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머니라고 한 적이 없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단 한 번도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른 적이 없다. 예수와 마리아가 직접 대화를 나눌 때 마리아에 대한 호칭은 ‘여자여’(γύναι)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가 밖에 와 있다고 이야기하여도 흔히 말하는 대로 ‘모시러’ 나가지 않고 자신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예수 공동체에 마리아가 계속 함께 한 사실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마리아를 홀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성경에 기록된 바로는 마리아가 특별한 대우를 받지도 않았다. 다른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마리아가 술을 더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는 예수가 투덜거리기까지 한다. 성경에는 예수와 마리아의 직접 대화 장면이 3번 나온다. 예수가 12살일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유월절을 거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을 때의 장면에서 마리아가 ‘아들아,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걱정하며 찾았다.’라고 말하자 예수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는가?’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타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법적으로 예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3일이나 찾아다니다가 겨우 그를 발견한 터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데 예수가 30살이 된 무렵 혼인 잔치에 예수와 함께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잔칫집 일을 돕던 마리아가 예수에게 ‘술이 떨어졌네.’ 하고 말하자 예수는 마리아를 꾸짖듯이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자여.’(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 γύναι)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 아무 말이 없이 슬퍼하고 있던 마리아를 바라보며 예수가 말한다. ‘여인아. 봐라. 당신의 아들이다.’(Γύναι, ἴδε ὁ υἱός σου)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와 나눈 대화의 전부이다.
그나마 아버지 요셉과의 대화는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 그것도 전혀 모자간의 대화로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만이 성경에 남아 있다.
예수가 12살 되었을 때의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루카복음>에만 나온다. 나머지 두 대화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복음사가들은 각자의 신앙공동체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에 예수와 마리아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다르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를 신과 동등한 신격의 존재로 여기는 공동체가 기록한 것이기에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며 그에 못 미치는 ‘인간’인 마리아와의 거리를 의도적으로 명시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예수의 생물학적인 어머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루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한 인물로 바울의 주치의로서 그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의사답게 예수 사건에 관한 것을 매우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합치면 그 양이 <신약성경>의 27%를 차지할 정도이다. 그러니 <신약성경>에서 그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더구나 예수 사망 이후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문서인 <사도행전>은 기독교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서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신약성경이 필자가 10명이지만 그가 차지하는 무게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루카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의 선교에 무게를 둔 사람이라 굳이 여성 차별적인 유대인의 습속을 따를 필요는 없었을 것임에도 예수가 마리아와 그의 가족을 특별히 대하지 않았음을 담담하게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신뢰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십이 사도 가운데 예수가 가장 사랑했다는 요한이다. 그리고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마리아의 아들로 묘사되었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그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라는 부탁을 실천한 것과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서기 100년쯤부터 시작해 긴 기간에 걸쳐 편집 저술된 것이니 요한이 직접 쓴 것으로 보는 것에는 매우 무리가 있다. 그와 관련된 공동체가 작성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정체에 관한 논의는 21세기에 들어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 관련된 내용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더구나 <요한복음>은 여러 사람이 저술한 흔적이 너무나 분명하여 단독 필자의 작품일 수가 없는 문서이다.
사실 다른 복음서도 단독 필자가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의 사상 체계의 근간을 마련해준 바울 서간들에서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다. 바울은 회심 이후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서간 가운데 테살로니키 공동체에 보낸 것이 50년경에 쓰인 것으로 가장 오래되었다. 예수의 죽음 이후 거의 20년이 흐른 다음의 기록이니 사실 이때 마리아의 생사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여기에 더하여 이 당시 선교에서 마리아에 관한 언급은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바울의 생각에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자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 자체였기에 인간인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할 필요 없이 예수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그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와는 별도의 선교 공동체를 수립하고 관리하던 사람이니 더더욱 예루살렘의 사정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어느 모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어머니 마리아 못지않게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가 사형당하던 순간 모든 남자 제자들이 도망간 와중에도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임종을 함께했고 예수의 부활도 최초로 목격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천대받는 계급에 속했음에도 성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적을 정도라면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부활 사건 이후에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접촉이나 대화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한 줄도 안 나온다. 아들이 죽고 나서 다시 살았다는 데도 누구보다도 놀랐을 어머니의 반응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다. 이러한 기록이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보인다.
반면에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고 목숨을 내놓고 따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최초로 목격한 인물로서 기독교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인물로 남는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탄생과만 관련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그래서 중세를 거쳐 현세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는 오로지 아기 예수를 안은 모습과만 연관되어 표현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시신을 거두는 형상이 중세에 부활한 예수를 미켈란젤로가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마리아의 슬픔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기독교 역사의 변두리에 있는 존재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가톨릭교회가 그 영화를 많이 상실한 20세기 초반에 가톨릭교회의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라는 신심 단체가 설립되면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한때 붐이 일었지만 이제 서양의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오히려 한국과 같은 기독교 변방 국가에서 강력한 조직으로 남아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성경에는 예수와 관련된 마리아가 3명이 등장한다. 예수를 낳은 마리아, 예수를 충실히 따른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나자로의 여동생 마리아이다. 이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도 계속 예수 공동체에 남아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마리아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다른 지역과 종교에서도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이 세 마리아 가운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돋보여야 할 존재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예수의 생물학적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마리아의 행적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리고 다른 문서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어머니 마리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후대에서 마리아에 관한 ‘전설’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설은 교파만이 아니라 민족과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게 된다. 사실 전설은 거의 모든 종교의 필수 요소이기도하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마리아를 특별히 존경하거나 공경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3세기부터 교회 안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넘어 숭배 사상이 신자들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12세기에 들어와서는 마리아가 예수에게 신자들의 청원을 전달해 주는 ‘전구자’(mediatrix)라는 믿음으로 마리아 숭배의 광풍이 일게 된다. 그래서 중세에는 한때 위경인 <야고보복음>에서 마리아의 부모라고 알려진 요아힘과 안나는 물론 조부모까지 숭배하는 민간신앙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에 관한 5가지 교리를 선포하고 이를 준수하고 있다.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이며, 처녀로 예수를 잉태하였고, 죽은 후에 하늘로 들어 올려졌으며, 그 자신도 죄 없이 잉태되었고, 영원히 처녀라는 주장이다. 이 교리 가운데 일부는 다른 교파와도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에서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중재자 역할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이니 어머니가 중재에 나서면 아들이 그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마리아에게 전구 기도를 하는 관습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리아를 소망을 비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숭배하는 것이 이미 중동지방의 고전적 신화나 종교에 있던 것이 기독교에 흡수된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곧 이집트의 ‘이시스’(Isis), 그리스의 ‘아르테미스’(Ἄρτεμις), 소아시아의 ‘시빌레’(Κυβέλη)와 같은 토속 여신의 이미지가 기독교로 넘어와 마리아의 토착화를 촉진했다는 주장이다. 이 여신들은 모두 풍요와 인간의 행복을 주재하는 여신들로 기독교 이전에 여러 문화에서 혼합된 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빌레는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로 유입되면서 ‘가이아’(Γαῖα), ‘레아’(Ῥέα), ‘데메테르’(Δημήτηρ), 더 나아가 ‘아테나’(Ἀθηνᾶ)와 동격의 여신으로 받아들여진다.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이런 신이나 신적 존재를 시대정신과 문화에 맞게 변형하는 습속이 그대로 전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여러 여신들의 요소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속성이 더해지면서 현세의 고난과 어쩔 수 없는 어려움에서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로 두드러지었다.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이 끊일 날이 거의 없었던 중세에 기댈 곳이라고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기독교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리아에게 기대며 기적적인 평안을 갈구하는 평민의 신심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간은 본래 어쩔 수 없는 사건 앞에서는 신적 존재의 자비를 갈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적 존재로 숭배되는 경우는 없었다. 유일신교이며 가부장적 종교인 기독교에서 아버지와 아들만이 숭배받아 마땅한 존재였기에 여성이 그들과 동급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다만 마리아에게는 여왕의 칭호가 부여되면서 지상에 태어나고 살았던 인간 가운데 최고의 지위에 있는 존재로 경배되기에 이른다. 이는 사실 대중신심과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가톨릭교회의 권력자들이 내놓은 타협책이었다. 마리아는 성경에서도 보잘것없는 존재로 묘사되어 예수와는 비교가 안 되었지만, 신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에서는 마리아에 대한 시각이 서로 엇갈리게 된다.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마리아를 존경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츠빙글리(Zwingli)도 마찬가지였다. 위클리프(John Wycliffe)와 칼뱅(John Calvin)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마리아가 예수와 동격이거나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아무리 가톨릭의 부조리를 극복하자고 나선 개신교라 하더라도 철저한 남성중심주의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여자’가 숭배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세기 이후 개신교는 마리아 숭배(Mariolatory)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마리아에 대한 경배와 신심을 공격하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교회는 아예 마리아에 관한 두 교리, 곧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교리를 ‘무류적’(ex cathedra)인 진리로 선포해 버리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곧 비오 9세 교황은 1854년 12월 8일에 교황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반포하여 마리아의 ‘무염시태’(Immaculata conceptio), 곧 예수처럼 마리아도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믿을 ‘교의’(dogma)로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신의 아들이며 본질적으로 신인 예수를 낳은 마리아의 신성성을 강조하다가 결국 이런 선포를 하기에 이르게 된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무염시태는 어떤 성경적 근거가 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저 중세에 수도회를 중심으로 확산된 대중신심의 일종이었다. 사실 1206년 설립된 도미니코회(Ordo Fratrum Praedicatorum, O.P.)는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금 후인 1209년에 세워진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는 마리아 숭배에 가까운 신심을 보이며 무염시태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여기에 1244년에 수립된 아우구스티노회(Ordo Fratrum Sancti Augustini)마저 무염시태 지지에 나서면서 문자 그대로 수도회 간의 진흙탕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는 단순히 마리아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수도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어 버렸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설립되어 경쟁 관계에 있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무염시태를 명분으로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적인 교리 문제와 현실적인 세력 다툼 문제가 결부되면 결국 이런 결과가 나오고 심한 경우 교파가 갈라지곤 하였다. 그러나 늘 명분은 교리를 내세우곤 하였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차마 현실적 이익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기 민망했기 때문이다.
‘복된 동정 마리아의 승천’(Assumptio Beatae Mariae Virginis in coelum)에 관한 교리는 더 최근의 것이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이 사도 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반포하여 무류성의 진리로 선언하였다. 교리적으로 마리아는 무염시태로 태어나 원죄도 없는 유일한 인간이 된다. 그런데 마리아는 죽고 나서 어찌 된 것일까? 성경에는 마리아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안 나온다. 그뿐 아니라 아예 예수가 부활한 다음 마리아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마리아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신의 독생자 예수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고려하여 마리아의 사후 행적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예수처럼 죽음의 세계에 잠시 머물다가 하늘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실 예수도 죽고 나서 저승에 잠시 머물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나서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하늘에 올랐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순리적이기는 하다. 그런데 마리아가 죽기 전에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는 믿음도 그에 못지않게 퍼져 있었다. 구약에서도 살아 있다가 바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에녹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7세기경에 등장한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가 죽고 나서 무덤에 묻혔는데 임종하지 못한 토마스 사도의 주장으로 무덤을 다시 파보니 마리아가 수의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묘사된 장면과 비슷한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또 다른 전설에서는 마리아가 하늘에 오른 다음 허리띠를 하늘에서 사도들에게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마리아가 최소한 죽고 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음이 신자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사실 요셉보다는 덜 하지만 마리아가 성경에서 매우 관심 밖의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초기 신학자들에게도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을 듯하다. 예수 자신도 마리아를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나타낸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요한복음>이 유일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그러나 이 구절 말고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 사후에 요한이 마리아를 ‘끝까지 모셨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예수 사후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에 마리아의 이름은 단 한 번 등장한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2-14)
이른바 초대교회의 시작인 ‘다락방’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다른 여자들과 더불어 사도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역할이나 활동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승천한 예수를 최초로 발견하고 사도들에게 알린 막달라 마리아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철저히 남자들의 이야기만 나온다. 당시 매우 강력했던 남성중심주의가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성경의 여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난 다음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간에서 아무런 언급이 안 되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19세기 이후 마리아 신심에 관한 교의를 무류적인 것으로 선포하게 된 배경에는 가톨릭교회가 중세시대에 누리던 중심적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위기감을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마리아의 지위에 대한 개신교의 신랄한 공격에서 가톨릭의 고유한 신앙을 지킨다는 의도에서 인간인 마리아가 승천할 만큼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기독교 교리의 일차적인 권위는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성경에서는 마리아의 위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예수를 낳은 존재이지만 그 혈연관계에서 오는 특권이 어디에도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마리아만이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심한 박대를 받았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