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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Nov 30. 2022

김건희가 지은 죄가 있나?

아무도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1)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페리코페(περικοπή)이다.      


레위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율법이 나온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간통하면, 곧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     


또한 신명기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어떤 남자가 남편이 있는 여자와 동침하다가 들켰을 경우, 동침한 그 남자와 여자 두 사람 다 죽어야 한다. 이렇게 너희는 이스라엘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한다. 어떤 젊은 처녀가 한 남자와 약혼을 하였는데, 성읍 안에서 다른 남자가 그 여자와 만나 동침하였을 경우, 너희는 두 사람을 다 그 성읍의 성문으로 끌어내어, 그들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그 처녀는 성읍 안에 있으면서도 고함을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한다.(신명 22,22-24)     


원래 구약에 나오는 유대교의 율법에서는 간통을 저지른 남녀 모두를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여자만 죽이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여자가 레즈비언이 아닌 이상 반드시 간통한 남자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위선적인 당대 유대인들은 여자만 ‘죽일 X’이라고 난리를 피운다. 오늘날에도 남성중심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종교와 무관하게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여자만 죽자고 물고 늘어진다. 페미니즘으로도 사회의 마초적인 기본 패러다임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좀 더 세월이 흐르면 나아질까?     


지금 한국 사회에서 김건희는 최고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김건희가 이른바 ‘관종’이라면 이를 충분히 즐기고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논조가 모조리 비판, 조소, 풍자, 조롱, 모욕, 그리고 심지어 저주로 일관되니 김건희가 ‘즐거이’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김건희 지지층에서 페미니즘적인 옹호 논리를 펼쳤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그래서 김건희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문자 그대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마치 김건희가 이른바 ‘미운털’이 박혀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조롱만 당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른바 ‘국민 놀림감’이 되어 버려 저잣거리의 술상에 나오는 단골 안주처럼 소비되고 있다. 국민의힘과 대통령실이 안간힘을 내 보지만 그들도 내심 지는 게임의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건희에 대한 비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나댄다’는 것이다. 그것도 실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한국과 같은 실력 위주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실력이 없는데도 나대는 것은 거의 죄악이 된다. 더구나 외모와 학력을 ‘성형’한 것이 밝혀질 경우 인격마저 매도당하기에 십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외모와 학력은 ‘실력’의 최고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김건희가 나대는 것은 비단 럭셔리 굿즈(luxery goods)를 즐겨 애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의 아내라는 신분을 과시하는 것에서 더 잘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성을 ‘윤석열의 아내’로 내세우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에 다섯 쌍둥이의 돌잔치에 이른바 ‘축하 손 편지’를 보낸 것에서 잘 드러난다.(참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7117#home)     


짧은 편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되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애써주시는 김진수, 서혜정 대위님,

고생만큼 행복도 넘쳤던 지난 일 년,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분의 건강과 행복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겨울에 문턱에 들어선 늦가을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 김건희 드림”     


띄어쓰기와 어법의 오류를 탓할 생각은 없다. 김건희처럼 50줄에 들어서면 국문법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하니 말이다. 다만 마지막에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이라는 타이틀에서 김건희의 ‘나대기’가 잘 드러난다는 점만 지적하고 싶다. 법적으로 김건희는 윤석열의 부인일 뿐 대한민국을 대표할 그 어떤 공직을 부여받지 않았다. 미국식의 first lady라는 호칭도 전적으로 비공식적인 것이다. 미국 조 바이든의 아내인 질 바이든(Jill Tracy Biden)도 자신을 소개할 때 결코 “I’m the First Lady, the wife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식으로 발언하거나 글을 쓴다면 미국 전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조 바이든의 ‘곁다리’로 활동하기보다는 자신의 원래 직업인 Northern Virginia Community College의 영문과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대외적인 자신의 공식적 직함도 이를 사용한다. 김건희도 이렇게 나대기 전에는 코바나 컨텐츠라는 회사의 대표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대선이 마무리될 무렵 회사를 정리하고 ‘내조’에 전념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직함이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인 것을 내세운다.     


그 이유는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대한민국은 외모와 학력이 전부인 나라이다. 그리고 그 외모와 학력은 다시 ‘간판’으로 축약된다. 그 간판은 사회적 서열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존대법이 9가지나 되고 신라시대의 골품제를 실질적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서열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그 간판은 생존 자체에 달린 문제이다. 그래서 그 ‘간판’의 수준에 따라 반말을 찍찍하고 아무 데서나 나댈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다. 그래서인가? 윤석열도 아무 데서나 반말 찍찍하지만, 그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도 그 못지않게 반말을 찍찍해댄다. 그것도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되는 자리에서도 말이다.      


인도네시아 방문 중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실에서 ‘공식적으로’ 촬영한 비디오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김건희: 대통령님 나 바바바. 와 멋있다. 이걸루 찍어 주세요.     

윤석열: 빨리 찍어.”(참조: https://www.youtube.com/shorts/fWFe9RPxmA8)     


남편의 직함을 호칭으로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인 부부간의 호칭은 ‘여보’ 아니면 ‘저기요’ 정도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서도 윤석열은 예의 반말이다. 사실 윤석열의 반말은 이제 언론에 지나칠 정도로 노출되어 이질감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김건희마저도 그런 윤석열에게 반말을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호칭은 ‘대통령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고 바로 ‘나 바바바.’ 해버린다. 극존칭과 극하대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대법이 지극히 짧은 문장에 나온다. 물론 띠동갑이어도 부부가 되면 서로 말을 편하게 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장인 남편에게 “부장님 나 바바바.” 이렇게 말한다면 관찰자의 입장에서 당연히 ‘저 부부는 뭐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인도네시아의 병든 아이를 방문하고 ‘화보’를 찍은 사건도 저잣거리에서 계속 ‘나대기’의 한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엉뚱하게 조명을 사용했느니 마느니의 논쟁이 벌어졌지만, 조명 사용의 흔적이 명백하다.(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kXQ8AdbgDQQ, https://twitter.com/schema35943103/status/1594283182501003264?t=ebSwd9YZA_1HEOM56UTPPQ&s=32) 이 비디오를 보면 광원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광원의 조명에 따라 캘빈도도 차이가 난다. 경찰에 고발된 상태이니 사실이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김건희의 언행이 그로테스크하지만, 법적으로 단죄하여 김건희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나댄다’고 해서 비난하기도 께름칙하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집단의식이 ‘나대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과연 고학력 고위직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럭셔리 굿즈를 마다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이른바 ‘돈 귀신’과 ‘물질 귀신’에 빙의되어 문자 그대로 미친 듯한 ‘소비 중독’과 ‘과시 중독’에 걸린 사람이 대부분인 한국 사회의 누가 감히 돌을 들어 김건희에게 던질 수 있겠는가?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다듬고 옷을 고르느라고 출근 시간이 늦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운전 중에도 티코는 물론 ‘레이’나 ‘아방이’가 끼어들면 속으로 ‘감히’, ‘건방지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을 것이다. 내 차는 ‘뻰찌’나 ‘비머’, 아니면 ‘랜드로버’ 정도는 되니 말이다. 식당에 가서도 저절로 말이 짧아지는 경험도 많이 하지 않았나? 내가 이래 봬도 스카이 출신의 고위 공무원, 대기업 간부이니 말이다. 저절로 반말이 나오고 저절로 나대고 싶어 손과 입이 근질거리지 않나? 그런 ‘주제에’ 어찌 감히 김건희를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잘 나간다고 나대고 살아간다면 그럴 자격이 없다.      


서두에 인용한 성경 구절에서 예수는 기세 등등한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군중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그렇다. 지극히 병든 사회에서 오래 버텨내고 더구나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현재 한국의 내로라하는 ‘나리’들이 몸소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뭘 하는지 신문 보고 알고, 행안부 장관은 생때같은 국민 수백 명이 서울 시내 한가운데에서 죽고 다쳐도 내 일이 아니란다.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로 이어져 온 이른바 수구 정권에서 사회의 집단의식이 ‘능력주의’를 빙자한 ‘나대기 정신’으로 굳어진 결과의 일부 현상이 바로 김건희일뿐이다. 김건희는 사회악도 그리고 그 원인도 아니다. 다만 한국의 지극히 병든 물질주의, 출세주의, 쾌락주의라는 집단의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병리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진보 언론과 촛불이 김건희와 윤석열의 ‘나대기’와 ‘반말’을 비난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물이 이미 푹 썩었는데 그 물에서 잘 놀고 있는 물고기를 비난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구나 마음 속은 푹 썩은 주제에 양반인척 가면을 쓰고 남만 욕하며 사는 사람으로 넘치는 병든 연못에서 말이다. 그런 병든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맑은 물’로 환수하기 전까지는 언감생심이다.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까? 기도하면 되나? 촛불은 이미 타오르고 있지만 아직 때가 안 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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