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단지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다.
예수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이 사랑한 것처럼 그대로 자신의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토록 사랑한 제자들은 예수가 죽기도 전에 모두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도망가 버렸다. 오로지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이 그의 수난과 임종에 함께 하였다. 결국 예수는 짝사랑만을 하고 만 것인가?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는 12명의 사도에게조차도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직접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자기가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에게는 사탄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예수가 가장 사랑한다고 알려진 요한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기독교 신자는 모두 형제자매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정작 예수가 말한 사랑이 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어찌 된 일일까? 예수의 사랑은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가 아닌가?
성경 가운데 사랑을 자주 언급한 것은 <요한복음>과 바울의 서간들이다. 그런데 정작 복음서 가운데 좀 더 ‘오리지널 텍스트’에 가까운 공관복음에서는 사랑에 대한 장광설이 안 나온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와 베드로의 사랑에 대한 매우 감동적인 대화는 <요한복음>의 원저자가 아니라 후일 다른 사람이 가필한 내용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은 하나의 문서의 완전한 결론 구절이다. <신약성경> 원어인 그리스어로 보면 이 사실이 매우 명확하다.
Πολλὰ μὲν οὖν καὶ ἄλλα σημεῖ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ἐνώπιον τῶν μαθητῶν [αὐτοῦ], ἃ οὐκ ἔστιν γεγραμμένα ἐν τῷ βιβλίῳ τούτῳ: ταῦτα δὲ γέγραπται ἵνα πιστεύ[ς]ητε ὅτι Ἰησοῦς ἐστιν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καὶ ἵνα πιστεύοντες ζωὴν ἔχητε ἐν τῷ ὀνόματι αὐτοῦ.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예수는 (그 밖에도) 많은 다른 [기적적인] 표징을 실행하였다. 그런데 이 책에 그것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의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을 지니도록 한 것이다.”(요한 20,30-31)
그런데 이렇게 책이 마무리된 다음에 느닷없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부록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다시 갈릴리호숫가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기에는 예수가 살아 있을 때처럼 ‘갈릴리호수’가 아니라 서기 1세기부터 사용한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명칭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1절에서는 아예 ‘갈릴리 (곧) 티베리아스 호수’(θαλάσσης τῆς Γαλιλαίας τῆς Τιβεριάδος)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온다.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소리다. 그러나 21장에서는 아예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단어만 사용한다. 원래의 명칭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시기에 작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장 1절을 보자
Μετὰ ταῦτα ἐφανέρωσεν ἑαυτὸν πάλιν ὁ Ἰησοῦς τοῖς μαθηταῖς ἐπὶ τῆς θαλάσσης τῆς Τιβεριάδος.
직접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냈다.(요한 21,1)
문장의 시작이 ‘그러고 나서’(Μετὰ ταῦτα)인데 이는 앞 문장과 논리적 연결이 전혀 안 되는 시작이다. 뭔가 새로 첨부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렇게 무리하여서라도 이 장을 첨부한 사람은 예수와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 구체적으로 기독교 교회의 신자들이 그의 권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싶었던 셈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베드로는 제1대 교황이다. 지금의 교황의 권위는 모두 그의 권위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요한복음>에 이 장을 삽입한 사람은 이러한 교황의 이른바 교도권을 예수가 직접 수여했다는 것을 성경의 권위로 확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을 삽입한 시기가 로마 교회의 주교가 교황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고 난 다음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니 서기 100년 이후에 <요한복음>에 이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예수는 153마리의 생선을 잡아 기뻐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은 다음 갑자기 베드로와 사랑에 관한 긴밀한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사랑을 지칭하며 서로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 예수의 ‘나를 사랑해?’라는 의미의 ‘아가파스 메?’(ἀγαπᾷς με)라는 두 차례의 질문에 베드로는 두 번 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필로 세.’(φιλῶ σε)라는 말로 답을 한다. 그러다가 예수가 세 번째로는 ‘나를 사랑해?’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번에는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를 그대로 활용하여 ‘필레이스 메?’(φιλεῖς με)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변함없이 ‘필로 세.’(φιλῶ σε)라고 답을 한다. 그것도 펑펑 울면서 말이다.
흔히 철학에서 사랑에는 에로스(ερως), 필로스(φίλος), 아가페( αγάπη)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에로스는 육체적 욕망, 필로스는 지적 사랑, 아가페는 신의 인간에 대한 가장 고귀한 사랑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웃기는 소리이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언어의 유희’(Wortspiel)라고 한다.
고대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 그리고 로마인들은 이런 말장난에 매우 능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이런 말장난에 넘어가 무슨 심오한 뜻이나 있는 것처럼 많은 주석과 해석을 달곤 하였다. 따지고 본다면 원래는 에로스만 있었다. 플라톤의 저서 <심포지온>(Συμπόσιον)에서 인간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 곧 사람을 에로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에로스는 아가페와는 달리 육욕적인 사랑을 지칭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 주워들은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 나오는 153마리의 생선이라는 표현을 두고도 많은 신학자가 고민했다. 그래서 별별 조합을 다 만들어 해석을 시도하였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다 합치면 숫자 153이 된다든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를 다 더하면 153이 된다는 식이다. 더 나아가 그물이라는 그리스어 단어 ‘딕투온’(τὸ δίκτυον)을 그리스 숫자로 표기하면 153의 8배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다 우스운 말이다. 그저 그 당시 세어보니 우연히 153마리였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신앙이 독단적 도그마가 되고 이성을 마비시키게 된다. 그러니 <성경>도 건전하고 합리적인 상식으로 접근해야 오류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153마리면 기적이고 152마리면 기적이 아닌가? 그리고 151마리면 절망해야 하나? 답답한 노릇이다. 지엽말단적인 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예수 이야기의 본질을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짓이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예수의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개념 정의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가 사랑의 행위를 하기 전에 반드시 그 자신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초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이다.
이 단어는 공관복음서에만 나오고 <요한복음>에는 안 나온다. 성경에 나오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런데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의 <마태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미제레오’(misereo)로 <루카복음>에서는 ‘미제리코르디아’(misericordia)로 번역된다. 미제레오는 타인에 대하여 동정(compassion)이나 연민(pity)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misericordia’도 ‘compassion’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그리스어 ‘스플랑그니초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에 좀 더 근접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compassion’의 라틴어 어원인 ‘compassio’가 ‘더불어’(con)와 ‘고통’(passio)의 합성어이기에 그렇다. 이 단어를 직역해 본다면 고통을 당하는 다른 사람과 함께 그 고통을 똑같이 느낀다는 의미이다.
‘스플랑그니초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원래 그리스어로 내장을 의미하는 ‘스플랑그논’(σπλαγνον)을 동사화한 것으로 직역하면 ‘애간장이 끊어지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한글 성경에서 흔히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로 번역하는 데 사실 이는 오역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번역하면 높은 자, 잘난 자, 더 많이 가진 자가 낮은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에게 적선하는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자기 형제자매의 고통을 바로 자신의 고통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닌 예수의 애간장이 끊어질 것 같아서 그들의 고통을 즉시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예수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껴야만 하기에 그들을 치유하였다. 물론 이는 이기주의와 거리가 멀다. 사랑 자체의 존재인 예수에게 이기주의가 들어설 틈은 전혀 없다.
결국 예수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자신의 지상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타인을 돕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사나이였다. 이러한 예수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한 공관복음서의 필자들은 차라리 그리스 철학적 표현인 ‘심파테이아’(σῠμπᾰ́θειᾰ), 곧 ‘함께’(σῠν) ‘고통’(πᾰ́θος)을 느낀다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확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굳이 ‘애간장’(σπλαγνον)이 끊어진다는 표현을 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마음이 배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애간장이 끊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는 소리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프면 배가 아프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머리로만, 그리고 말로만 남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위선과 허영에 물들어 말로만 그리고 예식으로만 신앙을 과시할 뿐 참다운 신앙, 곧 타인을 위한 선행은 무시하였다.
바로 그러한 종교적 타락이 예수의 눈에는 견딜 수 없었기에 일종의 유대교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에 막혀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 곧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정리하자면 예수가 말한 사랑은 인간의 배에서 시작되어 심장으로 올라가고 심장의 피가 고동쳐서 손발이 저절로 선행을 위해 움직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런 사랑을 하지 않으면 내 애간장이 끊어져 결국 내가 먼저 죽게 된다. 그러한 행위를 실행한 다음에야 비로소 머리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결과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성경 이야기를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을 먼저 한다. 그리고 배운 지식을 입으로 뱉어내는 것까지는 곧잘 한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심장을 움직이고 궁극적으로 배를 움직이는 데에는 거의 다 실패한다.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마치 혈액이 역류해 버려서 순환이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는 원래의 어려운 길을 포기하고 기형적인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곧 예수가 직접 행위로 보여 준 참사랑의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그저 예수를 숭배하고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빌기로 작정한다. 그러고는 결국 애간장이 끊어질 만한 일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다가 예수처럼 고통스럽게 죽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예수가 분명히 당신처럼 살라고 당부했는데 정작 예수처럼 사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무슨 궤변인가?
21세기에 들어와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것이 곧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살아가기에 예수가 말한 애간장이 끊어지는 일은 더욱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이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는 바로 그런 이기적 생존본능을 뛰어넘는 사랑이야말로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자기 말을 믿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믿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한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이리 복잡하고 어려워야 하는가? 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그토록 긴 간극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에 대한 인간, 특히 교회의 태도 변화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예수가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은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따라 해도 무탈한 정도가 아니라 천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 하였다.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빌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예수에게 빌기만 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근본적으로 예수가 인간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은 셈이다. 예수는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약속하지 않았다. 부활 이후의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지복직관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자신이 먼저 부활해 보여 주었다. 이 부활을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