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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신이 죽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우리가 죽인 신에는 예수의 새로운 의미가 있다

by Francis Lee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니체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니체가 마치 신성모독이나 저지른 사람, 더 나아가 이른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난리를 피우는 이들도 있다. 단언하건대 그런 사람들은 니체의 책의 표지도 안 본 사람들이다.

니체의 저서 Die fröliche Wissenschaft에 보면 신의 죽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조금은 길지만 니체가 신의 죽음을 논한 것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는 데 필요해서 전문을 인용해 보았다.

Der tolle Mensch. — Habt ihr nicht von jenem tollen Menschen gehört, der am hellen Vormittage eine Laterne anzündete, auf den Markt lief und unaufhörlich schrie: „Ich suche Gott! Ich suche Gott!“ — Da dort gerade Viele von Denen zusammen standen, welche nicht an Gott glaubten, so erregte er ein grosses Gelächter. Ist er denn verloren gegangen? sagte der Eine. Hat er sich verlaufen wie ein Kind? sagte der Andere. Oder hält er sich ersteckt? Fürchtet er sich vor uns? Ist er zu Schiff gegangen? ausgewandert? — so schrieen und lachten sie durcheinander. Der tolle Mensch sprang mitten unter sie und durchbohrte sie mit seinen Blicken. „Wohin ist Gott? rief er, ich will es euch sagen! Wir haben ihn getödtet, — ihr und ich! Wir Alle sind seine Mörder! Aber wie haben wir diess gemacht? Wie vermochten wir das Meer auszutrinken? Wer gab uns den Schwamm, um den ganzen Horizont wegzuwischen? Was thaten wir, als wir diese Erde von ihrer Sonne losketteten? Wohin bewegt sie sich nun? Wohin bewegen wir uns? Fort von allen Sonnen? Stürzen wir nicht fortwährend? Und rückwärts, seitwärts, vorwärts, nach allen Seiten? Giebt es noch ein Oben und ein Unten? Irren wir nicht wie durch ein unendliches Nichts? Haucht uns nicht der leere Raum an? Ist es nicht kälter geworden? Kommt nicht immerfort die Nacht und mehr Nacht? Müssen nicht Laternen am Vormittage angezündet werden? Hören wir noch Nichts von dem Lärm der Todtengräber, welche Gott begraben? Riechen wir noch Nichts von der göttlichen Verwesung? — auch Götter verwesen! Gott ist tod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ödtet! Wie trösten wir uns, die Mörder aller Mörder? Das Heiligste und Mächtigste, was die Welt bisher besass, es ist unter unseren Messern verblutet, - wer wischt diess Blut von uns ab? Mit welchem Wasser könnten wir uns reinigen? Welche Sühnfeiern, welche heiligen Spiele werden wir erfinden müssen? Ist nicht die Grösse dieser That zu gross für uns? Müssen wir nicht selber zu Göttern werden, um nur ihrer würdig zu erscheinen? Es gab nie eine grössere That, - und wer nur immer nach uns geboren wird, gehört um dieser That willen in eine höhere Geschichte, als alle Geschichte bisher war!“ - Hier schwieg der tolle Mensch und sah wieder seine Zuhörer an: auch sie schwiegen und blickten befremdet auf ihn. Endlich warf er seine Laterne auf den Boden, dass sie in Stücke sprang und erlosch. „Ich komme zu früh, sagte er dann, ich bin noch nicht an der Zeit. Diess ungeheure Ereigniss ist noch unterwegs und wandert, - es ist noch nicht bis zu den Ohren der Menschen gedrungen. Blitz und Donner brauchen Zeit, das Licht der Gestirne braucht Zeit, Thaten brauchen Zeit, auch nachdem sie gethan sind, um gesehen und gehört zu werden. Diese That ist ihnen immer noch ferner, als die fernsten Gestirne, - und doch haben sie dieselbe gethan!" - Man erzählt noch, dass der tolle Mensch des selbigen Tages in verschiedene Kirchen eingedrungen sei und darin sein Requiem aeternam deo angestimmt habe. Hinausgeführt und zur Rede gesetzt, habe er immer nur diess entgegnet: „Was sind denn diese Kirchen noch, wenn sie nicht die Grüfte und Grabmäler Gottes sind?“ (Die fröliche Wissenschaft, Verlag von E. W. Fritysch, 1887, ss. 154-155)


직역을 해 본다.

미친 사람. - 여러분은 밝은 오전에 등불을 켜고 시장으로 달려가 계속 외쳤던 그 미친 사람에 대해 들어 보지 않았나? “나는 신을 찾고 있다! 신을 찾고 있어!”-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에 그 사람은 큰 웃음거리를 불러일으켰다. (신이) 길을 잃었나? 한 사람이 말했다. 애처럼 길을 잃었나?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면 숨이 막힌 것인가? 우리를 두려워하나? 뭔가 잘못된 건가? 떠나 버린 거야? -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뒤섞여 소리 지르며 웃어댔다. 그 미친 사람은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가 소리 질렀다. “신은 어디로 갔냐고? 내가 말해주지! 우리가 그를 죽였다 – 너희들과 내가! 우리는 모두 그를 죽인 살인자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였냐고? 우리가 어떻게 바닷물을 다 마실 수 있겠는가? 지평선 전체를 지울 해면을 누가 우리에게 주었나? 우리가 지구를 태양에서 분리하면서 무슨 짓을 한 것이지?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이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야? 모든 태양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우린 계속 넘어지는 것 아냐? 그리고는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여전히 위와 아래가 있어? 우리는 무한한 무(無)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 아냐? 허공이 우리에게 숨을 내뱉는 것 아냐? 더 추워진 것 아냐? 밤만 계속 찾아오는 것 아냐? [그래서]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되는 것 아냐? 신을 묻어 버린 무덤 파는 이들의 소리를 전혀 못 들은 거야? 신이 부패한 냄새를 전혀 못 맡은 거야? - 신 또한 부패하지! 신은 죽었어! 신은 죽어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신을 죽인 거야! 가장 사악한 살인자인 우리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까? 지금까지 세상에 있었던 존재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가장 강력한 이가 우리 칼 아래서 피를 흘리며 죽음을 맞이했어. 누가 우리에게 뭍은 피를 닦아줄까? 어떤 물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할 수 있을까? 어떤 속죄 예식, 어떤 신성한 식을 만들어 내야 할까? 이 일이 우리에게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그런 일에 합당해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었어.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은 이 일로 말미암아 이전의 모든 역사보다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되지!” - 여기서 그 미친 사람은 침묵하고 청중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들도 침묵하며 그 사람을 낯설어하며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 사람은 등불 바닥에 던졌다. 등불이 깨져 꺼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말을 했다. “내가 너무 일찍 왔어. 아직 내 때가 아닌 것을. 이 엄청난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야. -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어. 번개와 천둥이 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천체의 빛에도 시간이 필요하지. 이 일에는 시간이 걸려. 그리고 이 일을 벌이고 나서도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려면 시간이 걸리지. 이 일은 그들에게 여전히 가장 멀리 있는 천체들보다 더 멀리 떨어진 것이야!” - 또한 사람들은 이날 그 미친 사람이 여러 교회에 침입하여 신의 장송곡(Requiem aeternam deo)을 연주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밖으로 끌려 나와 사람들이 말을 하라고 요구하자 그 사람은 늘 이 말만 했다고 한다.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를 전혀 읽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은 마치 니체가 신을 죽인 ‘놈’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어보면 니체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신을 죽인 현실을 통박하고 있다. 예수가 지키라고 한 계명을 죽어도 안 지키는 기독교인들 앞에서 예수의 신과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니체는 통찰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신을 죽인 자들이 교회를 신의 무덤과 묘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신은 그 누구도 아닌 그 당시 '우리', 곧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죽인 것이다. 그리고는 인간은 그 엄청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경향도 보이는 것이다. 특히 transhumanism이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에 팽배한 과학만능주의, 곧 인간의 지식으로 모든 질병을 극복하여 영생까지도 스스로 확보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곧 신이 되고자 한다는 니체의 말이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신은 불생불멸의 존재인데 어찌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니? 더욱 이상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신은 분명히 죽었다. 2,000년 가까이 그는 침묵하고 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인식 안에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신의 지상명령을 듣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아도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것을 안 인간의 간지(奸智, List)가 신의 섭리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의 간지는 이미 구약성경에도 나온다. 신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도 근본적으로 바로 이런 간지 때문이다.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כב וַיֹּאמֶר יְהֹוָה

אֱלֹהִים הֵן הָאָדָם הָיָה

כְּאַחַד מִמֶּנּוּ לָדַעַת

טוֹב וָרָע וְעַתָּה

פֶּן־יִשְׁלַח יָדוֹ וְלָקַח גַּם

מֵעֵץ הַחַיִּים וְאָכַל וָחַי

לְעֹלָם׃

(Genesis 3:22)

직역을 해 본다.

야훼가 말했다.

이제 인간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이 손을 내밀어

생명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어

영원히 산다면

어찌 될 것인가?

(창세기 3,22)

결국 신은 인간이 이미 자신과 맞먹는 지혜를 가진 것을 알고 이제 인간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생을 누릴 것을 경계하여 인간을 자신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아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쫓겨난 인간이 이제 신의 도움 없이도 영생을 누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인공장기로 신체를 대체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복제와 두뇌의 정보 복제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유대-기독교 전통의 신은 죽은 존재이다.


사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몰락의 길을 걸어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결정적인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른 우주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힘의 등장이다. 세계와 인간에 관한 기독교 신학적 해석의 오류가 속속들이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드러나면서 기독교 특히 기독교 교회는 더 이상 객관적 진리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이제 기독교는 겨우 개인적 신앙 체험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중이다. 결코 과학적으로, 곧 객관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이 개인적 신앙 체험은 그 비과학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결국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해야만 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적을 몸에 지니득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마치 주문을 외듯 기도문을 외며 이 세상에서의 출세와 부를 간구하는 자가 버젓이 유대-기독교 전통의 야훼신을 믿는다고 나서는 세상이다. 이들이 믿는 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록 전통에서 말하는 신은 죽었지만 여전히 개인적 ego 안에 자리 잡은 이른바 ‘나의 신’은 존재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토속신이었던 야훼가 보편적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한 지 2000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현상도 목격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신은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조로아스터교의 신, 이집트 종교의 신이 아직 명맥은 유지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보편적 유일신으로서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현재 세계의 기독교 신자는 가톨릭, 개신교, 기타 교파를 포함하여 24억 명으로 추산되어 2위인 이슬람교의 19억 명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 11억, 불교 5억 등 여러 다양한 종교를 포함한다면 기독교가 전 세계 인구의 31% 정도만 차지하니 절대적인 종교하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그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양 문명에 1,700년 가까이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온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종교사를 살펴보면 인류 문화 안에 존재한 종교 가운데 생성 소멸을 거치지 않은 종교는 단 하나도 없으니 특별히 슬퍼할 일은 아니다. 기독교가 소멸되면 다른 종교가 또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식욕, 수면욕, 색욕과 더불어 종교성이라는 욕망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충족해야 하기에 종교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 존재할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 안에서는 기독교를 대체하는 종교들이 이미 나타나 있다.


그것들을 뭉뚱그려서 이른바 new age spirituality로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대부분 기독교의 아류에 불과하여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종교적 틀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무엇보다 그 추종자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 기독교가 여전히 힘을 쓰는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서양의 정치-경제력과 그 신도 수에 있다. 새로운 종교가 기독교를 이기려면 이런 상황을 전복시켜야 하는데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신이 죽은 이 현실에서 인간은 또 다른 신을 이미 만들어 숭배하고 있다. 인간의 종교적 본성은 초월자에 대한 숭배에서 세속적인 숭배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쾌락주의는 물론 구체적으로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에 탐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는 이미 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른바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다 죽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종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신이 죽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예수에 대한 생각은 긍정적이다. 기독교에 지극히 부정적인 간디마저도 예수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을 표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슬람교에서도 그의 인격적 예언자적 품위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 신은 죽었는데 예수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살아있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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