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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pr 05. 2021

오세훈을 지지하는 20대가 극우라고?

극우가 아니라 애늙은이들이다.

오슬로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박노자가 3일 자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오세훈을 지지하는 20대가 '실망 당한' '문 지지자'가 아니라 본래 극우 쪽에 있던 자들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20대는 이명박과 박근혜의 신자유주의 정권이 지배하던 시대에 성장하여 그 사상에 젖어 살아 극우 선전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현재 20대는 흔히 Z세대로 불리는 이들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 이후의 Z세대는 200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세대를 말한다. 그럼 2005년 이후 세대는?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Z세대에 이르러 갈 때까지 갔으니 학자나 언론이나 마땅한 작명이 어려우니 더욱 그럴 것이다.


지본가들이 MZ 세대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이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제 막 소비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물건을 사들여 소비하는 인간만 사람대접을 하는 사상이니 당연히 이들에게 공을 들이고 싶어 한다. 그러니 이들의 행복보다는 최대한 소비를 촉진하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런 정교화된 신자유주의의 선전선동에 놀아난 20대들은 소비가 곧 행복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공식에 물들어 살고 있다. 이들은 영원한 진리, 정신적 가치, 삶의 본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즉물적이다. 곧 오늘 여기에서 쾌락만 누릴 수 있다면 영혼까지도 팔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이다. 그래서 10년, 20년을 내다보며 오늘의 고통을 견디고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때로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양보하는 정신도 거의 없다.



이런 20대의 사회적 소통은 주로 social media를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사회적 연대성은 더욱 희박한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도 ‘잡담’은 얼마든지 나누지만 ‘연대’는 할 줄 모르고 할 생각도 없다.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소비와 외모이다. 그리고 그 소비와 외모는 궁극적으로 최대한의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저 여기 지금 즐기는 삶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즐기고 싶은데 상황은 영 딴판이다. 경제는 불안하고 무엇보다 집값이 폭등하여 자신의 현재의 쾌락 추구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대는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어릴 때부터 노예 생활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세대이기에 그 타격은 심각하다.


부모의 철저한 간섭을 받으며 초딩 이전부터 국영수 학원에 노예가 되면서 시작한 인생은 대학 생활이 온통 취업 노예가 되기 위한 훈련 기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진하여 대기업의 노예가 되는 것에 인생을 건다. 그러면서 40살까지 20억을 모아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나머지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는 꿈을 꾼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문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나라를 불문하고 빈익빈 부익부가 구조적으로 가속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젊은이다운 패기가 부족하여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하고 이른바 출세를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은 분노로 전이된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역시 만만한 것이 이른바 ‘꼰대들’이다. 그 꼰대들은 입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시기에 적당히 공부해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 적당히 일해도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아래 세대를 적당히 등쳐먹으며 편히 살아온 세대로만 보인다. 그러면서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가 이상하다. 이른바 ‘선택적 분노’만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의 빈부격차의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즉물적으로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신을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이들에게 분노한다. 그런데 이 선택적 분노마저도 희한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현재 여당이든 야당이든 강남에 아파트를 지니고, 수십억 재산을 쌓아 놓고, 권력 주변에 맴돌며 권력을 탐하는 이들은 다 기득권자들이다. 여든 야든 가릴 것이 없는 것이다. 모두 현재의 경제적 난국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오세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대는 그런 이들을 포함한 정치가들을 재촉하여 법, 경제, 사회 제도의 개선을 촉구하기보다는 파당을 먼저 짓는데 익숙하다.


문제의 근원적 해결보다는 그들이 가장 경멸하는 꼰대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갇혀서 나는 좌파 너는 우파, 나는 진보 너는 보수라는 식의 진영 논리에 빠져 꼰대들의 삶을 답습한다. 20대가 경멸하는 꼰대들의 삶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하며 결국 꼰대와 같은 삶을 꿈꾸는 것이다. 서울의 이른바 노른자위 지역의 대형 아파트에 살며 BMW를 몰고 다니고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하며 강남의 비싼 클럽에서 이성들과 “재미있게 노는” 것을 꿈꾼다. 그렇다. 그것이 인생의 꿈이다. 사실 이런 것은 이미 잘 나가는 꼰대들이 성취한 것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택적 분노나 하는 20대는 결국 그런 꼰대를 벤치마킹하는 ‘애늙은이’ 일뿐 아니던가? 이 애늙은이들의 꿈은 무엇인가? 혹시 강남 아파트, 수 억 대의 연봉, 건물주, 40대 이후에는 골프나 치며 이성과 시시덕거리며 노는 삶인가?



사실 우리나라에 당장 필요한 것은 그런 애늙은이들이 꾸는 꼰대의 꿈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20대였던 ‘청년’들은 사회적 불의에 분노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길거리에 나서서 체제에 맞섰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체제를 바꾸었다. 불의한 정치 사회 제도에 죽음으로 맞서 꿈을 이룬 것이다. 지금 20대들이 착각하듯이 그 꼰대들은 적당히 공부하고 졸업해도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 편히 돈 벌고 부동산 투기를 잘하여 큰 집을 장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하루 12시간 이상 공부하고 지옥 같은 입시 경쟁을 치렀고 바늘구멍의 취업을 하고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토요일은 물론 때로는 일요일도 근무하며 문자 그대로 살인적으로 일했다. 그들은 흑수저 타령이나 하면서 다른 금수저를 저주하지 않았다. 그들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점점 줄어드는 실질 임금에 허덕이며 버텼다. 그러면서 강남의 집을 꿈꾸지 않았고 40대 은퇴도 설계하지 않았고, 40대부터 골프나 치며 놀고 사는 것은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취업하는 순간부터 은퇴 후의 연금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그 하루에 충실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충실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집과 안정된 가정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리고 인류 역사 이래 힘들지 않은 시대와 세대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의 Z세대와 같이 칭얼대는 세대는 보기 드물었다. 화가 나면 맞서 싸우고, 의롭지 않으면  죽음을 불사하고 맞서 싸워야 사회는 바뀐다. 단톡 방에 모여 선택적 분노나 배설하는 ‘애늙은이들’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바꿀 수 없으면 칭얼대지 말기 바란다. 바꾸지도 못하면서 칭얼대는 애늙은이들은 두려워할 기성세대, 아니 꼰대는 없다. 꼰대에게는 사회적 불의를 보고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덤비는 청년이 가장 두렵다. 그러나 꼰대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 나도 달라고 칭얼대는 그런 애늙은이들은 전혀 두렵지 않다. 이미 꼰대들이 깔아 놓은 판 위에서 선택적 분노를 하는 애늙은이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세상에 불만이 있다면 그 판을 뒤집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20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아파트, 골프, 클럽, 해외여행, 건물주가 되어 40대 이후의 놀고먹는 삶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그런 '꿈'을 이룩하고자 부동산, 주식, 심지어 비트코인 시장까지 기웃거린다. 이미 꼰대들이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어설프게 따라 하기에 급급하다. 새로운 시장,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척할 생각은 안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신자유주의적인 프레임을 걷어차고는 차라리 환경보호, 정치적 부패, 구조적 빈부격차, 신자유주의의 병폐의 혁파를 꿈꾸는 20대가 얼마나 되는가? 그저 신자유주의적인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쾌락 말고는 더 바랄 것이 없는 20대는 청년이 아니라 애늙은이다.



박정희는 청년들이 너무 두려워 심지어 머리 길이, 치마 길이까지 단속하며 그들을 철저히 억압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분노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그 분노의 집단의식에 눌려 비명횡사하였다. 그러나 요즘 정치가들은 아무도 20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즘 청년들은 불의에 분노하기보다는 칭얼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칭얼대면 '엄마'가 알아서 다 들어주었던 습관이 남아 있기에 칭얼댈 줄만 안다. 그리고 그저 꼰대처럼 큰 아파트에 살고, 꼰대처럼 비머 몰고 다니고, 꼰대처럼 골프 치고, 꼰대처럼 이성과 놀겠다는 애늙은이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박노자가 말하는 청년 극우가 신자유주의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는 20대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세훈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청년 극좌, 아니 청년 좌파, 청년 우파, 청년 중도는 그들보다 나은가? 이번 보선에서 나타날 20대의 표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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