 하는 일명 meritocracy 사회 즉 능력주의 사회에 진입하게 되는데, 여기서 부터 인간은 고도의 발전을 이루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발판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경쟁으로 인한 피로도가 쌓이게 되면서, '남보다 뒤떨어지면 어쩌지'란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보통은 주장한다. 전 인류를 통틀어 가장 먹을 것이 많은 지금 - 물론 국가경제 정도에 따라 아직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국가들이 존재하나, 빈곤국가의 지구 반대편에는 먹을 것이 차고 넘쳐 굶주린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은 버리는 국가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식량은 차고 넘친다고 하겠다. -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만큼은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져 이 이상으로 더 나아진 생활을 영위하기 경쟁하기 시작하고, 이 경쟁에서 남들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더 나은 교육 혹은 비싼 교육을 그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경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안이라는 감정의 부산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인데, 이기기 위한 교육보다는 불안함을 '슬기롭게' 해소해야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교육은 사회생활을 완만하게 할 수 있는 소양과 덕목 그리고 지식을 갖출 수 있게 만드는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이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이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전두 지휘하는 소위 말하는 기득권층들은 어떤 사회적 인간을 원하는지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교육이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기르는 주입행위에 더해 내가 습득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그리고 나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선택하여 다듬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힘낼 수 있는 지혜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으며, 소양과 덕목만으로는 역량을 발휘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 세 가지 개념이 삼박자를 맞출 때 비로소 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어느 측면에서 교육은 '퀴즈쇼 정답 맞히기'형의 순발력이 뛰어난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거나 그러한 문제를 직면할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혜를 발휘하여 해결방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인간들도 많아야 한다. 유연한 사고가 가능한 사람들 말이다. 일류가 아니어도 업신 당하지 않으면서 먹고 살 걱정 없이 마음껏 생각하고 움추러들지 않으면서 의견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고들이 편견 없이 공유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교육이 닦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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