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은 실체로 존재하고 인간의 정을 지배한다.
예수의 공생활 시작의 도식은 공관복음서에 나온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 단식하고 유혹자(마태 4,1-11) 또는 악마(마르 1,14-15)의 유혹을 물리친 다음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도 각각 다른 해석이 나온다. 특히 <루카복음>에서는 예수가 정확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아예 알 수가 없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13-17)
이때는 이미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였다. 그리고 그 당시 온 백성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다른 두 복음에 나온 것을 취하여 요한에게 예수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하였다. 그래야 더 이상 논란이 없을 것이니 말이다.
광야에서의 유혹도 마찬가지이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는 세례를 받고 바로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는 말만 나온다. 그 유혹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 12-13)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다. 매우 간결하다. 사실 마르코는 처음부터 예수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적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예수가 공식적으로 활동한 것을 묘사하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상세한 예수의 족보로 시작하는 마태나 테오필로스에게 보고서를 쓰는 루카와는 달리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담백하게 정리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 그의 복음서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특히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한 언행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데 관심이 컸다.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찌 자랐는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메시지 자체였으니 말이다. 특히 <마르코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복음서를 바탕으로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이 저술된 것이기에 더 원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간결하게 묘사하기에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은 예수와 악마의 대결이라는 좀 더 풍요로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 4,1-11)
여기에서 <마태복음> 사가가 악마라고 지칭한 존재를 예수는 사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악마는 <구약성경> 내용을 매우 자세히 알면서 예수와 경전 해석 논쟁을 벌이는 매우 지적인 존재였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13)
이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러니 분명히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베껴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성경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으로는 마태와 루카는 <마르코복음>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Q문서>(Quelle)를 참조로 각자의 복음서를 저술한 것으로 본다. <마르코복음>의 내용이 너무 부실하여 신앙심 깊은 두 공동체에서 이야기를 더 다듬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를 악마와 대립시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확립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악마와 사탄, 그리고 악령은 예수의 공생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예수는 베드로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예언하고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베드로와 예수의 화해 장면을 연출하지만, 이는 나중에 익명의 저자가 추가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 만큼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는 애증이 교차하는 특이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예수는 베드로를 사탄으로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1-33)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2)
<마르코복음>이 원본이라고 볼 때 <마태복음>은 거기에 약간 살을 더 붙인 것이다. 그런데 <루카복음>은 아예 베드로 이야기는 빼버렸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은 그리스어 원어로는 ‘사타나스’(Σατανᾶς)이다. 사실 영어권에서는 사탄이 악마(devil)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원래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악마를 의미하는 존재가 없다. 이는 마치 기독교가 만들어 낸 ‘원죄’(original sin)라는 개념이 유대교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에서는 악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사탄은 그저 인간에 맞서는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욥기>에 악마는 욥을 놓고 신과 내기하는 실체적 존재로 나오기는 한다. 그리고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도 악마는 인간을 유혹하는 실체적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유대교의 악마는 기독교의 악마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해석된다.
<신약성경>에서 사탄과 ‘디아블로스’(διάβολος), 그리고 흔히 ‘베엘제불’로 불리는 ‘베엘제붑’(בַּעַל-זְבוּב)은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전통에 따라 이들의 관계는 다른 것으로 해석된다. 특정 교파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헬렐’(הֵילֵל)을 번역한 루시퍼(Lucifer)까지 등장시켜 베엘제불이 루시퍼를 위한 일종의 총사령관이 되어 악마(evil)에 맞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전체적으로 유대교의 긴 역사에서, 그리고 유대교를 이어받은 기독교에서 악한 존재들은 모두 타락한 천사라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악을 직접 창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베엘제불은 <신약성경>에서도 마귀들의 수장이며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어느 고을이나 집안도 서로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한다. 사탄이 사탄을 내쫓으면 서로 갈라선 것이다. 그러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제자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을 수 있겠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22-32)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0-30)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14-23)
여기에서는 사탄(Σατανᾶς), 마귀(δαιμόνιον), 베엘제불(Βεελζεβούλ)이 번갈아 나온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맞서는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ς)도 등장한다. 그리고 베엘제불이 마귀들의 우두머리라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다. 고유명사인 사탄과 베엘제불과 달리 마귀는 일반 복수 명사로 처리된 것을 보아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양한 마귀, 예를 들어 ‘벙어리 마귀’(δαιμόνιον [,καὶ αὐτὸ ἦν] κωφόν)와 같이 특정 기능과 관련된 마귀를 상정한 것이다. 이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예수 또한 이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악령도 <신약성경>에 등장한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여기에 나오는 ‘악령’(πνεῦμα πονηρός)은 오늘날 생각하는 귀신이나 악마라기보다는 인간이 사는 데 어려움(πονηρός)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존재(πνεῦμα)이다. 실제로는 정신적으로 병이 든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악령은 대개 위에서 언급한 ‘마귀’(δαίμων)로 인식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사용한 것이다. 원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이 ‘다이몬’(δαίμων)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덕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전혀 반대되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변하였다. 이런 개념의 변화는 유대교에서도 이미 있었다. ‘바알’(בַּעַל, Βάαλ)은 원래 ‘주인’, ‘주님’을 의미하는 고대 가나안 지역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이를 초기에는 자신의 신인 ‘야훼’(יהוה), 곧 ‘나의 주님’(אֲדֹנָי)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하였다. 유대교에서 야훼는 바알 말고도 ‘엘’(אֵל), ‘엘로힘’(אֱלֹהִים), ‘엘 샤다이’(אֵל שַׁדַּי), ‘제바홋’(צבאות)과 같이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바알신과 야훼신이 대립하는 갈등 구조 속에서 타민족의 신을 부정적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알을 베엘제불과 관련 있는 악마적 존재로 격하시켰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유일신교로 발전한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 이는 당연했다. 특히 자신의 유일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교리의 차원에서 다른 종교의 다른 신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존재, 더 나아가 악마적인 존재로 격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기독교가 오랫동안 종교 간의 대화와 조화를 거부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자기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독교 울타리 밖의 사상만이 아니라 세속 세계 자체를 악마화한 기독교는 중세 유럽의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를 모두 배타적으로 장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 국가와 문화가 타 종교와 문화, 특히 이슬람 문화와의 대결에서 결코 우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타 종교와 문화만이 아니라 유럽 자체 내에서 생성된 새로운 지식과 문화도 적대적 세력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안녕에 방해되는 것을 ‘악마화’(Verteufelung)하는 것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특히 개교회 중심의 개신교에서는 개별 교회 자체의 생존을 위하여 같은 기독교 교단끼리도 이른바 이단 논쟁으로 상대방을 악마로 묘사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21세기에 들어와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독교의 배타성의 근원적인 이유는 기독교 초기의 태도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 있는 것이기에 현대 사회에 드러난 기독교 교회의 왜곡으로 비난할 수 없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의 배타성과 타 종교와 사상에 대한 적대감은 기독교의 생존 방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배타성과 적대적 태도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생존해 올 수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런 식으로 기독교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독점하는 동안 교회가 인류 문명의 다양한 발전의 동력을 억제하는 결정적 잘못을 저질렀다. 이른바 ‘암흑시대’를 교회가 조장한 것이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마치 독재정치가 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독재가 인류의 발전 자체를 억압하는 불행의 역사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계속 기독교 역사에서 역동적인 힘을 발휘한 이유는 바로 그가 약속한 사랑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