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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14. 2023

독일 초대 수상 2

1949~1950

1952년 독일연방의회에서 연설하는 아데나워


쉬망플랜     


이제 여론이, 유럽 전후 역사의 전환점을 곧 인식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1950년 5월 8일 아침, 곧 독일군이 1945년에 무조건 항복한 지 정확히 5년이 지난 다음 아데나워는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에 관한 건의서 초안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승인하였다. 이 문서는 즉각 인쇄되었다.    

 

이날 월요일 정오에 프랑스 외무부 촉탁인 로베르 장 미슐릭은 블랑켄호른을 방문하여 로베르 쉬망이 아데나워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자기 임무를 극비로 다루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누구도 서한의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또한 바트고데스베르크에 있는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위원들도 그가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해달하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위원들과 아무런 접촉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쉬망의 2장짜리 편지에 날짜는 5월 7일로 나와 있었고, 친필로 쓴 “진심어린 인사를 드립니다. 쉬망으로부터”라는 서명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시작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 유럽, 평화의 미래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기를 요청하는 뜻에서 귀하께서 5월 9일 화요일 저녁에 수용하고 공표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우리 [프랑스] 정부의 성명서에 관하여 귀하에게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제가 어떤 생각에서 이 성명서를 작성하였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래 나오는 문장은 장 모네의 유명한 보고서에 나오는 것이다. 그는 아데나워가 쉬망플랜의 기안자로 곧 알게 된 인물이다. “세계 평화는 오로지 평화를 위협하는 위협에 창조적으로 맞서는 노력 없이는 보장될 수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활기 넘치는 유럽을 문명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관계의 확립이 필수적입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모네의 글에서 나온 것이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자기 제안이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그의 근본적인 주장인 경제에 전념하면서 독일과 프랑스를 핵심으로 하여 유럽을 키우는 방안이 담겨 있었다. “유럽[연합]은 단번에 이룩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형태로도 힘이 듭니다. 구체적인 성과가 먼저 현실적인 연대를 이룰 때야 유럽[연합]이 수립될 것입니다. 유럽 국가들의 모임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해소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추진되는 사업은 무엇보다도 먼저 프랑스와 독일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킹스버리-스미스와 가진 기자회견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계속 읽어나갔다. “귀하께서는 공개적인 성명과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에서 그러한 계획에 온전히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두 국가의 경제적 연합을 제한하셨습니다.”  

   

이제 프랑스 정부가 이 길을 나설 때가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한정된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분야에서 즉각 치고 나가고자 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와 독일의 석탄 생산과 철강 생산의 총량을, 다른 유럽 국가들도 가입할 수 있는 한 조직의 틀 안에서 공동으로 정해 놓은 수준에 맞출 것을 제안합니다.”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 쉬망은 정부 간 합의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합의는 한 중재관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중재관은 모든 관계자가 임명하게 되는 것이었다. 기업의 소유권 문제는 고위 관리들이 관여하면 안 되었다. 또한 루르지역 관리 책임과 독일에 부여된 다른 의무들도 고려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경우에 말이다.”     


다시 한번 “확실한 협력”, “유럽 경제기구를 위한” 구체적인 “기초”와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되풀이되었다. 비록 프랑스 국무회의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도 쉬망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있었다. “저는 이 성명서를 프랑스 정부가 목요일 저녁에 발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까지는 비밀을 철저히 엄수해야 했다.     

그날 오후 아데나워는 프랑스 측의 제안에 대하여 블랑켄호른과 논의하였다. 그는 이 프랑스의 제안이 매우 새로운 발전을 이끌 것으로 확신하였다. 여기에서 간단히 설명한 개념은 그가 수십 년에 걸쳐 품어 왔던 기본 구상과 매우 일치하는 것이어서 그는 이에 즉각 동의하였다. 여기에서 모든 것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협상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커다란 가능성에 비해 보면 위험은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추진하기 위하여 아데나워에게 필요한 강력한 도움이 될 것이기도 하였다.    

 

두 통의 편지가 작성되었다. 하나는 공식 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것이었다. 공식 서한은 비록 공개적으로 이 구상에 동의함에도 아데나워가 늘 지니고 있던 신중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저는 이 서한에 전개된 구상이 독일과 프랑스의 밀접한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여겨 환영합니다. 이는 새롭고 평화로운 협력의 기초 위에 수립된 유럽의 질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물론 독일 정부는 프랑스 정부 계획의 세부 내용이 알려지면 이를 상세하게 검토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계획의 검토와 앞으로 필요한 조직 차원의 조치를 마련하는 데에 함께 할 것입니다.”     


개인적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자기 친구에게 솔직히 이야기하였다. 곧 “불신과 기피로 악화된 우리 양국의 관계가 이제는 프랑스 정부의 계획으로 건설적인 협력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쉬망에게 얼마 후에 [독일]내각에서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가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독일] 사민당(SPD)이 이에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결론부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음에도 쉬망의 편지에는 빠져 있던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바로 “동등한 권리”였다. “귀하께서 저에게 잘 설명해 주신 프랑스 정부의 계획은 독일 여론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1945년의 대참사 이후 처음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동의 과업에 함께 기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녁 6시 50분에 미슈릭은 독일연방 수상을 예방하고 두 통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아데나워는 쉬망이 계획된 기자회견에서 이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 나서야 여론에 [편지 내용을] 알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나중에야 아데나워는 쉬망이 자기 입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게 되었다. 프랑스 국무회의는 화요일 아침에 소집되었다. 모네와 쉬망은 내각의 핵심 인물을 설득하기 위하여 많은 공을 들였다. 신속한 동의를 얻어내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래야 쉬망이 다음날 런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떠날 때 뭔가 들고 갈만한 것이 있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곳에서 쉬망은 프랑스가 독일의 철강 쿼터를 높이는 데에 동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일요일에 딘 애치슨도 쉬망의 계획에 대하여 보고를 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펠릭스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출신으로 트러스트,[Trust], 곧 기업합동을 강력히 반대하던 애치슨은 유럽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자유주의자 동료들이 매우 혐오하는 카르텔을 다시 형성하고자 한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 역자주 – 펠릭스 바일(Felix Weil)이 주도하여 세워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사회 연구 연구소(IfS)에서 시작되었음. 신좌파 사상의 본거지로 유명해 짐.]     


같은 시각에 프랑스의 국무회의와 마찬가지로 본의 독일연방 국무회의가 유럽평의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이때 벌어진 논의에 관해서는 회의 참석자 가운데 두 사람이 간략하게 묘사한 것이 남아있다. 곧 세봄 장관과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의 보고서가 남아있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흔히 해온 대로 세계의 상황에 대한 거대담론적인 분석을 근거로 유럽평의회에 독일이 가입해야 하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유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 사이에서 ‘제3의 세력’이 되어야만 자기의 입장을 내세우고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독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독일이 가입을 거부한다면 유럽평의회 자체가 와해될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야콥 카이저와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카이저는 동유럽 지역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강조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를 반박하였다. 곧 동유럽 지역은 서방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강력해질 때 안전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이네만과 카이저는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결정하게 되면 전쟁의 위험이 증대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카이저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유럽평의회는 대서방조약의 첫걸음이 될 것이며 서방 열강의 방어체제에 독일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각에서 커다란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10월에 하이네만은 물러나게 되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독일이 무인지경으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독일이 중립을 선택한다면 이는 무력으로 보장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중립적인 독일을 지체없이 침략하여 자기들의 말을 듣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이네만과 카이저는 내각에서 고립되었다. 그러나 논쟁은 매우 격렬하여 기민당(CDU) 소속 장관들이 별도의 회의를 열어야 할 정도였다. 그제야 이 두 사람이 양보하게 되어 유럽평의회 가입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근거를 보면 반대하는 장관들의 생각을 최소한 말로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이 통합되는 것이 평화를 보존하고 독일의 통일을 회복하기 위한 필연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독일연방정부는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초대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이제 블랑켄호른은 파리에서 전화를 걸어 [프랑스] 국무회의가 긍정적 결론을 내린 것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아데나워는 쉬망플랜과 관련된 일도 잘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양국 정부에는 여론의 반응을 최대한 이끄는 방식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할 중요한 과제가 남았다. 원래 쉬망플랜을 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직접 공표할 생각이 있던, 최고위원회의 프랑스 측 직무대리는 독일연방정부 수상을 생각하여 이를 자제하였다. 저녁 6시가 되자 쉬망은 프랑스 외무부 건물의 ‘시계의 방’으로 세계의 언론을 불러 모아 이 중요한 소식을 전했다. 그는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그러자 한 기자가 비판적인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모한 일입니까?” 쉬망의 대답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는 무모한 것입니다.”     


저녁 8시가 되자 독일연방정부 회의실에서 대규모 기자회견이 열렸다. 300여 명의 기자가 모였다. 아데나워는 많은 장관을 대동한 자리에서 오전에 국무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설명하고 쉬망플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세운 이들에게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연방제적인 유럽’, ‘제3세력’이 ‘세계에서 탁월한 평화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는 ‘독일의 재무장을 위한 결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럽평의회와 대서방조약은 그 목적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유럽] 동부지역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의회위원회의 수립을 위한 결정을 내린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 결정으로 철의 장막이 더욱 강화되고 베를린을 포기하게 될 것을 근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데나워는 이제 이 주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특히 국제 정치의 차원에서 강해질수록 … 이는 베를린과 독일 동부지역에 더 유익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커크페트릭에게 들은 정보를 전달하였다. 곧 점령군 세력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해소책이 조속히 마련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정치적 변화가 ‘지난 8일 동안’ 급격하게 이루어졌다는 말도 더했다.     


프랑스와 쉬망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오로지 칭찬과 찬미만 하였다. 곧 “넓은 아량” “최고로 중요한”, “25년 전부터 이러한 목표가 눈앞에 아른 거렸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쿠르트 슈마허는 비록 분명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사민당(SPD)이 제시한 해결책은 ‘유럽’(Europa)이지 ‘유럽 주식회사’(Europa-Aktiengesellschaft)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도대체 프랑스가 제시한 계획에 사회화가 어디 들어 있으며, 노동자들의 공동결정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날 이후 몇 달 동안 슈마허는 이러한 점들을 비판의 주안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야당이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을 반대하는 것에서 더 이상 큰 재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일단 산을 하나 넘게 되었다. 여론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은 몇 달 전만 해도 아데나워가 독일 국민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로 여겨졌다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된 것이다.     


며칠 후에 상황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변하게 되었는지가 분명해졌다. 미국은 이 계획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인 스포르차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 계획에 찬성하였다. 다만 [영국 측의] 베빈은 격노했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이 동시에 자신을 구석으로 몰았다고 느꼈다. 영국의 시각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걱정되었다. 곧 그때까지 강력하게 행사하던 루르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상실과 유럽 대륙의 매우 뛰어난 광업연합에서 축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영국은 여전히 무엇보다도 영연방에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당의 산업정책도 장 모네가 구상한 고위관리청에서 진행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쉬망플랜이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아데나워가 어느 때부터 알게 되었는지는 지금까지 접할 수 있는 자료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늦어도 그가 장 모네를 직접 만나 영국과의 협상 상황에 대하여 보고받은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을 발표한 다음에야 원래 입안자가 로베르 쉬망이 아니라 장 모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데나워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몇 가지 걱정이 생겼다.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연합국 군대의 해상운송 조직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917년 그는 런던에서 연합국의 보급물자 전체를 수송하기 위한 선단을 구성하였다. 이를 일러 ‘연합국 해운 지휘부(AMTE)’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국제적으로 구성된 팀을 운영하고, 국가별 관료주의의 태만을 극복하고, 핵심 분야에서 탁월한 조직력을 발휘하여 폭넓은 효과를 거두는 방법을 배웠다. 아데나워는 또한 모네가 그 이후에도 국제연맹의 사무총장 직무대행으로 몇 년간 근무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192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는 국제금융계에서 일을 하며 폴란드, 발칸지역, 샌프란시스코, 양쯔강을 누비고 다녔다.     


1938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조짐이 보이자 프랑스 정부는 그를 워싱턴으로 파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일단 비행기 1,700대를 구매해야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즉시 그에게 1918년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해상운송을] 구성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1940년 6월의 프랑스 함락을 프랑스-영국 연맹의 수립을 통하여 막아보려던 처칠의 모험적인 계획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다.     


모네는 처칠의 위임을 받아 영국 ‘보급위원회’의 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민주주의의 무기고’를 자처하였다. 그는 다시 한번은 워싱턴 정가에서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모종의 일을 전개하고 나서 1943년에 활동 무대를 북부 아프리카로 옮겼다. 그리고 드골 진영에 합류하여 여전히 많은 물자를 대서양 넘어 운반하는 일을 지휘하였다. 이는 ‘자유 프랑스’(France libre), 곧 드골 망명정부 군대의 무장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드골은] 이미 57세가 된 그를 프랑스 정부 ‘경제계획부장’으로 임명하여 프랑스 경제 현대화의 임무를 맡겼다. 이 맥락에서 모네는 철강 산업의 강제적인 증설도 책임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철강이 과잉 생산되고 독일 철강 산업이 다시 본궤도에 오르게 되자 모네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현대화 계획의 민낯이 드러나는 날이 더 빨리 다가오게 되었다.     


그는 정당과는 거리를 두어 단 한 번도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파리 정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를 핵심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배후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며 현대화를 추진하고, 뜻을 같이하는 집단을 조직하며, 프랑스에 필요한 것을 세계 정치적 차원에서 넓게 볼 줄 아는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모네는 프랑스, 미국, 영국에 넓은 인맥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정계와 경제계에 내로라하는 인물들로, 모네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그에게 낯선 나라였다. 그는 늘 독일에 적대적인 진영에 있었다.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서방 민주주의의 확실한 협력을 구현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모네였다. 아데나워가 곧바로 알아본 대로 그는 강인한 인물이며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경제계획부장으로서 독일의 광업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한하여 프랑스의 필요에 맞추지 못한다면 바로 자신이 먼저 곤경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데나워가 그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시절의 연합국이자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연합국 지도층이 꼬인 문제의 타결책을 모색하면서 이 탁월한 능력을 지닌 매우 영리한 인물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핵심 산업에 장기적으로 재갈을 물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누구보다도 1950년 6월 긴 대화를 통하여 쉬망플랜의 배경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 하인리히 브뤼닝이 아데나워에게 경고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서 최악의 사태를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네라는 인물이 아데나워에게는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느 모로 장 모네는 대니 N. 하이네만과 유사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좀 더 정치적인 인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모네는 [하이네만과 마찬가지로] 국제 경제와 정치 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는 대서양 양안의 지도적 인물들에 대하여 [하이네만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하이네만과 마찬가지로 멀리 내다볼 줄 알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쩌면 그 또한 대서양 양안의 국민이 밀접한 동반자 관계로 유대를 맺어야만 번영과 생존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모네가 계몽된 현실주의자일지 아니면 그저 프랑스 내정을 똑똑하게 대변하는 인물일지는 좀 더 알아보아야 했다.     


아데나워가 6월 초에, 곧 모네가 본을 처음 방문한 다음에, 브뤼닝 휘하에서 제국 재무부의 차관을 지낸 한스 쉐퍼와 모네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고무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모네를 25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쉐퍼는 아데나워에게 모네가 독일과의 화해를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었다. 또한 독일을 위해 좋은 충고도 하였던 인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데나워는 모네가 비도 내각에서 자기 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5월 3일에 작성한 ‘제안서’의 내용을 알았더라면 안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제안서에서 모네는 독일이 서방 진영에 자리를 잡도록 하는 데에 미국이 동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국은 프랑스의 안정과 역동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조만간에 프랑스는 독일 산업의 경쟁력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었다.     


독일은 이미 철강 생산량을 1,10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늘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생산량은 여전히 900만 톤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가 반대하였지만, 미국은 독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의 철강 생산은 정체되거나 줄어들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독일은 덤핑 가격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프랑스 산업은 관세 장벽을 요청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카르텔이 부활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독일이 유럽의 동부지역 시장으로 진출하여 이를 정치적 협상에 이용할 것이고, 프랑스는 또다시 과거의 관행으로 되돌아가 세계 시장에서 뒤처진 생산력으로 주저앉게 될 일이었다.     


모네는 여기에서 역동적이고 건설적인 새로운 개념을 언급하였는데, 이 제안의 특징이 프랑스 측이 마련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철과 석탄에 관한 협정을 맺는 것이 독일의 위협적인 경제적 위력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모네는 분명히 한 것이다. 그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곧 상호 경쟁을 통해 공동 증산을 하되 어느 한 쪽이 철강 산업의 패권을 장악하지는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프랑스의 산업이 독일과 비슷한 수준으로 오를 수 있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되면 프랑스 산업은 독일 철강 산업계의 덤핑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특정한 카르텔에 가입해야 할 필요 없이도 생산을 증대할 기회를 얻게 될 일이었다. 사실 독일 산업의 부활은 ‘냉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을 힘이 없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제안으로 이제 이미 선포된 그 불길한 미래를 막기 위한, 프랑스가 주도하는 제대로 된 계획을 수립할 마지막 기회가 마련되었다.     


모네는 자기 힘을 유럽에 쏟아부으면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가 구상한 초국가적 권한을 지닌 고위관리청이 균형을 마련해줄 것으로 보았다. [국제] 조약으로 이 기구의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아직은 독일이 약하기에 독일과 협상을 통하여 이 조약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 기획이 실패한다면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었다. 미국이 지배하고, 영국은 이득을 보고, 냉전으로 동맹국이 필요한 연합국의 조치로 독일은 다소간 자유를 얻게 되고, 결국 프랑스는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 예상되었다.     


모네는 장기적으로 독일을 통제하는 방법도 구상하고 있었다. 특히 매우 현대적인 방법을 동원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고 장기적으로는 모네가 이미 그 당시에 밝힌 대로 유럽연맹의 수립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쉬망플랜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모네와 쉬망이 파리협약의 유일한 주체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상당히 노골적인 반독일 안보정책을 대표하는 구시대적 인물들이 프랑스 외무부에서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모리스 쿠베 드 무르빌과 정치경제부장 에르브 알팡, 그리고 그 당시 유럽 지역 담당관이었던 프랑소와 세이두였다. 이들은 쉬망플랜에 들어 있는 통제에 관련된 내용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 의회의 여러 정당의 충분한 지지를 확보해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독일 산업계는 어찌 되었든 쉬망플랜의 기본원칙에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독일 산업계는 이를 통하여 [연합국의] 루르지역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 자료를 정밀히 분석해 보면, 프랑스가 철강과 석탄에 관한 고위관리청의 계획을 통하여 앞에서 언급한 장 모네의 내부 건의서에 언급된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러한 분석은 1950년 6월 10일 귄터 헨레가 아데나워에게 제출한 건의서에 담겨 있었다.     


프랑스는 시장의 통합을 통한 대량 생산의 여력을 확보하여 그 당시 누리던 우위를 지속하고자 하였다. 또한 독일 철강 산업의 발전으로 프랑스의 수요가 충족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가 독일 석탄을 계속 유리한 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프랑스는 투자 확대로 자국의 광산을 경쟁력 있게 만드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차원에서 철강 산업의 통합은 독일의 철강과 석탄의 가격을 낮추게 되고, 이에 따라 독일 광업이 이에 적응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측이 보기에는 모네의 이 야심찬 현대화 계획이 근본적으로 곤경에 처하여 마지막 순간에 탈출을 모색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해야만 모네가 책임져야 하는 막대한 금액의 투자가 실패한 사실이 덜 알려지게 되기를 바랄 것이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희망과 회의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프랑스가 독일과 [친선] 관계를 맺기 위한 혁명적인 새로운 시도를 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프랑스의 이웃 국가인 독일은 이미 그런 결심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데나워는 그의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현실 감각에서 보면 교묘하게 설계된 프랑스의 함정에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하였다.    

 

그러나 모험해볼 만하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곧 독일이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자유 유럽 민족들의 현대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에 귀환하고 루르지역에 대한 통제에서 벗어나 100여 년에 걸친 독일과 프랑스 간의 경쟁을 극복하고 서유럽 민주주의 블록 안에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사실 1950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아데나워는 자신이 구상했던 서방 정책이 지체되는 데에 따른 부담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1950년 5월 23일 모네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속으로는] 매우 안심하고 있으면서도 쉬망플랜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눈매가 날카로운 모네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아데나워는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호기심을 보였다. 그리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나서야 의심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확실히 그는 우리가 진심으로 독일에 타국과 동등한 자격을 제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태도에서 어려운 협상을 거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세월이 묻어났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다음에 독일연방정부의 수상은 한스 쉐퍼에게 모네가 자신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사실 사람들은 쉬망과는 다르게 모네에게는 종교적 동기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불가지론적인 자유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어찌 되었든 문화투쟁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모네와 대화를 한 다음에 아데나워는 그가 “대단히 영리하고 매우 커다란 선의를 지니고 상당히 교양이 높고 조용하며 거만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모네는 진심으로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위대한 두 민족의 정치적 화해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인물로 보였다.     


모네는 막 런던을 들렀다 온 참이었다. 그는 런던에서, 영국이 일단은 [자기 계획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아데나워와의] 면담 전에 그는 여전히 독일의 외교 문제를 관할하고 있는 고위위원회를 먼저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는 모네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대로 독일과 프랑스가 직거래해도 되는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고위위원회가 협상 자리에 나와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모네는 워싱턴에 있을 때부터 친했던 맥클로이와 잘 통하였다. 쉬망플랜에 관한 협상에서 워싱턴이 적당한 인물을 파견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영국 측도 예측하지 못한 프랑스의 제안으로 영국이 루르지역 통제를 어찌 되었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이, 협상 자리에 고위위원회가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모네가 아데나워와의 직접 협상을 시작할 것을 승인하였다. 그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협상 경과에 대하여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오후에 그는 아데나워에게 일종의 방문 선물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곧 고위위원회가 옵서버 자격으로 협상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거의 두 시간 걸린 회의에서 아데나워와 모네는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측 위원 직무대리인 베라르, 로베르 쉬망의 비서 폰 베르나르 클라피에르, 그리고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과 서로 대화를 나누고 쉬망플랜의 진로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여기에 아데나워 외교정책의 운명도 달려 있었다.     


모네는 자기 계획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주도권을 쥔 처지에서 그 자신이 계획을 이끌고 그 진행 방식과, 함께할 사람을 정하는 문제도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협상의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졌다. 미국은 이 계획에 찬성하고, 고위위원회도 긍정적이고, 베네룩스 국가들도 함께 할 예정이었으나, 영국은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영국도 오래 지켜본 다음에 상황에 돌아가는 것에 따라 어차피 계획에 함께할 것이었다. 모네는 다시 한번 장대한 전망을 제시하였다. 곧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을 극복하고 그 당시까지는 군수산업의 근간이 되었던 중공업을 평화적 협력을 위한 것으로 재편하고 세계에서 유럽의 중요한 역할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모네는 절차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일단 경제적, 기술적 측면에 대한 고려는 접어두자고 하였다. 그리고 클라피에르가 강조한 대로 특별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단이 모네를 단장으로 하여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통상적인 성격의 계약서를 일단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러고 나서야 이른바 ‘전문가들’이 실무를 추진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정치적인 차원의 구상일 뿐 사람들이 커다란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야 비로소 구체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법이었다.     


이 계획은 아데나워의 귀에는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바로 그러한 식으로 자신이 평생의 위대한 과업에 매달려 왔기 때문이다. 그는 늘 일단 커다란 이상을 제시하고 그러고 나서 복잡한 협상을 진행해 왔었다. 이 협상에서 그의 전략적 능력이 완전히 발휘될 수 있었다. 확실히 방문자인 모네는 원칙적으로 아데나워가 [자기 제안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모든 것은 명백히 모네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고 절차 규정도 협상하여 결국 그 자신이 고위관리청의 수장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운영 규정이 확정되어, 중요한 경제적 문제들 예를 들어 생산 쿼터, 가격, 생산 방식 등을 결정해버리게 된다면, 독일은 손발이 묶여 모네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일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일단 모네를 믿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화 상대의 의도를 따르기로 하였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은 이 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완전한 정치가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모네와 생각이 같았다. 이 계획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비록 기술적인 측면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너무 세부적인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의 추구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노련한 현실주의자인 이 두 사람은 유럽 화해 정책이라는 높은 차원에서 커다란 과업의 첫 단계를 이루었다. 일반적인 원칙과 절차에 대한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아데나워는 그에게는 매우 드문 일을 했다. 독일 대표단에 속할 인물에 관하여 이제 막 알게 된 모네와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것이다.


모네는 [독일 측] 협상 대표를 [아데나워] 수상 직속으로 둘 것을 제안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전문부서가 잠정적으로 배제된 상황에서 로베르 쉬망이 단독으로 대표를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모네가 독일 협상 대표에 대하여 문의하자 아데나워는 발터 메르톤, 헤르만 요제프 압스, 한스 쉐퍼를 거론하였다.     

 

솔직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당시에 ‘프랑크푸르트 재건신탁위원회’의 감사원 원장인 압스가 최선의 인물로 보였다. 이제 쉬망플랜의 규정에 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직무 차원에서도 직접 관련되는 장 모네가 지휘하는 소집단에서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명민한 인물이 독일의 이익을 대변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서 아데나워에게는, 모네가 이 모임의 지휘자로서 광업 문제 전체를 매우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모네에 적합한 독일 측 상대자를 붙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진 대로 모네는 경제전문가를 독일 대표의 단장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협상단을 이끌고 싶어 한 것이다. 그래서 독일 측에서 교수를 파견해 주기를 바랐다. 모네는 압스에 관해 말하면서 막연히 프랑스 여론에서는 압스가 미국을 돌아다닌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압스가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기에 독일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압스가 프랑스의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스 쉐퍼를 지명하는 것에는 모네가 동의하였다. 쉐퍼는 스웨덴 망명 시기에 발렌베르크 그룹의 재정 자문으로 명성을 날린 바가 있었다. 아데나워는 칼 베르나르트도 지명하였다. 베르나르트는 ‘독일 주립은행 중앙협의회’의 의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모네는 은행가를 임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협상 [대표] 단장은 완전히 중립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오히려 베르나르트가 적임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인사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네의 생각에 대표 단장이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여야 했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모네 선생, 저는 프랑스의 제안이 저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제를 잘 처리하게 된다면 제가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데나워가 영국의 참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 영국인들은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모네가 들었다. 사실 모네는 독일과 프랑스가 먼저 화해하고 나서 다른 나라들이 함께 협력하도록 요청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아데나워도 더 이상 이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영국에 관하여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은 늘 [적을] ‘분열시켜 지배한다.’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가 일치를 이루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 두 나라가 일치를 이루게 되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모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의 세력이 모든 면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한스 쉐퍼에게 당시 상황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그러한 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결론적으로 언론 성명을 발표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하여 실망한 모네에게 이 성명으로 효과적인 외교적 무기를 전해준 셈이 되었다. “장 모네 씨와 독일연방 수상은 특히 [프랑스의] 제안이 신속하게 실현되는 것에 관하여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모네가 그의 《회고록》에서 말한 대로, 이렇게 하여 영국과의 협상 결과가 사실상 미리 정해지게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석탄과 철강 생산에 관한 협정의 제안과 독립적인 고위관리청의 결정을 모든 관계자가 준수하도록 하자는 모네의 기본적인 생각에 동의하였다. 런던에서는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이 6월 초에 결렬되자 아데나워는 한 달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것을 이루게 되었다. 곧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눈에 뜨이게 악화된 덕분에 독일과 프랑스가 매우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 그가 힘쓸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기회를 단단히 잡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다음 몇 주 동안에는 독일 측 대표 단장을 물색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하인리히 브뤼닝이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아데나워는 한스 쉐퍼를 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가 스웨덴 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극복하기 힘든 장애였다. 어찌 되었든 쉐퍼는 자신이 전문가로서 배후에서 조력하며 아데나워가 대표들을 선출하는 데 조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수상과 마찬가지로 그도 압스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압스가 프랑스 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면서도 아데나워는 쉐퍼에게 압스와 상의하여 다시 한번 모네에게 직접 건의해 볼 것을 지시하였다.     


제네바에서 온 룁케 교수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룁케는 장 모네의 계획에 대한 낙관주의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석탄과 철강 생산의 통합은 안보 문제 해결에 매우 훌륭한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분야별 통합이라는 모네의 구상을 다른 분야에 확대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쉐퍼와 마찬가지로 룁케는 이미 전문가로서 회의 준비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발터 할슈타인을 제1 또는 제2 대표 단장으로 거론한 인물이다.     


시간이 더 급박해졌다. 이미 6월 20일에 모네를 단장으로 하여 파리에서 협상 회의를 열기로 구상하였기 때문이다. 6월 15일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대표 단장을 맡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블랑켄호른은 그가 단장이 될 수 없는 명쾌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데나워의 개인적 대리자로 대표단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모네에게 언제든지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자신과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다고 전하였다. 오후에 할슈타인이 아데나워와 첫 회담을 하였다. 그는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고 결국 아데나워는 그를 대표단 단장의 자리에 임명하였다.     


아데나워는 노조 대표로 한스 폼 호프가 포함된 대표단을 직접 자기 휘하에 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모든 관련 인사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부수상인 블뤼허의 긴급 제안으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서 블뤼허,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프리츠 쉐퍼와 대담했다. 여기에서 대표단을 지휘하기 위하여 장관급 회의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회의체에서는 아데나워가 의장을 맡고 위에서 언급된 3명의 장관이 위원이 되었다. 또한 내각에서 안톤 슈트로흐가 추가로 참가하였다. 에르하르트는 자기 나름대로 이미 두 실무진을 구성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적 문제를 다루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문제를 다루도록 하였다.     

독일연방정부의 경제부와 마셜플랜담당부에서 나오는 불만의 소리가 컸다. 곧 연방정부 수상이 이 중요한 문제에서 협상을 자신이 직접 다루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누구도 아데나워에게 정색하고 맞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 협상대표단은 파리로 떠났다. 그곳에서 6월20일 프랑스 외무부 ‘시계의 방’에서 종전 이후 최초로 독일협상단이 공식적으로 [상대방과] 동등한 권한을 지니며 국제 협약을 맺는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독일이 국제 공동체로 돌아가는 길에서 첫 턱걸이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입장은 5일 전에 독일연방의회에서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이 가결된 것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자르지역 문제에 관련된 상황 때문에 그 누구도 비교적 소박한 투표 결과 이상의 것을 얻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는 반대표보다 68표나 많은 안정적인 찬성표를 얻게 되었다. 이는 쉬망플랜에 힘을 보태는 결과를 낳았다.  

   

1950년 초부터 상존해온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이 좌초할지도 모를 위험은 5월 9부터 6월 20일까지의 짧은 기간 안에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은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쉬망플랜에 관한 협상이 시작된 지 5일 때 되던 날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 1950년대 전반에 유럽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던 안보 문제가 이제 여론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과 쉬망플랜은 여전히 평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로 여겨졌다. 서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이러한 조치들의 평화 보장 특성이 돋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1950년 6월에 시작된 안보에 관한 논쟁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논쟁은 바로 또는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일어날 것 같은 유럽 동부의 [곧 소련과 위성국들의] 침략에 대해 [서유럽이]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에서 한국전쟁은 그저 하나의 뇌관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독일 서부지역의 군사력을 다시 확충하려는 준비는 이미 북한의 공격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있었다. 미국 국방부와 영국 사령부는 물론 아데나워 자신도 이에 대한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망나니 같은 아데나워     


어떤 방식으로든 독일이 군사적으로 서방에 기여해야 한다는 아데나워의 제안을 이미 아데나워의 동시대인들이 가장 무모한 것으로 여겼다. [지금] 회고해 보아도 그러한 평가는 옳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것이 [아데나워가 독일 재무장을 생각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든 역사책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자료들을 보면 이미 6월 6, 7, 8일에, 곧 북한이 침략하기 거의 2주 전에, 고위위원회 위원들 사이에서는 독일의 군대를 은밀하게 재건하려는 일치된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이 [미리] 자세히 알려졌더라면, 아데나워가 샤움베르크궁에서 공개적으로 격분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아데나워에게 독일군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도구였다는 주장, 곧 위급한 때를 대비한 군사력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자주 되풀이 되던 주장도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하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서유럽] 방어 분담의 정치적 기능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여러 해에 걸친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점차 뚜렷하게 전면에 부각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 1950년 초부터 여름까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즉시 아니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과 동유럽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서 [서방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군의 조속한 재무장을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독일군이 [유럽] 방어에 비교적 소박한 수준에서 기여하는 것에 관련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킬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적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무장을 해야 하였다. 아마도 그래야만 적이 위협을 느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적이 위협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일단 전쟁을 대비해야만 하는 법이다.     


[독일의 서방에 대한] 군사적 기여에 관한 국내 정치적인 싸움이 전개되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좌파 세력에 속하는 이들 가운데 무조건적이거나 부분적인 평화주의자들로 아데나워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이는 도덕적인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독일과 같은 민족이 과연 다시 무기를 들어도 된다는 말인가? 그 당시 아데나워의 고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보면, 그 당시에 아데나워는 이러한 생각을 지향하는 것은 고사하고 받아들일 처지에 있지도 않았고 그럴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적의 공격에 맞선 무장을 통한 방어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모든 민족의 당연한 자연권에 속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부 수반은 군사력과 충분한 무장 확보를 위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적절히 준비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군사적 기여가 도덕의 문제가 되는 경우는 서방이나 독일연방공화국이 도발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공격적인 전쟁을 계획할 때일 뿐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오로지 방어적인 기능만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아데나워라는 이 신중한 독일 시민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어느 모로 효과적인 유럽 방어에 참여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가장 잘 해낼 수 있겠는가? 국민 대부분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는 민족에게, 독일군의 참여가 권력정치의 차원에서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러한 힘에 관련된 사안에서 많은 정치적 대가를 치르면서도 반드시 사민당(SPD)과의 합의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민당(SPD)의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군대가 정치적 통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독일 군인이나 군사적으로 무장된 전투경찰은 아데나워의 생각에 안보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비록 더 중요한 것은 아니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매우 불충분하기 짝이 없는 연합군의 독일과 유럽 주둔을 즉시 강화하는 문제였다. 또한 서방 안보의 공식적인 보장이었다. 아데나워는 베를린 봉쇄가 시작되던 때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약 2년 동안, 내부적으로나 자유로운 대담에서나 안보 문제를 논의할 때 무엇보다도 그 문제를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두 가지 상이한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는 서로 연관되기는 하지만 각각 다르게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단기적으로 가장 우려되는 위험은 [독일] 동부지역에서 병영생활을 하는 민정경찰이 빠르게 조직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아데나워의 생각에 완전히 비대칭적인 군사력의 관계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소련의] 붉은군대와 서방의 약하고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서방 군대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 곧 동독의 병영생활 하는 민정경찰의 숫자는 1950년 여름을 기준으로 약 7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무리는 이른 시일 안에 약 15만 명의 군대로 재편될 수 있는 세력이었다. 당장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군사력이지만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은 전혀 이에 대응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 연합군 사단에는 약 8만 명의 독일군이 복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독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이 군인들은 전투병이 아니었기에 독립적인 전투가 불가능하였다.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국의 군대조차도 [동독의] 민정경찰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맞서 적절한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어찌 되었든 독일연방공화국은 어느 정도의 결단으로 민정경찰에 맞설 수 있을 방어 군대를 조직할 수는 있었다.    

 

동독의 군대만 고려해 본다면 서독에도 병영생활을 하는 민정경찰을 수립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있었다. 국경의 길이가 길다는 사실과 민정경찰이 무장 공격하는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서독의 민정경찰이 동독의 민정경찰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야만 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동독의 민정경찰에 맞서는 대책의 마련이 매우 긴급한 과제였다. 서독 수립 초기에 서방 열강이 소련과 더불어 점령군의 철수와 관련하여 일정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에 합의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제한된 공격에 잘 무장된 동독 군대 앞에서 서독은 군사적으로 전혀 무방비 상태로 맞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되었든 병영생활을 하는 민정경찰에 맞서는 문제는 기술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독 군대의 수립에 관한 근본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 문제는 분명히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1940년 5월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유럽을 점령하기 위하여 소련이 [육군] 기갑사단과 공군을 투입할 수 있는 위험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면 말이다. 서방의 군사령부와 많은 정치가가 1950년부터 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이러한 필연적인 사건에는 오직 서독이 방어에 확실히 기여할 때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방의 대규모적인 재무장 계획의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가 수립되고 나서 서방의 군사령부가 이를 준비하게 되었다. [소련의] 붉은군대와 서방의 군사력은 1948년 초부터 [소련과 미국의] 동서 긴장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미 균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왔기에 [소련이 침공하면 서방의 군대가 계속 밀려나] [이베리아반도의] 피레네산맥에서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현실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군사령부에서 회자되던 라인강 전선을 사수한다는 계획들은 모두 정치가들을 심리적으로 안심시키기 위한 수작일 뿐이었다. 정치가들은 강력한 재무장 계획을 추진하는 데에 식견도 힘도 부족하였다. 분명히 1950년 초의 세계정세는 매우 심각하여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파리와 런던에서 개최된 대규모 회의에서 많은 계획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첫 결의를 도출하였다.     

서방의 군사령부는 그러한 조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1948년 1월 미국 워싱턴의 총사령관은 ‘오프테클’* 전쟁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 계획은 1952년까지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 계획에 담겨 있는 기본 전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어서 미국 군사령부는 이 계획을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사령부의 계획에 반영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 ‘오프테클’[offtackle, 역자주 - 미국이 소련에 맞서 세운 군사 계획으로 소련의 공격을 라인강 전선에서 막고, 미국 해군을 지중해에 주둔하고, 필요한 경우 핵무기를 사용하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연합사령관’은 전쟁이 4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보았다. 제1단계에서의 상황판단에 따르면 영국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 대륙이 붉은군대에 점령되는 것이 상정되었다. 북아프리카는 서방 열강의 손에 남아있게 된다. 또한 스페인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제2단계에서는 영국, 스페인, 서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방어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교두보가 마련되지 못한다면 유럽을 탈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첫해가 마무리될 무렵 운이 좋아 결국 영국을 지켜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시기에 소련에 대한 전술적 공습이 효과를 낼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회의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미국은 1942~1943년과 비슷하게 유럽 탈환을 위하여 군사력을 키우고 이탈리아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쟁 2년 차 (곧 제3단계)에서는 1944년의 침공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하였다. 한쪽의 최전선은 [프랑스] 쉘부르와 독일 만 사이에 전개되고 다른 한쪽은 남프랑스 지역에 전개될 것이었다. 대규모 협공으로 가장 강력한 소련 군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제4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 소비에트 연맹은 항복하게 될 것이었다.     


아무튼 문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음울한 현실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었다. 곧 소련이 공격을 결심하게 된다면 유럽 대륙은 무기력하게 희생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아주 먼 미래에 가서나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될 노릇이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아데나워에게 이러한 상황판단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사령관만이 1949년 가을에 이 ‘오프태클’ 전쟁 계획에 관한 정보를 알고는 매우 놀랐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미 1948/49년 겨울에 ‘겔렌 조직’*의 수치화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슈파이델 장군의 건의서를 읽었다. 아데나워는 암암리에 소비에트 연맹이 피레네산맥까지 진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비록 서방의 사령관들은 라인강을 따라 이어진 전선이 ‘가능하고 확실한’ 방어선이 될 것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현실적인 군사력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최악의 경우 거의 모든 독일 지역이 점령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겔렌 조직’[Organiation Gehlen, 역자주 - 전후 1946년 미국이 수립한 정보기관. . 겔렌 장군이 지도자였음.]     


1949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서방 연합국의 계획은 이제부터 위협을 느끼는 서유럽 사람들의 전형적인 성향을 보였다. 결국 그들은 자기기만을 하게 된 것이다. 서방 연합과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사령관들 간의 대화에서는 흔히 라인강전선,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의 일부 지역의 방어에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소련에 대한] 대응 수단이 부족한 상황에서 서유럽의 전략가들은 미국 지상군과 전략 항공부대의 대규모 증강을 기대했지만, 1951년 초까지도 미국은 이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그럴 뜻도 보이지 않았다. [유럽의 뜻과는 반대로] 미국은 유럽 자체의 군사력을 신속하게 증강하여 러시아의 공격을 막는 일은 무엇보다도 위협받는 당사자인 유럽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동서 긴장이 1949년 다시 완화되자 그저 계획을 세우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모든 군인과 정치가는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가 딘 애치슨이 1950년 5월 런던회담에서 확인한 대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워싱턴, 런던, 파리의 총사령부는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곧 전쟁이 발발할 때 유럽 국가와 지역만이 근본적으로 성공적으로 라인강 전선을 방어해야 한다면 독일군 창설은 필수적이었다. 미국 국방부는 기꺼이 1950년 5월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계획에 독일군 관련 요청을 포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프랑스와 영국의 여론을 고려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어찌 되었든 1950년에 이루어진 미국과 영국의 대화에서 런던이 독일연방공화국의 재무장을 필연적으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베빈과 애치슨은 필요한 경우에는 독일을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편입시킬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확실히 독일연방공화국이 외교와 내치에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가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었다. 슈파이델 장군은 프랑스 장군들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군 창설의 필요성을 최소한 프랑스 수도의 저명한 군사전문가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런던과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군사 정책적 합목적성과 정치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사안은 서로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서방의 [정책] 수립에서 자신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그 상관들이 아데나워와 블랑켄호른에게 보고할만하다고 여기는 정보에만 만족해야 했다. 그밖에 아데나워와 그의 참모들은 신문에서 정보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중순에 한스 슐랑게-쉐닝겐이 지휘하는 독일총영사관이 [독일의] 첫 영사급 외교대표부로 런던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파리와 워싱턴에 각각 하우젠슈타인 총영사와 크레켈러 총영사가 지휘하는 동등한 지위의 외교대표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서방의 주요 도시들과의 공식적인 교류는 1951년 초까지 반드시 고위위원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블랑켄호른은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서방 점령 세력의 ‘큰 정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고 자신이 들은 것을 퍼즐처럼 맞추어보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밤낮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데나워 수상의 분신인 이 인물은 1950년 4월 처음으로 런던에서 영국 외무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5월 말 쉬망플랜에 관련된 협상이 시작되면서 블랑켄호른은 파리에도 자주 나타났다. 쉬망플랜과 관련된 할슈타인이 지휘하는 독일 대표단을 통하여 많은 정보가 서서히 본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4월 중순에는 영국이 수상실 관리 가운데 군사 문제에 관하여 접촉 인물로 선호하는 슈베린 백작 장군도 런던에 초대되어 이른바 ‘브리핑’을 받았다. 독일 신문의 해외 특파원 조직의 수립도 1950년에는 아직 그 초기 단계에 머물렀다.     


서방이 여전히 무책임할 정도로 열악한 안보 상황을 어떤 결단을 내려 개선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문제는 특히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장 심각하게 다가왔다. 프랑스와 영국과 벨기에는 그들의 공포를 최소한 라인강 전선을 방어한다는 환상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위기가 발발하지 않는 한 견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연방정부는 환상으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위험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가들은 느긋한 생각에서 안보 문제 해결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독일의 경우 이것이 특히 두드러졌다. 아데나워가 상황의 심각성을 그저 모른 척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곧 도덕적 판단, 진정한 외교 정책적 판단, 특히 프랑스의 여론에 대한 고려, 국내 정치에 대한 올바른 판단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일이 [유럽] 방어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종의 무력시위가 될 일이기에,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탱크가 몰려오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안보 상황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유혹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가 처음부터 군사적 상황에 대하여 커다란 주의를 기울인 것은 그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매우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서방 연합국 측이 그에게 이를 독려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은 아데나워가 최소한 위험을 직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쾰른시장으로 재임할 때부터 장기적 정책의 시행에서 전쟁과 위기와 같은 어려운 상황도 고려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더구나 더욱 놀라운 일은 이 민간인이 군사전략적이고 군사기술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원래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데나워의 동시대인들에게도 이는 경제적 요소나 사회적 과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것이었다. 1914년 이전의 논쟁, 제1차 세계대전, 1930년대 후반의 전쟁 준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사람은 군대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그러한 문제에서 무엇이 본질적인지를 알고, 무엇보다도 안보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쯤은 알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아데나워 정도의 경험을 한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조용히 뒤로 미루어 놓고 서방 연합국들이 본래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독일연방공화국에 적절한 요청을 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하인리히 브뤼인 같은 인물이 옳게 여긴 노선이다. 이 전직 제국 수상은 1950년 4월 5일 헬레네 베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직 확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썼다. “장기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없이는 유럽이 제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다가 가장 적절한 시기를 택한다면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안보 문제에서 늘 서두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흔히 독일이 점령지역의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독일 군사력을 외교적 도구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1950년 여름과 가을에도 상황을 실제보다 더 비관적으로 설명하며 국내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이익을 취하려고 했다는 설명도 나중에 보태려고 한다. 그러나 1948년과 1949년,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에는 그러한 설명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미국이 독일에 군사적 참여를 강요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이에 관련된 독일의 선행 조치는 국내외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미국은 1950년 6월까지 독일에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 아데나워는 독일의 방어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늘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미국은 1949년 1월 미국이 처음 제기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미국 국무장관이 1949년 11월 13일 본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독일연방정부는 두 가지 이유로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희생이 너무 컸었고 또한 그에 따른 독일연방공화국이 현실적으로 당면한 위기였다. 애치슨이 이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데나워는 매우 정확히 기억하였다. 그러나 그 이틀 전 만해도 아데나워는 프랑스 낭시에 있는 신문사인 《레스 레푸브리센》의 기자인 폴 바르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동사령부가 설립된다면 독일연방공화국도 적절한 시기에 “유럽방위체계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서 독일군이 유럽군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기자회견에는 아무런 반향이 없었지만, 아데나워가 12월 3일 《클리브랜드 플레인 딜러》 신문의 존 리아카코스 기자와 가진 기자회견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동독의] 병영생활을 하는 인민경찰의 수립에 대하여 커다란 우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서방군에 속하는 독일 용병이나 서독군의 설립을 반대한다는 뜻을 강력하게 밝혔다. 그러나 긴급한 경우라면 유럽군의 차원에서 독일군 [창설]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미국이 아데나워에게 내부적으로만 불만을 토로하던 1949년 1월과는 달리 이제는 국내외 언론이 그의 이러한 무방비적인 발언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그는 자기 발언을 서둘러 무마하고자 하였다. 곧 서유럽 방위에 대한 독일의 참여는 유럽에 대규모 전란이 발생하는 극단적인 경우에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벌어지고 난 후였다. 고위위원회의 위원들은 공개적인 비난을 삼갔고 1949년 12월 9일에 개최된 비밀회의에서 아데나워에게 비교적 온건한 어조로 공개적인 해명을 삼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모든 당파가 통상적인 평화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독일연방의회에서 아데나워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기민당(CDU)] 당대표인 폰 브렌타노는 원칙주의자다운 해명을 하였다. 독일 국민은 독일의 재무장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사민당(SPD)은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독일 안보에 대한 책임은 점령군에 있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수십만 명의 독일 군인이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독일의] ‘국법’은 독일이 유럽 방어에 기여해야 한다는 ‘금시초문의 요청’에 반대한다고 한 것이다. 온 사방에서 새로운 독일 군국주의가 신생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특히 그 당시 사민당(SPD)은 나중에 전설이 된 논리를 전개하였다. 곧 민주주의의 확립과 경제적,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질서의 수립이야말로 소련의 군사력을 무력하게 만들 방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독일의 분단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군사력 강화는 그 분단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49년 12월 16일에 있었던 [독일연방의회의] 안보에 관한 논쟁에서 사람들은 그 어떤 형태든지 [독일의 유럽] 군사 방어 참여에 대한 거의 모든 반대 의견을 청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데나워는 리아카코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밝힌 생각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만약 안보 문제에 관한 논의가 단순히 서방 강대국들에 맞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계속 논의를 요란하게 확대하여 불편한 문제를 끌어들이는 명분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독일군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냄으로써 점령군 규정의 수정에 관한 문제에서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데나워가 그 당시 유럽 방어에 대한 독일의 기여를 무엇보다도 외교 수단으로 간주한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왜 아데나워가 독일의 안보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군 문제를 계속 되풀이하여 언급하였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독재자가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체험한 이 노회한 인물은 중단기적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상했었다. [동독의] 인민경찰이 서베를린을 공격하는 것이든, 아니면 소련이 유럽을 공격하기로 하여 그 접경지역을 공격한 데 따른 결과이든 말이다. 아데나워가 전쟁이 임박했다고 처음으로 언급한 1948년 가을에 비하여 군사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이 그동안 핵무기 능력을 증강하였고 베를린 위기와 같은 커다란 위협에 놓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데나워나 서방 여론에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가 있든 없든 그것이 전통적인 동유럽과 소련의 공격에 맞서는 확실한 무기로는 아직 여겨지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아직 비관주의의 술책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술책으로 국내외 정치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소련과 동유럽의 현실적인 공격이나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우려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주요 동기였다면, 책임 있는 독일연방 수상이 지속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는 또한 분명히 서방이 군사력을 강화하면 소련이 군사적 모험의 의도를 포기하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소련이 전쟁을 통하여 영토 확장의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보았다.     


1950년에 그는 전쟁의 위험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여론에 대고 자주 하였다. 그런데 주된 위험이 소련의 붉은군대로부터가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 또한 어느 정도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산업 중심지의 이른바 ‘제5열’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도적인 정치가들은 일단 모든 사람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는 공황에 빠지기 쉬운 여론에 대고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은 또한 정치가들이 위기 상황에서는 기꺼이 용기를 내고 그에 대한 근거를 충분히 제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파악해 보면, 아데나워가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마음속 깊이 소련과 동유럽이 서유럽을 공격할 의도가 있다는 것을 거의 확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지속적으로 좌충우돌한 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의 좌충우돌은 사실 서방 연합국의 자극에 대한 반응도 아니라 독알연방공화국이 군사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서방에 알리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보호가 서방 연합국의 도움만이 아니라 독일의 자체 군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경찰군대이든 정규군이든 말이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1950년 첫 석 달 동안에 내부적으로나 기자회견에서나 지속적으로 서방 열강이 공식적으로 독일의 안보를 보장해줄 것을 독촉하였다. 새롭게 알려진 미국의 ‘오프태클 전쟁 계획’을 놓고 볼 때 아데나워의 그러한 주장은 사실 매우 의미 없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모스크바는 결국 이러한 경우에 서유럽을 공격하거나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미국의 반격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1950년 5월 런던회담에서 발표된 성명에 따르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조약이 독일연방공화국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라는 자명한 일이었다. 서방 열강인 미국과 영국이 아무런 저항 없이 독일에서 손을 뗄 리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동독의 인민경찰에 맞서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데나워의 [독일에 대한] 안전보장의 요청은 서방 열강이 일단 독일연방공화국의 수호라는 원칙을 의무로 삼도록 한다는 데에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요청이 수용되면 연합군의 신속한 전략 증강에 대한 요청이 근본적으로 더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와 같은 인물이 독일의 자체방어 노력의 불가피성을 확신하고 있었다면 일단은 연방경찰 조직을 수립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이 촉발하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현실적인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기에 국경수비대와 루르지역과 [독일] 수도[곧 본의] 보호를 위한 군대가 어찌 되었든 필요하게 되었다. 각 주별로 기동경찰대를 두는 방법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이들을 위기 상황에서 단일 조직으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볼 때 연방경찰이 훨씬 효과적인 수단이 될 일이었다. 곧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연방경찰이 더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무장을 하는 데에도 유리한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서방 연합국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서독의 연방경찰이 점령군 규정에 따라 자력을 지니게 되므로, 적어도 수상실의 생각으로는 손쉬운 방식으로 그러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근본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 측이 병영생활을 하며 군사적 동원에 적합한 연방경찰을 창설하는 것은 사실상 동독 지역에서 1948년부터 전개된 변화를 따라가는 일일 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1950년 9월까지 확실하게 추진하던 이러한 계획은 주정부의 반대에만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이 일과 관련된 독일연방정부 부서의 부서장인 하이네만도 연방경찰의 창설에 대하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이 모든 것을 최대한 방해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였다.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이 연방경찰의 창립을 옳은 구상으로 여기면서도 “이 단어의 두 부분[곧 ‘연방’(Bundes)과 ‘경찰’(Polizei)을 [분리해서] 강조한 것” 에 매우 불쾌해하였다. 하이네만은 연방경찰 조직이 위장된 군대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바로 그러한 것을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하이네만의 반대를 감지한 아데나워는 ‘슈베린 사무실’에서 국외 안보만이 아니라 국내 안보에 관한 일도 다루도록 결정하였다. 이미 2월에 [아데나워는] 내무장관을 통하여 고위위원회 측에 [독일 정부가] 연방정부 차원의 국경수비대 수백 명을 소집하여 병영생활을 하도록 하겠다는 안을 제출하였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아데나워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는 이 제안을 무시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4월 28일 자 훈령을 통하여 기본법 제91조 2항을 긴급하게 발효시켰다. 이 법 조항은 연방경찰과 주경찰을 중앙정부에서 동원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병영생활을 하고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차량을 보유하고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연방정부가 내무장관의 책임 아래 투입할 수 있는 25,000명의 국경기동대를 창설할 것도 제안하였다. 1950년 5월 중순에 하이네만은 주정부 내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이 국경기동대의 인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곧 연방기동경찰대 명의의 인원이 20,000명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바람은 런던회담에서도 언급되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측은 독일이 그러한 연방경찰을 설립하게 되면 [유럽] 방어 기여에 적절한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아데나워에게 일단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안보 문제는 매우 긴급한 의제로 다루어졌다. 몇 주 전부터 동독의 독일통일사회당(SED)은 오순절 대회를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었다. 동독은 이 대회로 약 50만 명의 젊은이들이 동베를린에 모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서베를린에 대한 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수상실의 아데나워는 오순절 기간인 5월 말에 경계 단계를 격상시켰다.    

 

그 4일 전인 5월 24일에 아데나워와 폰 슈베린 장군이 처음으로 만나 1시간 동안 대담을 나누었다. 그전까지는 이러한 접촉이 블랑켄호른과 글롭케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폰 슈베린 장군은 미국과 프랑스 측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모르게 영국에 오랫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독일담당관 커크패트릭과 영국 장교들과 독일 안보에 관하여 긴급 논의를 하고, 필요한 경우 영국 군부가 얼마나 긍정적으로 반응할 지를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아데나워는 폰 슈베린에게 두 개의 주요 근심거리를 털어놓았다. 그는 동독이 주도한 침투로 [서독의] 국내 안보에 위협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붉은군대가 공개적으로 침략을 감행하여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엄청난 숫자의 난민이 쏟아져 들어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도 하였다. 독일연방 수상의 생각으로는 이 난민들을 통제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데에 기동력이 있는 연방경찰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 경찰은 소리소문없이 설립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슈베린은 이 문제를 [런던회담에서] 설명할 임무를 [아데나워로부터] 부여받았다.      


한국에서 전형적인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아데나워는 그러한 [형태의 전쟁] 위험을 예상했었다. 이 시기를 전후한 그의 활동의 상당 부분은 동독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소수의 참모들과 더불어 계획서를 작성해 온 폰 슈베린은 서둘러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연방기동경찰 설립에 관한 의견서’라는 제목의 1950년 5월 29일 자 제안서에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그 당시 영국 사령부의 관련 계획에 관한 의견도 담겨있었다. 사람들은 런던의 일부 인사들이 안보 문제에 관하여 독일이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라고 격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1950년 5월 말 아데나워는 수상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심하게 아팠다. 그는 뢴도르프의 침대에서 요양해야 했다. 블랑켄호른이 아데나워에게 당시 상황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다. 아데나워는 요양 중에 병의 차도가 있어 축일에 관하여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생기면 국정 계획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아데나워가 중요한 제안서를 작성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실현에 옮기거나 수개월 동안 끌어온 계획의 진행에 관하여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이상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필 그런 시기에 폰 슈베린의 제안서가 그에게 제출된 것이다.     


폰 슈베린은 소비에트 연맹의 대군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공격해 온다면 며칠 안으로 라인강까지 밀고 들어오게 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강은 기껏해야 일차 방어선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공격이 있게 되면 독일 내부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수반될 것으로 보였다. 전직 기갑사단장인 폰 슈베린은 그런 사달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게다가 800만에서 1,5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대량 학살이 발생하고 독일인들이 중앙 러시아로 압송될 것도 예상되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동부에서 벌어진 참극이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에서도 벌어질 참이었다. 독일연방정부는 그저 재난을 최소화하고, 상황을 통제하며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폰 슈베린의 또 하나의 제안서를 받았다. 이는 ‘서유럽 연합군의 틀 안의 독일군 창설 구상’에 관한 것이었다. 폰 슈베린은 여기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안보를 위하여 연합군에 독일이 기여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럽연합군에 편제된 독일군을 창설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정부의 국경경비대를 ‘연방기동경찰’로 재편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 연합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아예 독일군을 독립적으로 창설하는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독일 여론의 입맛에 맞게 하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편제되어 있던 러시아 ‘부역자군’을 모범 삼아 단순히 용병의 역할만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6월 초에 미국 언론이 독일연방정부 수상실의 건의서를 입수하였다는 소식이 언론에 새어나갔다. 그 건의서에는 25,000명 규모의 기동경찰대를 창설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맥클로이와 로버트슨에게서 비밀을 엄수하라는 충고를 단단히 받았던 아데나워는 국가 기밀 사항이 얼마나 빨리 미국 언론에 공개되는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놀랄 필요는 없었지만, 매우 화가 났다.     


이 모든 사태가 아데나워를 더욱 자극하여, 자기 구상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6월 6~8일에 아데나워는 로버트슨과 맥클로이와 프랑소와-퐁세를 차례로 뢴도르프로 초대하여 독일의 안보에 관한 문제 전체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세 사람의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개별적이기는 하지만 집중적으로 논의한 것은, 멀리 내다보고 심사숙고하여 취한 외교적 조치인 것으로 여겨진다. 심혈을 기울여 8월 말에 완성한 안보 관련 제안서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처음으로 독일군 창설이 말하자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진행된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시기는 독일 내부의 매우 위급한 긴장이 야기된 때이기도 하였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뢴도르프에서 아데나워가 매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폰 슈베린의 제안서를 바탕으로 하여 아데나워는 자기 시각에서 바라본 안보 상황을 설명하였다. 소비에트의 침공이 야기할 수 있는 결과는 이미 자명한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800만에서 1,0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의 물결이 라인강 지역과 그 너머에 넘치며 교통체계를 완전히 붕괴시켜 연합군의 작전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러시아가 점령지역 안의 노동력이 있는 독일인들을 시베리아와 우라늄 광산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면 제2차 난민 물결이 일게 될 것이었다. 이런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정부 수상으로서 책임을 지게 되고 이제 연합군의 대표에게 견해를 밝히라고 요청하게 될 노릇이었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폰 슈베린 장군의 건의서에 따르면 러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려면 오로지 독일이 어느 정도 무장을 해야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폰 슈베린의 계산에 따르면 10~12개의 기갑사단을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주둔시켜야만 러시아의 1차 공세를 차단하여, 서유럽에 대한 공격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분명한 것은 독일의 재무장 시기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의 자원입대 장교와 사병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국제 용병’을 창설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아데나워의 생각에 그러한 ‘국제 용병’은 눈에 뜨이지 않는 방식으로 창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분명히 그는, 현실적으로 수백 명의 독일의 젊은이들이 해마다 용병에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속내를 감추는 데 좋을 것이었다. 그래서 ‘국제 용병’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면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를 감출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용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에게 이 방법은 프랑스에 전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어차피 이 군대가 프랑스 안보에 기여하고 프랑스가 군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런던회담에서 독일의 연방경찰 설립에 대한 강한 생각에 반대한 것이 누구보다도 프랑스 측이기에 아데나워는 연쇄 회담의 끝에 만난 프랑소와-퐁세에게 특별히 독일연방경찰과 ‘국제 용병’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아데나워의 제안은 가히 놀랍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순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의 질문에 대한 프랑소와-퐁세의 답은 그의 질문과 제안만큼이나 의미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데나워가 곧 발발할 것으로 여긴 소련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사람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군사 문제에 관해서는 로버트슨 장군이 가장 깊은 식견을 보였다. 그는 또한 영국 군사령부가 독일에 군사 방어 분담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그가 아데나워와 나눈 이야기에는 상당히 무게가 있었다. 맥클로이와 프랑소와-퐁세는 당연히 군사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문외한들이었다. [그들은] “헤터 백워쉬의 촌뜨기만큼이나 미숙하였다.”고 커크페트릭이 12월 중순 내부 문서에 기록하였다. 아데나워는 로버트슨을 만난 자리에서 현재 소련은 아직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러시아의 핵무장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앞으로 1~2년 사이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단 핵무장이 완료된다면 소련의 침공이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도 말하였다. 그때를 대비하여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영국 정보당국은 동유럽과 소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붉은 경고등을 켤 만한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맥클로이는 서유럽의 군사력이 사실 매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특히 프랑스가 매우 취약하였다. 그리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없어 보였다. 어찌 되었든 전차 방어 무기 분야에서는 발전이 있었다. 상황을 볼 때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예상해야 했다. 다만 그러면 러시아는 러시아의 모든 중심부가 핵폭탄의 폭격을 받게 될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맥클로이는 얼마 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동독의] 자유독일청년단(FDJ) 춘계대회에 대하여 커다란 우려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공산주의자들이 50만 명의 청년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독에서는 그와 맞먹는 행사를 개최할 수 없었다. 맥클로이는 이 시점에서 독일연방정부가 청년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소년단과 교회 단체를 포함한 모든 청년회에 경제적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맥클로이는 아데나워에게 그런 제안을 하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아데나워는 어느 정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독일연방공화국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해준 것이 없었다. 청년단체들과 유스호스텔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했다. 더 나아가 젊은이들이 유럽 [통합]에 대한 생각을 지금보다 더 많이 하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에게 적절한 조언과 제안의 전달을 유보하였다.      


프랑소와-퐁세는 군사적 상황에 대하여 로버트슨과 생각이 같았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몇몇 숫자를 나열하였다. 프랑스는 50만 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겨우 8만 명만이 유럽에 주둔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에 15만 명, 인도차이나에 12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유럽 주둔] 병력이 너무 적었다. 아직은 약 2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 짧은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야 했다. 바로 그래서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러 가지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맥클로이의 구체적인 제안에 대하여 마침내 아데나워가 비교적 세밀한 답을 하였다. 그러자 로버트슨은 극단적인 제안을 했다. 그는 폰 슈베린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였다. 영국, 미국, 프랑스의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독일의 군사적 무장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론이 충격을 받을 것이 두려워 그에 맞은 조처를 하는 일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나중에 프랑소와-퐁세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였다. 독일이 재무장하면 정작 피하고자 하던 일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 그의 생각에는, 러시아가 독일의 재무장을 애초에 말살하기 위하여 선제공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의 시각에서 볼 때 프랑스 군대의 현대화가 급선무였다. 그러지 않고는 프랑스와 그 나머지 국가들이 독일의 재무장에 대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의 군사적 무장을 ‘단계적으로’ 진척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슨은 아돌프 히틀러가 그러한 방식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탁월한 방법을 이미 보여준 바가 있다고 풍자적으로 말하였다.     


8만 명에 달하는 독일의 연합군 지원 병력 또한 점차 그 수준을 높이고 무장을 갖추고 군사 조직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그는 ‘국제 용병’의 구상이 매우 적절하다고 여기며 이를 영국 군부의 실력자들에게 설명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결론적으로 아데나워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매우 실용적이고 포괄적인 조치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반면에 맥클로이는 ‘국제 용병’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 비록 그가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적 인물들과 논의할 것에는 동의했지만 말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영토에 상당한 숫자의 독일군이 주둔하게 된다면 프랑스 자체의 병력을 증강하는 데 역량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대담에서는 독일 여론에서 부정적인 반응(‘새로운 외인부대’[Fremdlegion]!)이 예상된다는 것과 프랑스에서 나올 반대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논의 된 것이 없었다.     


로버트슨과는 다르게 맥클로이는 이미 아데나워가 여러 차례 언급했던 유럽군의 창설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단 서방의 여러 국가가 각자 자국의 군대를 강화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유럽통합이 진전됨에 따라 국제군 창설의 구상을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이제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소와-퐁세는 부정적인 자세를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아데나워의 [독일] 연방경찰 창설에 관한 생각에 대하여 무례한 반응을 보인 것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또한 [독일] 연방경찰이 결국 독일군 창설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세관과 국경경비에 11,000명, 연방정부 수도 경비에 5,000명이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25,000명 이상이 되는 규모의 독일연방경찰은 현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프랑스 또한 유럽연합이 독일의 [유럽] 방어에 참여하는 데에 유일한 방안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먼저 경제적 기반이 확실하게 마련되어야만 그가 바라는 대로 정치적, 군사적 연합이 이른 시일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야 비로소 독일이 장차 창설될 유럽군에 적절한 [규모의]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과거 히틀러 시대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장교들과 사병들이 현재 제기하고 있는 불만을 그는 이해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도 노동이 가능한 이들에게 충분한 연금을 지급하면 해결될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일단은 장관들 가운데 누구와도 이 매우 기밀에 속하는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프랑스 측과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남한에 대한 공산국가의 침공이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안보 상황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주었기에, 아데나워는 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서방 연합국이 이 문제에 관하여 어느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고위위원회의 모든 위원에게 독일이 [유럽] 방어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이는 이 실험적 대화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론을 설득하는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하지 못했다. 또한 [독일이] 어떤 형태로 이에 기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이는 독일이 은밀하게 재무장을 추진하는 경우나 국제군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독일군을 창설하는 경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에 분명히 시간이 촉박해지고 있었다. 비공개 단계에 이 일에 곧 바로 돌입해야 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독일이 강력한 군대의 조직을 완료하여 [소련에 맞서] 위협적인 효과를 발휘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여론과 관련해서 북한의 남침이 완전히 다른 상황이 초래되었다. 공산주의자 측은 군사적 무장을 추구하는 서방의 정치가들과 사령관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련된 계획의 수립에서 9월이 될 때까지 매우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곧 몇 달 안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조치를 취해야 할지, 아니면 불길한 1952년, 나아가 1953년이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해는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가장 확실한 때라고 말하였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침공이 공산주의자들의 포괄적인 ‘일반 계획’의 일부일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7월에 영국은 [동독] 인민경찰의 베를린과 서독에 대한 공격이라는 ‘현실적 위협’, 그리고 서독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형성한 ‘제5열’의 위협에 대하여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 프랑소와-퐁세는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아데나워에게 전달한 대로 이 상황에 대하여 매우 깊은 우려를 나타냈고 7월이나 8월 또는 9월에 있을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미국이라는 대국이 이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는 동안, 스탈린은 미국이 재무장하여 힘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전에 신속하게 공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국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연합국을] 지원하는 독일군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에게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번 경고를 하였다. 독일이 재무장하게 되면 소련이 침공을 더 서두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 막 파리에서 돌아온 블랑켄호른은 당시 프랑스에 절망감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아데나워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장교 집단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다. 미국에서 무기 수송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불안정하였다. 사람들은 알제리에서 폭동이 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아데나워는 최측근인 인물의 이러한 비관적인 설명에서 폰 슈베린이 전망한 것보다 더 심각한 공포를 느꼈다.    

  

독일의 시각에서는 프랑스 측의 경각심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측 위원은 이 시기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아데나워에게도 상황을 돌이킬 수 없도록 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사실을 결국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독일의 [유럽] 방어 협력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실현해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아데나워가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상황이 진척되는 것을 일단 지연시켜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어찌 되었든 프랑소와-퐁세는 소련과 동유럽이 서유럽을 침공하게 되면 독일연방정부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16일 일요일 빙엔에서 코블렌츠로 가는 배 안에서 프랑소와-퐁세는 블랑켄호른에게 독일연방정부가 고위위원회의 의견을 따를 것을 권유하였다. 블랑켄호른이 해결책을 묻자 고위위원회 프랑스 측 위원인 프랑소와 퐁세는 캐나다로 정부를 옮기는 방안을 언급하였다. 블랑켄호른은 이에 반발하였다. 독일연방정부가 캐나다로 옮겨가게 되면 [유럽대륙에서 진행되는] 사태와 완전히 단절되고 말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파국적인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게 된다면 일단 독일 서남부로 후퇴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소련이 [유럽을] 더 깊숙이 침공하게 되면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로 후퇴하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결코 본을 떠나지 않고 소련군을 자기 사무실에서 맞이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조금 후에 슈파이델 장군이 프랑소와-퐁세를 만났다. 파리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독일 난민을 반아들일 수 없게 될 노릇이었다. 고위위원회의 프랑스 위원은 9월 쯤에 베를린이 동유럽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으로 보았다. 8월 중순에 이미 그는 동독의 인민경찰이 [서독을] 침공하게 될 것을 ‘거의 확신’하였다.     


긴장이 고조된 이 시기에 아데나워와 그의 부하들은 특별히 고위위원회 미국 측 대리위원인 헤이즈 장군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헤이즈 장군의 사저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비밀을 보장하기 위하여 독일 측 인사들은 부엌문을 통하여 들어와야 했다. 헤이즈 장군은 상황을 심각하게 여겼지만, 어찌 되었든 당분간은 큰일이 없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의 침공 징후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며 심각한 상황은 1년이나 1년 반 이후에나 전개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때가 되면 소비에트연방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모든 준비는 이 기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니 이제 여기에서 유리한 심리적 상황을 활용해야 했다. 영국 측의 시각도 이와 유사하였다.     


분명히 헤이즈와 커크패트릭은 모든 경우에 대비한 신속한 대처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과연 소련이 침공할 경우 독일이 연합군과 함께 싸울 준비가 되어 있겠는가? 1950년 7월 10일 아데나워의 위임을 받아 이 문제를 논의했던 블랑켄호른과 폰 슈베린은 회의적이었다. 그 당시에 여전히 미국의 위임을 받아 일하고 있던 겔렌 장군 또한 이 대화에 참석하였다. 독일 여론에서는 독일군이 무기력한 희생자가 된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영국과 미국 측 상대방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침공할 경우 독일연방정부가 서방연합군과 함께 [유럽] 방어 요청받고 충분한 무기를 확보하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보였다.    

 

이 대화에서 드러난 대로 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정치적 어려움은 여전히 큰 것이었다. 독일의 참전에 대하여 프랑스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헤이즈 장군의 생각으로는 세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첫째로 소련이 침공하게 되면 즉시 독일의 자원입대 부대를 창설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 군대는 미군에 속하게 될 것이었다. 둘째로 [독일의] 지원부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문제로 아직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셋째로 주정부 단위로 경찰예비군을 두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이들을 연방정부 차원에서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하는 것이다.


이제 아데나워는 야당 대표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헤이즈 장군과 대화를 나눈 다음 날에 쿠르트 슈마허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데나워는 자기가 속한 연정 정부의 정치가들보다 더 솔직한 대화를 슈마허와 나누었다. 여기에서 전체적인 상황판단에 관하여 중요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또한 이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서도 논란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은 미군의 증강을 가장 긴급한 조치로 여겼다. 다만 경찰 병력의 숫자를 10만 명으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자기 우려를 적절한 방식을 통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앞으로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기로 합의하였다.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주제인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문제를 사민당(SPD)의 동의로 다루는 것이 이제 가능하다는 말이었나?     


그 사이에 폰 슈베린은 추가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7월 초에 ‘국가적 위기 상황’에 관련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 건의서에는 ‘거의 군사적인’ 긴급조치와 더불어 ‘장기조치’로 12개의 독일 기동 기갑사단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7월 중순에 독일 내부와 연합국 자체의 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되어 폰 슈베린 백작의 세밀한 건의서의 초안이 마련되어 독일연방 수상실의 인사들과 고위위원회의 대표들 사이에서 세부 사항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일을 어느 정도 진척시킨 다음에 일단 7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스위스의] 뷔르겐슈톡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고자 하였다. 그런데 휴가를 떠나기 전에 그는 커크패트릭에게 당시 상황에 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활화산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커크페트릭은 고위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최고 책임자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데나워에게 다시 한번 맹세하듯이 말했다. ‘매우 신중하여야 합니다. 절대로 공개적인 입장표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중, 신중, 또 신중해야 합니다!’     


아데나워가 휴가를 떠나기 직전에 만난 맥클로이는 아데나워가 약간 허약해진 모습을 보았다. [사실 아데나워는] 정신적, 영적, 육체적으로 모두 쇠약해져 있었다. 독일군 창설의 전망은 적어도 프랑스가 확실한 군대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불투명하다는 말을 독일연방 수상 자신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동독의] 인민경찰이 서독을 침공하는 것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무엇인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심각한 경우에는 독일군도 [유럽 방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누구도 74세의 정치가가 스위스 피어발트슈테터세 호수 넘어 높은 곳에 있는 팰리스 호텔에서 몇 주 동안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1949년 여름에 쉴 틈이 조금도 없었다. 지난 1947년 여름에 자기 아내와 더불어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낸 이후에 그는 늘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스위스의] 뷔르겐슈토크에서도 이어졌다. 쉬망플랜에 대한 협상과 안보 상황은 그의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했고, 국내 정치 문제도 아데나워를 계속 괴롭혔다. 곧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 수립 문제가 그를 힘들게 하였다. 블랑켄호른이 본과 파리와 뷔르겐슈토크를 계속 오가면서 [정부] 계획을 추진하였다. 폰 슈베린은 [군대 창설] 준비에 계속 노력을 기울였다.    

 

노선은 비교적 분명하였다. 강력한 연방경찰을 신속하게 창립해야 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이 연방경찰은 루르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날 때도 투입될 것이었다. 또한 [연합군에 파견된 독일] 지원군도 미래의 독일군으로 재편되기 위하여 체제를 바꾸어야 했다. 프랑스에 주둔하는 ‘국제 용병’이라는 이상한 생각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군 차원에서 독일군을 창설하려는 의도는 일단 어쩔 수 없이 잠정 조치로 대치해야 했다. 7월 말 뷔르겐슈토크에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가 독일연방 기동경찰의 창설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주정부만이 병영생활을 하는 경찰을 최대 10,000명까지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최종 결정 사안일 필요는 없었다. 폰 슈베린의 계획은 여기에서 더 나아갔다.     


사실 한국전쟁은 미국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고위위원원회의 미국 측 위원과 워싱턴 내부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데나워는 다만 맥클로이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유럽] 방어에 독일[군대가] 대규모로 참여하는 것을 얼마나 열심히 주장하였는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7월 중순에 고위위원회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경고하였다. 곧 독일이 위기상황에서 스스로 방위할 방안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면 서방이 독일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더구나 이를 돌이킬 희망이 전혀 없이 말이다. 맥클로이의 참모들이나 워싱턴이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아데나워의 압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파악하기 힘들다. 이 시기에 슈마허 또한 맥클로이에게 독일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맥클로이는 본의 가장 강력한 정치가가 독일의 재무장 문제에 관하여 매파에, 곧 강경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맥클로이 자신도 어찌 되었든 이 시기에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를 강력히 지지하던 인물이었다.    

  

처음에 아데나워는 7월 초부터 9월 초에 이르는 동안 워싱턴에서 즉각적이며 공개적으로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신속하게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국방부는 한 가지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곧 미군이 서유럽에 주둔하면서 미국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강력한 독일군이 참여하는 통합적인 방어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대륙에 4~6개의 미군 사단을 파병하면서 2~4개의 독일 보병 사단을 즉각 창설할 것이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총 10~15개 사단의 병력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일 공군과 독일 총사령부, 그리고 일정 수준의 독일 군수 산업의 확립은 반대하였다!      


몇 차례 논쟁이 있은 다음에 미국 국무성은 국방부의 계획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다. 다만 ‘유럽방위군’(EDF)으로 최대한 통합을 이루고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총사령관이 이를 지휘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유럽방위군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틀 안에서 움직이면서 유럽 대륙에 주둔하는 모든 군대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유럽방위군에서 탈퇴하는 것은 모든 회원국의 동의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워싱턴 D.C.의] 포기 바텀 지역에 있는 미국 국무성의 관리들은 이와 같은 조치가, 독일이 유럽방위군에서 탈퇴하는 일을 방지하는 데에 충분할 것으로 여겼다.      


9월 초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단일 패키지 계획’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연합국, 특히 프랑스는 뉴욕에서 9월 12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되는 회담에서 ‘제안을 수용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의 재무장을 즉각 수용하지 않는다면 미군 사단이 유럽에 주둔하지 않을 것이고 최신 무기도 공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연방경찰과 다른 모든 지원군에 관한 주장은 이러한 커다란 계획 앞에서 이미 시시한 구상이 되어버렸다.     


런던에서도 발상의 전환이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주장이 [영국 외무장관] 베빈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영국 외무부는 영국 총사령부와 마찬가지로 제3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베빈은 뉴욕회담에서 여전히 독일 연방기동경찰대의 구상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 기동경찰대가 [동독의] 인민경찰에 맞서는 조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부대가 일종의 군사적인 방어 임무에도 활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빈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는 영국 측의 명확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런던에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던 폰 슈베린 백작과 아데나워의 지지를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영국 총사령부도 이 도발적인 독일 연방기동경찰 병력의 숫자에 동의하였다. 10만 명의 연방경찰에 더하여 영국 총사령부는 독일 측에 20개의 전투사단과 10개의 예비사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이와 더불어 지상 공격을 위한 1,100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전략공군과 공중 방어를 위한 전투기 1,000대, 그리고 당연히 해안방어를 위한 해군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당분간 독일연방경찰의 창설에만 집중하고자 한 영국의 구상이 거의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뉴욕회담에서 드러났다. 베빈은 격렬한 논쟁을 벌인 다음에 결국 미국의 노선에 가담하였다.     


처음에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이 추진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였다. 연방경찰의 창설도 반대하고 지원군의 확충에도 반대하였다. 그리고 유럽통합군에 독일 사단이 참여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로베르 쉬망은 근본적으로 빈손으로 뉴욕회담에 참석하였다.     


오늘날 확보된 자료에 따르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였다. 곧 상황의 매우 신속한 전개는 아데나워의 뜻과 무관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 측이 아데나워에게 해결책을 촉구하지도 않았다. 워싱턴과 런던의 의견 수렴 과정의 진행과는 별개로 그는 자기 결론에 도달하고 이를 스스로 고위위원회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진행되는 상황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 정도는 그에게도 도달되었다. 아데나워와 그의 참모들은 연합국 측의 다양한 대표들이 독일에 관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고, 각자 나름대로의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대표들이 의도하지 않게 독일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곧 영국은 폰 슈베린과 블랑켄호른의 뜻을 매우 잘 반영하고, 미국 측은 호이싱거와 겔렌의 뜻을 존중하여 간접적으로는 슈파이델의 뜻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독일연방 수상은 8월 내내 그리고 9월에도 마찬가지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모든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서방 연합국 측이 어떤 생각에 일치를 보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의 안보 상황을 즉각 개선하고 이를 위하여 어떤 형태로든 독일 방위군을 조속히 창설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일단 그는 현실적 위험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사안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이에 집중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곧 동독의 민중경찰에 맞서는 서독 연방경찰군의 신속한 창설이었다.     


확실히 아데나워의 상황판단은 한국전쟁이 전개되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북한의 군대가 먼저 남한의 군대를, 그리고 이어서 미군을 한반도의 남부 지역인 부산까지 몰아내자 신속하게 창설된 동독의 인민경찰군에게 소련이 진군 명령을 내려 심지어 서방 연합국까지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더욱 심각해졌다.      

아직 브뤼켄슈토크에 머물고 있는 아데나워에게 진행 상황을 계속 보고하면서 그의 근심과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블랑켄호른은 8월 9일 프랑스 파리의 마티낙가 18번지에 있는 [프랑스] 경제개발위원회에서 장 모네를 만나 독일연방정부의 상황판단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소련 군대의 직접적인 공격이 있을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았지만 동독의 인민경찰이 침공을 하고 이에 편승하여 ‘독일 통일’을 구호삼아 [서독 내부의] ‘제5열’이 준동할 것으로 보였다. 동독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는 본의 정부가 조만간에 민중의 뜻에 따라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도 있었다. 그러면 아데나워와 페르드멩게스 그리고 에른스트 로이터는 ‘인민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심지어 독일 서부지역에서도 인민군 장교와 사병을 모집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군 2.5개 사단과 무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영국의 2개 사단 그리고 전투력이 의심스러운 보잘것없는 프랑스 사단들은 현대적 무기로 무장한 20~30만 명의 인민경찰  병력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공격으로 서독 국민이 공포에 빠지게 된다면 소련과 동유럽에 추가적인 도움이 될 것이었다. 독일연방정부는 미국과 영국이 10개 내지 12개 기갑 사단을 엘베강으로 파병하여 위력을 과시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요청에 대한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군사력의 보호가 있어야만 서유럽의 군비 강화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의 선제공격을 배제할 수 없게 될 일이었다. 블랑켄호른은 8월 9일의 이 회의에서 “우리는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비록 전초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연합국 측에서 정치적인 권한도 지닌 일원적인 지휘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매우 긴급한 일이었다.     


모네는 그러한 설명을 들으니 비로소 위험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는 즉시 그 당시 맥클로이와 함께 있던 플레뱅 수상을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 정부에 조속히 연합군의 군사력을 강화해 줄 것을 촉구하기로 합의하였다.     


아데나워가 뷔르겐슈토크에서 다시 본으로 돌아오자,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제안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여기에서 결국 저 유명한 8월 말에 작성된 ‘안보 건의서’가 나온 것이다. 그 제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유럽평의회자문회의에서 나온 안보결의안과 관련하여 8월 11일 처칠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한 연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스 슈파이델 장군, 아돌프 호이싱거 장군, 헤르만 푀르취 장군이 8월 7일 작성한 건의서이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8월 3일부터 개최된 유럽평의회자문회의에 서유럽의 내로라하는 의원 대표들이 모였다. 여기에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헤롤드 맥밀란, 휴즈 달톤, 프랑스의 로베르 쉬망, 폴 레노, 귀 몰레, 앙드레 필립, 벨기에의 폴-헨리 스파크가 포함되었다.     


처칠은 8월 11일 독일군도 포함된 유럽연합군의 즉각적인 창설을 요청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그러한 ‘유럽군’을 창설하면 독일군의 참여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관련된 결의안이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프랑스 측 의원도 모두 찬성표를 던졌고 독일 대표도 사민당(SPD)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하였다.     


슈트라스부르크 회의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를 정당화하고, 자신도 바라는 유럽[연합]군에 대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회의에 처음 참여한 기민당(CDU) 의원들이 유럽 각국의 중요한 의원들의 생각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독일 의원들도 처음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기에는 사민당(SPD)의 원내대표인 폰 브렌타노, 게르스텐마이어, 키싱거, 카를로 슈미트도 있었다.     


기민당(CDU) 중진 의원들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지 3일 만에 이미 맥클로이에게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에 관한 문의를 받았다. 그리고 최소한 게르스텐마이어는 블랑켄호른 덕분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독일 대표단 가운데 처음으로 독일어로 연설하였다. 그는 독일이 유럽 공동 방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신중한 긍정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내각뿐만 아니라 당 지도부에도 자기 의중을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외교 정치가들이 여기에서 서방의 다른 국가들이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구상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은 나중에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의 의견을 수렴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폰 브렌타노는 자기 생각을 이제 바꾸기 시작하였다. 수상이 이제껏 당내에서 설득 작업을 하는 데에서 놓치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제 슈트라스부르크 회담에서 더욱 세심하게 다루게 된 것이다.     


슈파이델 장군, 호이싱거 장군, 푀르취 장군은 포괄적인 제안서를 통하여 또 하나의 제안을 해왔다. 이 제안서 작성에는 기자인 클라우스 메네르트와 시카고 대학 교수인 아르놀트 베르크슈트레도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인 계획 수립에 무관한 집단이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스 슈파이델은 독일 여론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저서 《1944년 침공》으로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롬멜의 참모장이었던 그가 [히틀러 암살을 기도한] 7월 20일 거사에 참가하였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흠결이 없었다. 그리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 파리에서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고 그때부터 프랑스 군부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그는 프랑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서 즉각적인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 여름에 슈파이델 장군 이외에 그 누구도 프랑스 수도에서 더 신뢰받는 인물은 없었다. 아데나워는 1949년 1월부터 그를 알고 지냈다. 그리고 그의 건의서를 통하여 슈파이델 장군이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를 오로지 유럽 차원의 틀에서만 바람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슈파이델이 처음에는 비교적 프랑스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던 것에 비하면 호이싱거는 미국 측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총사령관 프란츠 할더의 직무대리로 일하면서 그는 미군의 ‘역사부’가 진행한 연구서인 《군사작전사》 작성에 참여하였고 1948년부터 겔렌의 조직에 참여하여 평가 업무를 이끌었다.     

슈파이델과 호이싱거,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장교들은 유럽-대서방의 틀 안에서의 독일 재무장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9/1950년 겨울부터 독일연방정부를 위한 자문기구 수립에 매진하였다. 정치계와의 접촉은 자민당(FDP) 계열의 연방정부 건설부 장관인 빌더무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빌더무트는 르아브르 방어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장기적으로 자신과 자기의 소속 당을 위하여 국방장관직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데나워와 가끔 군사문제에 관하여 [직접] 논의하던 유일한 장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 문제에 관한] 의견 수렴에 자기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뷔르겐슈토크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블랑켄호른과 폰 슈베린이 한패가 되고, 빌더무트와 그를 지지하는 장군들이 다른 한 패가 되어 주도권을 놓고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몇몇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었다. 아데나워가 안보 문제를 한사코 자신이 주도하고자 하면서 숙고를 계속하는 동안에, 군사적으로 지나치게 나대는 이들이 그 구상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는 빌더무트의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 아데나워는 빌더무트가 지나치게 군 위주로 생각한다고 여겼다. 아데나워는 안보에 관련된 복잡한 상황이 국내 정치와 외교에서 매우 다루기 힘든 것이기에, 장관 수준에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블랑켄호른을 통하여 빌더무트 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아데나워는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가는] 모든 발걸음마다 지뢰가 묻혀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사실 폰 슈베린은 영국의 총애를 받고 있고, 호이싱거와 겔렌은 미국에 호의적이고, 슈파이델은 프랑스와 친밀하다는 사실을 그가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다양한 군대 집단들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이 일을 반드시 민간인에게 위임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장군들을 잘 다룰 수 있는 인물을 선발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빌더무트는 일단 흔들림 없이 자기 주변의 장교들에게 안보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8월 14일 수상이 본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를 제출하였다.     

 

어찌 되었든 슈파이델은 이 건의서를 워싱턴에 있는 트루먼 스미스 대령에게 전달하고 스미스는 다시 이를 국방부와 백악관에 넘겼다.      


뒤에서 겔렌의 도움을 받은 ‘슈파이델-호이싱거 연구모임’이 1950년 8월 7일 완성한 건의서를 읽어보면, 이 모임이 완전히 미국의 추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이 독일연방정부 기구 안의 그 어떤 이들 보다 국방부의 노선을 더 잘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 포괄적인 건의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슈파이델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아직은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폰 슈베린의 연구모임이 즉각적인 조치에 집중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이 건의서에서는 처음으로 세분화된 장기적인 포괄적 개념이 제시되어 있었다. 군사전략적인 상황판단, 국내 정치와 외교적인 상황분석, 군사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추론이 여기에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에 이렇게 접근하는 방식은 아데나워가 선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데나워는 얼마나 위협적인 집단이 샤움부르크궁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는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바로 슈파이델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 자체가 그와 그의 동료가 필요한 인재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 장군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건의서를 작성한 이들은 안보 상황에 대한 [아데나워의] 비관적인 판단을 확증해 주고 있었다. 더 나아가 연방정부 수상 주변에서 강력하게 제기되던 의견도 확인해주었다. 곧 [독일군 창설] 계획을 1952년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에 소련과 동유럽의 침략이 있을 것이 가장 확실했었다.     


슈파이델과 그와 함께 한 이들은 [창군] 계획을 단호히 추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연방경찰로 군대를 창설하는 것이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로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특히 일종의 위장술로 말이다. 그러나 연합군을 위한 독일 지원군의 창설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이에 종사하는 이들의 사기 저하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군대를 창설하고 전략공군을 조직하는 직접적인 방법이야말로 목표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길이다.” 그런데 1952년이라는 불길한 해를 내다본다면 속도를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건의서를 작성한 이들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자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곧 “독일군의 재건은 오로지 유럽-대서양 방어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독일군이 소대 단위까지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자체적인 전략공군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1950년 여름이라는 시기를 고려할 때 이는 매우 놀라운 식견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단순한 보조를 위한 체계가 아니고, 로버트슨 장군이 뢴도르프에서 아데나워와 처음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주장한 ‘단계별’ 창설도 아니며, 폰 슈베린이 원칙적으로 ‘장기계획’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 규모는 현대적 [무장을 갖춘] 15개 정도의 사단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950년에는 이에 동원될 수 있는 양성된 ‘인적자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의 창설은 속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1952년에 필요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제안서의 저자들이 여기에서 6월 초부터 [갑자기] 전개된 위기 상황에 대한 고려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독일 방어 협력에 대한 정치적 전제 조건들을 문서의 맨 앞에 제시한 것은 당연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아직 평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아직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유럽 공동체와 대서양 조약에 여전히 묶여 있다.” 서독이 서유럽 공동체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은 “서방 세계가 아직은 서독을 동등한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과 대조된다. 여러 차례 요구한 안전보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 지역의 연합국] 점령군은 그 세력과 장비를 볼 때 우리의 안보를 보장할 수준이 아니다.”   

   

이는 사실 아데나워가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점들이고 또한 다양한 형태로 논의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이제 다시 한번 서둘러 마련한 비상계획을 새롭게 논의할 때가 온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대로 이 제안서에 담긴 몇몇 정치적 기본 의견은 아데나워가 작성하여 8월 말에 서방연합군에 전달한 건의서에 담기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데나워가 동독 인민경찰의 공격에 맞선 방어를 위하여 내세우는 주요 논점은 두 가지 구체적인 조치로 요약된다. 곧 연합국의 군사력을 가시적으로 강화하고, 독일연방결찰을 창설하는 것이다.     

안보에 관한 건의서를 작성하는 데 중요한 과정은 8월 17일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길게 나눈 대화였다. 아데나워는 연방경찰 문제가 이제는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확신에서 이 건의서 작성에 들어간 것이다. 슈파이델의 건의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독일연방공화국의 형편없는 안보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를 길게 하였다. 탁월한 민간인 전략가로서 아데나워는 그가 알고 있는 동유럽과 소련의 군사력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그의 상황판단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때까지는 공격을 자제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전쟁 당사자 양측이 각자의 몰락을 두려워하여 최악의 무기를[곧 핵무기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소련의 압도적인 지상군과 공군이 총동원될 것이다. 아데나워는 스탈린이 가까운 장래에 정치적으로 동독 정부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고, 한국의 상황을 모범 삼아 인민경찰을 서독의 ‘해방’을 위하여 출동시키게 할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동독 인민경찰의 [전력] 증강과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1952년에 그 문제가 정점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에 두 가지 요점을 강조하였다. 첫째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민은 심리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는 전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서방 열강은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러시아가 경계하게 될 뿐 아니라 독일인들에게도 용기를 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자신을 포함한 독일인들이 느낀 것을 회고하면서 [연합군의] 대규모 공군기 편대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상공을 선회하도록 해야 한다고 매우 진지하게 주장하였다. 연합군 공군기의 엔진 소리가 독일 국민에게 [연합군의] 방어 준비 태세를 가장 잘 알려 주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대담을 통해 아데나워는 자기 구상을 더욱 밀고 나가야 할 때가 마침내 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대담 직후에 아데나워는 쿠르트 슈마허에게 [현재] 상황에 대하여 알려주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얼마 전에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15만 명의 독일연방경찰의 창설 문제를 야당과 협의하여 진행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다양한 대화를 통하여 슈마허의 판단에 매우 깊은 존경심을 지니게 되었다.    

 

사민당(SPD)의 동의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맥클로이는 이를 이미 예상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사민당(SPD)이 반대해도 자원입대자들을 소집할 것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것이다. 자기를 이어 독일연방정부 수상이 된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이 기회에 야당에 많은 정보를 흘리되 그에 대한 정치적 대가는 치르지 않으면서 설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술책은 그때나 그 이후에나 늘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일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의 공식적인 시작을 위한 논의를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가 《뉴욕 타임즈》의 잭 레이먼드 기자와 한 회견은 본의 정치계와 외국에서 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8월 16일 오후 5시 30분에 진행한 이 회견에 블랑켄호른을 참석시켰다. 블랑켄호른은 17일 오전에 이 회견 내용을 수정하였다. 이날 오전에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의 지시에 따라 안보 관련 건의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가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비밀리에 진행한 대담에서 말한 많은 내용이 이제 《뉴욕타임즈》에 보도되었다. 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동독의 병영생활을 하는 인민경찰이 서독을 침략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다. 북한이 자행한 것과 같은 침략을 막기 위한 강력한 독일 ‘방위군’의 창설을 요청한다.‘ 이는 그가 뉴욕에서 외무장관에게 요청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향후 3개월 안에 2~3개 사단을 유럽에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소비에트연방의 공격 능력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만큼, 과연 소련이 미국과 맞먹는 수준으로 핵무장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적인 반응도 있었다.    

 

독일 여론의 반응은 매우 요란했고 많은 이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쿠르트 슈마허가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슈마허가 2시간 30분에 걸쳐 수상과 나눈 대화는 격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야당 지도자가 아데나워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방식을 보고 추측해보면 슈마허가 [독일군 창설에 관하여] 일단 정부의 구상보다 한 걸음 더 나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슈마허는 한국과 비교하는 것을 잘못 비판하였다. 결국 동독의 인민경찰은 서방의 가장 강력한 세 나라의 군사력에 맞서게 될 일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동독 인민경찰은 독자적인 공격보다는 소련의 붉은군대와 함께 쳐들어오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붉은군대는 아데나워가 생각하는 ‘인민경찰에 맞서는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면 방어 개념은 포기해야 했다.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붉은군대의 공격이 걱정된다면 서방 열강은 서독 지역에 강력한 군사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민주주의 진영의 군사력은 ‘방위를 공격적으로 수행할 만큼’ 강력해야 했다. 아데나워는 “서독이 유럽 전장(戰場)의 최전선이 되는 것을 막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독 지역과 베를린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역사에서 동독 지역의 수복에 대하여 이보다 더 강한 주장이 제기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야당 지도자로부터 심리적, 외교적 차원에서 매우 커다란 기술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독일군은 서방 열강으로부터 결정적인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마지막 패’로 사용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잭 레이먼드와의 기자회견에서 [아데나워가] 이러한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독일의 입장이 취약해지고 말았다고 슈마허는 주장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자기 입장을 어느 정도 무마하며 ‘내적 안보’와 ‘외적 안보’를 구분하고자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동독의 인민경찰의 위협도 거론하였다. 그러면서 외적 안보는 서방 열강이 보장하여야 하는 것이고, 자신은 기자회견에서 내적 안보를 이야기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내각의 장관들과 여당도 놀랐다. 이상하게도 아데나워는 8월 22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여당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폰 슈베린이 작성한 제안서에 들어 있는 [독일이 당면한] 위협에 대한 분석을 이야기하면서 독일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안보 관련 건의서 초안을 낭독하도록 하였다. 참석자 모두는 이 건의서에 찬동하였다. 이제 독일연방 수상은 국무회의에서 여당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폰 브렌타노는 사실 [이 일의] 완만한 진행을 바랐다. 그러나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 수상에게 아무런 어려움도 끼치지 않았다. 비록 수상이 위급한 경우에 경찰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이른바 유럽군의 차원에서 독일군을 운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도 폰 브렌타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 위협적이지 않게 들리는 ‘보호경찰대’라는 개념으로 일을 추진하려던 아데나워의 전략에 다시 한번 차질을 가져왔다. 이 당대표는 아무 생각 없이 기자들 앞에서 이 경찰군이 경찰의 임무가 아니라 군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럼에도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와 노선을 함께하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군대 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던 자민당(FDP)과 독일당(DP)도 이에 합류하였다.     

이 민감한 문제를 8월 23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미리 논의하지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는 쉬망플랜이 논의되었다. 어찌 되었든 8월 24일 아데나워에게는 화가 난 맥클로이를 진정시킬 기회가 있었다. 맥클로이는 이미 8월 22일 블랑켄호른과 전화 통화에서 아데나워가 잭 레이몬드와 한 기자회견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독일연방 수상이 《뉴욕 타임즈》 기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다음에 누가 그와 비밀협상을 추진하려고 하겠느냐는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아데나워나 블랑켄호른은 맥클로이가 실망한 근본적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실 맥클로이는 워싱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커다란 의견 수렴 과정이 이미 독일의 정규군 창설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데나워는 서방 연합국이 이미 결론을 내린 대로 영국이 선호하는 독일의 재무장 모델에 찬성한 것뿐이었다. 아데나워는 이틀 후에 빌더무트 장관과 대화를 나눌 때도 같은 생각을 전했다. 빌더무트는 아데나워에게 ‘경찰대 창설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 영국과 호흡을 맞추는 유일한 길이하고 하였다.     


8월 24일 맥클로이와 나눈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미국이 독일연방경찰의 창설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매우 의기소침해하며 회담장을 떠났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맥클로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개인적으로 ‘경찰대 창설 방안’에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아데나워는 맥클로이가 워싱턴의 관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망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의 관료들은 독일이 유럽 방어에 완전히 참여하는 방안을 극비리에 논의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각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내무장관인 하이네만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리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연방경찰 창설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다. 그런데 내무부를 쉽게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아데나워는 이와 관련된 계획서를 이미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마련하도록 하였고 최소한 내무부의 실무진과 연방정부 수상실의 기획자들이 연계를 맺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히 [내무부 장관인] 하이네만이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조직 차원에서 연방경찰을 내무부에서 분리해내려는 모든 시도는 ‘경찰대 창설 방안’이 결국 무엇보다도 군사적 문제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게 될 뿐이었다.     

8월 25일 오전의 국무회의에서는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세부적인 내용이 알려졌다. 기본적으로 이는 어느 정도 축약된 3개의 보고서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의견서, 하이네만의 초안, 그때까지 국무회의에서 작성된 블랑켄호른의 기록이 있었다. 이 기록에는 아데나워, 하이네만, 카이저가 10월 10일 국무회의에서 각자의 시각을 제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서 무엇이 다루어진 것인가라는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한편으로 하이네만은 장관직에서 물러나기 전이나 이후에도 자신이 연방정부 수상과 갈등을 벌이는 이유가 제도적 측면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내각에서 관련 조치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하이네만은 안보 관련 제안서를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발송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와 내각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데나워는 8월 25일 오전에 이 문제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긴 보고를 하였다. 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맥클로이도 ‘경찰대 창설 방안’에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미루어볼 때 아데나워는 장관들에게 그때까지 고위위원회에 아무런 구체적인 제안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9월 5일까지 그러한 제안을 전달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날 베빈이 뉴욕을 향해 떠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느긋한 시대였다. 정부 수반과 장관이 아늑한 대서양 횡단 증기 여객선을 타고 뉴욕을 향해 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행기 외교’의 시대가 코앞에 닥친 때이기도 하다. 아데나워가 나중에 변명으로 내세운 대로 그 당시 정말로 일이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몰랐을까? 나중에 하이네만이 주장한 대로 최종 결론이 상호합의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블랑켄호른이 얼마 전에 맥클로이와 통화하며 작성한 기록에 보면, 국무회의 직전에 이루어진 전화 대화에서 맥클로이는 “안보에 관한 건의서를 최대한 신속하게 완성하여 며칠 후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정확한 날짜는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국무회의에서 8월 30일 수요일이 되어서야 맥클로이가 조속히 출발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8월 29일에도 두 개의 건의서가 작성 과정에 있었다. 블랑켄호른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9월 30일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고위위원회로 전달되었다.     


아데나워는 점령군 규정의 개정 문제를 이 건의서와 연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아데나워는 이 점에 관하여 여러 의견을 수렴한 것이 분명하다. 슈파이델 장군의 제안서와 슈마허의 제안서, 그리고 이제 부수상인 블뤼허의 제안서도 받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제2차 건의서의 작성은 게오르그 포겔의 초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블뤼허의 외교자문으로 일하던 인물로 블랑켄호른의 소개로 자문단에 합류하였다. 모든 면에서 볼 때 안보 관련 건의서와 ‘점령군과의 관계 개선의 문제에 관한 건의서’는 이 무렵에 연계된 것이다. 이 두 개의 복잡한 사안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나중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아데나워가 6월부터 8월까지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안보 위협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아데나워가 최선을 다하여 창설하고자 했던 ‘방위군’ 창설은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결정 과정을 분석해 보면, 아데나워가 근본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을 점령군 규정[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려고 [유럽] 방위에 독일이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제 아데나워는 점령군 규정의 개정에 대한 요청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연합군 측 고위 관리를 재촉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얼마 동안 생각을 한 후에 이 두 가지 사안을 연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2차 건의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연합국과 독일 사이의 전시 상황이 종결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점령군의 목적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독일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과 점령군의 관계는 협약 체계를 통하여 정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면 이는 다르게 나타났다. 안보 건의서와 [독일과 연합군의] 개정된 관계 규정을 동시에 제출하게 된다면, 많은 연합국 외교관은, 아데나워가 처음부터 독일군이라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패’를 활용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권 회복이라는 작전상의 궁극 목적을 추구했다는 인상을 받게 될 노릇이었던 거시다.     


197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지게 된 건의서의 내용에도, 아데나워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호소한 불안한 안보 상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특히 [동독의] 인민경찰에 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었다.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아데나워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경찰대 설립 방안’을 선호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이른바 ‘외적’ 안보와 ‘내적’ 안보라는 불분명한 구분을 시도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을, 여기에서는 직접 그 명칭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외부의] 붉은군대를 막는 것이 연합국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매우 심각한 어조로’ 점령군의 군사력 강화를 다시 한번 요청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즉각 [나중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주장을 내세웠다. “중무장한 충분한 숫자의 연합군만이 현재 서유럽에서 수행되고 있는 방위 조치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이어서 매우 중요한 말이 나온다. “독일연방정부 수상은, 서유럽 국제군의 창설될 경우 독일군도 이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천명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연방정부 수상은 [독일] 국가 자체적인 군대를 창건하여 독일의 재무장을 추진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 내각의 결의가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아데나워는 독일군이 [서유럽연합군에] 참여하겠다는 이러한 제안이 순전히 자기 생각이며, 이를 ‘다시 한번’ 제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나중에 여러 차례 이를 부인했음에도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각에서 논의된 것 가운데 이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제안한 연방경찰의 창설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연방정부가” 연방 차원에서 곧바로 “방위경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월25일 회의에 관한 보고가 맞는다면 아데나워는 그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제안을 논의하도록 한 것이었다. 8월 31일에야 그가 이에 관한 최종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그때까지 그 안건이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방위경찰’의 임무에 대해서는 안보 관련 건의서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독일 공산당에 맞설 때 발생할 모든 안보 위협은 ‘내적 안보’의 개념에 해당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내적 안보는 제5열의 활동만이 아니라 [동독의] 인민경찰과 자유독일청년단(FDJ)의 공격으로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동독의] 인민경찰이 “서독 영역을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공격을 시작하더라도” 연합국이 ‘그 어떤 이유로든’ 그들의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을 때는, 방위경찰이 이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위험이 ‘내적’ 차원의 위협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방위경찰의 개념은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8월 31일 개최된 고위위원회 위원들과의 연석회의에서 제기된 집요한 질문을 받은 아데나워는 결국 그 건의서에 일부 모순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서독의] 연방경찰이 현재 상황에서 [동독의] 인민경찰에 효과적으로 맞서 싸우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협상에서 아데나워는 조지 헤이즈에게 매우 지친 인상을 주었다.      


아마도 아데나워는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그 당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안서의 내용을 장관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10월 17일 국무회의에서 이를 분명히 고지하였다.    

 

8월 31일 국무회의가 다시 개최되었을 때 장관들은 아침 신문에서, 연방정부 수상이 그 전날에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자기 견해를 서면으로 제출하였다는 소식을 읽게 되었다. 이 회의에 관한 자료도 지금까지는 단지, 8월25일 개최된 내각 자문회의에서 언급된 자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재구성하기가 힘들다.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 문서의 내용에 대한 소식을 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였다. 맥클로이가 [곧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무장관 [하이네만은] 그 문서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데나워는 그 문서의 일부만 낭독하고 나서 2차 건의서에 관한 정보도 장관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하이네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장관들이] 그 문서를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이다. 연방정부 수상이 이에 동의하자 하이네만은 그 문서를 읽기 위하여 회의실을 떠나 연방정부 수상실로 갔다.     


하이네만이 회의실을 떠나있는 동안에 최종안이 마련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블랑켄호른은 그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각은 모두 연방정부 수상을 지지하며 연방방위경찰대의 창설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다만 프리츠 쉐퍼만이 ‘경찰대’이라는 표현이 헌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를 받아들여 며칠 후에 고위위원회의 미국 측 위원에게 그 경찰군에 ‘연방방위대’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건의서를 읽던 하이네만은, 연방정부 수상이 단도직입적으로 서유럽 연합군에 독일군을 파견할 의사가 있다고 한 구절에 대하여 바로 이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흥분하여 회의실로 돌아와서는 아데나워가 의도한 것이 안 될 일이라고 하며 비판하였다. 아데나워가 독일군을 파견할 것이라는 말을 내각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가 명확히 기억하는 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저는 내각에서 사퇴하는 바입니다.” 이 말이 진심이었나 아니면 단순한 협박이었을까?      


블랑켄호른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장면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하이네만 장관과의 충돌: 그는 연방정부 수상이 방향감각을 상실했다고 비난하며 자신이 [장관의] 직무에서 벗어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수상은 내무장관이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비판은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헌법 수호 문제든 경찰 문제든 아무런 가시적 성과를 [하이네만이]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내각에서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은 하이네만은 이제 동료 장관들에게, 자신이 안보 관련 건의서를 직접 읽어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아데나워가 독일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이네만이 물러난 이후인 10월 17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데나워는 야콥 카이저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장관들에게 건의서의 중요한 부분을 회람토록 하였다. 카이저가 조심스럽게 문서 전체의 사본을 볼 수 없는지를 문의하자 아데나워는 늘 하던 대로 냉정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 자신도 복사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원본은 단지 1부만 있고 그것은 블랑켄호른 씨가 관리하는 금고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아데나워와 하이네만은 이미 8월 말에, 무엇보다도 업무 절차가 문제가 된 이 논쟁에서, 사실 독일군의 파병 자체가 논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9월 내내 하이네만을 둘러싸고 위기가 고조되었다. 연방정부 수상과 내무장관은 마치 두 명의 유도 선수처럼 상대방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선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야콥 카이저도 여전히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원내대표 폰 브렌타노에 대해서도 완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당지도부는 8월 31일 국무회의 이후 아데나워로부터 이 건의서에 관하여 설명을 듣고 그를 지지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폰 브렌타노는 외교정책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고 그 대신에 기독교의 정신에서 내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데나워를 비판적으로 또는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그가 자기 안보 정책계획을 드러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계획은 단순히 두 개의 건의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국무회의와 원내대표에게 정보를 흘리자마자 아데나워는 7월 31일 페터스베르크에 주둔한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가서 다시 한번 강한 연방경찰대의 창설을 요청하고 이와 동시에 이 두 개의 건의서로 연합국과 독일의 관계에서 급격한 변화를 모색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는 그의 오래된 노선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 영토에 대한 침략은 즉각 전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연합국이 성명으로 발표해 줄 것을 다시 한번 요청하였다.      


8월 말과 9월 초에 아데나워는 또 다른 건의서들을 받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방위경찰대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6만 명의 병력을 2단계에 걸쳐 확보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또한 병력 증강은 상황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미국 정부에만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이전의 쿠르트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서유럽 방어에 독일연방공화국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서방 군대의 12개 기갑사단을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부 전선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서독의 군대가 현대적 장비로 무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서방이 [독일의] 안보 보장을 공식 문서로 확인해 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하였다. 폰 슈베린 공작은 헤이즈 장군에게, 유럽군에 파병될 독일군 사관생도의 양성을 위한 전단계로서 전방병사들의 ‘전우애’를 앙양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의서도 전달하였다. 그리고 고위워원회의 미국 측 위원인 찰스 타이어는 헤르베르트 블랑켄호른의 요구 사항의 내용을 진작부터 들어왔다. 블랑켄호른은 안보 관련 건의서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는 독일 사단을 6개월 안에 창설할 것입니다.”     


연방정부 수상실은 어느 모로든 필요한 경우에는 아데나워가 모든 가능한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고지하였다. 이제 이 문제는 뉴욕에 모인 외무장관들이 논의할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 외무장관들은 오랜 토론을 거친 후에도 아데나워에게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았다. 물론 아데나워는 그 회의에서 진행된 내용에 대하여 얼마 후에 정확히 알게 되기는 하였다. 분명히 연방정부 수상만이 자기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힌 것은 아니다. 강대국인 미국도 프랑스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정상회담 결과의 무게를, 1955년 5월 5일 서방과 맺은 협약들이 최종적으로 발효될 때까지 4년 반 동안이나 감내해야만 했다. 만약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이 프랑스의 강력한 저항에 굴복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서독 군대를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편입시키는 것을 관철하였다면 국제정치만이 아니라 독일 국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갔을지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영국 외무장관] 베빈과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다른 장관들도 독일군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련이 실질적으로 이에 맞서 선제타격으로 대응했을까? [이 문제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내부에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을 것이다. 프랑스 측의 반응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이 독일에 대한 [군사] 정책을 5년 먼저 실시했더라면 동유럽 블록의 강화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고 어쩌면 소련의 철수도 이끌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뉴욕에서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를 둘러싼 힘든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유럽 통일을 위한 운동을 너무 서둘러 안보 문제와 연계시키고 결국은 유럽군 창설의 좌절을 야기하였다.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군사적 참여를 반년 동안 저지한 것을 대단한 전략적 기지를 발휘한 일로 칭송하는 사람이라면, 뉴욕회담에 대하여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독일의 [유럽] 방위군 참여의 문제에서 별로 대단한 진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럽방위공동체(EDC)[Die Europäische Verteidigungsgemeinschaft, EVG, 영어 EDC, 역자주 -  1952년 5월 파리에서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서유럽 방위를 위하여 설립을 추진한 초국가적군사공동체]     


그 당시에 한국전쟁의 상황이 다시 한번 독일에 심리적 작용을 하였다. 9월 중순까지 유럽과 미국은 북한 인민군이 미국의 파병군대를 부산 앞바다로 밀어내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9월 12일 뉴욕에서 일련의 회의가 열렸다. 회담 초반에 미국 정부 측은 독일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대규모로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북한 침략군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정치가들과 장군들은 유럽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서두르지 않게 되었다.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에 관한 논란의 해결책을 일단 급하지 않은 협상회의의 안건으로 미루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강력히 요청한 강력한 연방경찰대의 창설은 거부되었다. 모든 일은 서방 연합국의 외교 관료주의의 지지부진한 절차대로 몇 달에 걸쳐 진행되었다. 유럽 방어를 위한 독일의 군사적 참여에 대한 터부가 깨지고, ‘장기 계획’이 이미 협상 단계에 들어섰으며, 각국 정부가 원래 계획했던 준비 단계를 건너뛰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각국 정부들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고 독일연방공화국과 프랑스에서는 국내적인 논쟁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커다란 진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속한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여러 회의와 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내 정치에 대한 영향은 바로 나타났다. 1950년 5월 9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1950년 11월부터는 매우 심각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1951년 가을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이 어려움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9월 중순부터 이미 아데나워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예감하고 매우 신중히 처신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뉴욕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헤이즈 장군은 9월 17일 아데나워에게 전화를 걸어 독일 정부가, 유럽군에 독일군을 파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문의하였다. 수상은 내각이 그 문제에 관하여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실 내각의 관심을 오로지 경찰대 창설을 통한 해결책에 집중시키고자 주의를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뉴욕에 모인 대표단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신중하게 대답하였다. 곧 연합국의 외무장관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독일 정부에 정식으로 문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래야만 독일의 관계 기관에서, 특히 독일연방의회에서 이 안건을 다루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아데나워는 모든 면에서 알리바이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이를 앞으로 독일연방의회의 정당대표들과 내각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구스타프 하이네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그 제안을 저는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첨언하였다. “조만간, 다시 말해서 몇 주 후나 아니면 곧 바로 독일 정부와 독일국가를 대상으로 공식적인 질의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 질문은 독일이 서방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독일의 인력과 자원을 국제연합군에 파병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국제연합군은 아마도 소비에트 군의 공격을 막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그러한 문의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재무장이 국내 정치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기민당(CDU)과 마찬가지로 사민당(SPD) 내부에서도 소문이 돌았다. 사민당(SPD)의 슈마허는 자신이 강력히 추진하는 노선을 관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전략적으로 아직 때가 이르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 사민당(SPD) 내부에서 늘 우파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 인물인 카를로 슈미트는 이제 전국에 다음과 같은 평화주의적인 견해를 전하였다. “건전한 집안의 건전한 사람들이 볼셰비즘에 물드는 것이 땅굴 속에서 불구로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슈마허 자신은 반대파들의 ‘나는 빼고!’를 내세우는 움직임이 어떤 기회를 주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아데나워] 수상의 계획에 맞섰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기에 조속히 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하였다. 1949년에 치른 독일연방의회 선거는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본 것이다.    

 

자민당(FDP)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마스 델러나 에버하르트 빌더무트와 같은 인물은 독일의 군대 파견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한 데 비하여, 민족적 양심을 근거로 이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당 지도부는 대다수가 아데나워를 지지하고 있었다.     


한스 뵈클러가 이끄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금까지 관련 자료가 밝혀진 적은 없지만, 뵈클러와 [이데나워] 수상이 협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계속 돌았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 독일군 파견에 대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 대가로 아데나워가 노조의 [기업 운영 문제에 대한] 공동결정 요구를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아데나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측의 정치 세력들은 독일의 재무장 문제에서 철저히 분열되었다. 이 문제로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분열의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먼저 자기 내각의 의견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당이 아직 [분열이라는] 세균에 감염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는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다는 불평을 털어 놓았다. 프란츠-요제프 뷔르멜링은 “하이네만의 경우를 당 지도부와 귀하[곧 아데나워]가 논의하는 방식”에 대하여 완곡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간결하게 답하였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이네만이 제기한 반대 의견은 여러 가지 차원의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생각은 이 무렵에 아직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매우 우려한 것은 독일이 재무장하면 소련이 선제공격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를 아데나워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슈파이델 장군과 헤이즈 장군에게 들은 정보로 안심하고 있었다. 곧 소련이 아직은 충분히 무장되어 있지 않았으며 특히 핵무기 분야에서는 매우 모자란다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이네만은 슈마허와 마찬가지로 연합군이 무엇보다도 독일연방공화국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것이 연합국의 근본적인 이익에도 맞갖은 일이라고 보았다. 자체방어 또한 독일의 근본적 이익에 해당한다는 반론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다른 반대 의견은 [독일의] 분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사실 하이네만이 독일의 유럽연맹 가입을 주저하는 것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교파 간의 문제도 부각되었다. 개신교회는 그 당시만 해도 동독과 서독을 이어주는 마지막 남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하이네만 자신이 독일개신교연합회(EKD) 전국위원회의 총감독이었기에 개신교 내부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그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이네만은 [아데나워] 수상이나 내각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동료 신자들의 의심이나, 종종 제기되는 비판에 더 동감하였다. 수상이나 내각은 군사적 자위권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마르틴 니묄러와 맺은 관계였다, 니묄러는 처음부터 아데나워를 비판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교적 동기와 가톨릭에 대한 반감도 여기에 같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니묄러는 아데나워와 연합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이전의 [제3제국 시절에 활동한] 군장교들이 참모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속으로 역정을 내면서 [진실을] 자기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그는 여러 가지로 이미 준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결국 모든 활동은 조만간 발발하게 될 제3차 세계대전에 대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니묄러가 ‘노골적인 국가 반란’을 기획한다고 한 아데나워의 비난은 현실에 매우 가까운 것이었다. 독일 정부와 미국이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다면,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하이네만 자신이 니묄러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결국 [아데니워와 하이네만]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아데나워는 그를 “이 나라의 적으로 여기며 그에게는 생존권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무장관의 상황판단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여기에는 개신교의 신앙고백적인 내용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게는 매우 낯설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1950년 9월 4일 하이네만과 나눈 대화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기를 두 차례에 걸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 번씩이나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그가 제시한] 이유들이 아데나워를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은 발송하지 않은 9월 23일 하이네만에게 쓴 편지의 초안에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귀하께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협 앞에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평화로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힘으로 평화를 수호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상대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면, 소비에트 러시아가 오판하게 되어 [결국 우리는] 평화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체주의적인 국가사회주의[곧 나치]를 경험하였기에 제 생각으로는,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해서 전체주의 국가가 결코 정복욕을 버리게 되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가 힘을 길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힘은 그 국가가 자기 생존의 위협을 감수해야만 정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련에 대한 아데나워 정책의 주요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나치의] 제3제국의 전체주의적인 확장정책에 대한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스탈린의 [소비에트] 정치국은 아돌프 히틀러와 똑같은 동기로 야망을 펼칠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인류는 1945년 5월이 되어서야 히틀러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스탈린이라는] 독재자를, 1935년부터 1938년까지 화해 시기에 서방 열강이 [히틀러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독재자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밖에 모른다. 그것은 바로 “권력의 언어!”이다.     


수상은 커다란 어려움 없이 내각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오직 야콥 카이저만이 자기 불만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장관이 가끔 제기하는 요청이 별무소득으로 끝난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는 아데나워가 ‘최우선으로 여기는’ 이 문제에서 선택지는 ‘반역이냐 아니면 찬성이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찬성하는 것은 대부분 관료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슈토르흐 장관은 10월 17일에 열린 최종 회의에서 하이네만이 “내각의 이물질”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델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이네만 선생의 태도는 오로지 싸우자고 덤비는 것으로 니묄러의 악의에 찬 태도와 일맥상통하였다. 그것은 바로 개신교회를 가톨릭 신자인 수상과 대립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와 하이네만]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어른답게 헤어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온전히 어른답게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이 문제의 종지부를 찍은 10월 9일 자 서한에서 아데나워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곧 하이네만과 결별하는 방식을 파면으로 할지 아니면 그가 연방정부 대통령에게 제출한 사표를 근거로 사임시킬지를 정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두 줄짜리 감사 인사는 잊지 않았다. 같은 날 아데나워는 하이네만에게 또 다른 편지도 보냈다. 그 편지에는 좀 더 단호한 어조가 담겨 있었다. 하이네만은 자신과 아데나워의 대담에 관하여 언론 보도문을 발표하였다. 아데나워는 최고위직 시장의 스타일로 그를 꾸짖었다. “저는 귀하가 아직 직무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귀하에게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하가 직무상의 비밀을 엄수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더 이상의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당이 그에게 억지로 추천했던 미운털이 박힌 장관을 떠나보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서로가 못된 인간이라는 확신도 지니고 있었다. 하이네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데나워] 수상을 독재적이고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며 계급을 따지는 인간으로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아데나워] 수상이 재무장에 관련된 도덕적 문제에 대한 감이 없어서 독일연방공화국을 쉽사리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끌 수 있는, 자기 단독 결정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로 묘사하였다. 슈바벤 지역의 한 경건주의자는, 게르스텐마이어에 맞서서 하이네만의 추종자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였다. 하이네만은 “평화의 인물이며, 망나니 같은 아데나워나 당신과는 달리 정치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하는 인물입니다.”     


이 얌전한 슈바벤 사람이 사용한 “망나니 같은 아데나워”라는 강력한 표현은 깊은 도덕적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이는 자기 도덕적 우월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때부터 평화주의자 무리가 아데나워에 맞서며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독일 재무장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아데나워라는 인물을 비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이 보는 아데나워의 모습은 이제 더욱 어둡게 채색되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단순히 분리주의자로 비난했다. 그에 수반되는 독일 정책에 관련된 모든 의심을 더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 완고한 반평화주의자이며 무시무시한 권력정치를 추구하는 이라는 비난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지속되는 침체     


아데나워 정부는 처음부터 특별한 인기가 없었다. 1950년 초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겨우 28%만이, 곧 3분의 1도 안 되는 이들이 “아데나워의 정책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하였다. 26%는 “불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대다수인 46%는 잘 모르거나 판단을 유보한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다시 말에서 국민들이 아데나워가 하는 일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은 확실히 아데나워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연방정부 수상의 인기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쉬망플랜이 발표되자 잠시 31%의 지지도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정부에 대한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에서 [독일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실시된,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연구소>의 설문조사에서 모든 응답자 가운데 정확히 4분의 1은 하나의 당이 통치하는 정부가 국가에 가장 좋다는 답을 하였다. 나치의 지배를 경험한 지 겨우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응답가 가운데 22%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고, 약 절반 정도만이 헌법에 입각한 다당제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부 제도라고 답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응답자의 10% 정도가 모든 독일 정치가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위하여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원치 않은 지지를 받던 아데나워 정부는 독일의 재무장에 관한 논란이 일면서 더욱 인기가 떨어졌다.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1950~1951년에 23%와 24%를 오갔다. 정부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응답자의 숫자는 1950년 11월의 36%에서 1951년 4월의 39%로 증가하였다. 정부에 무관심한 응답자의 숫자는 40%대에 머물렀다. 1951년 4월 20일 아데나워는 파리에서 쉬망플랜에 서명하고 나서 자랑스럽게 돌아왔다. 아데나워는 오토 렌츠에게 국민이 이를 성공으로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렌츠는 아데나워에게 비교적 소수의 유권자만이 그의 편에 서있다고 말하였다. 그 이전의 여론조사 이후 그의 지지도는 20%로 추락하였다.     


선거에서도 비슷한 우울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운이 좋았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방선거가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득표율은 변화가 없었지만, 과거 6%에 머물던 자민당(FDP)이 12%의 지지율을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에 독일공산당(KPD)의 득표율은 14.5%에서 5.5%로 추락하였다. 1950년 6월부터 8월까지, 분명히 다른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는 뒤셀도르프에 있는 칼 아르놀트 주지사를 자리에서 몰아내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여 근심이 커졌지만, 어찌 되었든 기민당(CDU)과 중앙당(Zentrum)의 연정이 이루어져, 연방정부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지지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본의 정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연정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추락이 시작되었다.     


커다란 소란 끝에 하이네만을 연방정부에서 몰아낸 직후인 1950년 10월에 헤센과 뷔르템베르크-바덴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는 바이에른에서 선거가 있었다. 이 세 선거에서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헤센에서 기민당(CDU)은 1946년 선거에 비하여 12%p를 잃으면서 득표율이 20% 이하로 추락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패배를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좌파 성향의 주(州)를 좋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민당(SPD) 단독 정부라는 기존의 상황에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 헤센 기민당(CDU)의 브렌타노는 아데나워로부터 즉각 선거 결과가 나쁜 이유가 ‘대부분’ 국내 정치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였다. 구석에 몰린다 싶으면 강력한 공격에 나서 숨통을 틔운 것이다!     


뷔르템베르크-바덴의 선거 결과는 훨씬 나빴다. 또한 노르드-바덴과 노르드뷔르템베르크의 선거 결과도 나빴다. 여기에서 기민당(CDU)의 득표율은 38.4%에서 26.3%로 줄어들었다. 바이에른의 선거 결과는 최악이었다. 기사당(CSU)의 득표율은 52.3%에서 27.4%로 추락하였다. 이때부터 쿠르트 슈마허가 독일연방의회의 총선을 요구한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 요구가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 진영이 모두 패배한 것만이 아니었다. 특히 기민당(CDU)이, 곧 아데나워 자신이 심각한 패배를 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가 상당 부분 독일 전체의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말이다. 이에 비하여, 부분적으로는 좀 더 민족-자유주의적이고 부분적으로는 독일·민족주의적인 자민당(FDP)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자민당(FDP)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지지율을 2배나 끌어 올렸다. 그러나 바이에른에서는 약간 상승하는 데 그쳤다. 뷔르템베르크-바덴에서도 비슷한 성장세를 보였다. 여기에서 약 20% 정도로 최고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확실히 이는 선거에서 절정에 이른 전국적인 “나는 빼고!”의 분위기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패에는 물론 지역적인 원인도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과거 독일제국 영토 거주 독일인이었던] ‘추방민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이에른에서는 기사당(CSU)과 바이에른당(BP) 사이의 일종의 형제 싸움으로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바이에른당(BP)은 17.9%의 득표율을 올렸다. 전국적으로 추방민당*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당은 바이에른에서 12.3%, 뷔르템베르크-바덴에서 14.7%,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무려 23.4%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 지역에 추방민들이 가장 많이 몰렸고 실업률도 극에 달했던 것이다!     


* 추방민당[Block/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 GB/BHE, 역자주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전 독일 통치 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정당]     


아데나워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사민당(SPD)에 유리한 결정적 변화는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민당(SPD)은 상당히 침체 되었다. 오직 베를린 의회 선거에서만 아데나워가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가을 선거에서 계속 참패당한 다음에 얻은 성과였다. 상황이 이제 급변하였다. 사민당(SPD)의 지지율이 20%나 줄어들었고 이는 고스란히 기민당(CDU)과 자민당(FDP)의 몫으로 돌아갔다.      


정부 구성에서 선거 참패의 결과는 뼈아픈 일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라인홀드 마이어가 독일인민당(DVP)/자민당(FDP)과 사민당(SPD)의 연정을 구성하였다. 곧 선거전을 치르던 때와는 달리 기민당(CDU)을 제외한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연정 모델은 아데나워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자유주의자들과 사민당(SPD)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가톨릭식 학교 정책에 맞서는 전선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와 라인홀드 마이어 사이에는 처음부터 불신이 맴돌았다. 이 두 사람은 서독의 수도인 본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 처음 충돌하였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그 당시 헤센 주지사 직무대리였던 힐퍼르트와 연대하였다. 그가 일방적인 협상을 통하여 우위를 점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아직 의회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이제 마이어 박사는 힐페르트 박사가 이미 그에게 속삭인 것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이어는 1950년 지방선거전에서 주를 누비며 다음과 같은 재담을 펼쳤다. 곧 아데워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 한 표가 많은 덕분에 헌법에 따라 연방정부 수상으로 선출되는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데나워는 정부가 있는 도시를 자기 고향에서 [겨우] 6km 떨어진 곳에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분기탱천하였다. 그 자신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놀리며 농담을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한 짓을 하면 이는 권위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곧 마이어는 새로운 본의 화려함을 빗대어 ‘연방중앙극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논쟁이 일었다. 칼 아르놀트가 연방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마이어가 이를 음모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결국 아르놀트는 슈바벤 지역의 주민이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진짜 골칫거리는 서남부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마이어의 고집이었다. [아데나워] 수상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연방참사회에서 기민당(CDU)에게 해를 입힐 뿐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은 다수당을 유지하고 있는 최대의 가톨릭 주인 뷔르템베르크-호헨촐러른과 바덴에서 패배할 것이었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와 마찬가지로 기분 나쁜 것이 이 문제가 서남부국가 문제를 둘러싸고 싸우는 가운데 세 개의 주에서 동시에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분열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독일인민당(DVP)/자민당(FDP)에게 이득이 될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서남부국가가 수립되는 경우라도 이러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라인홀트 마이어가 정부 구성에서 연방 정치 차원의 관점이 아니라 서남부국가 문제에서 ‘적이냐 친구냐!’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따르게 될 것이 아닌가? 그가 문화정책적으로 사민당(SPD)과 연대하고자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차치하고도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1950년대에 이 고집불통의 슈바벤 사람과 함께 해야만 했다. 그는 아데나워와 여러 가지 일에 함께하였다. 비록 그가 지방 정치적 동기에서 행동하고 그의 세계 정치적 지평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민족주의-자유주의적 신념을 뛰어넘어 확장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사실 마이어는 기민당(CDU)의 선거 패배 이후에 뷔르템베르크-바덴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확실히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사당(CSU) 또한 기반이 약화되었다. 한스 에하르트가 바이에른의 행정부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사민당(SPD)과 추방민당(GB/BHE)을 연정에 참여하도록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만 기민당(CDU)이 선거에서 패배해도 정권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추방민당(GB/BHE), 기민당(CDU), 독일당(DP)과의 연정은 아데나워의 마음에 꼭 들었다. 이는 단지 추방민당(GB/BHE)이 본의 정부 진영에 진입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방민당(GB/BHE)과는 앞으로 좋든 싫든 간에 함께할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아데나워 자신이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그가 즉시 알아차린 바와 같이 자민당(FDP) 사람들은 우쭐거렸다. 헤센과 뷔르템베르크-바덴의 선거가 끝난 지 이제 겨우 며칠 안 되었지만, 아데나워에게 7장에 달하는 비판적 제안서가 도착하였다. 이는 자민당(FDP) 당대표와 부수상인 프란츠 블뤼허, 자민당(FDP) 원내대표 직무대리인 한스 벨하우젠이 작성한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자민당(FDP)이 다른 속셈을 드러내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연방정부와 국민 간의 괴리,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무지, 정치적 일과에 관한 불충분한 내용 전달 – 이러한 점들이 늘 지적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데나워가 지나치게 많은 비밀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을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자민당(FDP) 부수상에게도 그리고 내각에 참여한 자민당(FDP) 동료들에게도 그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불평의 내용이 길었다. 아데나워는 결국 의원 가운데 외교 업무를 담당할 인물을 선정하고, 총영사를 신속하게 파견하고, 의회를 상대로 하는 차관을 임명하여 연정에 참여한 다른 정당의 통제를 촉진하도록 하며, 자민당(FDP) 출신 인사를 연방정부 내무부의 제2차관으로 임명하고, 연방정부의 업무규정을 마련하고, 부정부패의 요인을 단호히 척결하며, 연방정부 홍보처를 개혁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블뤼허는 그의 성격대로 단 한 가지의 요구 사항도 직접 제기하지 않고 벨하우젠에게 위임하여 유럽부흥계획(ERP) 부서를 실질적인 통상부로 전환하고 외무부의 설치도 건의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블뤼허가 어느 부서든 하나는 맡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추측건대 그는 외무장관이 되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었다. 수상은 머뭇거리지 않고 당장 5장짜리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는 그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연정에 참여한 모든 관계자가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결국 자민당(FDP) 측에 인사 정책과 관련하여 몇 가지 혜택을 베풀었다.     


외무장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대통령인 호이쓰를 설득하여 아직은 별도의 외무장관을 임명할 때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호이쓰는 당 동료인 블뤼허를 불러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이 문제를 아데나워보다 더 잘 다룰 사람은 없다는 뜻을 전했다. 통상장관 문제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블뤼허와 에르하르트를 몰아세웠다.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에 대하여 만족할 수가 없었다. 1950년 가을부터 늘 재정위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가 블뤼허와 대립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는 정부 부서 간의 다툼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상에게는 책임이 없는 일이 되었다. 이리하여 연정 내부의 분위기는 이미 여름에 한바탕 다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매우 악화되었다.      


또 다른 자민당(FDP) 소속 장관 또한 연방정부의 인사정책에 대하여 점차 불만을 제기하였다. 바로 에버하르트 빌더무트였다. 아데나워는 빌더무트에게 외교 업무를 담당하고 언젠가는 외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에리히 멘데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의 장관들과는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은 채로” 결정적인 순간에 기민당(CDU)의 테오도르 블랑크를 택하였다. [사실] 자민당(FDP)은 이미 조만간에 이 두 전통적인 부서들은 결국 기민당(CDU)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블랑크의 장관 임명 조치는 자민당(FDP)을 특히 분노하게 했다. 자민당(FDP)이 오래전부터 직업군인과 참전용사 전체를 그들의 지지 세력으로 삼기 위하여 공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아데나워가 자민당(FDP)에 그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자민당(FDP)의 빌더무트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아데나워] 수상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연방정부 대통령 호이쓰의 지지를 얻어내었다는 것은 전혀 위안거리가 아니었다. 호이쓰는 테오도르 블랑크가 국방비에 노조의 지원을 받는 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아데나워의] 주장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내부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1950년부터 1953년 사이에 아데나워와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간에 있었던 그리 편치 않은 관계에 대한 핵심 자료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와 관련된] 당내 회의의 회의록을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에 따르면 인사정책 조치, 은근한 협박, 억누르기 힘든 불만을 가리키는 내용만 찾아볼 수 있다. 하이네만이 물러난 다음에 아데나워가 무엇 때문에 당대표 직무대리인 프리드리히 홀츠아펠에게 내무장관 자리를 맡아줄 것을 독촉하였는가? 아데나워가 내각을 통제하는 데에서 저항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홀츠아펠은 그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결국 로베르트 레어가 당의 제안으로 그 자리를 수락하게 되었다. 레어는 이미 1949년에 이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었다.   

  

아데나워는 레어가 이미 ‘루르투쟁’ 때 연방국경경비대 설립에서 이전의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당원들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룬 것을 알고 있었다. 레어는 그가 장관으로서 처음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블랑크가 차관 회의를 주재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연합군과 협상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업무 조정자 역할을 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업무를 토마스 델러에게 맡길 수 있었다. 그는 레어와 마찬가지로 헌법 수호를 책임진 내무장관이 헌법적 권리에 대한 문제를 책임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업무는 연방정부 수상의 관할로 두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당연히 테오도르 블랑크의 임명은 시기적으로 내무장관의 교체와 맞물려 있었던 것인데 모든 관계자가 분노하게 했다. 아데나워 자신은 블랑크가 적임자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중요한 국무회의에서 말한 대로, 나이 문제만 아니었다면 전임 제국 시대 국방장관이었던 오토 가이쓸러가 임명되었을 것이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전통을 단순히 이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을 원하였다.     


블랑크의 무뚝뚝함은 이미 그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수상은 그가 매우 쓸모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아데나워의 생각에 군장성들은 상황에 따라 매우 거친 말투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폰 슈베린은 그를 크게 키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한 [군인인] 슈파이델과 호이싱거가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면 민간인 지휘자들이 그들을 잘 감시해야 할 일이었다. 블랑크는 민간인이고 노조원이며 단호하며 아직 젊고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모든 면에서 이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블랑크는 기민당(CDU) 소속으로 아데나워의 허락 없이는 사민당(SPD)에 맞서는 일도 감행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폰 슈베린은 블랑크를 비난하고 슈파이델을 선호한 것이다. 슈파이델은 당보다는 국가를 앞세우는 사람으로 슈바벤 동향 출신인 카를로 슈미트와 친밀하였다.     


이리하여 아데나워는 내각의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로베르트 레어를 임명하여 우파를 중용하면서도 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블랑크를 임명하며 노조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야콥 카이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곧 아데나워가 블랑크를 임명하면서 사실 노조의 우파를 등용했다고 본 것이다. 블랑크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를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이고 사회위원회에 별로 이득이 될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1950년 10월 중순에 있었던 소규모 내각 개편 때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가] 개신교회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탁월한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아데나워는, 현직을 맡을 그릇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던 연방정부 대통령 에리히 쾰러에게 외무 직무, 곧 멀리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호이쓰가 이에 대하여 강하게 불만을 토로하자 다시 그를 이란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유명한 개신교 신자에게 정부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1950년 10월 19일에, 곧 하이네만을 파면한 것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날에 연방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헤르만 엘러스는 고백교회 신자였다. 그는 1945년 올덴부르크 지역 교회의 법적인 총회장이었고 독일개신교연합회(EKD)에서도 신망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엘러스가 기민당(CDU) 안에서 전체 독일의 문제를 소신 있게 다룰 수 있는 독일민족주의를 구현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개신교 세력을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도움으로 개신교 신자들의 표를 얻고자 한다면, 그들이 동독지역에 있는 개신교 형제들과의 유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모든 노력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었다.     


오토 렌츠를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으로 받아들인 것도 아데나워가 처한 답보상태에 있는 저조한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를 추천한 인물은 글롭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어떤 정치적 고려로 렌츠를 받아들였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의 임명이 가시화되자 야콥 카이저는 그를 높이 칭송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베를린 기민당(CDU) 지도부에 속해 있으면서 [나치에 맞선] 저항운동의 선봉에 선 이 인물을 통하여 자기 입지를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중에 렌츠는 뮌헨의 법률사무소에서 요제프 뮐러와 함께 일했다. 렌츠는 저항운동을 하면서 뮐러와 친분을 쌓았으나 나중에 다시 헤어졌다. 그밖에는 아데나워가 문제 삼을 만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야콥 카이저를 중심으로 한 무리는 얼마 안 가서 실망스러워했다. 렌츠가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의 선봉에선, 타협의 여지가 없는 투사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프리츠 쉐퍼도 국무회의에서 렌츠를 임명한 것에 대하여 날이 선 비판을 하였다. “예,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와는 반대편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 임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쉐퍼는 이 새로운 인물이 매우 커다란 어려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블뤼허, 에어하르트, 카이저, 세봄, 루카셰크, 니클라스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렌츠는 연방정부 수상실의 문제해결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어떤 장관도 그 앞에서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일단 방향 설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원래 그가 추구하던 것으로, 린츠에게서 찾아낸 것이 바로 일이 돌아가도록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곧 연방정부 차관의 정규 업무를 수행하고, 외교관과 교수들을 정치적으로 재촉하는 일을 담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관계를 맺은 초기에 [아데나워가 자기] 속내를 솔직히 털어 놓는 인물이었다. 렌츠는 경제적으로 아쉬울 필요가 없어, [아데나워] 수상을 포함한 모든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담대하게도 일단 두 달 반 동안 임시직으로 일해 보겠다는 뜻을 5월까지 아데나워에게 줄기차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연방정부 수상실 차관 자리를 받아들였다. 아데나워가 그에게 임명장을 직접 손에 쥐여주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아데나워는 일만 잘한다면 새 사람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렌츠는 1951년부터 1952년 중반까지 아데나워의 귀 역할을 하면서 아데나워의 뜻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아데나워와 너무 가까이 있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렌츠가 권력을 휘두르며 많은 사람을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회한 주인에게 그에 관하여 나쁜 말들을 했던 것이다. 1952년 8월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게 되었다. 연방정부 수상실의 차관이 폰 브렌타노와 프란츠 슈트라우쓰와 공모하여 하필이면 아데나워가 뷔르겐슈토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안에 내각 개편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렌츠는 외무장관으로 폰 브렌타노를 천거하였다. 이는 반역이자 불충이었다. 아데나워는 자기 심복이 그러한 짓을 하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말다툼은 있어왔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데나워는 지치지 않고 ‘사달을 벌이는 사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3년 렌츠가 독일연방의회 의원직을 계승하고자 할 때 말리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매우 안 좋았던 1951년에 렌츠는 이 당시 아데나워와 상당히 분열된 내각이 처한 난국을 타개할 근본적인 방책을 마련하였다. 이미 첫 번째 논의에서 연방정부 수상은 렌츠에게 “강력한 선전 전략을 만드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하였다. 렌츠는 이 과업에 열성을 다하여 연방홍보국에 이른바 ‘인재풀’을 구축하여, 신문사 편집장, 방송국장, 기자들을 감언이설로 설득하거나 협박하여 조직을 만들고 돈을 마련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이나 프랑스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1년여 동안 탐문을 한 끝에, 연방정부 공보실장이 될 만한 인물로, 그 당시 《베저쿠리어》의 편집장으로 일하던 펠릭스 에커르트를 찾아냈다. 이리하여 초기에 볼품없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던 연방정부의 이미지를 개선하여 1952년 초부터는 점점 더 좋은 모습을 갖추게 했다. 그러나 선전기구의 설립은 이 부지런한 인물이 수행한 여러 활동의 일부에 불과하다. 렌츠는 1951년 1월에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광산업계에서 [노동자의 경영에 대한] 공동결정권과 관련하여 커다란 다툼이 일었다.     


석탄과 철강 산업에서의 [노동자와 기업가의] 평등한 공동결정권은 원래 연합국의 [독일] 점령 초기의 유산이었다. 곧 이는 그 당시 영국 측이 제정한 것으로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측에서 강력히 지지하고 입지가 약화된 기업가 측에서 수용한 조치였다. 본에서는 노조와 사민당(SPD), 나아가 기민당(CDU) 내부의 노조 파벌까지 합세하여 처음부터 노동자의 공동결정권을 법제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그 당시의 거의 모든 복잡한 산업정책 관련 문제가 여기에 엮이게 되었다. 곧 연합국의 [독일 산업] 해체 시도, 노조와 사민당(SPD)이 강력하게 요구한 [산업] 사회화 요청, 쉬망플랜에 관한 협상과 같은 문제들이 여기에 얽히게 된 것이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은 광산업계의 공동결정권에 관한 법률이 모든 분야의 대기업에 적용되는 포괄적인 공동결정권 관련 법률 제정의 단초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 볼 때는 이러한 법률이, 런던의 노동당 정부가 [독일의] 사민당(SPD)과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그리고 라인-루르지역의 기민당(CDU) 안의 좌파와 공모하여 과거에 전개했던 일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들은 그러한 일이 곧 지나간 일이 되기를 바랐었다.     


아데나워가 바라본 상황은 그러하였다. 그의 후계자였던 헬무트 슈미트 수상은 1970년 중반에 공동결정권과 관련된 논란이 한창일 때, 초대 수상[인 아데나워]의 공동결정권에 관한 견해를 거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광산업계에 공동결정권을 도입한 것은 콘라드 아데나워의 역사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이와는 약간 달랐다.    

 

아데나워는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로서 노동자의 공동결정권을 매우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자본과 노동을 동등하게 여기는 데에는 반대하였다, 그가 1947년 초 이에 관하여 귄터 헨레와 서신 교환을 한 것에 보면,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이 드러난다. “우리는 관련 당사자들 가운데 노조가 주도권을 잡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주총회와 감사실에서, 개인이 소유한 주식과 무관한 투표권은 최대한 다양한 주체, 곧 주, 시, 군, 조합, 노조가 공평하게 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를 바라는 이유는 과거에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게 된 권력의 집중을 그 당시와는 다른 형태로 다른 장소에서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데나워는 그 당시 감사실에서 [노동자와 기업가 비율이] 55대 45로 구성된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 당시 기업가들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그가 보기에] 상당히 지나친 제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1950년에는 “노조가 나가는 길에서 결국 새로운 독재가 수립될지 모른다.”는 아데나워의 근심이 줄어들었던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곧, 먼저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의장인 한스 뵈클러와 크리스티안 페테의 지도로 어느 정도 온건해진 노조를 사민당(SPD)과 분리시킬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아데나워는 1918년 혁명 이후 루르지역에서 발생한 소동을 결코 잊지 못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미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던 1959년 가을에도 그는 자기 당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여러분이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알게 됩니다. 곧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산업지역에서 소동이 일어나면 독일의 다른 지역에도 그 소동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독일의 동족상잔을 예고하는 조짐과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그러한 위험이 그렇게 현실적이지는 아닐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라인-루르지역 대기업의 노동자위원회에서 여전히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조 지도부에 속하는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독일금속노조의 과격 파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이가 있었다. 소동이 벌어진다고 해도 독일 경찰은 독일 동부지역에 확산된 태업 활동이나 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온건 노선을 택한 이들이 주도권을 잡아야만 노조도 질서 있는 권력의 기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국제적 상황도 나빴다. 사민당(SPD)이 쉬망플랜에 반대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아데나워는 이 핵심적인 외교적 노력에 노조의 동의만이라도 이끌어내야 했다. 이는 독일의 [유럽 방위군] 참여 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광산업계가 [노동자의] 공동결정권 문제에서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에 맞서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도 공동결정권 문제에 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측면에서도 타협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파 정당인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은 거의 무조건 기업가 편을 들었다. 여기에서 자민당(FDP)은 그들의 선거전에 필요한 자금줄과 중산층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 것이었다.     


1950년 내내 아데나워는 강력한 말을 했지만, 결국 1951년 1월 공동결정권 문제에 관하여 경고음이 울리게 되었다. 노조가 요청한 동등한 공동결정권의 지지를 위한 정치적 파업이 2월 1일로 예고된 것이었다. 이것이 가을 총선에서 치명타를 당한 아데나워가 당장 필요한 마지막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입법자들의 그러한 강요가 비민주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주재하는, 기업가와 노동자 대표 간의 회담에서 사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시 한번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제 오토 렌츠라는 강력한 사냥견도 곁에 두고 있었다. 렌츠는 이념적으로 아데나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수상의 요청에 따라 무조건 장관, 기업가, 노조원들에게 다가갔다. 아데나워는 이 상황에서 그들 모두에게 자신을 중재자로 보이고 싶어 하였다.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이루어진 협상에서 유명한 ‘평등한 해결책’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 해결책은 노조에 진정한 의미의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고 그들의 체면만 살려준 것이 되었다. 11번째 이사는 최대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합의를 통하여 선정하되 결국 주주들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기업가들은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연정에 참여한 소수정당들이 아데나워에 반기를 들기를 바랐다. 실제로 1월 16일 개최된 중요한 국무회의에서 블뤼허와 빌더무트를 포함한 여러 장관이 오토 렌츠에게 자신들이 사임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1차 내각에서 사임하겠다는 위협은 워낙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위협을 가장 많이 한 장관이 바로 프리츠 쉐퍼였다! 오후가 되자 상황이 다시 변했다. 이제 독일당(DP)은 연방정부 수상이 성공적으로 중재한 것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전했고 자민당(FDP)이 우유부단한 것에 대하여 비판을 가한 것이다. 오토 렌츠의 기록에 따르면 블뤼허가 이에 대하여 강력 동의하였다.     

그래서 1951년 1월 기본법, 곧 헌법에 관한 논의에 타개책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자신을 위대한 평화의 일꾼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연방정부의 노동부장관이나 칼 아르놀트, 또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원내대표는 이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연정 내부에서 논란이 한 달 더 진행되었고 3차 회의에서는 아데나워가 이전 시대에 자주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의 소동이 연방의회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이 힘을 합쳐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을 굴복시킨 것이다.     


이 법률에서 11번째 감사를 선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된 ‘법률 제8조’에 대한 표결 후에 절차 문제에 관한 소란스러운 논쟁이 일어났다. 엘러스가 회의를 중단시켰다. 그러자 이제 아데나워가 다시 한번 페르드멩게스의 도움을 받아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여기에서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과 사민당(SPD) 대표가 직접 협상에 나섰다. 사민당(SPD)은 착각하여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안건에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철한 아데나워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이 반대하자 기민당(CDU)은 법률 제8조의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표결이 진행되었다. 표결 결과 자민당(FDP)과 독일당(DP)이 대부분 포함된 ‘’약 50표‘라는 다수의 찬성표가 나왔다.     


공동결정권 문제에 관한 표결 결과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아데나워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것에 관하여 연방 차원의 기민당(CDU)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생각에 석탄과 철강 산업에서의 공동결정권은 정치적으로 현명한 조치입니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과 사민당(SPD)을 분리시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이 공동결정권 문제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면 결코 쉬망플랜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아데나워는, 이 기회를 빌려서, 이 법률을 보편적인 공동결정권 관련 법률[의 제정으로] 나가는 단서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저는 이것이 전체 경제계에 선례가 되는 법률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석탄과 철광 업계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법률에 대한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공동결정권에 관한 협상에서 기민당(CDU)의 입장은 확고하고 다른 양보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민당(FDP)과의 관계는 확실히 이전보다는 악화되었다.     


공동결정권에 관련된 이러한 결과에도 기민당(CDU)에 대한 전국적인 호감도는 개선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금속노조(IG Metall)가 광산업계에서 영향력을 어느 정도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노조와 노조 관련 세력, 그리고 심지어 기민당(CDU) 안의 사회위원회에게는 이 공동결정권의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다. 이들은 그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를 국내 정치적인 차원에서 전환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아데나워 자신은 이 모든 것을 그저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아데나워에게 훨씬 중요한 문제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이 내년에 추진될 기업 운영에 관한 법률에서 동등권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     

파업 위협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재정 지출 위기가 아데나워를 위협하였다. 이 문제와 결부된 것은 밀가루와 설탕 수입과 관련해서 매우 심각한 결핍이 발생한 일이었다. 내각은 공동결정권 문제에서 불안한 휴전이 이루어지고 나자마자 이 결핍 문제를 논의하였다. 아데나워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소속 장관인 에르하르트와 니클라스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자민당(FDP)과의 커다란 불협화음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데나워는, 식량부장관 니클라스가 국무회의 시작 때 식량 상황이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단계에 있다고 보고한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사실 아데나워는 그 무렵이 맥클로이 장군에게 [미국의] 식량[원조] 선박을 최대한 빨리 독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할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한 참이었다. 하필이면 이때 맥클로이가 아데나워에게 [독일 산업] 해체 문제의 해결을 독촉할 무렵이었다. 그는, 빵 배급제 실시가 정치적으로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국 위원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독에 대한 선전전에도 마찬가지의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정체된 그의 정치적 지지율이 이 일로 수직으로 낙하게 될 것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위원원회의 미국 측 위원에게 독일이 아직도 미국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위임을 받은 오토 렌츠는, 독일농부연맹(DBV)의 위원장인 안드레아스 헤르메스에게 가서 니클라스의 후임자 후보에 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헤르메스는 하인리히 륍케, 그리고 활동적인 알로이스 훈드함머라는 상반되는 두 전문가를 추천하였다. 그러면서 헤르메스 자신은 그 자리에 앉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1949년 내각을 구성할 때 헤르메스에게 공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렌츠는 헤르메스에게 일찍이 그의 동방정책에 관한 견해를 자세히 문의하고자 했었다는 암시를 주었다. 사실 아데나워가 그의 견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1년 초에 [아데나워] 수상은 지지율이 너무 낮았기에 동방정책과 관련하여 신뢰하기 힘든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마저 내각에 불러들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고의 전문가를 영입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큰 무리가 없이 식량 사정이 다시 호전되었다. 그래서 니클라스는 1953년까지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에르하르트 또한 이 시기에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아데나워와 경제부장관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관계가 지나간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에르하르트 또한 수상 휘하의 다른 모든 장관과 마찬가지로 자기 부서와 관련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데나워에게 노골적으로 비난받았다. 1950년 초와 1951/52년 겨울에 실업자의 숫자가 2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1951년 1월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결제동맹(EPU)에 더 이상 지불할 돈이 없어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의 여파에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원자재와 운송비 원가가 가파르게 상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유럽결제동맹(EPU)과 관련하여 자금 부족이 발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에르하르트가 과욕을 부려 무역 자유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라며 그를 비난한 것이었다. 독일의 서유럽과의 무역자유화율이 이미 60%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를 비난하였다.   

   

아데나워가 이제 해결해야 하는 어려움의 주요 원인은 경제부처의 인사 조직에 있었다. 아데나워가 1949년 가을에 순전히 연정 정책 차원에서 블뤼허를 마셜플랜 담당부서의 부서장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후에 두 명의 장관이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제대로 협력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식량을 수입해야만 했던 사정으로 또 다른 어려움이 야기되었다. 1950년 독일이 수입한 물자의 44%가 식량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업부 또한 경제와 관련된 핵심 부서 가운데 조정이 긴급히 필요해 보였다.      


아데나워는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에르하르트의 경쟁자인 오토 렌츠와 같은 인물은 수상에게 에르하르트가 장관이 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사실 에르하르트가 장관으로 있던 바이에른의 경제부를 사람들이 ‘뒤죽박죽 빌라’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아데나워는 경제부 장관이 모르는 사이에 몇 달 전부터 에두아르트 샬페이에프 차관을 대신하여 경제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는 에르하르트가 지휘하는 부서를 정돈하고 다른 부서들과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이센 정부에서 무역과 중소기업 담당 국장을 지냈던 프리드리히 에른스트는 아데나워에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들먹였다. 곧 그에게 “차관으로서 에르하르트 선생의 독특한 업무 처리 방식과 요구 사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유니레버 회사의 부장을 역임하고 후에 독일연방은행 총재가 된 칼 블레싱에게도 손길을 뻗었다.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는 독일 석탄광산지도부(DKBL)에서 재무부장으로 일하던 루드거 베스트릭에게 그 직무를 잠시만이라도 맡아주도록 하였다.     


동시에 [아데나워는] 베스트릭에게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경제정책 조정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3월 초에 연방정부 수상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자원 분배, 가격과 임금 조정, 식량과 [물품] 보급 상황과 수출입 업무를 다루었다. 말하자면 연방정부의 경제부에서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다룬 것이다. 아데나워는 다시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아데나워는 에른스트를 특권을 지닌 ‘위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리하여 에르하르트가 실권을 상실할 것은 명약관화해 보였다.     


맥클로이 장군이 마셜플랜의 미국 대표 자격으로 작성한 1951년 3월 6일 자 서한을 통하여 독일 무역정책의 커다란 변화를 요청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유럽결제동맹(EPU)에 2월 한 달 만에도 6천만 달러의 부채가 발생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무역] 자유화를 조속히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경제를 관리하고 조정하며, 물가와 외화 통제 요청을 달러 지원과 더불어 긴급히 필요한 지하자원 수입 중단의 협박과 결부시켰다. 이러한 급격한 간섭의 주요 동기는 서방 세계의 수호에 독일이 경제적 기여하기를 원하는 미국의 바람이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중앙석탄판매’를 즉시 해체하고 [독일 산업의] 해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쉬망플랜이 본궤도에 오르게 해달라는 프랑스 측의 요구 사항과 관련된 미국의 압력이 강화된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51년 3월과 4월에 경제정책 분야에서 할 일이 넘치게 되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반격을 가하면서 독일연방의회에서 탁월한 연설을 통하여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소속 의원들이 자기 정책과 인격을 지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경제계의 지지를 확보하여, [경제에] 필수적인 통제 조치를 주도하며 맥클로이의 공격에 맞섰다. 에르하르트는 함부르크에 있는 푀닉스주식회사의 총지배인인 오토 프리드리히를 경제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 독일연방정부의 지하자원 관련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아데나워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이 무렵 그에게 호의적인 여론을 동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인두스트리쿠리어》, 《벨트 암 모르겐》, 《폭스비르트》와 같은 신문들은 연방경제부에서 사주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논설들을 실었다. 그 글들은 연방정부 수상실이 ‘경제학자들로 이루어진 숨은 실세 정부’라고 성토하였다. 또한 쉐퍼와 블뤼허도 공격하였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에게 가장 공격적인 서한을 보냈다. “귀하의 행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저는 대단히 불쾌한 심정을 귀하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하는 연방정부의 본질에 대하여 완전히 오판하고 있습니다. 연방 정부의 그 어떤 장관도 중요한 문제에서 자의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내각의 결정이나 연방정부 수상의 지침을 어기며, 정당에 대적할 권리가 없습니다.” 몇 가지 잘못을 지적한 다음에 아데나워는 요점에 이르렀다. “귀하는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귀하는 오래전부터 경제 발전을 명백히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 귀하의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인 언사로 귀하 자신과 다른 이들이 현재 우리의 경제 상황의 심각성을 잘못 판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부의 행정적 무능에 대한 강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결론에 가서는 아데나워가 화제를 바꾸며 에르하르트가 지금까지 쌓은 훌륭한 업적을 기렸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험한 상황에서 이러한 엄중한 비판을 안 할 수도, 안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이날의 기록에 따르면 [말미에 추가된] 그러한 온건한 어조는 오토 렌츠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렌츠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서한을 받은 에르하르트는 사실 사임을 선언해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에르하르트가] 그렇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있었고 동시에 자민당(FDP)과의 연정 고리가 되는 이 인물을 내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도 아데나워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틀 후에 아데나워는 국무회의 도중에 에르하르트, 쉐퍼, 폰 브렌타노, 압스를 따로 불러 별도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먼저 오토 렌츠를 경제부 장관에게 급파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끈질기게 자기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다가 결국 아데나워의 강요로 이 상황에서 아데나워에게 충성을 서약한 쉐퍼의 견해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사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각에서는 에르하르트, 쉐퍼, 압스의 제안을 반영한 대책안이 마련되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진행된 이 논쟁의 모든 과정에서 아데나워는 프리드리히 에른스트라는 인물을 연방정부 수상실의 경제담당관으로 임명한 것이 장관들을 연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에른스트의 직능을 조종위원회의 ‘간사’라고 불러도 될 일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여러 측면에서 운이 좋았다. 지불 적자는 [예상보다]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촉발된 투자 붐으로 독일 경제는 1952년 5월부터 무역 흑자의 급속한 증가라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미 1951년 12월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은 15억 마르크의 순재정흑자를 이룩하게 되었다. 또한 국내 물가도 안정되었다. 실업률도 감소했다. 1951년 가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와 오토 프리드리히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위기가 지나간 것이다. 이미 1952년 초부터 수입 제한이 풀릴 수 있게 되자 에르하르트는 다시 한번 여론의 총애를 받는 찬란한 승자가 되었다. 또 다시 그는 야당과 고위위원회 뿐만 아니라 아데나워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아데나워는, 1951년 3~4월에 에르하르트가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경제부 장관과 충돌하지 않게 된 것을 속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에르하르트의 질서정책*의 철학이 앞으로 아데나워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에르하르트는 운이 좋았다. 신자유주의 이론이 그의 철학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운이라는 것이 정치에서는 중요하였다. 아데나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데나워 정부가 마침내 1952년 초에 오랜 [지지율]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요인으로는 그가 이룩한 외교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경제 기적을 들 수 있다. 당시 국내외에서 독일의 경제 기적은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권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 정부에 지금까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던 이들도 경제 성과에 대하여 정부를 칭찬하게 되었다.     


* 질서정책[Ordnungspolitik, 역자주 - 1950년대와 1960년대 독일연방공화국 경제부 장관과 이후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루드비히 에르하르트가 실시한 사회적 시장 경제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경제 정책 철학. 질서정책은 자유 시장경제와 국가의 규제를 조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함.  이 질서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의 경제 철학적 바탕이 됨,]     


그러나 1951년은 정치적으로 매우 침체했던 시기이다. 이는 확실히 어려운 상황에 기인한 것이지만, 동시에 아데나워가 첫 임기 동안에 내각이 조화롭게 일을 하도록 이끌지 못한 데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이를 시행할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는, 아마도 자기 심복 장관인 쉐퍼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치적 이성이 매우 결여되었다고 지나치게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비록 그 자신이 지속적으로 압력을 받는 것은 아니어도, [각료들 가운데] 누구나 언제든지 단내각의 합을 희생시켜가면서 각자의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깊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가 늘 그러한 압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데나워의 지도 스타일이 장관들을 이간질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히 지나친 것이기는하다. 그러나 그는 일을 성급하게 처리하거나, 순전히 전략적으로 부서 권한의 한계를 분명히 하지 못하거나, 자주 소동을 피우는 장관을 궁지에 몰기 위해 그 경쟁자의 부서 이기주의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에 가서 그는 자신만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확신했으며 장관들도 이를 느끼도록 하였다. 

    

지불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오토 렌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런 내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내가 믿을만한 장관은 외무장관 밖에는 없네.” 이렇게 아데나워는 정부를 간신히 꾸려나가면서도 자기 노선을 견지하며, 의도했든 아니든 권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려움을 짊어지고 나갔다. 그가 권위주의적인 지도 스타일로 스스로 짊어진 업무를 차치하고도 늘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본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는 독일언론은 이 정권 초기에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권위주의적이고 다툼을 즐기고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코 숭배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존중은 [정권 수립] 2~3년 후에, 이 여러 모로 까다로운 노인이 경제정책, 심지어 점령 셰력과의 관계에서도 성과를 이룩하였다는 것이 확인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 그에 대한 존중에서 국민들의 신뢰가 점차 자라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뢰에서 그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아데나워가 본의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을 그저 멀리서만 바라보는 이들은 그에 대한 애정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지도가 여전히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1951년에 이는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아데나워의 생활 리듬     


객관적으로 볼 때 아데나워가 수상이 된 초기가 가장 힘들었을 때였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는 늘 때가 매우 안 좋다고 불평했었다. 그러나 초기의 어려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재임 초기의 수상에게는, 후일 그를 둘러싸며 모든 비판을 상당히 막아주던 개인적 아우라가 없었다. 이 아우라가 비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독일의] 경제 기적이 확립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자랑스럽게 주장하는 대로, 외교적으로 독일은 1952년의 서방과의 조약들이 비준된 이후 유럽의 구성원이 되는 길에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가 [독일의] 경제적 성공에 기여한 바는 본질적으로 그가 에르하르트를 무조건 신뢰한 데에 있다. 그러나 독일이 외교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분명히 그의 업적이다. 독일의 경제적 성공과 외교 무대의 복귀에 대하여 1953년의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좋게 평가하였다.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대외적으로나 국내 정치적으로 확고한 지지기반을 확보한 수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52년과 1953년에 잠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나서 그는 주관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달라보였다. 사실 그는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자기 입지와 나라가 완전히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되풀이하여 기민당(CDU) 지도부 인사들이나 장관들에게, 특히 자기 측근들에게 자기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이야기하였다. “상황이 이처럼 나쁜 적이 없었네…” 그는 늘 자신을 재촉하였다. 

    

1951년의 매우 심각했던 불안이 사라지게 되자 1952년 5월 조약 체결을 관철한 것이 잠시나마 그의 짐을 덜어주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일에 매진해야 했다. 독일연방의회에서 그 조약에 대한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리고 이는 최대한 신속하게 연방참사회와 연방헌법재판소라는 관문도 통과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1953년 총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선이 승리로 끝났지만, 파리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1955년 [독일이] 주권을 회복하고 서방 공동체에서 입지를 공고화된 후에도, [독일] 군대에 관련된 법률 제정과 독일군의 구체적 창설에 관련된 모든 어려운 문제가 아직 미해결로 남아있었다. 동유럽과 중동에서 위기가 커지기 시작하고 세계적 차원의 동서 갈등은 지속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위협이 되었다.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의석의 과반수를 확보하게 된 1957년 여름 총선이 승리도 그의 짐을 덜어주지 못하였다. 이제 베를린 위기와 프랑스의 국가 위기, 게다가 케네디, 드골, 맥밀런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 외교를 하는 일이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그가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업적을 망칠 수도 있는 무능해 보이는 후계자에 대한 걱정이 신경을 건드렸다. 1963년까지 그는 자신이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신생국의 불안한 승객들을 차에 태우고 넘어지지 않고 빠른 속도로 험한 길과 구덩이를 지나가야 하는 늙은 운전기사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신이 속한 당이 그의 퇴임을 요구하게 되자 그의 비관적인 상황판단은 더욱 어둡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이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그와 관계있는 모든 이가 보기에는 수수께끼였다. 그의 본성이 국가를 이끄는 과업을 쉽게 짊어질 만큼 낙관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달 동안이나 베를린을 떠나 [현재 폴란드의 도시] 바르치노에 머물면서 귀공자다운 태연함을 보여준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책임 의식이 강한 소시민적 공무원의 이 올곧은 아들은 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책임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단 하루도 정치에서 문자 그대로 온전히 벗어나는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다. 주말에도 뢴도르프의 언덕 위에 있는 자기 집에서 본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며 “명목상의 휴가”를 보내는 방식은 나중에 생겨난 개념인 ‘근무휴가’를 정확하게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데나워가 주중에 일과를 처리하는 것만 관찰해보아도 그가 일중독에 걸린 사람이라는 인상을 쉽게 받게 된다. 그의 삶에서 정치가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데나워가 자기 직무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삶을 정치활동에만 소모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자녀들과 일부 측근들만이 그가 어떻게 자신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했는지를 증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가끔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58년 초봄의 몇 주 동안 그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방스 근처에 있는 고도 500m에 위치한 생마르탱성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대니 N. 하이네만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본과 정치에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를 지닌 사람으로서 완전히 거리를 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의무가 외부에서 부여되기에 자기도 모르게 내면에서 계속 그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저주입니다.”     


‘우리 시대의 저주’인 정치. 아데나워처럼 정치에 몰입해 보이는 인물의 글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고백 아닌가! 그러나 사실 그는 타고난 극기 정신을 동원하면서, 내면적 본성으로 업무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때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날마다, 주마다, 휴가 때마다 그는 잠시 [일에서] 벗어났다. 확실히 이것이 많은 사람이 놀라워한 그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명민함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쾰른에서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그는 어떻게 모든 최상의 성과가, 정치활동에 앞서 자신만의 생활 리듬을 유지하고 앞세우는 것에서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생활 리듬이 날마다, 주마다, 해마다 거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쉽게 파악해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에게 익숙한 생활 리듬을 철저히 지켰다. 그의 수면 시간은 6시간으로 짧았다. 원칙적으로 그는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아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의 가정의였던 베버-부흐 박사는 약물과 그 상호작용에 지속적으로 변화를 주어 약물이 효과를 거두도록 해야만 했다. 많은 다른 노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원칙적으로 새벽 5시에 기상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혈액순환을 위하여 습관처럼, 세바스티인 크나이프 목사의 권유대로 찬물이 약간 담긴 욕조 안에서 몇 분 동안 움직였다. 나이가 더 들면서 그는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침대에 잠깐 누웠다. 수상직에 오르고 난 뒤 몇 해 동안 그의 육체적 능력은 무한해 보였다. 대부분 시간에 그는 깨어있었고 날씨가 좋으면 가벼운 옷을 입고 정원을 산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완전히 혼자 있으면서 마치 왕처럼 자기 제국을 조망할 수 있었다. 본의 오른쪽에 위치한, 멋진 교회가 있는 작은 마을인 뢴도르프에는 그 시간이면 많은 사람이 침대에서 등을 구부리고 있다가 기지개를 켤 때였다. 오른쪽으로는 드라켄펠스의 웅장하게 솟은 석벽이 보였다. 그가 아는 대로 그 너머에는 아직 아침 안개에 젖어 있을 그의 고향 쾰른이 있었다. 그 고향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라인강 가 좌측의 아름다운 언덕은 아직 무표정한 콘크리트 건물로 흉측해지기 전이었고,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는 낭만적인 롤랑스보겐이 인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50여 년 전에 약혼하였다. 저 멀리에는 아이펠 산맥의 푸른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마리아라흐가 있다. 그 너머로는 아데나워가 독일의 미래와 함께하고 싶은 서방의 국가들이 있을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에 처음 정착할 때만큼 정원을 가꿀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특히 주말에 정원이 잘 가꾸어진 것을 살펴보았다. 그는 모든 꽃송이와 모든 관목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공립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독일어로 된 꽃 이름을 최소한 기초적인 차원에서라도 더 이상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멀리 경치를 내다보며 홀로 있는 이 시간은 그의 일과의 절정이었다. “아침에 기상한 직후에 사람은 가장 명민해진다.” 아데나워가 [그의 비서] 안네리제 포핑가에게 자주 하던 말이다.      


그러고 나서 서재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1960년까지 사용한 이 책상은 소박하지만 품격 있는 미르테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아데나워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이 책상 대신에 사용하기 위하여, 카데나비아에 머물 때 골동품상인 콜롬보 부인에게서, 작지만 이전의 것만큼 아름답고 그것을 사용할 나이든 주인만큼이나 구식이고 편안한 책상을 구입했다. 여기에서 그가 어젯밤 들고 온 서류와 아침에 배달된 신문들을 살펴보기 전에 보온병에서 커피 한 잔을 따라서 마셨다.     


1950년대 초반에 그는 아침 7시에 자주 블랑켄호른에게 전화했다. 그는 당시에 호네프에 살고 있었는데 이 시간이면 이미 조간신문들을 검토한 다음 자기 상관의 전화에 대응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쯤에는 아데나워 집안에 온통 활기가 넘쳤다. 6시와 7시 사이에 첫 전령이 도착해서는 직배 우편물과 연방정부 공보실에서 발행하는 《나흐리히텐슈피겔》, 그리고 모든 최신 소식을 전달하였다. 7시와 8시 사이에 그는 개인 비서인 호만을 불렀다. 호만은 결혼한 다음에 쾨스터 부인으로 불렸다. 아데나워는 1946년부터 그를 개인 비서로 채용하였다. 이 쾰른 출신의 여성은 처음에는 아데나워 곁에서 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시에 영국 점령지역의 기민당(CDU) 대표였던 아데나워는 자기 서한을 정리할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 전직 [쾰른]시장은 누구도 함께 편하게 식사하기 힘든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의 아내가 호만을 설득하였고 이제 뢴도르프의 식구가 된 것이다. 호만은 8시 30분부터 9시까지 중요한 서한이나 비망록을 기록하고 주말에도 늘 대기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아침 커피를 규칙적으로 7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마셨다. 가족이 집에 있으면 함께 커피를 마셨다. 여기에는 1954년에야 결혼해서 집을 떠난 딸 로테, 신학자 파울이나 막내아들 게오르크가 함께하였다.     


아데나워는 보통 8시 30분에, 때로는 8시에 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수상 전용차 앞에 경호원이 탄 차가 함께 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951년 본의 경호실은 매우 민감해졌다. 1951년 초에 아데나워의 집의 석탄 더미에서 6개의 폭발물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9월에는 연방정부 수상실에 체코정보부의 암살단이 뢴도르프에서 본에 이르는 도로에서 [아데나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는 첩보가 당도했다. 실제로 그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나루터와 뢴도르프 사이의 길에서 지나가던 아데나워의 자동차에 폭발물을 던지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 집권 후기에 라인강 우측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해진 자동차 행렬이 등장하게 되었다. 곧 맨 앞에는 경호원이 탑승한 지붕이 없는 포르쉐 자동차 2대가 달리고 [아데나워가 타고 있는] 벤츠 300 자동차 뒤에는 또 한 대의 벤츠 자동차가 따랐다. 이 자동차에는 무전기가 달려 있었다. 돌렌도르프에 있는 나루터는 수상이 도착하자마자 자동차 행렬을 나룻배에 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9시부터는 샤움베르크궁에서 회의와 담화가 시작되었다. 그의 스케줄은 4주 전에 미리 작성되었다. 당연히 조정이 가능한 일정은 원칙적으로 한 주 전 중반에 확정되었다.     


외교적인 조찬이 없는 날에는 오후 1시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아데나워는 이때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홀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가벼운 식사를 하였다. 스프, 고기, 채소를 먹었다. 그가 비스마르크처럼 엄청난 양의 고기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식사에 관하여 그는 절제하는 편이었다. 그러고 나서 낮잠 시간이 이어졌다. 나이든 처칠과 마찬가지로 그는 제대로 된 침대에 누웠다. 그 침대는 샤움베르크궁의 소회의실 뒤편에 이른바 비더마이어실과 거실과 함께 마련하도록 지시한 침실에 있었다. 이곳은 그의 개인적인 제국이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무실이 아닌 3개의 개인적 방에 대한 월세를 국가에 지불하였다.     


그가 나이 들어갈수록 낮에 쉬는 시간이 길어졌다. 몸이 불편할 때는 낮잠을 자고 난 다음에도 셔츠차림으로 집무실 뒤에 있는 식당의 소파 위에 몇 분 동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음악을 듣거나, 그의 측근 가운데 한두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바깥 공기를 즐기는 사람이었기에 샤움부르크궁의 정원에 길을 넓히고 자기만을 위하여 마련된 산책로에서 산책하는 습관을 곧 들이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이 산책은 3시 30분 무렵에 시작하였다. 이 산책을 하면서 그는 주로 글롭케, 블랑켄호른, 할슈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30분 정도 산책을 하고 나서 그는 다시 연방정부 수상실로 돌아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데나워는 자신에게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도 시간 엄수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위위원회 위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1951년 초부터 자신이 페테스베르크로 찾아가기보다는 위원들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조치하였다. 그는 그들을 찾아가는 것을 늘 불편해하였다.     


엄격히 정해진 일과를 지키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아데나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그가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대형 괘종시계들을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 시계들은 샤움부르크궁만이 아니라 뢴도르프에도 설치되었다. 그가 내각을 떠나면서 작별 선물로 남긴 것은 사방으로 시계 바늘이 나 있는 탁상용 시계였다. 이 시계로 장관들이 “모든 토론을 할 때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의식하라는 뜻이었다.”   

  

아데나워는 자주 전화했다. 샤움베르크궁의 책상에는 린도르프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흔한 검은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그는 새로운 직통전화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앞방에 교환원을 둘 필요 없이 그의 생각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글롭케가 그런 사람이었고, 블랑켄호른과 할슈타인, 그리고 연방정부 공보실의 실장도 여기에 속하였다. 1955년부터는 외무장관인 폰 브렌타노와 하인리히 크로네도 포함되었다. 1957년부터 부수상을 역임한 에르하르트는 서열 2위의 인물이었다.     


저녁이 되면 대부분의 서류 작업이 끝났다. 그러나 종종 보좌관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면담 약속이 없는 경우에는 저녁 8시 무렵에 뢴도르프로 돌아갔다. 이때 자주 한 꾸러미의 서한과 서류들을 들고 갔다. 자기 집 밖에서 저녁에 사교 모임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는 정당 생활에서 매우 선호되는 저녁 술자리에 거의 함께하지 않았다. 술을 철저히 절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한 잔 이상을 마셨다. 쾰른에 있을 때 그토록 자주 즐겼던 음악회에 갈 시간도 없었다.     


집에서는 최대한 방해 받지 않고 머물고 싶어 하였다.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글롭케였다. 그리고 1950년 중반부터는 크로네, 그리고 그와 직통전화로 연결된 사람들이 더해졌다. 이제 그는 가벼운 저녁 식사를 다시 하고 가족들에게 있었던 일에 관하여 이야기 듣는 것을 즐겼다.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는 사양하였다! 매우 드믄 경우에 그는 뢴도르프에서 측근들과 밤에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매우 즐긴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장에 나온 [자성]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고전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처럼 마음이 가장 편해졌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로 늘 남아있었다.     


때때로 그는 그림도 그렸고 그림의 구도과 색채에 빠져들었다. 잠들기 전에 그는 종종 탐정소설을 읽거나 신문을 다시 뒤적거렸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매우 시민적이고 고전적인 인물로 침대 곁의 탁자 위에는 주로 이런저런 시집이 놓여있었다. 그 고전적인 시들은 당연히 그가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에 암송한 것들이었다. 곧 아이헨도르프, 쉴러, 울란트의 작품들이었다. 그가 종종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시를 읽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주 단위로 진행되는 리듬도 있었다. 이 리듬은 그의 수상직 재임 초기에 업무를 보는 날과 주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독일]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연방정부 수상실에서도 십계명을 기준으로 삼았다.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탈출기 20,9-10) 때로 아데나워는 이미 토요일 오전에 뢴도르프로 가서 얼마간 쉬면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 상대방은 일부 고위위원들, 그리고 블랑켄호른이나 할슈타인이었다. 그가 중단하기 싫은 일은 기꺼이 지속하였다. 여기에서 국제회의를 위한 중요한 의견서, 중요한 비망록이나 서한의 초안을 다루었다. 그의 유고에 보면 기조강연 초안이 많이 발견된다. 이는 대부분 주말에 흘려 쓴 독일어로 종이에 적은 것들이다. 

    

주일에는 당연히 성당에 갔다. 그러나 그 외에는 집과 가정이 [주말에는] 중심이 되었다. 정원을 살펴보고, 개인 편지를 검토하고 답장을 썼다. 가끔 멀리 떨어져 사는 자녀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아들] 콘라드는 어느 사이에 쾰른에 있는 라인브라운회사의 부장이 되었다. 막스 아데나워는 아버지의 [정치가] 인생 여정을 따라갔다. 그는 1948년 쾰른시 의원이 되고 1953년부터는 시청 고위 관리가 되었다. 묑헨글라드바흐에 사는 아데나워의 장녀가 사위인 발터 라이너스와 함께 [뢴도르프를] 방문하였다. 노이쓰에서는 첫째 아내 사이에 낳은 막내딸 리베트 베어한이 찾아왔다. 아데나워의 어린 자녀들은 그의 수상직 재임 초기에는 대부분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것도 그들이 본에서 공부하는 학기 중에는 그랬다. 195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자녀들이 집을 떠났다. 로테 아데나워는 1954년 건축가인 물트하우프트와 결혼하고 막내아들 게오르크는 1955년부터 스웨덴 사람인 울라-브리타 예안손과 결혼하여 살면서 자기 아버지가 젊었을 때 꿈꾸던 것을 실천했다. 곧 지방의 공증관이 된 것이다. 신학을 공부한 파울 아데나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사제로 서품된 이후에도 직무가 허락하는 한 뢴도르프의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집안일은 거의 10년 동안 엘스베트 노엘레가 도맡아서 했다. 노엘레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체닉스벡 8a번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노엘레는 혼인하게 되자 아데나워에게 가정부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데나워의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나 뻣뻣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1960년부터는 슐리프 부인이 가사를 돌보았다. 슐리프 부인은 웅켈 출신의 라인란드 사람으로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데나워는 이를 좋게 여겼다. 곧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하고, 자존감이 있으며 모든 일을 노예처럼 억지로 하지 않고 확실하고 주체적으로 하였다.     


이것이 아데나워가 최소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느긋하게 살던 세상이었다. 비교적 많은 사람이 70대 중반이 된 그에게서 발견한 젊음은 한 성질 하는 자녀들과 자주 교류한 덕분이었다. 그들은 슬픔이라는 것은 몰랐다.     


월요일이 되면 그를 위하여 또다시 “영원히 업무에 맞추어진 시계”가 울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의 상태에 있었다. 흔히 그는 월요일 아침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속이 약간 나빴고 귀찮은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것이 그의 주요한 [생활] 리듬이었다. 확실히 그는 늘 돌파구를 마련해야만 했다. 물론 당대표로서 버터 바른 빵과 보온병을 들고 겨울에 담요를 몸을 감싸며 털털거리는 차를 타고 독일의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 그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본으로 부를 수 있었다. 수상직 초기에 있는 이 원칙주의적인 인물의 생활방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은 귀찮은 여행은 지나간 일이 된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그의 한 주일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지방의회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는 또다시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원하는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장거리 여행이면 기차를 이용하였다. 항공 운항이 시작되면서 비행기도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동차를 좋아하였다. 과거 [쾰른] 시장 시절에 하던 대로 운전기사에게 차를 빨리 몰 것을 재촉하였다. 그는 지방선거전을 한편으로는 귀찮게 여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본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들이 독일연방공화국의 일상 생활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대중과 당원들을 만나 중요한 조언을 찾아 활용하였다. 그는 자주 회의나 방문객과의 면담에서 그러한 방식의 만남에서 수집한 정보와 의견을 언급하였다.     


1951년부터 파리, 런던, 로마, 브뤼셀, 룩셈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와 같은 외국으로 자주 여행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항공 여행에 익숙해지게 되자 비행기를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1951년과 1952년에 단거리나 장거리 해외여행을 12차례 하였다. 스위스로 휴가 여행을 떠난 것을 제외하면 1951년부터 1963년까지 총 71차례 해외여행을 하였다.    

  

파리를 처음 방문하면서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과 기꺼이 어울렸다. 그것이 자신이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섭생과 취침 습관에 조금은 어긋나는 것이어도 말이다. 블랑켄호른과 더불어 아데나워의 최측근으로서 삶을 즐기는 인물이었던 폰 에카르트는 가끔 아데나워를 설득하여 파리에서 굴과 샴페인을 방으로 주문하여 그것을 즐기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외국을 방문하여 밤에 동료들이나 외교관의 고위 관리들과 주흥이 넘치는 자리에서 오래 머물러 있다가 다음 날 잠이 덜 깬 상태로 협상 자리에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짓인지를 곧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의 수도에 도착한 날 밤에는 필수적인 만찬에만 참석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이는 그 자리에서 정보를 탐색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최대한 빨리, 곧 대체로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서류 검토에 들어갔다.     


또한 일단 익숙해진 호텔을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쾰른] 시장일 때 가능하다면 ‘카이저호프’에서 늘 같은 방을 사용하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파리의 ‘브리스톨’, 런던의 ‘클레리지스’, 그리고 나중에는 뉴욕을 자주 방문하던 때는 ‘월도프 아스토리아’를 선호하였다. 나중에 독일이 다시 모든 나라에 대사관을 세우게 되자 그는 대사관 관저에 머물기도 하였다.    

 

일간 리듬과 주간 리듬은 더 포괄적인 연간 리듬에 연계되었다. 수상직 재임 초기에는 두 차례 휴가를 확실히 보냈다. 바로 성탄과 새해 휴가, 그리고 여름휴가였다. 나중에 그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겨울이 끝나고 나면 온화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기후가 있는 곳에서 추가로 휴가를 보냈다. 이를 위해서는 주로 바데바덴의 뷜러훼헤,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그리고 1959년부터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코모 호수에서 휴가를 보냈다.     

11월이 되면 그는 대개 감기에 걸리거나 지독한 기관지 천식에 시달렸다. 그러한 비교적 가벼운 질병이라도 일이 많은 정부 수장에게는 피곤한 일이었다. 일단 병에 걸리면 대부분은 2주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뢴도르프의 집에서 침대에 누워 직원들을 불러들이고 많은 일은 전화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되는 일이었지만 대부분 정상 업무에 일찍 복귀하였다.   

  

그의 세대에 속하는 모든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성탄절이 1년의 정점을 이루었다. 뢴도르프의 거실에서는 이제 예수 탄생을 묘사하는 커다란 모형 구유가 들어섰다.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성탄절을 지냈다. 그의 자녀들, 사위들, 며느리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도 참석하였다. 이는 시민적인 독일의 이야기에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해마다 12월 25일 독일 방송을 통하여 발표하는 성탄 메시지 작성에 늘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모든 개인 편지도 처리 처리하였다. 어느 정도 한가한 이 시기는 늦어도 1월 5일이면 끝났다. 그가 한 살을 더 먹게 되면 본에서의 정치 생활에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그가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영명축일은 생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생일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그 자신도 자녀들의 영명축일을 축하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사람들이 콘라드 [아데나워]의 영명축일인 11월 26일을 기억하기 바랐다. 그런데 1950년 1월 5일부터는 중요한 생일, 곧 75세, 80세, 85세 생일에는 커다란 잔치를 벌이다가 차츰 그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의 생일을 공화제의 수상보다는 통치하는 군주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가 수상이 되고 나서 처음 맞이한 생일에는 모든 격식을 다 갖추었다. 모든 주에서 풍부한 선물이 당도하였고 내각, 여당, 본, 쾰른에서 축하 인사가 당도하였다. 더 나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점령지역의 고유의상을 입은 세 명의 소녀도 인사하러 왔다. [연합국] 3국이 점령한 지역의 인물들도 인사를 하였다!     


1년 후에 아데나워는 75세 생일잔치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독일의 유럽 방위] 군대 참여 논란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게 된 그의 이미지를 온화한 가장의 모습으로 빛나도록 하는 데에 대규모 행사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면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커다란 축하 행사를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식량부 장관 니클라스를 선두로 하여 푸른 사냥꾼 복장을 한 사람들이 9시 정각에 샤움베르크궁 앞에서 사냥에 성공했을 때 부는 호각을 힘차게 불면서 수상 앞에 [독일] 전국에서 잡은 멋진 사냥감들을 늘어놓았다. 9시 30분에 공식적인 예식이 시작되었다. 연방정부 대통령 호이쓰가 ‘독일 국민을 대표하여’ 축하 인사를 하며 그레고리오 성가가 나오기 이전에 만든 성가가 담긴 레코드판 전집을 선물하였다. 비오12세 교황만이 이 귀한 물건을 지니고 있다고 기자들이 보도하였다. 내각은 1490년에 제작된 아름다운 성모상을 선물하였다. 이후 이 조각상은 아데나워 집무실의 중요한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수상은 감동하여 장관들에게 ‘나의 친구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매우 가끔 만족감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순서가 이어졌다. 헤르만 엘러스가 이끄는 독일연방의회 의장단은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담긴 귀한 포도주를 선물하였다. 독일연방참사회 의장단은 님펜부르크 도자기 회사에서 만든 ‘플로라 여신상’을 선물하였다. 각각의 주 정부도 주지사나 주대표를 통하여 선물을 증정하였다. 벨펜 가문 출신으로 콧수염을 기른 하인리히 코프가 선물한 도른카트 도른카트 회사가 만든 양주 한 상자가 가장 눈에 뜨였다. [사민당(SPD) 대표인] 쿠르트 슈마허도 인색하게 굴지 않고 당을 대표하여 75가지 종류의 차향이 아는 장비인 티로즈를 선물하였다. 선물 행렬이 더 이어졌다. 광산업계의 공동결정권을 강력히 원하는 한스 뵈클러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의 500만 회원들의 축하 인사와 더불어 아름다운 식물 장식품을 선물하였다. 프리츠 베르크는 독일연방산업회(BDI)를 대표하여 커다란 그림을 선물하였다. 정오가 되자 의례적인 경찰악대의 연주가 있었다. 오후 4시에는 전 세계가 아데나워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독일 주재 외교단이 축하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동안 19개 국가의 신임장이 제정되었다. 그러고 나서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선물을 전달하였다. 연방언론협회는 언론인다운 풍자를 곁들여 두 마리 살진 ‘오리’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본의 시의회 위원들이 장관들과 함께 아데나워를 아름다운 바로크양식의 시청으로 영접하며 명예시민증을 전달하였다. 14년 전 이곳에서 아데나워는 그 당시 슈미트 쾰른시장과 협상을 맺은 바가 있었다. 이 협상으로 그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른 저녁이 되자 2,000명의 본 시민이 마크트플라츠에 모였다. 맨 앞줄에는 횃불과 단체기를 든 젊은이들이 서 있었다. 아데나워는 시청 발코니에서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다. “우리는 온 힘을 모아 우리 나라의 재건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독일 젊은이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10시간에 걸친 생일잔치를 마무리하면서 한 어린 여자 아이가 수줍어하며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생일 축하합니다. 대통령 아저씨!”   

  

생일잔치 행사의 중요성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잔치는 그 당시에 유행한 것도 볼 수 있게 해준다. 행사 자체의 즐거움과 더불어 커다란 과시효가 있다는 확신에서 아데나워는 해마다 마치 왕이나 된 듯이 이 행사를 거행하였다. 본에서 거행되는 이 생일잔치가 [독일] 정치 일정에 고정된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독일연방 대통령이 주재하는] 신년 하례식을 대통령 자신이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면서, 적지 않은 사람은 라인강변의 작은 샤움부르크궁에서 ‘선출직 군주’가 정부를 통제하면서 그의 지배 아래 모든 것이 질서를 회복하여 차라리 그가 종신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아데나워가 자기 생일을 처음으로 성대하게 거행할 때만 해도 사실 그의 인기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정계와 재계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행사를 치른 사실은 그가 이미 그 당시에 얼마나 높은 명망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가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게 된다면 그의 명성이 얼마나 더 오르게 될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수상직 초기의 또 다른 여유로운 일은 여름에 있었다. 아데나워는 휴가 때도 오래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휴가는 반드시 4주나 그 이상 지속되어야 하고, 오로지 스위스 산간에서만 제대로 휴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온 가족을 고지대에 있는 셩돌랑으로 끌고 올라가는 것은 이제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 지역은 너무 외진 곳이었고 독일연방 수상의 위상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는 [스위스의] 뷔르겐슈톡이 그의 위상에 어울렸다. 팰리스 호텔 지붕 위로는 3개의 깃발이 휘날렸다. 그 때 이미 가능한 일이었다. 한 가운데에는 스위스 깃발, 그 오른쪽에는 이스라엘 전통의 정금 촛대인 메노라가 푸루 바탕에 그려진 이스라엘 깃발, 왼쪽에는 검정-빨강-황금 색깔의 독일 깃발이 있었다. 이때 여기에는 아데나워와 더불어 이스라엘 대통령인 카임 바이츠만이 머물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는 않았다. 아데나워는 피어발트슈태터 호수의 숨 막히는 경치를 즐기며 커다란 소란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더 이상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산책을 거의 못 할 정도로 많은 기자가 몰려왔다. 게다가 스위스 언론도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독일의 정치 소동이 벌어지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953년과 1956년에는 뷜러회헤를 찾았다. 그러나 1955년에는 다시 [스위스] 뮈렌 근처의 라우터부룬너탈의 숙소에 머물면서 제네바 회담에도 참관하였다. 1920년 대 방식의 가족 휴가는 당연히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늘 아들이나 딸 한 명이 그를 동반하며 [아데나워가] 산간에서 머무는 것이 ‘노동하는 휴가’가 되지 않도록 보살폈다. 가끔 자녀들도 함께 모였다. 그러면 이 노인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 그는 여전히 ‘가족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놀라울 정도로 여전히 강건한 등산가였다. 빌헬름 그레베는 제네바회의에서 뮈렌에 머물고 있던 아데나워를 자주 찾아왔었다. 그는 아데나워, 폰 브렌타노, 할슈타인과 함께 산책했던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산책’이라기 보다는 ‘행진’이었다. 아데나워는 한 시간에 걸쳐 가파르고 돌로 덮여 있는 산길을 행진하였다. 그를 따라잡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1950년과 1951년에 뷔르겐슈토크호프에서 머물 때의 모습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유럽 권력자들의 여름휴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일을 뒤에 두고 왔지만, 전령과 장관 또는 장군들이 [본에 있는] 집무실에서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위기가 전개되던 1950년 여름에 독일연방 대통령 호이쓰가 독일연방 수상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아들 루드비히와 함께 아데나워를 찾았다. 블랑켄호른은 이 위기가 고조된 시기에 본, 파리, 뷔르겐슈토크를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이때는 독일군의 [유럽방위군] 참여를 준비하고 있었고 또한 쉬망플랜이 논의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단지 커다란 노선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는 본의 사무실에 남아있는 이들이 느끼기에는 너무 지나칠 정도였다. 제3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유럽 하늘을 뒤덮고 있을 무렵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선거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지역에서 칼 아르놀트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블뤼허는 수상이 휴가 중일 때 [자기의] 부수상직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휴가를 떠나기 전에 이미 블뤼허는 운신의 폭을 매우 제한하는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매우 위급한 현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저는 이 시기에 제가 바라던 대로 정부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무차관인 루스트 박사와 고위자문관 오스터만을 중심으로 한 작은 사무실을 뷔르겐슈토크에 설치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추진하는 업무를 귀하께서 저를 대신하여 그곳에서 실행하여 주기바랍니다. 저는 귀하께서 필요한 경우에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저와 상의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상황이 대부분 ‘매우 위급할’ 것이기에, 그러한 조치는 관행이었다. 다만 일상 업무는 부수상이 처리하였다. 여기에 한스 글롭케, 오토 렌츠, 발터 할슈타인이 그를 보좌하였다. 중요해 보이는 모든 사안은 아데나워에게 보고되었다.     


다음 해 여름에는 뷔르겐슈토크를 방문하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수상의 여름휴양소로 초대되는 것이 일종의 특권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의 대표들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화를 밀어붙였다.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부수상 블뤼허와 논의하면서도 결국 모든 일은 그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겼다.     


[쾰른] 시장 시절에 한스 볼프가르텐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즐기던 방식의 휴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은, 아데나워가 몇 주 동안 산에서 산책하고 나서 건강을 많이 회복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짜증스러운 불면에 시달렸다. 그는 원인이 1944년 체포당했던 시기의 흥분 때문으로 여기고 있었다. 두통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두통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제 나이가 들자 젊을 때부터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온 덕을 보게 되었다. 본의 의사인 파울 마르티니 교수가 그의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르티니는 1932년부터 라이니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 내과 정교수로 재직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를 매우 신뢰하여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았다. 검진 결과는 그 연령의 남자를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양호한 것이었다. “그는 아데나우 지방에서 일하는 벌목꾼의 심장을 지녔다.” 이는 본의 기민당(CDU) 시의회 의원이기도 한 마르티니가 가끔 본 시장인 슈마허-헬몬트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몸은 이제 세 가지 약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먼저 약한 기관지와 잘 알려진 통증이 있었다. 본의 온실과 같은 공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가끔 피부 알레르기와 노인 당뇨 증상을 보였다. 신선한 공기에서 많이 움직이고, 자주 남부나 산지로 휴가를 가거나 섭생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늘 주치의의 오래된 불평을 들어야 했다. 아데나워가 독감이나 기관지 천식을 치료하기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칙을 매우 존중하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처방된 많은 양의 약을 규칙적으로 먹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작고 간단한 의료 처방은 뢴도르프의 가정의인 엘라 베버-부흐가 담당하였다. 이 의사는 어느 모로 마르티니 교수의 지시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베버-부흐는 아데나워의 육체적 건강을 지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가 고질적인 병에 걸리면 베버-부흐가 늘 달려왔다. 1953년과 1956년 사이에는 뷜러훼헤의 요양원에 있는 슈트로만 교수가 아데나워를 돌보기도 하였다.     


사실 실력 있는 의사들이 그의 주변에 넉넉히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아주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환자를 다루는 것이었다. 늘 순환기의 문제로 힘들어하던 슈트레세만이나 수십 년 동안 죽고 싶을 만큼 건강이 안 좋았던 비스마르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데나워는 건강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기 한계를 알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였다, 적절한 생활방식을 실천하고, 최대한 많이 움직이고, 정기적으로 휴가를 가는 것을 통하여 활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건강에 관련하여] 힘든 시기를 이겨내야 할 때도 강력한 각성제인 페르비틴이나 레비탈린 같은 약물 사용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신선 세포 치료를 받기 위하여 취리히의 유명한 의사인 니한스 교수를 방문한다는 소문이 자주 났지만 베버-부흐는 이를 단호히 부인하였다.     


어디를 보아도 아데나워는 그의 일생을 비추어 볼 때 유감스러울 정도로 정돈된 삶을 살았다. 과도함과 커다란 감정의 기복이나 숨겨진 짐이 없는 삶을 산 것이다. 쓸데없는 힘을 쓰지 않는 절제는 그에게 제2의 천성이 되었다. 그러나 거의 시계추와 다름없는 규칙적인 삶의 지루함을 달래는 데는 역설적으로 업무의 무게뿐 아니라 내적 긴장에서 나오는 성질이 필요했다.     


그도 가끔은 억눌렀던 열정과 감정과 자기주장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도 대부분 절제되고 측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유머도 있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비꼬는 것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유머만큼이나 두드러진 그의 비관주의를 감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그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치기가 있었다. 집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몰래 놀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휴가 때는 멍청하게 늘어질 때도 있었다. 그를 가까이 한 모든 사람은 그의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고 하였다. 그에게 잘 알려진 모순된 모습이 언급되었다. 곧 그는 전혀 감상적이지 않고 정치적 일상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데 비하여 타인의 특성에 대한 세밀한 감수성이 있으며 때로는 다시 다정해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다가 격노하기도 하고, 극기하면서도 화를 잘 냈다. 때로는 너무 솔직하여 예측할 수 있었다가도 도대체 속을 알 수 없기도 했다. 또한 무덤덤하다가 민감해지고, 이성적이다가도 격한 감정에 움직이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의 생애는 모든 정상적인 시민적 형태를 갖춘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초기, 여전히 고난과 통제가 모든 지역에 넘치던 시절에 그의 삶의 양식은 부유한 시민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처럼 그 당시 쾰른의 진짜 부유한 시민들의 삶의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그러한 평가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물론 그는 안락한 시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집이 화려한 것은 사실이었다. 고급 가구들은 중세 후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장인이 만든 최고의 것이었다. 그리고 오래된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가 누린 유일한 사치였다. 그 그림은 엠마 바이어가 결혼할 때 가져오거나 나중에 구매한 것들로 진품도 있고 위작도 있다. 그 외의 집안 물건들은 비교적 소박하였다. 그의 소박한 침실과 욕실, 그리고 사치스럽지 않은 서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총지배인, 은행가. 부유한 상인들은 이미 1950년과 1960년대에 역사에 족적을 남긴 [아데나워] 수상보다 훨씬 화려하게 살았다.     


아데나워는 [나치의] 제3제국 초기의 어려움을 통하여 과거 막스-부르흐-슈트라쎄에서 누렸던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은 옳지 못한 추세를 따른 것이었다는 사실에 눈이 제대로 뜨게 되었다. 아데나워와 같은 출신 배경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법이다. 아데나워는 작은 것에는 절약했지만 양탄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옷을 사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하였다. 사실 이는 노인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 유행의 옷과 관련된 허영은 나이와 더불어 점차 줄기 마련이다.     


1950년대 독일연방공화국의 사람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의 삶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도 있음을 의미하였다. 그에게 정상적이란, 사오십 년 전의 매우 단정하고 부유한 시민과 같이 외부와 매우 차단된 사생활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가 자신이 정한 틀에 맞추어 살듯이 말이다.     


그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는 양심적으로 수행하는 업무, 조화롭고 우아한 가정생활, 음악적 사색의 소박한 찬미, 평화로운 저녁 시간 보내기, 먹고 마시는 것의 절제였다. 이 모든 것은 현대 생활의 분열만을 아는 이들에게는 마치 천국에 속하는 것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그러한 것들을 우스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신이 개인적 영역에서 몸소 실천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천국에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들과 매우 정성스럽게 다져온 우정도 포함되었다. 브뤼셀에서 볼 일이 있을 때마다 대니 N. 하이네만은 자주 본을 찾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가끔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왔다. 미국에 갈 때마다 아데나워는 그를 만나 루돌프 세르킨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디어 파크에서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모은 괴테의 친필 문서나 초판본이나 가치가 높은 나폴레옹의 문서집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데나워 성격에 좀 더 맞는 사람은 로베르트 페르드멩게스였다.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들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페르드맹게스의 가족들과는 종종 생일잔치 때나 휴가 때 함께 모였다. 그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베를린을 들를 때마다 만난 사람은 프리츠 슈펜라트였다. 그 또한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아데나워와] 함께 했던 몇 안 되는 인물에 속했다.     


그는 새로운 친구를 더 이상 사귀지 않았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이후에 몇 개월 동안 그가 겪은 환멸은, [쾰른] 시장 시절 때만 해도 모든 불신에도 불구하고 지니고 있던 [사람을 대하는] 자연스러움을 모두 소멸시켜 버렸다. 결국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은 그에게서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가족은 남았다. 정치 이외에 가족이야말로 그의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의 직무 생활과 사생활이 서로 섞였다. 특히 성인이 된 딸들은 이제 의전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외국 사절이 본을 국빈 방문하거나 아데나워가 외국을 공식 방문하거나 늘 그러하였다. 외국 방문은 1951년 이후 그가 점차 즐기던 행사였다. 그의 딸 로테가 1954년 결혼하기 전까지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였다. 그 이후에는 딸들이 따로 살았다. 휴가 때도 따로 다녔다.     


국빈 방문 때 딸들이 언어 능력을 발휘하며 의전 행사에 도움을 준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었다. 아데나워의 자녀들과 그 가족들이 보여주는 가정의 포근함과 삶의 편안함이 주는 분위기가 없었다면 이 노인은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을 것이다. 활달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선의의 비판을 할 줄 아는 가까운 친지들의 모임에서 아데나워는 그들의 예절과 겸손을 믿기에 엄격한 수상의 면모를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그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긴장을 풀었던 것이다.    

 

그가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자녀들에게 보낸 비교적 많은 편지에서 이러한 차원에서 전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함없이 정신을 매우 집중하여 절제된 독일어 서체로 쓴 편지에는 그 당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쁜 아버지가 다 자란 자녀들에게 쓸 만한 내용만이 담겨있었다. 개인적 일에 관한 관심, 앞으로 곧 있을 여행이나 어려운 일들 대한 간단한 정보, 날씨에 대한 만족이나 불만에 대한 간단한 언급, 정원의 상태에 대한 약간의 풍자가 담긴 이야기, 그러면서도 그가 직업적으로 다루고 있는 몇 가지 일들에 대한 매우 진지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 3월 25일 [독일연방의회 대회의실의] 각료 좌석에 앉아 근엄한 얼굴로 의원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가운데 얼마 전에 영명축일을 맞이한 장녀 라이 라이너스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에야 네게 축하 인사를 건넨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그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단다. 오늘은 무시무시한 독일연방의회 논의의 마지막 4일째가 되는 날이다. 비교적 장내가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는 좋은 발언 덕분에 네게 편지를 쓸 여유가 생겼구나. … [프랑스에 있는] 방스에서 보낸 시간이 정말 좋았다. 아직도 즐거운 기억이 난다. 그러나 벌써 오래전 일이다. 3월 5일 나는 돌아왔다. 오늘이 25일이다. 지난 20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 너희가 있는 곳의 날씨가 맑고 좋기를 바란다. 휴가를 잘 보내기를 바란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여기에도 봄이 찾아오는 것 같다. 부활절이 되어야 봄이 제대로 도착하게 될 것 같다. 사랑하는 내 딸과 사위 발터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다. 언제나처럼 네 아빠가.”     


적어도 자녀들과의 대화에서는 아데나워가 매우 정상적이고 편안한 늙은 신사가 된다. 독일연방의회의 회의와 토론을 그토록 혐오하는 그가 그러한 처지에 놓인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 딸과 함께 [프랑스] 알프마리팀 주에서 보낸 휴가를 떠올리고 라인탈의 변함없이 늘 비오는 날씨가 걷히기를 바라고, 그의 친지들 모두의 영명축일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가 수상직에 있던 14년을 그토록 유연하게 견디어 낸 것에는, 성장한 자녀들과 변함없는 끈끈한 관계를 이어간 것이 내적인 힘의 비밀이 되었다. 그 자녀들과의 관계와 격려가 그를 지탱해 준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생활방식을 살펴보면 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을 보여주는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곧 그는 매우 구식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독일 시민이었던 것이다. 실내장식과 정원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음악을 즐기는 일과 휴가 습관, 사교모임과 가정생활 – 이 모두는 시민적인 굳건하고, 지적인척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현실 세계의 소란에 놀라울 정도로 흔들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즐기던 유일한 사치는 그림 수집이었다. 그는 쾰른시장 재임 시절부터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는 대로 이런저런 ‘소소한 싼 물건들’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수상으로 재임하던 시절과 그 이후에도 더 많은 물건을 수집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다.     


페르드멩게스는 아데나워에게 미술상인 하인츠 키스터스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아데나워를 대하는 법을 알았다. 아데나워가 선호하는 것은 후기고딕 양식의 그림들이었다. 예를 들어 엘 그레코를 포함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주제는 [성당] 제대화,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과 초상화였다. 키스터스의 말에 따르면 뢴도르프 집 서재의 책상 맞은편에는 트레첸토, 곧 이탈리아 14세기풍의 거장이 그린 황금색 바탕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칼카르 출신의 얀 요에스트가 그린 ‘그리스도의 [죽음의] 탄식’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었다. 이는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림 전면에는 [예수의 어미니] 마리아와 요한 사도가 떠받치고 있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옆구리에 큰 상처가 있는 분의 시신이 보인다. 그 옆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다. 배경으로는 골고타 언덕이 보인다. 그곳에는 3개의 십자가가 서 있는데, 여기에는 중세 후기 그림에 전형적으로 나오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언덕과 그 윤곽, 그리고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그 벽에는 브뤼거 마이스터의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작품도 걸려 있었다.     


아데나워는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을 특히 좋아하였다. 그것은 티치안이 그린 [베니스와 제노바 공국의] 프란체스코 도나 제후의 초상화였다. 모든 면에서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고 올곧은 자세로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고 커다란 눈은 깊은 눈빛을 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티치안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은수자(隱修者)인 예로니모 성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옷을 반쯤 걸치고 삐쩍 마른 성인은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배경으로는 달빛에 빛나는 산등성이 숲이 보였다. 무릎을 꿇고 있는 예로니모 성인 뒤로는 그 유명한 사자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인이 그 사자의 앞발에서 가시를 뽑아 주었고 그 이후 그 사자는 성인 곁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끝으로 라파엘로 계파의 빈첸초 타마니가 그린, 생각에 잠긴 커다란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진 귀족 부인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네 번째 벽에는 아데나워가 사용하는 소파 위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는 요스 반 클레베의 작품이다. 그 옆에는 보헤미아의 거장이 그린 영면하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0세기 중반 독일연방정부 수상이 생각에 잠기고, 가지고 온 서신들을 정리하고, 연설문과 발제문의 초안을 작성하며, 가끔은 의자에 앉아 담요로 무릎을 덮고 쉬면서 그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1층의 방들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 한 그림은 바오로3세 교황의 초상화였다. 아데나워는 그것을 엘 그레코가 그린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 못지않게 감동을 준 그림은 칼카의 요에스트가 그린 잡혀가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 무리 가운데, 이 그림에서만큼 중무장한 병사들의 얼굴에 그토록 비열한 표정을 나타낸 사람은 없었다. 그 그림 한 가운데 계신 예수님 옆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유약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가 있다. 이는 [성경의] 구원사(救援史)를 저절로 말해주는 그림이다!     


한계 상황에 놓이거나 누미노제*를 마주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그러한 그림들이 아데나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무한히 명상할 수 있었다.     


* 누미노제[Numinose, 역자주 – Rudolf Otto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신성한 존재의 작용이나 그러한 식으로 작용하는 신적 존재를 의미]     


그런데 그림들에는 계속 변화가 있었다. 곧 아데나워는 교환을 통하여 그림의 개수를 늘리고자 하였다. 또한 그림을 자주 전시하기도 하고 그중 몇 개는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아데나워와 화상 키스터스 사이의 거래에는 간계와 술책이 난무하였다. 두 사람은 아데나워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 거래를 하였다. 그런데 제삼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아데나워가 휴가를 떠날 때든지 아니면 휴가에서 돌아 올 때 메르스부르크에 있는 키스터스를 찾았다. 이는 키스터스가 좋은 그림을 감추어 두지는 않았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어떤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 마치 외교적 협상을 할 때와 같은 기지를 부리고 집요함을 보였다. 그는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만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의 취향은 거의 건드릴 수 없었다.     


아데나워가 그의 모든 보수적인 성격에도 그러한 예술품에 대하여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이루어낸 시대와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림들은 분명히, 근본적으로 그 시대에 맞지 않는 노인 내면의 가장 깊은 핵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30여 년이 지난 지금 볼 때 아데나워와 같은 인물의 생활방식이 구식으로 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동안 독일의 시민사회에서 이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삶의 중심으로 여겨진 온전한 대가족,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든 종교적 기본자세, 비교적 전통적이고 소박하게 꾸민 사생활 영역, 다른 모든 것에 비하여 우선되는 것으로 여긴 직업 활동, 건강한 생활방식, 최소한의 날카로운 시대 비판, 시대적인 또는 실제적인 생존 위기, 이 모든 것이 1950~1960년대 독일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이었다.      


아데나워가 ‘19세기’라는 표지가 붙은 자기 삶을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 일구어낸 방식을 살펴보면 당시의 사회 현실에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활 리듬이 그 당시에 이미 보수적이고 전통에 사로잡힌 것이라는 주장은 옳다.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사실 정치가로서의 아데나워는 그의 생활방식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늘 매우 근대적이었다. 쾰른에서 시장을 할 때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나 마찬가지였다.     


정치 분야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여전히 광범위한 시민계층에서 통용되던 가치관과 자화상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거리가 있었다. 국내 정치에서 이 신앙심 깊은 가톨릭 신자는 ‘기독교 민주주의 연맹’의 이념을 구체화했다. 사실 그는 개신교와의 동등한 협력 가능성을 확신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그는 다른 사람 대부분과 비교하면 훨씬 일찍부터 20세기 후반에 형성될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 1945년에 근본적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필수불가결한 결론을 이끌어 낸 것이었다. 그는 또한 단독적인 강국의 역할은 모든 유럽 국가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민족국가의 틀을 확실히 벗어나고자 한 그의 의도는, 여전히 전통적이고 1945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많은 시민계층 사람들이 견지하던 확신에 대한 일종의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차근차근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정책의 차원에서 아데나워는 시민계급에 속한 많은 이들에 비해 앞서 나아갔다. 그는 개혁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낡게 된 그러한 개념을 굳이 사용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는 결코 전통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결국 여러 정치적 구상에서 여전히 전통주의적으로 생각했다는 이유로 계속 야당의 공격을 당했다. 그런데 그는 이에 대한 반론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많은 성공한 보수주의자들처럼 아데나워도 특이한 방식으로 전통주의자이면서 쇄신하는 인물이었다. 구식과 신식의 혼재, 곧 ‘구세계’의 시각과 20세기 후반의 정신의 혼재는 매우 모순적이고 정치 생활에서 모든 가능한 부조리를 낳았다. 이 부조리를 그 자신은 거의 부조리로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게 인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세상이 모순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나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데나워의 개인적인 생활방식은 보수적인 요소에 확실히 지배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혼란, 독일연방 수상 재임 초기의 지속적인 불확실성, 195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임기 말까지의 국내외적인 변화의 숨이 막히는 역동성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좋아하는 전통을 따르는 생활방식에서 늘 새로운 자기 확신과 언제나 새로운 힘을 이끄는 일을 제대로 해낼 상황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이 정치에 집착하는 인물의 삶에서 비정치적인 영역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는 그러한 [정치] 영역에 많은 관심을 두어 이른바 게을러질 여유가 없었다. 게으름은 무능력과 더불어 그가 가장 싫어하는 비난이었다. 만약에 공직자로서 그에게 그러한 비난이 제기된다면 말이다! 물론 정치는 그에게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집과 정원, 자연과 예술, 가족과 미사를 그의 삶의 중심에 놓았기에 그는 그 운명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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