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함의 의미를 알고 싶은가?
1972년생이니 심은하가 벌써 50살이다. 1993년 MBC 탤런트 공채에 합격하여 들어선 연예계에서 활동하다가 2000년에 활동을 중단했으니 연기자의 경력은 짧다. 더구나 2005년 지상욱과 결혼하면서 완전히 그 ‘바닥’을 떠나 오랫동안 전업 주부로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활동 기간만 본다면 심은하는 배우라고 보기 힘들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모그래피를 보면 심은하는 분명히 연기자의 족적을 강하게 남겼다. 심은하만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주요한 영화상을 휩쓸었고 1999년의 SBS 연속극 <청춘의 덫>으로 인기의 절정을 누리게 되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같은 해에 나온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심은하의 연기력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1년에 지금은 이영애의 남편이 된 정호영과의 이른바 ‘약혼과 파혼’의 사달을 겪은 후유증으로 전격적인 은퇴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2005년에 지상욱과의 결혼에 성공하면서 지금까지 딸을 둘 낳고 잘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이 되기 전 과거의 남자 친구와의 동거 의혹과 정호영과의 사달을 들어 심은하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뒷담화로 세월을 보내는 이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열등한 자들의 감정 배설일 뿐이다. 오히려 그런 ‘과거’를 극복하고 오늘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이룩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심은하의 외모는 무엇보다도 단아함이라는 수식어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의 ‘과거 행적’을 근거로 그런 이미지가 가식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에서 보여준 청순한 이미지로 배수지와 같은 순수한 첫사랑의 이미지가 각인된 상황이라 더욱 ‘배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심은하 본인만이 아니라 ‘그 바닥’의 업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객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사달이 나면 늘 여자 배우가 이른바 ‘독박’을 쓰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근본적으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프레임’ 씌우기이다. 그런데 심은하는 대중이 원하는 청순가련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나서 오히려 더 유명해지고 연기력도 늘었다.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화위복은 심은하의 삶을 잘 말해주는 단어이다. 정호용과의 혼인 문제로 위기를 겪고 나서 은퇴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위기를 잘 극복한 후 지상욱과 결혼하여 안정적인 삶을 이어오는 심은하의 모습에서 그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심은하의 사주가 어떻기에 그런 전화위복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정사 일주에 편재가 월지를 차지하고 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정화라... 결코 나대지 않는 단아하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사주이다. 식신생재하고 정관이 강한 데다가 정임합을 이루니 좋은 아내가 될 사주이다. 다만 중간에 기토가 방해하는 작용을 하고 암합도 있으니 그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남편인 정관이 뿌리가 있고 오롯한 데다가 대운이 화목으로 흐르니 원국이 신약인 심은하의 경우 좋은 팔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54세까지 갑진 대운이 이어지니 조금은 답답한 일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55세부터는 목운이 20년간 들어오니 말년이 편하다. 좋은 팔자다. 특히 자식에게 큰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인생 별 것 없다. 젊을 때 잘 나가는 것도 한 때고 남는 것을 결국 자식이니 자식복이 만복의 근원이다. 사주로는 나이가 들고 강한 남자와 인연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기토의 방해로 결국 적당한 나이의 적당한 남자와 결혼하여 잘 살고 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닐까?
심은하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 제목이 잘 어울린다. 8월 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 만난 ‘초원 사진관’ 주인인 유정원을 사랑하는 주차단속원 김다림 역을 맡은 심은하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큐를 찍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영화를 찍을 때가 1997년이니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던 심은하는 25살로 여성미의 절정을 보여주던 시절이다. 좌충우돌하는 10대의 치기를 뒤로하고 사라진 청춘의 빛에 대한 회한에 잠긴 30대의 우울의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야누스적인 20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8월과 크리스마스 사이 어디쯤에 영원히 머물고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을 심은하가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29살에 은퇴하고 33살에 결혼하여 연예계를 떠나버렸기에 이 영화가 심은하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켜버린 것 같다.
165cm의 키에 45kg의 몸무게의 몸매에 화려하지 않지만 날씬하고 도회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움과 탁월한 연기력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배우라기보다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편안함을 주는 얼굴을 지녔다. 이른바 ‘잘난’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인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기자에게 한 말이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준다. “화려하지만 헛헛하고, 다 가졌으나 한없이 부족했던 삶을 가족들이 바꿔놓았다.” 젊고 예쁜 후배 배우들에게 한 때 자신이 차지한 영광을 스스럼없이 넘겨준 관록을 볼 수 있는 발언이다. 60이 가까워서도 나잇값도 못하면서 여전히 20대인 척하며 ‘주책’을 부리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기품이다. 또한 본업은 부동산 투기이면서 발연기만 해대는 무늬만 배우인 이들과도 결이 다르다.
심은하의 전혀 화려하지 않은 아름다움은 특히 그의 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쌍꺼풀이 있지만 전형적인 동양적 눈은 상대방의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날도 보는 사람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다. 키도 크지도 작지도 않다. 배우이면서 가정주부이다. 심은하의 모든 것이 중용을 이루고 있다. 찌라시 연예부에서 기레기로 일하는 자들이 심은하의 ‘과거’를 들먹이며 그의 이미지에 대한 ‘환상’을 깨는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결혼 이후의 그의 행적이 사주에 드러난 팔자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외부에서 피부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위로 솟아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심은하가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사주에서 관성이 강하고 맑은 경우 남자를 많이 사귀더라도 결국 현모양처의 삶으로 귀결된다. 내면적으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현모양처의 ‘프레임’을 두고 페미니즘에서는 남성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억압 기제로 여기겠지만, 현모양처 자체가 homo sapiens sapiens라는 종이 지닌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반대의 개념인 ‘무식한 엄마와 강퍅한 아내’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력은 인간 이성의 차원에서 근원적인 능력이다. 그래서 아름다움도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오래된 지혜가 많다. 특히 외모와 더불어 내면에서 솟아나는 본질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많다. 그래서 성현들은 외모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에 맞갖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룰 때 다른 사람의 찬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가르친다.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말투가 저급하고, 목소리가 거칠고, 그 대화 내용이 속되면 천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일시적으로 교양 있는 척, 얌전한 척할 수도 있지만 결국 본질은 숨기지 못한다. 인성은 송곳과 같아서 주머니 안에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내면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지성미로 드러난다. 물론 지성은 단순히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수도 있는 ‘박사학위’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교양미라고도 하는 지성미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갖춘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모에 자신이 없으면 이른바 ‘명품’으로 자신을 포장하듯이 흔히 지성미에 자신이 없으면 ‘학위’로 자신을 과장해 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으로 포장할수록 오히려 더 가려질 뿐이다.
이에 더하여 흔히 말하는 착한 마음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킨다. 영어로 표현할 때 good character나 heart of gold라고 하는 이 착한 마음은 단지 마음 씀씀이가 고운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배려를 말하는 것이다. 외모가 아무리 빼어나도 성격이 자기중심적이고 더 나아가 이기적인 여자를 어찌 아름답다고 할까?
그러나 한 인간에게서 진선미를 모두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단순히 보편적인 미모만이 아니라 ‘개성’에서 찾기도 한다. 그리고 ‘미모’보다는 ‘매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인 political correctness의 일환일 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이 누구인지를 직관할 수 있디. 성형기술이 발달하여 이른바 ‘강남 미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성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적 질문에 대한 정답이 구해진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의 미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주관적인 판단력과 객관적인 대상의 아름다움 모두이다. 그럼에도 평범한 다수가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미모’가 그 타당성을 직관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다. 물론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 보통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대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노인의 얼굴에 난 주름살과 검버섯에서도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인간은 젊음의 빛을 내는 20대 초반의 여인에게서만 미인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미적 감수성은 대부분 시각적인 자극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체적 아름다움 외에도 지성미와 더불어 인간미를 말하지만 이는 내면화하기도 어렵고 지속하기는 더 어렵다. 매우 지난한 후천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외모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는 데 없는 것을 만들어 계속 가꾸어야 하니 그 어려움이 어떨까? 다만 나이와 더불어 외적인 아름다움은 그 빛을 잃어가지만 지성미와 인간미는 오히려 증진될 가능성이 있으니 희망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주의이기에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인성조차도 노화되기에 지혜로운 노인이 되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는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50줄에 들어 선 심은하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움은 매우 놀라울 정도이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내면과 외면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미모를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상대방에게 얼굴을 마구 들이대고 심지어 고학력을 운운하면서 자신이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며 억지를 부리는 가짜 미녀들이나, 부동산 투기를 전업으로 하고 부업으로 연예인을 하고 있는 가짜 미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개성이라면서 거친 언어를 사용하고 천박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며 그것을 이른바 ‘걸 크러쉬’라고 억지 포장을 하는 현대 세상에서 더욱 희귀해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심은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나 보다. 이런 의미에서 심은하가 지금의 ‘이미지’를 계속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다행히 심은하의 사주를 볼 때 관성이 뿌리가 깊고 강하니 ‘유혹’이 와도 크게 흔들릴 것 같지는 않으니 기대를 해본다. 습기가 가득한 가운데 숨이 턱턱 막히는 8월 땡볕 아래에서 기쁜 일이 있을 것만 같은 크리스마스를 꿈꿀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사람으로 영원히 남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