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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육신으로도 부활했나?

부활은 사실이고 교리는 창작이다.

by Francis Lee

기독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실 사랑보다는 부활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지상에 머물다가 결국 ‘하늘’로 올라갔다. 이는 기독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에 모든 복음서에는 예수 부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복음서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도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각 복음사가의 공동체가 서로 긴밀한 유대를 맺지 않으면서 각자의 신앙을 실천했다는 사실의 간접 증거도 된다. 이미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는 장면에서 복음서마다 서로 다르다. 먼저 <마태복음>을 보자.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20)

여기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있는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다.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학자마다 의견이 다양하다. 문제는 이 장면이 여러 이야기가 중첩되어 정리되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천사가 여자들에게 제자들이 갈릴리 지역으로 가면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아예 예수가 직접 나타나 다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임을 여자들에게 알린다. 그리고는 예수의 발을 직접 만지기까지 한다. 제자들보다 앞서 여자들이 예수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1)


여기에서도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이야기가 중첩된다. 여자들이 흰옷을 입은 젊은이로부터 갈릴리로 제자들이 가도록 부탁하는 말을 듣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다. 다만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이후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 가기도 전에 먼저 제자 두 명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2-18)

여자들이 흰옷 입은 젊은이의 이야기를 전했는지 알 수 없는데 제자 두 사람이 다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전했지만, 여전히 불신했다는 말만 나온다. 그러자 아예 예수는 열한 제자, 아마도 사도들을 의미하는 이들 앞에 직접 나타나 그들에게 복음 선포와 세례, 그리고 이적 행위의 실천을 명령한다. 그리고는 바로 승천해 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나가게 하셨다. 아멘. (마르 16,20)

제자들은 갈릴리에 갈 것도 없이 바로 복음 선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갑자기 다시 여자들이 베드로와 동료들에게 흰옷 입은 젊은이가 한 말을 이제야 전달한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이미 말을 전한 다음인데 또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제자들은 복음 선포 사명을 실천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있다. 여러 이야기가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나열된 셈이다.

사실 이러한 혼란은 모두 복음사가가 자신이 모은 여러 자료를 편집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마르코복음>은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에 기초 자료가 된 책이다. 그런 근원적인 자료가 되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마르코복음> 자체도 여러 자료를 취합 정리한 것이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의 자료가 되는 문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약성경의 내용의 27%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루카로 알려진 저자가 썼다고 전해지는 <루카복음>에서는 이러한 <마르코복음>을 바탕으로 예수의 부활에 관한 전설적인 매우 긴 이야기가 나온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12)

여기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말고도 여자들이 여러 명의 여자에게 ‘눈부시게 차려 입은 남자’가 예수의 부활을 설명한다. 여자들은 11명의 사도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이 일을 알려준다. 그런데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여기에는 갈릴리 지역으로 가라는 부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어서 <마르코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두 제자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매우 장황하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13-32)

여기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과 영광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예수의 입을 통해서 잘 정리되어 나온다. 게다가 예수는 구약의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 시작하여 자신에 관한 기록을 다 설명해 주었다. 이른바 예형론으로 예수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설명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아무리 예수가 자신의 삶과 사명에 대하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한 이들이다. 그래서 답답했던 예수가 부활 이후, 곧 자신에 관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다시 한번 상세히 그 일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시 한번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자신이 부활한 예수임을 증명해준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33-43)


여기에서는 부활한 예수의 모습에 대하여 매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는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구운 물고기 한 토막도 먹었다. 부활이 영혼만이 아니라 뼈와 살이 있는 육신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부활한 몸은 부활 전의 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고 육체적 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론 이는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다른 복음사가와 달리 루카가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활용하여 정리한 내용으로 보인다. 사실 부활 이후 예수의 몸의 상황에 관하여 이처럼 정확하게 설명한 내용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부활을 논할 때, 특히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난 몸에 관하여 논할 때 결정적 자료가 된다.

이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는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러고 나서 예수의 승천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결국 예수는 베타니아까지 제자들과 함께하고 나서는 승천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승천한다. 어느 복음에서 말하는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승천이 그리 굉장한 사건으로 묘사되지는 않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도 승천은 약간 자세히 묘사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9-11)

흰옷 입은 사람은 기독교에서 흔히 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친절하게 예수의 재림까지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어 원어로 보면 예수는 스스로 하늘로 오른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데리고 간 것으로 해석된다.

καὶ ἐγένετο ἐν τῷ εὐλογεῖν αὐτὸν αὐτοὺς διέστη ἀπ' αὐτῶν καὶ ἀνεφέρετο εἰς τὸν οὐρανόν(루카 24,51)


καὶ ταῦτα εἰπὼν βλεπόντων αὐτῶν ἐπήρθη, καὶ νεφέλη ὑπέλαβεν αὐτὸν ἀπὸ τῶν ὀφθαλμῶν αὐτῶν.(사도 1,9)


루카복음의 ‘아나페로’(ἀναφέρω)든 ‘에파이로’(ἐπαίρω)든 모두 수동적으로 들려져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예수와 마리아의 승천의 구분과는 차이가 난다. 교리적으로는 예수는 스스로 올라갔고 마리아는 신이 끌어올렸다고 구분한다. 신적인 존재는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도 피동적으로 신의 힘으로 끌려 올라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글 번역본은 예수가 스스로 승천한 의미로 나와 있다. 이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성경은 이런 식으로 미묘한 의미 차이를 무시하고 교리에 맞추어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곧 그리스 원어로 읽는 이들에게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다시 부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루카복음>에서는 부활한 날의 묘사가 매우 정밀하다. 부활 이야기의 기본적인 뼈대에 여러 가지 살을 붙였다. 천사가 말했다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는 문장의 ‘살아 계신 분’은 사실 구약에서 흔히 사용되는 살아 있는 자의 신인 ‘야훼’를 상투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여자 세 명 가운데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살로메 대신 요안나가 등장한다.


승천 장소가 예루살렘이나 갈릴리 지방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베타니아라는 점이 특이하다. 베타니아는 예수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자로를 부활시킨 마을이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까지는 약 150km 떨어져 있으니 통상적인 걷는 속도(4km/h)로 하루 8시간을 걸어도 5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다. 그러니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했어도 그 거리를 단숨에 달려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와 전혀 다른 전통의 <요한복음>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매우 장황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요한 공동체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의심 많은 토마스 이야기가 나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5-18)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6-28)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승천하기 전이니 부활한 자기 몸을 만지면 안 된다고 경고한 예수가 토마스에게는 직접 손가락을 상처에 대보라고 한다. 부활 이후 여드레가 지난 시점까지 예수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안 나온다. 그러나 승천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 여드레 동안 예수의 몸은 만져도 되는 상태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게 작성된 문서답게 전해져 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모아서 정리한 다음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추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세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로 다른 복음서와 차이가 난다. 그런데 한사코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지칭된 여자의 정체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정통 교리에서는 여기에 나오는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러나 야보고는 예수의 형제로 이야기된 인물이니 만약 야고보가 예수의 친동생이라면 결국 이 여자가 바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일 개연성도 크다. 사실 부활 이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행적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그를 모시고 살았다는 언급 말고는 없다.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예수의 어머니가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매우 낯설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의 골수에 박힌 가부장제도를 생각해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일단 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을 정리해 보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의 시신을 보관했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처음으로 부활한 자기 모습을 보여 준 상대방은 그가 선택한 사도들도 아니고 어머니 마리아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와 그 밖의 여자들이었다. 최대 3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그들의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였다. <요한복음>에서는 살로메 대신 요안나가 등장한다. 그 이후 길을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난 이야기도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만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후 마침내 사도들을 찾는 예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에 나온다. 그런데도 예수의 승천 이야기는 다시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만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의 승천 이야기가 나오지만, 예수의 사도와 직제자들이나 기독교 신자들, 그리고 온 인류가 예수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명료하게 나오지 않는다. 부활 후의 삶에 대해서도 간략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너희들이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예수의 재림 이야기가 나온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다시 온다는 말은 없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승천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만 한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마르코복음>은 승천을 말한다. 그리고 신의 오른쪽 곧 권능의 자리에 오르는 것까지 이야기한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루카복음>에서는 승천 전에 ‘신이 약속한 존재’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 49-51)

<요한복음>에는 승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요한 21,22-23)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그 당시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의 언행을 보면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1장이 이어진다.

사실 앞에서 말한 대로 <요한복음>의 마지막 21장은 후대의 익명의 인물이 추가한 내용이다. 원래의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시시하다고 여긴 누군가가 예수가 티베리아스호수, 곧 갈릴리호수에 제자들에게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난 이야기를 첨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든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요한복음 21,2)


이 7명 말고 나머지 4명의 제자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추가 설명이 없다. 그리고는 바로 위에서 인용했던 베드로와의 감동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이러한 추가적인 내용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만의 신앙을 나타낸 것이다. 공관복음서에는 안 나오는 내용이라서 그런 특징을 더욱더 강하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복음>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기 약 7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마르코는 예수의 사도에 속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또한 그가 언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바나바와 함께 떠난 소아시아 지방 전도 여행을 중도에 표기하고 돌아오고 만다. 신앙의 열정이 강한 자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는 바울과 싸우고 갈라서게 된 인물이다. 성경에서도 그의 위치는 그리 높은 존경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이름으로 된 가장 오래된 복음서가 전승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루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합치면 <신약성경>의 거의 27%나 되는 분량이다. 기독교 교리의 주요 기반이 <신약성경>임을 감안해 보면 교회 역사에서 그가 기록한 것의 비중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직업이 의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루카 또한 열두사도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루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아마도 루카가 바울과 함께 선교를 다녔음에도 예수에 관한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루카는 마르코보다 20년 후인 서기 90년경에 <루카복음>을 저술하여 마르코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복음사가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서기 70~90년이면 예수가 죽고 나서 사흘 만에 부활하고 승천한 지 최소한 40~6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라는 말이다. 세대로 따지면 2~3세대가 지난 다음에 쓰인 셈이다. 당시 유대인의 풍습과 기독교인들의 평균 학력을 감안해 보면 그동안 제대로 기록된 문서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구두로 전승된 예수 이야기와 자신이 수집한 자료에 더하여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이른바 <Q문서>(Quelle), <마르코복음>을 바탕으로 <루카복음>이 저술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오늘날 사복음서의 관계는 비교적 정리되어 있다. <마르코복음>과 <Q문서>가 공관복음서의 바탕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루카복음>과 <마태복음>이 쓰였다. <요한복음>은 전혀 별개의 내용이 담겨 있는 별종이지만 <루카복음>과 <요한복음>과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루카복음>은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베타니 마을의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나자로에 관한 이야기는 이 두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체포될 때 종의 귀가 잘린 묘사도 이 두 복음서에만 나온다.

물론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 말고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승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굳이 그 내용을 상세히 적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서 부활, 승천, 재림은 늘 삼위일체 교리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기에 이토록 허술히 다룬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될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리 허술한 이야기에서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교리가 수립된 것일까? 결국 후대의 많은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승천이 모든 인간에게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생을 약속했다. 과연 영원히 사는 것은 누구인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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