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교회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하는 말이 나온다.
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마태 16,18)
직역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에게 말한다. 너는 페트로스(Πέτρος, 돌)다. 그리고 내가 이 페트라(πέτρᾳ, 바위) 위에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모임)를 지을 것이다. 그리고 하데스(Ἅδης)의 문들이 그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문장을 예수가 직접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여 현재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그 권위가 이어져 온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교회를 예수가 세운 것은 맞지만 베드로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프란치스코가 266대 교황이라는 학문적 과학적 근거는 없다. 교황청 자체에서 발행하는 <교황청연감>(Annuario Pontipicio)에 교황의 이름과 재임 기간이 명기되어 있어 이를 기준으로 삼을 뿐이다. 그러나 중세에 여러 대립교황이 난무하던 시절에 여러 정치 세력들이 마음대로 임명했던 그 모든 교황을 다 계산에 넣는다면 현재 교황은 270명이 넘는다. 위에서 말한 <교황청연감>의 근거 자료가 되는 것이 6세기에 작성된 <교황연대표>(Liber Pontificialis)라는 문서다. 그러나 누가 이 문서를 작성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작성자가 354년에 나온 <리베리아누스 연대표>(Catalogus Liberianus)를 기초로 그 연대표를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만 확인된다. 그런데 이 문서도 누가 작성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이 <리베리아누스 연대표>는 로마의 주교였던 히폴리투스(Ἱππόλυτος, 170~235)가 쓴 <연대기>(Chronica)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앞서 작성된 또 다른 로마 주교 명단은 180년에 현재 프랑스의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Εἰρηναῖος, 130~202)의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서의 신뢰성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 자신이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임명한 적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수가 베드로와 교회의 관련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위의 구절이 전부이다.
게다가 베드로 다음으로 누가 교황이 되었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공식 명단에는 베드로 다음 교황이 리노라고 나오지만, 이 주장의 학문적,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다. 교황청의 공식 문서로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정리한 <교황청연감>(Annuario Pontipicio)에 나오는 명단을 인정하기로 결정한 이후의 계산에 따라 프란치스코가 266대로 정해진 것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는 ‘교황’, 곧 전체 기독교 교회의 황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로마 주교의 수위권 논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른바 4세기에 만들어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Donatio Constantini)이라는 문서를 근거로 로마 주교가 모든 교회의 황제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그 당시 출신성분도 불분명한 로마 주교였던 실베스터 I세에게 로마의 황제 궁전과 이탈리아 반도 땅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압권인 것은 그 당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이른바 펜타르키아(Πενταρχία), 곧 5대 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로마의 교회 가운데 실베스터 I세가 주인으로 있던 로마교회를 ‘베드로 좌’가 있는 교회로 가장 우위에 있다고 선포했다는 내용이 이 문서에 담겨 있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교황의 ‘수위권’(prīmatus)이 나온다. 로마교회에 베드로좌가 있다는 주장은 현재 베드로대성전이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는 전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사실 베드로가 로마에 왔거나 심지어 로마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학문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그 ‘베드로 좌’는 현재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전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이탈리아의 가톨릭 사제 발라(Lorenzo Valla, 1407~1457)가 1439년부터 1년간 연구한 끝에 이 문서가 8세기 무렵에 익명의 저자가 위조한 가짜임을 밝혀냈다. 그 연구 결과로 발표한 것이 바로 <거짓으로 믿고 위조된 '콘스탄티누스 기증' 선언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이다. 그렇지만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로마에서 베드로가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다른 교파나 세상이 어찌 생각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는 교파 간의 해석 차이일 뿐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을 걸고 누군가 기독교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세계적으로 교회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그 숫자를 다 파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현재 교회 건물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
다만 가톨릭교회 건물이 약 1,800개, 개신교 교회 건물이 약 6만 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 신자가 약 5백만 명이고 개신교 신자가 약 800만 명이니 가톨릭은 교회당 약 2,700명, 개신교는 130명 정도의 신자들이 모인다. 개신교가 주장하는 대로 1,000만 명 신자라고 해도 170명 정도다. 그러나 대형교회들이 대부분의 신자들을 독식하고 있으니 실제로는 신자가 50명 이하인, 그래서 집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매우 영세한 교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영세한 소규모 교회가 오히려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던 원래의 초대교회인 에클레시아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나 일단 교회는 큼직한 부동산을 보유해야 제대로 대접받는 풍토가 정착된 지는 오래되었다.
사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 다음에도 어느 한 건물이나 장소에 상주하면서 가르침을 설파한 적이 결코 없다. 늘 동가식서가숙 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리에서든 집에서든 진리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예수 생존에는 주교나 신부, 목사는 물론 장로도 없었다. 그저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에클레시아, 곧 모임만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늘날과 같은 어마어마한 건물, 정부의 관료제도 뺨치는 비대한 조직, 수만 명의 신자의 익명성이 당연시 여겨지게 되었을까? 어느 모로 예수가 몸소 발을 들여놓을 틈을 주지 않는 지극히 세속적인 조직의 운영이 교회의 주업으로 착각하는 이들의 모임이 어찌 교회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을까?
당연히 자본주의 때문이다. 교회 안에 자본주의가 파고들면서 물질이 영혼을 몰아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셈이다. 그래서 교파를 막론하고 교세 확장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모든 교회를 욕하고 증오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교회 안에서는 헌금 경쟁 그래프가 당당하게 벽보에 붙고, 헌금을 내지 않는 신자들을 비난하는 목사의 설교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보다는 사교적인 모임에 더 열을 올리는 자들이 예수 이름을 입에 담아도 신성모독이 되지 않는 곳으로 교회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교회 안에서는 목사파와 장로파, 더 나아가 집사파, 그리고 혁신파와 수구파, 그것도 모자라 대형 아파트파와 연립주택파로 사분오열되어 끼리끼리 놀기도 한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한다. 예수가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하늘나라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교회를 두고 미리 알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런 ‘타락한’ 현대 교회와 같은 모습의 당시 유대교 성전에서 무늬만 신자로 돈놀이나 하는 장사꾼들을 예수가 이미 2,000여 년 전에 단죄하였다. 이 장면은 드물게도 공관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나온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물건, 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매매하는 이들과 환전하는 이들을 “쫓아냈다.” 예수가 그들을 쫓아낸 이유는 기도의 집인 성전을 그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는 예수가 2,000년 전에 쫓아낸 강도들이 여전히 가득하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매매와 환전에 전념한다. 많은 경우 기도도 출세와 축재를 위해 드린다. 예수가 선포한 때가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에는 철저히 귀를 닫고서 말이다. 원래 기도는 자기반성과 신과의 대화를 위한 것임에도 말이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면서 예수가 한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 배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당연히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돈을 주고받으며 사교 모임을 하는 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신과 만나는 것이 전부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기도는 인간과 신의 대화이다. 물론 교파에 따라 신에 대한 감사와 개인적 청원이 추가되지만,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세속적 요구 사항이 첨가되지 않은 신과의 순수한 대화 자체가 원래 기도이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신과 나누는 것은 언어의 대화가 아니라 영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세속적인 안녕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장사꾼들의 목소리만 넘쳐난다. 그런 교회에 대고 예수는 다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은 강도들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의 집이라고. 그런데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와는 달리 요즘 교회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도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이 없다. 아니 그런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은 이미 교회를 떠난 것 같다.
마치 예수가 오늘날의 교회를 벌써 오래전에 떠났듯이 말이다. 물론 예수 이전에 신이 교회를 먼저 떠난 것도 확인된다. 신과 예수는 이제 교회 안보다는 거리에서 인간을 더 자주 만나고 있다. 유감스러운가? 아니다. 신과 예수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니 말이다. 그 자리는 바로 거리의 흔한 인간들 사이이다.
예수는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거행하는 예배의 전형이 된 최후의 만찬도 그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아무개’의 집에서 드렸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예수는 파스카 축제를 지낼 장소를 묻는 제자에게 예루살렘의 ‘어떤 집’, 그 집주인의 이름을 복음사가도 모르는 집에서 거행하였다. 예수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기 ‘교회’, 아니 교회 건물이 없었다. 그 거룩한 최후의 만찬도 남의 집에서 먹을 수밖에 없던 예수의 행색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참고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의 메뉴는 다음과 같다: 누룩을 첨가하지 않은 빵, 포도주, 양고기, 올리브, 대추야자, 생선 소스, 허브, 콩죽. 이 자리에서 예수가 빵을 생선 소스에 찍어서 그를 겨우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주면서 예수의 3일에 걸친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런 모든 일들은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이런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 안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한 에클레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특정 건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다. 베드로만이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 에클레시아, 곧 모임이 있다. 결코 강남의 노른자위 땅 위에 있는 높이 솟은 건물 안이 아니고 말이다.
마침 코로나 사태로 2020년 이후 건물의 형태를 갖춘 교회의 위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대면 예배가 아닌 비대면 예배로도 충분히 기도, 곧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체험한 신자들이 원래 교회 건물 밖에 있던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곧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체험을 한 셈이다. 이러한 체험으로 강도들의 소굴에서 벗어나 자신이 사는 집, 자신이 일하는 일터가 바로 기도의 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수 제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건물의 형태를 갖춘 강도들의 소굴이 된 교회가 소멸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교회가 자라나는 실마리가 마련된 듯하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을 이루고 나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결국 잘 살다가 예수와 더불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잘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잘 사는 것은 예수가 직접 보여준 모범에 따라 그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 ‘말씀’의 실천을 예수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였다. 그것도 오래전에 말이다. 그 이유를 다음 장에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