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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31. 2021

윤석열이 한국 수구의 긴 역사를 지양할 것인가?

송시열에서 시작된 수구 세력의 끈질긴 생명력의 종말을 기원한다.

뉴스에 보니 송시열을 기리는 우암사적공원 정문으로 70대 남자가 몰던 그랜저가 돌진하여 정문이 폭삭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너지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한국에서 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수구 세력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송시열이 누구인가? 1607년에 태어나 81살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서인 노론의 두목으로서 한국의 당파싸움의 최고의 솜씨를 보이고 간 사람 아니던가? 특히 그의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주자를 공자처럼 떠받드는 중화사상을 뼈 속 깊이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으로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나라의 앞날이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음에도 송을 받드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이미 망한 명을 살리겠다고 새로운 세력인 청을 공격하자는 이른바 북벌론을 제창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수구 정신의 탄생이다. 북벌론의 명분은 존주대의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파 싸움의 연장선에서 파당적 이해관계를 노린 짓으로 해석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북벌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을 송시열이 이를 들고 나온 것만 보아도 이는 단순히 공론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수구 정신의 백미는 예송논쟁에서 드러난다.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아니라 차남인 효종이 죽자 3년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니 기년상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반대파는 효종이 왕이었으니 맏아들에 준하는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대립한 것이다, 이 또한 명분을 빙자한 당파 세력 간의 이해다툼이었을 뿐이다. 지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고 물러나면 돈을 벌 수 없으니 피 튀기는 싸움을 할 수밖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끼리 당시의 예에 관한 법조문을 날카롭게 해석하며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과 동시에 자기 파벌의 세력을 규합하고 적대 세력을 물리치는 신공을 보인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다. 어쩐지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보여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송시열 파벌과 그에 맞선 윤선도 파벌은 이 예송논쟁을 빌미로 서로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난리를 쳤다.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 1600년대, 곧 17세기이다.     

17세기는 서양에서 근대적인 사상과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흥하던 시기이다. 이것이 18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그리고 19세기의 식민주의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서양이 문자 그대로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시기에 조선에서는 3년상이냐 아니냐를 놓고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송시열이 있었다.


그의 주자와 송 숭배 사상을 이어받은 수구 세력은 조선 말기에 이른바 위정척사론을 무기로 성리학의 고리타분한 명분론에 집착하여 결과적으로 나라를 말아먹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 곧 시대정신에 둔감하고 명분과 당파적 이익에만 집착하는 소아적인 수구 세력의 전형적인 폐해였다.  


한국에는 참다운 보수가 없다. 다만 짝퉁 보수, 곧 수구 세력만 있을 뿐이다. 보수는 한 사회의 ‘바른’ 전통 가치를 이어가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수구는 특정 세력이나 집단의 기득권 유지에만 전념한다. 수구 언론도, 수구 정당도 이런 잣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도 결국 당파 싸움의 여파로 81살의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상반된 해석이 전해진다. 곧 선비답게 당당하게 사약을 마셨다는 해석과 목숨을 구걸하려 애쓰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사약을 입에 부어 넣어 겨우 죽게 만들었다는 해석이 양립하고 있는 것이다. 유배지인 제주를 떠나 한양으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가는 도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통상 국문에 임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임에도 도중에 죽었으니 말이 많아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두 가지 해석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는 후세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파벌은 서원을 세워 그 세력을 온전히 보존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흥선군이 고종 8년에 서원을 철폐하려고 보니 송시열 이름의 서원이 44개에 이르렀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흥선군조차도 서원을 완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47개는 남길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한 서원의 힘이 그렇게 막강하였던 것이다.     


이 서원이라는 것이 원래는 중국의 송에서 시작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그런 제도가 조선으로 들어오더니 변형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지방 세력의 발판의 기능이 더 강화되었다. 중국에 없던 것이 조선에 들어와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비용을 주변 백성들을 갈취하는 방법으로 마련하였다. 그러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기회를 노리는 일종의 지방당 노릇을 하였다. 귤이 황하를 건너 탱자가 된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다.    

 


사실 대원군이 처음으로 서원 철폐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초인 숙종 때에 시작되었고 노론이 다시 득세한 영조 시대에도 서원 철폐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서원과 사원 173개가 철폐되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 몰래 서원을 다시 지으려는 수구 세력들의 준동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대원군 때에 와서도 서원은 전국에 수백 개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선두에 있었던 것이 44개의 서원을 장악한 송시열 계파였다. 세계의 시대정신이 어찌 돌아가든 자신의 계파, 자신의 가문만 호의호식하면 그만인 수구 정신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을사오적의 대표인 이완용은 원래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의 핵심 세력의 후손으로 그의 먼 친척인 이호준에게 입양되어 그 잘난 노론의 적통을 잇게 되었다. 정말 무서운 수구 세력의 생명력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은 이 수구 세력의 척결을 등한시한다. 그 결과 친일 청산은 오늘날에도 미완의 과제가 되어 정계에서 친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담론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윤석열로 돌아와 보자. 유석열은 아직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수구 언론과 정당을 중심으로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지만 아직은 정중동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신중한 선택을 하여 수구 세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수구 세력이 아니라 참다운 보수 세력이다. 모든 선진국에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적절한 견제를 하면서 정치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수구가 보수를 자처하며 기득권과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역사가 이어져 왔다. 그런 당파 싸움이나 외척 세력의 준동과는 거리가 먼 파평윤씨 집안의 윤석열이 만약 정계에 진출한다면 이제 그 수구 역사의 질곡을 끊고 참다운 보수 세력을 규합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보수의 탈을 쓴 수구 세력 말고 이른바 '찐보수'가 제대로 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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