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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13. 2023

독일 초대 수상 1

1949~1950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1차 총선 포스터의 아데나워



정부 구성 1949  

   

‘아데나워가 언제부터 독일연방 수상이 되고자 했나?’라는 상당히 한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증언은 프링스 추기경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아데나워의 딸 리베트와 헤르만-요제프 베어한의 약혼식에서 아데나워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였다. 프랑스 추기경은 “얼마 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아데나워 씨에게 인사하게 될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독일연방 수상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꿈을 더 잘 펼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법에 수상직에 관련된 제도적 조항이 확정될 무렵에 그가 수상이 될 결심을 했을 것으로 거의 확실하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월 자민당(FDP) 의원인 토마스 델러와 막스 베커가 미국식 대통령제 수립하자는 제안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유력 정치가들은 아데나워를 오래전부터 잘 알았기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자민당(FDP)의 유력 정치가들에게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의회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하여 인사 문제를 꿰뚫고 있던 헤르만 회프커-아쇼프는 선거 당일에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 거론되던 테오도르 호이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거 후에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연정이 이루어지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아데나워가 수상이 될 것입니다. 퓐더는 능력이 없는 인물로 고등법원으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아데나워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 바로 [미영 공동지역] 경제위원회의 감독관이었던 헤르만 퓐더다. 그러나 그는 명목상의 대안이었을 뿐이다. 그는 기민당(CDU) 의원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쾰른 지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아데나워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상대로 싸워 수상이 되어보겠다는 환상을 전혀 품지 않을 사람이었다. 퓐더는 아데나워를 지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여기고, 암암리에 그 대가로 ‘국가관계부’가 수립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이미 프랑크푸르트에서 행정적인 기초를 짜 맞추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아데나워는 모든 외교 문제를 독일연방 수상실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에 더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퓐더는 조각(組閣)과 관련하여 전임 제국 수상인 한스 루터에게 매우 섭섭한 생각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루터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인 호이쓰에게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를 할 때 퓐더가 경제부장으로 수행한 업적에 대하여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더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퓐더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이것이 전부입니까?’라는 귀하의 질문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실 매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14명의 구급대원에 제가 더 이상 속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실 그에게 [관직이라는] 포도는 너무 시어 있었다. 이전에는 좋았던 아데나워와 퓐더의 관계는 [퓐더가] 1년 반에 걸쳐 감독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나빠졌다. 개인적인 갈등, 어쩌면 퓐더에게는 [아데나워가 자신을] 프랑크푸르트에 내버려 두었다는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1949년 3월 퓐더가 루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회의적으로 들린다. “이제 본에서 출범할 새로운 연방이 우리에게 놀라운 개선을 가져다줄지는 좀 더 기다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식량농업부 부장 한스 슐랑게-쉐닝겐 또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커다란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점점 더 비판적으로 대하였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프랑크푸르트의 농업정책은 종종 [사람들의] 항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슐랑게-쉐닝겐을 여러 모로 여전히 대연정을 찬성하는 인물로만 여기게 되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그가 독일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려는 성향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보였다. 또한 이 제국시대의 장관이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니더작센의 기민당(CDU) 지도부의 귄터 게레케와 친분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인맥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두 사람은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속했었다. 게레케는 왕국과 프로이센 제국의 관구지도관을 지냈고, 그 후에는 제국의회의 의원을 지내고, 마지막으로는 슐라이허와 히틀러 내각에서 일자리창출부의 제국위원으로 일한 인물이다.   

   

슐랑게-쉐닝겐 또한 연방의회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단 자기 욕망에 비하여 낮은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아데나워의 인사 계획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올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슐랑게-쉐닝겐은 정치적으로 북부 독일의 기민당(CDU) 개신교 지방 단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헤르만 퓐더보다 그의 야망을 더 경계해야 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가 결코 출세의 길을 달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더욱 굳게 다짐한 것이다. 슐랑게-쉐닝겐은 총선이 끝나고 1주일이 지난 때의 [관직을 둘러싼] 자리다툼에서 밀려나 결국은 런던의 총영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 차원에서도 불만의 원천이 제거되었다.  

   

아데나워는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의 야망을 가장 심각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는 경제위원회의 기민당(CDU) 대표로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홀츠아펠과 마찬가지로 경제위원회에서 공적을 쌓은 게르트 부체리우스가 나중에 전한 바에 따르면 홀츠아펠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근무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아데나워는 기민당(CDU) 안에서 권력 기반을 지닌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신의 눈으로 그를 대하였다. 홀츠아펠은 원래 빌레펠트의 상공회의소 소장으로서, 제3제국 시절에는 헤르포르트에 있는 빗자루와 솔 생산 공장을 공동 운영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국가인민당(DNVP) 출신으로서 슐랑게-쉐닝겐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개신교 노조 계파의 대표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경제정책에서 자유주의자이고 외교적으로는 민족주의자인 그는 그 무렵까지는 아데나워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그는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홀츠아펠은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소연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방의회에서 개최된 첫 당무회의에서 홀츠아펠은 자기 진심을 슬쩍 내비쳤고, 그제야 아데나워는 홀츠아펠이 자신이 수상직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는 차가운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홀츠아펠은 기민당(CDU) 뿐만 아니라 대통령실과 수상실에도 그러한 자기 뜻을 전하고, 테오도르 호이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홀츠아펠은 이리저리 생각하여 가톨릭 신자인 아데나워를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어쩌면 다시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자신이 독일연방 수상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인사 문제라는 것이 [원래] 몇 년에 걸쳐 마무리되는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정부 수립] 첫 주에 여러 가지로 홀츠아펠과 충돌하고 나서 그를 밀어내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홀츠아펠은 [별 볼 일 없는] 당대표 직무대행 자리를 맡게 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아데나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본에서도 한 자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커다란 소동을 피우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을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만을 등용하리라고 결심하였다. 여기에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 [영미] 공동지역에 있는 법률사무소의 발터 슈트라우쓰, 그리고 누구보다도 안톤 슈토르흐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슈토르흐는 노동청 청장으로서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불만이 가득한 거물들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 다양한 동기로 ‘대연정’을 촉구하는 세력이었다. 아데나워의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인물들인 주지사들은 의회에 진출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들을 격파하는 데에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당장 바이에른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아데나워는 도발적인 편지로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핵심 인물인 한스 에하르트 주지사에게 구애 작전을 펼쳤다. “이 위급한 시기에 기사당(CSU)이 귀하의 강력한 지도 아래 놓여 있기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이 두 사람은 8월 2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로부터 하루가 지나서, 곧 독일연방공화국의 제1차 총선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 아데나워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고위 정치가들 일부를 뢴도르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 여러 소문을 일으킨 이 회담은 8월 21일 일요일에 열렸다.

    

루돌프 모르세이스의 연구에 따르면, 아데나워와 에하르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나눈 대화는 그다음날 이루어진 뢴도르프 회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민당(FDP)과 연정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매우 친절하였다. 아데나워가 말한 바에 따르면, 사실 에하르트라는 인물이야말로 독일연방 수상이 될만한 재목이었다. 그러나 기사당(CSU)이 헌법에 반대투표를 하였기에 아쉽게도 이는 난망한 일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참석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것은 전략적인 반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에하르트는 그러한 결과가 자신이 후보로 나서는 것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가 독일연방 수상 후보가 되는 것에 찬성한다는 의사 표시를 미리 한 것이었다. 아르놀트가 독일연방 수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반대하는 처지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데나워는 에하르트를 연방참사회 의장 후보로 밀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독일연방 대통령으로는 테오도르 호이쓰가 물망에 올랐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처음부터 인맥 정치에 이용되었다. 이 자리는 자민당(FDP)에는 매우 먹음직한 미끼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안에서 바로 드러난 것처럼, 가톨릭 파벌만이 아니라 이 당에 속한 많은 정치가에게 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독일연방 대통령으로 에리히 쾰러도 거론된 바가 있었다. 이리하여 대다수가 대연정을 지지하는 헤센의 기민당(CDU)의 전선에 쐐기를 박아 넣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쾰러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위급한 경우에는 그와 결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년이 지나고 나서는 실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다. 곧 독일연방 수상 [아데나워는] 쾰러를 호주 총영사로 점지하여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사실 연방의회 의장이 되지 못한 인물을 독일연방 대통령으로 미는 것은 기사도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쾰러에게 이란 총영사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쾰러는 두 가지 제안을 모두 사양하였다. 1957년까지 쾰러는 독일연방의회에서 일반 의원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영미] 공동점령지역 경제위원회의 주요 위원이었던 쾰러는 이제 거물이 되었고 아데나워가 계략에 활용할만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연정 협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와는 일단 협상 대표단에 관하여 아무런 논의를 하지 말아야 했었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연방정부의 경제부장관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중요한 결정들 또한 여기에서 미리 내려졌다. 야콥 카이저는 ‘동부지역과 난민 문제부’ 장관으로 임명될 것이었다. 그런데 연정 협상의 과정에서 [담당 부서가] ‘전독문제부’로 축소되었다. 그는 선거전 동안에 이미 전적으로 아데나워 측에 섰고 칼 아르놀트나 베르너 힐퍼트의 대연정 제안에 동의할 의사가 별로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특히 선거전에서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의 거친 공격에 매우 분노하였다.   

   

놀랍게도 아데나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진 이 정상회담에서 외교정책을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의 직속으로 차관을 두어 외교 문제를 다루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용의주도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던 헤르만 퓐더는 헛물만 켜게 되었다!

     

반면에 재무장관 자리를 놓고는 이미 갈등이 벌어졌다. 한편으로는 바이에른이,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FDP)이 이 자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이미 테오도르 호이쓰가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난 이 단계에서 자민당(FDP) 수뇌부는 연방부수상과 국가재건부 장관으로 프란츠 블뤼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며칠 뒤 에하르트는 자신이 프랑크푸르트 대담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자민당(FDP)과 연정하는 구상에 동의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화가 났다. 그것 때문에 그는 대연정을 훨씬 선호하는 이른바 남부 독일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에 속하는 주지사들의 통일전선에서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의 기사당(CSU)의 요청을 개인적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관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의회위원회에서 원내대표를 역임한 안톤 파이퍼는 기사당(CSU)의 선거 결과가 나빴던 탓에 독일연방의회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는 의회에 진출한 프리츠 쉐퍼를, 그의 유명한 고집 때문에, 특별히 신뢰하지 않았다. 기사당(CSU)의 신임 사무총장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당 안에서 요제프 뮐러 계파의 젊은이로 알려져 있었다. 에하르트의 관점으로는 정황상으로 8월 20일에 아데나워와의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자신이 생각한 연정을 위해 중요한 사전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에하르트가 다시 조심스럽게 그와 거리를 두려고 하였지만 이미 달리고 있는 기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열린 뢴도르프 회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늘 그것이 아데나워의 탁월한 전략적인 성과라고 경탄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이는 8월의 일요일인 이날 그는 대규모 커피 대담에 신사들을 초대한 것이다. 이때 그는 당연히 향응을 베푸는 사람이자 당대표였다. 초대자 명단은 아데나워가 직접 작성하였다. 그 명단에는 총 26명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2명의 주지사, 곧 라인란트-팔츠의 페터 알트마이어와 튀빙겐의 겝하르트 뮐러가 있었다. 그리고 수석부장인 퓐더, 프랑크푸르트 경제위원회의 지도부에 있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경제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기민당(CDU) 의원인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 에리히 쾰러, 테오도르 블랑크, 그밖에 지방당 대표들도 있었다. 바이에른 주의회 의장인 호르라허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를 대신하여 바이에른 대표로 안톤 파이퍼가 참석하였다, 자기 상사인 [아데나워의] 수족 역할을 하는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과 요제프 뢴스도 참석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대연정을 지지하는 이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이들을 이 회의에 의도적으로 초대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마키아벨리즘적인 해석은 칼 아르놀트가 불참한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나온 것이었다. 사실 대연정을 찬성하는 측의 적절한 대표로 주지사인 알트마이어와 뮐러, 그리고 남부 바덴에서 온 베르너 힐퍼트, 귄터 게레케, 안톤 디흐텔이 참석하였다.    

 

국가 정책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유명한 기조연설을 통하여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CDU)과 기사당(CSU)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구성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결국은 쿠르트 슈마허 자신이 (CDU)과 기사당(CSU)과의 연정을 반대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또한 에하르트 주지사도 무엇보다도 바이에른의 재촉을 의식하여 자신이 제시한 해결책을 선호한다는 것도 밝혀내었다. 그러나 사민당(SPD)과의 연정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민당(FDP)이 극우적 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계속 트집을 잡자 아데나워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이제 독일당(DP)과의 연정 협상을 “시도하기 시작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 독일당에 있는 헬베게와 세봄이 “성실하고 신사다운” 이들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정확히 구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함부르크의 은행가인 샤른베르크, 말없이 경청만 하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립된 연정의 지속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이한 것은 테오도르 블랑크와 야콥 카이저 같은 노조원들도 이러한 노선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블랑크는 이 기회에 “영리한 경제정책을 통하여 사회정책을” 가능하게 한다는 에르하르트의 생각을 자신이 열렬히 지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야콥 카이저는 이제 사민당(SPD)에 대한 깊은 불만을 마음에 담게 되었다. “슈마허는 독일의 불행이다.” 그래서 사민당(SPD)에 맞서 나아가려면 다수 내각을 수립해야 했기에 중앙당(Zentrum)에도 공을 들여야 했던 것이다!      


특히 이때 헤르만 퓐더와 에리히 쾰러가 아데나워의 노선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지했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보수주의자인 칼 슈뢰더도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그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마찬가지로 연정에 독일당(DP)을 끌어들일 것을 역설하였다. 슈트라우스가 보기에, 그러지 않으면 기사당(CSU)이 과연 기민당(CDU)과 연합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해 보아야만 할 일이었다.   

  

이 기조연설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대연정을 찬성하는 이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이제 아데나워가 지역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광범위한 집단을 자기 지지 세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곧 그는 경제계 계파, 노조, 가톨릭, 개신교, 영국 점령지역만이 아니라 남부 독일의 기민당(CDU) 인사들, 그리고 서남부 독일의 정치가들의 지지도 확보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지속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의 변론은 쾰른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의 기술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의 변론은 “마치 들판에 내리는 비처럼 모든 반론을 부드럽고 천천히 무력하게 만들며” 참석자들 위로 쏟아졌고 저항을 무너뜨렸다.     


최종적으로 국가 최고위직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 겝하르트 뮐러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아데나워의] 발언을 기록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핑크 씨는 란다우에서 매우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글쎄 제가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연방정부 수상입니다.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수상이 되고 싶습니다. 제 나이가 73살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저는 수상의 직무를 수용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통령은 당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영국 점령지역에서 당권을 지닌 사람입니다. 우리 당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제가 없으면 지난 일요일에 제기된 중요한 과제들을 지속적으로 완수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통합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 저는 국가 차원의 문제와 행정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습니다. 셋째, 저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람들이 호이쓰를 대통령 후보로 논의하도록 하였다.     


[총선 때의] 선거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는 [역설적이게도] 아데나워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사민당(SPD)의 주지사들과 카를로 슈미트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역당대표인 프리츠 헨쓰러의 반대를 무릅쓰고 슈마허는 사민당(SPD)이 야당으로 남도록 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사민당(SPD)에 경제 정책에 관한 책무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정부 내각에 참여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확고한 반대 의견의 배경에는 시민 파벌이 조속한 시일 안에 무너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데 되면 사민당(SPD)이 내거는 조건에 따른 대연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여전히 대연정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는 기민당(CDU) 정치가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국 점령지역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강력한 권위를 발휘하여 하나의 정파를 규합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정파는 일단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정파가 규합되는 과정에서 의회위원회의 전임 의장이며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수이고 동시에 회의의 최고령자인 인물을 이 정파의 대표로 선출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이 중요한 단계에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협상 대표로 나서게 되어 비록 방해나 비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지를 관철할 기회가 생겼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안에서 대연정을 찬성하는 이들은 이제 그들의 목적을 우회로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면 대결하기로 결심한 [아데나워라는] 당대표가 일단 협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연정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선 문제를 물고 늘어져서 특히 자민당(FDP)의 불신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자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8월 말과 9월 초에 연정 자체나 연방정부 수상의 직위를 요구하는 아데나워에게 커다란 거부감을 지닌 이들이 일단 테오도르 호이쓰의 대통령직에 대한 반대의사 표명이 노골화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당파를 초월해야 하는 대통령직은 당대표가 차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연정 협상을 대통령 선출과 연계하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짓이다! 카를로 슈미트는 블랑켄호른과 나눈 비밀 대화에서 “이는 헌법을 위배하는 것입니다!”라고 비난하였다. [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의] 대통령이었던 겝하르트 뮐러는 같은 생각을 약간 온건한 언어로 표현하였다. 결국 테오도르 호이쓰가 적임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로 의회위원회의 중요한 문화정책적 문제에서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에 커다란 어려움을 불러일으킬 인물이 아니던가? 많은 사람에게 그의 경제자유주의는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노조 계파에 속하는 알로이스 렌츠는 당내에서 벌어진 격렬한 토론에서 그를 “멘체스터 사람!”이라고 불렀다. 렌츠 자신은 독일노조연맹 의장인 한스 뵈클러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계파간 협상에서 그는 호이쓰의 대통령직 취임이 기민당(CDU)과 기사당(CSU)과의 연정에서 전제 조건임을 분명히 하였다.      


당내의 반대에 당면하여 아데나워는 이제 독일연방 대통령 선출과 연정의 연계를 분명히 하였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이 한스 에하르트를 위해 자민당(FDP)의 표를 얻으려면 그 당의 대표가 독일연방의회에서 테오도르 호이쓰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실패에 이를 뻔하였다. 칼 아르놀트가 프랑스 점령지역의 기민당(CDU)과 사민당(SPD) 주지사들과 협력하여 예상치 못한 반란을 일으키며 그들이 택한 사람을 독일연방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아데나워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에하르트는 속았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기사당(CSU)은 이제 재무장관직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민당(FDP)도 노리는 자리였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동분서주하며 지속적으로 최신 정보를 얻고 다니던 블랑켄호른에게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곧 사민당(SPD) 안에서는 슐랑게-쉐닝겐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정서가 퍼져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한스 에하르트는 자신이 연방 대통령 후보로 나서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며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자민당(FDP), 독일당(DP), 바이에른당(BP)의 다수가 자신을 밀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흔들림 없이 호이쓰를 계속 밀고 있었다. 당내의 다수는 호이쓰를 밀고 있었고, 반대는 소수에 그쳤다. 국가수반에 관한 논쟁과 나란히 재무장관, 법무장관, 건설부장관에 관한 끈질긴 줄다리기도 지속되고 있었다.     

[정치] 만화경의 장면은 날마다 바뀌고 있었다. 슐랑게-쉐닝겐는 결국 당 동료들에게 자기 입장을 밝혔다. 곧 당대표와 원내대표의 명시적인 뜻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결국 아데나워와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종교적 교파 문제 또한 어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쿠르트 슈마허가 아데나워의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슈마허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 또한 대통령 후보로 모든 당이 원하는 통합 후보가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대연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리되자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다수는 호이쓰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투표에서 호이쓰는 과반수 득표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2차 투표에서는 후보로 선출되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투표권자 가운데 17명은 호이쓰에게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기 후보직을 놓고 근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이 그의 후보직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특히 야콥 카이저는 승리가 확실한 그의 경쟁자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가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의원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연방정부 수상 후보를 지명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가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경고합니다. 저와 함께하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이날이 9월 1일이었다. 그날 이후 실제로 [사람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2주 후에, 연방정부 수상 선거 하루 전날 분위기가 매우 나빠졌다. 브렌타노와 홀츠아펠 측에서 무차별적인 공격이 가해진 것이다. 그들의 공격의 주된 내용은 과연 연방정부 대통령이 연방정부 수상이 제시한 내각 명단에서 특정한 인물을 거부할 수 있는기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암암리에 당내 중진들의 불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각 구성에서 민감한 인사 문제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브렌타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당원들의 이해를 확고하게 수호하는 자로 자처하며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선출되면 공석이 되는 당대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사람들이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아데나워가 독재자처럼 당을 휘젓고 있다는 비난이 당내에서 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비난을 농담을 섞어가면서 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모든 이는 매우 강력한 지도자를 선출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9월 14일 수상 선출 하루 전에 그가 주시하고 있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와 곧바로 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자기 당원들을 대상으로 즉시 연설과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 자리에서 내무부 장관의 인선 문제에 관한 논의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이미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와 게르트 부체리우스, 수석 장로인 헤르만 엘러스와 뒤셀도르프에서 개인적으로 선거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둔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아데나워에게 장관직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개신교 연맹 진영에 모종의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하인리히 바이츠나 로베르트 레어를 마음에 더 두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에게 내무부를 맡기는 조건을 요청하면서 이 문제를 일단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하이네만이 ‘모든 직무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이네만이 독일개신교연맹의 고위성직자로서 중요한 직위를 내려놓게 될 경우, 기민당(CDU)이 입을 손해를 감내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 후계자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연정 협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아데나워는 내일 반드시 투표가 개시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인사 문제, [인적, 물적] 자원의 분배, 정부 계획에 대하여 아무런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위급한 경우라서 바이에른당(BP)의 행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바이에른당(BP)은 1차 투표에서 기권할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고 나서 바이에른당(BP)이 2차 투표에서 요구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독일당(DP)은 심지어 아데나워에게 떼를 써서 당선각서를 서면으로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독일연방 수상 선거는 9월 15일 11시에 치르기로 확정되었다. 블랑켄호른의 기록에 따르면 자민당(FDP)의 아우구스트-마르틴 오일러 의원은 “수상 선출과 자민당(FDP)에 재무장관 자리를 배당하는 조건을 연계하는 식으로 작은 압박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조건을 물리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9시 30분에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원내교섭단체가 투표장에 나왔다. 다시 내무장관 자리를 놓고 논의가 있었다. 블랑켄호른이 참석 인원을 호명하는 가운데 3명의 의원이 빠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데나워는 슐레스비히 남부의 두 의원과 바이에른당(BP)의 찬성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사당(CSU)의 호르라허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10시 59분 정당연합 회의가 중단되었다. 11시 정각에 1차 투표가 개시되었다. 202명의 찬성표가 나와 간신히 과반수를 넘기게 되었다. 당연히 자신에게 투표한 아데나워는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발표되자 그는 걸죽한 쾰른 사투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한번 잘 끝났네요!”(Et hett noch enmol jut jegange!) 자민당(FDP) 위원 2명은 정당한 이유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기민당(CDU) 의원 가운데 5명이 반대투표를 하거나 기권한 것이 확실하였다. 그런데도 과반수를 넘긴 것은 기적이었다! 기사당(CSU)에서는 바이에른당(BP)의 요한 바르트너의 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확신했다.     


취임 선서를 마치고 나서 아데나워는 거의 1시간 동안 독일연방의회 식당에서 가족들과 축하 모임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오후 3시에 이미 하이네만과 1시간에 걸쳐 논의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제 막 취임한 수상에게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협상이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식으로 밤이 깊도록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그는 블랑켄호른과 함께 차를 타고 고향인 체닉스벡으로 갔다. 이때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블랑켄호른이야말로 아데나워가 수상이 되는 데에 결정적 책임을 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가 이제 모든 힘을 기울여 장수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불필요한 일을 줄이고 또한 잘 먹고 잘 쉬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뢴도르프의 밤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대규모 횃불 행렬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하루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밤 10시에 하인츠 루버스가 긴급 기자회견 안건을 들고 온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몇 주일이 지나갔다. 무대가 ‘쾨니히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연방정부 수상의 관저가 임시로 마련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번이라도 함께 일해 본 사람은 평생 지속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얻게 된다. 바쁜 일과 속에 있던 아데나워와 그의 직원들에게 박제된 동물들이 즐거움을 선사하였던 것이다. 그 동물들 가운데 일부는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또 일부는 검푸른 커튼 뒤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본에서 벌어지는 ‘인간희극’*이 그 요란한 동물왕국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정치적 포부, 소문, 원한, 분노가 들끓는 분위기에서 의원들, 고위 공무원들, 외교관들, 단체 대표들이 [아데나워라는] 최고위직 인물과 그의 측근을 만나러 떼를 지어 몰려왔다. 블랑켄호른은 이에 대하여 풍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방문이 있었다. 장관이 되고 싶어 하거나, [도저히] 그럴만한 인물이 아닌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앞으로 수년 동안 번복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아직 내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 ‘인간희극’[Comedie humaine, 역자주 – 프랑스 작가인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유명한 동명 소설에 빗댄 표현]     


재무장관직을 둘러싼 싸움에서 결국 프리츠 쉐퍼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는 뮌헨 출신의 61세의 인물로 아데나워가 끌어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 든 사람이다. 그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20년 바이에른 지방의회에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에른 민중당의 당대표를 역임하였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바이에른 주 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도 1944년 [나치] 제3제국의 체포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5년 미국은 골수 보수주의자인 그를 주지사로 임명하고 나서 얼마 안 가서 좌파자유주의적인 언론[관련] 결정이 내려지자 바로 해임시켰다. 쉐퍼는 기사당(CSU) 창당 발기인이었다. 그러다가 요제프 뮐러와 갈등을 벌여 잠시 당을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바이에른당(BP)과 잘 지내다가 1949년 초에 적절한 시기에 다시 기사당(CSU)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파사우 선거구에서 출마하고 아데나워가 보기에 칼 아르놀트가 연방참사회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불안해하는 기사당(CSU) 의원들이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을 떠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데나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얻게 되었다. 사실 쉐퍼는 자기 당 안에서도 분명히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곧 끈질긴 성격과 연방정부의 예산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는 기지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예산 절감의 대가만이 아니었다. 나훔 골드만은 쉐퍼가 이스라엘과 유대 단체들과 화해를 이루는 데에서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까다롭지만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다!” 아데나워는 어찌 되었든 쉐퍼가 모든 바람직하지 않은 [재정] 지출 요청을 막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일종의] 충돌방지장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기민당(CDU) 안에서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인 파벌의 요구를 차단하는 일에만 활용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기사당(CSU)이 내각에 들어오도록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쉐퍼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정] 지출을 하고자 할경우에는 그를 짠돌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결국 수상은 내각 구성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리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이네만과 대화를 나눈 다음 아데나워는 로베르트 레어를 내무장관으로 낙점하였다. 사실 그는 기민당(CDU)의 아르놀트 파벌에 속하는 이 사람을 내각에 받아들일 뜻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속을 알 수가 없어 예측하기 어려운 개신교 측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당내의 개신교 파벌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며 이제 만장일치로 하이네만을 추천하였다. 아데나워는 페르드멩게스를 본으로 긴급하게 소환하였다. 이는 하이네만이 6개월 전에 정말로 그를 ‘악당’이라고 불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내각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하이네만과 다시 대화를 가졌고 여기에서 만족할 만한 해명을 들었다. 그래서 하이네만은 마침내 내무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블랑켄호른은 레어가 “이 싸움에서 실망하며 물러났다.”고 하였다. 이후 몇 달 동안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에 대한 자기 본능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여러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1950년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장관을 물러나게 할 동기가 생겼다. 당이 그를 물러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제 드디어 로베르트 레어에게 기회가 왔다. 그의 장단점을 누구보다도 아데나워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 예측이 가능한 인물이었고 [아데나워에게 다행스럽게도] 그의 전임자 정도의 세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오토 렌츠가 비꼬는 듯이 말한 대로, 그는 내각에서 대부분 아데나워의 의견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노동부장관 임명에 대해서도 비슷한 불만을 지녔다. 기독교 노조원인 안톤 슈토르흐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노동부장으로 재직할 때 통합보험에 관한 문제에서 기존의 체계를 사민당(SPD)의 의도와 노조의 바람에 따라, 아데나워가 보기에 너무 지나치게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자민당(FDP)이 한 짓도 잊지 않았다. 자민당(FDP)은 정부 내각 발표 하루 전인 9월 19일 밤에 연정 협력과 슈토르흐의 입각을 연계시켰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추진력이 있는 테오도르 블랑크의 입각을 훨씬 더 바라고 있었다. 그는 기민당(CDU)의 노조 계파가 에르하르트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적절한 자신감도 지닌 인물이었다. 블랑켄호른은 8월 18일 블랑크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독교 노조원 전체에 비해서도 자신이 더 나은 인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도 바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회상임위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여 기사당(CSU) 출신의 막시밀리안 사우어보른이라는 인물을 차관으로 임명하여 장관의 감시자 역할을 맡겼다. 그는 장관과는 달리 기존의 사회보장체계를 견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일반적 신뢰”를 지닌 인물이었다. 슈토르흐도 내각의 장식품으로만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조 진영에 확실한 대안이 없기에 그는 1957년까지 자리를 보전하였다.

     

아데나워는 농업경제부 장관을 놓고 세 번째로 타격을 받았다. 아데나워가 염두에 둔 후보는 칼 뮐러였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과거 중앙당(Zentrum)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1919년 쾰른의 시의회 의원으로 있을 때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1945년 이후 함께 일했다. 아데나워는 오랫동안 라인란트 농업회의소 소장을 역임한 뮐러를 여러 자리로 이끌어 주고자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뮐러는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뒤셀도르프 주의회 의장의 직무대행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자기 정치적 추종자를 최소한 내각에라도 심어놓고자 하는 아데나워의 바람은 당내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뒤에서 이를 반대한 세력은 독일 농부연맹이었다. 이 연맹의 회장은 안드레아스 헤르메스였다. 헤르메스가 여전히 정치적 야망을 지니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내각 구성 초기에 농부연맹이 아데나워에게 하인리히 륍케를 선택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농부연맹이 사민당(SPD)의 사주를 받아 좌파에 속하는 인물을 내각에 들이밀고자 한다고 생각하여 륍케의 문제가 많던 농지개혁계획을 이유로 그를 거부하였다. 내각 구성의 최종 단계에서 아데나워는 잠시 이 자리를 안드레아스 헤르메스에게 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곧바로 아데나워에게, 헤르메스가 나돌니 대사와 함께 그 당시 대중의 많은 관심을 끈 고데스베르크 단체에 너무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돌니 대사는 소련의 영향력을 서양에 전달하는 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결국 아데나워는 기사당(CSU)의 빌헬름 니클라스로 타협을 보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농업부장의 직무대리로 일한 바 있었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 수상은, 안톤 파이퍼를 연방정부 수상실의 국제 업무 담당 차관으로 앉히려는 에하르트 주지사의 끈질긴 시도를 천신만고 끝에 막아내었다.     


내각의 기초를 어렵게 마련한 다음, 아데나워에게는 9월 20일로 예정된 정부성명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비록 아데나워가 9월 18일 블랑켄호른에게 자기 컨디션이 좋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이날 오전에야 그는 원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간에 쫓겨야만 비로소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정말로 촉박해졌다. 그는 9월 19일 오후 3시가 되도록 그의 참모들과 함께 진지하게 원고를 다듬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논의가 시작되었다. 밤이 되어서야 그는 초고를 완성하였다. 오전에 일부 내용을 교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장관 명단이 작성되었다. 10시 30분 독일연방 대통령이 내각을 임명하고 12시에 처음 소집된 내각에서 정부성명의 개요를 추인하였다. 7명의 비서들이 이제 25매에 달하는 초안을 정서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2시 10분이 되자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의회에서 정부성명을 낭독하기 시작할 무렵 마지막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시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중에 블랑켄호른이 한 평가는 타당하다. “정부성명은 대단한 내용이 담고 있지는 않았다. 웅변적인 광채도 전혀 없었다. 이는 한 남자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이제 막 수립된 독일연방정부가 당면한 문제와 과제를 나열한 연설이었다.”  중요한 대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의 핵심국가이다!” 연합국 고등위원회와 합의하여 자유와 책임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원과 우리의 신념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서유럽 세계에 속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에서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독일과 프랑스 간의 대립을 극복할 것을 지지하며 영국과 미국에 대해서도 좋은 말을 개진하였다.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가끔은 야당 의석에서도 정중한 박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아데나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다만 활력이 넘치는 인물이 이제 고삐를 손에 틀어쥐게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은 이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제야 독일연방정부의 초대 수상으로 소개된 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미 그 당시부터 서로 크게 엇갈렸다. 아데나워에게 수많은 축하 인사가 전해지기에 앞서서 대니 N. 하이네만의 편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 편지에는 이미 검증된 친구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귀하는 분명히 목적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귀하의 나이는 불문하겠습니다. 제가 귀하보다 5살 연상입니다. 베를린의 카이저호프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귀하에게 수상직을 제안했지만 귀하는 거절하였습니다.”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당선된 직후에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운명적으로 이미 권력의 정점에서 두 차례나 추락한 경험이 있는 이분의 생애에서 중요한 날이다.”   

    

그러나 정적, 질시하는 자들, 불만이 있는 자들의 숫자가 이미 친구의 숫자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헤르만 퓐더의 문서에는 일기장 내용이 보존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미 1948년에 어떤 친지가 한 말이었다. “어제 엄격한 이와 성찬을 나누었다. 아데나워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아데나워에 대하여 싫어하는 점이 무엇인지는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나는 그를 오래전부터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는 프랑스인보다 더 믿을 수 없고, 영국인보다 더 거짓말을 잘 하고, 러시아인보다 더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바로 이런 자가, 패전으로 학대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정치가이다.”             

본의 초기 정치 상황     


아데나워의 동시대인들과 역사가들은 아데나워가 수상이 되고 나서 첫 4년 동안이 그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때였다는 데에 비교적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이 시기에 ‘기초 확립’, [철로] ‘분철기’, ‘공화국 설립시기’라는 개념들이 등장했다. 상황이 간단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돌아보면 그 사실이 쉽게 잊힌다. 아데나워의 14년에 걸친 독일연방 수상 재임기는 역사학자들에게조차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데나워의 성공 가능성을 비교적 높게 여기고 실패의 가능성을 너무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1949년 가을 아데나워에게는 불리한 것과 유리한 것이 최소한 엇비슷하게 존재했었다.  

   

아데나워의 나이때문에도 이미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과도기적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이 초기에 그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의 정적이나 경쟁자들은 이 늙은 사나이가 곧 자연스럽게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부 구성 때 느긋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또한 엄청난 업무 일정의 쳇바퀴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연합 세력의 기초를 확실히 다지는 데에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수상은 위험한 여울이 많고 갑자기 몰아닥치는 폭풍이 자주 몰아치는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여야 했다. 그는 특히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드러난 것과 같은 불확실한 국제정치적 관계와 국내 정치가 전개되는 가운데 초대 수상이 된 것이다.    

 

의회의 정적을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아데나워는 사민당(SPD)을 [연정 상대가 아니라] 야당으로 대하고 싶어 하였다. 아데나워의 세심한 헌정 정책적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이 당면한 것 같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상존하는 야당이 의회에서 뚜렷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대연정을 맺는 바람에 그러한 세력이 제대로 야당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은 일입니다. 그 경우에 그 세력은 원외에서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멋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야당의] 행태를 질리도록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쿠르트 슈마허가 무자비한 투쟁을 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데나워가 어떤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나라가 다시 정상 궤도에 올라가도록 하려는 연방정부는 어쩔 수 없이 많은 문제와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는 결단들을 내려야만 했다. 그 어떤 경제적 충격이든 정부를 일격에 침몰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하여도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어 반대 세력의 씨앗은 어쩔 수 없이 자라나기 마련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수상은 서유럽 열강들과의 관계에서 미묘한 상황에 놓였다. 그들은 군정청을 [본] 근처에 주재하는 고위위원회로 대체하였지만, 워싱턴과 런던, 심지어 파리도 본의 [독일] 정부가 힘을 발휘하도록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연합국이 바라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면 위험한 대립 정책을 모면할 수는 있지만, 그 대신에 야당이 그를 고위위원회의 허수아비로 몰아붙이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기 마련이었다. 이에 슈마허는 의회에서 야간 토론을 벌이면서 한 [아데나워에 대한] 비난은 유명하다. “연합국의 독일연방정부 수상!” 이러한 비난이 [야당의] 갈등 조장 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만약 아데나워가 이전에 영국에 대하여 여러 번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합국에 대하여 강력하고도 공개적으로 대립하였더라면 점령군의 지원은 곧바로 종료되었을 것이다. 미국 측의 지원은 지속되었지만, 미국이라는 바람은 미국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 당시 독일에 잘 알려져 있었다.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일단 미국이 주도하는 대로 움직였다. 다시 말하자면 런던의 이해는 워싱턴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시장경제 실험을 매우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독일 정부가 [연합국의 의사에] 반대하는 정책을 [연합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도록 몰아붙이는 것을 순순히 바라만 보고 있을 리도 만무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히 사실이고 아데나워도 매우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와 동시에 슈마허가 서방 연합국들에 대하여 도가 넘치는 언행을 일삼는 것을 불편해하면서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에 대해서도 때때로 다소간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슈마허를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로 여기지 않았다. 독일 사민당(SPD)과 가까운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영국조차도 그러하였다.    

  

파리에서는 슈마허를 제멋대로 구는 프로이센식의 민족주의자로 여기고 있었다. 아데나워 또한 연합국 관리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슈마허를 비난하는 기회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워싱턴에서는 미국 국무장관인 애치슨이 [슈마허라는] 이 독일의 정당 대표가 자신에게 당당하게 맞서 처신한 것에 대하여 두고두고 놀라워하였다. 곧 애치슨이 1949년 11월 본을 방문하던 기회에 슈마허와 긴 대화를 나누던 때 슈마허가 세계 최강 국가를 대리하고 있는 그를 붙들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비난을 가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은 슈마허가 [나치의] 제3제국에서 커다란 박해를 받은 병자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독일연방의회가 그 첫 회기를 시작할 때 슈마허는 회의장에 들것에 실려 와야 했을 정도였다. 블랑켄호른은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신경증적인 강직 현상을 보건대 중병에 걸린 이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마허는 그러나 다시 건강을 회복하였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연합국 측과 독일연방정부 수상에 대한 그의 말투도 온건해졌다. 그러나 프로이센 민족주의자라는 호칭은 그를 [영원히] 떠나지 않았다.     


정부 구성 이전부터 슈마허라는 인물은 아데나워의 정적들이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가 지나친 민족주의자이며 철저한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가톨릭을 끔찍하게 싫어했기에 연정 정부 안의 모든 계파가 그를 불편하게 여겼다. 칼 아르놀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슈마허가 제안하는 기회에 사민당(SPD)과 연합할 준비가 여전히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아르놀트가 가톨릭교회를 계속 깎아내리는 슈마허와 손을 잡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게다가 칼 아르놀트는 유럽 [통합]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임과 동시에 모든 민족주의를 강력히 거부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와 슈마허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진영은 붉은 천과 같았다. 북부 독일의 기민당(CDU) 파벌, 독일당(DP), 자민당(FDP)에는 아데나워의 강압적인 유럽 정책이 지나치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이러한 정치가들은 과연 아데나워가 독일의 통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은근히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슈마허가 아데나워 면전에서 퍼붓는 비난에 대하여 이들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경제 정책과 사회정책에서는 정부 안의 파벌들 가운데 대표적인 민족주의 진영은 아데나워의 오른팔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자기 나름의 소신으로 연정의 지도자로서 중도 노선을 걷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국가 차원의 문제에서 사민당(SPD)과 협력하는 데에서 슈마허가 걸림돌이 되었다. 중도적인 사민당(SPD) 인사들은 늘 되풀이하여 신중한 자세로 말하기를 슈마허의 반자본주의 언사는 대부분 허풍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누가 그의 깊은 속을 알겠는가?    

 

슈마허가 야당을 이끄는 한 대연정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설사 아데나워가 대연정을 결심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야당 지도자는 독일연방의회 첫 정기회의에서 늘 되풀이하여 커다란 말싸움을 벌이면서 연정 정부 안에서 수상에 대한 불만이 일도록 부채질하였다. 이에 반하여, 에른스트 로이터나 카를로 슈미트가 사민당(SPD) 당수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유혹이 사민당(SPD) 측에서도 솔솔 흘러나왔다! 그래서 사민당(SPD)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아데나워와 대립하는 야당 지도자만 교체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더구나 연정 정부가 자기들 인사 가운데 새로운 수상을 선출하기로 합의한다면 말이다.     


수상은 자신에게 대드는 인물의 출현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그를 필적할만한 인물도 없었다. 기민당(CDU) 내부의 불만은 결코 음모를 꾸미는 단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음모는 있었다. 본이 괜히 본이 아니었다!     


전임 제국 수상인 하인리히 브뤼닝에 대한 논의가 자주 일었다. 그러나 중요한 시기에 그는 하버드 대학교의 [기숙사인] 로웰 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1948년 여름 그는 몇 주 동안 독일 서부 점령지역을 방문하였다. 그러고 나서 1950년 초여름에야 다시 독일을 방문하여 3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는 1952년 초부터 3년 동안 쾰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긍정적인 기대에서 실망에 찬 거부로 바뀌었다.     


1948년도부터 귄터 게레케가 브뤼닝의 요청으로 당내에서 아데나워에 맞서는 세력의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 [사실] 게레케는 제국의회의 기독교국가농민당(Christlich-nationale Bauern- und Landvolkpartei) 의원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아데나워와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다. 그러나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가 브뤼닝에게 이에 관하여 다시 한번 언질을 주자 브뤼닝이 아데나워와 관계를 끊으라는 신호를 게레케에게 보내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게레케가 보기에 브뤼닝은 매우 지쳐보였다. 게레케의 생각에 아데나워는 매우 강력한 전투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물리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초반에는 브뤼닝과 아데나워가 서로 마음이 매우 잘 맞았다. 이미 실망감을 금치 못하고 있던 헤르만 퓐더에게 브뤼닝은 1949년 11월 중순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 생각에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의 기질, 사람 다루는 능력, 전략적 탁월함 등을 볼 때 그러합니다. 그는 사람을 다스릴 줄 알며 자기 휘하에 있는 조직의 선전 사업의 상당 부분을 자신을 위하여 이용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기자들이 쓴 기사를 보면 아데나워가 독일에서 비스마르크와 버금가는 인물로 여겨지고 슈트레세만이 실패한 과업을 완성한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효과의 차원에서 볼 때 여기에서 그러한 강한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데나워가 중용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누이에게 쓴 편지에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뭔가 이루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유일한 사람이야.”     


그런데 1949년 여름부터 독일의 여러 인사들과 나눈 일련의 서한에서 극명한 부정적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가 보기에 아데나워의 프랑스와 유럽에 대한 정책이 지나치게 조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1949년 8월에 독일의 ‘지속적인 분열’을 언급한 것이 브뤼닝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1950년 6월에 이 두 사람은 뢴도르프에서 만났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불신만이 남아 이때가 [이 두 사람 사이의] 실질적인 단절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였다. 브뤼닝이 1950년 초여름에 독일 전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기민당(CDU)의 많은 고위 정치가들을 만난 것을 아데나워는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아데나워 생각에] 브뤼닝이 정치 재개를 준비하는 것인가? 그를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두 사람의 기민당(CDU) 정치가들을 언급한 다음에 브뤼닝에게 노골적으로 언제 출국할 것인지를 묻기까지 하였다.    

 

그때부터 브뤼닝은 편지를 계속 쓰면서 아데나워가 하는 일의 대부분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쉬망 플랜에 대한 처리, 독일의 자르지역 정책, 독일의 재무장 문제의 저돌적인 추진, 소련과의 장기적인 화해를 파악하고자 하는 자세의 부족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홀츠아펠, 헤르만 퓐더, 야콥 카이저, 전독부 국무장관인 테디크, 하인리히 크로네, 게르트 부체리우스, 하인리히 포켈은 물론 연방 대통령 호이쓰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파울 세테에 이르는 기민당(CDU) 측의 많은 인사들은 그가 [아데나워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그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를 깎아내리는 평가가 늘고 있었다. “나는 본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어리석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다. … 수상에게는 세계정치와 군사에 대한 식견이 없다.” 또는 “수상은 환상 속에 살고 있다. - 이전의 슈트레세만보다 더 심하다.” 브뤼닝에게 아데나워는 그저 ‘약아빠진 하루살이 전략가’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브뤼닝의 장문의 편지를 읽어보면 누구나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아데나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아데나워]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여긴 것이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과거 제국 수상이었던 인물이 1952년부터 다시 독일로 귀환하여 그의 등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1951년부터 기민당(CDU)의 불만 인사들은 브뤼닝이, 1948년 게레케가 아데나워에게 맞설 때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때가 되면 브뤼닝이 아데나워를 대체할 믿을 만한 인물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었다. 브뤼닝은 공개적인 투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용도가 다한 인물이고 국내외적으로 돌아가는 일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는 이론적인 대안이 될 뿐이었다! 그가 정말로 진지하게 대안이 되고자 하였다면 아무리 늦어도 그때 공개적으로 아데나워에 맞서야 했다. 그래서 독일연방의회에서 아데나워를 몰아치고 기민당(CDU) 내에 자기 세력을 규합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쾰른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에 관한 대규모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꽃가마에 태워 모셔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는 아데나워의 맞상대가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당내에서 아데나워의 맞상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그가 연방의회에서 당의 지도자로 나설 수 없도록 조처해 놓았다. 게다가 홀츠아펠은 한스 슐랑게-쉐닝겐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신자였고 독일민족주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기민당(CDU) 내부의 강력한 파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기민당(CDU) 내부의 다수는 가톨릭 진영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콥 카이저도 본의 정치가들과 기자들에게는 수상과 필적할 최선의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또한 결코 아데나워를 대적할 만큼 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카이저는 갈등이 있을 때라도 매우 훌륭한 당규율에 따라 공개적인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를 대체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이 보기에, 음모를 꾸밀 경우에도 그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칼 아르놀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독일연방의회 의원도 아니었다. 아마도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브렌타노가 여러 파벌이 함께 밀어줄 만한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데나워에 필적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개적인 경쟁자로 거론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아직 그러한 일을 도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누구의 머릿속에서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지를 모르지 않았다. 1949년 정부 구성 과정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홀츠아펠은 1950년도 가을에 다시 한번 내무장관으로 입각할 기회가 있었다. 이 무렵에 아데나워는 자기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점점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홀츠아펠을 내각의 규정에 묶어두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홀츠아펠은 이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모든 사람에게 홀츠아펠이 내무부를 이끌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가 어찌 수상이나 대통령이 될 만한 그릇이겠는가? 1952년 그는 스위스 대사직으로 좌천되었다.     

한스 슐랑게-쉐닝겐은 이미 1950년 말부터 런던의 대사로 파견되었다가 스스로 사임했다. 아데나워의 국가정책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고 아데나워의 정적을 자처한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는 독일과 유럽의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을 매우 만족할 만한 필생의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그 또한 단 한 번도 독일연방의회 의원이 되어 본 적이 없었기에 [아데나워의 대체 인물로서]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베르너 힐페르트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자 1949년 가을에 이미 연방의회에서 물러났다. 1950년 여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방선거 후에 아데나워는 칼 아르놀트의 손발을 묶어두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고 나서 결국 아데나워는 그에 맞서 음모를 꾸미다 실패한 귄터 게레케를 1950년 중반에 동독 정부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것을 이유로 기민당(CDU)에서 추방하였다.     


사실 기민당(CDU) 내부에서 아데나워의 위치가 사람들이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을 구체화 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된 적은 없었다. [아데나워] 수상의 정책이나 개인정치적 의지를 억지로라도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황을 현명하게 판단해 볼 때 아데나워를 대적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건강을 유지하면서 절망적인 정치적 상황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는 연정에 참여한 다른 당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기사당(CSU)은 커다란 어려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기사당(CSU)이 총선에서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무부와 농업부라는 전통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방우편부 장관직도 차지하였다. 바이에른주의 [지방] 정치에서 지속해 문제가 있었기에 기사당(CSU)은 내부 단속에 골몰해야 했다.     

 

자민당(FDP)의 경우 사정은 달랐다. 자민당(FDP)은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한 첫 4년 동안 역겨운 푸대접을 견뎌야만 했다. 광업 관련 공동결정권, 독일조약, 많은 비판을 받은 아데나워의 유럽정책, 자민당(FDP)의 인사 정책에 대한 요구의 무시, 게다가 수상의 중요한 외교 계획에 대한 매우 불충분한 정보 등으로 자민당(FDP)은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민당(FDP)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민당(FDP)의 지지기반인 중산층] 시민 진영이 여전히 아데나워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내부에서는 감히 [아데나워] 수상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아데나워라는] ‘군주’를 암살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인물이라면 칼 아르놀트가 있었다. 게다가 테오도르 호이쓰는 직무상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아데나워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자민당(FDP) 안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자민당(FDP)은 당내에서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곧 자유주의와 민족자유주의의 대립, 독일민족주의, [법으로] 금지된 국가사회주의(나치)와의 대립, 남부독일과 북부독일의 대립, 아데나워 추종자와 아데나워 반대자의 대립 등으로 자민당(FDP)은 정신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집단들이 모이다 보니 기민당(CDU) 안의 불만 세력에 영향을 미칠만한 힘을 모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민당(FDP) 당대표인 프란츠 블뤼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가 어려움 속에서도 잘 버티게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출세욕이었다. 그는 부수상과 마셜플랜부 장관직에서 외무부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블뤼허의 당내 입지가 취약해졌다. 그래서 그는 자민당(FDP) 당대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데나워에게 철저히 달라붙는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정부 수상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첫 3년 동안 맞서 싸워야 했던 정당제도 안의 반대 세력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적들, 비판적 당내 동료들, 늘 불만인 연정 파트너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게 그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세력이나 개인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단순한 조역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활동의 중심축이 되었고 모든 세력을 자기 목적으로 이끌고 정부 기구의 강력한 힘을 동원할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    

 

아데나워를 서독 부르주아의 마키아벨리적 대변인으로 여기는 모든 정적과 비판자들은 그의 정치에 담긴 기독교 민주주의적 경향의 무게를 과소평가하였다. 그의 정치는 다면적인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집단, 보수주의 집단, 자유주의 집단, 가톨릭과 개신교, [제도] 교회에 밀착된 기독교인들, 그리고 단순히 일반적인 기독교 인본주의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민주주의 파벌의 핵심 집단이 기민당(CDU) 수립 초반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기독교 세력의 무게는 1950년대에도 아데나워의 수상직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발휘하였다.     


연방정부 안의 상당한 가톨릭적 요소는 아데나워 자신이 몸소 구현하였다. 분명히 그는 내각에 보수주의자이면서 개신교 성향을 지닌 지도적 인물을 적절한 시기에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일을 게을리하였다. 여당이 아데나워에게 키워달라고 요청한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볼 때 유해 세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를 위하여 열어 놓은 측면은 개신교 파벌의 규합을 목적으로 활용하는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외교 정치에는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헤르만 엘러스,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 로베르트 틸만스, 게르하르트 슈뢰더, 그 밖의 많은 평의원들은 개신교 여론에서 볼 때 아데나워의 정책에 맞서는 선봉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데나워는 개신교 주류 교회 측에 속하는 독일 루터 교회의 은밀하지만 지속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디벨리우스 주교도 포함되었다. 디벨리우스는 기민당(CDU) 소속이었고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안에서 한 때 한스 릴리에 주교와 함께 독일연방정부 대통령 감으로도 논의 되었던 인물이다.   

  

정권 초기 내각에서는 아데나워의 추종자들 가운데 ‘유럽파’의 숫자는 눈에 그리 많이 뜨이지 않았다. 오히려 의원들 가운데 많이 있었다. 1949년 아데나워가 완전히 새로 구성된 여당에서 며칠 동안 원내대표직을 맡을 때도 당내 갈등 상황에서 그를 지지하는 믿을만한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럽통합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젊은 의원들 가운데에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그들 가운데 당직이 가장 높은 이가 원내대표인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였다. 그는 오펜바흐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1945년 헤센의 기민당(CDU) 창당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의회위원회의 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초기에는 아데나워와 거리를 두었다. 아마도 이는 전략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당원들은 그가 아데나워에게 당당히 맞서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물러난 그를 원내대표로 선출한 것이다. 그 당시 브렌타노는 여전히 헤센의 지방색을 띠고 있어서 그의 출신 지역에서 정치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브렌타노 디 트레메초 가문의 후손답게 그의 가족의 전통에 따라 자신을 유럽통합주의자로 여겼다. 그래서 1950년 여름부터 그는 유럽평의회의 자문회의에 참여하였고 회기가 거듭될수록 원래의 모습대로 열렬한 연방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여당의 자리를 자주 비우고 슈트라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로마, 파리를 돌아다니며 유럽[통합]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원내총무인 하인리히 크로네가 가끔 그의 당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폰 브렌타노는 그가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만족했다.     

그런데 폰 브렌타노는 유럽통합 세력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결국 아데나워의 정책을 계속 적용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폰 브렌타노가 원내대표로서 [당원들의 요망으로] 아데나워에게 의무적으로 맞서야 하는 기회가 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때로는 장황하게 쓴 그의 편지를 서랍에 넣어두고는 답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어느 사이에 충실한 아데나워 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폰 브렌타노가 1961년 조각 때 외무부 장관직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 아데나워가 [자민당(FDP)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바람에 실망하게 될 때까지 그 충성심은 유지되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에게도 일어났다. 기민당(CDU)의 젊은 정치가들 가운데 그는 매우 특이한 인생을 걸어온 인물이다. 1949년에 그는 남자로서 절정인 43살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성취하였다! 슈베비쉬 알프 출신의 별 볼 일 없는 배경을 지닌 사람의 성공담이 된 것이다. 1937년 로스토크에서 개신교 신학부의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교수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작은 슈바벤 사람이 어떤 거물이 될지를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또한 그의 자부심 넘치는 추진력이나 무한한 창의력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먼저 [나치의] 제3제국에서 실패를 맛보고, 나중에는 아데나워 시대에도 불편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무부의 허락을 받아 [독일] 가톨릭주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의 위임으로 전쟁 전에 다양한 해외 선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하여 그 당시나 그 이후에나 저명한 해외 개신교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때 이후로 그는 외교정책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접촉과 외국어 공부에 대한 매력 또한 느끼게 되었다.      


1942년부터 게르스텐마이어는 ‘크라이사우어회’*에 속하였다. 당시 개신교총회* 위원이었던 그는 [1944년] 7월 20일 사건* [역자주 – Claus von Stauffenberg 소령 등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 때 벤들러슈트라쎄*에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7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미군이 그를 풀어주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바로 ‘개신교 구호단체’(Evangelisches Hilfswerk)를 세워 1951년까지 이 단체의 장을 맡았다. 그가 1949년 총선 때 바크낭-슈베비쉬 할 선거구에 출마할 무렵에 이 단체는 서양 국가들과 많은 유대를 맺은 대규모의 조직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 크라이사우어회[Kreisauer Kreis, 역자주- 몰트케 백작이 이끌던 나치 저항 단체)


* 개신교총회(Konsistorialrat, 역자주- 독일 개신교 최고협의체)]     


* [1944년] 7월 20일 사건 [역자주 – 슈타우펜비르크 소령 등이 주도한 일명 ‘발키리 작전’인 히틀러 암살 기도 사건]     


* 벤들러슈트라쎄[Bendlerstraße, 역자주- 히틀러 시대에 군사령부가 주둔하던 곳, 이곳에서 히틀러 암살 계획에 참여한 인사들이 총살되었음]     


게르스텐마이어는 즉각 유럽[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1950년 여름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유럽평의회로 가서 본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소동을 벌인 [독일] 최초의 의원들 무리에 속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여러 가지로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존경받는 개신교 대표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또한 그는 열정적인 유럽[통합]주의자로 여러 가지 임무의 수행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은밀히 배후에서 일을 추진하는 데에도 적합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안에서 외교 전문 정치가로 선두에 서 있었다. 주간지인 《그리스도와 세계》의 공동 소유주로서 개신교 분야에서 영향력도 발휘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를 더욱 중요한 인물로 여긴 것이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아데나워가 그를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로 여기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아데나워가 그와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첫 만남이 있은 지 몇 년 뒤에 게르스텐마이어는 확신하게 되었다. 곧 “그는[아데나워는] 내가[게르스텐마이어가] 안수받은 목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나를 교회 제도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여겨 힘들게 살아가는 경영인으로 여긴 것이다. 아데나워에게 받은 지금까지 남는 인상으로 볼 때, 내가 [히틀러] 저항 운동가였다는 경력은 아데나워에게 별 것 아니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게르스텐마이어가 저항운동 단체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야콥 카이저의 경우와 연결시켜보았다. 게다가 많은 사회주의자와도 연계시켰다. 아데나워는 그런 인물들을 정치적으로 [중용하려고] 고려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 개신교총회 위원이 결코 자기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아데나워에게 이야기할 때는 정중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목사가 자기 교회의 유명한 인물을 대하듯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르만 엘러가 1954년 사망하고 나서 독일연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게르스텐마이어는 아데나워의 유럽[통합]정책에 대하여 의회에서 가장 뛰어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채 45세도 안 된 법률가이며 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 주의 기민당(CDU) 원내대표를 역임했던 이 인물은 초선 의원으로 당선되어 본으로 왔다. 여기에서 그는 본의 시민 단체[건물]에서 열린 첫 원내회의에서 아데나워와 충돌하였다. 그는 아데나워가 그의 말을 끊으려고 한 것에 화를 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 호이쓰에 대하여 날선 비판을 하였다. 곧 그를 “19세기의 사랑스러운 유물”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말이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것으로 여기며, 대통령에 관한 문제를 모험하는 심정으로라도 사민당(SPD)과 논의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에게는 처음부터 사민당(SPD) 내에 그가 잘 가꾸어 놓은 인맥이 있었다. 곧 동향 인물인 카를로 슈미트와 프리츠 오일러가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는 가톨릭학생협회 출신이었다. 곧 그는 가톨릭학생협회 아스카니아(KV Askania) 출신이었다. 그가 그곳에 있을 때인 1929년 당시 초대 손님이었던 프로이센 국가회의 의장과 함께 그는 매우 불편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키싱거는 자신이 뛰어난 법률가인 척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나치의] 제3제국 시대에 이 ‘마이스터’는 베를린 최고의 과외교사로 여겨졌다. 그는 전쟁 기간을 외무부에 근무하면서 잘 넘겼다. 여기에서 그의 주 업무는 해외 선전이었다. 제3제국 시절의 경력으로 그에게는 어찌 되었든 나치 당원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었다. 이 오명은 1950년부터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당내에서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섰다. 아데나워는 그가 자기편에 선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고 그를 자기 차기 주자로 여겼다. 이 해에 곧바로 [아데나워] 수상은 때로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젊은 능력자들을 길들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들에게 목표, 곧 정치적 목표는 물론 그들의 공명심에 걸맞은 목표를 제시하여 준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시민연합의 당파 회의에서 키싱거에게 똑바로 들이대던 인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대동소이한 인물이었다.     


1050년 고살러에서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을 수립할 때 아데나워는 키싱거가 사무총장의 소임을 수행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에게 의장단 총무라는 직함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 당시 키싱거는 독일연방의회에서의 명연설로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또한 유럽위원회 자문회의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도 그의 명성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의 기민당(CDU)은 그를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공격하였다. 당내 상임위원회의 투표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어서 키싱거는 결국 사무총장에 오를 것을 포기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여러 가지로 실망을 주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였지만, 아데나워의 사람에 속하였다. 그는 언어적 재능과 다양한 유럽 차원의 인맥으로 게르스텐마이어와 마찬가지로 유럽 기독교 민주주의 파벌에서 아데나워의 노선을 대변하고 독일 내부에서는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기사당(CSU)의 사무총장으로서 바이에른에서 자기 기반을 공고히 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또한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임하던 이 시기에 아데나워의 유럽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있었다. 그의 정치적 뿌리를 기사당(CSU)에 둔 덕분에 그는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 슈뢰더 보다는 좀 더 운신의 폭이 넓었다. 아데나워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정치적 재능을 타고난 이 인물을 적당히 견제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슈트라우스 또한 사람들이 그를 아데나워에 속하는 젊은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부인하지 않았다.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 슈트라우스는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의 구상이, 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힘든, 독일의 외교정책과 관련된 문제의 열쇠라고 여겼다. 아데나워가 추구하는 노선을 의회, 여론, 국제 차원에서 관철하는 데에 이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기민당(CDU) 전체가 유럽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협력하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을 큰 틀의 유럽 정당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원래 기민당(CDU)의 중요한 기본 노선이었던 것이, 유럽 차원의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 [연합]과 유럽[연합 지지] 언론매체들의 도움에도 힘입어 시간이 지나자 독일의 국가 차원의 노선이 되었다. ‘유럽’이라는 수식어는 그 당시에 [독일이] 갈망하던 서유럽 민주주의와의 유대, 평등한 대접, 국가연합 안에서 찾는 새로운 안정감, 평화로운 미래, 그리고 또한 외교의 근대성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 근대성은 확신을 주고 승리를 확신하게 해주고 무익한 비판에 대한 면역성을 강화해주었다.      


아데나워의 수상직을 지지해주는 또 다른 무리에 속하는 이들이 경제자유주의자들이었다. ‘유럽파’와는 달리 이들의 추진력은 195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시화되었다. 1949년 총선은 [사회 시장경제론자인] 에르하르트를 중심으로 한 선거였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격동의 시기에 사회주의에 맞선 연대에서 아데나워가 이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 무리에는 루드히비 에르하르트,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 귄터 헨레, 프리츠 헬비크, 게르트 부체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경제계 파벌만이 모인 것이 아니었다. 시장경제의 이념은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공고히 해주는 것이었다. 이 두 당은 선거전에서 대부분 경제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서 페르드멩게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프리츠 베르크가 이끄는 독일 연방 산업협회(BDI), 독일상공회의소(DIHT), 여러 재벌회사와 은행 등은 여러 [사회 분야에서] 개별적인 비판이 있었음에도 아데나워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본질적으로 이 그룹에 속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사회국가적 차원의 요구 사항과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에 대한 필수적인 타협을 지속적으로 이루었다. 집단이익과 개인의 요청보다 더 커다란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그는 늘 강조하였다. 그는 교조적인 경제자유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4년 만에 기민당(CDU)을 유럽 [차원의] 정당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을 거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자기가 속한 정당에, 그러고 나서 독일 전체에 시장경제 정신을 불어 넣는 기술을 탁월하게 발휘한 것이었다.     

정부 안의 시장경제 파벌에는 뛰어난 대표자, 곧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있었다. 그리고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저명한 인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에는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와 헤르만 요제프 압스가 있었다. 또한 경제계의 이익과 특정 분야를 대변하는 한 무리의 의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초반에 산업계가 지나치게 자민당(FDP)을 지원하거나 당을 고려하지 않는 요구를 하는 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실망감을 보였다. 1949년 총선 직전에 아데나워는 프란츠 에첼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사업가들이 기민당(CDU)에 관심을 너무 늦게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헨레 씨와 귀하를 … 사람들이 곧바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당내에서의 활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거명된 이름은 페르드멩게스나 에첼 또는 압스와 더불어 아데나워의 사람들로 여겨지는 경제계 인사들의 것이다.    

 

클뢰크너 콘체른의 귄터 헨레는 라인과 루르지역의 핵심 산업계 출신이었다. 그의 장인인 페터 클뢰크너는 전설적인 루르라데* 출신이다. 아데나워는 클뢰크너와 자주 교류를 하였다. 그가 라인 지역 중앙당(Zentrum)의 산업계 파벌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외교관이었던 헨레가 이 기업의 최고위층에 올랐지만 결국 [나치 시절의] 대관구지도관이었던 테르보벤이 그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는 행운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그는 루르지역 산업계에서 원래 자리로 돌아간 첫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프랑크푸르트의 경제위원회에서 기민당(CDU) 소속으로 일을 한 바가 있고 제1기 독일연방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카르텔 해체, 광업 노조의 설립, [노동자의] 결정 참여권 문제에 관한 어려운 문제들에서 아데나워의 편을 들어준 사람이다.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과 외국에서의 인지도는 그가 기민당(CDU) 안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하였다. 프란츠 에첼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민당(CDU)이 광업노조의 조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 루르라데[Die Ruhrlade, 역자주 - 1928년부터 1939까지 존재한 루르지역에 있는 12개의 영향력 있는 기업들의 연합체]     


기민당(CDU) 안에서 아데나워 계파로 분류되던 또 한 사람의 의원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있었다. 슈뢰더는 산업변호사였으며 1947년부터는 광산업의 신탁관리사무소의 법률고문을 역임하였다. 그는 또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나 테오도르 블랑크와 마찬가지로 선두 세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당내의 개신교 파벌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특히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오래전부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늘 세련되어 보이는 슈뢰더는 아데나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전략가이고, 일을 준비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연합을 철저히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슈뢰더는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래서 당대표에게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어떤 사람이 선을 넘지 않고 자기 지도력을 문제 삼지만 않는다면 그런 소문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후계 정치가들에 맞서 중도우파 노선을 유지하는 것이 아데나워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든지 그에 반대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지만 않으면 아데나워 수상은 그를 존중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조금 과하게 반대하여도 무심하게 넘겼다. 슈뢰더는 1951년에 이미 당대표 측근 진영에 속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와 요하네스 알버스와 더불어 아데나워 계파의 최측근이 되었다.  

   

아데나워 진영에 속하는 인물로 시장경제를 위하여 특히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사람으로는 함부르크 출신의 게르트 부체리우스가 있다. 그는 이미 프랑크푸르트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바가 있었다. 이 시기부터 아데나워는 이미 그를 좋게 보아왔다. 부체리우스의 해외 경험도 아데나워에게 도움이 되었다. 1950년 초반에 자르지역 문제가 미국에서도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었을 때 아데나워는 [부체리우스의] 상세한 보고서를 통하여 정보를 얻고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탁월한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체리우스는 출판업자로서 아데나워에게 인쇄 매체를 통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간지] 《디 차이트》는 아데나워의 서방정책과 시민연합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디 차이트》의 주필인] 리하르트 튕겔의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위원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사설이 격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강화된 [《디 차이트》의] 민족적 색채가 특히 자르지역에 관한 문제에서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디 차이트》와 같은 신문은 연방정부 수상실에서는 생각만 할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부체리우스를 통하여 《디 차이트》와, 그리고 게르스텐마이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세계》를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정부와 관련을 맺도록 한 것이 [자신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여겼다.     

확실히 부체리우스와의 관계에서 아데나워의 언론기관에 대한 구시대적인 생각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1953년 초에 파울 보르딘의 기사 때문에 벌어진 커다란 소동이 보여준 대로, 아데나워는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신문발행인이 원하는 대로 글을 써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발행인이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의 유명한 당원이기에 《디 차이트》는 아데나워가 이끄는 대로 그 노선을 최대한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문의] 편집이라는 것이 편집장이 이끄는 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데나워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 시대의 말기에 부체리우스가 발행인이며 동시에 기민당(CDU) 소속 의원으로서 지속적으로 당면하게 된 역할 갈등으로 결국 이 두 사람은 결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달랐다. 부체리우스는 의회에서 아데나워의 매우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가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요하네스 알버스의 당대표 측근 무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말해주는 대로 기민당(CDU)의 좌파는 여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변수였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문제는 근본적인 경제 질서가 아니라, 시장경제가 어느 정도의 사회적 요소로 꾸며지고, 보완되고,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하고 만들어질 수 있는가라는 절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에 관하여 의견들이 엇갈렸다. 곧 [경영에 대한 노동자의] 공동결정권 문제, 사회보장제도의 형태, 수입자유화, 주택경제에 관한 이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내부에서 1945, 1946, 1947년에 보였던 근본적인 견해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 진영에도 테오도르 블랑크를 선두로 한 확고한 시장경제주의 파벌이 존재하였다. 그 또한 처음에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안에서 아데나워의 사람에 속한 인물이었다. 아데나워는 광업산별노조 위원장인 이 노조원을 중시하였다. 블랑크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노조 사무총장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30살에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서는 기계공학을 전공하였으며 군대에서 6년 동안이나 복무하였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 매우 적극적인 시장경제주의자였고 외교 문제에서는 유럽[통합]주의자였다. 그리고 냉정한 반공주의 사상을 지닌 모든 면에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아데나워는 필요했다! 아데나워는 그를 노동사회부 장관으로 임명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이후에도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그를 국방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아데나워가 임기 초에 그를 가장 적게 지지한 이들은 민족주의 진영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최고 목표는 동부 독일 지역과의 재결합과 [독일의] 과거 영토의 수복이었다.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베를린의 기민당(CDU) 인사들은 일단 아데나워와 신사협정을 맺고 충성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데나워가 독일 문제에 관하여 그들의 강경노선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일과 더불어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을 다시 조정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북부독일 기민당(CDU) 계파의 지도적인 인물들도 아데나워의 민족적 의지가 확고하지 않다고 의심하고 있었지만 일단 아데나워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들도 아데나워가 독일 제국의 부활을 다짐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자민당(FDP)과 크리스토프 세봄을 중심으로 한 독일당(DP)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지녔다. 아데나워의 통일정책이 이러한 사람들이 바라는 수준으로 확실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얼마 안가서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들은 아데나워와 결별을 하지는 않고 일단 아데나워를 믿으며 함께 나아갔다.     


아데나워의 통일 의지가 확고했는지 여부에 대한 커다란 논란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수상보다 더 조급해하고 기꺼이 무리수를 두고자 한 이들이 사실 결국 그의 정책에 함께하였고 정당화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기가 쉽다. 대체로 이들은 이주민단체*, 소련 점령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단체들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자기 주장을 정부가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재무장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군인 단체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반공주의자들과 [국경] 재협상주의자들은 대부분 외부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고 ‘민주 단체 연합회’*와 같은 종류의 여론 형성 단체의 지원도 받았다. 원칙적으로 그 누구도 아데나워의 반공주의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서양 열강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독일 동부지역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그의 결의는 믿을만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언제나, 이 진영에 속하는 그를 회의적으로 여기는 이들조차도 그의 통일정책에 관련하여 그 목표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와 방법에 대한 문제만이 논란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독일연방의회의 투표나 총선에서 강경 노선을 강화할수록 시민 진영의 민족주의 세력과 [동유럽 지역에서 살다가 쫓겨난 독일] 추방민들의 일부가 아데나워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 이주민단체[Landsmanschaften, (역자주 – 2차대전 이전 독일 제국, 프로이센 제국 지역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이들의 모임]      


* ‘민주 단체 연합회’[Arbeitsgemeinschaft Demokratischer Kreise, 역자주 – 아데나워 정권이 정부 홍보를 위하여 1951년 설립한 단체]     


1945년 이후의 대부분의 기민당(CDU) 정치가들과는 달리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자신이 다양한 세력들을 규합할 때만 자기 정치를 성공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래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과 독일 북부지역의 자유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들에 대한 그의 구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구 독일 제국 지역에 살던] 추방민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연합국 측에] 공개적으로나 글로 제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독 주민들의 상처받은 법감정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레스라우*와 쾨니히스베르크*가 독일 도시라는 사실을 그에게 환기시켜줄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아데나워 또한 영토 문제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 브레스라우[Breslau, 역자주 –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시.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영토인 슐레지엔주의 수도]     


*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역자주 – 현재 소련의 칼리닌그라드 시. 1525년부터 프로이센과 동프로이센의 수도였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     


확실히 아데나워의 민족정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무리의 민족주의 진영이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과 연대를 맺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이를 잘 해냈다. 제1기 독일연방의회의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에서 외교정책을 이끄는 아데나워의 통솔력이 주로 유럽[통합]주의자들과 시장경제주의자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야콥 카이저, 에른스트 레머, 리누스 카터도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동부지역에 살던 독일] 추방민 세력을 등에 업은 평의원들도 자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의 외교정책] 방향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수정을 가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무엇보다도 사민당(SPD), 민족주의 구호를 팔아먹는 공산주의자들, 극우파들에 맞설 때는 평소와는 달리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아데나워의 [행정]기구     


아데나워가 내각에서 처음부터 자신이 행정기구를 다루는 데에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임을 보여주지 못하였다면 연정 정권 내부에서 다양한 노선들을 지향하는 세력들을 규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이 노회한 시장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가장 맞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물론 장관들을 쾰른시의 부관들을 다루듯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장관들과 주고받은 서한이나 지금까지 보존된 1949년도의 내각 건의서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한 사람이라면 아데나워가 커다란 틀에서 사유하는 능력 이외에도 모든 행정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서도 식견이 밝고, 쾰른에서 이미 유명했던 것처럼 서류와 전문(電文)을 호기심 넘치는 자세로 꼼꼼히 살펴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사정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모든 차관 인사에도 관여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가 극렬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장관으로 임명된 인물로는 전독일부의 장관인 프란츠 테디에크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이 쾰른에서 일할 때부터 벨기에와의 국경 지역 분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 태디에크가 자기 자르[지역] 정책 분야에서 방해가 되고 서양 열강들의 불신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외에 군소정당의 인물 가운데에서는 차관 수준의 직위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13명의 차관 가운데 7명이 기민당(CDU) 출신이었고 독일당(DP) 출신으로는 단 한 명만 있었다. 그 밖의 차관들은 당적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아데나워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장관으로 일하는 부서에서는 최소한 자기 상관[장관]에 맞서는 차관들이 임명되었다. 곧 내무부의 하이네만 밑에는 리터 폰 렉스, 노동부의 슈토르크 밑에는 사우어보른이 있었다. 로젠베르크에 있는 법무부의 장관인 자유주의자인 토마스 델러는 발터 슈트라우쓰가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델러는 이 귀찮은 감시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51년 초에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에게도 루드거 바이스트릭이라는 차관이 함께 있었다. 그는 수상실과의 관계를 촉진하고 연방정부 경제부를 행정적으로 정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기민당(CDU) 차관들은 대부분 당원이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행정관료였다. 그들은 [이전의] 독일제국 행정부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의회위원회의 발터 슈트라우쓰는 제대로 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랫동안 법조계에서 종사하다가 델러와 몇 차례 충돌하고 나서 다시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관심은 단순히 [권력의] 정상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중앙사무소들의 주요 부서장들이 사민당(SPD)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그가 매우 실망하게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행하고 있는 행정 업무를 곧바로 연방정부 기관으로 이관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사무소들이 좌편향적일 뿐 아니라 비능률적이라고 여겼다. 내무부의 강력한 지휘 아래에 있는 국무위원회가 조직과 인사 체계의 수립을 위한 지침을 확립하였다. 이에 따라 사무차관 이상의 직책을 위한 인물의 지명과 임명에 관한 사안은 그들의 첫 취임 때부터 내각의 각 관련 장관의 추천에 따라 정부 고위 차관이 승인하도록 하는 것에 장관들이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연방정부 수상실은 검증과 영향력 행사의 기회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프랑크푸르트의 사민당(SPD) 소속의 일련의 고위 관리들이 가차 없이 쫓겨나게 되었다. 곧 많은 중요한 자리들이 기민당(CDU) 사람들이나 당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아데나워는 주요 부서들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하이네만이나 슈토르흐처럼 기민당(CDU) 소속이지만 맘에 들지 않는 장관들 주변에도 수상실에서 볼 때 노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관리들을 추가 배치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부수상인 블뤼허가 지휘하는 유럽부흥계획부(ERP)에도 자신이 신뢰하는 관리들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부서는 마셜플랜에 따른 미국의 경제적 지원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아데나워와 블뤼허 사이에 인사 정책에 관한 갈등이 지속되면서 그때까지 좋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사관리를 조종하는 일은 한스 글롭케 국장이 담당하였다. 그는 마치 거미줄 위에 앉아있는 거미처럼 아데나워와 긴밀한 접촉을 하며 모든 인사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1953년 가을 정부 조각 때 마침내 차관으로 임명될 무렵에는 이미 연방정부의 대다수 부서에서 아데나워의 의지가 관철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어떻게 자기 14년 동안의 연방정부 수상 재임기에 이러한 핵심적인 인물을 얻게 되었는가? 아데나워가 한스 글롭케에게 부여한 역할은 그의 인사 정책에 관한 근본적인 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48/49 겨울부터 그는 블랑켄호른과 함께 어떠한 기본원칙과 인사[정책]을 통하여 연방정부의 행정부를 채울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중앙관청에는 원칙적으로 나치에 속한 전임 제국 관리들은 전혀 근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능력 있는 인물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상적인 직업을 지닌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정당정책적인 차원에서 특정 정당 [곧 사민당(SPD)을 지지하는] 사람을 임명하는 것이 가능했다. 많은 비난을 받은 프랑크푸르트 행정의 비효율성은 여기에 근본 원인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연방정부의 행정부를 다시 전문 관리 계층의 중심으로 만들 결심을 분명히 하였다. 이 시기에 그에게 가장 커다란 근심거리는 사민당(SPD)의 선거 승리였다. 그 당시 그의 생각에 그러한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사민당(SPD)과 연정을 수립해야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야만 연방정부의 관리를 사민당(SPD)이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행정] 경험이 풍부한 제국 관리들 대부분은 나치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다만 형식적으로만 나치에 몸담았던 것인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도 쿠르트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연방정부 장관들을 정당정책적으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나타내는 인사정책을 추진할 결심이었다. 그런데 전문 관리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에 그 정치적 성향과 자질이 일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최고위직 관리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인물들을 찾았다. 곧 자질이 특출하고 나치에 속하지 않았으며 사민당(SPD) 사람이 아닌 것은 물론, 기민당(CDU) 소속이거나 최소한 당에 동조하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에 해당되는 인물이 가톨릭 신자라면 금상첨화였다. 제국시대의 고위 관리들은 개신교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획과 관련하여 국가 수립 이전에, 아데나워는 [영국과 미국] 공동[점령]지역의 회계감사원으로 있으면서 그가 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자문 역할을 하던 에리히 케쓸러의 권유로 한스 글롭케를 처음으로 만났다. 글롭케는 당시 자기 고향인 아헨 시청에서 재무국장으로 근무하면서도 국가 행정부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였다. 그는 50대 초반의 원숙한 인물이었다. 부유한 상류 시민계층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수건 도매상인이었다. 그는 1929년부터 먼저 프로이센 내무부 관리로 일하고 나서 1945년까지는 제국 내무부에서 근무하였다. 글롭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청년회 출신이며 1922년부터 1933년까지 중앙당(Zentrum) 당원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 기민당(CDU)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나치의] 제3제국 시기에 그는 교회의 요청에 따라 내무부에 머무르게 되었고 전후에도 그가 교회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명분으로 넉넉히 이른바 ‘사면증’을 받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베를린에서 가톨릭 저항 세력을 가까이 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글롭케가 나치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결점이 있었다. 1935년에 작성된 뉘른베르크의 인종[차별]법에 대한 공식적인 주석을 그가 대부분 작성하였던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인종 문제와 관련된 이들에게 이로운 방향을 해석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여러 경우에서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혼인에 개인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는 그에게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었다.’* 1948년 글롭케가 뒤셀도르프 시의 내무부 인사과장으로 지명될 때부터 이미 그의 주석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었다.’[Dennoch bleibt ein Erdenrest, zu trageneinlich. 역자주 -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문장의 의도적인 인용]
 

글롭케는 1945년 이후 여러 가지로 조사를 받았다. 그 가운데에는 로베르트 켐프너의 조사도 있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과거의 동료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모든 정치적 검증 결과 글롭케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아데나워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처음부터 도망을 가는 경우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글롭케의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 주석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글롭케를 중용한 이유는 그가 절대적으로 충성을 하는 인물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인물은 오직 수상의 도움을 통해서만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마키아벨리적인 생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글롭케의 경우는 그러한 추측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글롭케와 같은 중요한 직위에 있던 모든 관리는 그러한 자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법이고, 이를 위하여 치를 대가는 무엇보다도 자기 상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었다. 여기에서 그가 뉘른베르크의 인종차별법과 관련되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글롭케는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의 차관 지명을 일단 철회하였다. 이는 분명히 그러한 인사 결정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처사였다. 1949년 12월 그는 야콥 카이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또한 저는 글롭케 부의장을 차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보류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귀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우리 당원은 아니고 잘 알려진 법률주석 사건과 연관되어 있기에 그를 차관으로 지명하는 데에서 우리의 반대파가 우리를 공격할 그 어떤 빌미도 제공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숙고 끝에 글롭케가 1950년까지 국장 직위에 머물면서 내부무의 차관 업무를 담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차관 자리는 오토 렌츠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글롭케를 잘 알고 있던 아데나워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기 업무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는] 그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글롭케는 이른 시간 안에 자기 진가를 발휘하며 늘 주변 사람을 잘 파악하여 아데나워를 도왔고 지치지 않는 성실성을 보였다. “글롭케와 상의하시오.” 이것이 누군가가 아데나워에게 부탁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안기면 그가 늘 하던 말이었다. 글롭케의 영향력은 일찍부터 연방정부의 모든 행정 부서만이 아니라 주정부 관청에까지 미쳤다. 하인리히 헬베게가 장관으로 있는 연방참의회부가 존재했지만, 문제가 첨예화되고 확실한 처리가 필요한 경우에 아데나워는 기꺼이 글롭케에게 일을 맡겼다. 이러한 일은 바로 기민당(CDU) 지방 단체가 연방정부와 갈등을 벌이게 될 때 발생하게 되었다. [프랑스 루이 13세의 탁월한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두 트렘블레이 수사가 있었다면, 아데나워에게는 글롭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곧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글롭케는 하루에 두세차례 아데나워의 집무실에 들어와 그에게서 직접 지시받고 수많은 전화 통화를 하였다. 또한 뢴도르프를 자주 찾았다. 업무 관계가 점점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아데나워가 낮잠으로 기운을 되찾은 다음 이른 오후에 샤움베르크궁을 글롭케와 같이 산책하는 일이 더욱 필수적인 과정이 되었다. 아데나워가 많은 방문객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글롭케도 배석하였다. 대부분 그는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을 본 모든 이들이 늘 말한 것처럼 아데나워와 글롭케 사이에 순수한 의미의 우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글롭케는 직위와 나이 차이에서 나오는 한계를 인정하였다. 두 사람을 잘 알고 나중에 차관까지 오른 칼 굼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아데나워도 그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업무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1949년 가을, 글롭케가 아직 차관으로 거명되기 전에 연방정부 수상실의 실장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로 드러났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글롭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사에게 인사 발령이 났다. 1949년 10월부터 1950년 2월까지 라인란트-팔츠의 지역구 연방 의원이었던 프란츠-요제프 뷔르멜링은 그 업무를 자기 의원직과 병행할 수 있는지는 시험해보았다.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내무부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글롭케와 친했다. 그러나 연방의원직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연방정부 수상실의 실장을 찾는 일은 1950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아직 수상실 직원 규모가 작았다. 고위직에 임명된 이는 19명에 불과했다. 아데나워가 물러난 1963년에도 직원 숫자는 35명에 그쳤으나, 1978년에는 120명에 이르게 되었다.      


오랜 검토 끝에 아데나워는 마침내 오토 렌츠를 실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951년 초부터 2년 반 동안만 내실 있는 시간을 아데나워와 함께하였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글롭케가 아데나워 아래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반대 세력에 속하는 인물인 렌츠를 측근에 두었다. 오토 렌츠는 1938년 제국 법무부에서 파면되어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고 칼 괴르델러와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저항 단체에 가입했었다. 게르스텐마이어와 헤르메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러 해 동안 교도소에 감금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러시아 군대가 그를 풀어주게 되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베를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1948년에는 뮌헨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요제프 뮐러의 법무법인에서 근무하였다. 아데나워가 볼 때 그는 두 개의 적대 세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곧 기민당(CDU)의 야콥 카이저 파벌이면서 동시에 뮌헨에 있는 아데나워의 개인적 적들에 속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1950년 말에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많은 정치적 숙고 끝에 결국 렌츠를 그의 측근에 두었다. 그는 글롭케처럼 조용히 일만 하는 행정가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긴급하게 필요한 인물은 역동적인 기획을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또한 착상을 할 줄 알고 모든 종류의 [정치적] 음모를 맞받아치고, 모든 반대를 물리치면서, 아데나워의 계획을 무작정 치고 나가며, 밤새 아데나워와 통음을 하며 그러한 계획이 올바른 궤도에 들어서도록 할 줄 아는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 차관은 광업 분야의 [기업가와 노동자의 기업 정책] 공동결정(Montan-Mitbestimmung)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덕분에 아데나워는 당분간 노조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렌츠는 결국 여론 전략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연방정부에 언론정보국을 수립하여 정치 외곽에 있는 조직들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정부에 우호적인 주간지들의 발행인들을 모종의 비자금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주정부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강인하고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국제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파리, 런던, 워싱턴으로 분주히 오갔다. 이 분주히 움직이는 정치적 재간꾼에게 적지 않는 매우 골치 아픈 과제를 안겼다.   

  

렌츠는 글롭케가 추천한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베를린의 ‘목요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이 모임은 야당 성향의 중앙당(Zentrum) 인물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보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글롭케는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차관 업무의 상당 부분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그리고 렌츠는 큰 정치에 집중하였다.    

 

‘목요회’에는 권력의 중심에서 이제 막 부상하고 있던 인물도 속해 있었다. 그는 해가 갈수록 아데나워 곁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하인리히 크로네였다. 그는 오랫동안 중앙당(Zentrum)의 사무총장 직무대리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흑적금 제국 국기단’*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리고 제3제국 시절에 아데나워만큼 고통을 당하였고 이제 본과 인맥을 맺게 된 것이다. 폰 브렌타노가 원내대표인 이상 그는 원내총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크로네와 글롭케와 렌츠는 서로 매우 도타운 신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폰 브렌타노가 아니라 크로네가 연방정부 수상실과 당의 정치적 교류 업무를 점차로 더 많이 담당하게 되었다.     


* 흑적금 제국 국기단 [Reichsbanner Schwarz-Rot-Gold,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인 1924년 사민당(SPD), 중앙당(Zentrum), 독일민주당(DDP)이 연합한 중도 성향의 단체]     


그런데 재임 초기에 아데나워의 커다란 관심사가 외교정책이었기에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이 수상실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다. 그는 1949년 9월 고위위원회를 상대하는 연락사무소를 설립하였다. 이 부서에서 외교정책 분야의 중요한 활동이 기획되었다. 그런데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또 다른 부서들이 수립되고 있었다. 퓐더 국장은 독일연방공화국 수립과 더불어 ‘국제관계부’의 설립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지만 무위로 끝났다. 아데나워가 이를 반대한 것이다. 그는 퓐더가 이 부서의 장이 되고자 할 것이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몇몇 사람을 끌어모으게 될 것임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주지사들, 심지어 사민당(SPD) 당대표도 외교 업무는 일단 수상실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여야 한다고 제안한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50년 5월 [조직] 정비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외교문제사무국’의 여러 부서가 통합될 수 있었다. 블랑켄호른은 국장으로 승진하여 기획조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서 전체의 지휘를 담당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데나워에게 매우 필요한 인재인 블랑켄호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과거 [나치 권력 기관의 중심지인] 빌헬름슈트라쎄 시절의 외교관을 새로 설치한 외교문제사무국의 수장으로 임명하기에는 고려할 점이 많았다. 그러는 동안 아데나워는 외무부서의 직원들의 성향을 충분히 파악하였고 처음으로 야당 인사를 관리로 임명하면서 그 관리의 나치 당원 전력에 민감한 언론의 비판이 있을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블랑켄호른 자신도 다른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치 시절 빌헬름슈트라쎄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를 차관으로 임명하게 되면 1950년에 연방정부 차원의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선례를 남기는 일이 될 노릇이었다.     


그래서 발터 할슈타인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민법과 사회법을 전공한 당파가 없는 교수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에는 미국의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그런 할슈타인을 제네바의 룁케 교수가 아데나워에게 쉬망플랜의 독일 대표로 추천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맘에 들어 하며 1950년 8월 차관 겸임 외교문제사무국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외교에서 대부분의 중요 사안은 여전히 아데나워의 오른팔인 블랑켄호른이 관장하고 있었다. 할슈타인은 사실 거의 1년 동안 파리에서 쉬망플랜에 관련된 복잡한 협상에 매달리고, 다음으로는 [유럽 국가들의 군사 협력에 관한] 플레뱅플랜에 관한 업무를 지휘하였다. 이 계획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대책이 마련되었다. 과거 [연합국] 고위위원회와의 연락 담당 부서인 [수상실] 제2부는 여전히 블랑켄호른이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수상의 소식통으로 남아 있었다. 1950년부터 1952년부터 블랑켄호른과 할슈타인이 아데나워와 대화를 나눈 시간을 아데나워의 일정표를 참고하여 비교해 보면, 1950년 들어 블랑켄호른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 언론의 주장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외교정책에 관하여 상당한 견해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은 그들의 상사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미래는 서유럽과의 긴밀한 유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였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독일은 [독일] 서부지역의 [이른바] 핵심독일국가를 의미하거나 통일된 독일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블랑켄호른은 좀 더 실용주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굳이 제도적인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맞는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에 비하여 할슈타인은 좀 더 배포가 큰 구조주의자였다. 그는 계약법과 헌법의 범주를 바탕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블랑켄호른은 권력의 지형을 파악한 데 비하여, 할슈타인은 제도와 범주를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히 블랑켄호른의 관점이 아데나워의 것에 훨씬 더 근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할슈타인과 같은] 법률가의 기여는 필수적이었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거의 쉴 새 없이 진행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독일의 미래를 결정할 계약에 관련된 작업은, 독일의 권리를 되찾아야 하면서도 상당 기간은 서양의 강대국 앞에서 약자의 입장에 놓여야 할 것이기에, 최대한 정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할슈타인은 확신했다. 그래서 계약 작업은 최대한 확실히 하고 정치적 자의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데나워에게는 두 사람 다 필요하였다. 서로 다른 기질과 사고방식을 지닌 두 협력자를 측근에 두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에서 긴장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는 생산적이기도 하였고 아데나워가 난제를 돌파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어쩔 수 없이 분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1951년 3월 15일부터 외무장관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다양한 국가 재건 사업 문제에 매달리면서 그 자신이 마치 담당 부서장이나 된 듯이 외교 업무에 전념할 시간은 당연히 부족하였다. 그것은 이제 할슈타인이 처리할 과업이었다. 그가 실질적인 외무장관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면서도 독일연방의회에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다. 황제의 통치 시절과 마찬가지로 외무담당 부서는 한 사람의 관리가 이끌었는데 많은 의원이 이를 유감스럽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정치[제도]의 형태를 갖추는 문제에 큰 관심을 두었다. 여기에서 그는 블랑켄호른만이 아니라 할슈타인과 오토 렌츠, 그리고 가끔 개별적인 연방의회 의원들과 외부 인사들의 자문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 외부 인사 가운데에는 그 당시 은행가인 헤르만 요제프 압스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이 외무담당 부서의 차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그를 마음에 둔 적이 있었다. 그가 1950년 6월 블랑켄호른과 대화를 나누며 압스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몇 안 되는 독일인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평균적인 시민이 대부분인 [독일] 민족에게 그는 매우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압스가 고위 공직에 오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여론이 안 좋다는 막연한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래서 압스는 은행계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아데나워를 위하여 특별한 임무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의 외채에 관련된 런던합의를 다루는 일이었다.     


그 당시 연방정부 수상실에서는 후일 연방정부의 국방부가 탄생하는 데에 씨앗이 된 부서도 있었다. 외교관계에 관하여 서방 연합국은 처음부터 이 부서의 설치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인에게 완전히 터부시되어야 했던 군사적 안전이라는 민감한 문제에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였다. 1050년 5월 24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데나워는 과거 기갑 사단장이었던 게르하르트 폰 슈베린 공작을 ‘수상 직속 안보문제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하엘 토마스가 배후에서 영국 측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제1보병군단에서 근무한 장군의 이름은 마리온 된호프 공작부인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그 당시 《차이트》에서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독일 장군들에 대하여 워낙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그와의 개인적 친분은 없었다. 그는 제삼자가 그에게 추천한 여러 인물 안에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슈파이델, 벤크, 겔렌, 가이어 추 슈베펜부르크 남작이 있었다. 아데나워가 결국 슈베린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전해지는 바로는 고위위원회의 [영국 측 위원인] 로버트슨이 그를 강력하게 추천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슈베린의 태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그는 호전적이지 않은 인물로 보였다. 본에서 들리는 모든 소문을 알고 있던 발터 헨켈스는 오래 진행된 첫 대담에서 나온 연방정부 수상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그는 전혀 군인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사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 해도 아주 그럴듯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슈베린사무실’에서 이미 1950년 7월에 ‘조국근무센터’라는 위장명으로 지휘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50년 10월 테오도르 블랑크가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가운데 아직 예산조차 편성되지 않았던 ‘조국근무센터’가 해체되고 슈베린도 그곳에서 근무하던 여러 장교들과 더불어 면직되었다. 새로 설립된 ‘블랑크사무소’도 수상 직속으로 있었다. 1950년 이 사무소에는 약 20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런데 1953년 초에는 이미 700명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블랑크는 외교 업무에서 할슈타인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잘 이용하였다. 비록 그가 장관이나 다름없이 업무를 처리하였지만, 여전히 아데나워가 국방 분야도 몇 년 동안은 자기 통제 아래 두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와 자민당(FDP)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국방부와 관련된 이러한 조직 마련의 커다란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조직은 수상이 국가방어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1955년 5월까지 자신이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진두지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는 가운데 블랑크와의 관계 때문에 연정 정치에 그 어떤 어려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데나워는 국방장관이 아니었다. [정치] 상황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국방] 업무를 담당하는 기민당(CDU) 정치가는 전체적인 노선에서 그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그가 장기적인 계획과 협상 시기에 참다운 의미의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블랑크사무소의 지휘는 그가 신임하는 기민당(CDU) 정치가가 맡아서 수행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부서의 조직개편이 필요하게 되자 자민당(FDP)은 블랑크의 자리를 자기 당에 주도록 요청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연방정부 수상실, 외무담당부서, 블랑크사무소의 인력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어야 한다는 논리는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서유럽 열강들과의 관계 형태, 통합적인 국방 조치, 국내 정치 차원의 바람직한 해결책의 추진 사이의 내적 관계가 더 잘 보장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결국 이러한 조치가 수상의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데나워는 근대적인 통치의 또 다른 권력 수단을 자기 측근에 마련해 두었다. 그의 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여론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이에 맞추어 정보정책을 민주주의 국가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활용하려는 그의 뜻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집권 초기에 인사 정책에서 일련의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그가 연방공보실의 제1대 부서장과 의견이 어긋나면서 어려움이 자주 발생하였다. 언론 분야의 인사 문제 파악에서 처음에는 외교업무나 국방업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연방공보실의 실장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누가 차지하든지 간에 아데나워의 관점에서 연방정부 수상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였다! 오토 렌츠가 실장이던 시절에는 제2부서인 연방 언론 및 정보부가 점점 더 독자적인 부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은 마침내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라는 제대로 된 인물을 실장으로 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방 언론 및 정보부가 연방정부 수상실의 조직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 부서에는 차관이 수상 직속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첩보부에 대하여 깊은 호기심을 가지며 동시에 매우 강력한 불신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아데나워가 아니었을 것이다. ‘슈베린사무소’ 안에 그는 처음부터 정보부와 통신부를 두도록 하였다. 그 사무실 옆에서는 글롭케가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과의 업무 접촉을 도모하였다. 그의 ‘조직’은 이미 미국 측의 재정지원으로 수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방정부 수상에게도 [정보] 분석 보고를 하였다.  

    

이렇게 수상 취임 첫해를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분명하였다. 수상 직위에 오르자마자 아데나워는 마치 문어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닌 것이다. 법적 구비요건에 상관없이 이 첫해에 모든 것을 더 잘 꿰뚫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연합국 측이 그가 어느 정도 자유롭게 [나라를] 이끌어나가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중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많은 것을 정당화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시 세워진 국가의 운영이라는 분명한 과업에 매진하느라고 애쓰는 가운데에서도 당을 장악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고 아데나워는 고슬라에서 [연방 차원의] 독일 기독교민주주의 연맹(Christlich Demokratische Union Deutschlands)이 수립된 1950년 가을까지 점령지역 기민당의 당대표였다. 아데나워는 또한 라인란트 기민당(CDU)의 당대표도 겸임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독일 동부 이외 지역에 세워졌던 기민당(CDU) 조직들이 하나의 당으로 통합된 것이다. 이 [통합] 기민당은 당연히 당대표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럼에도 아데나워는 질투하듯이 그의 직무대행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과 야콥 카이저를 통제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카이저는 이제 내각의 규율을 따르고 있었다. 연방의회에서 당에 대한 홀츠아펠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아데나워가 쿠르트 게오르크 키싱거를 일종의 사무총장으로 내세워 선두 주자로 밀려고 시도하던 일을 바로 이 두 사람이 이 베를린의 기민당(CDU)을 사주하여 좌절시킨 바 있다. 한동안 아데나워는 조직[정비] 문제를 미루어 두었다. 연방정부 차원의 부서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부상하여 그가 당내에서 박힌 돌을 차내는 굴러온 돌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3년 총선이라는 일이 먼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뭔가 일을 벌여야 했다. 키싱거는 이제 자기 슈바벤 동향 사람인 브루노 헥을 끌어들였다. 고대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튀빙겐 대학교 학생회 아스타(ASTA) 회장으로서 튀빙겐 지방 정치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쉬드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의 튀빙엔 문화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실 본에서 당 조직 수립이나 선거전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의 책임을 맡을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배운 것과 무관했다. 아데나워 또한 그와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의장단은 아데나워에게 헥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곧 총선을 훌륭하게 이끌어나갈 뿐 아니라 충성스러운 사람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1949년 가을 이전에 당 조직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편으로 이제는 국가적 차원의 직무에 더욱 몰두하고 있었다. 지방 당 조직들은 여전히 대부분 자율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당 지도부가 원리원칙에 따라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아서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기민당(CDU) 수상이 직무에서 성과를 거두는 한, 국가 관련 직무가 원칙적으로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당대표직의 권한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선거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연설가이며, 위대한 지도적 인물이고, 그리고 또한 선거전을 이끌어 나가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직간접적으로 마련해 주는 존재였다.      

아데나워의 시대가 길어질수록 대중이나 정치학계에서는 아데나워가 강인한 당대표로서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제 기민당(CDU)은 마치 수상의 선거 단체이고, 당은 한 인물의 순전한 권력 도구인 것으로 [잘못] 여겨지게 되었다. 그 인물은 마치 민주적 [입헌] 군주처럼 샤움베르크의 궁전에서 통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파악은 당의 여전한 자의식을 간과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아데나워의 자기 이해도 오인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정치적 투쟁 집단의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 단체를 승리로 이끌어 자기 힘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였다. 수상의 민주주의는 정당의 민주주의이기도 하였다. 또한 수상 자신도 정당인으로 [자기 경력을] 시작하였고 여전히 정당인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그가 이제는 주로 자기 직위를 근거로 삼고 샤움베르크궁에서 내각을 통하여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특히 기민당(CDU) 당조직에 자기 강한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렵게 시작한 서방정책     


“외교정책 분야에서 우리의 노선은 확고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서방의 이웃들, 특히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수립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일이 유럽연맹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회원국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뜻을 관철하는 데에 우리는 특히 서방에서 더욱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다른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들과 더욱 긴밀한 협력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아데나워는 헬레네 베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대로 이렇게 외교정책에 관한 생각을 간략하게 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회고해 보면, 이러한 노선의 성과가 전혀 드러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실망스러운 인상을 쉽게 받게 된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은 여전히 실질적으로는 서방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는 나라였다. 아데나워가 새 정부를, 불행한 기억 속에 있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정권들보다 더 나은 운명을 이끌게 될지는 일단 두고 볼 일이었다.     


사람들은 정부성명이 발표되자마자 연방정부 수상이 자기 내각의 주요 장관들과 더불어 페터스베르크에 있는 [연합국]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가서 인사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고위위원들은 원래 이 기회에 커다란 격식을 갖추어 점령 규정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막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아데나워 정부가 연합국의 [독일 내정에 대한] 간섭권, 거부권, 통제권, 협의권에 대하여 협상하면서 충돌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고 권한은 여전히 연합국이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권한은 근본적으로 독일연방정부 기구의 관할 분야보다 더 중요한 분야에 미쳤다. 여기에는 외교 문제, 안보, 점령군의 경비, 군비축소와 군사력 축소, [전쟁 비용] 배상, 무역, 외환관리, 루르지역 통제, 대기업과 은행의 분리, 곧 금산분리가 포함되었다. 고위위원회가 배타적으로나 최소한으로 통제하고 승인하지 않는 중요 분야는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내치에 속하는 영역, 예를 들어 조세, 기업 규정, 노동 중재와 같은 일조차도 독일의 관련 법률이 발효되기 전까지는 계속 고위위원회의 통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고위위원회 고유 권한에 속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도 여전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서방 열강의 강력한 관료주의는 독일의 연방정부와 주정부 차원에서도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영국 점령군의 통제위원회에만도 1만여 명의 민간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점령군이 독일을 문자 그대로 착취하고 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연합군의 군인들과 민간 군무원들의 숫자가 거의 10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의 가족 25만 명과 독일인 근로자 22만 5천 명이 추가되었다. 이들을 위하여 독일연방정부 예산의 정확히 36%가 지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모든 것이 신속히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최대한 빨리 그 부담을 줄이고 [그 내용이] 여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독일 민주주의에서 서방 [열강에 대하여] 반대하는 정서가 빨리 퍼지지 않도록 해야만 하였다. 이는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형성되고 있는 독일 행정부와 미국 군정청의 [업무적] 직결 관계를 차단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내각이 수립된 첫 주부터 [독일 인사들의] 연합국 인사들과의 개인 접촉을 삼가야 한다고 거듭 경고하였다. 그는 앞으로 오로지 고위위원회와 독일연방정부 사이의 협상만을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특히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여봐란듯이 허세를 부리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실 궁극적으로 그 자신이 독일연방의회에 대하여 [정부를] 책임지는 연방정부 수상이었다. 고위위원회는 단순히 각 국가의 정부를 대표하는 관리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1951년 4월까지 아데나워가 그들이 일하는 건물이 있는 페테스베르크를 향한 좁은 도로를 향해 정기적으로 몸소 길을 나서도록 한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페테스베르크 호텔을 고위위원회 건물로 사용한 이유가 영국의 챔버레인 수상이 1938년 여름 수데텐란트 위기* 때 마침 그곳에 있다가 아돌프 히틀러와 굴욕적인 협상을 하기 위하여 드레스덴 호텔로 갔었던 일을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사랑하는 시벤게비르게를 출발하여 [페터스베르크에서] 위세를 떠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언제나 [연합국 측의] 부당한 요청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형평을 맞추는 차원에서 고위위원회 위원들을 가끔 개별적으로 뢴도르프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 수데텐란트 위기[Sudetenkriese, 역자주 - 1938년 나치 정권이 체코슬로바키아와 보헤미안과 모라비아 영토를 독일제국에 합병하기 위해 도발한 분쟁. 콘라트 헨라인이 수데텐독일당(SDP)이 나치 협력을 주도함. 결국 1938년 10월의 뮌헨 협정으로 소련이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도함.]     


그는 로버트슨 장군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서로를 신뢰하거나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초대 군사령관인 숄토 더글라스 경만큼이나 독일에 대하여 거부감을 지닌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인 로버트슨은 무조건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로버트슨을 깊이 파악하고 있던 당시 독일담당부서 장관이었던 파켄햄 경은 1970년대에 로버트슨이 패전국 독일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파켄햄 경은 영국군 사령관이며 나중에 고위위원회 위원이 된 이 로버트슨을 “강하고 냉철하며 매우 지적이고 때로는 독설을 날리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파켄햄 경은 로버트슨이 “자기 유별난 개인적 감정을 매우 냉정하게 통제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로버트슨과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당대표인 아데나워 사이에는 그리 커다란 우호적인 감정이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시기에 아데나워와 브라이언 로버트슨 사이에는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냉기가 흘렀다고 할 수 있다.”     


이 지경의 사람인 로버트슨이, 말하자면 영국을 대표하고 있었고 영국 외무장관인 어니스트 베빈 또한 독일의 친구로 여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나중에 로버트슨은 진심으로 아데나워가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협상을 이끄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그[아데나워]는 누구나 금방 좋아하지는 않고 때로는 감정이 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결국 그를 좋게 여기게 되었다.” 또한 아데나워도 시간이 흐르면서 로버트슨의 사람 됨됨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1년 베를린 위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로버트슨은 아내가 직접 구운 다과를 들고 아데나워를 다시 찾은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그를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친절하게 대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로버트슨이 독일에서 활동하던 무렵이 1961년보다 훨씬 더 편하고 기쁜 시절이었을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그것은 아름다운 과거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1948, 1949, 1950년에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계속 엿보고 있었다. 둘 다 올곧은 인물이었지만 서로를 불신하였다. 둘 다 냉정하였지만 동시에 약간 시니컬한 유머를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로버트슨은 늘 현실을 강조하였고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대표] 위원이었던 프랑소와-퐁세가 훨씬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다른 거물들에게 아첨이나 떨던 외교관들을 아데나워는 속으로 매우 경멸하고 있었다. 프랑소와-퐁세는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베를린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그 당시 그러한 인물에 속하였고 [정세를] 낙관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는 히틀러 이후의 독일을 더욱 정신 차려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소와-퐁세는 독문학자로서 평생 독일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였다. 그래서 고위위원회 소속의 3인 위원들 가운데 당연히 독일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교만과 허영은 유명하였고 그가 스스로 독일인보다 독일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 당시에도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그의 필생의 사업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를 단 한 번도 신뢰한 적이 없다. 그리고 프랑소와-퐁세도 아데나워 수상을 불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문제가 더 복잡해지게 된 데에는 이 고위위원회 위원이 그들 동료 사이에서 가장 잘난척하고는 있지만 사실 정치적으로 가장 미약한 존재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와 아데나워 수상 사이에는 계속 독설이 오갔다. 다만 이러한 독설은 그럴듯한 덕담과 가시 박힌 농담으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러한 짓에 달인이었다.      


아데나워가 몇 년 뒤에 유럽 차원의 거물 정치가로 발돋움하게 되자 프랑소와-퐁세도 그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아데나워 또한 과거의 적이었던 사람에게 좋은 얼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던 초기에는 아데나워가 이 프랑스 사람에 대해 보인 적대감이 가끔 드러난 공감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오랫동안 베를린 대사를 역임한 이 인물을 고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사실은 프랑스가 독일연방공화국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파리의 관점에서 정부 기관이 위치한 라인 지역의 핵심 도시가 바로 ‘독일’ 자체였기 때문이다.  

   

고위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지도적인 인물은 존 맥클로이였다. 그는 처음에는 독일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사실 맥클로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헨리 스팀슨 아래에서 국방부 장관의 직무대리로 근무하면서 모겐소플랜*에 맞서 싸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무렵에 처음으로 독일을 깊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월스트리트의 법률가는 독일로 파견되기 전에 세계은행 총재로 있으면서 초기에는 국제금융 정책의 전문가였을 뿐이었다. 그가 고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것을 보면 어느 모로 미국이 독일 정책을 펼치면서 어디에 방점을 두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와 관련된 재능을 무엇보다도 쉬망플랜에 관한 협상에 활용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 모겐소플랜[Morgenthau Plan, 역자주 - 미국 재무 장관 헨리 모겐소가 제시한 전후 독일 산업 붕괴를 위한 계획]     


아데나워가 다행으로 여긴 것은 맥클로이가 워싱턴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독일과 미국의 관계가 전체적으로 고위위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맥클로이와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하버드법대’ 출신으로 전시에 이미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다. 맥클로이는 국방부에서 애치슨은 상무부에서 비슷한 지위에 있었다.     


처음에는 아데나워와 그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맥클로이가 독일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근무하는 기간 내내 그는, 자신이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이 독일 사회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독일인들의 독재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기우는 경향, 독일의 권력정치, 독일의 민족주의는 그가 크게 우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신뢰하기 힘든 아데나워 수상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맥클로이가 처음에는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협상 과정에서 세밀한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그의 참모들에게 자주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다양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곧 [국가 주도의 통제를 주장하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신봉자와 기업자유주의자, 대연정 신봉자와 반사회주의자, 기업통합 반대자, 유럽 [통합] 지지자, 좌파자유주의자와 독일 군부의 역할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가 여기에 섞여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고위위원회의 미국 측 위원이 취한 노선이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측근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써야만 했다.    

 

많은 사람이 맥클로이에게 늘 이 아데나워라는 독일인의 교활함에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었지만, 맥클로이는 아데나워의 점잖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데나워는 맥클로이가 고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될 것이라는 사실을 듣기 전에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맥클로이의 아내와 자기 죽은 아내인 구시 친서가 먼 친척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를 멀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맥클로이도 이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만 미국에서는 전시와 전후 초기에 독일인들과 가족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큼 불편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변하기 마련이었다. 아데나워가 잘 나가게 될수록 맥클로이 또한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일하기 시작한 초반에 자신이 ‘세 명의 동방박사’*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기게 되었다.      


* ‘세 명의 동방박사’[Die Heilige Drei Könige, 역자주 - 고위위원회 위원 3인을 빗댄 표현]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서방 열강의 다양한 대표들에 대하여 일련의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이러한 편견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그가 최고령자였기에 9월 21일 취임 인사차 페터스베르크를 방문하였을 때 자기 위엄을 최대한 내보이는 데에 이를 활용하였다. 3명의 고위위원들은 아데나워 수상이 자기 내각을 소개하기 위하여 그들이 서 있는 양탄자 앞에 기립하여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양탄자 위로 신속히 걸어 올라가서는 그들과 나란히 섰다. 그는 사실 의회를 대표하는 정부 수반이었다. 게다가 그는 1951년부터 외무부장관의 직무도 겸임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고위위원들의 상급자와 동등한 지위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정부 수반으로서 의전에서는 그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 그러한 차이는 곧 아데나워에게 이롭게 작용하였다. 고위위원회가 전승국을 대표하고 아데나워는 지위가 낮아진 독일인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었다. 사실 3명의 고위위원들 모두에게 쿠르트 슈마허가 받아들이기 힘든 대안이 아니기만 했어도, 상황은 아데나워에게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는 이 수상 재임 초기의 상황이 진전되는 것에 자기 영향력을 강력하게 발휘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신생 국가를 외부에서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여기에서 세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곧 환율, 베를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독일 기간 산업 해체라는 문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아직 수상의 직무와 권한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고위위원들은 영국 파운드화의 위기를 염두에 두고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하였다. 이와는 다른 생각에서 독일 마르크화의 환율을 높이고자 했던 독일 연방 정부의 제안은 무시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과 언론은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파리만이 아니라 연합국 전체가 그들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권한을 내세우는 것에 대하여 자기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독일 여론이 그를 냉정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서도 언짢아하였다.     


서방 연합국들이 하필이면 소련이 동독의 수립을 획책하고 있던 때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주체적인 외교정책을 꿈도 꾸지 못하던 상황에서 동베를린은 이미 자체적인 외무장관을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것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과거 동부 기민당(CDU)의 사무총장이었던 게오르크 데팅거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물론 이는 무늬뿐인 주권이었지만. 이미 정치 바닥에서 닳고 닳은 인물인 아데나워는 정치라는 것이 원래가 허상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연합국들에 맞서 최대한 빨리 자기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민주주의 차원에서 정당성이 없는 동부의 국가, 곧 동독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이 점에서 그와 내각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였다. 또한 정부와 야당도 의견이 같았다. 서부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소비에트-프로이센’에 맞서는 냉전은, 작센 출신 연방의회 의원인 헤르베르트 베너의 표현에 따르자면, 신성한 의무였다.    

 

이에 비하여 베를린 문제에 관해서는, 아데나워와 그의 내각 사이에 처음에는 견해차가 있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베를린] 서부지역의 분위기는 위기에 빠졌다. 경제적 상황은 비참하였다. 어찌 되었든 동독 지역에 있는 베를린은 여전히 정부가 있는 자리였다. 서베를린에 있는 이들은 이제 불안에 떨면서 베를린의 남은 지역, 곧 서베를린을 [서독의] 12번째 주로 지명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서베를린 시의회만이 아니라 본에 있는 사민당(SPD)도, 동독[문제] 때문에 [전승국] 4강 체제가 붕괴된 상황이, 소비에트 연맹이 기정 사실화 한 것에 맞서 서방도 실제적인 현실을 내세울 절호의 기회라는 점을 서방 열강들을 향하여 주장하였다. 여전히 외무위원회 위원장인 카를로 슈미트는 고위위원회 프랑스 직무대리인 베라르에게 사민당(SPD)이 서베를린을 [서독의] 12번째 주로 선포하는 계획을 무조건 지지할 것임을 표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한 것이다. 고위위원회에서도 이 문제에 관하여 이전에 확고했던 입장이 상당히 느슨해졌다. 애치슨은 한 때 베를린을 독일연방공화국에 통합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프랑스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무렵 베를린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늘날 돌아보자면 매우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베를린을 서독의 12번째 주로 만드는] 계획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 가지 근거를 들었다. 그 가운데 두 가지는 그가 늘 되풀이하여 주장하던 것이고 하나는 그가 마음속 깊이 품어 왔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고위위원들에게, 베를린을 [서독의] 12번째 주로 편입하는 것은 소비에트 연맹의 보복 조치의 위험을 촉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이는 서베를린을 안전하게 만드는 조치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근거로 독일연방공화국과 같은 취약한 국가에 대해 소비에트 연방이 국가의 일부, 더구나 베를린 일부를 요구하는 일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한 소련에 어떻게 [독일이] 홀로 맞설 수 있겠는가?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서방 열강은 베를린에 대한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근거는, 야당과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민당(SPD)이 베를린 시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그리 된다면 정부가 연방참사회를 장악할 수 없게 될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렇게 주장하는 배경에 냉정한 ‘국가 이성’(raison d'État)이나 특히 반베를린 정서에 따른 국내 정치적 기회주의 때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이는 사민당(SPD), 그리고 [주간지] 《슈피겔》에서 루돌프 아욱슈타인이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아데나워는 베를린 시민들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나치의] 제3제국 초기에 베를린에 대한 거부감을 크게 키운 바 있었다. 국무회의에서 그는 베를린에 대한 지속적인 경제적 지원을 추진코자 하는 확고한 의사를 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맞서고자 하는 동기도 있었다. 베를린은 “[공산주의] 동유럽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그러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베를린을 지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다시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 데에는 베를린에 파견된 사절이 믿을만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는 상황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민당(SPD)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만 잘 나갈 때는 시장단에도 속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한 때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데나워는 절대 잊지 않았다. 로이터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어서 본에서 중요한 협상을 할 때 AEG회사의 사장이었던 프리드리히 슈펜라트를 함께 데리고 왔다. 수상을 설득하여 베를린이 바라는 바를 관철하고자 할 때 로이터는 자주 전면에 나서야만 하였다. 슈펜라트는 젊었을 때 아데나워의 사람으로 쾰른에서 [정치를] 시작하였고 [나치] 제3제국 시기에는 아데나워가 어려웠을 때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소수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베를린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연방정부 수상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 아데나워는 [베를린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충분한 경제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였다. 그러나 야콥 카이저와 일부 인사들이 주장한 것처럼 일부 정부 부서들을 [베를린이라는] 과거 제국의 수도로 이전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그에게 베를린은 과거 제국의 수도였다는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을 때만 바람직한 도시였다. 연방정부의 일부 중요 부서를 앞에서 말한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이전하는 일은 아데나워에게는 가장 한심한 일이었다.     


그래서 베를린을 위한 지원은 확충되었지만 [베를린을] 서독의 12번째 주로 포함시키는 문제는 고위위원들이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반대가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연합국이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독일연방 수상이 최소한 중요한 논거로 작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사민당(SPD) 지도부가 베를린 문제를 정부와 야당 사이의 당쟁 거리로 만들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에 발생한 셋째 문제를 둘러싸고는 정부와 야당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것은 바로 산업 해체 문제였다. 국내 정치나 외교 차원에서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1946년부터 연합국의 산업계획은 자주 수정되었다. 해체되거나 파괴되어야 할 744개 기업의 명단은, [연합국이] 독일의 산업 능력을 과감히 축소하여 독일의 [또 다른 전쟁 촉발]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금 차원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1949년의 [독일] 산업 해체가 서방의 정치 상황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일 사람들만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적 입헌 국가의 출발이 대규모의 일자리 감소와 함께 진행되는 것이라면 실업률이 9%에 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혼란스러워하는 독일 국민이 서방 열강의 선의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독일연방공화국에서도 철저히 진행되고 있는 마셜플랜의 목적이 독일의 소중한 산업적 잠재력의 파괴와 일치할 수 있는가?      


그러나 아데나워는 20세기 국제정치에서 목적에 관련된 갈등과 부조리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원칙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 만큼 충분한 세월을 살아왔다. 아데나워는 영국이 최소한 세계시장에서 독일의 경쟁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매우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독일 산업의] 해체 목록을 작성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동기는 프랑스 측에도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안보를 우려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산업] 해체 문제는 독일의 국내 정치와도 관련이 있었다. 연방정부, 노조, 기업가, 사민당(SPD) 일부도 최소한 이 점에서만이라도 초당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를 위한 여건은 마련되었다. 정부 측은 카를로 슈미트가 독일연방위회 외교상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은밀한 협력의 제도적 전제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이 카를로스 슈미트의 집에 찾아가 그가 ‘양당 정책’에 동의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저녁에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미트는 당대표인 아데나워와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와 슈마허 사이에서 [독일 산업] 해체와 관련하여 첫 외교 정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논쟁의 정점에 이르기 직전인 1949년 12월 12일 블랑켄호른은 잘 나가다가 막판에 이르러 좌절된 노력에 대하여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시간여에 걸쳐 나눈 대화를 나눈 다음에 카를로 슈미트는 매우 지쳐 보였다. 얼굴이 부어서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이러한 자세로 나를 마주하고 앉아있던 그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속한 당의 동료들과 슈마허에 대하여 가장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슈마허가 내성적인 사람으로 불같은 성격이 아데나워의 정치에 대한 격렬한 공격의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슈미트에게 야당에 대하여 외교 정치 분야에서 협력을 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여긴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슈마허 씨의 언론 인터뷰 때문에 다시 모든 것이 소란스러워져서 공동 대화를 다시 추진하기에는 큰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화요일에 벌어진 논쟁을 매우 깊은 우려의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카를로 슈미트도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연방정부 수상을 비난하였다. 루르지역 문제와 유럽 연합 문제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인사 정책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슈미트는 아데나워가 보낸 특사와 헤어지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닌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슈미트는 11월 15일 독일연방의회에서 벌어진 격론에서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이 ‘고의적인 결과’(dolus eventualis)를 낳은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회 발언을 막아서 그러한 표현을 하게 된 것이고, 원래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얀 거짓말’(reservatio mentalis)이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의 도움을 받아서 사민당(SPD)의 가장 강력한 기둥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 맞서] 위험한 술수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아데나워 자신이 직접 사민당(SPD) 당수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슈마허는 [산업] 해체 문제로 아데나워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사실 서방 연합국들은 [독일의] 중요한 공장들의 해체를 중단하는 대가로 독일연방정부가 루르지역 관리에 필요한 정부 측에 배당된 인력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지금까지 아데나워는 이를 주저하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0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다른 나라들이 루르조약*에 대한 협력의 거부를 [업무] 방해로 여기고 그 반면에 [독일 정부가] 루르지역에 대한 [연합국의] 통제에 참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이제는 외교정책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루르지역에 대한 미국의 차관을 확보할 방법이 없는 노릇이었다. 내무장관인 하이네만이 이견을 제시하였지만 내각 전체가 아데나워의 뜻에 동의하였다.     


* 루르조약[Ruhrstatut, 역자주-1949년 4월 28일 런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3국의 6자회담에서 루르지역 관련하여 맺은 조약. 이는 1945년 샤를 드골이 야기한 루르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음. 루르 조약의 목적은 유럽의 안보를 보장하고 유럽 국가 간의 경제 협력을 촉진하는 것이었음. 1949년 11월 22일의 피터스베르크 협정으로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루르 조약에 가입. 이후 ‘석탄 및 철강 공동체’ 설립 후 루르조약은 1951년 10월 19일 폐지됨]     


이에 반하여 슈마허는, 아데나워가 루르지역의 산업을 외국이 무기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에 대하여 불법적인 동의 견해를 밝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연방정부 수상이 자기 의무를 이토록 소홀히 하다니 말이다!     


아데나워 자신도 독일 여론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영국의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방식으로] [연합국의] 요구 사항을 [무조건] 들어주는 정치가로 몰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내심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무장관] 에르츠베르거와 [암살당한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를 아데나워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1949년 여름부터 아데나워는 대규모의 철강공장이나 화학공업 시설을 해체하는 것을 그가 즐겨 하는 ‘유기적 결합’을 실행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였다. [연합국의] 통제를 독일의 이익에 대한 일방적인 침해가 아니라 유럽 차원의 미덕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프랑스 외무장관인 쉬망에게, [독일] 총선이 있기 전인 7월 26일 자의 매우 깊은 우려가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때 아데나워는 선거유세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선거 현장의 파국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산업] 해체보다는 서방 3개 연합국의 공동 관리를 제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쉬망은 여기에서 선거전에 뛰어든 정치가가 외교적 성과를 노리면서도 본심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949년 가을의 어려운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이제, 1922년과 1923년 휴고 슈티네스가 애호하던 생각인 루르지역 산업계 가운데 특정 기업의 소유권을 프랑스 측에 넘기는 방안을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막연한 구상이었다. 연합철강회사는 이미 적절한 기획안을 마련하였다. 쿠르트 슈마허를 중심으로 한 사민당(SPD)의 협상단도 1949년 12월 5일 멕클로이에게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트-튀센-제철소의 소유권을 국제화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데나워는 10월 14일 고위위원회 위원들과의 회의에서 [산업] 해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잘 알려진 그의 유럽 [통합] 구상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루르협약은  프랑스와 독일의 평화 관계 기구 마련을 위한 지속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양국의 상호 경제 이익을 정치적 협력의 바탕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1920년대 중반 독일·프랑스 관세 동맹에 가입을 지적하면서 에밀 마이리쉬와 나눈 대화를 언급하였다. 그 당시 마이리쉬는 부어바흐-아이히-뒤델딩겐 연합 제철소(ARBED)의 회장이었다.     

고위위원회 위원 가운데 누구도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자 아데나워는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하였다. 일단 독일 산업 재건에는 자본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프랑스는 이 [독일] 산업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프랑스는 안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자본이 없었다. 그러니 미국이 프랑스에 자본을 대주어 독일 기업의 주식을 살 수는 없는 일인가? 당연히 영국도 그러한 대규모 주식 투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여전히 망설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언성을 높였다. “수백 년 동안 서로 싸워온 두 나라에 이제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없애버리든지, 아니면 다시 친교를 맺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것처럼 서로를 없애버리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프랑소와 퐁세는 이에 대하여 비꼬듯이 응답하였다. “저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진지하게 말하였다. “저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외교 관례에는 어울리지 않게 프랑소와 퐁세를 비난하듯이, 프랑스가 1918년에 독일의 좋은 이웃이 될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하였다. 오히려 프랑스는 아무런 소득이 되지 않는 분리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아데나워는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이제는 수상이라는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 할 수 있고 화해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아데나워는 [단순히] 자기 의견을 제시할 뿐 아니라 로베르 쉬망이 새로 제안한 것에 대하여 깊이 실망했다는 말로 자기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쉬망은 서방 연합국의 [독일 산업] 해체 계획에 대한 독일 측의 비판에 강력하게 맞섰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아데나워의 의견에 맞선 프랑소와 퐁세의 강력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독일연방의회에서 나온 어떤 민족주의적 발언들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독일연방의회에서는 처음부터 [독일 산업의] 해체와 다른 여러 까다로운 문제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반대 의견이 제기되고 불평과 [연합국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독일 사람들의 환멸을] 독일연방의회가 촉발한 것은 아니라는 말만을 하였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이 독일연방의회의 일부 의원들의 발언에 대하여 반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데나워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자 했던 비공식적인 회담은 서로가 냉랭해진 채로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와 기자회견에서 ‘프랑스와의 협력’을 독일연방정부의 주요 노선으로 내세우는 것을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만 미국 측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미국과 독일의 관계를 개선하자면 프랑스와의 관계를 좋게 해가야만 할 노릇이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에서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책 노선이 얼마나 심하게 변하는지를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11월 초에 《차이트》의 에른스트 프리드랜더가 이와 관련된 대담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프랑스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아직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은 파리에서 서둘러 소집된 연합국 3개국 외무장관회의에 달려있었다. 이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측 위원에게 자기 기본적인 생각을 요약해 적은 ‘건의서’를 전달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문서에 연합철강소 측이 마련한 기획안도 첨부하였다. 이 기획안에는 외국 자본의 투입을 전제로 한 이 기업의 자본 지분의 새로운 구성이 담겨있었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는 세계적인 수준의 신문은 아닌 《볼티모어 선》과 대담하였다. 사람들이 아데나워에게 미국의 대통령이 그 신문을 정기적으로 읽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 대담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독일 산업에 낼 수 있는 자본 비율이 40%라고 말하였다. 여론에서 비판이 일자 그는 즉각 그 숫자가 언론 보도의 혼란으로 나오게 된 것이라는 변명을 하였다.     


서방의 외무장관들이 11월 9일과 10일에 파리에 모이자 진정한 유럽[통합]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질서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반자 관계의 시작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외무장관들은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이제 [독일 산업] 해체와 점령규약의 수정에 관한 협상을 위임하였다. 어찌 되었든 독일연방공화국은 루르협약에 협력하고 [연합국의] 군사안보위원회가 [독일] 경제를 통제하는 것을 수용하여야 했다.     


이제 아데나워의 시야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그는 미국의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었다. 독일 외교관들이 아데나워에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애치슨은 처음부터 독일에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 밑에서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으로 좌파 자유주의 진영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잘 아는 사람의 말로는 그가 “훌륭한 변호사로 전략가나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은 1949년 초에 마셜 장군의 후임이 소련에 대한 온건 정책으로 회귀할지 모른다고 근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애치슨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설립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여론을 따랐다. 1949년 가을의 미국 여론은 베를린 봉쇄 때와 마찬가지로 반공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을 시작할 수 있을지 아니면 모든 것이 일단은 정체되고 기분 나쁜 상황에 머물게 될지는 1949년 11월 9일과 10일에 걸쳐 파리에서 결정될 일이었다. 애치슨은 여기에서 상대적으로 간단명료한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독일 문제에 접근하였다. 곧 미국과 서유럽이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하는 것과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억압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전의 적들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여기에서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아데나워는 10월 말에 다행스럽게도 영국이 [독일 산업] 해체 문제에 관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영국은 무엇보다도 독일 여론에서 영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그의 강경 노선이 영국 하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상황은 1948년 초와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곧 미국은 강하게 밀어붙이고, 영국은 마지못해 따르며 프랑스는 불평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삼국의 합의가 아니라 프랑스 내각이 이 회담의 결의안을 채택하는 일이었다. 이는 [독일 산업의] 해체와 관련된 문제에서 합성 석유와 고무 제품을 생산하는 400개의 공장을 해체 대상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게다가 베를린에 있는 모든 공장과 함보른의 아우구스트-튀센 제철소도 살리자는 것이었다. 해체 목록에 여전히 남게 되는 공장은 살츠기터에 있는 헤르만 괴링 공장과 에센에 있는 크룹 회사 정도였다. 만약 이 시설들마저 남겨두게 된다면 쉬망은 협상 자리에서 자기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상응하는 대가로 독일은 기존의 서방 세계의 조직에 가입하여야 했다. 그 가운데에는 특히 ‘유럽경제협력기구’(OEEC)와 ‘관세무역일반협정기구’(GATT)가 있었다. 또한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협력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에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파리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에 이미 맥클로이는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회의가 끝난 다음 베를린과 본을 방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애치슨은 11월 11일 독일을 방문하여 아데나워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애치슨에게 자기 유럽 구상을 설명하였고 애치슨은 아데나워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어진 슈마허와의 대담에서는 별로 성과가 없었다. 슈마허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미국의 국무장관이 말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다가 격론을 벌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미국 외교의 수장은 아데나워가 미국 워싱턴의 바람직한 외교 상대라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슈마허만 없다면 독일 사민당(SPD)도 상대할만한 대상이라고 여겼다. 이리하여 독일연방정부 수상은 독일과 유럽에서 자신을 친미 정치가로 내세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서방 연합국이 파리회담에 이어 개최된 페테스베르크회담에서 양보한 내용은 독일언론에 보도된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록을 작성하는 일이 중요한 안건으로 남아 있었다. 아데나워도 자신이 바라던 루르협정 수정안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연합국이 제시한 카르텔 해산 조치를 계속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하는 문제가 본이나 파리 모두에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예측하고 있었다. 자르지역 정부마저 [프랑스가] 저수하게 된다면 슈마허가 독일의 가입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막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파리의 강경노선주의자들이 독일의 자르란트가 가입해야만 독일연방공화국의 가입을 용인할 것이라고 주장하리라고 예상되었다.     


그럼에도 독일 여론이 [이 협상에서] 커다란 돌파구가 마련되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연방의회에서 피를 말리는 논쟁이 벌어진 것 때문이었다. 슈마허는 의회에서 냉정한 전략가인 아데나워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야당 지도자인 슈마허는 이 논쟁을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는 루르지역규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독일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며 대규모 국제자본의 파렴치한 수작에 넘어가는 일과 다름없는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독일 안에서 연합국이라는 경찰에게 부잣집 금고를 내어 맡기는 꼴”이라는 것이었다. 슈마허의 당 동료인 아돌프 아른트는 헌법정치 차원의 논의를 전개하면서 아데나워가 독일연방의회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페테스베르크협정을 정부간 협정의 문제로 다루었다고 비판하였다. “저는 우리가 의회민주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헌법이 없는 군주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열정적인 프로이센 사람들을 독일과 국제 여론 앞에서 맹목적인 민족주의자들로 몰아갈 작정이었다. 슈마허는 “연합국의 독일연방정부 수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이런 계략에 빠지게 되었다. 11월 17일 고위위원들과 일차로 격론을 벌이고 난 다음에 그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1920년대의 것과 비교하여 역할이 변하였다고 말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의회의 좌파 의석을 차지하고 우파가 이성적으로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연합국의 부정적인 정책을 단계적으로 타파하는 방법이 사민당(SPD)의 접근법인 원칙주의적인 방법보다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노조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매우 든든한 일이었다. 야간 의회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측에서 정부 노선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한스 뵈클러가 이 소식을 아데나워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1951년 2월 사망할 때까지 이 중요한 [정부 수립] 초창기에 내정을 둘러싼 다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독일 노동조합총연맹 의장은 아데나워보다 1살이 많았다. 아데나워는 이 인물이 쾰른의 시의회에서 노조사무총장을 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높이 평가해 왔다. 뵈클러는 그 당시 아데나워의 당 동료였던 하스나 메어펠트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가 신임하던 노동자 지도자였다. 곧 과단성 있으면서도 현명하며 온건하며 타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전후에도 아데나워와 뵈클러는 함부르크의 지역위원회의 공동회의에서 늘 같은 노선을 견지해 왔다. 한스 뵈클러는 좌파를 맡고 로베르트 페르드맹게스는 우파를 관리하여 아데나워가 본에서 격동의 [정부 수립] 초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의 측근인 블랑켄호른은 1950년 1월 1일 그의 일기장에 그동안의 상황을 정리하며 1949년 9월부터 12월까지 연방정부가 순조로운 출발을 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보다도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중부 유럽, 곧 독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새로운 유화정책”과 프랑스와의 관계였다. 여기에는 매우 우려스러운 프랑스 측의 자르지역에 대한 정책도 관련되었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새해가 “외교나 내정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대로 이는 성급한 판단이었다. 현실에서는 1950년이 아데나워가 이겨내야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해였다.   

  

유럽에서 제일 실망한 인물”     


1950년에 들어선 지 채 1주일도 안 되어 아데나워는 그의 유럽 정책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본과 파리가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양측이 얼마든지 불만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가 불협화음을 내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커다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에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 측의 안보에 대한 불안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계속 다양한 형태로 모든 분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르지역 문제였다.     


프랑스 측에서 제기한 모든 문제에 대한 더 큰 이유는 분명히 독일이 다시 강자로 부상하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데나워는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모든 기회에 프랑스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표명하였다. 곧 최근에 있었던 지난 일 곧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라도 프랑스는 독일에 대하여 안보에 대한 거의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지속적으로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분야에 유럽통합에 관련된 미래지향적인 구상이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어도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차원의 화해로 나아가는 길은 자르지역 문제에 달려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 관계에 관련된 이 특별한 문제는 늘 되풀이 하여 주요 문제로 대두되는 운명에 놓인 것이었다. 이 문제는 1950년 초반 몇 개월 동안의 어려운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 중반에 궁극적인 해결책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근본적으로 1950년대 초반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양측이 절반만이라도 만족할 만한 해결책이 전혀 없어 보였다.     


프랑스가 자르지역과 관련하여 지닌 의도는 프랑소와-퐁세가 아데나워의 측근인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에게 1950년 1월에 매우 분명하게 전하였다. 곧 제2의 룩셈부르크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르란트가 국제법적으로 자율적이고 프랑스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는 룩셈부르크에 부여한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한 지위를 자르란트에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르자면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국가임에도 완전히 자율적인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프랑스가 지원하는 요하네스 호프만의 정부가 이끄는 자르란트는 일종의 [프랑스] 보호령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이제 언젠가는 다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독일 국가가 수립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프랑스의 처지에서는 자르란트의 특별 지위를 국제법적으로 확립할 절호의 기회였다. 처음부터 자르지역은 프랑스 점령지역에서 분리된 것이었다. 이 지역은 나중에 라인란트-팔츠에 편입된 109개 행정구역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자르지역 정부는 대부분 프랑스에 이민하였던 독일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파리 정부에 복종할 의사가 있는 이들이었다. 프랑스에 기대를 거는 많은 이들은 자르란트를 위하여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독일이 어떻게 될지 1947년과 1948년 자르지역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프랑스와 긴밀한 유대를 맺은 미래를 꿈꾸었다. 1949년과 1950년에 상황은 변하였다. 그러나 이때 자르지역의 친프랑스 세력이 급격히 늘게 되었다.     


자르란트는 1947년 프랑스와 화폐와 관세 동맹을 맺었다. 압류된 석탄광산과 강제 관리를 받고 있던 뢰클링 공장은 프랑스의 [국가] 경제계획에 온전히 포함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자르지역에 관한 프랑스 측의 뜻을 지지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본에서는, 그러한 동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지지한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1950년 1월 초 프랑스 외무부에서는 프랑스와 자르란트가 맺을 세 개의 조약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 조약들은 [자르란트를] 실질적인 보호령으로 확립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자율적인’ 자르란트의 외교대표와 [군사적] 방어는 일단 프랑스가 책임져야 할 일이 되었다. 자르란트 주재 프랑스공화국 대표는 프랑스 측에 중요해 보이는 모든 문제에서 절대적이거나 유보적인 거부권을 지니게 될 것이었다. 또한 자르란트의 탄광은 50년 동안 프랑스가 운영하게 될 것이었다. 이는 소유권 문제에 관한 규정과 독일과의 평화협정과 무관하게 보장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자르란트의 철도에 관한 권한도 계속 보유하게 될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자르란트의 수립과 결부시켜서 프랑스의 강제조치에 대하여 본의 간접적인 인정을 받아내고자 하였다.     


프랑스의 자르지역에 관한 정책은 그 근거에 경제적 동기와 정치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르지역의 광업과 철강 산업에 대한 통제권은 프랑스의 광업이 독일의 광업에 비하여 원래 열등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자르란트의 보호령 지위는 어느 모로 프랑스가 호르라인부터 시거란트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동부의 국경에 다른 독일지역과 분명하게 분리된 독립적이거나 반독립적인 독일의 위성 국가들을 수립하여 완충지역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원래 드골 장군과 프랑스 외무부의 이러한 구상에서 1950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르란트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프랑스의 이러한 자르지역 정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 정책은 격세유전적이든 잠정적이든 폐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1950년대 초반기의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에서 그의 자르지역 정책만큼이나 논란이 되었던 것은 드물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본질적으로 아데나워의 생각은 서독의 다른 정당 대표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영국 외무장관인 베빈이 1946년 10월 자르란트의 분리를 선언하였을 때 아데나워는 《벨트》의 한 기자에게 건넨 성명서에서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의 논거는 분명하였다. 민족의 자결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독일과 [자르란트의] 평화협정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분리가 합법화된다고 하였다.     


자르지역 문제가 얼마나 폭발력이 있는 것인지를 아데나워는 이미 그 당시에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48년 10월 바센하임에서 로베르 쉬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를 주제로 충분히 논의하였다. 나중에 아데나워가 기억하기로 이때 쉬망은 아데나워에게 자르지역을 독일에 반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의 보장만을 원할 뿐입니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수상으로 재임하던 초기 몇 달 동안 이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에 슈마허는 프랑스의 자르지역 정책을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자르지역 문제가 국내 정치에 미칠 부정적 영향의 가능성은 분명해졌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야당은 이러한 명분이 있는 안건을 민족주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당연히 주저함이 없었다. 야당만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적 사안이라는 제단 앞에서 기꺼이 큰 목소리로 찬미를 드리는 자민당(FDP)과 독일당(DP)에도 이는 중요한 주제였다. 부수상인 블뤼허는 그의 일요대담에서 자르지역 문제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견해를 밝혔다. 독일연방정부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쓰도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토마스 델러는 지나치게 강한 어조로 이 문제를 거론하여 독일연방정부 수상이 고위위원회 프랑스 위원들에게 즉시 공개서한으로 법무장관에 대한 유감을 표명해야 할 정도였다.  

   

기민당(CDU) 내부의 민족주의 파벌도 거침이 없었다. 사실 전체 독일 문제에 대한 당연직(ex officio) 차원의 책임을 지고 있던 야콥 카이저는 1950년 1월 중반에 자신이 작성한 ‘자르지역-건의서’가 언론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대외비’로 명기된 이 문서가 언론에서 특히 지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바람은 실제로 이루어져서 연방정부 수반과 장관 사이에 공개적인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서로를 공격하는 서한의 교류도 이어졌다. 아데나워는 이 연방정부 장관의 지나치게 노골적인 언사뿐만 아니라 건의서 자체에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것에 대하여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고래 싸움에는 새우등이 터지는 법이다. 연방정부 대변인이었던 파울 보르딘이 희생양이 되었다. 그가 내각의 의견을 언론에 부주의하게 드러냈다는 이유였다. 그가 사임하면서 아데나워가 수상이 된지 4개월 만에 연방정부에서 쫓겨난 두 번째 대변인이 되었다.


언론이 자르지역 문제를 어느 모로 극단적으로 몰아가자, 프랑소와-퐁세는 [독일] 정부의 언론 통제가 최근에 있었던 [나치] 독일의 음울한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는 가시 돋친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1950년 1월에 독일의 [산업적] 무장 해제에 대한 이러한 중대한 요청이 있었던 때부터 계속 자르지역 문제가 그의 연정을 붕괴시키지는 않을지언정 내부적으로 흔들어 놓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하여 근심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데나워는 델러가 함부르크에서 행한 프랑스에 적대적인 내용이 담긴 발언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에게 이 장관을 조속히 내각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카이저 또한 강력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자르지역 문제의 근본적인 위험 요소는 그의 서방 정책 전반에 관련된 국내 정치적 기반을 흔들어 버린다는 사실에 있었다.    

 

외교적 차원에서 본 당국은 프랑스에 맞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아데나워는 최대한 조속하게 유럽평의회에 가입하는 것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독일 산업] 해체, 루르지역의 통제, 점령규정의 개정, 유럽의 단합에 관련된 기본 문제들에 대한 프랑스 측의 반론이 결국 자르지역 협정의 일부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의 태도는 그다음 해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현실을 냉정히 바라볼 때 이미 프랑스와 여러 문제로 다투고 있던 미국이나 영국이 하필 자르지역 문제에 관하여 프랑스와 커다란 논란을 벌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연합국의] 인사들이 그러한 부차적인 독일과 프랑스의 싸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자르지역 문제에 관하여 독일 인사들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기를 부탁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결국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사람들이 평화조약의 조항을 건드리지 않고 자르란트의 민주주의 원칙이 지나치게 도발적으로 손상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단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아데나워의 계산으로는 얼마 안 가서 독일연방공화국의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무게를 사람들이 느끼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 이후에 흔히 볼 수 있듯이 프랑스가 1950년부터 1월부터 3월까지 제기한 도발에 맞선 아데나워의 전략은 단계적으로 진행된 다양한 대응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제1단계에서는 프랑스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며 동시에 시간을 벌려고 시도한다. 제2단계에서는 막후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프랑스 측의 노선을 변경하도록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내치와 외교에서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제3단계는 원래의 강경한 태도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동안 전개된 긍정적인 변화를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로 양보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잊게 되거나 협상 결과를 [사실상] 승리로 과대 포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1단계는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이 처음으로 본을 방문하던 때와 맞아떨어진다. 그는 1950년 1월 2일 아데나워에게 자신이 1월 12일부터 15일까지 독일을 방문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처음에는 이 방문이 어떤 숨은 의도로 계획된 것처럼 보였다. 곧 두 달 전에 본과 베를린을 방문했던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을 따라잡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쉬망은 본에서 독일연방정부 수상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을 영접해주기를 바란다는 기묘한 요청을 하였다. 교섭을 벌인 끝에 쉬망이 탄 기차가 본으로 들어오게 하여 애치슨을 맞이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와 그의 수행원들이 그를 영접할 수 있었다.     


쉬망의 여정이 알려지자마자 아데나워는 샤움부르크궁의 수리를 하루 안에 완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성은 많은 인부가 작업하던 중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자기 매제이며 쾰른시의 고위 시정관리인 빌리 수트에게 시에서 보유하고 있는 가구, 그림, 은식기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시간에 겨우 맞추어 도착한 은식기 때문에 아데나워는 건축학과 교수인 한스 슈비퍼르트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쾰른시의 은식기야말로 프랑스에서 온 국빈을 대접하기에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대로 자르지역에 관한 프랑스의 계획은 이 방문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제 아데나워는 쉬망이 대화에 실질적인 내용을 담지 못하고 이 방문으로 [단순히]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독일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취해 프랑스의 자르지역 정책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하기가 어렵게 만들고자 하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방문 전에 아데나워는 최선을 다하여 자르지역 협약에 대한 독일의 단합된 전선을 형성하고자 애를 썼다. 블랑켄호른은 카를로 슈미트를 이 대열에 합류시켰다. 이리하여 그는 독일 정부가 자르지역 협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그에게 확신시키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서 ‘당파를 초월한 정책’의 가능성이 새롭게 제기되는 것에 대한 암시가 있었다. 여러 정당 대표는 이 정보를 접하고는 아데나워에게 이구동성으로 그들의 입장을 밝혔다. 곧 프랑스가 자르지역 협약을 맺게 된다면 각 정당은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에 찬성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1년여 전에 개최된 바센하임에서의 첫 회담과는 달리, 지금은 아데나워와 쉬망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파리에서 국내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고 있던 쉬망은 독일 언론이 오로지 하나의 주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곧 독일언론은 기분 나쁜 프랑스의 자르지역 정책만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 쉬망에게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쉬망이 바센하임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뜻을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래서 샤움부르크궁에서 개최된 최초의 성대한 국빈 방문은 제대로 된 분위기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38명의 인사가 점심 식사에 초대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프링스 추기경과 쿠르트 슈마허도 있었다. 슈마허는 매우 힘들게 계단을 올라와 2층에 도착했고, 2층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방과 방 사이로 그를 [휠체어에] 들어 날라야 했다. 쉬망은 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독일어로 연설하였다. 그러나 원래 웃기는 말로 식탁에 모인 좌중을 즐겁게 하던 사람이었던 아데나워는 자신도 퉁명스러워질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작심한 듯 미리 준비해온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저녁에는 에르니히 성에서 아데나워와 쉬망이 식탁에서 대화를 이어갔으나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블랑켄호른은 쉬망의 비서인 콩트 드 부르봉-부세가 독일 사람들은 자르지역에서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을 호출하여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폰 말트찬 남작을 즉시 본으로 소환하여 [업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원래 1950년 1월 16일로 예정된 독일·프랑스 무역 협약의 조인식이 연기되어야 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조용한 일요일 오전에 뢴도르프에서 블랑켄호른과 함께 전략을 숙의하였다. 아데나워는 쉬망의 독일 방문 목적이 2월 8~9일로 예정된 프랑스와 자르지역 정부와의 협약을 위한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를 잘 마무리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총리로 쉬망의 오랜 친구였던 조르쥬 비도는 제네바의 빅토르 쿠진느를 통하여 아데나워에게 자기 의사를 전달하였다. 곧 그 나름대로 제네바에서 아데나워와 맺은 약속에 충실하여 자르지역 문제에서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쉬망은 진실하지 못한 인물이라서 아무도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어느 정도 고소하게 여기게도, 쉬망의 [프랑스] 국내 정치적 입지가 미약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오후에 있던 대담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에르니히성에서 두 시간에 걸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아데나워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통역 없이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데나워는 프랑소와-퐁세가 문 앞에서 대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소와-퐁세는 독일인의 남을 무시하는 민족성에 대하여 기분 나빠하면서 늦어도 한 시간 후에는 들통과 빗자루를 들고 옆방으로 달려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키고 바닥에 널려 있는 조각들을 모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의 글에 나타난 두 가지 세부 사항이 관심을 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모든 문제를 세 당사자, 곧 프랑스와 독일과 자르란트가 모여 논의하자는 그의 제안이었다. 그러자 쉬망은 이 의견을 비도에게 전달했다. 비도가 외무장관이 되면 프랑스의 자르지역 정책은 더욱 부정적인 것이 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당 동료들이 문제였다. …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쉬망에게 자르지역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단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쉬망은 아데나워의 경고를 파리에 전달하였다. 곧 자르지역 문제가 전개되는 것에 따라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하는 문제도 논란의 여지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르지역] 협약의 비준을 적어도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할 때까지 만이라도 늦추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과 함께 본으로 돌아가면서 대화가 전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쉬망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자르지역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매우 놀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쉬망은 자르지역 문제를 제외하고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긴밀한 협력 단계로 끌어 올릴 방안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블랑켄호른의 기록에 따르면 본의 기차역에서는 차갑고 ‘매우 말이 없는’ 작별이 이루어졌다. 쉬망은 아데나워만큼이나 심기가 불편하였다. 프랑스의 기자들은 쉬망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낙담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이어서 한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포자기적인 것으로 들렸다. “우리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아데나워나 쉬망이나 이 실패한 회담에서 유럽 차원의 후광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국내 정치 상황에 묶여 있었다. 사실 둘 다 각자의 국익을 강력하게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다음 날 아데나워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프랑스의 자르지역 정책에 대한 그의 모든 권한을 상술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경고를 공개적으로 되풀이하였다.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와 로버트슨과 별도의 대담을 요청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자제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에 이어진 토마스 델러의 발언은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프랑스 측은 아데나워에게, 무역 협정이 이틀 안에 체결되지 않는다면 협상이 결렬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아데나워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자기 외교적 협상의 여지가 얼마나 좁은지를 다시 한번 인식해야 했다.     


아데나워는 이제 자르지역 문제를 서로 체면을 구기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방법에 대하여 깊이 고민을 하였다. 쉬망이 떠나자마자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와 양자 대화를 나누며 자르지역 경제를 그 당시의 루르지역의 산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적 권위 아래 두는 것에 관하여 탐문해 보았다. 그러나 맥클로이는 정확한 통찰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아무런 확답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1950년 3월 아데나워는 자르란트의 경제적 특별 지위에 관한 생각을 정밀화하였다. 곧 자르지역은 법적으로 다시 프랑스 점령지역 아래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자르지역이 국제법적으로 독일에 속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독일 입법기관의 의원들이 자르지역에 경제적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남부 독일과 로트링겐에 대하여 특별한 관세 규정을 두자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모든 특별한 정권은 자르란트의 국민투표의 결과를 존중하여야 한다. 이는 1935년과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생각은 아데나워가 인준한 1950년 3월의 자르지역 백서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3월 초에 이미 상황은 그러한 계획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3월 3일 자르지역협약은 프랑스 외무부의 ‘시계의 방’에서 조인되었다. 아데나워는 그 하루 전에 프랑소와-퐁세로부터 고위위원회와의 정례회의 말미에 이에 관한 개략적인 내용을 스쳐지나가는 투로 전달받았다. 아데나워는 이제 극도로 신중하게 처신해야 했다. 일단 아데나워에게는 자르지역협약을 다른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최대한 상처를 주는 형식으로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곧 1시간에 걸친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르지역 문제에 관한 지금의 규정은 나치를 떠올리게 한다고 단언한 것이다. “‘보호령’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나아 보입니다. 차라리 ‘식민지‘라고 말하는 것이 나았을까요? 물론 저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연방정부는 기만당한 것은 아니지만 곤경에 처한 것은 분명하였다. 서부 독일은 서양에 대한 신뢰를 크게 잃게 되었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유럽평의회에 [독일이] 가입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아데나워는 특히 이 조약이 독일의 동부지역 문제에 끼치는 파장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이 일에 서양에서 일어나고, 용인되고, 규정된다면 도대체 오더·나이쎄 국경에 관하여 폴란드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연방 수상의 이런 강경한 태도를 보았던 기자들은 3일 후에 3월 8일자 신문에 대서특필된 미국 기자 킹스버리-스미스와 진행한 아데나워의 기자회견 관련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비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킹스버리-스미스는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 유럽지부장으로 파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 기자회견이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독일이 단일 의회를 구성하는 완전한 연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한 꿈같은 생각을 제시할 때 흔히 그러하듯이, 아데나워는 영국과 베네룩스 국가들과 이탈리아도 그러한 ‘통일 의회’에 가입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선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비록 독일이 프랑스보다 인구가 2,500만 명이 더 많지만 각각의 국가의 의원 숫자는 같아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자르란트를 [독일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기본적인 생각은 하나였다. 독일과 프랑스가 핵심이 된 연합에서 통일 유럽을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외교가에서 나온 반응은 분명하였다. 이 인터뷰가 매우 진지한 것으로 미국에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하필이면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이 프랑스와의 완전한 연합을 제시했다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한 제안은 [사실] 1940년 6월 초 프랑스에서 [독일과의] 지상전이 벌어지던 위험한 때 영국의 처칠 수상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이 제시되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드골은 ‘프랑스국민연합당’(RPF)의 당수로서 파리 프랑스 의회 건물인 부르봉 궁전에서 다른 정당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또한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에 맞서 십자군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한 기자회견에서 드골은 프랑스와 독일의 연합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갈리아, 게르만, 로마 민족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에 맞서 군사 동맹을 맺었던 일과 칼 대제 통치 후기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또한 아데나워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르지역 문제가 자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르지역의 주도권은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     


그의 주장에 대한 반응이 매우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느낀 아데나워는 3월 21일 킹스버리-스미스와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 회견에서 한 말은 좀 더 현실적이었고, 아데나워의 생각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유럽연합이라는 이상적인 계획을 이제,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해온 생각에 맞추어 재단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먼저 그는, 아마도 드골의 발언에 힘을 얻어, [미국과 소련의] 동서 갈등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연합을 유럽연합국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생각을 제시하였다. 곧 서유럽이 새로운 정치생명을 보여주게 된다면 소련은 유럽대륙의 정복이라는 매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독일의 관세동맹을 언급하였다. 독일관세동맹과 관세의회는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의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논조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독일과 프랑스의 연합에 관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곧 단계적으로 ‘두 나라가 관세와 경제 분야에서의 융합’. 입법권을 지닌 ‘공동 경제의회’, 각국 정부의 결정으로 수립한 경제의회를 책임지는 ‘기구’. 경제의회와 정부의 과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확대되고 양국의 통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 정립의 정치적 효과는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측의 안보에 대한 요청이 충족될 것이고 독일 측에서는 민족주의의 발흥이 억제될 것이었다. 결국 이는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둔 경제적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그 당시 추진 중이던 베네룩스국가들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연합을 위한 노력,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세협상을 들었다. 이 모든 것은 마셜플랜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계획을,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에서 매우 강력하게 이끌어 낸 것이라는 사실은 킹스버리-스미스와의 2차 기자회견을 한 다음 닐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고위위원회의 프랑소아-퐁세와 그의 동료 위원들에게 자기 생각을 새삼스럽게 제기하며, 자신이 생각했던 1925년의 관세 동맹 계획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이 제안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었다. 곧 유럽평의회 가입 문제에서 조만간에 [독일이 치욕스럽게] 항복하게 될 것이기에, 이를 유럽의 미래 전망이라는 장밋빛의 짙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단기적인 전략적 동기도 여기에서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이 당시에 아데나워는 거의 극복하기 힘든 독일과 프랑스의 적대감은 정부와 국민의 환상을 민족 국가의 이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통하여 바꾸어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민족적 이익은 유럽의 차원에서도 지상명령으로 들리겠지만 이를 상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제적 반응은 확실히 미약하였다. 프랑스의 정보국장인 테이젱은 즉흥적인 제안을 거부해야 하고, 독일을 품에 안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아데나워의 제안을 무시했다. 영국의 공식적인 입장도 마찬가지로 차가웠다. [영국의] 야당 지도자인 윈스턴 처칠이 독일과 프랑스의 연합에 관한 생각을 긍정적으로 여긴 것이 아데나워에게는 전혀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독일연방의회에서도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민당(SPD)의 외교정책 대변인인 게르하르트 뤼트켄스는 아데나워의 기자회견 활동을 빌헬름 2세의 개인 통치에 비견한다고 말하였다.     


모든 면에서 아데나워의 제안은 좌절된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이 시기에 깊은 고립감을 느꼈다. 파리와 런던은 아데나워에게 등을 돌렸다. 유럽통합 운동에 어떤 성과가 있을지가 매우 불투명하였다. 맥클로이는 일주일 내내 본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데나워는 서유럽 정부들과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외교정책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에 관한 정보는 언론을 통해서만 얻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국제정치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으며 관련 정부들은 그 변화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과연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협상이 재개될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비도 정부는 이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럽평의회나 특정한 유럽 국가들 사이의 관세동맹 계획에서 어떤 현실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 여전히 참모부 구성 단계에 머물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어떻게 될 것인가? 동서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독일의 상황이 다시 위험해진 동시에, 미국에서 나온 정보에 따르면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공산화된 중국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화해의 시기가 도래할 것인가? 아니면 냉전이 더욱 격화될 것인가?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분명히 아데나워가 해외 정보 수집 부서를 제대로 확충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제대로 된 차관을 아직 찾지 못하였다. 1949년 10월 아데나워가 [차관으로 임명하기로 정한] 헤르만 요제프 압스는 프랑스와 미국의 마음에 안 들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망설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독일의 외교정책은 [반드시] 정부와 야당이 동등하게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아데나워는 다른 사람을 뽑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는 아직 공석에 있는 외교부서와 중요한 해외 주재 부서의 수장으로 과거 정부에서 일한 외교관을 임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파리, 런던, 뉴욕 주재 독일 총영사를 파견하는 일을 망설였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잠정적으로 제3국에 독일 외교관이 주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결국 3명의 총영사가 임명되었다. 그들은 모두 외무부 출신이 아니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출신 자민당(FDP) 의원인 하인츠 크레켈러는 뉴욕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슐랑게-쉐닝겐은 런던으로 갔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그의 이웃인 슈륄터-헤름케스의 충고를 따라 정치와는 거의 무관한 예술사가인 빌헬름 하우젠슈타인을 파리 총영사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파리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대사인 게파르트 폰 발터였다. 그는 과거 정부에서 제대로 업무를 익힌 사람이었다.   

  

이제 확실한 것은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하는 문제가 일단 준회원국 자격으로 정리되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제를 자르지역 협약 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은 역효과가 나는 것으로 드러났다. 비록 사민당(SPD)이 여전히 강력하게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 무렵에는 아데나워와 [사민당(SPD) 당수인] 슈마허 사이에 비교적 긍정적인 대화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과의 복잡한 서신 교환을 통하여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한 것에 따르는 국내 정치와 외교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의 생각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이 먼저 가입을 추진하지는 않고 요청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자르란트 [국가]가 수립된다고 하여도 이는 독일이 암묵적으로 자르란트의 자율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독일이 잠정적으로 유럽평의회의 준회원국으로 가입하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정회원의 자격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연합국이 추가적인 긍정적 ‘자세’를 보일 경우에만 독일연방의회가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승인할 것임을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였다. 이리되면 자르지역 협약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잠재우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과 여전히 강력한 반독일 정서를 지닌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에게는 이것이 지나친 농담처럼 들렸다. 독일이 유럽의 문명국가들의 모임에 가입하도록 문을 열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독일 ]사람들은 가입 조건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프랑소와-퐁세는 이를 뼈가 있는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가 여러분 [독일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할 때마다 우리는 뺨을 한 대 얻어맞게 됩니다.”     


유럽평의회에 최대한 빨리 무조건 가입하라는 서방 연합국의 압력에 맞서서 아데나워는 새로운 논지를 전개하였다. 곧 독일이 [유럽평의회] 가입을 결정하게 되면 소련에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50년 부활절에 아데나워는 영국의 자유주의자로 《이코노미스트》와 《뉴스 크로니클》의 발행인인 레이튼 경과 논쟁을 벌였다. 곧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가입하게 되면 독일이 서유럽에 확실한 기반을 잡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독일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이렇게 말한 의미는 사방 강대국들이 독일을 푸대접하였기에 서방과 유대를 맺는 것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데나워의 그러한 발언은 무엇보다도 모든 중요한 분야에 대하여 서방 연합국들의 동의를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레이튼 경이 들은 바대로 유럽의 문제에 대한 강한 책임을 지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서독의 안보의 보장과 [독일 국가] 방위에 관한 정보를 고려한 것이다.     


맥클로이는 3일 후에 바트홈부르크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진행된 5시간에 걸친 아데나워와의 대담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 곧 유럽평의회 가입 결정은 독일연방공화국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의무에는 권리가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서유럽은 파괴되고 분열되었으며 무장도 안 되었고 공산주의자 때문에 내부적으로 취약해졌다. 이미 독일에서는 자포자기의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산업계조차도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동부, 곧 소련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서유럽 지역의 안정은 미국만이 아니라 서유럽 측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는 말미에 아데나워는 본심을 드러내었다. 곧 여기에서 그는 서유럽의 무장을 완비하고 필요한 군부대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맥클로이는 이에 대하여 신경질적으로, 더 나아가 거의 짜증스럽게 반응하였다. 독일이 유럽평의회 가입을 계속 지체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결속에 대하여 계속 부정적으로 나온다면 미국이 서유럽에 대하여 무관심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방어 경계선’을 미국 대륙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발터 리프만의 글이 회자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독일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맥클로이가 얼마 전에 워싱턴을 다녀온 차이기에, 아데나워는 그의 설명을 분명한 경고로 여겨야만 했다.     


결국 이 긴 대화는 미국이라는 점령 세력이 [독일의] 생사가 달린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의 입법 [과정]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인상을 주었다. 맥클로이는 소득세를 낮추는 것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세금 경감으로 투자와 구매력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본의 다수당이 직업공무원제도의 개혁에 대한 미국의 생각에 반대하지 않으려는 자세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여전히 대기업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 안 되어 고위위원회 회의에서 드러날 예정이었다.     


아데나워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자르지역을 보호령, 심지어 식민지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그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독일연방공화국도 별반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자기 서방 정책의 명백한 위기에 대한 [아데나워] 수상의 반응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지속해서 서유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그의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정점이 킹스버리-스미스와 가진 기자회견이었다. 이 회견에서 아데나워는 진정한 유럽통합론자로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였다. 유럽평의회 가입 방식에 대하여 완고하게 협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았던 이들은 여기에서 아데나워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되었다. 아데나워에게는 독일의 법적 지위의 수호, 동시에 자기 국내 정치적 권력 기반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외교는 위대한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닳고 닳은 변호사의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힘든 시기에 자기 잘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 그는 자존심 강한 독일인으로서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독일 민중의 민족적 정서에 호소하며 동시에 그 자기 내면에 숨어 있던 감정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그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곧 그는 멀리 내다보는 유럽인인 동시에 끈질긴 전략가이자 자존심 강한 나이든 독일인이었다.  

   

총선 이후 아데나워는 주로 본에만 머물렀다. 가끔 연방정부 수도 밖에도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였다. 그래서 한번은 함보른의 아우구스트-튀센 제철소의 직원들 앞에 서기도 하였다. 그들은 아데나워를 연합국의 산업 해체 음모에 맞서는 구세주로 열렬히 환영하였다. 1950년 4월 초중반에 그는 독일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위대하고 강한 [독일] 민족의 대변인이라는 메시지를 서방 연합국 정부들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공식적인 도시 방문으로 그는 그러한 명분을 제시하였다. 바로 뮌헨과 베를린 방문이 그것이었다.     


이 두 방문에서 그는 서방 연합국들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뮌헨에서 개최된 기사당(CSU)의 경제인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연합국들이 독일연방정부 세수의 절반에 해당되는, 점령[군 유지]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제는 상호적인 무역자유화를 승인하고 무엇보다도 독일의 철강 수출량 쿼터를 높여야 했다. 또한 독일은 최소한 유렵평의회 각의에 옵서버로 참관할 수 있어야 하였다. 곧 단순히 자문회의의 위원으로 머무는 것은 이제 아데나워 생각에 “우리 [독일]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특히 영국 외무장관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병세가 점차 심해지고 있던 베빈은 3월 28일 하원에서 윈스턴 처칠과 논쟁을 벌이면서 [당시] 독일이 비스마르크 시대에 그 뿌리를 둔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발언에 분노하며 청중들이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곤경의 시기에, 이러한 파국에서 독일 민족이 보여준 것과 같은 그토록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는 민족을 이 세상에서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외침은 베를린에서 하기 위하여 아껴두었다. 아데나워는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오래된 제국 수도로 길을 나섰다.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토마스 델러, 야콥 카이저도 그를 수행하였다. 비용 절감에 민감한 프리츠 쉐퍼는 결국 신중하게 본에 남았다. 아데나워는 3일 동안 베를린을 돌아다녔다. 베를린의 재건은 여전히 독일 서부지역 지역에 비하여 뒤처져있었다. 그리고 베를린의 시민들은 누군가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전해줄 사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의 이 첫 방문은 [수상과 베를린 시민] 양측에게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이제부터 베를린에 대한 조치를 가시화하여 베를린 원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독일연방대표부 건물의 낙성식을 거행하고 이 도시가 독일연방공화국에 속한다는 점을 어디서나 매우 강조하였다. 아데나워와 당시 베를린 시장인 에른스트 로이터 사이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쳤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개인적으로도 이 방문에서 베를린 시민들과 화해하였다. 그가 나타나는 모든 장소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 환호하였다. 그때까지 그를 그토록 환대한 도시는 없었다.     


베를린 방문의 절정은 티타니아궁에서 한 연설이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베를린 의회 의원들과 서방 연합국 도시주둔군사령부 인사들을 포함한 약 1,800명의 초청 관중 앞에서 연설하였다. 강당 안은 독일의 모든 주 깃발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독일 동부지역 주들의 깃발 위에는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블랑켄호른은 세심하게 밑줄을 그은 연설문 초안을 아데나워에게 건넸다. 그는 그 연설문의 기본 요점을 일기의 메모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넣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은 베를린에서 독일연방정부가 연합국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태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의 이익을, 특히 독일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유럽 정책에 관한 서방 열강들의 접근 방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맞서고, 유럽통합을 지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을 서유럽 연합이 받아들여 줄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하였다.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점령규정을 개정하고 나서야 유럽평의회에 [독일이] 가입할 것임을 천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내용은 연설의 끝으로 미루어 두었다. 아데나워는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독일 국가의 3절을 부를 것을 요청하였다.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3절의 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독일국가의 1절만 열창하였다. “독일이여, 그 무엇보다도 독일이여…” 서방의 [베를린]시 점령군 사령관들은 분노하여 자리에 앉아있었다. 베를린 사민당(SPD)의 좌파 지도자인 프란츠 노이만은 일부 당원들과 함께 과시하듯이 무대를 떠났다.     


반응은 뜨거웠다. 독일 동부지역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이렇게 하여 자기 뜻을 분명히 전달하였다고 확신하였다.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의 심각한 비난에 맞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독일연방정부에서의 저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1918년 이후의 [바이마르] 공화국과는 반대로 민족주의적 흐름을 막아서 민족 정서가 올바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연설의 주요 대상은 동베를린 시민들이었다. 결국 “[독일 국가의] 제1절은 매우 오래된 구식의 가사를 담은 것으로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부를 수가 없습니다. 2절은 약간 어리석은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3절은 여전히 타당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데나워의 수상 재임 초기에 일어난 몇몇 가지 사건들은 아데나워가 민족의 이념과 민족 정서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민족 이념과 민족 정서를 선점하고 그 목적을 변경하고자 한 것이다. 곧 그는 자기 정치를 위하여 이를 선점하여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SED)이나 슈마허가 이끄는 [서독의] 사민당(SPD), 나아가 극우파들이 민족주의적 구호를 들고 나오며 그에게 맞서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기능 변경을 하여 독일국가(國歌)에서 민주주의적 입헌국가에 맞갖은 내용을 끄집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 독일 국가에 나오는] ‘통일과 법과 자유’(Einigkeit, Recht, Freiheit)이다!     


독일 동부지역, 곧 동독 정부와의 논쟁에서 아데나워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차원에서만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독일 서부지역 국민은 서방과의 유대와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오히려 독일인은 민족적이기에 서양 민주주의와의 공동체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아데나워는 서방 강국들에 자신이 농담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이 모든 독일인과 민족 전통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을 일시적으로 상실한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정서를 이성적인 서방 정책으로 이끌 것인지 아니면 불안하게 떠돌며 방황하도록 내버려 둘지는 자기 손에 달린 일이라고도 여겼다.     


독일의 여론은 서방 제국들이 이러한 아데나워의 제안을 딱 꼬집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은 독일연방정부의 소득세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사실 이에 관한 견해차는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고위위원회 측에서 행사한 첫 거부권으로 티타니아궁에서의 연설과 시기적으로 인접한 때 이루어진 것은 우연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거부권은 결국 4월 말에 철회되기는 하였지만 [독일 국민은] 기분이 계속 불쾌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이제 기분이 매우 상하게 되고 민족주의자 진영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원래 민족주의자들은 아데나워의 유럽 구상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이들이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의 발행인으로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인 파울 세테는 아데나워 수상이 이미 그들의 진영에 들어왔다고 믿었다. 세테는 한 논설에서 이제 아데나워는 “유럽에서 가장 실망한 사람이다.”라고 썼다. 그는 서방 국가들이 자기와 동등하게 독일을 대접해주었더라면 지난 가을 아데나워가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독일을 서방 공동체 안으로 이끌고자 마음을 먹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아데나워가 서방 여러 나라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년 만에 아데나워는 “서방 [중심] 이념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에서 기분이 상하여 삐딱하게 [서방을] 의심하는 자가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가장 불만인 것은 독일이 여전히 서방의 주요 세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4월 말과 5월 초에 런던과 파리에서는 서방의 방위계획에 관한 포괄 회의가 열렸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전체와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의 역할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본은 찬밥 대우를 받았다.

    

서방 연합국은 독일에 유럽평의회 가입을 여전히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블랑켄호른은 1950년 4월 말 런던을 방문하는 길에 이본느 커크패트릭 경과 회동하였다. 이 당시 그는 아직 영국 외무부의 독일부 부장이었지만 이미 로버트슨 장군의 후임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커크패트릭은 독일이 너무 빨리 다시 일어나 엄청난 잠재력을 드러내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이었다. 바로 그래서 독일이 반드시 유럽평의회에 가입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이다! 블랑켄호른은 독일이 유럽평의회 가입을 주저하는 이유가 히틀러 시대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이러저러한 면모를 보여주어 [서방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이 유럽평의회 문제에 관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서방 측의 양보도 기대해볼 만한 것이었다. 그러면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은 외교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커크패트릭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였다.     


그날 저녁에도 아데나워의 특사로서 아데나워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한 블랑켄호른은 안보 문제와 관련하여 일단 큰 희망을 두지 않았다. 만약 러시아가 서방을 공격한다면 영국도 안전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독일 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을 증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북부 아프리카에 핵으로 무장된 강력한 폭격부대를 배치하는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이 부대는 소련의 핵심 산업지역인 로스토프와 바쿠를 초토화시키는 공격을 감행하게 될 것이었다. 소련이 이를 두려워한다면 중부 유럽에 진주하지 못할 것이었다.    

 

처칠도 마찬가지로 독일이 유럽평의회에 즉각 가입할 것을 아데나워에게 간곡히 요청하였다. 유럽평의회의 자문회의는 7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처칠은 이 회의에서 모든 국가가 동등한 권리를 지닌 회원국 대접을 받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일단 모험을 감행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비록 이때문에 쿠르트 슈마허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될 것이 예상됨에도 말이다. 사실 아데나워의 진영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아직 엇갈리고 있었다. 야콥 카이저와 구스타프 하이네만이 내각에서 심각한 이견을 제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5월 11일 런던에서 대서방위원회의 연초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때까지는 상황이 명확하게 정리되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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