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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Feb 15. 2022

샤이 진보와 샤이 보수의 힘을 믿는다고?

샤이가 아니라 언론이 문제일 뿐이다.

이재명의 지지율이 답보 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윤석열의 설화가 계속되면서 둘의 당선 가능성은 여전히 안갯속에 머문 형국이다. 그래서인가? 양 진영에서 아전인수격 선전선동전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모양이다. 특히 좀처럼 40%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이재명 진영은 마지막 희망을 이른바 ‘샤이 진보’의 존재와 그 파급력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윤석열은 그런 샤이 보수 세력을 고민할 필요 없이 치고 나가고 있는 형국이고. 그러나 둘 다 위험한 전략이다. 하나는 헛된 기대가 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미리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샤이 진보 이전에 샤이 보수가 먼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지난 2017년 미국 대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여론조사와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트럼프를 폄하하는 추세를 만들어 냈지만 결국 트럼프가 힐러리를 누르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여론조사와 언론의 편향성이 도마에 올랐지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유야무야 지나가 버렸다. 조사기관이나 언론이나 자기들 얼굴에 먹칠하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파고들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사실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와 언론이 창피를 당한 것은 지난 45대 미국 대선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트루먼을 누르고 듀이가 33대 미국 대선에서 압승을 거둘 것을 확신한 미국 언론의 오만함에서 빚어진 오보 사건이었다. 아직도 신문을 팔아먹고 있는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Chicago Daily Tribune)은 1948년 대선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아예 듀이의 압승을 알리는 기사를 미리 배포해 버렸다. 사실 1948년 11월 2일에 치러질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거의 모든 여론 조사에서 듀이가 두 자릿수 이상의 차이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정치 전문가라는 이들도 듀이의 압승을 예고하였다. 이 분위기를 뒤집을 만한 조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트루먼의 승리였다. 그러자 이 찌라시 수준의 신문인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진정한 반성과 사과보다는 변명에만 일관하였다. 찌라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 근본적 뻔뻔함을 버리지 못하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한국의 대선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 어떤 언론 기관도 정확한 예측을 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출구조사마저도 정확도가 떨어진다. 한국의 16대 대선에서 아무도 노무현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언론은 현재 윤석열을 ‘빨아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광분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의 설레발이 먹히지 않았다는 또 다른 사례로 남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정권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여 진정한 민심과는 다른 안드로메다의 세상에서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습성을 2022년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현재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은 그 신뢰성을 스스로 갉아먹었다. 과학적이고 공정한 분석과 보도보다는 선전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고도 광고주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생존을 위하여 진영논리와 가짜 뉴스를 확산시키는데 오늘도 여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이성적 국민’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샤이 보수나 샤이 진보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계층을 만들어 놓은 근본 원인을 제공한 편향된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 기관은 자기들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고 본심을 드러내지 않은 국민만을 탓한다. ‘회색층’이니 ‘부동층’이니 하는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용어를 남발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샤이’라는 그럴듯한 용어를 동원해서라도 낙인을 찍어버리고자 애쓴다. 사실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이 신뢰성을 담보한다면 샤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건방지게’ 여론을 주도하겠다는 욕망으로 편향된 조사 결과를 내는 여론조사기관과 그것을 다시 재가공하여 개별 언론사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선택적으로 보도하는 편향된 언론 기관은 사실 그 본질적 존재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여론을 신속하고 정확하며 공정하게 전달해야 하는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정작 ‘참된’ 국민이 살아남는 방식은 본심을 감추는 것뿐 아니겠는가?


편향된 의도에서 가공된 오보와 가짜 뉴스 생산 언론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조선일보>의 1986년 11월 17일 자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제목의 오보는 한국 언론의 오보 역사에 영원히 남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이전과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수많은 오보와 가짜 뉴스를 뿌려대면서도 단 한 번도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북한이 <조선일보>를 놀려주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애먼 소리나 해댄 것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자칭 ‘1등 언론사’라는 것이 말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군대에 있었던 나와 동료들은 ‘데프콘 3’이 발령된 상황에서 이제 조국을 위해 전선에 투입될 것을 예상하며 죽음에 맞설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데프콘 3’은 이른바 ‘round house’라고 불리는 단계로 한국군의 작전권이 한미연합군사령부로 넘어가 실질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으니 그럴 만도 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소동을 <조선일보>라는 ‘일개’ 찌라시 언론사의 기자 아닌 기레기의 펜대가 일으켰다. 그런 사달을 내고도 <조선일보>는 무탈했고 여전히 X소리를 짓어대는 유명한 찌라시로 날뛰고 있다.


며칠 전 나온 <조선일보>의 특종도 마찬가지이다. 안철수가 윤석열에게 단일화를 제안한다는 ‘설’을 인터넷판 1면 톱기사로 냈다. 그러나 결국 나온 결과를 보면 문자 그대로 천둥소리에 놀라 쥐새끼 한 마리가 기어 나온 형국 아닌가? 이런 것을 ‘단독 특종’이라고 설레발을 치는 <조선일보>가 이제는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발행부수를 조작하여 정부 보조금을 뜯어먹던 관행을 들킨 상황에서 ‘특종’을 남발해야 먹고사는 저치가 되고 만 것인가? 사실 안철수와 윤석열의 단일화는 <조선일보>가 ‘이끄는’ 보수 진영의 마지막 남은 카드이다. 그리고 서울 시장 보선에서 이미 잘 써먹은 카드이니 이번에도 안철수를 몰아세워 이득을 보자는 심산이 너무나 뻔히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정작 안철수의 단일화 제안이 나오자 국민의힘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안철수가 제안한 국민경선은 윤석열이 물기에는 너무 위험한 미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윤석열이 두려워한다는 이른바 ‘역선택’이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한 바닥 민심의 확인에 대한 확신이 윤석열에게는 전혀 없다. 실제로 여론조사에서도 단일화는 윤석열에게 매우 불리하게 나온다. 평생 검찰의 안온한 조사실에서 자라온 윤석열에서 그런 조건은 도박이 아니라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러자 오전에 단일화 변죽을 울리던 <조선일보>가 윤석열의 변명 아닌 변명을 받아 적으며 오후에 바로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접는 모양새이다. 도대체 언제나 철이 들까? 금광으로 벼락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이 1933년이니 벌써 90살에 가까운데도 이 모양으로 철이 없으니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100여 년이 가까워도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고 있는 조선 시대의 조선미디어의 <조선일보> 아닌가? 그 모양이 어디 갈까 싶다.


곁다리지만 김건희 윤석열 커플이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주 관상술로 보면 안철수가 만만한 것은 아니다. 안철수와 윤석열은 일간의 궁합이 그 유명한 을경합금으로 윤석열의 기운에 묻어가는 형상이지만 윤석열의 사주가 신약이라서 신강 사주를 지닌 안철수의 기를 무조건 빨아들일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안철수가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욕심이 넘치는 사주라 절대 손해 보는 짓은 안 한다. 물론 이는 사술이니 크게 믿을 바는 못 된다. 그럼에도 당장 대선 정국의 최대 이슈인 안철수와 윤석열의 단일화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에 참고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사주 궁합이 말해주는 대로 이번에는 안철수가 그리 만만하게 윤석열의 노리갯감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10%대 미만의 지지율을 보이는 안철수도 끝까지 완주하기에는 명분과 실리에서 약점이 많다. 더구나 15%를 넘지 못하면 쓴 돈을 다 토해내야 하는데 돈에 민감한 안철수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배팅을 하는 수밖에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각에서 나오는 소문대로 이재명과 단일화는 어떨까? 이 경우 노무현 대통령이 정몽준과 단일화 한 기억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을목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택도 없는 소리이다. 안철수와 이재명의 사주궁합을 보면 일간이 모두 을목이라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서로 복잡하게 얽힐 뿐 뚜렷한 동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안철수의 지지율이 10% 이상의 수준, 더 나아가 마의 15%를 넘길 때에만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그 전에는 이재명과의 단일화도 전혀 임팩트가 없다. 그러니 안철수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몸 값을 더 올리는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말든 말이다.   


언론이 그 본분을 상실한 나라에서 국민이 믿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본인 자신일 뿐이다. 사실 이는 민주주의의 최대의 약점을 건드린 것이 된다. 플라톤이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중우정치가 된다고 했다. 중우정치의 가장 커다란 특징이 바로 국민이 스스로 이른바 ‘개돼지’가 되어 정치가들이 선전선동하기에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악한 정치가가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사악한 정치가를 낳는 것이다.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의식이 있는 국민이 다수인 나라에서는 동서 지역주의나 좌우 이데올로기가 정치에서 힘을 쓸 수 없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는 영호남 대립과 ‘빨갱이’ 구호가 총선이나 대선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여 늘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바로 한국 국민의 정치 수준을 반영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깨어 있는’ 국민들은 진심을 감추고 있다가 투표장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본심을 드러내면 좌우 양진영에 깨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과 그 무리들은 이른바 ‘유세 출정식’에서 3월 9일 축배를 들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마치 대선 승리 선포식을 거행하는 것 같았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자리에 있던 윤석열의 연설대에 쓰인 글이 눈에 뜨인다. “국민이 키운 윤석열.” 사실 이는 맞는 말이다. 지금의 윤석열을 만든 것은 그의 영적인 능력이 있는 아내인 김건희도 아니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도사’들도 아니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입을 놀리는 이준석도 아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도록 해 준 것은 오로지 한국 인구의 40% 내외를 차지하는 ‘국민’이다. 윤석열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 40%가 ‘개돼지’로 여겨지겠지만 이들도 염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리고 이들도 오늘 하루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돈을 벌지,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지 근심하는 바로 내 이웃의 ‘평범한 인간’이다. 결코 개돼지는 물론 ‘악마’도 ‘무지몽매’한 자들도 아니다. 더구나 그를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한국 사회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 가운데 상당수가 개신교 목사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김장환이다. 조용기의 장례식에서 윤석열에게 안수 기도를 했다는 그 김장환 말이다.


그런데 오늘 뉴스를 보니 김건희가 김장환을 3시간 정도 만나 “좋은 말씀 듣고 기도한다.”라고 했단다. 김장환은 누구인가? 엄연히 한국 수원에서 태어나 자라고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목사로 거의 반평생을 보낸 사람이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통’이다. 미국서 목사가 되었고 미국 이름까지 지니고 다닐 정도다. 아내도 그렇고. 그러나 학력이나 가족관계로만 미국통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특히 빌리 그레엄 목사와의 친분으로 미국의 정계와도 깊은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에 ‘인사드리러’ 가는 일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조차 김장환을 거간꾼으로 하여 트럼프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다. 우리나라에 누가 이런 ‘막강한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그가 극우 기독교 세력을 대표하고, 전두환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수감 생활을 ‘예수 수난’과 비교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을 지닌 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어느 모로는 외교부의 관리들보다 더 강한 미국과의 끈을 이용하여 ‘힘’을 발휘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종류의 인간들의 상당 수가 지금 윤석열을 지지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자진해서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앞잡이가 된 일본에 비해서는 미국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서해 바다를 두고 중국을 문자 그대로 코앞에 대면하고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의 전위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곧 자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연줄을 놓을 줄 아는 김장환은 한국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뜯어보면 이처럼 ‘능력’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가 이들이 한 집단을 이루면 ‘개돼지 신드롬’을 보이는 것이다. 이른바 특정 정파의 ‘묻지 마’ 지지 세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고자 한다면 원래 반대 진영에 있었다고 해도 눈치 보지 말고 이 세력에 편승하면 그만이다. 지조는 개나 줘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러한 현상을 잘 말해주는 것이 바로 ‘멀쩡한’ 개인이 쉽게 빠져드는 ‘광적인’ 군중심리를 갈파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이다. 이렇게 개인은 능력 있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 인간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면 마치 바보가 된 듯이 자발적으로 부도덕해지는 현상은 이미 나치 시대의 독일에서 잘 드러났다. 또한 가장 최근에 트럼프를 ‘묻지 마’ 지지하는 미국의 백인 노동자 계층과 보수 기독교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트럼프의 비논리와 비이성적 행위에서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들 세력의 힘으로 트럼프는 권토중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정도이다. ‘다행히’ 미국의 ‘지적’ 언론이 트럼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어느 정도 균형은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그런 미국의 트럼프 지지 현상은 현재 한국에서 MZ세대가 그들의 ‘분노’를 대신 ‘배설’ 해 주는 윤석열에게 열광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이다.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성적 인간들이 숨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섣불리 나섰다가는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샤이’로 숨어있어야 하는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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