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족보 없는 사람이었다.
기독교 교리상으로 예수는 신의 성령을 통해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탄생한 신의 독생자다. 본질적으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한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에는 매우 긴 예수의 족보가 나와 있다.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라함과 아담에까지 이르고 있다. 도대체 신의 독생자에게 이런 족보가 왜 필요했을까? 더구나 복음서 가운데 19세기까지 가장 으뜸가는 권위를 보이던 <마태복음>은 아예 예수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그리스 원어로는 다음과 같다.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처음부터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하면서 분명히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정작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양부인 요셉이다. 그리고 이 족보에는 오류가 있다.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까지 14대라고 했지만, 사람 숫자를 자세히 세어 보면 13명이다. 한 명이 빠졌다. 그럼에도 특정 숫자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 14대를 더해 모두 52대로 이어지는 족보라는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이와 나란히<루카복음>에도 족보가 나온다. 여기에서는 <마태복음>과는 반대로 예수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조상을 찾아 올라간다. 그리고 결국 아담에 이르는데, 그 결론이 놀랍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루카 3,38)
그리스어 원어로는 다음과 같다.
ὢν υἱός ... Ἀδὰμ τοῦ θεοῦ.
23절에서 시작한 “...의 아들”(ὢν υἱός)이라는 단어가 그 족보의 마지막 문장까지 걸린다. 아담이 신의 아들인데 신을 제외하면 예수까지 76대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족보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예 신까지 포함하여 77대로 보고 이를 죄를 사한다는 의미의 상징적 숫자를 사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그 근거로 든 것이 <마태복음>과 창세기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
그러나 이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만이 아니라 많은 교부의 자의적 해석이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훨씬 선배인 이레네오(Εἰρηναῖος, 130~202)의 경우는 이 족보에서 72대 만을 계산했다. 그의 생각에 77은 별 의미가 없는 숫자였다.
그래서 사실상 숫자놀음은 의미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셉까지의 족보가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맞는지를 검증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검증은 불가능하다. 그저 <성경>에 나온 두 족보가 서로 다른 것만이 사실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온 것이 맞는지 아니면 <루카복음>에 나온 것이 맞는지는 아무도 확신하고 말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예수는 족보가 필요 없는 존재인데 이토록 장황한 족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마태 공동체와 루카 공동체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이러한 상이한 족보가 나온 이유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첫째 근거는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른 경우가 많았다. 다윗의 후손은 다윗과 같이 유대민족을 다시 영광스러운 과거의 강대한 왕국의 신민으로 만들어줄 존재를 말한다. 당시 유대민족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남부의 작은 유대 왕국을 유지하되 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살면서 신의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상태였다. 이러한 자존감을 회복할 뿐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정신이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치유하고, 먹을 것을 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 몇 개를 인용해 본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태 9,27)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마태 12,23)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태 15,22)
그런데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태 20,30)
군중이 그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주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태 20,31)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또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불쾌해하며, 예수님께 “저 아이들이 무어라고 하는지 듣고 있소?”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당신께서는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을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 21,15-16)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
“너희는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찌 된 일이냐?(마태 22,42)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메시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태 22,45)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마르 10,47-48)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5-37)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루카 18,38)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9)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말한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루카 20,41-44)
여기에서 나오는 다윗의 자손은 성경 원문에 모두 ‘후이우스 다비드’(υἱὸς Δαυίδ)로 표현되었다. 문자 그대로 다윗의 아들, 곧 그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이런 호칭에 대하여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그를 다윗의 아들로 부르며 도움을 청하는 불구자나 병자에게는 호의를 베풀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논쟁에서는 메시아, 곧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내용은 유대인 출신이 주를 이루던 기독교 공동체인 <마태복음>의 무리만이 아니라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이러한 예수의 이중적 태도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다윗은 누구인가? 다윗은 유대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일생은 윤리 도덕적으로 그리 모범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총애하던 부하 장수인 우리야를 계략으로 죽이고 결국 그의 아내 밧세바와 통정하여 낳은 아들인 솔로몬을 후계자로 옹립한 것은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직 우리야가 살아 있을 때 간통으로 밧세바가 임신하게 되자 그 사실을 감추고자 전장에 있던 우리아를 소환하여 밧세바와 성관계를 가질 것을 독촉하는 간계까지 부린 것이 다윗이다.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도 우리야의 것으로 여기도록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우리야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 전쟁 중에는 아내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결국 그를 위험한 최전선에 내보내 죽게 만든다. 그 후에 나온 다윗과 밧세바의 첫아들은 신의 징벌로 병사하고 둘째로 낳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그런데 밧세바는 다윗에게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동의하자 다윗의 삼남인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당했다.
이처럼 다윗 시절에 유대민족이 제대로 된 왕국을 수립한 것은 맞지만 다윗이 메시아라는 칭호에 맞는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없는 성군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존재이다. 그런데도 굳이 예수를 다윗의 아들로 부르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다윗이 유대인들에게 신화적인 존재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예수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지식이 탁월한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자신의 지위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곧 다윗은 유대민족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의 선조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은 신의 아들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인들의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으니 예수는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문자 그대로 예수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그렇게 한 이유는 기독교 신학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곧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갚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삼으려고 유대인의 신앙심을 건드린 것으로 본 것이다. 유대인의 사제와 바리사이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신성모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가르침을 주는 예수의 모습은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신성모독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자신이 신적 메시아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까? 사실 예수는 자기 입으로 ‘나는 메시아다’라고 말한 적은 없다. 베드로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했는데도 오히려 예수는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예수와 베드로의 메시아에 관한 대화는 아래 세 버전으로 나온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13-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27-30)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18-21)
세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약간 다르게 표현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코복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복음>
<마르코복음>이 원본이라고 전제하면 루카는 예수를 신이 지명한 메시아로, 그리고 마태는 더 나아가 신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메시아로 지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메시아’ 정확히는 ‘마쉬하’(מָשִׁיחַ)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Χριστός)다. 그리고 이를 다시 라틴어로 음역한 것이 그리스도(Christus)이다. 유대교에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한 메시아가 동시에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라는 논리를 전개한 기독교가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디아스포라 상황에 있던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논리를 수립하기 위해서 결국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족보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자신이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신의 아들, 그것도 외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는 신성불가침한 진리가 되었다. 예수만이 신의 독생자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입을 통해 이를 진리로 확인해야 했다. 그러한 지위에 있는 예수는 이제 온 세상의 악도 제압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는 신성한 존재이지만 다윗과 무관하게 분명히 보통의 생물학적 뼈와 살을 지닌 인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인간인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