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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by Francis Lee

사실 기독교에서 이스카리옷 유다와 더불어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둘 다 예수와 누구보다도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었으나 기독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이들에 관한 관심이 다시 일기 시작하더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대중매체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극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록 오페라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 Star)와 마틴 스콜세이지(Martin Charles Scorsese)감독이 영화로 만든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작품인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다. 초기에는 두 작품 모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전자는 이제 당당히 메인스트림에 들어갔고, 후자는 아직도 ‘경건한’ 신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른바 ‘컬트 무비’에 속하고 있다.


과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기독교 교리에서 신의 외아들이며 신 자신이기도 한 예수와 깊이 관련된 여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사실 <성경>만 보아도 막달라 마리아는 열두 사도에 버금가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특히 예수의 부활 직후의 상황에서는 다른 12명의 사도들보다 앞서, 그리고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만나보고 대화를 나눈 인물이다. 게다가 복음서에서 막달레나 마리아의 실명이 12번이나 등장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도들보다 빈도수가 오히려 높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여자라는 말이다. ‘막달라’(מגדלא)는 갈릴리호수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로 당시 대도시인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예수가 자란 나사렛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30km 정도 더 가야 했다. 성인의 걸음으로 하루에 도착하기에 벅찬 거리다. 예수와 갈릴리호수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지만 사실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그 당시 갈릴리호수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공생활이 주로 갈릴리호수 근처의 마을에서 이루어졌기에 막달라 마리아도 그 여정에서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된 복음서 구절을 살펴보자.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1.5.8)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마르 16,1.2.9.11.20)


예수님께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5-18)

위에 나온 모든 복음서에서 묘사된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의 결정적인 증인이고 예수는 자신의 부활 사실을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제자들에게 알린다. 남성중심주의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것도 예수 사후 최소 40년이 지나 저술된 복음서들에서 여전히 이 정도 수준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기술이 나온다면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의 결정적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에 관하여 더 이상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이후의 문헌에서는 아예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단 한마디도 안 나온다. 바울도 자신의 서간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예수 부활의 유일한 직접 목격자라는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그 부활 사건으로 시작된 예수 공동체에서 그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경 이외의 문서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을 찾아보는 시도가 초기부터 있었다. 정경에서는 그 흔적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기에 외경과 위경이 위세를 발휘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단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정설’로는 이 마리아가 갈릴리호수 서안의 막달라 마을 출신이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음서 가운데 그나마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이 <루카복음>이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그에게 일곱 악령이 들었다가 나갔다. 일곱 악령에 관한 이야기는 <마르코복음>에도 나온다. 그러나 사실 이 내용은 원래 없던 것이 2세기경에 <루카복음>을 바탕으로 추가된 부분이다. 그러므로 <루카복음>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원래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유대인들에게 7은 완전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악령에게 시달렸다기보다는 그만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심한 고통을 당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사도들이 다 도망간 사이에도 예수를 십자가 밑에서도 끝까지 지키고, 예를 따르던 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관심이 없던 무덤까지 직접 찾아가는 행동을 보인 것은 그만큼 예수에 대한 집착이 강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의 악령을 쫓아낸 것을 직접 묘사하는 부분은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 악령에서 치유된 상태에 있는 이들 무리에 함께 하였다는 말만 나온다.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에 대한 설명은 아래 나오는 <루카복음>처럼 매우 무미건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2-3)


여기에서 말하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가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공동체를 물질적으로도 돕는다는 내용이 나오는 이상, 분명히 그는 아팠더라도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였고 그 회복에 예수가 결정적 작용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에게 생명의 도움을 준 이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 이상의 문헌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에 어디까지나 이는 추측에만 머물 뿐이다.


사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다음 정작 그 시신을 내려 장례를 치른 사람은 열두 사도가 아니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죽었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도망갔다. 스승인 예수의 시신을 내버려 두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아리마태의 요셉이라는 인물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를 찾아가 그 궂은일을 다 처리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세 명의 마리아, 곧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가 그 곁에서 그를 도왔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밖에 없다. 그만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결정적 증인이 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만큼 핵심적인 인물도 없을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를 무시하는 사상이 기독교 역사 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상당수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하다가 걸려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과 동일한 인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가 아예 창녀였다고 못 박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성경 어디에도 그런 단정적인 표현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그를 창녀로 ‘몰아간’ 것은 6세기 이후부터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540~604)가 591년 한 강론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베타니의 마리아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고 선언해 버린 탓이다. 이때부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설’이 걷잡을 수 없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69년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인물들을 별도의 존재로 간주하면서 오류가 시정되었다. 그러나 이미 수백 년 동안 ‘창녀’로만 여겨져 왔기에 대중들의 신앙에서는 여전히 그런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게다가 바울 서간에서는 부활한 예수를 최초로 본 사람은 베드로라고 못 박으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복음서와 전혀 다른 주장을 바울이 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예수만이 아니라 예수 공동체와도 제대로 된 접촉이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바울이 세운 신앙공동체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별 언급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신격화하는데 매우 공을 들인 <요한복음>에서조차 예수가 직접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사도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수여할 정도로 묘사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부활 이후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그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남성중심주의적인 유대 사회의 풍습을 기독교 공동체도 그대로 답습한 영향이 큰 것이었다고만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예수가 만민평등주의를 내세웠다고 해도 그 당시의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고 본다. 그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에도 기독교의 여성에 대한 대우가 특별히 개선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렇게 여성은 예수의 복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차별의 역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이 양성평등이지만 오히려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한 집단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만민평등주의가 선포된 지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모양이니 말이다.


이러한 지경이니 기독교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두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이른바 정경보다는 위경이나 외경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본모습’을 더 찾아보게 된다. 사실 외경은 정경에 비하여 더욱 매력적인 문서들이다. 왜냐면 이미 기득권을 쥔 이들이 정경을 정할 때 그들의 권한에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의도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경의 확정에 여성이 개입된 흔적은 전혀 없다. 모두 남자들이 그것도 권력을 쥔 극소수의 남자들이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성경에 들어갈 만한 책을 정했다.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상세히 나오는 외경에는 <구세주의 대화>(The Dialogue of Savior),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 <토마스복음>, <[막달라]마리아복음>이 있다. 이러한 외경에 따르면 사도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를 매우 질투했다. 그러나 정경 목록에 들어 있는 성경에서는 부활 이후의 막달라 마리아의 언행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모든 책은 남성들이 정한 정경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예수가 치료해 주었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함께 했고 부활하고 나서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인데 부활 이후 그의 역할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성경 정경의 작성 과정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에 대립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와의 관계에서 그를 능가한다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추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경 또한 특별한 의도를 지니고 쓰인 문서이고 대부분이 남성들이 작성한 것이기에 그 정당성이나 정확성을 담보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문서가 부족한 기독교의 주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는 데에 참고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정경을 정하면서 너무나 많은 문서들이 사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논쟁을 촉발한 일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그 누구보다도 막달라 마리아와 더불어 바로 이스카리옷 유다이다. 다음 장에서 그에 대하여 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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