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생물학에서 정치사회학으로 나가는 길
1. 들어가는 말
윤리와 연관된 일상 언어에 “정상”(normal)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의 반대말은 “비정상”(abnormal)이다. 이 단어는 오래전부터 목수가 사용하는 직각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norma”에서 나온 것이다. 비유하자면 주어진 자로 재어 보아서 목수의 생각과 맞아떨어지면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라는 판단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모든 사회에는 규범(norm)이 있고 그 사회 구성원은 정해진 규범을 따르도록 요청받는다. 그런데 모든 사회에는 그 규범을 따르지 못하는 소수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지능지수 평가를 도표화 한 확률분포 곡선에 비유해 볼 때 한 사회에는 가운데의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수들이 있고 그 양 주변에 머무는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소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정상에 속하는 이들 중에는 때로는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내는 천재들이 있는 반면에 주변으로 몰려 소외당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소수에 속하는 이들 중에는 성의 규범에 따라 주변으로 밀려나는 동성애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동성애자의 문제는 이제 현대 사회의 중요한 쟁점들의 하나가 되고 있다.
동성애가 별개의 학문적 논의의 개념이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동성애(Homosexualität)라는 단어는 동일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호모스(ὁμός)와 성을 뜻하는 라틴어 섹수스(sexus)를 결합한 인조어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작가 케르트베니(Karl Maria Kertbeny, 1824-1882)가 1868년에 쓴 글에서 이성애(Heterosexualität)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개념이 사용되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86년 발간된 크라프트-에빙(Richard von Krafft-Ebing)의 저서인 “성도착증”(Psychopathia sexualis) 덕분이다.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이 역사적인 책은 동성애뿐 아니라 사디즘(Sadismus)과 마조히즘(Masochismus)이라는 용어도 유행시킨 바 있다. 그는 인간의 성생활의 궁극 목적이 후손을 보는 것에 있으므로 단순히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생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성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모두 정신 병리 현상으로 간주한 것이다. 사실 크라프트-에빙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남아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성생활과 관련하여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행위를 종교적, 도덕적 죄와 연결시켜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고전적 시각에 맞서는 새로운 관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어떤 사람을 정상이나 비정상으로 판단하는 그 “자”(norma) 자체의 정당성이다. 사실 한 사회적 규범(norma)의 정당성은 물리적인 자의 정확도와 동일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잰 1cm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 끝에서도 1cm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대 양자물리학의 차원에서 바라본 세계에서는 시공간의 왜곡이 얼마든지 발생하고 측정 주체와 측정 대상의 상대성이 필연적으로 제기되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정확한 자”의 존재 자체가 부인되고는 있다. 이른바 “불확정성의 원리”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정설이 된 지 오래되었고, 현대 세속 사회에서도 절대 원리보다는 상대주의가 득세하는 현상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인간의 머리 안에 존재하는 “1cm”라는 개념 자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이는 중세의 보편논쟁과도 연결되는 문제로 결국 해결책은 절대적 근거를 신의 존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현대 사회에서 동성애자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나타난다. 먼저 절대적인 ‘자’(norma) 자체에 대한 신뢰성이다. 그 자의 정확성을 보증해주는 절대적인 근거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절대적 근거를 찾아 논리적 퇴행을 거듭해야 하는 곤경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다음으로 그 자의 활용에서 발생하는 오류이다. 동일한 자로 대상을 측정하는 경우에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상대주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중반부터 서양 선진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인권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하는 시대정신은 전통적인 서양 교회의 가르침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특히 20세기의 양차 대전과 1968년 학생혁명 이후 무너진 구체제와 더불어 교회와 세속 사회의 대화 단절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위험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통전적 접근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먼저 전통적으로 동성애를 죄와 연결시킨 종교적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실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 추세를 논하여 보도록 한다.
2. 동성애의 종교적 이해
2.1 유대-그리스도교와 동성애
유대-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성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창조 이후 처음 내리신 명령에 매우 충실한 이해를 견지하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지닌 피조물에게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워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하는 명령을 내리신 것에서 성의 궁극적 목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로 “번식하다.”와 “자식을 많이 낳다.”는 모두 동일한 단어인 “פְּרוּּ”를 사용한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모든 생명체는 번식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 두 명령 모두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면서” 하신 것이다. “고대 근동과 성경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복은 영적인 선만이 아니라, 생명의 전개와 그 완성으로 가시적이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축복은 현실 생활에서 인간의 번식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번식은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의무의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징벌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오난을 죽게 하셨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기”(창세 38,10)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형벌도 강력하게 제시된다.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겨운 짓이다”(레위 18,22).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 둘은 역겨운 짓을 하였으므로 사형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죗값으로 죽는 것이다”(레위 20,13). 토라에서 동성애를 “역겨운 짓”으로 간주하면서 사형을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동성애를 신성모독과 다름없는 죄로 간주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유대교 가르침이 담긴 미드라시(מדרש)와 탈무드(תַּלְמוּד)에서도 동성애는 금지의 대상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현대 유대교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주요 견해는 전통적인 강경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랍비 슈네르손(Rabbi Menachem Mendel Schneerson)과 같이 동성애를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여 도움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성애 자체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정통 유대교의 전반적인 입장이다.
신약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선포를 구약의 완성이며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사건의 시작으로 여기는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도 동성애는 단죄의 대상이 된다. 물론 교파에 따라 약간의 입장 차이는 나타난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의 일부 개신교회들과 독일 루터교회,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의 일부 개신교회들은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반면에 동방정교, 미국의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와 같은 주류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근본적으로 신약의 바오로 서간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동성애 행위에 대한 혐오에 공감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동성애가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들의 우상숭배를 통박하며,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인간들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τὴν φυσικὴν χρῆσιν)와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τὴν παρὰ φύσιν)를 대립시키고 있다. 물론 로마서의 이 구절이 동성애 자체보다는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와 그들의 성전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결국 참된 하느님을 벗어난 종교에서 벌어지는 행위가 하느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내세우는 코린토 1서 6장 9-11절과 티모테오서 1장 8-11절에 나오는 구절들은 현대에 들어와 논란이 되고 있기에 여기에서는 언급을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에 나오는 “남창, 비역하는 자”(masculorum concubitores, 1코린 6,9; 1티모 1,10)라는 표현은 동성애라기보다는 소아성애(pedophile)에 가까운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음을 지적할 필요는 있다. 곧 이들은 비슷한 나이의 성인 남자들 간의 성행위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성적 착취 행위에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2 이슬람교와 동성애
불로우(Vern Bullough, 1928-2006)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 동성애가 널리 퍼진 것은 성에 긍정적이고 남녀를 엄격히 분리하는 문화에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여성이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에서 청년이나 여자처럼 보이는 남성을 성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 사회의 여성 간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흔히 서양에서 하렘(harem)에 거주하는 여성들 간의 동성애를 묘사하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 환상이나 추측에 따른 것이다. 이슬람 문화에서 여성에 관한 자료는 동성애뿐 아니라 다른 범주의 것도 찾아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성애가 종교적인 기원을 지닌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의 경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그 뿌리를 함께 나누지만 이슬람교의 혼인과 이혼 그리고 성행위와 관련된 율법은 이 두 종교와는 다른 전통에서 나온 모습을 보인다. 불로우(Bullough)는 아랍 전통에서는 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고 무함마드도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출신지인 아라비아에서는 남자들의 동성애를 조롱하였지만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코란에도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이슬람 문화에서는 이를 그리스도교에서처럼 동성애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슬람교에서 동성애를 매우 긍정적으로 여기고 나아가 미화한 것으로 성급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서양에서 보는 동성애의 관점과 이슬람 세계의 과거와 현재에서 발견되는 동성애의 관점의 차이는 하나의 단순한 범주적 요소가 아니라, 종교, 정치, 사회 구조, 국가 형태, [사회적인] 낙인의 관행, 친족 제도, 가정 구조와 같은 여러 가지의 작고 때로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차이들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전 세계에서 동성애자를 사형에 처하는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 세계에 속한다. 이는 인권 침해의 사례로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슬람교 전통에서 그 근거를 찾는 시도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성애가 북유럽에서 처음 드러나고 그것이 다른 문명권으로 전파되었다는 논리도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배격되어야 한다. 분명히 이슬람 문화권 고유의 동성애의 현상이 존재하고 이것이 서양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동성애의 현실
베를린 지방법원 판사인 뷔르 마이어 박사(Dr. Ulf Buermeyer)가 대표로 있는 독일의 인권단체 ‘자유권협회’(Gesellschaft für Freiheitsrechte)는 최근 성적 자기 결정권에 관련된 헌법소원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에 제기하였다. 주된 내용은 주민등록부(Personenstandsregister)에 기록하는 성을 개인이 결정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는 2020년 4월 22일 독일 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에서 내린 판결에 불복하는 것이다.
독일의 공영방송인 ARD의 보도에 따르면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남성’(männlich)도 ‘여성’(weiblich)도 아닌 성으로 확인된 사람이 나중에 ‘여성’(weiblich)으로 표기되는 난을 삭제할 권리를 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였다. 사실 독일의 주민등록법(Personenstandesgesetz)에 따르면 ‘성적 발전에 변이가 있는 사람’(Personene mit Varianten der Geschlechtsentwicklung)은 공문서 상의 성별 표기를 나중에 수정할 권리가 이미 보장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독일 연방대법원은 그러한 권리는 자신이 혼성(Intersexualität)이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오로지 의학적인 혼성자(Interperson), 곧 육체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판명이 난 사람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맞서 ‘자유권협회’는 성별은 육체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이 생각하기에 공문서에 자신의 성이 잘못 표기되었다면 그것을 고칠 권리가 국민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막는 것은 차별에 해당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2018년부터 모든 공문서에 성별을 기록하는 난에 남성과 여성 이외에 ‘다성’(divers)을 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자유권협회’는 이러한 자기의 성을 결정하고 수정할 권리 행사에는 오로지 의사의 확인서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인권의 행사를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 맡기는 것은 차별이기에 부당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성차별에 관한 여러 사건(Bostock v. Clayton County, Ga., Altitude Express v. Zarda, and R.G. & G.R. Harris Funeral Homes v. Equal Opportunity Employment Comm’n)을 통합하여 1964년 7월 2일 제정된 미국 역사의 기념비적인 ‘민권법’(Civil Rights Act) 제7조에 나와 있는 ‘성’(sex)의 개념을 시대에 맞게 정의하였다. 곧 이 시민권법에 나온 ‘성’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과 ‘트랜스젠더’(transgener)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2019년 말에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호세 오라시오 고메즈 대주교(José Horacio Gomez)는 2020년 6월 15일 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고메즈 대주교는 미국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라티노 출신 성직자로서 의장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의 성명은 미국 연방대법원이 최근 내린 성차별의 정의에 대한 판결에 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차이와 보완적 관계를 없애버리면 우리는 하느님 창조의 영광을 무시하며 사회 건설의 기초가 되는 인간 가정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의 성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느님의 창조와 우리의 삶을 위해 마련하신 계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자연법을 근간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의 정의에서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은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인권에 관한 의식과 제도가 급격히 개선되는 상황에서 모든 개인의 민권을 포함한 인권은 거부하기 힘든 개념이 되었다. 오늘날 개인의 인권은 자유와 평등을 모두 포섭하는 근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청하는 당위에 속하는 것이 되었다.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는 "과연 성적 정향이 인권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법적으로는 동성애자들의 결혼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종교계, 특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분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연합은 동성애자들의 성행위를 범죄로 여기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문화적 견해 차이보다 더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동성애자와 관련된 정부 정책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이들의 혼인의 합법성 인정과 법적 혜택 부여이다. 혼인은 단순한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 행위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형식의 변화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도 의미하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을 중심으로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동성혼을 법적으로 허용하여 이성혼과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2001년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동성혼(same-sex marriage)을 합법화하였다. 이후 벨기에(2003), 스페인(2005), 캐나다(2005), 남아프리카(2006), 노르웨이(2009), 스웨덴(2009), 포르투갈(2010), 아이슬란드(2010), 아르헨티나(2010), 덴마크(2012), 브라질(2013), 프랑스(2013), 우루과이(2013), 뉴질랜드(2013), 룩셈부르크(2015), 아일랜드(2015), 독일(2017)이 뒤를 이었다. 미국의 경우는 매사추세츠 주(2004)를 시작으로 로드아일랜드 주(2013)에 이르기까지 주별로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과정이 지속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시민 결합(civil union)을 포함하면 미국의 20개 주가 동성혼을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어 마침내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혼이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입각하여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 전역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된 것이다.
사실 동성혼 이전에 이미 덴마크(1989)에서 시작된 시민 결합(civil union)은 그린란드(1996), 독일(2001), 영국(2005), 체코(2006), 슬로베니아(2006), 스위스(2007), 헝가리(2009), 오스트리아(2010), 리히텐슈타인(2011)에서 합법화된 제도로 활용되어 왔다. 국가별로 법적인 제한에 차이가 있지만, 동성혼과 시민 결합(civil union)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자녀의 입양이나 출산의 제한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도 점차 완화되는 추세로 영국과 같이 시민 결합에서 동성혼의 합법화로 진행하는 단계를 많은 국가들이 밟아왔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이처럼 서양의 선진국들이 동성애 혼인을 합법화하는 추세에 있는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여론의 호의적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퓨연구소(Pew Research Center)의 2019년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61%가 동성혼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명시적으로 반대를 표명한 사람은 31%에 불과하다. 2011년을 기점으로 찬성이 반대를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13년 6월 25일에 있었던 미국 연방 대법원의 결혼보호법(DOMA) 위헌 판결 이후 동성애자들의 동성혼을 포함한 성소수자들의 권리 보호에 50% 이상이 찬성 의견을 보였다. 이후 현재까지 그러한 추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도 그러한 추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신교 주류 교회의 백인 신자들의 66%, 가톨릭 신자들의 61%가 동성혼에 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보수 교파에서는 여전히 반대가 높다. 그러나 극도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백인 신자조차도 2004년(11%)에 비해서는 18%p가 늘은 29%의 찬성률을 보이고 있다. 흑인 개신교 신자의 경우는 44%가 동성혼을 지지하고 있다. 이렇게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유럽은 물론 이제 미국조차 성소수자의 인권, 특히 행복추구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존중의 시대정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다.
혼인과 관련한 역사를 보면 이는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성사혼의 효력을 무력화시키고 사회혼에만 법적 효력을 인정하였다. 독일에서도 1875년 비스마르크가 ‘사회혼법’을 제정하여 오로지 사회혼만이 법적 효력을 지닌 것으로 규정하였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1566년 트리엔트공의회 칙령으로 사제 앞에서 두 명의 증인과 더불어 거행된 성사혼 이외의 혼인은 무효라고 선언했지만 그 이전의 혼인은 대부분 일종의 사실혼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곧 인류 역사에서 혼인은 법적 규제를 받지 않고 혼인 당사자의 합의만으로도 충분했었다. 그것을 교회가 중세부터 통제해온 것일 뿐이다. 사회혼도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국가가 간섭하는 것으로 인권침해의 요소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사실혼에 뒤지는 제도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선진국에서는 이제 동거 또는 시민결합도 법적으로 성립된 사회혼과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2013년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96년 제정된 연방 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이 "수정헌법 제5조에서 보호되는 인간의 자유를 침범하였기에"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법에서는 동성혼 부부에 대하여 세금, 자녀 상속, 복지 제도 등에 관련된 혜택을 인정하지 않았다. 연방 결혼보호법 3조에서는 "부부"의 개념이 "이성 커플"에만 해당된다고 정의하며 동성혼 부부에게는 이성혼 부부에게 보장되는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위헌으로 판결되면서 "혼인"과 "부부"의 법적 개념을 이성 간의 관계에만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판결은 "미국 대 윈저 사건"(United States vs. Winsor)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2007년 캐나다에서 합법적으로 동성혼을 하고 뉴욕에 거주하던 윈저(Edith Winsor)는 자신의 배우자였던 스파이어(Thea Spyer)가 2009년 사망함에 따라 유산 상속을 하는 과정에서 세금 감면 조치가 결혼보호법을 근거로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게 되자 2011년 뉴욕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2012년 6월 6일 존스(Barbara S. Jones) 판사는 결혼보호법 제3조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고 2012년 10월 18일 순회 항소심에서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다. 이에 미국 검찰이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결국 법은 최종적으로 윈저의 권리를 보장하는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때 연방 대법원은 이 사건과는 별도로 "홀링스워츠 대 페리 사건"(Hollingsworth vs. Perry)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가 추진하고 있는 동성혼 금지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이로써 캘리포니아 주는 미국에서 동성혼을 허용하는 13번째 주가 되었다. 이러한 판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시대정신은 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자유와 권리를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고 이를 법적, 제도적 장치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평등과 차별 금지가 사회 정의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가운데 동성애자를 포함한 모든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은 불의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정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동성혼 가정의 증가가 이러한 시대정신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회적으로 21세기에 들어와서 세속적 가정의 정의가 더 이상 한 남성과 한 여성의 배타적인 평생 공동 운명체만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남녀의 평균 수명의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가정이 반드시 후손을 보는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부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의도적으로 자손을 낳지 않고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지배할" 이유에 대한 이해와, 그 번성과 지배의 정당성에 대한 이해에도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20세기 이후 환경 문제가 대두되고 인구의 증가가 가져오는 파국적인 미래의 예측으로 인간이 온 땅에 퍼져서 지구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땅에 대한 지배가 인간의 탐욕의 무한 충족이라는 그릇된 목적을 위한 무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물질적 욕망의 무한 충족을 위한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이성적 성찰의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친환경"이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4. 나가는 말
역사적으로 교회와 그 구성원뿐 아니라 많은 인간 공동체와 개인들도 사회적 질서를 선호하도록 교육되었다. 심지어 일부 종교와 사회 제도에서 무질서는 악으로 단죄되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국가적, 국제적 제도들도 따지고 보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존속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질서를 어기는 구성원에게는 제재가 가해진다. 질서를 파괴하는 경우에는 형벌이 가해지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무질서는 사회적 비용의 발생을 초래하고 그 부담은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질서보다는 질서를 선호한다. 무질서에 따른 사회적 비용 발생의 영향이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서 유지를 위하여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일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곧 이미 주어진 제도에 순응하면서 사회적인 것, 전체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 사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순응과 복종이 윤리적 덕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자연권의 수준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힘을 얻으면서 전통적인 질서관이 흔들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종전에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하여 개인이 기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기여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종래의 규범 위주의 개인윤리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적 제도 자체의 윤리성을 따지는 사회윤리의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다. 곧 종래에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윤리성을 따졌다면 이제는 그 사회 자체의 제도의 정당성과 윤리성을 따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윤리적 시각에도 변화가 요청되고 있다. 윤리적인 문제가 개인의 결단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이제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었다. 물론 철저한 금욕과 정신 수련을 통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진리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금욕과 정신 수련을 요구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이다. 참다운 질서는 무질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질서조차도 포섭하여 더 큰 질서 안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 전개된 자연계는 오히려 질서에서 무질서로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도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가 증가하여 결국 폭발해 버리고 그에 따라 지구와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도 소멸되어 다른 에너지의 형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태양이 약 50억 년 후에 완전히 소멸할 것으로 보인다. 태양과 지구의 운명이 이러하다면 인간의 운명도 적어도 물리학의 차원에서는 이미 “과학적으로” 예정된 것이다. 인간이 관측한 우주의 운명도 결국은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무질서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계의 현상을 인간의 세계에 적용하는 데에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먼 과거를 돌아볼 때에 인간 사회가 질서 있고, 평화롭고,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유토피아(utopia), 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을 꿈꾸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비록 지구의 파괴적인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러한 유토피아가 이 지상에 결코 존재할 수 없지만, 어제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행복한 곳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