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없다.
21세기 기독교 교회에는 말씀의 성령은 떠나고 부동산 투기와 권위주의의 악령이 판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유대인이 아니라 사실 기독교 교회 자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라는 말까지 회자된다. 어쩌다가 이리된 것일까? 원래는 매우 순수하고 그저 주님만 바라보던 교회가 나중에 타락한 것인가?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훑어보면 교회는 처음부터 그랬다. 예수 말씀의 실천을 멀리하고 분열과 갈등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긴 타락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3부작의 시작이다. 그 가운데 제1권인 이 책에서는 여러 기독교 교회가 자기 교파의 이익을 위하여 마음대로 만들어 내어 결국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눈이 어두워진 ‘작태’에 신물이 난 사람들을 위하여, 제도적 기독교 교회의 손으로 조작되지 않은 원래 <성경>에 나온 있는 그대로의 예수와 그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 다음으로 출간될 제2권 <기독교 교회의 길고 긴 죄악사>에서는 예수 사망 이후 수립된 교회, 특히 바울이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들에서 이미 1세기부터 시작된 분열과 기만과 사기와 탐욕의 역사를 다룰 예정이다. 사실 기독교가 요즘 많이 욕을 먹는 이유가 예수가 모범적으로 보여 준 이웃 사랑의 실천은 멀리하고, 그저 파당적으로 분열하고 지극히 세속적인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멀어버린 모습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행태가 결코 18세기 이후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직후 수립된 이른바 ‘초대교회’ 시대부터 교회는 이미 지독한 파벌 싸움과 돈 싸움에 골몰하였다. 그 싸움의 명분으로 내건 것은 예수와 신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었지만, 그 바닥에 깔린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돈과 권력이었다. 다만 그러한 본질적 역사가 철저한 사기와 기만 술책으로 오랫동안 교묘하게 감추어져 왔기에 많은 사람이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기독교 교회가 ‘타락’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추한 기독교 교회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이 책 다음으로 나올 제2권 <기독교 교회의 길고 긴 죄악사>를 반드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
1, 2권에 이어 이 시리즈의 결론이 될 3권인 <그래도 예수를 믿는 이유는>에서는 교회가 부동산 투기와 헌금이라는 돈맛과 신도들을 종으로 취급하는 권위주의 맛이 단단히 들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물질적으로 타락하고, 금욕주의적인 예수의 모범을 멀리하고, 사제의 아동 성폭행으로 도덕성마저 상실해 버린 상황에서도, 이른바 ‘탈기독교’(post-Christianism), 곧 제도적 교회를 벗어나는 시대정신의 시각에서 예수의 언행을 새롭게 살펴보고 이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비록 제도적 교회가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기독교가 그 종말을 고한다고 해도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충족하는 또 다른 패러다임의 종교는 필연적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 종교는 기존의 제도 교회 중심의 기독교의 폐해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한 형태가 될 것이다.
현재 유럽과 미국이 여전히 정치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강력한 이 서양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기독교다. 20세기 초기에 들어서 서양에서 정교분리가 법적으로 이루어지고 난 뒤 오늘날 서양 사회에서 기독교의 사회적 발언권이 형편없이 줄어들어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렸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의 대통령 취임 때는 신의 가호를 빌고, 유럽의 시민들은 기독교의 축일을 중심으로 제작된 달력의 일정에 따라 일상생활을 한다. 그리고 다수의 여론 조사 기관의 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서양인은 기독교 교회는 미워하지만, 예수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매우 긍정적이다. 여러 설문조사의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럽에서 기독교는 이제 종교가 아니라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번성한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다. 원수도 사랑하고 나의 것을 다 내주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도록 신의 뜻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초기부터 듣지 않고 분열과 갈등과 저주만 하는 문자 그대로 죄로 일관한 2,00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연 기독교의 무엇이 그러한 ‘죄인’들로 넘치는 서양이 세계를 제패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러한 기독교의 힘을 찾아보는 여정을 바로 제3권 <그래도 예수를 믿는 이유>에서 마련해 보았다. 그러나 이 3부작은 논리적인 순서가 없기에 아무 책이나 먼저 읽어도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맘에 끌리는 책을 그저 편한 마음으로 먼저 읽어도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편견이 요즘처럼 심한 적도 드물다. 특히 최근 정치적 혼란과 코로나 사태가 이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인 일치가 필요한 시기에 교회가 보여 준 모습에서 대부분의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개별 교회 중심적인 ‘이기주의’를 목격하고 이른바 ‘개독교’를 혐오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사실 이는 한국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계몽주의 시대부터 기독교가 극도로 비난받으며 인류 역사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한때 정치, 경제, 문화를 통제하면서 유럽 사회의 삶 전체를 규정하던 막강한 교회의 권위는 특히 20세기에 정교분리로 결정적인 제도적 타격을 받았다. 사실 이는 교회의 사회적 권위를 무너뜨리는 큰 사건이 되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종교성을 담보로 윤리와 신앙에 관한 가르침에 관해 누리던 배타적인 권위마저도 그동안 철저히 숨겨져 왔던 과거와 현재의 많은 교회 성직자의 돈과 성에 관한 추문이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는 근세 이전의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모두 내려놓은 채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궁지에 몰려 있다.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도덕성과 자정 능력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여전히 도덕과 신앙에 관하여 말을 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이다. 2,000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의 이름 없는 마을,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 정확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형편없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한 가난하다고 보잘것없는 사나이였던 예수는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쇠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긴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양과 질에서 이미 인류사에서 대적할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나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예수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특히 한국 사회에 아직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왜곡을 최대한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 이 예수 이야기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다. 교회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존하도록 한 예수의 존재 의미에서 제대로 배울 것을 찾아보는 것이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다. 약간은 전문적이고 복잡한 내용도 가끔 나오지만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읽어 보면 그러한 필자의 의도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예수를 편향된 틀에 박힌 이기적 의도로 해석해온 교조적인 교회와는 다르게 설명한 것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면 이 책의 저술 목적이 일단 어느 정도 달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제1권의 책을 크게 3부로 나누어 보았다. 제1부 ‘예수의 전설’에서는 예수의 탄생, 족보, 인성, 악령, 부활에 관한 궁금증을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풀어보았다. 제2부 ‘예수의 가족’에서는 예수가 신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가족과 맺은 관계에 관한 의문을 탐구해 보았다, 제3부 ‘예수의 교회’에서는 성경에 나온 예수와 현실의 교회와 신자가 이해하는 예수 사이에 커다란 인식의 차이가 나게 된 원인을 추적해 보았다.
흔히 기독교가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한 인문주의,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강화된 모더니즘, 물질주의, 세속주의 때문에 주변으로 밀리고 심지어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무지의 소치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는 그 설립 초기부터 타락해 왔다. 그 타락을 재는 잣대는 물론 예수 자신이다. 예수를 교주로 삼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겠다는 장한 결심으로 세워진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행태를 보이는 역사는 예수가 죽은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독교 신자 집단 간의 다툼과 분열만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예수 제자들의 언행은 예수의 분노를 일으킬 정도였다. 예수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가 가르치며 한 말을 이해 못 했으니 그 가르침의 실천은 언감생심이었던 셈이다.
사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가 ‘밀라노 칙령’(Edictum Mediolanense, 313)으로 기독교의 공적인 종교 활동을 ‘승인’하고, 더 나아가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 347~395)가 ‘테살로니키 칙령’(Cunctos populos, 380)으로 기독교를 유일한 국교로 ‘공인’한 것을 기독교 역사에서는 기독교의 승리로 묘사하지만 사실상 이는 기독교의 타락과 비극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두 황제가 칙령을 발표하기 전까지 이미 기독교는 내부적인 파벌 싸움으로 날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던 이 종교적 싸움이 황제의 정치적 명령으로 간단히 수습되었다. 신앙심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세속적 권력이 해결한 셈이다. 교회 내부적인 교리 논쟁도 주로 황제가 소집한 교회회의를 통하여 정리되었다. 사실 야훼만을 유일한 신으로 여기는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극단적인 배타성을 지닌 기독교가 다양한 신앙 활동을 허용하는 로마제국의 다원주의적 종교 생태계에 맞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록 기독교의 종교 활동을 허용했지만 죽을 때까지 기독교 세례를 받지 않았다. 자신의 정치 세력의 안정을 위하여 다른 종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 학자는 그가 죽을 때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이는 의미 없는 주장이다. 황제가 정신이 멀쩡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 것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독히 기독교 신자가 되기를 거부한 황제가 니케아에 있던 자신의 별궁에서 오늘날 이른바 ‘제1차 니케아공의회’(Concilium Nicaenum Primum)로 알려진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오늘날 모든 기독교 교회에서 내세우는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니케아신경(Symbolum Nicaenum)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교회 교리의 가장 근본이 되는 기초를 확립한 셈이다. 테오도시우스가 통합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기독교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그가 기독교 세례를 받은 이유는 병에 걸려 문자 그대로 ‘죽다 살아난’ 일 때문이다. 흔히 개인적인 임사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데 테오도시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오도시우스는 이 칙령을 발표한 다음 해인 38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라는 명칭의 2차 교회 회의를 개최한다. 이 공의회에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신앙고백의 원형인 이른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확립된다.
기독교 교회의 핵심 교리 확립에 황제가 개입하게 된 것은 그들이 독재자라서가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교회 논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혼란은 결국 황제의 절대 권력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 자체의 모순적인 역사의 시작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곧 기독교는 정치권력과 분리해서는 제대로 존립할 수 없는 정치 의존적 존재가 된 것이다. 380년 이후 동로마제국이 망한 1453년까지 로마제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유일한 종교였던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천년왕국을 누리게 되었다.
사실 467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오히려 ‘순수’ 기독교의 권한을 강화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제 절대 군주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할 뿐 아니라 오히려 100% 기독교 신자인 민심을 등에 업고 정치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대륙에 새로운 통일국가인 프랑크 왕국을 수립한 클로비스 1세(Chlodovechus, 446~511)도 게르만족이었음에도 정복한 유럽 대륙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법이다. 교회의 권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권력 지향적이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해진 교회는 문자 그대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원래 예수가 설파한 메시지와 어긋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신자들도 느끼게 되었다. 예수가 설파한 ‘마음이 가난한 삶’을 멀리하는 교회에 실망하여 그 권위에 대항하는 운동이 수도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이미 10세기부터이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도 교회의 타락은 지속되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오자 결국 16세기의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교회는 개혁되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을 거듭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개신교도 극렬히 비난했던 가톨릭의 교계제도를 흉내 내는 반개혁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신부들의 자리를 목사들이 차지하면서 그들 역시 권력과 돈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를 떠난 민심이 르네상스에서 시작하여 계몽주의를 거쳐 확립된 과학주의였다.
계몽주의 이후 교회의 ‘타락’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초월적인 인격신에 대한 ‘과학적’ 의심마저 제기되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다. 특히 21세기의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이제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속하는 사적 영역에서 머무는 문화가 되었다. 과거 기독교가 국교이기에 종교적 소속이 개인과 왕국의 생존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던 시대는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도 주종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영적 위안을 주는 절대적 존재와 인간이 맺는 친교의 의미가 강해졌다. 다시 말해서 신은 이제 인간의 죄를 묻고 심판하는 무시무시한 판관이 아니라 인간을 위로하고 무한한 도움을 주는 위로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신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인격신이 아니라 그가 무척 사랑한다는 인간의 요청에 부응하는 인격체로 존재해야만 하는 인본주의적 존재가 되었다.
종교가 사적 영역에 속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의 대접도 달라졌다. 과거에 교회가 다른 사상과 종교에 대하여 행하였던 ‘악마화’나 ‘마녀사냥’이 이제는 오히려 교회를 대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에서 교회를 이른바 ‘개독교’로 지칭하는 분위기이다. 예수의 열정적인 삶과 죽음을 기반으로 세워진 기독교 교회가 이천 년 가까이 진리와 도덕에 관한 독점적이고 독단적인 권위주의적 권리를 내세우다가 이제는 역으로 고집불통의 도그마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유럽에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날로 악화하고 있다. 특히 최근 사제와 교회 관련자의 아동 성폭행에 관한 추문이 지속해서 공개되고, 돈과 관련된 추문이 자주 밝혀지면서 교회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 여파로 해마다 교회를 탈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독일의 경우 2021년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과거에 있었던 이른바 ‘교회세’를 회피하기 위하여 떠난다는 비난조차 이제는 거의 사그라들었다. 교회 자체가 현대인에게 도움이 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진리와 도덕에서 나쁜 사례가 되는 상황은 세속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도 충격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유럽을 중심으로 교회의 쇄신에 대한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공고한 교계제도를 수립한 교회는 변화할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다. 스스로 정화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공룡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동을 성폭행한 사제의 성적 취미보다 더 사악한 의도로, 곧 제도적 교회의 존립을 위한 집단 이기주의로 그 사제를 교회 제도권 안에서 보호하고 피해자를 버려둔 교회의 관행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었다. 이는 사제라는 한 인간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구조적 폭력의 공고한 패러다임 안에서 성폭행 피해자는 이른바 ‘이차적 희생’(secondary victimization), 또는 2차 가해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수모를 견디지 못하여 피해자가 오히려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살하는 사례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런 교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 교회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지만,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특히 미국의 이른바 극우파 기독교인(far-right Christian)은 주요 선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로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색채의 이른바 ‘참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지닌 이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교분리마저 신의 뜻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나라를 기독교의 신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미국의 기독교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의 개신교도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민심을 잃어 결국 ‘개독교’가 되었어도 정치에 대한 위세를 부리는 일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개독교’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현상이 되어 기독교에 대한 민심 악화를 조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는 기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개독교의 행패’와 ‘사제의 아동 성폭행’이 기독교 교회의 참모습일 수는 없다. 아무리 교회가 타락했어도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가 그 명맥이 이어져 온 데에는 정치권력의 엄호와 교회 재산만이 아닌 다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예수다. 사실 예수의 참모습을 다시 발견한다면 교회가 얼마나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너무나 뚜렷하게 알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런 현실 교회와 멀리 떨어진 예수의 참모습에서 다시 예수를 알고 신앙을 쇄신할 동기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종교적 존재이기에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종교가 나타났다. 그리고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종교는 명멸을 거듭했다. 이제는 기독교에 그 변화의 차례가 온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 인구 가운데 22억 명을 신자로 ‘거느리고’ 있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실질적 국교’가 기독교인 이상 쉽게 무너질 리는 없다. 그래서 과거 역사에서 볼 수 있었듯이 기독교의 몰락이 아니라 쇄신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 쇄신에 필요한 것이 이른바 ‘예수 바로 알기 운동’인 것이다.
문제는 예수의 참모습을 알기 위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에만 예수의 참모습 일부만을 겨우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2,000년을 견뎌온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모습에서 교회의 개혁, 나아가 제2의 종교개혁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기존의 교회가 보여 주는 모습에서 예수의 참 얼굴을 찾기가 힘들어진 세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래서 이 책에서는 예수의 참모습을 먼저 <성경>에서 찾는 여정을 시작해 보았다. 이 책을 3부로 나눈 이유는 먼저 신과 예수의 관계를 규명해야 예수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예수만이 아니라 예수의 주변 인물들과 예수의 관계를 정리해 본 이유는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를 파악할 때 예수를 도그마적인 숭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교회가 쇄신의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를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이 예수의 모습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특히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과 다른 내용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도그마적으로, 그리고 교파 편의적으로 해석하여 이른바 ‘(주식회사)예수교회’를 세워 세속적 이익을 도모하는 세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에서 본래 모습의 예수를 찾아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나 성직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준’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개인 각자가 직접 성경을 통해 만나는 예수의 참모습을 찾는 연습에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