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의 대화는 초월적일수밖에없는 이유가 궁금하다.
구약에서 신은 인간과 자주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밤새 싸움도 한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신은 예수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앞두고 큰 고통에 아버지에게 호소해 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다른 이도 아닌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보낸 외아들이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왜 나를 버리느냐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
<성경>에 보면 십자가 위의 예수는 그 당시 갈릴리 지방 사투리인 아람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나온다.
“E′li, E′li, la′ma sa‧bach‧tha′ni?”
이를 성경에서는 그리스어로 음역하였다.
Ηλι ηλι λεμα σαβαχθανι(마태 27,46)
Ελωι ελωι λεμα σαβαχθανι(마르 15,3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요?”라는 말이 된다. 예수가 아버지인 신을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장면은 이 두 복음에만 나온다.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 46)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는 말을 하고 마지막 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예수에 대한 존경심에서 마태나 마르코 공동체에서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맘에 안 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미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말이다.
“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רָח֥וֹק מִ֜ישֽׁוּעָתִ֗י דִּבְרֵ֥י שַֽׁאֲגָתִֽי”(시편 22,2)
이를 직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요? 왜 나를 돕지 않고 멀리 계시나요? 내 울부짖는 소리를 멀리하시나요?”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구약을 많이 이용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른바 예형론(typology)이다. 곧 구약에 나온 이야기를 예수를 예언한 것으로 해석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도 복음 기자들이 각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이었으니 큰 고통 속에서 유대인들이 즐겨 암송하던 시편 구절을 고통 속에서 저절로 말한 것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해석이든 다 가능하니 이를 두고 굳이 논쟁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아버지인 신을 찾은 것은 분명함에도 신이 대답하거나 사람들이 들을 수 없어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그 어떤 표징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신과 동일시하는 신학을 전개한 요한이 쓴 것으로 전해진 복음에서는 아예 이런 울부짖는 예수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숨을 거두자마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며 신전의 장막이 둘로 갈라지는 이적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온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는 무덤이 갈라지고 죽은 이들이 부활했다는 묘사까지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마태 50-52)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이상한 현상에 관련된 그 어떤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당연히 각 복음서를 쓴 기자들의 예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듯하다. 그리고 이 당시와 비슷한 시기의 로마제국의 그 어떤 문서에도 이러한 천재지변 수준의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를 사랑한 사람들의 심리적 충격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흔히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그런데 신은 예수에게만 침묵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늘 인류에게 침묵했다. 그래서 이러한 신의 긴 침묵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소련을 빼고는 모두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살육을 하는 것도 모자라 야훼 신을 인간 역사 안에 드러낸 유대인마저 대량 살상을 해도 신은 침묵했다.
물론 일부 신학자들은 신이 말을 했으나 인간이 귀를 닫아서 못 들었다는 해석을 한다. 그리고 이미 성경에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할 말이 없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매우 부족한 말이다. 기독교의 신은 매우 자상한 아버지이다. 그럼 자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인간의 가청 주파수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고 해도 일단 ‘소리’이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자녀가 듣지 못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인류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신의 말을 들은 사람은 아직 없다. 물론 일부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심지어 신을 ‘보았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 체험에 머무는 것이기에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없는 주장들일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적 체험을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경우 더욱 신의 목소리일 리가 없는 법이다.
창조 이후 인간과 자유롭게 교제하던 구약의 신은 이집트 탈출 시대부터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예언자와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외의 인간들은 그 예언자의 신탁을 통하여 신의 말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예 예언자와도 대화를 끊었다. 물론 바울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성경 구절이 나오지만, 그것이 신인지 예수인지 아니면 천사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은 전혀 없으니 타당성이 부족하다. 외아들인 예수에게도 침묵한 신이 바울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2,000년 가까이 신이 침묵하고 있음에도 많은 기독교인은 여전히 신과의 대화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유일한 방법은 기도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 특히 20세기 들어와 발흥한 오순절 교파 계통의 신자들은 마치 무당이 접신을 하듯 신적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목소리와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그 은총을 몸으로 느꼈다는 보고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런데 가톨릭의 경우는 신과의 직접 대화에 대한 보고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라는 형식으로 체험한 신적 계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성모 마리아는 유럽을 중심으로 발현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 대륙에서도 발현했다고 보고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신이 직접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것이 제삼자의 객관적인 검증까지 받았다는 사례는 실질적으로 단 한 번도 없다. 왜 그런가? 신은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외아들마저 서슴없이 내어준 인류에게 왜 그리도 끈질기게 침묵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모습을 보면 인간이 죽기 때문이라는 다분히 구약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그런 설명은 유대인의 민족 신에 대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설파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성숙된 오늘날의 기독교는 비록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지만 유대교가 아니다.
사실 이 기독교 신의 침묵은 신의 본질이다. 그래서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과의 대화는 역설적으로 침묵일 수밖에 없다.
침묵으로 말하는 신에 침묵으로 다가가는 인간만이 대화할 수 있다. 침묵 속에서 대화하는 방법이 바로 기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기도는 개인화되어 중세 교회 전통에서의 신과 나누는 집단적 대화를 대체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 나아가 교회의 신은 죽어 버린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형식화된 신과의 만남의 의미 자체가 소멸해 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죽은 것이다. 그 의미를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