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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영과 육의 영생을 약속했나?

영생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by Francis Lee

예수는 원래 지구라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하러 왔다. 그런데 왜 세상을 구하러 왔다고 했는가? 흔히 예수의 세상 구원의 근거로 드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리스어 원어로는 다음과 같다.


Οὕτως γὰρ ἠγάπ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ὥστε τὸν υἱὸν τὸν μονογενῆ ἔδωκεν,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μὴ ἀπόληται ἀλλ'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세상을 사랑해서 외아들을 보냈지만 구하려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다. 구원받은 인간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외아들’은 그리스어 원문에 보면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ῆς)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 적이 없다. 예수 사후 100~200년이 지나고 <요한복음>이 저술될 무렵 기독교인들의 신앙관에서 이미 예수가 신의 외아들이라는 확신이 들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세상을’은 ‘코스모스’(κόσμος)를 ‘사랑하다’는 ‘아가포’(ἀγαπάω)를 번역한 것인데 당시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아니다. 원래는 지상에서 사는 인간, 곧 인류를 의미한다. 원래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코스모스’는 오히려 예수와 적대적인 물질적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신이 이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외아들을 보낸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멸망은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파괴된다’라는 뜻인데 그 의미가 확대되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해졌다. 생명은 ‘쪼에’(ζωή)를 번역한 것인데 ‘생기가 있다’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확대되어 신과 예수의 은총을 받아 최후의 심판 이후에 부활하여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린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신학적, 교리적 내용이 담긴 말을 예수가 자신을 ‘감히’ 외아들이라고 지칭하면서까지 직접 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한결같이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권고했을 뿐이다. <요한복음>이 저술된 시기에 완성되고 있던 예수에 대한 숭배 사상이 이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생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일단 육체적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사실 영혼의 영생에 대한 논리는 기독교에서 매우 취약하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도신경>을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신경>에서 나온 것이고, 이 이른바 <니케아신경>은 다시 <로마신경>(Romanum)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로 작성된 <로마신경>은 루피누스(Rufinus de Aquileia, 344~411)가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로마제국 전체에 알려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신학자들은 <로마신경>의 원저자가 마르셀리우스(Marcellus de Ancyra, 285~374)이고 이 신경이 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로마 교회의 주교였던 율리우스 1세가 서기 340년에 받은 서한에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나중에 다른 문서가 발견되면 이 주장도 수정될 수 있다. 기독교에 관련된 많은 문서가 위조되었거나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도 마찬가지이다.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et in Christum Ies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e,

qui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est et sepultu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in ca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u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et in Spiritum sanctum,

sanctam ecclesia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마루셀루스의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Πιστεύω οὖν εἰς θεò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καὶ εἰς Χριστὸν Ἰησοῦν,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τὸν μονογενῆ, τὸν κύριον ἡμῶν,

τὸν γεννηθέντα ἐκ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καὶ Μαρίας τῆς παρθένου,

τὸν ἐπὶ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σταυρωθέντα καὶ ταφέντα

καὶ τῇ τρίτῃ ἡμέρα ἀναστάντα ἐκ τῶν νεκρῶν,

ἀναβάντα εἰς τοὺς οὐρανούς

καὶ καθήμενον ἐν δεξιᾳ τοῦ πατρός, ὅθεν ἔρχεται κρίνειν ζῶντας καὶ νεκρούς·

καὶ εἰς τò ἅγιον πνεῦμα,

ἁγίαν ἐκκλησίαν,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σαρκὸς ἀνάστασιν,

ζωὴν αἰώνιον.

두 신경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결정적 차이는 그리스어 신경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쪼엔 아니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 곧 ‘영원한 생명’뿐이다. 라틴어 번역본에는 이 문장이 아예 없다. 그러나 바로 위에 있는 육체의 부활은 모든 신경에 남아 있다. 이는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눈 것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성령보다 더 깊은 감명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는 영혼의 부활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하던 그 당시 세상에서 그리스 철학에서 흔한 영혼 불멸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집트 시절부터 많은 사람이 노력을 했지만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사실 부활 신앙이 아니면 기독교가 이렇게 세력을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생은 민족과 국가 그리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인간의 본능에서 나오는 욕구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결합된 영생의 기원은 특히 여러 종교의 교리에서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인물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만이 다시 살아나는 영혼 불멸의 사상을 내세웠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로 몸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신앙을 확신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한 몸은 영적인 것으로 지상에서 지닌 살과 피가 있는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코린토 전서 15,44)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σπείρεται σῶμα ψυχικόν, ἐγείρεται 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 εἰ ἔστιν σῶμα ψυχικόν, ἔστιν καὶ πνευματικόν.


여기에 나오는 ‘소마 프시키콘’(σῶμα ψυχικόν), 곧 물리적인 육체와 ‘소마 프누마티콘’(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 곧 영적인 몸의 구분은 사실 복음서의 부활한 몸의 해석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부활한 예수의 몸을 제자들이 직접 만지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루카복음>에서 그 사실을 정확히 볼 수 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ἴδετε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καὶ τοὺς πόδας μου ὅτι ἐγώ εἰμι 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

여기에서 예수는 분명히 ‘프시라페사테 메 카이 이데테’(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곧 나를 만지고 보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프뉴마 사르카 카이 오스테아 우크’(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곧 영적인 존재, 다시 말해서 유령은 살과 뼈가 없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나오는 명사 ‘프뉴마’(πνεῦμα)는 바울의 주장에 나온 형용사 ‘프뉴마티곤’(πνευματικόν)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왜 바울은 예수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일까? 한마디로 그는 예수의 부활한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였기에 부활 이후 인간이 지니는 몸이 죽기 전의 몸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의 의미는 달라진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 이전과 동일한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승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몸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예수는 과거의 몸에서 새로운 몸으로 영혼만 이동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이 만질 수 있는 살과 뼈를 지녔고 그들과 함께 식사도 했다. 바울이 말한 영적인 몸만 가진 이가 식사를 할 리가 만무하다. 이 모순을 교회가 제대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계속 이 모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어차피 답이 없다. 지금까지 부활을 체험한 기독교 신자는 단 한 명도 없기에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부활은 불교의 윤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기까지 계속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윤회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영혼인지, 정신인지, 아니면 자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윤회와 열반의 조건에만 더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였다. 그래서 특히 <유식론>에서는 윤회를 둘러싼 엄청난 이론을 정립하였지만 정작 그 윤회와 열반의 주체에 대한 이론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허상인 것이니 그러한 나에 대한 분석 자체가 무의미한 구조적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세상이 공허한 것이고 또 공허한 것이 세상이며 그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자아가 허상이니 분석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 원래 마음이 실체가 없는 무아인데 그 무아가 윤회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순이다. 문제는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윤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티벳 불교의 경우 달라이라마가 계속 윤회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믿음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물리학적 지식으로 볼 때 오히려 몸이 부활하고 영혼은 사라진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른 물질적 존재에서 왔다. 지구도 이미 이전에 존재했던 별이 폭발하고 나서 다시 모인 물질들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몸은 그 지구의 구성요소가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그 몸을 구성한 요소들은 다시 분해되어 다른 물질의 구성요소가 된다. 물질은 이런 식으로 윤회한다. 그러나 영혼의 윤회는 단 한 번도 객관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다. 그저 모든 종교와 사상에서 설을 만들고 전파할 뿐이다.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진리라 해도 여기 지금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도 불교와 비슷한 윤회를 주장한 교부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17년부터 138년까지 활동한 영지주의자 바실레데스(Βασιλείδης, 생몰 불명)였다. 그러나 그는 이단으로 몰렸기에 그가 저술한 <해석>(Exegetica)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윤회론은 사실 유대인들이 지닌 부활 의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으니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다시 바울이 이야기한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몸으로 돌아가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러한 몸의 구분은 예수가 전혀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복음서에서도 나오지 않은 개념이다. 그래서 부활을 논할 때 복잡한 신학적 변명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란 것인가?


예수는 인간이 이미 완성된 천국으로 가고자 노력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천국은 그런 식으로 어딘가 이미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예수는 우리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데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협력의 첫걸음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죄를 전제로 한다. 그 죄를 기독교에서는 흔히 원죄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죄는 회개로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한 회개는 원죄 의식을 가지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 죄를 회개하라는 의미이다. 천국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여기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그 천국은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이 천국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국이 완성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는 바로 지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가 지옥에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사실 모든 인간의 부활에 관하여 복음서보다 훨씬 앞서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한 사람은 바울이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그러나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서 매우 결정적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린도 전서 15,3-8)


이어서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인간의 부활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전혀 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굴복되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신 분이 제외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죽은 이들이 전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우리는 또 무엇 때문에 늘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 12-30)

복음서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바울은 매우 단호한 어조로 설명한다. 예수를 만나지도, 가르침을 직접 받지도 않은 사람이 이 정도의 확신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아예 영혼과 함께 하는 몸의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십니다. 씨앗 하나하나에 고유한 몸체를 주시는 것입니다. 육체라고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집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날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몸체들의 광채가 다르고 땅에 속한 몸체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해의 광채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고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들은 또 그 광채로 서로 구별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렇습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 35-58)

이렇게 정교한 부활 논리는 사도들은 물론 예수 자신의 입에서도 나온 적이 없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다가 갑자기 회심하고 기독교를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선교사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심하고 베드로와 대립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교리화하는데 전혀 관심 없고 그저 예수의 언행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가 당부한 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바울이 재빠르게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부활에 관하여 이런 논리를 확립하였다.

사실상 기독교의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활과 승천에 관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나머지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해석한 것일 뿐이다. 특히 바울의 고유한 해석은 예수에 대한 숭배의 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하였다. 부활을 확신하던 사두가이파에 속한 바울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에 대한 숭배로 기울면서 정작 예수의 가르침, 곧 자기희생과 세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하늘나라의 도래를 위한 준비의 실천의 중요성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예수에게 모든 세상적 복을 비는 기복신앙의 형태로 변형되게 된다. 사실 예수는 자신을 숭배하라는 요구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매우 오랫동안 교회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관한 교리만을 신자들에게 가르쳤을 뿐 정작 그 교리의 기초가 되는 성경 내용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세기의 역사비평적 성경 연구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예수의 참모습과 그 가르침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예수가 말한 부활도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 본질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 셈이다.

특히 기독교의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영혼과 더불어 몸도 부활한다는 점이다. 다만 이때 부활하는 몸(Leib)은 죽기 전에 지니고 있던 육체(Körper)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되듯이 부활을 통하여 인간은 전혀 다른 몸의 사람이 된다. 그 몸으로 천국에서 살면 더 이상 병들지도 늙지도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사실 부활은 기독교의 고유한 개념이 아니다.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에도 부활 사상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 나오는 부활은 영혼만 관련된다.(다니엘서 12,1-3 참조) <구약성경>에서 부활 사상이 강하게 나오는 것은 단연 <마카베오기> 다. 이 성경 저자는 전장에서 죽어간 유대 민족의 전사들이 결국 부활할 것이기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2,44-45 참조)


이 전통은 다시 예수 시절에 이미 파벌 간의 알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당시 종교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부리던 사두가이파는 영혼과 더불어 육체도 죽음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쿰란 동굴 문서로 유명해진 에세네파는 영혼만이 영원하고 육신은 소멸된다고 믿었다. 율법에 관하여 예수에게 욕을 많이 먹던 바리사이파는 영혼은 불멸하고 몸도 그 영혼을 담는 도구로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개종하기 전에 열정적인 바리사이파에 속했던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에서 매우 장황한 논조로 그 몸이 지상에서 살고 있을 때 지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부활한 몸과 거리가 있는 해석이다. 예수는 분명히 부활하기 전과 동일한 몸을 가지고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입은 상처도 그대로였고 제자들이 구운 생선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유령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몸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는 바울로서는 신과 다름없는 예수가 ‘더러운’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활에 대하여 예수가 직접 이야기한 것은 <마태복음>에 나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마태 22,29-33)

여기에서도 예수는 부활의 사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고 있다. 예수의 말에 따르면 부활 때 인간은 천사와 같아진다. 이어서 예수는 신이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신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곧 죽은 이들, 곧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부활이 없고 오로지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는 이들에게만 신과 함께 영생하는 특권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먼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사실상 논의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루카복음>에서는 다른 뉘앙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 34-38)


여기에서는 선택된 이들만이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결국 하느님의 자녀가 될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살게 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죽게 되는 이들도 있다는 말이다. <루카복음>의 설명을 보면 <마태복음>에서 애매하게 설명했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곧 신에게는 모든 인간이 최후의 심판을 받아 천국에 갈 때까지도 죽지 않는다. 지옥에 가는 인간도 결국 죽지 않는다. 영원한 형벌을 받을 뿐이다. 지옥에서 인간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한다. 그런데 그 불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영혼인지 아니면 몸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기독교 종말론에서는 모든 인간이 몸과 더불어 부활하여 신의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이니 지옥에 가는 이들도 결국 몸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영혼과 더불어 몸도 된다고 본다.

예수 이전에 승천한 인물로 이야기되는 경우는 <구약성경>에 두 명이 나온다. 바로 에녹과 엘리야다. 다만 이들은 죽지 않은 상태로 하늘로 올랐다. 예수의 경우는 부활하고 승천한 것이니 경우가 다르다. 아담의 육대손인 에녹은 신과 동행하는 가운데 신이 데려갔다고 설명되어 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기 5,24)

<구약성경>에는 그가 아담의 칠 대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담 자신을 제1대로 보고 계산하는 유대인들의 습속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신이 데려갔다’라는 표현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에녹에 관한 족보가 나오는 <창세기> 5장에서 에녹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죽었다’라고 표현되었으나 유독 에녹만 ‘신이 데려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다른 인물들에 비해 365살이라는 짧은 나이로 사라졌기에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바울이 단정적으로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5)


물론 이 문장은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나온 말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이들에 의해 기독교에서는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한 인물로 해석된다. 단 한 문장에 불과한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말이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에녹과 전혀 다르다. <구약성경>에서 그의 승천에 관한 분명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강을 건넌 다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너에게 해주어야 할 것을 청하여라.”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어려운 청을 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자기 옷을 움켜쥐고 두 조각으로 찢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집어 들고 되돌아와 요르단강 가에 섰다. (열왕기 하권 2,9-13)


예언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이미 벌어질 것을 엘리사도 알고 있었다. 예정된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수처럼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기독교의 고유한 교리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신적 존재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와 신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티브이다. 그러나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영혼과 합쳐진 상태로 새로운 삶을 그것도 온전한 몸을 가진 영혼이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은 기독교의 고유한 도식으로 자리 잡아 여전히 핵심 교리가 되고 있다. 이 모든 교리의 근거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도그마다. 그런데 그 신의 아들이 성경에는 많은 가족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나온다. 어찌 신이 지상의 인간을 가족으로 함께 살 수 있었는가? 예수의 가족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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