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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미워한 이스카리옷 유다?

예수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변했다

by Francis Lee

이스카리옷 유다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십이 사도에 속하는 예수의 정통 제자였다. 예수 자신도 그를 십이 사도에서 공식적으로 축출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예수를 배신하기 전까지는 공동체의 자금관리도 하며 악령을 물리치는 일에도 참여하여 상당히 중요한 활동을 하는 사도였다.

성경에서는 그가 왜 예수를 배신했는지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를 고발한 유다의 행위에 대해서도 복음서마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겨우 은전 30개를 받고 배신하였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 14-16)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아예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함께 의논하였다.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유다는 그것에 동의하고, 군중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루카 22,3-6)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만 유다가 예수가 사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반성하고 돈을 되돌려준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10)


사실 그 당시 은전 30개는 오늘날의 화폐로 계산해서 20~30만 원 정도에 불과한 액수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그 당시 일용 육체노동자의 일당으로 지급하던 1데나리온이 은 4그램인 것을 고려해 보면 120데나리온, 곧 일용 육체노동자의 120일 치, 곧 4개월 치 일당이므로 아주 적은 돈은 또한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기적을 언제든지 베푸는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인 자신의 스승의 죽음에 대하여 ‘겨우’ 4개월 치 노동자 임금 정도의 돈을 요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은전 30개를 강조한 것은 성경 저자의 예형론적 글쓰기 방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곧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옹기장이의 밭 이야기를 더하기 위하여 은전 30개를 설정한 것이다.

수석 사제들은 그 은돈을 거두면서,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 값어치가 매겨진 이의 몸값, 이스라엘 자손들이 값어치를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 주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신 대로 옹기장이 밭 값으로 내놓았다.”(마태 27,6-10)

그러나 <예레미야서> 어디에도 은돈 30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즈카리아서>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좋다고 생각하면 품삯을 주고, 그러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그러자 그들은 내 품삯으로 은 서른 세켈을 주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나의 값어치를 매겨 내놓은 그 잘난 품삯을 금고에 넣어라.” 나는 은 서른 세켈을 집어 주님의 집 금고에 넣었다.(즈카 11,12-13)


여기에 더하여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옹기장이 이야기를 짜깁기하여 이런 전설을 만들어 낸 듯하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옹기장이의 단지를 하나 사라. 그러고 나서 백성의 원로들과 원로 사제 몇을 데리고, ‘토기 문’ 곁에 있는 ‘벤 힌놈 골짜기’에 나가, 거기에서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말을 선포하여라.(예레 19,1-2)


예수의 죽음을 둘러싼 일들이 이미 구약성경에 다 예언되어 있었다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념으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형론적 논술 방식은 복음서 전반에 나온다. 그러나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구약성경>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용의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복음사가의 임의로 편집하고 해석한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은돈 30개는 예루살렘 전체를 뒤흔들고 기득권을 누리던 사제단의 미움을 사는, 그래서 그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된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인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는 매우 보잘것없는 돈이다. 그 정도 푼돈으로 예수를 팔아먹을 사람으로 여기기에는 유다가 열두 사도 가운데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크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돈 관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돈을 관리했다는 것은 예수와 사도들의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시몬(또는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할 때 어떤 여자(또는 죄 많은 여자 또는 나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또는 다리에) 향유를 붓자 유다는(또는 시몬은) 그 향유를 팔면 300데나리온이나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요한복음>에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어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1-8)

요한복음에서는 유다를 이미 예수를 팔아넘긴 자로 규정하고 이 장면에서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그러나 <마르코복음>과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벌어진 장면이나 불평한 자가 전혀 다르게 나온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말하였다. “왜 저렇게 허투루 쓰는가? 저것을 비싸게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태 26,3-26)


사실 <요한복음>은 이미 예수가 신과 동등한 존재인 것을 전제로 쓰인 것이기에 일종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해당되는 내용이 많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와 같이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할 때 <요한복음>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매우 평범한 여자가 300데나리온, 곧 일용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을 예수를 위하여 쏟아 부어 쓴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가난한 예수 공동체의 돈 관리를 도맡아 하던 유다가 계산을 허술하게 했을 리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말이다. 참고로 성경에 나오는 금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당시 노동자의 16년 치 평균임금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적어도 예수 정도의 인물이라면 1달란트, 100달란트를 받아도 모자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유다가 받은 은전 30개는 실제 액수라기보다는 상징성이 강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다의 죽음도 성경에서 서로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은화 30개를 특정한 <마태복음>에서는 유다가 후회하며 돈을 돌려주고 결국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자살은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죄악이다. 그래서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유다가 자살했다고 보기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는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해 보게 된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그 돈으로 땅을 샀으나 결국 사고로 죽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어떤 결말이든 유다가 배신의 대가로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살이든 사고사든 유다의 죽음이 강조된 것은 그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증오를 나타낸 것이고 이러한 원한은 후세에 전통으로 이어지며 여러 가지 ‘전설’을 낳게 된다.


도대체 예수에 의해 직접 사도로 선택되는 특전을 누린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한 것일까? 앞에서 말한 대로 성경에는 그 현실적 이유가 전혀 안 나온다. 그냥 배신한다는 말밖에 없다. 그래서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은 그저 ‘악마’가 그의 마음을 흐린 것으로 해석하고 만다.


그리고 <요한복음>이나 <마태복음>은 예수가 이미 유다의 배신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전제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은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진행된 사건이 된다. 어차피 예수는 사형당하여 인류의 죄를 씻어야만 했고 유다는 그 역사를 위하여 배신자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가 이미 나온 상태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을 추론하여 원인을 단정하는 이른바 자기충족적 예언이니 시간적 논리를 거슬러 뒤집는 것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이다.


더구나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 경우 유다는 신의 섭리의 실천을 위한 도구, 더 나아가 꼭두각시의 역할을 한 것이니 그의 죄를 묻기가 어려워진다. 죄라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자발적으로 어떤 행위를 죄에 해당되는 것을 알고도 스스로 자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으로는 유다는 그저 신의 뜻을 충실히 따른 자이니 죄가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 말고 또 다른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은 유다의 출신과 관련된다. 열두 사도 가운데 11명은 모두 갈릴리 지방 출신이지만 이스카리옷 유다 한 명만이 유대아 지방 남부에 있는 마을인 카리오트 출신이었다. ‘이스카리옷’(Ὶσκάριωθ)이라는 말 자체가 카리오트 출신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방색이 매우 강하던 그 시절의 예루살렘에서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사는 데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 자신조차도 사마리아 여자를 차별하지 않았던가? 솔로몬 이후 북부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부의 유대 왕국으로 갈린 것도 모자라 지역으로 조각난 유대인의 민족적 특성이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정치적 분열 상황을 예수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적어도 성경에 나온 예수의 언행을 보면 말이다.


물론 유다의 정체에 대하여 다른 해석도 다양하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연 유다가 왜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결국 배신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논리적, 합리적 설명은 성경과 그 이외의 어느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2000년 가까이 최악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인물이 된 셈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유다가 배신자와 동의어로 사용된 역사가 길다. 그러나 이는 사실 자의적 해석과 편견과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유다가 왜 ‘배신’했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가짜 뉴스가 넘칠 수밖에 없다.

사실 배신으로 따지자면 자타가 공인하는 1등 제자인 베드로의 배신이 가장 충격적이지 않은가? 닭이 울기 전에, 곧 동이 트기도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그 잘난 제자 말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 되고 단지 사법 당국에 예수를 밀고한 유다는 최악의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사실 예수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 전통이 만들어 낸 신화이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유다는 상반된 두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다. 곧 예수를 따르다가 밀고한 배신자이기도 하고 신의 뜻에 따라 예수를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는 데 조력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배신행위를 실행할 것을 독촉한 장면에서 유다의 배신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에 결국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매우 약화되기도 한다. 이런 점을 강조한 것이 외경인 <유다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의 구원사가 완성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를 놓고 한정된 원인을 거꾸로 추론하는 논리적 모순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권역에서 벗어나 이른바 이방인 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다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상징적 인물로 고착되고 이는 결국 먼 훗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정당화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특히 교부학자인 크리소스토모스는 유대인을 차별하는 규정을 확립하는데 이는 중세를 관철하여 유대인 차별의 합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리하여 유다는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지명한 열두 명의 ‘정식’ 사도에 속하는 인물이었음에도 기독교 역사에서는 사도가 아닌 ‘배신자’로 규정되고 있다. 그 대신에 나중에 예수 공동체가 선발한 마티아스가 정통 십이 사도로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록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예수가 유다를 사도단에서 직접 추방하고 마티아스를 대신 사도로 임명한 기록이 없기에 무의미한 행위이다.

예수와 사도들이 돈 관리를 맡길 정도로 신뢰한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기에 많은 추측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신학적 해석이나 개인적인 추론의 차원을 벗어난 것은 없었다. 그저 신의 섭리의 신비 영역에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예수의 형제자매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형제자매 존재 여부는 예수 자신보다는 마리아의 신성에 직접 관련된 일이다. 기독교 가톨릭 교리에서는 마리아가 인간적인 성적 접촉 없이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출산하였고 그 이후에도 처녀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가 신의 유일한 아들이기에 신이 선택한 여자의 몸에서 세속적 인간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의 형제자매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 그럼에도 가톨릭 신학에서는 예수의 신성성을 강조하고 그에 편승한 마리아의 완벽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마리아의 ‘무염시태’(Immaculata conceptio) 교리를 확립하였다. 곧 마리아의 어머니, 다시 말해서 예수의 외할머니가 마리아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도 죄 없이, 곧 육체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 논리적으로 그 외할머니도 무염시태여야 한다. 또 그 위의 할머니도 거룩해야 하고. 이런 논리적 퇴행의 자가당착에 걸리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그냥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에서 멈추기로 정해 버렸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대로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이 사도 칙령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의 발표로 마리아의 ‘무염시태’가 무류성의 교리가 되었다. 사실 이 이전에 교회의 신학사에서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의 탄생 신화에 대한 논쟁은 지속해서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한 마침표를 마침내 19세기에 들어와서 찍은 셈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예수의 형제자매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여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한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그 형제자매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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