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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07. 2021

최장집의 궤변을 통박한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시각에 갇힌 입진보의 한계인가?

최장집이 제주연구원에서 특별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촛불시위로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붕괴되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단다. 또 한 명의 김문수의 탄생을 보는 느낌이다.     


최장집이 누구인가? 한 때 조선일보와 맞짱을 뜨며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 아니던가? 이제 그도 가는구나... 씁쓸하다. 왜 대한민국의 이른바 진보 논객들은 50이 넘어가면 이리 시들시들해지는 것일까? 갱년기와 관련이 있는가? 생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 만하다. 1943년생이니 이제 ‘겨우’ 78세다. 치매 운운하기에는 아직 젊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특강의 제목이 어마어마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진단과 전망’이란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검진하고 처방을 내리듯,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방점을 찍겠다고 작심한 모양새이다. 근데 그 논리가 희한하다. 촛불 정신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말이다.


그의 주장을 언론에 보도된 대로 옮겨본다. “(투표를 통한 결과라 할지라도) 한 정당이 만년 승자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정치 세력 간 일정한 균형이 유지되는 게 필요하다.” “안정적인 다수를 점하는 정치 세력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쉽게 위협한다.” 이게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정권은 기계적으로 5년마다 바뀌어야만 민주주의란 말인가?


내가 즐겨 예로 드는 독일의 경우 기민당/기사당 연합 정권이 독일연방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무려 57년 동안 정권을 장악해 왔다. 맞수인 사민당과 다른 정당에 정권을 내준 것은 겨우 15년에 불과하다. 그래서 독일의 민주주의가 위협당했나?     


문제는 정권을 진보와 보수가 기계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이 반영된 시대정신에 맞는 정치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한다면 100년을 집권한들 무슨 대수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장집은 현재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진단하는 시작점으로 촛불시위를 들고 싶다.”라고 일갈했단다.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유지되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단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적폐 세력의 준동과 폐해가 보수의 균형 감각이란다. 이건 뭐 김문수 뺨을 후려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민주당을 폄훼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촛불시위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촛불시위를 혁명으로 규정하고역사 청산적폐 청산과거 청산 등을 표방하며 보수 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니 그럼 최장집은 촛불시위가 시민들의 무혈혁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박근혜가 계속 적폐를 누적시키는 것이 보수의 균형감각의 유지란 말인가?   이런 당황스러운 최장집의 발언이 30년 전의 김지하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킨다. 

 

과거 1991년 강경대 구타 치사 사건으로 대학가에서 분노의 시위가 이어질 때 김지하가 느닷없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보수의 대열로 전향하여 세간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군사독재의 마지막 주자였던 노태우 정권이 기쁨의 굿판을 벌인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후 진보 진영은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의 소용돌이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고 군사 독재 정권은 당시 총리였던 정원식의 밀가루 쇼를 대서특필한 조선일보의 농간에 힘입어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그 단초는 한 때 군사독재의 대표적인 피해자로 진보의 영웅으로 군림했던 김지하가 제공했다. 그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후 김지하는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로 단죄되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그를 적당히 이용해 먹다가 팽한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김지하는 '지조 있게도' 2012년 한 시국강연에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한 때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김지하였다. 그런 그가 박근혜를 지지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최장집도 김문수와 김지하의 길을 가려는 모양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런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협약에 의한 정치의 상실 또는 파괴된 풍토에서 어느 한쪽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관철하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온다.”갈등을 제도화된 틀 속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타협하는 게 민주주의다.” 말은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 정권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이들이 정권을 장악할 때 갈등을 제도의 틀 안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타협한 적이 있는가?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진부한 것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사람을 앞설 수는 없는 일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의 틀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사람이 아니라 이념을 앞세우는 이들이 학자라고 큰소리치는 세상이 문제다. 이데올로기가 생기기 이전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먼저인 이유이다.     


참 이상타. 이른바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은 끝까지 이른바 지조를 잘 지키고, 기득권에 붙어 호의호식하는 데, 왜 자칭 진보 인사들 가운데에는 나이 들면 이리 돌아버리는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일까? 진보로 남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인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입진보도 얄밉지만 기왕 진보 진영에 있다가 배를 갈아타는 이들은 더욱 얄궂다. 그저 그런 사상의 전환이 병리 현상과 무관하기만을 빌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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