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예수의 실체를 보아야 한다.
‘인간 예수’라는 표현은 당연하다. 이른바 정통 교리에서도 예수는 다른 모든 인간과 다름없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대소변을 본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 존재로 이해한다. 인간인 마리아의 태중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정상적으로 출산한 인간의 육신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예수를 만난 유대인들은 물론 그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도 그의 신격을 확신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그의 부활 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그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이른바 ‘기독론’이라고도 하는 ‘예수론’(Christology)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많은 분파는 근본적으로 바로 이 예수론의 교리를 둘러싼 갈등에서 생겨났다.
과연 예수는 순전히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부처처럼 득도한 거룩한 존재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을 가장한 완전히 신성한 존재였는가? 그도 아니면 둘 다인가? 그 어느 설명이 예수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지는 학문적으로 논증이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누가 신의 아들, 그것도 외아들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예수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초대교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논의에서 잘못하다가는 교주의 신성성이 손상되는 것은 여느 종교에서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성경에도 예수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나온다.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주가 흔히 그에게 따라다닌 호칭들이다.
먼저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유대교 경전에서 나온 이 단어는 원래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만이 신의 후손이고 나머지 민족들은 다 ‘짐승’으로 여겼다. 원래 히브리어로 ‘벤 아담’(בן–אדם)인 이 단어를 적확히 번역하면 ‘아담의 후손’이다. 신이 창조한 아담의 순수 혈통을 지닌 민족은 오로지 유대인이니 자기들을 이리 부른 셈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들’은 유대교의 신, 곧 야훼와의 관계에서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실 아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흙을 의미하는 ‘아다마’(אדמה)에서 연유했다. 이는 신이 인간을 ‘흙의 먼지’로 빚어 만들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조어이다. 곧 영원한 신에 대비하여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결국 흙의 먼지로 다시 돌아갈 운명에 처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어가 <다니엘서>에서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게 된다. 곧 이 ‘사람의 아들’이 종말론적인 해석에 사용되는 것이다. 당시 이민족의 억압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쓰인 이 예언서는 이민족을 모두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최후의 날에 신이 ‘사람을 닮은 이’(כבר אנש)에게 세상의 통치를 맡길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아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단어를 둘러싸고 유대교 자체에서도 커다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단어는 기독교에 들어와서 종말과 세상 통치와 맞물리면서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 해석되었다. 사실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다윗의 동의어였음에도 말이다.
원래 그리스어로 쓰인 복음서들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예수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사실 이 단어가 ‘벤 아담’(בן–אדם)을 직역한 것이고 예수가 실제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독일의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과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은 이 단어를 복음사가들이 의도적으로 추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경건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은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의도를 가지고 직접 사용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여러모로 매우 불완전한 문서이기에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유일무이한 확고한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어로 된 성경에 나오는 ‘신의 아들들’(בני האלהים)이라는 표현도 야훼가 창조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사람의 아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 단어의 의미대로 번역한다면 신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러나 신의 아들은 유대교나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아니다. 중국에서도 왕을 ‘하늘의 아들’(天子)로 지칭했고 이집트의 파라오도 처음에는 신의 아들로 불렸다. 그리고 한때는 아예 지상에 강림한 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또다시 해석이 변하더니 이제는 신과 그의 아들인 파라오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더니 다시 또 한 번 더 바뀌어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왕은 신의 뜻을 지상에 펼치는 사제가 된다. 마치 조선이 쿠데타로 이룬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도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아다닌 전설을 만들 필요와 마찬가지 아니었나? 신화는 어느 권력에나 붙어 다니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헤라클레스와 같은 많은 영웅이 신의 아들로 묘사된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예 암살당한 시저를 신성한 율리우스(Divus Iulius), 곧 신으로 지칭한다. 그러더니 그의 양자이자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신성한 율리우스의 아들’(divi Iuli filius)이라고 하다가 아예 ‘신의 아들’(divi filius)로 불러 버린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무렵이 예수의 생존 시기와 겹치는 관계로 이 호칭을 기독교 신자들이 가져다 쓴 것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엄청난 권력을 지닌 제국의 황제가 바로 신의 아들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러니 지상이 아닌 하늘 왕국의 왕자라면 당연히 신의 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의 문제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신의 아들’(υἱος θεοῦ)이라는 호칭이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교의 야훼신을 부르면서 특별히 ‘아빠’(Ἀββά)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신과 자신의 부자 관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것이 그를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자로 몰아가는 빌미를 제공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신의 아들들’(υἱοὶ θεοῦ)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도 지칭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신의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로 정의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된 신의 아들은 유대교 전통에서 말하는 ‘장자’(בְּכוֹ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개념으로 원래 유대인들을 지칭하던 말이다. 결국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커다란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유대인인 예수가 그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단어가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유대인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만이 신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협소한 배타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기독교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가 다 망해 버렸으니 그렇게 말을 해도 무방했다. 아무도 이런 저작권 침해를 걸로 넘어질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예수에게 가장 흔히 붙어 다니는 ‘메시아’ 히브리어로는 ‘마쉬하’(מָשִׁיחַ)라는 호칭은 어떤가? 이는 원래 히브리어로 왕이나 고위 사제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직역하면 머리에 기름을 바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유대교에서의 왕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는 다른 민족의 왕도 메시아로 지칭한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특히 다윗과 솔로몬을 즐겨 메시아로 지칭한다. 이 두 왕이야말로 오랜 분열과 침략으로 얼룩진 역사의 질곡으로 신음해온 유대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그 역사에서 전성기를 이루어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를 ‘다윗의 아들’(υἱοῦ Δαυὶδ)이라고도 부른다. 신의 외아들인 예수와 인간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인 다윗의 혈연관계를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임에도 말이다.
끝으로 ‘주’(κύριος)도 살펴보자. 이 역시 유대교에서 이미 사용하던 단어이다. 주로 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히브리어로 ‘나의 주님’(אֲדֹנָי)은 신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를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Ἡ μετάφρασις τῶν Ἑβδομήκοντα)에서 ‘키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하면서 이 단어에 절대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독교가 그대로 넘겨받은 셈이다. 원래 그리스어에서 ‘키리오스’는 한 집안의 우두머리인 가장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다. 그러나 여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오로지 예수에게만 붙는 호칭으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를 신성화하는 데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골몰했을까? 사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신격화가 노골화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의 여러 서간에서 본격적으로 예수의 신격화가 이루어진다. 곧 예수가 죽고 나서 수십 년이 지나 예수에 대한 전설만 남은 상황에서 교회가 설립되고 교계제도가 이루어지면서 예수의 언행록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해석이 중심이 되는 역사가 전개된 셈이다. 그것도 예수를 본적도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배운 적도 없는, 그래서 결코 직제자가 전혀 아닌 바울을 통해서 말이다. 이후 성경은 기독교 신자들이 직접 읽고 이해하는 글이 아니라 ‘권위 있는’ 성직자가 중간에 서서 신의 뜻을 ‘독점적 해석’하여 무지몽매한 신자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는 구조가 고착되어 수천 년이 흐르게 되었다. 기독교가 극도로 혐오하는 이교도들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구조에서 흔한 신의 신탁을 해설하여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무당의 역할을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해낸 것이다. 신과의 직접 교감을 강조한 예수가 본다면 무척 아쉬워했을 일이지만 이는 다른 대부분의 종교가 걷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 길에서 기독교는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종교는 반드시 교주와 제도와 성직자 그리고 교리를 필수로 갖추어야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 기독교는 특히 바울의 활동으로 예수를 신적 존재, 더 나아가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 있던 ‘인간적’ 면모는 완전히 무시해 버리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 메시아가 유대교 전통에서 본다면 기껏해야 지상의 왕이나 제사장이었는데 그 제사장의 자리에서 예수 공동체가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키고 성직자 계층이 자신을 신의 대리자로 만들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예수와 나머지 인간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신부나 목사의 직분을 지닌 일종의 제사장을 반드시 거치도록 하는 제도를 공고화한 셈이다. 이는 예수가 통렬하게 비판한 그 당시 유대교의 사제단과 바리사이들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종교가 숙명적으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교주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교리와 제도밖에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교리와 제도는 성직자들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의 배타적 권위는 물론 그들이 교주로 삼은 신적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러한 패러다임의 정당성은 성직자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것이니 일종의 자가당착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신적 정당성을 검증할 길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교회 권위의 인정 없이 자신을 성직자의 반열에 올린 자의 원조는 바로 바울이다. 그는 예수가 임명한 적도 없는데도 자신을 사도로 불렀다. 그런데 예수가 직접 임명하고 예수와 더불어 최대 3년 동안 함께 고생한 12명의 사도들과 맞먹는 권위를 지녔다고 스스로 공언하고 행세하는 이런 선례를 남긴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베드로와 더불어 로마 교회를 세운 선구자로 성인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가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직접 바울에게 말을 하고 직접 사명을 부여했다는 개인적 체험에 있다. 바울에게 예수는 지상을 거니는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환시를 통해 자기 눈을 멀게 했다가 다시 보게도 할 수 있는 신적 존재였다. 이렇게 바울을 통해 이제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전능한 신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에 대한 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흐를수록 예수는 더욱 신성한 존재로 해석되었다.
그렇게 이천 년 가까이 기독교는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제거하고 신격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이 결국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 성직자들이 예수를 믿지만, 예수처럼 살지 않는 변명거리를 만들게 되었다. 어차피 예수는 신인데 그의 모범을 천한 인간이 어찌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말이다. 이런 좋은 변명거리가 어디 더 있겠는가?
사실 성경에서 예수는 자신을 숭배하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이 한 행동을 따라 하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예수를 신격화해 버리고 그저 믿고 기도만 하는 것이 편했던 셈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예수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마치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감추고 신적인 요소만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참다운 신앙인 것처럼 호도하는 ‘타락한’ 성직자 세력의 출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작 그 ‘잿밥’인 권력과 돈은 그 성직자들이 독점적으로 차지해 버리면서 말이다. 그들은 마치 영혼을 메피스토에게 팔아넘긴 파우스트 박사처럼 헛된 꿈을 꾸는 것 같다. 사실 예수는 평생 ‘잿밥’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가 대적할 상대는 물질이 아니라 악한 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에 관한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