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普通)이란 넓게 통한다는 말인데, 사전적인 의미를 굳이 찾아본다면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뒤쳐지지도 않는 중간 정도란 말이다. 그런데, 이 보통의 기준은 사람, 소득 그리고 나라마다 다르고, 종교 그리고 직업군에 따라서도 그 범위와 종류가 조금 또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
보통을 분류할 수 있는 여러 기준 가운데, 가장 직관적인 기준은 소득과 직업군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매우 위선적인 단어, '중산층'은 어떤 이에게는 선망의 대상, 어떤 이에게는 우스운 계층으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한번 '보통'이라는 토대 위에 놓고 개념화해보겠다. 통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가장 직관적인 관점에서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이 기준은 12년 학제를 거쳐 대학교에 진학 그리고 졸업을 거쳐 주 5일제 근무하는 회사에 또는 기관에 취직하여 한국의 1인당 GDP 정도의 소득으로 생계를 누리는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단층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이 좋아하는 OECD는 중위소득 50-150% 구간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중산층이라고 했을 때 2021년도 기준 중위소득이란 4인 가구 기준으로 480-500만 원 정도가 중산층인 셈이다. 이 돈이 어떤 가족에게는 한없이 적을 수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마지노선을 맞춰 빠듯하게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어떤 가족에게는 한번쯤 벌어봤으면 하는 액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중산층의 범위도 사람마다 보는 기준이 다를 수 있고, 내가 어렸을 때 보통으로 여겼던 것들이 내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상에서는 전혀 보통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백만 원을 버는 회사원 부모들이 다수인 동네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동네에 학교가 있다고 쳤을 때, 이곳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보는 보통의 기준은 한 달에 백만 원어치 정도의 소비생활을 하는 회사원 부모들이 보통 부모의 기준 일 수 있다. 반대로 한 달에 정해진 일정한 수입이 없는 대신 월 기준 가처분 소득이 천만원인 부모가 모인 동네에 살면서 홈스쿨링을 받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 기준에서의 보통은 홈스쿨링과 천만 원 정도의 소비생활이 보통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가장 오랫동안 노출된 조건에 따라 보통의 기준이 달라지는데, 공교롭게도 국가라는 현실감각 떨어지고 보수적인 조직은 사회가 정한 보통의 기준이 '중산층'이라면서,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를 만드려고 안간힘을 쓰고, 모든 국민들을 중산층에 몰아넣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벌인다.
시대적인 관점에서 본 보통의 기준을 생각해보면 또 다르게 이 오묘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존엄성(dignity)이라는 숭고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해진 이 개념이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부여되어 '보통'이라는 생각이 만들어지기 전 인류는 피 터지게 싸우는 전쟁과 다툼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나치의 종말을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Charité at War' 그리고 나치 시대를 살아왔던 독일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보낸 청년 시기에는 보통의 범주의 벗어나는 인간들의 부류, 예를 들면 유태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보통에서 벗어나는 인간들'로 치부되어있기에 그들을 당연히 혐오할 수 있는 시기였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계몽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오히려 이러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혐오주의자라며 주홍글씨를 씌워 제약하지만, 아마도 여러 시대를 살아온 일부 노인들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보통의 기준에 대해 자기 판단과 생각을 내릴 겨를도 없이 생존을 위한 '보통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왔을 것이라 짐작된다.
지금은 우리 시대가 숭고하게 여기는 것들, 개인 존중, 인권, 다양성 포용, 지속가능성 등 뭔가 착해 보이는 듯한 이런 말들은 20세기 초 전쟁의 폐허에서 생존 방식 수호가 최우선시되었을 그 시기엔 거론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생존'은 사실 굉장히 추접한 인간의 사악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게 하며, 아주 작은 개념의 '생존'이라고 볼 수 있는 '나의 안위를 위해 남을 짓밟는 행위'도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 없이 행할 것이다. 개인적인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추궁하며 한 인간의 벌거벗은 내면까지 국가를 주무르는 기득권들의 입맛에 맞게 강제적으로 청소하려고 했던 사상검증이라는 말도 안되는 짓은 한 때 국가질서 확립이라는 명목 하에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는 그 소름 끼치는 경험을 불과 반세기 전에 겪었던 반도 위에 살아가고 있는데, 과거와 달리 지금 한국에선 이러한 행위가 더 이상 '보통'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상당히 원칙적인 사람이다. 사고의 유연함을 지니려고 노력하기에 일명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지만, 예를 들면 '할 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는 상당한 편이고, 편법을 쓰는 것을 범죄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은 융통성이 없다며 무시하지만, 원칙을 져버리며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나에겐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눈감은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치졸한 태도라고 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보통의 기준을 남에게 억지로 들이대며 내가 상대방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겠구나."란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하게 된다. 나는 적어도 내일 잘 곳, 먹을 것, 할 일에 대해 걱정해본 적은 없는 사람이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인 의식주는 어렵지 않게 충족시켜줄 부모가 있었고, 심지어 선택을 할 수 있는 호강도 누렸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인도네시아에서는 의식주는 커녕 음식이 아닌 끼니도 없어 무료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맛과 상관없이 삼켜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보통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것이기에 나는 내용물을 거들떠보지 않고 이미 쓰레기통으로 내동쳤을 것들에 대해 길거리의 사람들은 내게 동냥한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너무 처절하게 느껴지는 일상생활 전면에 깔린 불평등 속에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며 쓸데없이 괴로워하곤 했다. 지금은 막히는 도로에서 차창에 검은 손바닥을 보여주며 나의 부끄러움을 단숨에 집어살킬듯한 큰 눈으로 내가 창문을 열어 무엇이라도 줄 것을 기대하는 아이들을 매정하게 무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 말하기 힘든 불편함 아니 부끄러움은 존재하며, 우리는 일명 1st world problem에 매몰되어 필요 이상의 경쟁으로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다.
물론 내 기억 속 가장 최근의 한국은 2000년대 중반쯤이다. 그렇기에 지금 너무 변해버린 나라를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에서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에게 국적을 부여해준 것 이상 이하도 아닌 나라 '한국'은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고, 나는 다시 '보통의 기준'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내게 있어 보통의 기준은 타인의 감정을 망치거나 해를 입히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기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탐욕이 사고를 지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소한 즐거움, 예를 들면 내가 맨날 다니는 산책로, 내 생각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한적한 장소, 일명 영혼도 달래 줄 수 있을만한 소울푸드를 먹는다든가 하는 이런 작지만 의미 있는 행위들을 경제적 부담 없이 영위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한 보통의 기준이다.
보통의 기준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겠지만, want와 need를 구분하여 탐욕이 지배하지 않게 나의 마음을 다스려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사회생활이라는 타협점 속에 내가 좋아하는 행위와 감정들을 비밀스럽게 수집할 수 있는 환경 속에 나를 풀어줄 수 있는 작은 용기, 이 두 가지만 충족된다면,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은 10년 20년 뒤에도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이 가장 잘 영글었을 때, 열반에 이르러극에 달하는 즐거움인 극락, 즉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거라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