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Sep 01. 2021

윤석열이 기회주의자라고?

원래 기회주의의 원조는 박정희였다.

홍준표가 기세가 오른 모양이다. 8월 25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정부 출범 초기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하는 데 일등공신이 돼서 중앙지검장에 발탁될 때 다섯 계단을 넘어서 벼락출세를 했어요. 벼락출세를 해서 중앙지검장을 하시면서 우리 적폐 수사 명분을 걸고 수사를 했을 때 우리 진영의 사람들이 1천 명 이상 조사를 받았어요. 그리고 200명 정도가 구속이 됐고. 그리고 거기에 자살자가 5명이 나오죠, 수사 도중에...”     


박근혜 구속과 적폐 청산의 주역으로 보수 진영을 초토화하다시피 한 윤석열이 이제는 오히려 진영을 바꾸어 진보 진영을 초토화하겠다고 나선 모양이다. 정치계라는 것이 워낙 변화무쌍하다고 하지만 윤석열처럼 극적인 변화를 보인 자도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사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가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도 당을 여러 번 바꾼 경력이 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기회주의라고 할 것이다. 이길 수만 있다면 진영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나만 잘나서 잘 되면 그만인 것을. 아마 이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윤석열의 속 마음을 알 수 없지만 홍준표가 대신 말해준다.     


“지금 문재인 정권 들어와서 진영 논리가 팽배하다. 사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우리 보수 우파 진영의 지지는 그렇다. 윤석열 후보를 통하면 정권 교체가 되겠다 싶으니까 우리 진영에서 이거는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는지 그건 상관없이 그 진영 논리로 지금 매몰돼 있다.”     


맞는 말이다. 현재 윤석열의 인기는 그의 인품이나 정치적 역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구 진영은 윤석열이 된다 싶으니 이른바 ‘묻지 마 투자’를 하는 심정으로 배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홍준표는 다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반대 진영에서 앞장서 우리를 철저히 궤멸시킨 사람이, 다시 반대 진영으로 넘어와서 TK(대구경북)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정의와 상식에도 어긋나고 국민감정에도 어긋난다. 보수 우파의 본산인 TK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날 수 있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워낙 정치판이라는 것이 한 번 달아오르면 이성이 상실되는 곳이다. 히틀러가 총통에 오르기까지 그는 법을 어긴 적이 없다. 기존의 법제도를 철저히 활용하여 인류사에서 최악의 살인마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 국민은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고 지금도 독일인의 10% 이상이 히틀러의 극우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독재자는 혼자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를 지지하는 ‘진영’과 ‘국민’의 협력으로 만들어진다.     


히틀러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기회주의자였다. ‘살길’을 찾아서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도 ‘진영’을 넘나드는 기회주의적인 정치가들이 넘친다. 그리고 정치만이 아니라 인류사에서도 배신의 사례는 넘쳐난다. 오죽하면 인류의 구세주라는 예수마저도 유다에게 배신을 당할까? 가장 믿음직한 제자였던 그가 겨우 은전 30개, 오늘날의 돈으로 따지만 일용직 일당 수준의 20~30만원 정도의 돈으로 구세주를 팔아넘겼다. 그것도 예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입맞춤까지 하면서 말이다.


박정희가 대표적이다. 박정희는 남로당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백선엽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무기징역을 면하게 된다. 그런데 박정희는 원래 총살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남로당 조직원 300명의 명단을 군 당국에 넘겨준 대가로 무기징역으로 감면된 상태였다. 그보다 먼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가 적극적으로 남로당 활동에 참여했다가 사형을 당했다. 말하자면 박정희는 ‘원조 빨갱이’ 집안 출신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에서 살아남은 다음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오히려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이른바 빨갱이 척결에 여생을 보냈다. 전형적인 ‘진영’을 바꾼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사실 박정희는 빨갱이가 되기 전인 일본 강점기에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군을 때려잡는 장교가 되었다. 이 학교에 입학 지원서를 내면서 박정희가 혈서를 동봉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 7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血書 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で送付されて?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6102.html)     


여기에 나오는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곧 ‘한 목숨 바쳐 충성 박정희’라는 글을 박정희가 자신의 피로 썼다는 것이다. 얼마나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 싶었으면 말이다. 사실 그의 나이가 23살이라 제한 연령인 19살을 한참 넘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위의 본문에 나온 대로 자신이 너무 부족한 사람(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이지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각오가 되어 있단다(命の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이것이 박정희였다.     


그런 박정희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해방이 되었고 몰각의 길을 걸을 뻔했다. 그러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극도로 싫어하던 빨갱이로 ‘진영’ 갈아탔던 것이다. 친일과 빨갱이의 경력은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일본 강점기의 친일파 관리들을 신생 정부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쓰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이승만이 제일 싫어하는 빨갱이였다는 사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박정희는 친일 매국노와 빨갱이도 ‘진영’을 바꾸면 얼마든 최고의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후배 정치가들에게 남겼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물론 박정희가 결국 업보를 갚느라고 최측근의 총에 비명횡사하였지만,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정치가에게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권력, 그것도 대권에 한 번 눈이 멀어버리면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된다.   

  

윤석열은 친일 매국노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니다. 다만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그 조직이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할 뿐이다. 더구나 박정희 지지 세력의 본산인 TK가 강력히 밀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진영’이면 친일 전력도 빨갱이 전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윤석열처럼 ‘한 번’ 진영을 갈아탄 자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홍준표가 하는 말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홍준표가 누구인가? 과거에 비상식적인 발언으로 저잣거리의 비웃음을 산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오히려 상식적으로 들리는 세상이 되었다. 문자 그대로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정치계에도 이른바 new normal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문제는 윤석열의 지지 세력도 상식이 무엇인지 안다. TK도 친일 매국과 남로당이 빨갱이라는 것을 잘 안다.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진영 논리’에 빠지게 되면 그런 상식이 사라지게 된다. 홍준표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윤석열이 “TK(대구경북)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정의와 상식에도 어긋나고 국민감정에도 어긋난다. 보수 우파의 본산인 TK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날 수 있는가.”     


현재 한국의 대선 정국에서 상식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가 뜨는 것에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비상식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초인이 나와 비상식이 상식이 된 이 뉴노멀의 한국 정치판을 갈아엎어 상식을 다시 세우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낙연의 소탐대실을 경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