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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30. 2022

파멸에는 329개의 전조가 있다?

대창녀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태원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매우 어지럽다. 단순히 많은 젊은이가 자기 삶을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비극적으로 사망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이 심각한 파멸의 전조로 보이기 때문에 심란한 것이다.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으로 위험관리를 담당하던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 1886~1962)는 작업장에서 1건의 큰 상해(major injury)가 나기 전에 반드시 29건의 작은 상해(minor injury)가 발생하고 이 상해와 관련된 300건의 무재해 사고(accidents with no injuries)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흔히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고 한다. 이태원 사태와 같은 대형 사고가 나기 전에 반드시 그런 파국적 상황을 예견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치지 않으면 그러한 ‘징조’를 무심하게 지나쳐버리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재난이 발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예언서를 찾아보고 그 위기를 견딜 방법을 찾곤 했다. 한국의 전통 예언서에는 <토정비결>, <격암유록>, <정감록>, <정역>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저자들이 모두 불분명하고 예언했다고 한 내용도 맞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격암유록>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사회 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분열만 가속되었다. 다른 예언도 제대로 맞은 것이 없다. <토정비결>은 그저 심심풀이로 전락하였다. <정감록>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10권의 예언서들을 총정리한 책이라 나름 재미있게 볼만하지만, 그 주 내용이 전쟁과 같은 난리가 났을 때 피난할 장소, 이른바 십승지를 지정한 것에 불과하다. 남한의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정해 놓은 곳으로 주로 농사짓기에 좋은 동네들을 모아 놓았다. 농업이 경제의 전부이던 시절에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한 결과이다. 21세기에 들어 핵전쟁이 날 경우 남한 전 지역이 피해를 받는 상황에서 전혀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이다. <정역>은 증산교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을 강조하고 있는데, 현재 한국 사회를 보면 개벽은 고사하고 종말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고전 예언서와는 별개로 <송하비결>이라는 예언서도 한때 잘 팔렸지만 그 책에서 예언된 것은 단 한 가지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원래 세상이 어지럽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천인공로’할 도사라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법이다. 무식한 ‘개돼지’나 다름없는 민중은 그런 말에 솔깃해지고. 그런 식으로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이런 책과 무관하게 여러 자칭 도사들이 직접 한반도의 미래를 예언한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불교 승려였던 탄허다 그는 승려임에도 <주역>과 <정역>을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예언도 틀린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여자 임금과 통일이다. 그리고 탄허도 한국의 많은 예언자들처럼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는데 이는 서양의 여러 미래 예측 연구소의 결과를 볼 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의 귀에는 달콤한 소리겠지만 한국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계적인 시각이 부족한 일부 국내파 예언가들의 헛소리가 대부분이다. 세계적인 경제 연구소와 미래 연구소는 아시아에서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가 30년 안에 세계 강대국이 될 것을 미신적인 예언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예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은 20위권으로 밀려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실 서양에도 예언서라는 것이 많다. 특히 근세 초기 프랑스의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가 1555년에 출판한 <예언서>(Les Prophéties)라는 책이 심심하면 들먹여진다. 그러나 이 책 또한 허무맹랑한 내용이 담겨 있고 대부분의 예언이 어긋났다. 그의 예언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많은 이유는 책의 내용이 두리뭉실해서 이현령비현령,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예언한 것은 대부분이 전염병이나 지진,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과 침략과 같은 재난이다. 이러한 내용도 대부분 1522년 프랑스에서 인쇄되어 1524년 로마에서 출간된 작자 불명의 <Mirabilis liber>라는 예언서를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는 중세부터 전해오는 여러 잡다한 예언을 편찬한 것에 불과하다. 노스트라다무스는 그 당시 기독교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이슬람의 침략을 염두에 두고 자기 나름대로 예언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런 서양의 예언 전통의 근원은 기독교이다. 특히 <신약성경>의 <요한 묵시록>은 서양의 거의 모든 예언서의 원천이 되고 있다. 사실 이 <요한 묵시록>은 마르틴 루터가 정경 목록에서 빼버릴 것을 상당히 고민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의심스러운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혹세무민을 즐기는 목사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이 또한 <요한 묵시록>이기도 하다. <요한 묵시록>은 서기 약 100년 이후에 쓰인 책이다. 예루살렘이 서기 70년에 초토화되면서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도 붕괴된 데다 금방 이루어질 것 같던 예수의 재림도 막막한 일이 되어버린 무렵에 작성된 것이다. 게다가 예수가 사망한 지 70년 정도 지난 무렵이니 예수의 직제자들도 거의 다 죽고 난 다음이었으니 예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전설만 남은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로마제국에 대한 증오가 넘칠 때였다. 그래서 오합지졸이 되어 간신히 연명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예수가 어서 다시 와서  구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한 증오와 기대가 섞인 마음으로 작성한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인 것이다.    

 

그런 책이지만 많은 이들이 <요한 묵시록>을 즐겨 인용한 것은 예수가 사망한 이후 2000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말한 대로 살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종말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의 종말을 위하여 예수가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할 필요도 없다. 전염병, 핵전쟁, 지구온난화, 운석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로도 인류가 멸망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6,600년 전에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운석으로 당시 생명체의 75%가 소멸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지구에는 네 차례의 생물 대멸종이 일어났었다. 4억 3천만 년 전의 기후 변화에 따른 오르도비스기 대멸종, 3억 7천만 년 전의 기후 변화에 따른 데본기 대멸종, 2억 4,500만 년 전의 환경 변화에 따른 페름기 대멸종, 2억 1,500만 년 전의 트라이아스기 대멸종이 있었다. 이러한 대멸종으로 지구에 생존했던 생명체의 99%가 사라졌다. 그 이후에 탄생한 포유류에 속하는 인류, 그 가운데 우리가 속한 homo sapiens sapiens는 이제 겨우 20만 년 정도 종을 유지해 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 인류가 이미 멸종 상황에 처하고 있다. 중세의 흑사병과 전쟁은 유럽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구온난화는 이미 진행 중이고 2050년부터 기후 변화로 수억에서 수십억 명의 인류가 죽음에 내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 인류가 보유한 핵무기로 인류는 몇 차례 절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재난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수억 년 뒤부터는 태양의 활동 변화로 지구에서 인류의 생존 자체가 힘들어지게 된다.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낸다고 해도 50억 년 후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버리면 태양계 자체는 붕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허무맹랑한 예언서를 들먹이며 인류의 미래를 운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는 거룩한 종교의 예언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천인공로’할 도사들이 날뛰고, 정치가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국민은 갈갈이 분열되어 있기에 그런 예언서라도 들추어 보면서 희망의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나름대로 점 공부를 한 사람으로 현재 거의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의 정치판의 미래를 예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함부로 예언하지 말기로 한다. ‘천인공로’할 도사 무리에 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정치판이 돌아가는 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열불이 치솟아 답답함이 그지없다. 그래서 동양의 점술은 앞에서 대충 보았으니 이번에는 서양 점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묵시록>에 빗대어 한국의 정치판의 미래를 엿보고자 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현재의 한국 정치판을 비유할만한 대목을 찾자면 당연히 ‘대창녀’ 부분일 것이다. 세상이 망하려면 대창녀, 곧 최악의 악녀가 등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던 일이다. 중국 역사에서도 나라가 망할 때면 반드시 악녀가 등장한다. 은나라의 달기, 한나라의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 전의 악녀인 달기는 상나라의 폭군으로 악명이 자자한 주왕의 첩이었다. 주왕은 술과 여자를 밝히는데 당할 자가 없었다. 원래는 공부도 잘하고 머리가 뛰어난 자였으나 권력에 취하더니 교만해지고 하루 빼놓지 않고 술만 퍼마시는 미친 군주가 되었다. 게다가 달기를 만나고 나서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문자 그대로 ‘가스라이팅’이 되어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게 되었다.


달기라는 여자는 특히 저속한 음악과 술과 고기를 미친 듯이 좋아했다. 그래서 주왕도 날마다 연못에 가득 찬 술과 숲처럼 매달아 놓은 고기를 즐기고 이 음탕한 여자에 빠져 살면서 국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그런 주왕을 보다 못한 재상 비간이 법을 무시하고 여자의 말만 들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간언 하였다. 그러자 달기가 그런 비간의 심장을 보고 싶다고 하자 그의 심장을 도려내어 달기에게 보여줄 정도였다. 달기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 취미가 있어서 주왕은 매일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놀이를 일삼았다.


결국 이런 폭정은 오래가지 못하여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면서 사람들이 달기를 잡아 죽이고 주왕은 자살하게 된다. 하도 사악한 여자라 나중에 중국 역사에서 달기는 구미호가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전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달기와 비슷한 구미호 같은 여자가 나타나 이 남자 저 남자 전전하다가 권력자의 애첩이 되어 권력자와 더불어 몰락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군주 연산군의 애첩이었던 악녀 장녹수가 있고 일본의 상황 도바의 애첩이었던 전설적인 타마모노마에가 있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악녀가 주로 권력자의 애첩으로 등장하는데 서양에서는 여자 자체가 대단한 창녀나 마녀로 등장한다. 그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요한 묵시록> 17장에 나오는 ‘대창녀’다.   

  

Καὶ ἦλθεν εἷς ἐκ τῶν ἑπτὰ ἀγγέλων τῶν ἐχόντων τὰς ἑπτὰ φιάλας, καὶ ἐλάλησεν μετ' ἐμοῦ λέγων, Δεῦρο, δείξω σοι τὸ κρίμα τῆς πόρνης τῆς μεγάλης τῆς καθημένης ἐπὶ ὑδάτων πολλῶν, μεθ' ἧς ἐπόρνευσαν οἱ βασιλεῖς τῆς γῆς, καὶ ἐμεθύσθησαν οἱ κατοικοῦντες τὴν γῆν ἐκ τοῦ οἴνου τῆς πορνείας αὐτῆς.(묵시 17,1-2)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일곱 그릇을 들고 있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이리 와라. 많은 물들 가까이에 사는 대창녀에게 내릴 심판을 네게 보여 주겠다. 땅의 임금들이 그 여자와 간음하고, 땅의 주민들이 그 여자의 창녀 짓의 술에 취했다.”     


여기에서 테스 포르네스 테스 메가레스(τῆς πόρνης τῆς μεγάλης)가 바로 ‘대단한 창녀’를 의미한다. 원래 ‘포르네’(πόρνη)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를 말한다. 이 단어에서 타락을 의미하는 ‘포르노’라는 개념이 나왔다. 메가스(μέγας)는 겉으로 볼 때 터무니없이 강력하다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직역을 하면 닳고 닳은 창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여자가 흘리는 술에 취한 나라의 주민들의 멸망을 예언하는 문장이 된다.     


대창녀는 누구인가?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다.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다.(묵시 17,4)     


과거에 진홍색 옷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입던 것이다. 그래서 대창녀는 지도자이거나 지도자에 버금가는 자리에 있는 여자이다. 금과 보석과 진주는 당연히 권력과 돈에 취한 대창녀가 즐겨 착용하는 장식품이다. 원래 창녀들은 자신의 더러운 본질을 감추고자 화려한 장식을 선호한다. 오늘날에도 별 다르지 않은 현상이다. 이런 창녀의 말년은 어찌 전개될까?   

   

네가 본 열 개의 뿔과 그 짐승은 탕녀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알몸으로 만든 다음, 그 여자의 살을 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묵시 17,16)     


그렇다. 그 대창녀의 운명은 결국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창녀는 그동안 모은 모든 재산을 빼앗길 뿐 아니라 살이 찢기고 남은 몸은 불에 타버리게 된다. 문제는 그 창녀와 더불어 그 주민들 전체가 술에 취해 파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파국의 징조는 사실 하인리히의 법칙에서 말하는 대로 이미 나와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태원 사태이다. 


소돔의 멸망 이전에도 이미 329개의 징조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한심한 도시를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신과 계속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도 정작 소돔의 주민들은 그 징조를 애써 외면하며 쾌락과 권력욕과 물욕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신의 분노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전설의 도시로 남았다. '레고랜드 사태'와 '이태원 사태'를 애써 무마하다가는 소돔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329개의 징조를 다 채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 와중에 국민이 겪을 환란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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