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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Dec 04. 2022

왜 윤석열의 동상을 세워야 하나?

‘합법적’ 독재자의 말로는 늘 비참했다.

민주당에서는 윤석열이 독재, 특히 ‘검찰 독재’를 한다고 난리다. 그런데 과연 윤석열이 독재자인가? 정답은 ‘맞다.’이다. 물론 독재의 학문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윤석열만이 아니라 강력한 대통령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모두 독재자다. 정확히 말해서 ‘합법적 독재자‘이다.   

   

합법적인 의미의 ‘독재자’라는 단어의 기원은 고대 로마제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화국의 율리우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100~44BC)의 전임자인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138~78BC)가 인류 역사 최초의 합법적 독재자다. 원래 그 시대의 독재자는 법적으로 원로원의 동의를 받아 제한된 동안 단독으로 로마 공화국을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였다. 사실상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는 대통령제에서 선출하는 대통령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그 기간이 로마 공화국 때보다 조금 길 뿐이다.      

고대 로마시대의 술라는 실제로 종신 독재자의 길을 닦아 놓았지만 헌정 위기를 초래할 위험에 처하자 알아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몇 년 후에 병사해서 큰 소란이 없었다. 그러나 시저는 갈리아 지방에서 한바탕 전공을 세운 뒤 정적들을 몰아내고 술라의 뒤를 이어 기원전 49년에 10년 임기의 독재자에 오른 지 5년 만에 아예 ‘종신 독재자‘(DIctator perpetuo)가 되었다. 전임자인 술라도 겨우 1년 임기의 독재자가 되었지만, 자신의 개혁안이 원로원에서 승인되자마자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도 그랬다. 영원한 권력자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유신 헌법을 제정하고 종신 대통령을 획책하다가 김재규의 총알 두 발에 황천의 객이 되고 만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법을 바꾸어 가며 종신 독재를 꿈꾸었던 시저도 그 직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원로원에서 수십 명의 칼에 찔려 비명횡사하였다. 종신 독재자라는 지위도 그의 생명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독재자의 말로가 비참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근세 역사를 보아도 다르지 않다. 레닌은 말기에 병들어 휠체어에 간신히 몸을 의지했고, 스탈린은 심장마비로 1945년부터 고생하다가 8년 만에 급사했고, 히틀러는 자살했다. 독재자 가운데 매우 비참한 최후는 무솔리니가 맞이했다. 극우 파시즘의 원조인 그는 독일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애인의 손을 잡고 도망가다가 빨치산에게 잡혀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 즉결 총살형을 당했다. 그의 애인이 몸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먼저 총알 밥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분을 참지 못한 민중의 린치로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채로 그의 시체는 밀라노 광장에 애인과 더불어 거꾸로 매달려 공개적으로 능욕당했다. 사실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독재자에게 내리는 정당한 형벌이었다. 그 뒤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독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특히 리비아의 카다피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국민을 적으로 삼는 독재자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독재자를 꿈꾸는 자들이 넘쳐난다. 중국의 시진핑이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하겠다. 그리고 독재자의 배우자가 된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맘대로 살고 싶은 마음에 나라를 뒤집어 놓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 멋대로 사는 삶의 말로가 어떤지를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인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이다.     


다시 윤석열로 돌아가 보자. 윤석열은 어떤 독재자인가? 일단 민주당이 말하는 식으로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사 독재자는 아니다. 윤석열은 부동시로 군대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이니 말이다. 그리고 권력을 군사력으로 찬탈한 적도 없다. 그럼 합법적 독재자인가? 적어도 로마 공화정 시대의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로마의 독재자가 원로원의 동의로 일정 기간 로마 공화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동의로 5년 동안 나라를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치체계에 ‘독재자’는 사실 앞에서 말한 ‘종신 독재자’를 의미하는 것이니 윤석열을 현대적 의미의 독재자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겨우’ 5년짜리 권력을 쥐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윤석열이 지난 6개월 동안 보여준 언행은 고전적 독재자로 불려 마땅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독재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행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히려 ‘독고다이’다. 독고다이는 무엇인가? 일본어로 톳코우타이(特攻隊, とっこうたい)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특공대인데 제2차 세계대전에 있었던 카미카제, 곧 자폭 특공대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역사가 있는 용어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독불장군’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독재자나 독고다이나 하는 짓은 비슷다. 한 마디로 자기 멋대로다. 자기가 법이고 원칙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변덕에 따라 맞추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거의 정신병자가 되어 버리기 일쑤다. 윤석열은 MBC만이 아니라 언론사 전체를 보이콧하며 비공개 일정으로 YS의 무덤을 찾았다. 김건희가 모든 일정을 비공개로 하고 오로지 대통령실을 통해 사후에 선택하고 보정한 사진만 공개하더니 그대로 따라 할 모양이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던 도어스테핑도 때려치울 모양이다. 이런 윤석열을 보고 민주당에서는 군사독재자를 연상시킨다는 비난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 와중에 MBC는 천인 공로할 자칭 ‘도사’라는 자의 ‘비리’를 밝히는 방송을 강행했다. 이에 맞서듯 대통령실에서는 아예 MBC 출입기자 등록 취소도 검토한단다. MBC는 지난번 김건희의 ‘비리’를 밝힌 방송 이후 계속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자 <일간베스트>에는 대통령실 관리(이기정 홍보기획비서관)와 입씨름을 벌인 MBC 기자를 두고 ‘내가 총대 메고 MBC 기자 죽인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시되었단다. 그러자 경찰은 기자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신변 조치로 112 시스템에 등록까지 하고. 한마디로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윤석열이 등단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해서 말이다. 요즘 윤석열의 행보는 지난 6개월간 벌어진 사달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김건희 팬카페 방장이었던 강신업이라는 자는 아예 윤석열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난리다. 사실 모든 나라와 시대에서 독재자의 동상은 반드시 세워졌다. 그리고 그 독재자의 동상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생전에 세워졌다. 그리고 심지어 그 앞에서 반드시 절을 하도록 법이 만들어졌다. 이제 광화문 앞에 윤석열의 동상이 세워지고 ‘법대로’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날이 곧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법대로 하면 안 될 일이 없으니 말이다. 이 나라가 지금 기형적인 ‘법치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지 않은가?     

로마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당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흔히 황제의 동상에 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유대인이라서 벌어진 사달이다. 유대교의 십계명 가운데 첫째 석판에 있는 계명에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어떤 형상으로도 신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신명 5,6-10)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탈출, 20,1-6)     


십계명의 둘째 석판에 나오는 조항은 성경의 책에 따라 다르게 나오지만, 첫째 석판에 나오는 이 우상숭배 금지와 안식일 준수는 신과 관련되는 것으로 특이한 차이가 없다.      


이 무시무시한 계명에 충실한 유대교인들의 전통을 따르던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도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임자들의 동상에 절하는 것이 왜 우상숭배였나? 그 당시 로마 황제들은 자신이 성자 곧 성부의 아들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로마 시민들은 받아들였다. 기독교인에게 성부와 성자는 야훼와 예수였으니 이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인가? 아니다. 이런 우상숭배는 20세기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광적인 우상숭배의 대상이었다. 마오쩌둥과 차우셰스쿠도 우상숭배의 대상이었다.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한반도에서 박정희를 우상 숭배하는 무리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승만의 동상을 세우고 숭배하던 시절도 있었다. 전두환마저도 동상이 있다. 심지어 어느 시골 구석에서 미관말직에 다리를 건 자도 자기 흉상을 걸어 놓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러니 윤석열의 동상을 세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독재자들은 이렇게 동상에 미친 것일까? 당연히 종교적인 해석으로는 마귀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령은 인간의 에고(ego)를 꼬드겨서 네가 바로 신과 같은 절대 권력자라는 속삭임을 귓가에 흘린다. 그러면 그 권력자는 머리가 돌아버려 자신이 정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한몫을 차지하려고 눈이 벌건  ‘십상시’나 ‘윤 핵관’과 같은 간신배가 그 독재자 귀에 대고 찬가를 불러댄다. 독재자 앞에서 “영군이십니다.”라고 합창한다. 그리고 그 독재자의 아내에 대한 아부에도 소홀함이 없다. “천하절색이십니다.”라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상숭배의 프레임을 구축하고 나면 그 독재자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일반 백성은 우상숭배의 광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 독재자가 무슨 짓을 하든 열광적으로 찬미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프랑코의 스페인,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의 북한에서 이미 목격한 것이다. 이러면서 나라가 다 같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쳐 돌아가는 일’이 지금 다름 아닌 한반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매우 ‘합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독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실 그런 최후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 세계는 종교에서 말하는 인과율과 더불어 융이 말한 동시성의 원칙이 지배한다. 악을 행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저주를 받으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과율과는 별도로 많은 사람이 무의식에서 느끼는 것은 결국 그 느낌과 일치하는 현상이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이 개인의 내면에서 느끼는 것이 다른 많은 이들과 공유되는 수준에 이르면 일종의 ‘염력’이 커다란 힘을 발휘하여 현실에서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윤석열이 권력을 잡은 지 겨우 6개월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를 반대하고 심지어 적지 않은 이들은 그와 그의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넘어서서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윤석열과 김건희는 아직 잘 버티고 있다. 왜 그런가? 아직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윤석열의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몰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 ‘때’를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한다. 이는 크로노스와 다른 개념의 때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Χρόνος)는 우라노스의 막내아들로 어머니 가이아의 계략에 따라 아버지를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막내아들인 제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크로노스가 원래 시간을 장악하여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유한한 삶을 살았으나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축출한 덕분에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이 신화에서 비롯되어 그리스어 ‘크로노스’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가역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내아들이었다. 모든 신들은 카이로스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찬탈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회를 놓쳤다. 그런 기회는 한 번 오면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앞머리만 치렁치렁하고 뒤통수는 민 대머리를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다가오는 기회는 잡기 쉽지만 지나간 기회는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신업은 김건희 팬카페 방장이었고 이미 여러 기행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에 성공한 자다. 그런 그가 윤석열의 동상을 세운다고 주장한 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객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동시성의 하나의 징표가 될 것이다. 동상은 결국 독재자의 패망과 직결된 현상인데 그가 그런 발언을 한 것이다. 예언은 무당이나 점쟁이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백성들도 자기도 모르게 예언을 하고 그것이 맞아떨어지는 일은 얼마든지 벌어진다. 특히 무심코 내뱉은 말이 마치 자기 충족적 예언처럼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런 무의식적 발언으로 집단의식이 드러나 현실과 맞아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무심히 한 말이 결국 이미 벌어질 일을 예언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국민은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사악한’ 독재자를 허용한 것일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자가 왜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국무총리를 할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함석헌이 말한 것과는 반대의 의식 수준에 국민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깨어있지 않은 민족에게는 독재자가 오히려 반갑다. 모든 ‘귀찮은’ 일을 그 독재자에게 다 맡겨 버리고 그저 그가 자기를 구할 메시아가 되기를 빌면 될 뿐이다. 그래서 그를 우상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미친 독재자가 그런 백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는가?     


그런 무지한 백성과 악령에 물든 독재자가 콜라보해서 만든 것이 나라의 분열과 갈등과 분노와 저주다. 그리고 그 끝은 패망이다. 점술과 영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한국의 내년의 정치적 경제적 전망은 매우 어둡다. 국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도 여전히 윤석열은 권력 다툼 ‘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를 맹목적으로 우상 숭배하는 30% 남짓의 무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머지 70% 정도의 백성들은 억울하지만 그 흔들리는 배에서 함께 멀미할 수밖에 없다. 깨어있지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담담히 2023년에 대한민국에 들이닥칠 대파국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만 하면서 말이다. 그 전조를 이미 시진핑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얼마 전에 실질적인 종신 독재자가 되었다. 물론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파국의 전조라는 것을 시진핑과 그 졸개들 외의 사람들은 다 ‘느끼게’ 되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 방역 조치에 대한 반발이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를 눈치챈 시진핑도 결국 강력한 코로나 방역을 완화하는 조치를 시작하였다. 천하의 종신 독재자도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 곧 천심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진리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어도 민중의 또 다른 형태의 저항이나 권력 암투가 그의 몰락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왕조가 아닌 나라에서 ‘합법적인’ 종신 독재를 꿈꾼 자의 말로가 비참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윤석열이 지금 그런 독재자의 흉내를 내고 있다. 툭하면 반말이고, 국민의 의사 표현을 무조건 ‘법대로’ 찍어 누르려고만 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김건희의 ‘만행’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못 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행태가 독재자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서 이제 윤석열이 스스로의 파멸을 불러오게 될 것이 자명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파국이 오면 윤석열을 반대하는 이들은 물론 그를 ‘우상숭배’하던 이들도 모두 윤석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결국 거꾸러뜨릴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윤석열과 무관하다고 난리를 피울 것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광적으로 우상 숭배하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국민이 보여준 그 ‘태도 전환’처럼 말이다. 그것이 악한 영에 물든 인간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래서 사실 내년에 한국에 사달이 나도 그것은 근원적으로 윤석열과 김건희만의 단독 책임이 아니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악한 무리들과 그런 사달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고 침묵한 ‘비겁한’ 나머지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벌써 윤석열과 김건희가 너무 불쌍하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악령이 시키는 대로 악을 행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사달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마치 그들만이 악령에 물든 것처럼 비난받으면서 말이다.    

  

바울은 <갈라티아서>에서 악령과 성령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언행을 명확히 구분해 주고 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시비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갈라 5,13-16)     


악령의 명령에 따른 육의 행실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이다. 지금 윤석열 김건희 커플과 ‘윤핵관’ 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딸랑이들’,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광적인 ‘팬덤’이 보여주는 모습 아닌가? 성령에 따른 행실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뿐이다. 그런데 과연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런 행실을 보여주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윤석열과 김건희를 저주할 뿐 그들을 오히려 측은히 여겨 그들의 영혼을 구할 생각을 하는 이는 없다. 이제 윤석열과 김건희는 그저 술상에서 뜯는 ‘노가리’ 안주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라 전체가 두 패로 갈려 바울이 말한 대로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 그 결과를 바울이 또 말한다. “서로가 파멸”할 뿐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불교와 기독교적인 상선 필벌의 인과율만이 아니라 융의 동시성의 원칙으로 바라보아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너무나 암울하다. 누가 과연 이 난국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시절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기도만 할 뿐이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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