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Mar 30. 2021

예수는 단 한 번도 이런 교회를 세운 적이 없다.

기도의 집인 예수의 에클레시아를 찾게 된 이유는?

성경에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이 나온다.


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Matt 16:18)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에게 말한다. 너는 페트로스(Πέτρος, 돌)다. 그리고 내가 이 페트라(πέτρᾳ, 바위) 위에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모임)를 지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Ἅιδης)의 문들이 그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문장을 예수가 직접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여 현재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그 권위가 이어져 온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교회를 예수가 세운 것은 맞지만 베드로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교파 간의 해석의 차이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이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한국에는 현재 교회 건물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 다만 가톨릭 교회 건물이 약 1,800개, 개신교 교회 건물이 약 6만 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 신자가 약 5백만 명이고 개신교 신자가 약 800만 명이니 가톨릭은 교회 당 약 2,700명, 개신교는 130명 정도의 신자들이 모인다. 개신교가 주장하는 대로 1000만 명 신자라고 해도 170명 정도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이 대부분의 신자들을 독식하고 있으니 실제로는 신자가 50명 이하인 그래서 집세로 제대로 내지 못하는 매우 영세한 교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영세한 소규모 교회가 오히려 원래 에클레시아의 모습에 가깝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 다음에도 어느 한 건물이나 장소에 상주하면서 가르침을 설파한 적이 없다. 늘 동가식서가숙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리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수 생존에는 목사는 물론 장로도 없었다. 그저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에클레시아, 곧 모임만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늘날과 같은 어마어마한 건물, 정부의 관료제도 뺨치는 비대한 조직, 수만 명의 신자들의 익명성이 당연시 여겨지게 되었을까? 예수가 발을 들여놓을 틈을 주지 않는 지극히 세속적인 조직의 운영이 교회인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의 모임이 어찌 교회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을까?



당연히 자본주의 때문이다. 교회 안에 자본주의가 파고들면서 물질이 영혼을 몰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세 확장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모든 교회를 욕하고 증오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교회 안에서는 헌금 경쟁 그래프가 당당하게 벽보에 붙고, 헌금을 내지 않는 신자들을 욕하는 목사의 설교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보다는 사교 모임에 더 열을 올리는 자들이 예수 이름을 입에 담아도 신성모독이 되지 않는 곳으로 교회가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 교회 안에서는 목사파와 장로파, 더 나아가 집사파, 그리고 혁신파와 수구파, 그것도 모자라 대형 아파트파와 연립주택파로 사분오열되어 끼리끼리 놀기도 한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한다. 예수가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늘나라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교회를 두고 미리 알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런 ‘타락한’ 교회와 같은 모습의 유대교 성전을 예수가 이미 단죄하였다. 이 장면은 드물게도 공관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나온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물건, 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매매하는 이들과 환전하는 이들을 “쫓아냈다.” 그가 쫓아낸 이유는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도 예수가 2천 년 전에 쫓아낸 강도들이 가득하다. 교회 안에서 매매와 환전에 전념한다. 기도도 출세와 축재를 위해 드린다. 예수가 선포한 때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에는 철저히 귀를 닫고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면서 예수가 한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 배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당연히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교회는 돈을 주고받으며 사교 모임을 가지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기도는 인간과 신의 대화이다. 물론 교파에 따라 신에 대한 감사와 개인적 청원이 추가되지만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세속적 요구 사항이 첨가되지 않은 신과의 순수한 대화 자체가 기도이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신과 나누는 것은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 영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세속적인 안녕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장사꾼들의 목소리만 넘쳐난다. 그런 교회에 대고 예수는 다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은 강도들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의 집이라고. 그런데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와는 달리 요즘 교회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도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이 없다. 아니 그런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은 이미 교회를 떠난 것 같다. 마치 예수가 오늘날의 교회를 벌써 오래전에 떠났듯이 말이다.



예수는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거행하는 예배의 전형이 된 최후의 만찬도 '아무개'의 집에서 드렸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예수는 파스카 축제를 지낼 장소를 묻는 제자에게 예루살렘의 어떤 집, 그 집주인의 이름을 복음사가도 모르는 집에서 거행한 것이다. 예수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 교회가 없었다. 그 거룩한 최후의 만찬도 남의 집에서 먹을 수밖에 없던 예수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참고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의 메뉴는 다음과 같다: 누룩을 첨가하지 않은 빵, 포도주, 양고기, 올리브, 대추야자, 생선 소스, 허브, 콩죽. 이 자리에서 예수가 빵을 생선 소스에 찍어서  그를 겨우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주면서 예수의 3일에 걸친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이런 교회 안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한 에클레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 안에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다. 베드로만이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교회가 있다. 높은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고 말이다.


마침 코로나 사태로 건물의 형태를 갖춘 교회의 위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대면 예배가 아닌 비대면 예배로도 충분히 기도, 곧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체험한 신자들이 교회 건물 밖에 있던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곧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체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체험으로 강도들의 소굴에서 벗어나 자신이 사는 집, 자신이 일하는 일터가 바로 기도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수 제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건물의 형태를 갖춘 강도들의 소굴이 된 교회가 소멸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교회가 자라나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의 이전글 윤석열은 왜 정치발언을 이어가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