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Sep 08. 2021
윤석열 일병을 구하자고?
해는 생각보다 빨리 저물 것이다.
윤석열이 6월 29일 대권 도전 선언 이후 계속 잔매를 얻어맞더니 이제 드디어 보디 블로우로 휘청거리는 모양새이다. 워낙 조석변개하는 것이 인심이라지만 벌써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홍준표를 띄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동안 윤석열에 올인하던 세력은 여전히 윤석열 일병 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문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그런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그 ‘보잘것없는’ 일병을 구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1998년에 나온 영화이니 벌써 23년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육군 사령관이 라이언 집안의 4형제 가운데 막내인 제임스만이 아직 전사 통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무조건’ 구해내라는 명령한 것에서 시작된 작전이다. 4형제 모두 죽게 놔둔다면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는 인도주의적 명분이 있다.
그러나 그를 구하기 위하여 나선 8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는다. 한 사람을 그것도 일병을 살려내기 위하여 6명의 군인, 그것도 정예 군인들이 목숨을 버리게 된다. 사실 여기에서 영화를 보던 이들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6명의 ‘탁월한’ 장병을 희생해서라도 평범하다 못해 ‘겁쟁이’인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 명분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한 인도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영화에서도 배우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제기되는 질문이었다. 더 문제는 제임스 라이언을 발견해 무사히 귀환하려 했는데 그의 고집으로 그를 구하러 간 병사들이 본의 아니게 전투에 참여하게 되어 희생이 커졌다. 심지어 여기에서 매우 지적이고 지략이 뛰어난 지휘관인 밀러 대위마저도 목숨을 잃게 된다.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이 꽤 심금을 울린다. “earn this... earn it.” 영어 번역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대명사이다. 선행사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 문장처럼 한국말로 거의 ‘거시기’ 수준의 단어가 출몰하면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러나 전체 맥락에서 제임스 라이언을 구하려고 갔다가 희생당한 이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로 들린다. 영어에서 earn은 공짜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제임스 라이언은 생명을 다시 얻은 명분을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어떤가? 그는 단순히 여권에 맞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그의 인기는 거의 공짜였다. 그러니 그 인기가 헛되지 않게 하려면 스스로 노력하여 그 명성에 맞갖은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국민의힘은 윤석열 일병 구하기에 나설 처지가 되었다. 사실 윤석열은 군대 근처도 안 갔으니 일병도 아니지만 알이다. 그리고 그를 구하되 목숨을 내놓고자 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편이 튈 것을 걱정하고 벌써 김웅으로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 발 빠른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보여준 윤석열의 행적을 보면 이번에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모든 말썽의 진원지인 아내 문제 아닌가? ‘쥴리’는 차라리 혼전 남자관계를 따지는 것이니 문제가 안 된다. 결혼 전에 남자를 5명을 사귀든 500명을 사귀든 그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행사에 관련된 사안이니 말이다. 요즘 말로 어느 남자가 결혼할 때 여자에게 처녀 증명을 요구하는가? 그러니 전혀 논란이 될 수가 없다. 물론 혼전 관계가 복잡한 것이 자랑은 아니다. 그러나 현행법으로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직접 연관된 김건희와 도이치모터스와 관련된 불법 행위는 죄가 된다. 한국 법체계에서는 특히 돈과 관련된 사기죄는 엄격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살인 사건보다 금전 관련 사기 사건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 그러니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이제는 한국 사회에 흔해진 혼전 남자관계처럼 간단한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그러니 윤석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윤석열 일병을 구하기보다는 대타를 찾는 분위기도 보인다. 마침 스스로 대타를 자임하는 사람이 있으니 안성맞춤이겠다.
그러나 홍준표가 과연 윤석열 일병을 구할 필요성이 전혀 없게 만들 수 있을까? 이낙연이 예상보다 더 큰 격차로 참패한 후유증으로 이낙연 지지자들이 홍준표에게 이른바 ‘묻지 마’ 지지로 ‘혼쭐’을 내주는 가짜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곧 진정될 것이다. 정치라는 바닥이 워낙 비이성과 감정 대립이 심한 곳이지만 홍준표를 윤석열의 대안으로 여기기에는 여러 가지 넘어야 할 걸림돌이 많다.
더구나 지난 19대 대선에서 홍준표가 이른바 ‘영끌’한 지지율이 20% 초반대에 머문 사실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물론 당시 안철수가 나서서 보수 진영의 표를 갈라놓은 이유도 있지만, 홍준표만으로는 자생력이 부족하다. 일부 사람들은 19대 대선 당시 홍준표와 안철수가 단일화만 이루었어도 문재인 후보를 이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수치로만 본다면 일리는 있다. 당시 문재인 41.4%, 홍준표 24%, 안철수 21.4% 였으니 홍준표와 안철수의 지지율을 합치면 45.4%로 문재인 후보를 4%p 차이로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초딩 수학에 불과하다. 안철수의 지지 세력에는 현재의 국민의힘을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준표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일각에서는 윤석열이 페이스메이커였다는 소문도 나오는 판이다. 그 정도로 윤석열을 둘러싼 잡음이 더욱 요란해지고 있다. 혹자는 원래 윤석열을 페이스메이커로 쓸 요량이었으나 ‘깜’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야권이 토사 이전이라도 구팽하는 전략에 들어갔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6월 29일 대선 출마 선언, 아니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정계 입문 선언을 한 이후 단 하루도 페이스메이커의 면모를 보인 적이 없다. 오히려 보수 진영의 기를 빼는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오히려 민주당의 엑스맨이라는 말까지 듣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페이스메이커는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전혀 준비 안 된 윤석열은 왜 대선 정국에 텀벙 뛰어든 것일까?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실력을 과신했다는 사실이다. 한 조직의 정상에 있다 보면 착시 현상에 빠지게 된다. 주변에서 다 굽실대니 자신이 전능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조직을 그만두어도 자신이 뭐든 다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결국 아파트 경비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깨닫는 세상의 현실을 윤석열은 모르고 있다. 물론 윤석열이 전관예우를 받아가며 변호사로 일하면 여생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내가 100억대 재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굳이 대선의 장에 뛰어든 과신을 부추긴 것은 물론 주변의 아첨꾼들이다. 윤석열이 반짝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현 정권에 증오심을 가진 이들이 묻지 마 투자를 한 것이다. 그 정도 인기면 불가능은 없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비유하자면 항성이 아니라 행성이다. 태양과 같은 차제 발광 능력은 제로인데 다만 햇빛을 반사하는 능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태양의 대척점에 서 있는 달만 바라보면 대낮같이 밝은 느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달은 태양이 없으면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 있게 될 뿐이다.
또 다른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현재까지 밝혀진 가족의 비리 의혹을 감추는 최선의 길이 대권을 잡는 것이라고 여긴 모양새이다. 그리고 장모와 아내의 추문은 물론 자신이 잘 알고 있을 본인의 비리를 감추는 길은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적어도 윤석열의 사고방식에서는 말이다. 권력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을 30년 가까이 체험해온 그 아닌가?
그러나 관료제도 안에서 누린 권력은 자신의 고유한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윤석열은 깨닫지 못했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도 제복을 벗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국민의 태도에 탄식하지 않았던가?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지 못한 윤석열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곡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대선 결과만을 놓고 볼 때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진보 세력은 과반수를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결정적 변수이다. 그래서 일단 보수 세력이 단합만 된다면 대선을 의외로 쉽게 이길 수도 있다. 그래서 윤석열이 대선 출마 선언 이후 단 한 번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지지율이 계속 정체에 머물러 있어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일단 보수 진영의 단일 후보만 된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현재 윤석열이 거의 매장당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이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윤석열이 이 고비를 넘기면 오히려 가장 강력한 대선 당선 가능성을 지닌 후보가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재 4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그의 당선 득표율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수치이다. 진보 세력의 외연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보수 세력은 윤석열이 능력은 고사하고 이른바 ‘정상인’임을 확인만 해도 ‘묻지 마’ 지지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기자회견과 토론을 회피하고 장모와 아내 문제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당과는 융화하지 못하고는 삼중고에 빠져 있어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 문제만이라도 시원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윤석열의 인기는 다시 치솟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참모들이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아직 묘수가 안 보이나 보다.
버벅대는 윤석열에게 매달려야 하는 보수 진영도 딱하지만 사실 이는 대한민국의 불행이기도 하다.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 세력이 믿고 밀어줄 만한 인재가 이리도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문제는 국민의힘에 그 누구도 라이언 일병을 구하고자 나선 8명의 용사와 같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자회견을 한 김웅처럼 선택적 기억상실 환자들로 넘치는 당이다. 불리한 것은 기억이 안 나고 유리한 것은 명료하게 기억하는 신공을 발휘하는 자들이 국민의힘에 모인 ‘인재’들이다. 그러니 이들 가운데 누가 윤석열 일병을 구할 것인가? 아무도 없다. 그저 다 각자도생에 몰두하거나 풀잎처럼 바람이 불기도 전에 눕고 바람이 그치기도 전에 일어선다. 참 모양 없다. 그래도 좋다는 수구 세력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현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만으로 해석하기 힘들다.
물론 서양 역사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정치적 변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시대가 있었다. 특히 니체(Friedrich von Nietzsche)는 이 르상티망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무력감, 좌절, 열등의식,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에게 이 르상티망, 곧 적대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적대감은 자신이 느끼는 열패감의 원인이 자신의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 곧 르상티망은 무능력한 자의 방어기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 방어기제를 발휘하면서 모든 잘못을 상대방에 전가하는 가운데 나의 생존의 의미를 찾게 된다. 사실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분노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정의로운 분노로 위장하게 된다.
서양 역사에서 이 분노는 대부분 민중과 시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구체제의 전복이 이루어지곤 했다. 프랑스혁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치 마당에서 작용하는 분노는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만 해소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재 대선 정국에서는 정권 교체의 형태로 르상티망이 표현되고 있다. 파죽지세로 오른 집값, 코로나로 더욱 악화된 경제 상황, 정치적 부패에 대한 분노는 무력감, 좌절, 열등의식, 질투가 복합되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그 분노를 대신 삭여 줄 인물로 밀고 있는 윤석열이 특히 아내의 과거와 장모의 재산을 둘러싼 추문으로 시민들에게 더욱 커다란 무력감, 좌절, 열등의식,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니 르상티망이 오히려 증폭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기댈 구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특히 한국 사회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분노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윤석열 일병을 구한다고 개선이 될까? 글쎄다. 지켜보자. 아니면 어디 두고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