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전설은 시작부터 복잡했다.
예수의 탄생 설화는 일단 그 시기부터 매우 불명료하다. <성경>에서는 로마제국이 실시한 인구 통계 조사에 응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도 살던 동네인 나자렛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있는 마을인 베들레헴의 어느 집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베들레헴은 다윗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그러나 지금도 베들레헴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에 전설이 하나 더 추가된다. 먼저 예수의 탄생을 천사들이 들판의 목동들에게 밤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2월 25일 한겨울에 목동이 밤에 야외에서 잠들 수가 없으니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날에 태어났을 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더해 이 탄생이 있기 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미리 예수가 마리아의 태를 통해 강생할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아이를 잉태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리아가 그 잉태 고지를 듣고 나서도 다른 임산부와 다르게 특별히 거룩한 예감을 가지고 태중의 예수를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혀 안 나온다. 예수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리아는 예수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오직 <루카복음>에만 나온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매우 장황한 이른바 이 ‘수태고지’(Annunciatio)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심이 반영된 신앙고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많은 학자의 의견이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구약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런 동네에 천사가 그것도 ‘신의 사람’이라는 뜻의 ‘가브리엘’( גַּבְרִיאֵל,)이라는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가브리엘인가? 유대민족의 전통 신화에서는 가브리엘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 열리는 아기의 영혼을 인간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에게 다름 아닌 가브리엘이 나타난 것은 철저한 유대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가 수립될 무렵에 가브리엘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는 종말론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은 오로지 <루카복음>에만 두 번 나온다. 마리아보다 앞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먼저 나타나 요한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고 나서 6개월 정도 지나서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의 경우처럼 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예수라고 할 것을 명령한다.
루카는 복음서를 역사적 사실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예수를 잘 모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기술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과 활동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추가적인 설명이 많이 나온다. 예수의 탄생 설화에 관한 내용도 그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매우 탁월한 그리스어 작문 실력을 근거로 그가 원래 매우 지적인 의사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 의사는 그리 지적인 고상한 직업이 아니었으니 그저 설이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여러 자료를 놓고 편집하면서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글을 써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만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예수 탄생에 관한 관심을 끌만큼 충분히 멋진 문장을 통하여 예수 탄생 설화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셉의 꿈에도 천사가 나타나 이미 아이를 밴 마리아를 버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마태 1,18-25)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천사가 나타났는지가 적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아와는 달리 요셉은 그 천사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현몽을 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요셉이 누구에겐가 전했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다분히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한 그 당신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누가 요셉의 꿈까지 이리 자세히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 탄생에 관련된 신화 중 가장 압권은 이른바 ‘동방박사들’이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 동방에서 별을 따라온 최소한 3명의 박사들(magi), 정확히는 점성술사들이 예수가 태어난 집을 정확히 찾아서 세 가지의 물건을 선물한다. <마태복음>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9-12)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선물의 개수에서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동방박사의 숫자를 연역해 낼 수밖에 없다. 세 개의 선물이니 세 명이 왔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이름까지 만들어 낸다. 곧 멜키오(Melchior), 카스퍼(Casper), 발타자르(Balthazar)다 그것이다. 이들이 ‘동방에서’ 왔다고 했지만 정확한 그리스어 단어는 ‘아포 아나톨론’(ἀπὸ ἀνατολῶν), 곧 ‘해 뜨는 곳’이다. 예수 당시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던 제국은 로마제국이 아니라 파르티아제국이었다. 파르티아(Parthia)는 현재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후 224년까지 거의 500년 가까이 존재했던 제국이다. 다신교 제국이었지만 조로아스터교가 매우 강력하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 종교의 사제를 흔히 ‘마기’(magi)라고 불렀다. <마태복음>에서도 이 나라의 존재와 종교를 알고 있던 이가 ‘동방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배냇저고리, 기저귀, 우유일 것인데 황금, 유황, 몰약이었다는 것을 보면 뜻밖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학적으로 황금은 왕권, 유향은 신성함, 몰약은 죽음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막 태어난 아기 예수의 일생에 관한 미래가 여기에서 이미 정확히 예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예수가 죽은 다음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신의 오른쪽에 올라갔다는 신앙이 확립된 이후에 추가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마태복음>에만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게 된 헤롯이 베들레헴 주변에 사는 2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살육이 일어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일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역사적 증거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탄생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한 다음 헤로데의 사망 이후 귀환한 예수 가족이 나사렛에 정착한 것도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사렛은 구약 어디에도 예언되어 있지 않은 장소이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려면 베들레헴과 깊은 연관이 있어야 하지만 예수는 살아생전 다시 베들레헴을 찾은 일이 한 번도 없다. 예루살렘은 죽음이 가까워서야 찾았다. 그는 거의 평생을 나사렛에서 살다가 공생활도 대부분 갈릴리호수 근처 마을에서 했다.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자가 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역사적 신뢰성을 담보하기 힘들지만 사실 나머지 <루카복음>과 <마르코복음>의 역사적 사실을 담보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무리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교회는 그저 신앙의 신비의 영역에 맡겨둘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특히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이른바 ‘성경무오설’(Biblical inerrancy), 곧 성경에 기록된 것이 성령의 감도로 쓰인 것이기에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개신교파 성직자들은 아직도 성경무오설을 내세우며 신자들을 대상으로 혹세무민하는 짓을 지속하고 있다. 성경에는 분명히 무수한 오류가 담겨 있다. 그 이유는 저자의 무지가 가장 근원적인 것이지만, 그 못지않은 것이 의도적 과장이다. 특히 <구약성경>의 경우 이스라엘의 민족적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 수없이 등장한다. 또한 역사적 자료로 증명할 수 없는 신화적 내용도 넘쳐난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의 삶을 구약의 예언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의 탄생과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예언을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신학 용어로 예형론(typology)이라고 한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단지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사의 완성을 위한 예형에 불과하다는 다소 오만한 주장까지 하는 학자가 나오기도 했다. 정작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 ‘신의 독생자’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철저히 배척하는데도 말이다. 또한 <구약성경>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원죄론을 창세기에서 이끌어 낸 것도 기독교이다. 그런데도 그 <구약성경>을 작성한 유대민족을 예수를 죽인 살인자 집단으로 매도하는 모순적 오류까지 저질렀다.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었는데 유대인을 집단적인 죄인으로 몰아가고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이들로 간주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 때 유대인 탄압과 학살은 매우 정당한 일로 간주했던 것이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였다. 그런데도 히틀러 이전에 이미 가톨릭교회가 유대인 탄압에 앞장섰던 부끄러운 역사는 여전히 제대로 반성 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예형론으로 사용된 구약성경의 구절들조차도 서로 정확히 맞지 않고 편의에 따라 재해석한 때도 많다. 당장 예수의 탄생 설화에 관한 내용부터 문제가 생긴다. 일단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예수의 탄생을 언급한 것은 <마태복음>과 <루카복음>밖에 없다. 둘 다 예수가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요셉이 법률적으로는 예수의 아버지였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양부였다는 주장도 일치한다.
오늘날 예수 탄생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서구 신학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마태와 루카 공동체 신자들의 예수에 관한 신앙심이 두 복음서에 기술된 것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두 복음사가는 예수의 탄생은 고사하고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도 본 적이 없다. 그저 풍문에 전해 내려온 것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러니 역사적 사실성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났음에도 굳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족보가 두 복음서에 나온다. 그런데 둘이 너무 차이가 난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집이 베들레헴에 있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요셉이 나사렛에 살고 있다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지만 <루카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그 유명한 수태고지를 한다. 그리고 <루카복음>에만 세례자 요한의 탄생,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 목동들의 경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이나 다른 어떤 문서에도 안 나오는 이 이야기를 교차 검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사실 예수의 탄생 시기와 관련된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 관한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루카복음>에서만 예수가 탄생한 시기가 정확히 이야기되고 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때문이다.(루카 2,1-7)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BC63~AD14)의 재임기는 기원전 43년부터 서기 14년까지 무려 57년간 지속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록인 <신성한 아우구스투스 업적비>(Res Gestae Divi Augusti)에는 그가 실시한 두 차례의 인구조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아우구스투스가 6번째 집정관으로 있던 기원전 28년에 마르쿠스 아그리파와 함께 41년 만에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 이때 확인된 로마 시민의 숫자는 약 400만 명이었다. 그다음으로 기원전 8년에 다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 이때 확인된 로마 시민의 숫자는 423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대충 기원전 8년 인구조사 때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루카스 복음사가가 ‘퀴리니우스(Publius Sulpicius Quirinius, BC51~AD21)가 시리아 총독일 때’라는 단서를 추가로 단 것에서 시작된다. 로마제국의 문서에 따르면 퀴리니우스는 기원전 12년부터 시리아 지방을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인구조사를 시행한 것은 서기 6년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기원전 8년부터 서기 6년 사이에 탄생한 것이 된다. 무려 14년의 차이가 난다. 탄생 시점을 정하기가 너무 애매하다.
그리고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구조사를 위하여 각자 태어난 본적지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시대에 이집트 지역에서 인구조사를 시행할 때 본적지로 돌아간 예는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로마제국 전체에서 실시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조처를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예수의 탄생 시기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오로지 <루카복음>에만 나오고 그조차도 불명료하게 나오기에 교차 검증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 탄생에 관련된 동방박사 설화, 그들이 따라온 별, 헤로데가 저지른 유아 살해 설화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사렛 지방에 정착하는데 <루카복음>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나사렛에서 정착해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베들레헴에서 출산을 하고 바로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설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 두 이야기를 적당히 섞어서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낸 셈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먼저 <루카복음>에 나오는 수태고지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임마누엘’이라고 알려질 아이의 탄생을 알려주었는데 정작 요셉은 아들의 이름을 그 당시 매우 흔했던 요슈아(예수)라고 짓는다. 동방박사의 행적에 관한 묘사도 애매하다. 지도를 놓고 보면 동방에서 서쪽을 향해 예루살렘까지 왔는데 예수를 찾지 못하고 더 서쪽으로 가서 예수를 찾아 경배하고는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어디서 온 누구이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3명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선물이 3개라고 3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고 나서 헤로데는 2살 이하의 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것이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과연 그런가? 어린아이 살해 이야기는 <마태복음> 이외에 다른 어떤 문서에도 안 나온다. 헤로데는 역사적으로 잔학한 폭군이었다. 그래서 자기의 친아들도 직접 죽인 인물이다. 그런 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모든 아이를 죽이는 악행을 벌였다면 기록이 남아야 하는데 전혀 없다. 헤로데의 친구인 니콜라우스나 유대 역사가인 요제푸스의 책에도 전혀 이 사건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태 공동체의 신자들은 예수를 유대민족의 메시아, 곧 유대민족을 도탄에서 구해낼 새 지도자로 확신하였기에 그가 이집트의 파라오와 같은 헤로데에게 시달리는 유대 백성을 구해내는 도식을 적용해 보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세 시절에 이집트의 파라오는 유대인 아이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모세는 꿈의 계시로 어린 아들과 함께 도피하여 살아난다. 이 프레임이 그대로 예수 가족에 적용된 것 같다.
베들레헴을 굳이 예수의 탄생지로 지정한 것도 구약의 예형론에 따른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유대인의 전설적인 왕 다윗이 태어난 마을이 바로 베들레헴이다. 그를 잇는 참된 새 메시아가 다른 마을에서 나올 리가 없다는 믿음에서 이런 전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베들레헴의 유아들이 살해된 것은 구약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이도 틀린 말이다.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서쪽으로 10km 떨어진 마을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요셉의 어머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서>의 구절은 비극이 아니라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저 아이들이 죽어서 비통한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자식 잃고 희망이 없는 이들의 탄식과만 연결시키는 것이다. 논리적 연결 없이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는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하여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인용이다. 지금도 많은 논문은 여러 선행 연구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기존의 권위 있는 연구 결과를 자신이 쓴 새로운 글에 권위의 근거로 삼는 셈이다. 기독교 초대교회의 경우도 다름없었다. 물론 그 의도는 순진한 것이었다. 그 공동체가 그리스도, 곧 그들이 구세주라고 확신하는 예수가 세계사적인 존재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라면 당연히 구약에서 그 존재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이 예언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지닌 문서는 <구약성경> 이외에 없었으니 그 문서에서 예수에 관한 예언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이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는 <구약성경>에서 예수가 구세주로 예언된 것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신적 존재임을 고백하는 비유대인들에게는 유대민족의 신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는 그 믿음에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 신자 공동체의 대다수를 차지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보장하는 데 <구약성경>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이를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의 지위에 오를 때 사실 교회 안에는 팔레스티나 출신 유대인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에는 이미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었음에도 기독교 교회의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는 거의 교리나 다름없는 가르침이 되었다. 또한 유대인도 오히려 자신을 핍박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일한 야훼신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자가 서로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유대교의 보잘것없는 분파로 시작된 기독교가 결국 유대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역사가 2,000년 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분명히 예수는 뼛속까지 유대인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다윗의 후손이다. 그리고 태어난 지 8일 만에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포경수술도 받았다. 그의 삶의 터전은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이었다. 그리고 유대교 율법을 따르는 청년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성직자와 학자들과 갈등을 벌이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조리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신의 독생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주로 팔레스티나 지역에 사는 유대인 가운데 극소수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예수의 직제자만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자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는데 이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무렵에 기독교 안에서 유대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반유대주의적 교리를 강조해 왔다. 교주인 예수가 유대인인데 반유대주의를 실천하여 중세 때부터 꾸준히 주님의 ‘원래 백성’인 유대인을 박해하고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흔히 히틀러만 유대인을 박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미 중세 이전부터 유럽 전역에서 형언할 수 없는 유대인 박해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것도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반유대주의는 성경 자체에 이미 노골적으로 나와 있다. 바울은 자신도 유대인이었음에도 유대인들을 기독교인들과 대립시킨다. 예수가 한 말을 듣고도 그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은 믿음이 부족한, 그래서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일뿐이었다. 비록 그 유대인들이 예수의 아버지인 야훼신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으로까지 묘사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 그 이후에도 예수를 거의 알지 못한 ‘불경한’ 민족이 되어 버린다. 그런 민족에게는 예수가 죽음과 부활로 약속한 영생은 보장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와 이런 유대인과의 관계, 특히 예수와 다윗과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노력에 기독교는 초기부터 매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바로 예수의 족보의 탄생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