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다
기독교 기도문의 정점인 ‘주기도문’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과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를 편집하여 만들었다.
먼저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도문을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빕니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마태 6,9)
<루카복음>에 나오는 말도 비슷하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빕니다.”(Πάτερ,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루카 11,2)
기독교에서 신은 아버지다. 그렇다면 신은 남자인가? <가톨릭교회교리서>에는 그렇지 않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의 성의 구분을 초월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신은 신이다.”(Recordari igitur oportet, Deum humanam sexuum transcendere distinctionem. Ille nec vir est nec femina, Ille est Deus., <가톨릭교회교리서>, 239항)
그런데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신은 인간의 부성과 모성을 초월한다. 신이 그것들의 기원과 잣대가 되지만 말이다. 그 누구도 신이 아버지인 것처럼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Paternitatem etiam et maternitatem transcendit humanas, licet earum sit origo atque mensura: nemo pater est, sicut Deus est Pater.)
매우 모순적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아버지’(Pater)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유대인의 민족신인 ‘야훼’(יהוה)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처리하면서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신은 아버지이지만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남녀의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이는 타당하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실 기독교 이전에 유대교에서도 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담은 신이 만든 존재이니 아담을 낳은 의미에서 아버지인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이 논리로 보자면 인간은 신이 직접 생산한 자기 자녀이다. 그런데 이는 다른 많은 문명권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해석이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다는 신화는 많지만, 인간이 신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민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신은 신이다. 유대교에서 인간과 거룩한 호흡, 곧 성령은 신의 경지에 결코 이르지 못하였다. 또한 다른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남성신에 대비되는 여성신의 개념도 유대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철저한 남성중심주의적인 유대교 문화에서 아버지만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양성평등 사상이 대두되면서 신의 ‘남성성’이 페미니즘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신학계에서는 신의 성을 논하는 것 자체의 무의미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방어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남성중심주의를 기독교가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아버지 신은 오로지 아들 예수와만 배타적 관계를 맺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유일한 아들의 개념과 존재의 의미가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곧 예수가 자신의 아버지인 신과 본질적으로 같은, 곧 서로가 서로의 본질 안에 침투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그런데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의 아버지 신은 예수를 낳는 데에 구약처럼 신의 말씀이 아니라 마리아라는 평범한 인간인 여성을 필요로 하였다. 사실 여기에서는 유대교와 무관한 그리스 신화적인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여러 자녀들이 신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제우스를 능가할 수 없는데 비하여 예수는 신의 유일한 아들이며 본질적으로는 신 자신이기도 하다. 곧 신이 아들의 몸이라는 형상을 통하여 세속 사회에 자신을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들 앞에서 신을 대리할 뿐 아니라 신 자체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는 당연히 유대인들의 눈에는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일로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왜 이리 유대교 전통에서는 매우 낯선 방법으로 인간 세계에 강생(incarnatio), 곧 내려온 것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정확히는 아담의 잘못으로 어긋난 신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자비로운’ 신의 뜻에서 나왔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반성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이 몸소 지상으로 내려와 그 죄를 무상으로 용서하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전에 신이 알아서 인간을 용서하고 인간을 사랑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은 인간이 기도하거나 청원하기도 전에 자신의 판단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경우 인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자신이 직접 흙의 먼지에서 빚어 만든 자녀인 아담의 후예들, 특히 카인의 후예들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자기 자녀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완전하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거저 주는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 부성(父性, paternitas)은 전적으로 신적인 것이기에 인간이 요청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청할 수도 없다. 그저 아버지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다. 그것도 인간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말이다.
신이 인간의 죄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어긋나게 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인간이 저지른 죄, 곧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죄를 용서하고 원상회복, 곧 인간의 영원한 삶을 회복시켜주었다. 인간이 반성하지 않았음에도 기독교의 신은 일방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여 몸소 인간의 몸을 취하는 과정까지 서슴지 않았다. 정말로 진한 자식 사랑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어떤 종교 체계에서도 이런 지극한 부성이 강조된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다. 다른 종교의 신은 인간계를 초월한 존재이고 궁극적으로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기에 인간을 특별히 사랑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자기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했다는 논리도 있지만 이미 신은 모든 짐승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도 창조한 존재이다. 그런데 삼라만상 중에 하필 인간만을 특별히 자기 모습으로 만들어 세상에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대적하여 죽을죄를 지은 인간을 특별히 보호하고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최고로 격상시켰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현대의 생태론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거부감을 보인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은, 이런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의 사랑도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에서 나온 욕심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아무리 부도덕해도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 주는 존재를 모든 인간은 바란다.
기독교에서 현실의 인간에게 요구하는 아버지의 사랑, 곧 부성도 이와 같다. 아버지는 자녀의 태도와 반응에 무관하게 무한에 가까운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지었다는 이 원죄의 개념은 정작 유대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율법 체계로 신의 용서를 비는 제도를 완비한 유대교이지만 정작 기독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원죄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인 아담의 죄에 대한 부채 의식을 유대교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유대교에서는 원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보장받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대교에서 출발한 기독교에서는 이 원죄 개념이 그 교리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그래서 사실 원죄가 없다면 예수가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독특한 해석으로 기독교와 유대교의 예수에 대한 해석도 전혀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용서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원래 유대교의 신은 인간의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인 ‘아바’(אבא)로 불린다. 예수도 신을 아빠라고 불렀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5-36)
그러나 유대교 신학에서 신은 기독교와는 달리 반드시 인격신은 아니다. 유대교의 민족신인 ‘야훼’(יהוה)를 아버지가 아니라 자연의 이법, 자연의 힘으로 여기는 유대교 교파도 적지 않다. 2008년에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야훼가 비인격적인 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숫자가, 야훼가 인간이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격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보다 2배가 많았을 정도이다. 곧 유대인들은 신을 반드시 인격적 존재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아버지이다. 인간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산한 자녀, 곧 인류를 위해서 사랑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왜 이리되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갚아준 존재이다. 그리고 지상 생활에서도 인간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존재이다. 자신의 언행으로 신이 인간을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사랑하는 존재로 정의해 버렸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그 사랑을 믿고 마음대로 살아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예수는 경고한다. 아무나 아버지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을 그토록 사랑해서 자기 외아들의 모습으로 지상에 와서 인간을 저주받은 죽음에서 구해 내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한 존재가 다시 자신의 사랑을 받을 조건을 인간에게 제시한 셈이다. 유대교에서 야훼의 속성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듯이 기독교에서도 신의 속성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인간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스스로 강생을 한 신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 자신과 함께 영생을 누릴 조건을 추가로 다시 제시한다. 이 모순적인 신의 행동은 해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와서, 특히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에서는 기독교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급격히 대두되었다. 신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그의 자녀들이 그렇게 서로 원수가 되어 무참히 학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야훼 신을 배타적인 민족신으로 섬기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희생을 보고도 ‘침묵’하는 신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으로 과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살육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순교한 이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10만 명도 안 되지만 기독교의 이름으로 살육된 이들의 숫자는 수억 명에 이르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그러한 평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유대인들이 종교로 박해받고 추방당한 일은 자주 있었다. 서기 70년경의 예루살렘의 파괴 이후 2천 년 가까이 지속된 디아스포라의 긴 역사에서 유대인들의 시련은 야훼 신의 뜻이 과연 유대인들의 지상에서의 행복을 궁극적으로 바란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나중에 신학자들은 그 또한 구약에 자주 나오는 대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야훼 신의 ‘분노’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지만, 이는 어느 모로 억지 노름이 아닐 수 없다. 신이 아버지라면 사랑하는 자녀들의 곤경을 보고 그 정도로 심하게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물론 신의 뜻은 신비의 영역이라서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집단수용소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의 상식과 인내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문자 그대로의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자녀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을 넘어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은 양차 대전 이전까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인간의 아버지였다. 또한 그 신은 가부장제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런 신이 아버지이니 가장도 집에서 제사장으로서 신의 권한의 대리자, 적어도 중계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세계대전 중에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의 생산 구조 안에 편입되는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성들이 전쟁으로 많이 사라지고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된 상황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구조의 운영에 참여하며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부수적인 결과로 이혼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커리어 우먼’의 등장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이다. 가부장제도의 붕괴는 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이혼율은 20세기 초반에 비하여 700%나 증가하였다. 무능한데 권위주의만 내세우는 가장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노동착취 구조에서 실질 임금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가장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과거보다 더 많이 일해야 했고 그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니 이러한 이중고에 시달리는 가장은 입지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서양 제국만이 아니라 한국의 아버지도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매우 적다. OECD가 조사한 바에 따른 국가 평균으로도 OECD 회원국의 아버지들은 하루에 150분 정도만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물론 교육학자나 심리학자들은 부모 특히 아버지가 자녀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녀들의 정서와 지능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한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부성의 재발견을 강조하는 것에 발맞추어 교회도 참다운 부성의 회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실질 임금은 감소하고 물가의 상승으로 지출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또한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녀의 양육에 투자할 시간이 현실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부권의 상실이라는 시대정신으로 아버지의 가정에서의 의미는 더욱 축소되고 있다.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 나가도 침묵만 지킨 신에 대한 신뢰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유럽에서의 기독교 신자 수의 감소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독일의 경우만 보아도 해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 40~50만 명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추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독일의 경우 종교와 관련하여 가장 큰 단일 세력은 무교, 곧 종교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다. 가톨릭도 신자 수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에서 30%의 선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고, 개신교도 마찬가지 상황에 부닥쳐 있다. 이제 곧 기독교 신자가 전 국민의 50% 아래로 줄어들어 실질적으로 비기독교 국가가 되는 상황이 곧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 신자는 약 25억을 상회하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아프리카나 남미와 같은 후진국에서 신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선진국에서 기독교 신자는 줄고 있다.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늘고 있지만 이는 남미의 라틴계 이민의 증가에 따른 것이지 순수 신자가 증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남성의 권위는 이제 페미니즘의 물결로 더욱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은 고사하고 사회의 중심도 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는 이제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로 보일 뿐이다. 곧 집단이기주의적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로 여겨지는 셈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교회, 더 나아가 기독교는 공공의 복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예배, 자신의 헌금, 자신의 안녕만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비치고 있다. 그런데 그 근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일부 목사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나 성추행이 아니다. 오히려 참다운 부성의 부재이다. 교회에서 성직자는 실질적으로 아버지, 가부장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원래 가부장의 권위는 그의 지휘를 받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이제는 마치 매미의 헐벗은 껍질과 같은 형식적인 가부장으로만 남아 억지로 강요하는 가짜 권위, 곧 권위주의만 남은 셈이다.
이 아버지 개념이 가장 많이 남은 종교가 원래부터 가톨릭이다. 교회의 교리를 정립한 신학자들도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로 불리고 교황도 아버지(Papa)로 불리며 주교도 아버지고 사제도 아버지(Pater)이다. 그러나 이제는 개신교의 목사들 또한 껍질만의 가부장의 기능만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대형 교회만 집착하고, 박사학위가 허위로 밝혀져도 변명으로 일관하고, 성추행해도 다시 교회를 세워 가부장이 된다. 권위는 사라진 권위주의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과격한 페미니즘 신학자들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로 바꾸어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는 부성만을 강조해온 가부장제도를 단어만 바꾸어 그대로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곧 또 다른 권위주의일 뿐이다. 모순적인 가부장제도의 틀은 놔둔 채 단순히 ‘부’를 ‘모’로 바꾼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가부장이나 이른바 ‘가모장’(家母長) 사회의 아이콘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예수가 말한 아버지는 어디 있는 것일까? 기독교가 철저히 인격신을 고수하는 한 신은 차가운 우주 원리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의존할 수 있는 자상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을 아버지, ‘아빠’로 부른 것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침묵하고 있다. 자상한 아버지가 왜 침묵하는 것인가? 그 침묵의 이유를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