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다시 만난다는 것의 의미
2부. 예수를 다시 만난다는 것의 의미
이 2부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정보보다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재조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학적 정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예수를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는 인물’로 상상해 보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멈추지 않아도 된다. 이 부는 완전한 이해보다 방향의 감각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4장. 인간 예수와 함께 걷는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예수는 대개 너무 빨리 초월적 존재가 된다. 그는 기도 속에서 호출되는 이름이 되고, 교리 속에서 정의된 본질이 되며, 신앙 고백문 속에서 반복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호명되는 순간, 예수는 점점 우리의 실존적 삶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는 믿어야 할 대상이 되지만, 함께 걸을 수 있는 인물이 되지는 못한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려는 예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라진 존재다. 신이 되기 이전의 예수, 다시 말해 갈릴리의 흙먼지를 밟고 살았던 인간 예수다.
인간 예수를 말하는 것은 그의 신성을 부정하자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예수를 신으로만 말할수록, 그의 말과 행동은 현실에서 멀어진다. 그가 왜 분노했는지, 왜 침묵했는지, 왜 특정한 사람들, 특히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사람들 곁에 머물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그저 “그는 원래 신이었기 때문에”라는 말로 설명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로지 숭배해야 할 하나의 절대적인 상징으로만 남는다. 그런 존재는 결코 여기 지금 내 곁에 머무는 인간 예수가 될 수 없다. 인간 예수를 다시 묻는 이유는, 그가 실제로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예수는 당시 로마 제국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통제 질서 아래에서, 정치적 힘도 경제적 안정도 전혀 없는 갈릴리라는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안정적이지 않았다. 평범한 아니 어쩌면 하층민인 요셉의 아들로 생존은 늘 불안했고, 그 당시 유일한 종교인 유대교는 사람을 살리기보다 구분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다. 성전 중심의 종교 체계는 사제가 거룩함을 독점하도록 만들었고, 율법은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배제하는 기준이 되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생태계 한가운데서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살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때로는 침묵했다.
인간 예수와 함께 걷는다는 말은, 바로 이 상황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예수의 말이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적 삶의 맥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하라”는 말은 안전한 상황에서 던진 윤리적 교훈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등과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 한복판에서 나온 선택의 언어였다. 그가 말한 용서, 자비, 하늘나라는 모두 현실을 회피하는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을 다시 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예수를 ‘설명하는 대상’으로만 대할 때, 신앙은 점점 추상적 관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예수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길’로 받아들이는 순간, 신앙의 성격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얼마나 정확히 확고하게 믿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나가며 살고 있느냐가 된다.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결코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선택을 요구한다. 어떤 편에 설 것인지, 누구의 곁에 머물 것인지, 무엇을 거부할 것인지를 묻는다.
예수의 분노는 도덕적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적 위선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종교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의 연민은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려는 실천이었다. 그의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잘못된 질문에 응답하지 않겠다는 거부였다. 인간 예수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이런 태도를 삶의 기준으로 다시 읽는 일이다. 그를 본받는다는 말은 그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판단 기준을 배우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앙은 다시 현실과 연결된다. 회사에서 부당한 구조를 마주할 때, 가정 안에서 반복되는 갈등 앞에서, 관계 속에서 침묵과 말하기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추상적인 신앙 원리를 떠올리지 않는다. 대신 “예수라면 지금 무엇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물론 그 질문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따른다. 그러나 바로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걷기 시작한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신자가 아니라, 길 위에 서 있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 예수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신앙을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든다. 더 많은 질문이 생기고, 더 쉽게 안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대신 신앙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만 유지되는 신념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 감각이 된다. 예수는 그렇게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설명 속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말한 ‘인간 예수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삶 속에서 더 이상 예수를 추상화하지 않겠다는 작은 약속이다. 예수를 너무 빨리 신의 자리로 밀어 올리지 않고, 먼저 인간으로서 그의 발자국을 바라보겠다는 태도다. 그 발자국은 언제나 안전한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만 신앙은 다시 숨을 쉰다.
�<이 장을 읽고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
오늘 하루, 복음서 속 예수의 삶에서 가장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장면 하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장면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어디에서 맞닿아 있는지, 판단 없이 가만히 적어본다. 설명하려 하지 말고, 연결만 시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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