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제7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홍상수는 이미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인트로덕션>으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으니 이번 상으로 이른바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한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내가 매우 좋아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면 대체적으로 수채화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안에 오롯하게 등장하는 미녀가 있다. 바로 김민희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여전히 불륜이라는 주홍글씨로 단죄하고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들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부끄러울 뿐이니 말이다. 죄 많은 내가 감히 누구를 단죄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한국 언론에서 홍상수 김민희의 이름이 등장하기만 하면 ‘불륜’이라는 주홍글씨로 단죄하는 이들이 차고도 넘치는 것을 보니 한국 사회에는 죄 없는 사람들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것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배우 김민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박찬욱 감독의 2016년 작품인 <아가씨>를 통해서이다. 박찬욱 감독의 유미주의에 매우 맞갖은 연기를 펼친 김민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연예계에 넘쳐나는, 얼굴과 몸매도 모자라 ‘학력’을 내밀며 ‘잘난 척’ 하는 배우 아닌 배우들에 염증을 느낀 내게 김민희는 한 폭의 잔잔한 수채화로 다가왔다. 배우에게 필요한 것은 연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완성되는 연기력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무늬만 배우인 '짝퉁'들은 얼굴과 몸매를 팔아먹는 데 더 열중하며 이미지 관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연기는 취미 활동 정도로 여긴다. 그런 배우 아닌 배우들은 어느 연기를 하든 늘 똑같은 이미지로 ‘나는 예쁘고 잘난 여자야!’라는 메시지만 전달한다. 그리고 결국 돈만 챙겨 간다. 그러고 나서는 강남의 100억, 200억짜리 집에 산다고 집 자랑, 돈 자랑이나 해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빌딩 투자에 성공하여 엄청난 수익을 남긴 것을 온 사방에 자랑하며 설쳐댄다. 마치 배우를 부업으로 삼는 부동산 투기꾼 같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그 역할에 온전히 몰입하는 경우가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짝퉁' 배우가 넘치는 한국의 연예계에서 김민희는 ‘찐’ 배우로서 거의 군계일학의 독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 김민희는 홍상수 감독의 2016년 작품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국제적으로도 배우로서의 능력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그런데 김민희는 이정재, 이수혁, 조인성과 공개적으로 사귀다가 결국 22살 연상의 홍상수에게서 사랑을 찾은 모양이다. 그러나 문제는 22살이라는 나이차가 아니라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비난의 한가운데 서도록 하는 사회적 단죄였다. 특히 찌라시에서 연예인 뒷담화로 먹고사는 기레기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어디 있을까? 그 이후 김민희는 연예부 기레기들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그러나 김민희는 그런 참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흔들리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인다. 1982년 생이니 만으로 40세.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나이. 세상의 유혹은 다 경험해 보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나이 아닌가? 참으로 나이에 맞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보기 드문 배우이다. 얼굴을 '갈아엎는' 것은 물론 이름을 바꾸어가며 팔자를 고쳐보려는 자들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심지어 나이가 60이 되어서도 젊은 애들이 입는 옷과 화장으로 호들갑스럽게 몸을 감추며 아직 20대라고 우겨대는 ‘속물’ 배우들과 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비유하자면 김민희는 남한산성 산자락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가을 햇살이 깃드는 전통 찻집에서 만나 마음이 편해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인과도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젊은 시절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세상의 맛’을 충분히 보고 돌아와 이제는 아쉬울 것이 조금도 없는 그런 여유를 지닌 여인 말이다.
김민희의 얼굴은 성속이 매우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곧 처녀다운 순수함과 세속적인 요염함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매우 작은 두상에다 그만큼 petit한 얼굴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한 동양적 눈과 입체적인 서구적 코와 입의 조화도 매우 독특하다. 특히 눈이 동양적으로 생긴 탓에 서양인들에게는 신비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줄 수 있어 보인다. 170cm의 키에 49kg 몸무게로 알려져 있는 그의 몸매는 길거리 캐스팅되어 모델로 처음 연예계에 들어선 사람답게 날씬하면서도 당당하다. 그래서 나름 몸집이 있는 홍상수 감독 옆에 서도 조금도 주눅이 들어 보이지 않는 기세를 보여준다. 가녀린듯하나 당당하다. 이러한 모순적인 요소가 김민희라는 페르소나 안에 들어오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피부는 이영애처럼 희고 곱지 않다. 그래서인지 매우 가냘픈 몸매인데도 오히려 내면의 강인함이 저절로 드러나 보인다. 남자들의 어쭙잖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쓰는 여느 배우들과는 다른 품격이다. MZ세대의 자의식이 묻어나는 듯한 분위기가 분명히 거기에 있다. 바로 그래서 서양의 여배우들 사이에 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해 보이는 것 같다.
김민희의 아름다움은 그의 외모와 더불어 이러한 당당한 태도에서 우러난다. 그래서 나잇값을 못하며 ‘주책’을 부리는 배우들이 넘쳐 나는 한국의 연예계에서 거의 군계일학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노출되었을 때 김민희가 그 답게 당당히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며, 다가올 상황, 현재 놓인 상황, 모든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런 말을 한 지 5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들의 사랑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불륜’을 입에 달고 사는 기레기들의 변죽에 맞춘 저잣거리의 입방아에도 꿋꿋한 김민희에게서 21세기의 네오 페미니즘이 엿보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팬들에게는 2017년 이후 오로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만 출연하고 있는 김민희가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을 택한 순간 돈이나 명예를 포기했을 것이니 그런 안타까움은 오히려 기우가 아닐까?
그런데 어떤 팔자이기에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서 사주를 보았다. 세간에 알려진 명식을 보니 계미 일주이다. 그런데 원국에 정편관이 혼잡하고 상관이 월령을 차지하고 있다. 비겁이 많지만 모두 뿌리가 없으니 신약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이런 신약한 사주가 그리 당당해 보이다니. 여전히 모순의 조화이다. 남자를 많이 만나지만 자주 다른 여자, 특히 친한 여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 팔자 아닌가? 이정재와도 그래서 헤어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팔자가 오히려 역으로 ‘남의 남자’를 빼앗는 귀결을 낳았으니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구하다.
내친김에 홍상수 감독의 사주를 보았다. 신묘 일주다. 인성이 강하고 일지에 재를 깔고 있다. 인성이 이 정도로 강하니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가 여장부일 수밖에 없지. 그러나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 인성이 축술형을 이루어 병이 든다. 소문에 따르면 홍상수 감독의 법적 아내가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단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홍상수 감독은 집을 자주 비우다가 결국 아내와 별거하게 되었고. 사주대로 살고 있다. 아니 사주가 때로는 이리 무섭다고 해야 하나? 일지의 아내 자리에 있는 편재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여자가 그 자리에 들어와도 견디기 힘든 사주다. 그런데 김민희와는 일주 궁합이 좋으니 아직은 버티고 있나 보다. 더구나 대운이 둘 다 재운으로 흐른다. 무탈한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재물은 풍요로울 것이니 아쉬움이 없다.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김민희를 닮은 초상화의 여인
예로부터 미인박명이라고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사주라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하다. 내세관이 없는 중국의 전통 사상대로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사주와 관상에서 복이 많은 팔자라고 하는 것은 윤리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러니 김민희도 도덕적 심판을 받아도 무탈할 것이다. 어차피 백년해로할 한 남자를 만날 운명이 아니라면 무위자연의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있는 일 아닐까? 이 또한 김민희의 모순의 조합과도 같은 외모와 닮은 삶이니 말이다.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아름다움의 요소를 김민희라는 페르소나 안에 녹여내듯이 한 남자와만 영원한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여도 여러 남자와 나눈 사랑을 내 안에서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런 삶이 오히려 주체적이고 당당한 것이기에,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작금의 참새들이 조선시대에나 어울리는 윤리도덕을 명분으로 김민희에 대한 질투심을 ‘배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김민희가 대붕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참새들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상관이 월지를 장악하고 있으니 아이가 있을 법도 하고 40이면 아직 출산의 희망이 있는데. 비겁과 정편관이 너무 소란스럽다. 그 점이 아쉽다. 본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김민희의 모순의 조화라는 묘한 매력을 주는 그 아름다움이 시나브로 세월이 가도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