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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20. 2023

유럽 정치 지도자 1

1950~1952

 

드골 국빈방문기념카드 ⓒ 독일역사박물관

 

제게도 악몽이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포츠담입니다.”  

   

아데나워는 이제 서방 연합국이 독일을 어떻게 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괴로워하였다. 1950년 4월에 이미 그는 맥클로이와 비밀 대담을 하면서 이에 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 당시 문제가 된 것은 독일의 유럽평의회 가입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기 국가를 위하여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독일의 외교 대표가 없다면 그는 시각장애인처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게 될 노릇이었다!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상황”이 1년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51~1952년이 되어서야 상황이 호전되었다. 1950년 가을 그는 일주일 내내 굳게 잠긴 문 뒤에서 진행된 뉴욕의 외무장관회의에서 실제로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공식적인 발표 내용도 모순된 것이었다.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관한 성명은 매우 애매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즈 장군은 9월 27일 블랑켄호른과 폰 슈베린에게 30,000명 수준의 기동경찰대와 직업 경찰로 이루어진 총 6개 사단의 독일군이 창설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반면에 주정부 차원의 경찰력 증강은 미미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프랑소와-퐁세는 [아데나워] 수상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에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라는 생각에 프랑스 여론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비꼬는 투로 답하면서 독일의 여론도 프랑스의 여론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아직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대체로 맥클로이도 동의한 내용이었다.     

뉴욕의 외무장관회담은 독일의 ‘방위군’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대신에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의 외채를 책임져야 한다는 요구를 하였다. 이 또한 지연작전으로 의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데나워는 1952년에 마셜플랜이 종료되는 것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독일은 새로운 외채가 필요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부채를 먼저 해결해야만 했다. 여기에 더하여 본은 [독일] 제국의 합법적인 정통성을 [독일연방공화국이] 이어받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권유되고 유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는 돈이 필요하였다. 아데나워는 독일연방의회가 서방 연합국에 백지수표를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실망하였다.     

9월 말이 되자 독일연방 수상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대한 구상을 확실히 밀고 나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야당과 개신교 좌파는 아데나워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그를 반대하는 측이 크게 화를 내 보았지만, 사실 그들은 아데나워가 이미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공식적인 항의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야당인 사민당(SPD)은 나중에 ‘죽느니 붉은 것, 곧 공산주의가 차라리 나은 것이다.’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패배주의적인 굴복과 쿠르트 슈마허의 유토피아적인 요청, 곧 독일군을 재건하기에 앞서 먼저 서방 연합군의 선봉대가 엘베강까지 진군해야 한다는 요청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 군대는 [독일의] 오더강이나 [폴란드의] 비스와강 너머에 있는 동부[지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서유럽을 보호할 만큼 강해야 하는 것이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미군 병력이 미국 수송단과 함께 무더기로 후퇴하게 되자 독일 안에 널리 퍼져 있던 비관론이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1951년 초가 되어서야 한국전쟁의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 위급한 시기에 서방 열강은 아데나워가 내민 손을 어느 정도 무시하였다.     

그 사이에 아데나워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곧 영국이 그를 ‘기만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는 서방 연합국 가운데 영국이 [독일의] 재무장에 대하여 적극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슈베린이 1950년 4월에 런던을 방문한 것은 미국과 사전협의가 없었던 일이다. 아데나워의 [독일] 방위계획은 6월 초부터 워싱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고 그는 이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하였다. 애치슨은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였다. 런던이 4월 비밀 대담을 위하여 슈베린 백작을 런던으로 초대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래서 독일연방경찰대 문제에 관한 아데나워의 외교 조치가 영국에 힘입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영국이 그 조치를 구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독일연방경찰대 설립 구상은 1950년 9월 초 뉴욕회담에서 [영국 외무장관] 베빈이 영국의 공식적인 의견으로 제안하였다. 곧 런던은 ‘첫 단계로’ 10만 명의 독일 기동경찰대를 창설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베빈이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보낸 건의서에 보면 독일이 [유럽] 방위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연방 수상 아데나워는 15만 명의 지원병을 창설하는 것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사적 참여] ‘준비’를 위한 것입니다. 그는 야당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정치적 지략도 동원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계획은 독일 측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에서 프랑스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베빈은 독일연방경찰대를 창설하고자 한 영국 측의 계획을 결국포기하였다.     

어느 때부터 아데나워가 이 점에 관하여 영국을 의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폰 슈베린의 생각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폰 슈베린 장군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로버트슨이 폰 슈베린을 추천하였고 영국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국무회의에서 근거로 들었다. 이러한 명시적인 배척은 영국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곧 아데나워가 영국의 역할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는 호이싱거 장군이나 슈파이델 장군과 일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프랑스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 런던도 당초의 의견에서 후퇴하였다는 사실이 바로 드러났다. 영국에서 노동당 정부는 국내 정치적으로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연방의회 선거를 지연시켜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라는 민감한 문제에서 독일이 노동당 좌파와 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베빈은 외무장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가 퇴임하기 전인 1951년 3월부터 이미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독일 국내에서 정치적 타격은 1950년 가을 선거의 참패에 기인한다. 또한 서방 연합국이 독일의 재무장에 대하여 갑자기 침묵을 지키기 시작하였다는 사실과도 직접 연관된다. 아데나워는 이미 선거 전부터 여당으로부터도 집중포화를 맞았다. 폰 슈베린은 하이네만이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방식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1950년 10월에 새로운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모든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 요소는 바로 장 모네의 유럽군 창설 계획과 선전전 차원에서 목표를 잘 선택한 동방 계획이었다. 이는 [독일의] 군사적 참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방위공동체(EDC) 개념의 탄생은 쉬망플랜과 마찬가지의 구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모네는 독일을 통제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바람에서 유럽 차원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10월 중순 전개한 구상은 아데나워의 유명한 제안서에 수용되었다. 곧 필요한 경우에는 유럽군의 틀 안에서라도 함께하겠다는 것이었다. 모네의 수많은 제안서 가운데 하나는 그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독일 문제와 관련하여 군사적 측면의 해결책은 석탄과 철강 문제와 마찬가지의 정신과 방법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럽군의 창설입니다. 그 군대의 지도, 조직, 무장, 자금은 모두 통일적으로 운영되고 초국가적인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핵심에 독일군이 참여하는 일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모네는 이제 엄격한 전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해결책은 쉬망플랜이 조인되고 나서야 효력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통제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곧 독일이 다시 군대와 주권을 조만간 회복하게 되면, 모네가 두려워하는 바대로, 독일은 산업적 우위를 바탕으로 초국가적인 틀에 묶이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모네가 내세우는 것은 유럽통합군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미국이 주로 생각한 것으로 아데나워가 그 당시까지의 생각한 것과도 걸맞은 것이었다. 이러한 유럽연합군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군대로 편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럽 주둔 미군과 함께하며 미국 장성의 지휘를 받는 것이다. 모든 관계자들은 여기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그러한 유럽-미국 연합군에 그 당시 한국군이 미국군에 편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었다. 곧 미국은 장비, 보급, 공중 방어를 담당하고, 독일군에는 참모진이 없고 사단과 군단 차원에서 유럽통합군에 완전히 흡수되기에 미국 장군이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 것이다.     

모네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유럽방위군에는 서유럽군만 포함되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처음부터 통합적인 유럽군의 일부로만 편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독일에서 최초로 징병되는 군인은 [처음부터] 유럽군이다.” 그러나 유럽에 주둔하는 다른 나라의 군대도 이 유럽군 아래 편제되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독일이 원하는 동등한 대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직 차원에서 이는 “인력과 물자의 완전한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한 명의 유럽 국방장관, 한 개의 장관회의, 하나의 공동회의, 하나의 공동 예산을 의미하였다.     

이 제안은 르네 플레방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플레뱅플랜’이라는 제목으로 10월 24일 나온 것은 독일 측이 볼 때는 훨씬 더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프랑스 내각은 참가국들로 구성된 군대가 “유럽군 안에서 최대한 통일을 이루어 편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네의 초안에 있던 ‘같은 군복을 입고’라는 표현도 강조되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프랑스 해군은 유럽군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기하였다.     

블랑켄호른이 당일 기록한 바에 따르면, 아데나워가 속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군사적 무장을 쉬망플랜과 긴밀하게 연계시키고 있다. 둘째, 독일군을 차별하고 있다. 셋째, 계획을 즉각 실시하지 않고 지연시키고 있다. 곧 쉬망플랜에 따라 진행하려는 것이다.” 이 계획이 발표되던 10월 25일 아데나워는 샤움부르크궁에서 클레이 장군을 위한 만찬을 열고 있었다. 여기에는 맥클로이, 헤이즈 장군, 이본 커크패트릭도 참석하였다. 모두의 의견은 같았다. “도저히 논의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었다.     

블랑켄호른은 여기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커크페트릭은 어조만 약간 부드러웠을 뿐이다.” 나중에 가진 별도의 대담에서 커크패트릭은 뉴욕회담에서 논의된 ‘큰 틀의 해결책’만 남았다고 하였다. 곧 서유럽에 53개 사단을 주둔시키되 독일에서는 6개 야전사단과 4개 예비사단이 참여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적절한 압력을 가한다면 사민당(SPD)은, 1914년 전쟁 부채 문제에 동의한 것처럼 결국은 이에도 동의할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베빈은 11월 본을 방문하고자 하였다. 일단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하여 아데나워와 논의하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기꺼이 이를 환영하였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과의 대화에서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발언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할슈타인은 “수상의 큰 우려와 실망을” 쉬망에게 전달할 위임을 받았다.     

독일의 거부를 극복하기 위하여 파리는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모네는 플레방과 쉬망과 함께 맥클로이를 우자레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맥클로이를 설득하고자 한 것이다. 프랑소와 퐁세도 플레뱅플랜이 아데나워의 맘에 들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프랑스의 본심은 다르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프랑스만 탁월한 지연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목적이 분명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10월 말 동유럽 블록은 프라하에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이후에 나온 모든 제안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어서 동독 수상인 그로테볼이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호이쓰에게 보내는 서한이 당도하였고, 결국 11월 3일 소비에트 정부가 서방 열강에 보내는 공지가 당도하였다. 여기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을 점령한 4강의 회의를 즉각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았다. 곧 포츠담 협정으로의 회귀, 독일의 비무장화, 독일 전체를 관할하는 임시 정부 수립, 독일과의 평화조약 수립, 평화조약 체결 후 1년 안에 점령군의 철수였다. 독일 전체를 관할하는 임시 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국민투표로 동의를 얻어서, ‘동등한 숫자의 동독과 서독 대표로 구성된 전독 재정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데나워 주변에는 모든 경고등이 켜졌다. 그가 보기에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보다도 4자회담이 프랑스와 영국의 의견으로 수렴될지도 모를 유혹이었다. 4자회담은 한마디로 독일이 참여하는 서방 방위군 수립의 지연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또한 점령군 규정의 완화를 위한 노력을 어렵게 할 것이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서방 열강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미국조차 믿지 못하였다. 독일에 관한 새로운 협상이, 확실해 보이는 지연작전에 더하여 근본적인 새로운 방향 전환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     

그가 2년 반 후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에른스트 프리드랜더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말한 내용이 이미 이 당시에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에 맞서는 연합국에 대하여 악몽을 꾸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게도 악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포츠담입니다. 서방 열강의 공동 정책이 독일에 미치는 부담은 이미 1945년부터 지속되고 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이 부담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교정책은 언제나 이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맷돌 안에 빠져들어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로베르 쉬망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위협에서 프랑스를 보호하는 데에 차라리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프랑스 외무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프랑스 선단을 방문한 것에 대한 어릴 때의 체험이 거기에 연관된 모든 것과 더불어 아데나워의 기억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차 세계대전에 두 개의 전선을 두고 전쟁을 벌인 것과 1944년에 체결된 프랑스-소비에트 협약은 이러한 고착된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독일 국민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 또한 외교정책에서 커다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곧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벌인 일이다. 쉬망과 모네가 구체화한 프랑스의 새로운 독일 정책이 4자회담의 지루한 과정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그에게는 크게 의심해 볼 일이었다. 독일 역사가 다시 본궤도에 오르면 또 다시 불안한 중간 자리에 서게 되고 그래서 20세기에 이미 두 차례나 겪은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     

하필이면 이 위급한 시기에 미국에서, 잘 알려진 고립주의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이미 오래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점령군이 서독 지역에서 물러나게 되자 프랑스의 독일 정책에 대한 견제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1922년으로 미국이 코블렌츠 주변의 비교적 작은 서독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빈자리가 남긴] 그 영향력은 사실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이 다시 한번 중부 유럽을 떠나버리게 되면 어떤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1950년 말 [아데나워] 수상은 뉴욕 총영사로 있던 크레켈러가 보낸 편지에 대하여 속을 끓이고 있었다. 뼛속까지 친독파였던 미국의 전임 대통령 후버는 12월 30일의 연설에서 유럽에서 미국이 철수하는 것을 언급하였다. 이는 외곽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영향력이 막강한 출판인인 리프만도 오래전부터 마찬가지 주장을 하였다. 후버는 서유럽이 신뢰할만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실망하였다. 그러나 1950년 12월에 그는, 실제로 60개의 서유럽 사단이 독일에 주둔하게 되면 러시아가 선제 공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미군의 철수가 프랑스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가] 소비에트 [연맹]과 호흡을 맞추려는 경향이 급속히 강화될 것이 뻔하였다. 미국의 원정부대가 1950/51년 겨울 한국에서 거의 궤멸할 뻔했다는 사실은 미군의 지원에 대한 신뢰를 더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문에 4강 협상에서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 결론이 대두되었다. 곧 다시 통일된 독일이 중립국이 되는 동시에 점령군이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중부유럽에서 더 이상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거나 최소한의 병력만을 주둔시키는 데 비하여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오더강 뒤에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동독의] 인민경찰은 그 무서운 역할을 시작할 것이었다. 동시에 미군의 철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들도 기세를 올리게 될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독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데나워가 감지한 바로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여론에서는 이미 소비에트 연방이 결국 유럽 대륙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일연방공화국에서도 [독일군의 유럽 방위] 참여를 반대하는 이들은 4강 회담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지연시키는 데에 좋은 핑계를 찾았다.     

[독일의] 중립에 관한 생각에서도 일종의 환상이 만들어졌다. 적지 않은 이들은 강대국들의 대립을 잘 이용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국가 체제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독일은 여러 방면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임 모스크바 주재 대사였던 나돌니와 울리히 노악을 중심으로 한 나우하이머 파벌은 노골적으로 이러한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동부지역, 곧 동유럽의 소비에트 대리자들의 지지는 결코 비밀이 아니라 매우 노골적인 것이었다.     

동유럽의 정권들은 1950년 10월 15일의 형식적인 선거를 치르는 바람에 또 다시 한동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의 [정치적] 억압이 더욱 심해졌기에, 그 어떤 서독 정치가도 제정신이라면 서독의 합법적인 민주주의 대표와 동독의 독재 정권의 대표가 동등한 대표성을 지닌 전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동독의 구호인 ‘하나의 탁자에 모인 독일인들!’은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 정권을 일괄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독과 서독의 대표가 점령군의 위임을 받아 서로 협상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와 연정을 이룬 정당의 많은 의원은 상황에 따라 독일이 중립국이 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 정당들은, 사실 소비에트 연방을 포함한 점령군이 물러나게 되면 동유럽의 공산주의자들과 직접 대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실제로 공산주의의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마치 뱀 앞의 토끼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얼어붙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가끔 그러한 질문이 기민당(CDU) 안에서 매우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1951년 2월 초에 연방위원회를 둘러싼 문제에 관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베를린 [기민당(CDU)] 계파의 로베르트 틸만스는 독일의 시각에서 볼 때 긍정적인 중립국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가 과연 언제까지 당의 의견을 통솔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다양한 차원에서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여기저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업가들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동유럽의 사주를 받은 파업에 대처하여 대기업에서 공장 보호 시설을 설치하라는 정부의 요청에 대하여 여러 회사 대표들은 1951년 여름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태만하게 굴었다. “반년 후에 러시아가 독일을 지배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서 그의 서방 열강에 대한 정책에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서방 열강에 관하여 그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쉬망플랜에 관한 합의, 미군과 영국군 주둔지의 변경 지역으로의 신속한 이동, 답보 상태에 있는 독일의 [유럽 방위군] 참여 문제의 해결, 점령군 규정을 [양국] 협약을 통한 규정으로 대체하기가 있었다. 그는 독일에 관한 동서 회담의 문제에서 최소한 자문이라도 구해 달라고 계속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이 문제에서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본의 뜻에 어긋나는 그 어떤 규정도 소련과 합의하는 것을 협약으로 승인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관련된 그의 요구 사항의 수준을 점차로 높였다. 1951년 10월부터 그는 하나의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이 제안에서 매우 뜨거운 논의의 대상이 된 일반협정 제 7조 3항이 나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그는 계속 4가지 커다란 오류를 지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곧 민족주의, 평화주의, 중립주의, 그리고 미국의 고립주의였다.     

이 상황에서 아데나워에게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가장 문제였다. 이른바 ‘위대한 유럽인’인 아데나워와 쉬망의 관계에 대한 신화로 후세에는 그 당시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이 주로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에 주력한 것이라는 인상이 남게 되었다. 물론 이 원대한 목표를 두 사람이 추구한 것은 맞다. 그러나 외교 현실은 매우 달랐다. 프랑스는 문제를 야기하였고 로베르 쉬망조차도 독일과 프랑스 관계 문제를 동등한 동반자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결국 잘 마무리된 것은 아데나워가 무엇보다도 먼저 미국에 매달렸고, 미국은 다시 계속 망설이는 프랑스 내각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유럽 정책에서 거의 극복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 무엇을 가장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지를 그의 측근이나 내각에 늘 되풀이하여 설명하였다. 1951년 2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가 발언한 것에 관한 오토 렌츠의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독일연방정부 수상은 동유럽에 대한 입장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매우 분명한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도 설명하였다. 그러한 정책으로, 독일이 동서 곧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인상을 절대로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나 영국의 정책이 현재 우리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미국을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보다 한 달 전에 [기업 운영의] 공동결정권 문제와 연관하여 노조의 총파업 경고가 제기되었을 때 아데나워는 원내대표에게 마찬가지의 말을 하였다. 곧 파업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립주의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어찌 되었든 서독이 중립국이 되어 재무장을 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주교들도 마찬가지 입장을 보였다. 아데나워는 2월 초에 헤르만 엘러스가 동석한 자리에서 자기 정책의 기본 노선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한 바가 있었다. 개신교 주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연방공화국이 흔들리는 태도를 보이면 미국에 바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1951년에 아데나워의 모든 신경은 미국의 정책을 향하고 있었다. 미국은 독일연방공화국을 러시아로부터 보호하고 동시에 파리와 런던을 위험한 길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확신하였다. 워싱턴은 유럽을 포기하는 대신 외곽 방어라는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독일 산업 중심지의 파괴까지도 염두에 두고 말이다. 그래서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해도] 얻을 것이 별로 없게 만들고자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와 관련하여 미국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이 매우 명백한 친미 노선을 택할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기회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었다. 불확실성이나 독일의 라팔로 조약*에 대한 충동과 소련에 맞선 안전보장, 또는 서유럽의 제안에 현명하지 못한 대응이 [미국의] 고립주의를 지나치게 강화하게 될 것이었다.  

   

* 라팔로 조약[Rapallo-Gelüste, 역자주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맺은 조약. 이 조약으로 독일과 러시아는 유럽 정치 무대에 복귀하게 되었음]    

 

그러한 근본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여 아데나워는 1950년 11월에 서방 연합국에 좀 더 현실적인 정책 추구를 더욱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벌써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라인란트 점령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가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랜 친구인 대니 N. 하이네만과 접촉하였다. 그는 하이네만이 11월 중순 브뤼셀에서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령을 통하여 5장짜리 문서를 전달하였다. 이는 긴급 요청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다시 한번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을 요약한 것이다.     

“① 이제 9월부터 이어져 온 대서방조약에 가입한 열강의 논의는 최종적으로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독일 국민이 대서방조약에 가입한 열강의 견해가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② 가장 긴급한 사안은 상당한 규모의 미군이 최대한 신속하게 이곳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독일 국민이 유럽에서의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저항 의지를 다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주둔하고 있는 2개 사단은 긴급한 경우 철수할 수 있지만 군단은 철수할 수 없습니다.”     

쿠르트 슈마허가 아데나워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 또 다른 사안은 다음과 같았다. 곧 심각할 정도로 약한 독일의 저항 의지를 촉진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출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독일연방공화국은 지나치게 많은 국방비 지출을 부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점령군 규정의 폐지라는 오래된 문제도 언급되었다. “분명히 이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강력한 발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순전히 정당정책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사민당(SPD)의 시도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하에네만은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12월 초에 아이젠하워 장군을 예방하여 아데나워 서한의 사본을 전달하였다. 아이젠하워는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고 국방장관 마셜에게도 이를 알려한 한다고 말하였다. 12월 중순에 워싱턴의 주요 정부관리들은 아데나워의 편지 사본을 받았다. 그 편지에서 아데나워는 믿을만한 친구에게나 털어 놓을 수 있는 수준으로 상황을 솔직하게 묘사하였다.      

하이네만은 1951년 3월 말 맥클로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아데나워의 정치적인 정신분석을 요약하였다. 아데나워에게는 ‘(좋은 의미에서) 독일인다움’ 이상의 특징이 없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가 아데나워를 방문하게 되면 아데나워가 현재 독일이 처한 정신적 육체적 고난에 대하여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고 하였다. 독일이 1945년 이후 얼마나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는지를 그가 제대로 가늠할 줄 모른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었다. 하이네만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데나워의 강한 독일인다운 기질은 외국에 대한 부족한 지식과 결부됩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에게는 라인강 서쪽에서 독일인들의 선의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때로는 쉽지 않은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지는 전혀 별개로 말입니다.”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용기와 창의성에 대하여 길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자질은 아데나워가 쾰른의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하이네만은 아데나워의 독재자적인 기질도 언급하였다. 그러한 기질로 아데나워는 때로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아데나워가 늘 사랑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이네만은 사람들이 아데나워의 용기와 도덕적 힘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것은 아데나워가 나치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며 보여준 것이다. 그는 그러한 용기와 힘을 개인적으로 겪은 압박에 맞서며 보여주었다.     

그러나 맥클로이는 이미 더 이상의 설득이 필요 없었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아데나워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1952년 5월의 대서방조약 조인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위위원회의 미국 위원들은 서독이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가장 종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50년 가을부터 매우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데나워는 매우 확실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맥클로이는 독일에 아직 민주주의가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미군정청(OMGUS)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결과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맥클로이는 공무원의 권리와 대기업의 해체와 관련된 독일의 내부 개혁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였다. 이때문에 그는 아데나워와 자주 충돌하였다. 이 문제에서 멕클로이는 독일 역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의 전형적인 유형을 따랐다.      

그러나 독일의 재통일과 관련된 민족주의의 위험에 관한 판단에서 아데나워와 맥클로이의 생각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의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의] 서방과의 유대를 방해하기 위하여 이제 민족주의 카드를 사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방과의 유대는 멕클로이의 관점에서 보아도 [독일] 신생 민주주의의 안정과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에서 서독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은, 의도와는 달리 결국 소련이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50/51년 겨울에 그는, [독일의] 재통일 과정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전에 서독의 민주주의가 이미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 정권에서 서방과의 통합이 최대한 진전을 이루어야 했다.      

그래서 맥클로이는 이제 모든 정치력을 동원하여 쉬망플랜에 관한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르지역 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그와 파리 주재 미국대사인 데이비드 브루스와의 협상, 그리고 장 모네와의 협상의 여지는 사실 좁았다. 파리의 간섭으로 그는 이제 독일의 재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점차 플레뱅플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제 그는 아데나워가 미국의 독일 정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곧 독일연방 수상이 점령군 규정의 수정과 궁극적인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을 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독일연방공화국을 서유럽에 편입시키게 된다면 말이다.      

맥클로이가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리인에서 미국 정부에서 아데나워의 전령으로 역할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늘 충돌이 있었다. 그렇지만 1950년과 1952년 사이에 상황이 은밀하게 변했다. 고위위원회의 미국 측 고위위원들이 점차 서방의 결정 과정에서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미국 측에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인사들도 있다. 《뉴욕타임즈》의 외신부장인 사이러스 슐츠버거는 이 당시 아데나워와 맥클로이와 다양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파리에 주재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하였다. 그런 그가 맥클로이가 고위위원회 위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데나워가 매우 영리하고 참을성 있고 단호하며 독재적이고 오만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물론 그는 맥클로이를 잘 구슬렸다. 그런데 이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맥클로이는 스스로 생각하듯 그리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두 차원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맥클로이와 직접 대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맥클로이가 고위위원회 안의 동료를 설득하고 워싱턴을 움직였다. 이와 더불어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와 공식적인 대화도 이어갔다.     

11월 중순 아데나워는 내각이나 독일연방의회의 외무상임위원회와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제안서를 전달하였다. 이 제안서에서 그는 다시 한번 점령군 규정의 개정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독일의 패배주의적 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유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그 누구도 자유를 위하여 희생할 의사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독일과 연합국의 관계에서 지속되는 문제를 언급하였다. 곧 점령군 유지 비용, 독일 산업 해체, 전쟁 범죄로 재판받은 독일군 처리 문제였다.     

방위 문제와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독일군이 연대 규모의 차원에서라도 [유럽군에] 통합되는 것에 찬성한다는 말까지 하였다. 물론 이에는 정치적 고려보다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고려가 앞서야 한다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사 기술적인 근거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5,000~6,000명의 독일 전투 병력이 서유럽 방위군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독일군이 유럽 전체 병력의 20% 이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였다. 이는 약 15만 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서방 연합국의 언론에 아데나워의 진지한 우려를 전달하기 위해서 킹스버리-스미스가 본으로 소환되었다. 아데나워에게 이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의 병력도 다른 모든 [나라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독일군이 총알 밥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또한 연합군 사령부에 독일 대표도 포함되어야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는 원칙적인 요구 사항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견해차가 있다는 의미도 있었다. 멕클로이는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브뤼셀에서 곧 열리는 외무장관 회담에서 커다란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필 지금 처음으로 서방 연합국의 외무장관들 무리에 섞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절차와 관련하여 서방 정부가 적절한 초안을 마련하여 이를 모든 언론에 공개하되, 그 전에 먼저 자신과 비공개적으로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당면한 모든 문제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곧 [독일군의 유럽] 방위 참여, 점령군 규정의 폐지, 부채에 관한 협상에 모두 적용되어야 했다. 아데나워는 [독일군의] 유럽 방어 참여에 관하여 당장 독일연방의회에서 논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그 이유를 분명히 전달하였다. 곧 독일연방의회가 독일군의 참여를 반대할 위험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어차피 거부당할 제안을 독일에 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외무장관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하였다. 일단 서방이 독일 측에 적절한 양보를 하면서 협상을 시작해야만 비로소 독일의 동의를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이를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한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점에서 아데나워의 태도는 명약관화하였다. 곧 독일에 관한 4강 회담이었다.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둘 중의 하나라면 그 답은 자명하였다. 곧 소련의 지배를 받을 것이 예상되는 조속한 재통일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서방 측에 속하여 자유를 누릴 것이냐 하는 선택지에서 “독일의 통일이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차라리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아데나워는 매우 긴 사적인 대화를 통하여 맥클로이에게 자기의 기본 노선을 다시 한번 전달하였다. 곧 볼셰비키주의자들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는 것을 늦추고자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워싱턴, 런던, 파리 사이에서 의견이 오간 결과로 복잡한 과정이 드러났다. 페터스베르크에서 [독일군의 유럽] 방위 참여에 대한 기술적 대담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블랑크, 슈파이델, 호이싱거가 독일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반면에 파리에서는 플레뱅플랜을 바탕으로 한 유럽군의 [창설] 방식을 논의할 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아데나워는 할슈타인을 그 위원회에 파견하였다. 그 대화에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나중에 독일연방공화국은 대표 외교관과 울리히 드미지에르 중령을 파견하였다. 점령군 규정의 일부를 개정하는 안이 연합국 측에서 가시화되고 1951년 3월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데나워가 바랐던 [공식] 조약을 통한 관계의 재정립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를 괴롭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일과 연합국의 협정이 아니라 1951년 3월에 시작된 4강 협상이었다. 어찌 되었든 워싱턴은 시간을 벌려고 하였기에 사전 회담을 여는 것에만 동의하였다. 파리의 마브르로제궁에서 개최되는 이 회담에서는 회담 일정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1951년 6월 22일에 아무런 성과 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외무장관들의 독일 관련 회담의 가능성이 불확실할 때는 [독일군의 유럽] 방위 참여 문제에 관한 논의도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그 당시 파리와 런던에서는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독일 문제에 관하여 근본적인 방향 수정이 추구되고 있을 것이라는 아데나워의 의심은 전적으로 근거가 있던 것이었다. 미국의 확고하고 동시에 전략적으로 탁월한 외교가 소련 측의 강력한 지연작전과 맞물리면서 외무장관 회담 소집을 방해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회담이 매우 나쁜 결론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다시 한번 아데나워는 이제 외교와 내치에서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슈마허와의 대화를 강화하였다. 1951년 1월 말 슈머허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서 수상은 자기 모든 근심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곧 미국에서 고립주의를 지향하는 ‘은밀한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럽에 주둔하는 [미군]에 관한 결정은 1951년의 첫 3개월에 내려질 것이었다. 4자회담은 “확실히 성사될 것입니다. … 이 회담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의 통일, 독일의 중립국화와 비무장화, [점령군의] 철군을 한데 묶어서 제안할 것입니다. … 본인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회담에서 그러한 제안을 한다면 독일 국민과 유럽에 가장 커다란 위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그에게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4자회담에 따라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해서 유럽이 소련의 영향권에 넘어가게 되는 위험을 [독일군의 유럽] 방위 참여 문제에 대한 독일의 뜻을 시의적절하게 표명하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 편지에서 슈마허의 전제 조건을 대부분 수용하였다. 곧 선제 방어, 재정 분야의 위급한 부담을 감내하는 데 필요한 지원, 점령군 규정을 조약을 통한 규정으로 대체하기, 서방의 동방정책에 대한 공동결정에 독일이 참여하기,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군사적 동등권 보장받기와 같은 조건에 동의한 것이다. 이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커다란 약속을 하였다. “우리는 다시 주권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다시 자유롭게 독일의 통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야당 대표는 일주일 후에 답장을 보냈다. 그 또한 매우 상세한 제안서를 전달하였다. 아데나워와는 달리 그는 미국의 철수 위협을 위험한 선전 놀음으로 여겼다. 그리면서 미국이 유럽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태프트 상원의원이 주장하는 고립주의가 문제라는 점은 인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방 연합국이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위한 현실적인 전제 조건을 먼저 마련하고 나서야 구속력 있는 독일의 성명이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야당 대표는 아데나워가 4자회담을 깊이 우려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회담으로 상황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며 앵글로·색슨, 곧 미국과 영국은 결코 독일을 소련에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슈마허의 4자회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곧 “독일 통일의 바탕이 되는 자유선거의 전제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51년 3월 9일 독일연방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합의를 도출하였다.     

슈마허가 자기 입지를 넓히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독일연방 수상과 야당의 이와 같은 건설적인 의견 교환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기민당(CDU) 지도부는 이제 처음으로 아데나워가 슈마허를 좋게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슈마허 박사는 이제 매우 특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최선을 바라는 것이겠지만 외교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종종 국내 정치에 대한 고려와 권력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2월 말 아데나워가 슈마허와 나눈 대화에서 동방 정책에 대한 기본 노선에서 근본적인 합의를 보았다. 나중에 아데나워는 오토 렌츠에게 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렌츠는 “슈마허가 4자회담에서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확신했다.     

4자회담에서 결론이 났다면 아데나워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을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확실하지는 않은 언급만이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그가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1951년 1월 초에 그가 맥클로이와 나눈 대화를 보면 두 독일, 곧 동동과 서독의 체제를 당분간 유지하면서 이와 관련된 ‘독일위원회’를 수립하고 모든 점령군의 철수를 전제로 [독일의] 완전한 비무장화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정도로 자포자기적인 심정을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아데나워의 기본 노선은 확고했다. 곧 서방과의 통합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고 그 어떤 동서 [진영의] 대화도 그를 빼놓고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화가 지연되는 것에 관해서는 서방 연합국들도 독일연방공화국 내부에서 감지되는 요소를 지적할 수 있었다. 1951년 5월 5일 니더작센 지방선거 결과 극우 정당이 다시 한번 힘을 받게 된 것이었다. 바로 사회주의제국당(SRP)이었다. 니더작센에서 사회주의제국당은 무려 11%의 득표율을 달성하였다. 이런 결과로 커다란 신나치주의의 물결이 일게 될 것을 누구든지 두려워할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를 수년 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하필이면 가장 상황이 안 좋을 때 일어난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즉각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기 정책에 이로운 것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잘못을 정적에게 넘겨버리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니더작센 선거가 끝나고 3일이 지나자 그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하노버에 있는 사민당(SPD) 주정부가 이러한 사태 전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이야기 하였다. 사민당(SPD) 주정부가 소수당도 기회를 얻도록 하는 선거법을 제정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사민당(SPD) 정부가 경찰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 민주 정당들의 선거 행사를 보호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게다가 헌법은 사회주의제국당(SRP)이 명백히 반민주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음에도 이러한 정당에 대한 모든 제한 조치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사민당(SPD)도 독일 민족주의 부활에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이후에 아데나워는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예를 들자면 어니스트 베빈의 후임인 허버트 모리슨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도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다.     

다른 서방 연합국의 고위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리슨 또한 자신과 쿠르트 슈마허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노력하는 독일연방 수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노동당 우파에 속하는 이 영국 외무장관에게 [독일의] 야당 당수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잠재적인 민족주의를 사민당(SPD)에 포섭하고자 하는 슈마허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민족주의가 – 특히 그가 보여주는 명시적인 민족주의가 – 작게 시작되어도 점차 극단에 이르게 되고 결국은 극우적인 민족주의 정당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가 이때와 다른 기회에 슈마허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확신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찌 되었든 그는 슈머허를 비난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정치가는 자신이 늘 제기하는 논리를 정당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능력이 있는데 아데나워는 이에 달인이었다.      

분명히 아데나워도 극우주의는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근본적으로 그릇된 독일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그는 잘 알고 있는 민간요법을 활용할 생각도 하였다. 곧 경찰, 법적으로 보장된 억압, 위협, 정부 선전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보여줄 때 그들을 민주주의로 이끌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아데나워는 모리슨에게 자기 확신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는 그가 그 전이나 이후에도 자주 언급한 것이었다. “[독일] 연방, 연방정부는 아무런 힘도 명성도 없습니다. … ” “이는 비결정체로 외부의 통치를 받습니다. … 우리에게는 참다운 국가 주권의 표징이 없습니다. 젊은이들 그리고 독일인들은 그러한 표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방의 권위가 없다는 탄식에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의 통치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을 괴롭혀온 것은 “[독일 연방] 주들의 미친 짓들”이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생 주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이었다. 아데나워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가 마치 “졸부(猝富)”와 같다고 비난하는 말을 바로 모리슨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대화가 놀라운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점령군 규정의 상당 부분이 정리된다면 앞으로 모든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아데나워는 말을 이어갔다. 곧 그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 위험해 보이는 생각을 언급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최소한 당분간은 그가 한 말을 누설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식으로 다짐받고 어느 정도 운을 띄운 다음에 아데나워는 모리슨을 떠보고자 하였다. 곧 영국이 정치적 무게를 주[정부]에서 연방[정부]로 옮길 의향은 없는지 물어본 것이다.     

물론 아데나워는 점령군이 자기 권리에 따라 기본법, 곧 헌법의 개정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는 독일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고위위원회에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위위원회가 자신이 지닌 권한을 3~5년 정도 독일연방공화국에 넘겨줄 수 있는 일 아닌가? 물론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3~5년 정도가 지나면 유럽과 세계가 어느 정도 안정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가능하고 또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연방[정부]는 취약한 독일을 참다운 국가로 보이도록 할 대외적으로 힘을 얻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모리슨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고 [아데나워의] 제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이 이른 시기에 이미 자기 정치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어려움에는 당연히 야당인 사민당(SPD)이 포함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본법에 있는 ‘연방주의’도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연방경찰과 주[정부]의 기동경찰에 관한 긴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극우주의에 맞서 싸우는 일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상이 헌법을 어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매우 불충분한 기본법에 대한 그의 존중심은 그리 큰 것이 아니어서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점령군의 권한을 이용하여 그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혼란이 있는 경우 그는 나중에도 늘 ‘국가 우선주의’를 따랐다. 누군가 그를 기본법을 부차적인 것을 여겼다고 비난하면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그는 기본법을 직접 건드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다만 국가 우선주의를 위하여 점령군의 권한을 이용하여 기본법을 우회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점에서도, 모리슨과 나눈 이 대화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이 대화는 유럽의 국가체계를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그 당시 아데나워가 생각한 것으로 아데나워의 초기 유럽 정치에서 프랑스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데나워는 비스마르크와 별다르지 않은 차원에서 유럽 지도를 늘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평생 관찰한 국제 관계에서 뭔가 배웠다면 그것은 바로 유럽의 정치적 지형이었다.     

신임 영국 외무장관은 이 기회에 접하게 된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에 관한 파노라마식의 설명에 대하여 경의를 표했다. 아데나워는 외국의 고위 인사와 대화를 나누게 될 경우에 그러한 식의 개괄적인 조망을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면 그 인사는 전에 미처 몰랐어도 나이 든 지혜로운 고위 정치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 고위 정치가는 1880년대부터 유럽 권력의 부침을 주의 깊게 관찰해왔고 일상적인 정치를 그러한 포괄적인 전망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리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함께 일했던 윈스턴 처칠의 말을 언급하였다. 곧 아데나워가 처칠에게 말하기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으로 19세기 유럽의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붙였다. “또한 독일도 그렇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유럽에서는 두 차례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곧 1918/19년 겨울과 최근인 1944/45년 겨울에 그러한 일이 생겼다고 하였다. 대륙의 민주주의, 곧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삼국은 소련의 압력을 오래 버텨낼 재간이 없다고도 하였다. 영국이 유럽의 구조를 새로이 공고화하고 강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도 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영국 외교의 고유한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이 유럽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저 영국 외무장관에게 영국이 두 개의 다리, 곧 영연방과 유럽을 지지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데에 만족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와 관련하여 모리슨에게서 영국인들의 정치·외교적 심리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하느님이 영국을 섬으로 창조한 바람에 영국인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인들에게 의회는 신성한 권리를 지닌 기구이기에 초국가적인 조직에 이를 복속시키는 것은 금기라고도 하였다. ‘시행착오’, 실용적 협력, 점진적인 진화에 대한 믿음, 이러한 것이 영국의 유럽[대륙]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라고 하였다. 1951년 처칠과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독일의] 기민당(CDU)과 [영국의] 보수당이라는 양대 정당은 이 중요한 점에서 실제로 의견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는, 독일연방 수상으로서 영국 외무장관과 나눈 이 최초의 포괄적인 시각에서 일단 잠정적으로 확립된 영국의 유럽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명히 러시아의 위험이었다. 여기에서도 아데나워는 역사적인 파노라마식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는 모리슨에게 약간 겁을 주며 프로이센의 왕가와 러시아 차르 사이의 유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국군대와 붉은군대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언급하였다. “라인란트가 프랑스군에 점령되던 시절에 베를린의 러시아 대사관저에서는 붉은 혁명 기념일에 정례적으로 특별히 입국한 붉은군대의 수장들과 독일군의 수장들이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아데나워가 왜 이런 이야기를 모두 한 것일까? 그는 모리슨에게 러시아가 오래전부터 독일을 자기편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독일의 산업적 잠재력, 인력, 그리고 모리슨이 스스로 말한 대로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아데나워는 이제 한국전쟁의 상황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전쟁이 러시아에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자기 목적에 이르고자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은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성공한다면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영향력이 단시일 안에 강력해지고, 이에 따라 서유럽에도 영향이 미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생각한 대로 [독일 내부의] 제5열의 위험에 맞서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는 없었다. 곧 독일을 서유럽에 통합하고 이러한 통합의 일환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1951년 아데나워가 외국인이나 독일인 모두에게 전하고자 하던 메시지였다. 그가 [동독의] 인민경찰의 [서독에 대한] 침공이 임박했고 소련의 대규모 침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1950년에 비하여, 이제는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서둘러야 할 동기가 크게 바뀌었다. 사실 아데나워는 기본적인 생각은 여전히 견지하고 있었다. 곧 독재적인 권력정치는 오로지 자유 민주주의의 군사력을 통해서만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여기에 순수한 정치적 동기가 더해졌다. 그는 외신기자들과 자주 가진 차담에서 이 동기를 설명하였다.      

“대서양 군대에 독일의 12개 사단이 참여하게 되고 서독에 그와 같은 규모의 미국, 영국, 프랑스 사단이 주둔하게 된다면”,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한 것이다. 단순히 25만 명 규모의 독일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방해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51년 6월 22일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시기가 일단은 지나갔다. 우리는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의 외무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4자회담]을 성사시키고자 끝까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4자회담은 좌절되었다. 그 이유는 모스크바가 미군 주둔기지와 북대서양방위조양기구(NATO) 문제를 무조건 논의 안건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재직한 14년 가운데 이때만큼이나 그의 신경이 곤두선 적이 별로 없었다. 그의 서방정책의 부진이 내부적으로 연정 정당들 사이의 갈등과 계속 저조한 지지율과 더불어 이어졌다. 여전히 차관 임명에 관하여 자신이 아직 어려운 상황에 대처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던 오토 렌츠에게 기가 막히게 정곡을 찌르는 답이 돌아왔다. “이 어려운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만한 그릇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나도 마찬가지라네.”     

그 당시에 아데나워에게 외교가 더 급한 일인지 아니면 내치가 더 급한 일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때까지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6월 초에 – 마브르로제궁에서 개최되는 사전 회의가 아직 진행되던 때 – 연정에 참여한 정당인 ‘녹색전선’(Grüne Front)의 대변인은 내각에 경고장을 던졌다. 곧 농업 분야에서 일정한 조세감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기 당은 거래역세의 인상에 반대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라면 더 이상 합리적인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차라리 사민당(SPD)이 국정을 운영하도록 맡기거나 국가 통치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내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녹색전선’의 의원들은 물에 젖은 강아지 모양으로 물러났다. 이 아데나워의 분노는 계산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후에 아데나워는 흔히 하듯이 렌츠에게 내각에 규율이 없다고 탄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국정을 이끌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탄식은 4자회담의 위협이 더 이상 심각해지지 않자 잦아들었다. 이제 아데나워는 [독일의 유럽] 방위에 참여와 서방 열강과의 관계 수립을 마침내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외국에 대하여 자기확신을 가지고 대하는 것과 더불어 국내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장관들과 기자들에게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였다. 내부적으로 분열된 독일연방공화국은 더 이상 연방을 이룰만한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독일이 다시 서방 국가들의 공동체에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하는 일에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될수록 외교가 우선 과제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유럽     

아데나워가 1950년 가을부터 1951년 가을 사이에 많은 타격을 입고 짜증 나는 일을 힘들게 이겨 나가는 가운데 그는 외교적으로 한 가지 구체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바로 1951년 4월 18일 파리에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설립에 함께한 일이다. 그는 그 당시 이미 이를 “유럽연맹이라는 건물의 중요한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자화자찬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역사가 흐르고 나서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조약작성에 관한 끈질긴 협상 과정과 조약 서명 과정에서도 아데나워가 어떤 환상을 좇으면서 독일의 핵심 사업을 외국 경쟁 기업에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야당인 사민당(SPD)은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광업연합계약’이 비준되고 나자 슈마허는 점령군 규정이 앞으로 50년 더 유지될 것이라고 비꼬듯이 말했다. 프랑스의 “독일 [석탄] 사용권이” 이 조약을 통하여 보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동유럽권의 선전은 더욱 강렬해졌고 이에 따라 독일연방의회 안의 스탈린의 ‘앵무새들’의 논조도 거칠어졌다. 그리고 경제계에서도 장 모네의 계획을 다분히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사태를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각이 잘 나타난 것은 《도이체 차이퉁 운트 비르트샤프스 차이퉁》에 나온 다음과 같은 논설이었다. “독일은 1세기에 걸친 성실한 노력과 현명한 조직으로 중공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키웠다. 평화에 대한 사랑과 유럽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 이제 다시 독일은 이러한 장점을 작은 부분만 남기고 몽땅 포기하고 있다. 이 남은 것마저도 고위위원회가 처분권을 쥐고 있다. 이 핵심 과제를 관철하기 위하여 모네는 다음과 같은 구호로 매우 영리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미국은 배후에서 철저히 공리공론에 빠지게 하고, 독일은 앞에서 국법적인 유럽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하고, 무대 중심에서는 프랑스가 카르텔 정책의 관행을 추구한다. 모네가 성공하여, 미국이 보는 앞에서 엄청난 규모의 하이퍼카르텔울 카르텔 금지의 깃발 아래 허용하게 되면, 이는 국제 카르텔 역사서에 프랑스 협상 기술의 걸작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우려와 평가가 언론계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산업계는 그의 생각에 공식적으로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러나 이는 그 어떤 유럽 열광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실 이와 다른 방식으로는 많은 독소조항이 담긴 루르규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기업, 관련 산업협회, 노조는 모든 차원에서 압력을 행사하여 예상되는 손해를 최소화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기업 운영] 공동결정권에 관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다시 한번 자민당(FDP)과 기민당(CDU)의 기업가 파벌에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페르드멩게스와 헨레는 기업계의 친구들이 독일연방 수상의 기본 노선을 따르도록 설득작업을 벌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수상에게도 그와 협상 대표인 발터 할슈타인이 고수해야 할 처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원래 아데나워는 광업연합을 일단 프랑스와 독일이 단독으로 수립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협상이 진행되면서 그는 베네룩스 삼국과 이탈리아가 여기에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였다. 이 국가들은 장관위원회의 권한 강화, 의원회의, 재판소의 수립을 요청하였다. 아는 고위원원회의 막강한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그 위원회의 중심적 역할을 장 모네가 끈질기게 해내고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쉬망플랜의 협상 과정에서 많은 요구 조건을 내세우게 되자, 아데나워도 이러한 구상의 문제점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장 모네는 조약서 작성 작업을 독일의 [유럽군] 참여 문제와 점령군 규정의 폐기 문제에 진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완료하고 싶어 했다. 1950년 가을에 접어들자 광업연합의 효력이 발휘되고 나면 루르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실제로 완전히 상실하게 될지가 매우 불투명해 졌다. 아데나워는 최선을 다하여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또 다른 요구가 대두되었다. 마리는 독일석탄수출협회의 해체를 긴급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공동 광업 시장에서 독일의 지위를 약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위위원회의 미국 고위위원들의 측면에서 볼 때는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반트러스트법의 제정을 밀어붙일 마지막 기회였다. 이러한 이유로 맥클로이가 조약협상에 모든 노력을 기울리게 된 것이다. 그가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였기에 협상이 결론에 이른 다음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비꼬듯이 물었다. 그가 평생 쉬망플랜을 다시 수립하려고나 할까? 그 사이에 멕클로이는 이 [아데나워라는] 노인에게 응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곧 그가 독일에서 고위위원으로 다시 한번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그 협상을 하기 싫다고 한 것이다.     

파리에서 장관회의가 마무리되기 직전에 모네는 아데나워를 찾아와서 프랑스와 독일이 광업연합기구에서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본에서는 투표권 분배를 사실 회원국들의 석탄과 철강 분담금에 결부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놀라울 정도로 느긋하게 모네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 시작부터 독일이 강력한 지분을 차지하는 통합체계를 파리가 승인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골의 측근 중에도 최측근이며 몇 년 후에 아데나워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미셀 드브레가 ‘프랑스 의회’에서 협정 조인에 관한 논쟁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주장을 내세우며 장 모네의 작업에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허상에 불과하다. 이는 인형극과 같은 것으로 그 배후에는 가장 강력하고 단단히 마음먹은 자들이 숨어서 그들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발터 할슈타인도 드골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의심스러웠다. 드골은 자신의 《자서전》 제1권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가 원하는 유럽의 틀 안에서는 그의 나라가 [곧 독일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히틀러의 분노와 패배로 상실했던 그 위상과 동등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러고 나면 독일의 경제가 강화될 것이고 결국 독일이 강력한 세력이 되어 국경과 통일에 관한 문제에서, 그가 [할슈타인이] 외무부 차관으로서 그의 이름이 붙은 원칙에 [곧 할슈타인원칙*에]따라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할슈타인은 이 첫 협상에서 모네의 편에 선 강력한 연방주의자였다. 나중에 그는 유럽 문제에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던 아데나워보다 더 강력하게 노력을 기울여 독일연방 수상이 실질적인 초국가적 유럽 기구의 설립과 강화에 힘쓰도록 하였다.   

  

* 할슈타인 원칙[Hallstein-Doktrin, 역자주 –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나라와 국교 단절을 주장한 원칙]     

아데나워가 속으로 연방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는 그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라도 목적이 불분명한 것에 대해서는 커다란 고민을 하지 않는 좋은 성격을 타고났다. 그러나 목적에 관한 갈등은 전략적 타협을 이끄는 그의 끈질긴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동시에 독일의 협상 여력의 다시 확보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유럽연맹의 수립, [독일의] 서방 세계로의 통합, [독일의] 통일을 추구한 것이다. 휴즈 게이스켈은 타고난 정치가의 이러한 필수 불가결한 재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에둘러 설명하였다. “두 마리의 형편없는 말을 동시에 탈 수 없는 사람은 이 한심한 서커스에서 일할 수 없는 법이다.” 아데나워를 철저히 분석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원칙적이고 마키아벨리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국제세계와 내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앞에서 보여준 본능적인 생존 기술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유럽 건설은 무엇보다도 독일 문제의 제대로 된 해결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장 모네와 다른 ‘유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 전부터 유럽 문제의 해결은 세부적인 내용과는 무관하게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일에도 이익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는 유럽 차원의 근본 노선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가 마음에 품고 자랐고 평생 간직한 확신을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유럽 민족들은, 사회학이 상대화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있어 보이는 성격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생물학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사회심리학적으로 규정한 상투적인 요소도 고려되었다. 그는 독일인이 근본적으로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지만, 20세기에 무시무시하게 진행된 역사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취약한 사람이라고 자주 강조하였다. 그의 성격으로는 드문 솔직함으로 프랑스인들도 생물학적으로는 취약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제4공화국의 심각한 불안정이 부분적으로는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의 국민성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영국의 외무장관인 허버트 모리슨이 들은 바와 마찬가지로 “매우 강한 끈기를 지닌” 이들이라는 평가를 했다. 그러나 그의 어법으로 이 평가는 사실 [영국의] 둔함, 근대화의 부진, 외교적 경제적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완곡하게 비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주 하던 대로 작심하고 비난하는 기회가 오면, 영국을 자기가 파산했다는 사실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는 가난한 기사령(騎士領)의 보유자로 비유하곤 하였다.     

이렇게 그는 유럽의 민족성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민족들의 덕성, 약점, 그릇된 태도가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매우 느리게 일어난다고 믿었다. 어찌 되었든 그는 개별 민족들의 고유성이 통일 유럽 안에서 해체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족들이 각자의 고유성을 내세우는 형태 이외의 유럽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개별] 국가라는 것도 그에게는 결코 과거로 치부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의 수많은 연설에서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주장한 내용을 찾아볼 수는 있다. 정확히 말해서 지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이 거대한 강대국에 맞서고 [유럽 국가들이] 서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를 확신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편협한 민족주의와 선을 그으며 흔히 표명한 정도로 민족 국가를 절대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국가는 하나의 민족의 정치적 형태로서 분명히 앞으로도 필수 불가결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며, 우상화되지만 않는다면 고유한 위상을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를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유럽의 민족국가들 안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최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유럽은 민족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국가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도 먼저 자기 국가의 시민들에게 그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모든 정부 수반은 무엇보다도 자기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니 말이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아직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주권이 제약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문제를 이미 1950년대 초반에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유럽연맹으로 나가는 용감한 첫 발걸음을 내디딜 의사가 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안에서도 그는 눈높이, 곧 상식의 원칙을 존중하고 건전한 인간 이성의 중용을 지키는 [원칙을] 선호하였다. 민족국가적인 유럽을 넘어서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혁명적인 방법으로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민족 국가도 오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아데나워의 유럽 [통합] 구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가 1950년대에 지녔던 역사관이 얼마나 다양했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71년에 제정되었던 과거 제국헌법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이었는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헌법에 관하여 일부는 학교 교과서를 통하여 배웠다. 그리고 또한 부분적, 독일 지역의 여러 국가가 비록 단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활력 있고 추진력이 있는 독일제국으로 변한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바이에른이 평화 시기, 곧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제국이 연방국의 성격을 가진 것임을 무시하고 자국의 군대 통수권을 바이에른 왕의 지휘 아래 두었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다민족국가로 수십 년간 지속되지 않았던가? 이 제국은 여러 왕과 독일 관료들, 그리고 독일과 헝가리 봉건귀족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 모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유럽에서 초국가적인 광업연합[조약]이나 유럽군의 창설과 같은 흔치 않은 실험을 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상황의 힘과 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가의 창의력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는 그 당시 지배적이고 타성에 젖은 헌법적 사고방식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가 늘 되풀이하여 유럽이라는 분야에서 엉뚱한 실험을 즐기는 경향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독일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주된 이유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멀리 내다보는 역사적 시각을 지닌 노회한 정치가라는 사실이 반영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럽[통합]구상을 지속적으로 선전하면서 그는 단순히 구체적인 통합계획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도 중요하지만, 독일도 외교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광업연합[조약]에 관한 국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독일] 국민에게 새로운 이념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이념은 유럽 차원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광업연합[조약]에 관하여 그 자신은 거의 환상을 품지 않았다. 당연히 그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통제 수단이었다. 그러나 비록 이 조약과 연결된 유럽 차원의 희망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규정이 수용되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루르지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내각 또한 독일의 철강산업을 묶어두지 못했다면 본질적으로 더 위험한 사안인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 문제에서 양보할 준비가 안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문제의 전개는 독일과 프랑스의 근본적인 화해에 달린 것이었다. 그 화해는 사실 1952년 초만 하더라도 수립되지 못하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아데나워의 유럽[통합]정책 초기 단계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아데나워는 오로지 프랑스에만 관심을 두거나 ‘작은 유럽을 지향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서유럽 발전에서 영국의 중요성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의] 노동당에 대하여 그는 전혀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보수당에 희망을 두고 있었다. 1951년 10월 처칠은 다시 한번 [수상이 되어] 다우닝가 10번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그가 [유럽]통합 과정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보여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프랑스는 1951년 내내 매우 비타협적으로 나왔다. 런던이 그 당시 막바지에라도 유럽통합과정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의사를 보였다면, 그의 1919년부터 1926년의 쾰른시절을 기억하여 그의 유럽[통합] 정책의 모든 노력을 영국에 집중하는 일이 절대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에서 그가 1945년 [영국이 그를 쾰른시장 자리에서] 쫓아낸 일을 생각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영국 측의 소극적 태도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은 1953년 초 [아데나워가] 런던을 두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솔직히 털어놓았다. 처칠이 아데나워에게 분명히 털어놓은 바로는 영국이 세 가지 원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영연방, 그 유명한 ‘특별한 관계’를 맺은 미국, ‘통일유럽’의 교집합을 이룬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단순히 유럽의 일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유럽이라는 문제에서 영국 말고도 상대할 나라가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있었다. 독일연방 수상은 독일 외교정책이 단순히 워싱턴, 런던, 파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최단기간 안에 배운 것이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유럽 통일 작업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아데나워의 차별화된 평가가 그 당시에는 막연한 인상만을 주었다. 그에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서유럽 철강산업의 맥락에서 수십 년 전 전부터 중요한 나라였다. 전임 쾰른시장이 뛰어난 전문 분야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독일 서부의 이웃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이다. 이에 비하여 네덜란드와는 개인적 친분이 별로 없었다. 네덜란드의 유럽 정책보다는 17세기의 화가들이 아데나워의 마음에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네덜란드는] 무역 정책적 계산, 프랑스와 독일과 같은 강대국의 주도권에 대한 거부, 영국의 간섭에 대한 호의, 커다란 [유럽] 통일에 대한 우려가 혼재하는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특히 네덜란드 사람들의 독일에 대한 분노심이, 1940년부터 1944년에 벌어진 일로 공개적으로든 은연중에든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에 관한 협상만큼이나 서유럽의 조화를 위한 그의 조종 능력을 발휘하기에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이 공동체는 1951년 4월 중순 6개 회원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수립되었다.     

독일연방 수상은 지금까지 모든 공식 해외순방을 피해 왔다. 점령군 규정을 약간 개정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정기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51년 3월 15일 [독일연방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쓰는 독일연방 수상에게 외무장관 임명장을 수여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특별한 의전 관련 문제없이 그 중요성이 점차 증대되는 다자간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외교 협상의 자리에 다시 들어서는 길이 열렸고 아데나워는 이 기회를 맞이하여 그가 기꺼이 처음 방문할 도시로 택한 것이 바로 파리였다.     

그때까지 파리를 방문한 독일연방 수상은 늘 심각한 문제를 들고 갔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 수상으로 임명된 초기에 첫 활동으로 파리를 방문하였다. 그가 방문한 모습은 프랑스의 그 누구도 좋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꽉 끼는 제복을 입고, 가슴을 한껏 내밀고, 어깨를 쫙 펴고, 힘을 자랑하며” 그는 1871년 3월 1일 블로뉴숲의 반파된 롱샴 경마장에 마련된 연단에 서서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연대가 행진하는 모습을 사열하였다. 이는 아데나워가 태어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도 80년 후 아데나워가 방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가 있을 것을 우려하였다. 뵈스트 백작은 푸른 블라우스를 입은 한 청년에 비스마르크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소리 지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너는 악명 높은 악당이다.” 이에 대하여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자를 체포해야 마땅하지만 그 용기만은 가상하다.” 파리를 향하여 말을 타고 가는 동안 그를 무섭게 노려보는 길가의 사람에게 비스마르크는 자기 담배에 불을 붙여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말도 있다.     

독일연방 수상이 다시 파리를 방문하기까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시 한번 그는 프랑스가 마뜩잖게 여기는 하인리히 브뤼닝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가 방문했을 때의 유럽 분위기도 극적이고 즐겁지 않았다. 국제 은행제도는 흔들리고 있었고 독일은 프랑스에 외채를 요청해야 할 상황에 있었다, 브뤼닝이 파리에 도착하자 ‘프랑스의 행동’이라는 단체가 항의 집회로 그를 맞이하였다.     

끝으로 히틀러의 비밀 방문도 있었다! [1940년 6월 22일 파리 동북쪽] 콩피에뉴에 있던 포흐 원수의 철도객차 안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 날 총통이자 제국 수상이던 히틀러는 1940년 6월 23일 [파리 북동부에 있는] 르부르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알베르트 슈페르 장군과 조각가인 아르노 브레커의 수행을 받으며 아직 사람이 없는 파리 근교로 마차를 타고 갔다. 슈파이델 대령이 그랑드 오페라 앞에서 총통을 영접하고 관광 안내를 하였다. 개선문, 트로카데로, 에펠탑, 앵발리데, 사크레쾨를 둘러보았다. 몽마르트르에서는 비스마르크의 진입 때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한 시장 상인이 히틀러를 알아보고는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나 본 듯이 소리쳤다.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야!” 그러고 나서는 평상시와 같은 실망이 이어졌다. 자동차로 파리를 한 바퀴 돌며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는 데에 거의 3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다. 그러나 파리는 폰 콜티츠 장군의 이성적 판단 덕분에 모든 것이 무사하였다. 그리고 히틀러가 파리를 방문한 지 11년 후에 아데나워가 오를리 공항에 착륙한 것이다. 아데나워의 이 첫 방문 이후에는 독일연방 수상의 파리 방문이 매우 드물게 그것도 프랑스가 붕괴하거나 위기에 빠졌을 때만 이루어지던 관행이 사라지게 되었다.      

[늘] 역사를 고려하여 생각하는 아데나워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유감스러운 과거사를 생각해 보면, 프랑스가 75세의 독일연방 수상을 영접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를 환대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아데나워가 진정한 화해의 정치가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음에도 그러하였다. 장 모네 혼자만 공항에서 그를 영접하였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러한 의도적인 불친절에 대해서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를 차분한 어조로 언급하였다. “오를리 공항에서의 영접은 전혀 의전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전후에 파리를 방문한 독일연방 정부의 최고위 인사였다.”     

그러나 예절 문제에 대단히 까다로운 아데나워도 이때는 그러한 도발에 대하여 차분히 넘어갔다. 결국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곧 서유럽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은 마땅했다. 그 이전에 마지막으로 파리를 방문한 독일연방 수상이 아돌프 히틀러였기에 말이다.     

게다가 아데나워는,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자기 기분을 상하게 만들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75살이 되어 독일연방 수상으로 취임해서야 비로소 파리를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이다. 1919년 6월 베르사유를 잠깐 방문한 일은 파리를 본 것으로 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 당시 잠깐 머물렀었고 자녀들을 위하여 풍선 몇 개를 샀지만 사실 파리라는 도시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이번 방문의] 많은 시간을 관광에 할애하고는 감출 수 없는 경탄으로 모든 새로운 것들을 내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예술사가인 빌헬름 하우젠슈타인을 파리 총영사로 발령하기로 생각했던 것을 스스로 장하게 여겼다. 아데나워는 그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며 노트르담 대성당, 생트샤펠 성당,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샤르트르 대성당을 들러볼 수 있었다. 프랑소와-퐁세는 손님 안내 역할을 하며 아데나워를 볼로뉴 공원으로 안내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함께 걷고, 아데나워를 개선문의 승강기로 안내하였다.     

프랑스와-퐁세와 블랑켄호른은 아데나워를 고급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블랑켄호른이 들려준 대로 아데나워가 루카스 카르통 식당에 처음 들어 때의 일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그 식당에 들어서자 퐁세가 종업원에게 물었다. ‘추천할만한 요리가 있나요?’ 그러자 종업원이 대답하였다. ‘대사님, 점심 메뉴가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제대로 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준비한 요리가 훌륭하고 풍요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독일연방 수상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 옆구리를 찌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박하지만 제대로 된 것, 이 말이야말로 우리 외교부의 제명(題銘)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니겠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프랑소와-퐁세가 아데나워를 안내한 것은 단순한 친절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곧 독일연방 수상은 파리에서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여전히 최고 권위자인 프랑스 고위위원의 은밀한 입회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6개월 정도 지나서 그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런던에서는 프랑소와-퐁세 대신에 이본느 커크패트릭이 직접 점령군 규정을 [아데나워에게] 상기시켰다.     

파리를 거닐면서 아데나워는 단순히 즐거움만 누린 것이 아니라 다행스러운 인상을 받게 되었다. 곧 파리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그를 침착한 무심함으로 대했고 때로는 친절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 것이다. 미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전주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심각한 시위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또한 그는 파리 방문 마지막 날에 그가 머물던 크리옹 호텔로 배달된,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자기 부친에게 수여된 ‘참전십자훈장’을 동봉한 한 여학생의 편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선물은 아데나워가 사망할 때까지 뢴도르프의 그의 서재에 놓여있었다.     

그의 파리 도착 다음 날에는 파리 공무원들의 국제적으로 통상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독일에 매우 적대적인 인물로 알려진 프랑스 대통령 오리오는 아데나워를 조찬 모임에 초대하여 불친절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로베르 쉬망은 이 기회에 자신이 확고한 유럽주의자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아데나워가 매우 안심할 약속을 하였다. 곧 어떤 경우에도 독일이 중립국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골치 아프게도 자르지역 관련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쉬망은 독일의 양보를 또 요구하였다. 아데나워는 필요하다면 평화조약에 버금가는 조약으로 자르란트의 지위를 확정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앞으로 압력이 더 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프랑스가 광업연합 조직에서 자르란트를 모나코나 안도라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표하는 것은 단순한 옥에 티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는 대통령의 엘리제궁과 외무부의 콰도르세 건물의 분위기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쾰른] 시장 시절부터 아데나워는 [건물의] 멋진 장식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왔다. 콰도르세 건물의 보바이 살롱 벽에 걸린 귀한 벽걸이 융단을 바라보면서 그는 독일의 이웃 국가가 얼마나 화려한지를 보며 매우 탄식하였다. 여기에서 국가는 로마나 런던만큼이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몇 달 뒤 그곳에서 다시 한번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 비하여 본의 평범한 모습은 얼마나 한심한가! 샤움부르크궁에서 1층 살롱 두 개가 다 필요한 연회가 있을 때 손님들에게 환영 술잔을 건넬만한 공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빈 방문 때는 흔히 불편한 정원으로 안내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기는 독일연방 수상의 개인집에 있는 것을 빌려 써야만 했다. 샤움부르크궁에 있는 그림과 융단조차도 빌려온 것들이었다. 음식도 정원으로 운반되어야 했다. 주방시설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빈민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은 본의 사치에 대하여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살펴본 것이기는 하지만 마침내 아데나워가 해외를 둘러보게 되면서 고국의 대화 상대들에게 자주 신생 독일 민주주의에 결핍된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곧 존엄, 광채, 스타일이 빠져 있던 것이다. 이는 외국의 방문객에게도 인상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독일 국민에게도 민주주의는 국격(國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국격은 드러나는 것으로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자신도 해외 방문을 통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는 데에 세련됨과 자신감도 기르게 되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날카로운 눈을 지녔던 애치슨은 1951년 말 아데나워와의 두 번째 만남 후에 확신을 얻게 되었다. 곧 아데나워가 지난 2년 동안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이제 인상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유럽석탄과철강공동체(ECSC)의 설립에 관한 외무장관회의를 시작으로 독일은 서유럽 민주주의의 세계에서 의전 차원에서 다시 동등한 자격을 얻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처음부터 자기 지위에 맞는 위엄을 갖추며 [외교 무대에] 나섰고 낮은 자세로 죄를 고백하고 더욱 겸손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유럽이라는] 클럽의 당당한 회원의 분명한 자신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현명하게도 이 무리 안에서 그 당시나 그 이후에도 그의 타고난 오만함을 절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국민을 대표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였다. 그 민족은 조만간에 다시 유럽 강국에 속하게 될 것이었다.     

몇 달 후에 그는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자 그의 주변에 모인 독일 기자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본인이 다시 대국의 [정치가가] 되고자 하면, 또한 우리 독일 국민도 대국의 국민이 되려면, 본인은 대국의 [정치가답게] 나서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언급을 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본의 외교비용이 과도하다는 노골적인 언론 비판이었다. 그의 언급을 새로운 독일의 권력정치의 서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국’라는 구호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후에도 모든 독일연방 수상은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1945년에서 겨우 6년 정도 지난 시기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친위대의 잔학행위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이 자의식이 강한 남자에게는 세계 국가공동체에서 독일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는 지위를 다시 차지하고자 끈질긴 협상을 벌이지 말아야 할 근거가 되지는 못하였다. 물론 여기에서 주도권을 쥐는 역할은 제외되고 그 자신도 이를 거부하였다. 그의 야망도 [유럽 공동체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다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서유럽 공동체 안에서 뛰어난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했다!      

6개 국가의 모임에서 이루어진 지속적인 협상이 아데나워의 유럽 차원의 정치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6개국 공동체의 창립 회원국 무리와 곧 이어진 광업연합의 장관위원회에서 아데나워는 서유럽 외교정책의 중요한 인물들과 어울리며 각 나라의 관심사도 알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외무장관과 연방정부 수상의 직위를 동시에 수행하였기에 그는 6개국의 국가수반들과 외무장관들과 빠르게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로베르 쉬망을 이미 1951년부터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디크 스티커에 대하여 좀 더 확실한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시야에는 더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외무장관인 스포르차 공작, [이탈리아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 벨기에 외무장관 판체란트, 룩셈부르크 외무장관 베크가 있었다. 가끔 주역이 바뀌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는 이 시절에 서유럽 고위 정치가들로 이루어진 거의 비슷한 무리와 더불어 활동했다. 이들 사이에는 많은 견해차가 있었지만 서로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데나워를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가 이 무리에서 선임자 역할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럽에서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파악하는 섬세한 감각을 얻게 되었다. 비록 이러한 감각으로 그는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에서 심각한 판단오류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다른 모든 독일 정치가와의 만남에서 정보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정보에서 아데나워를 결코 능가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아데나워는 쾰른시장 시절에 정기적으로 그 도시를 떠나 프로이센과 [독일]제국의회에서 활동한 것처럼 이제부터 그는 국내적인 본의 정치계를 떠나 더 자주 파리, 슈트라스부르크, 브뤼셀 또는 로마에서 유럽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어쩔 수 없이 그와 고위위원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이제 그는 직접 프랑스 외무장관과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소와-퐁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어 이제는 그저 한 명의 대사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서유럽국가 지도자들과 늘 대등한 자리에 놓이게 된 독일연방 수상은 미국과 영국의 고위위원들에게 마치 금치산자나 된 듯한 대접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독일의 서쪽에 위치한 강국들은 6개국 정상들 사이에서 빠르게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독일연방 수상을, 그를 서유럽 민주주의의 정부 수반이자 외무장관의 격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급속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1년 4월 그러한 변화가 가시화 되고 1년이 지나자 이미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1950년부터 1951년 초반까지 어렵사리 수행해야 했던, 서방 3개 점령국 보호령의 대표였던 아데나워가 1952년에 이미 서유럽의 고위 정치가가 된 것이다. 아데나워가 참석한 대부분의 회의에 그를 수행한 블랑켄호른은 서로 잘 아는 카를로 슈미트에게 1952년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예를 들어 1951년 12월 말에 개최된 최근의 파리회담에서 이탈리아 외무장관 데 가스페리의 명료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보고서와 지나치게 양보를 잘하고 유약한 프랑스 외무장관 쉬망의 주도권이 필연적으로 독일연방 수상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명확한 의지와 결단은 모든 회의 참석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수상은 오늘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유럽의 고위 정치가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서독 여론에도 찬란하게 조명되었다. 1949년의 아데나워는 정당인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1950년의 그는 어느 정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952년 독일 수상은 이미 유럽 차원의 인물이 되었다. 고위 정치가라는 넓은 망토를 쓴 인물이 된 것이다. 사실 서독이 외교정책에서 문자 그대로 바닥에서 시작해야만 하였기에 아데나워의 명성을 따라 나타나게 된 대비는 매우 극명한 것이었다.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푸대접으로 내적인 고통을 받은 많은 [독일] 사람은 이제 자기 나라의 수상을 바라보며 기를 펴게 되었다. 그 수상은 유럽이라는 콘서트에서 자기 소리를 내고, 자존감 있는 위엄으로 독일을 대표하고, 천민의 역할을 하던 나라를 민주적 국가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도록 이끌었다.      

분명히 1951년 4월 아데나워의 면모를 바꾸게 되는 이 과정이 처음으로 제대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6개국 외무장관회의는 여전히 풀지 못한 광업연합 관련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고위위원회의 회원국들의 정치적 비중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공동체] 사무소가 주재할 지역 문제였다. 본에서 가진 회담에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모네는 아데나워를 설득하였다. 곧 프랑스와 독일연방공화국이 이 기구 안에서 동등한 자격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합의는, [광업연합 회원국]의 광석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이 두 나라가 함께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서유럽은 독일과 프랑스가 협력하면 작은 나라들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이제 베네룩스 삼국과 이탈리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 두 대국은 엄청난 양보를 하며 복잡한 투표 규정을 만들어야 했다. 어찌 되었든 결국 만장일치의 합의가 도출되어 협약 조인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진행된 공동체 사무소 주재 지역에 관한 정부 수반들과 외무장관들 간의 줄다리기는 매우 힘들게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아 슈트라스부르크를 제안하였고, 네덜란드는 헤이그를, 벨기에는 뤼티히를 제안하였다. 놀랍게도 쉬망 외무장관은 협상과정에서 공동체 사무소를 독일 자브뤼켄에 두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면 자르지역의 ‘유럽화’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었다. 아데나워도 이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가능한 선택지로 놔두기로 하였다. 그래서 외무장관들이 18시간에 걸친 회의를 한 끝에 새벽 4시에 룩셈부르크가 제안한 것을 ‘잠정적’인 사무소 주재지로 정하게 된 것이다. 자정이 지나 아데나워가 시내에서 커피를 마시고자 잠시 협상 자리를 떠난 때 앞방에 모여 있던 독일 관리들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불쌍한 유럽이여!” 그는 회담장에 다시 돌아왔을 때도 같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협상에서 유럽의 초국가적 정신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반하여 아데나워는 1951년 6월 로마에서 만난 [이탈리아 외무장관] 알치데 데 가스페리스에게서 참다운 유럽 연방 정치의 정신을 보게 되었다.     

왜 독일연방 수상이 그의 첫 공식 국빈 방문 국가를 이탈리아로 선택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고 약간은 우울한 것이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만 무한한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데 가스페리는 아데나워를 이미 1950년 10월에 초청한 바가 있다. 런던도 이미 그사이 아데나워를 초대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초대에 대한 답은 미루기로 하였다. [영국에서] 애틀리가 계속 집권할 것인지 아니면 처칠이 다시 기회를 얻을 것인지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이미 5년 동안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데 가스페리는 그 당시 유럽 연방주의의 대표자로 여겨졌다. 아데나워는 그가 로베르 쉬망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가 두 민족을 갈라놓은 접경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881년 오스트리아 국민으로써 [이탈리아] 트리엔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트리엔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빈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논문 제목은 “카를로 고치의 행복한 거지들과 그 독일어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데나워의 모국어로 말하고, 그 자신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에서 쌓은 경험을 1940년대와 1950년의 유럽 정치에 반영한 두 세계의 사람이었다!     

데 가스페리는 학생 시절에 이미 황제 치하의 빈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물질적 정신적 상황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에 가입하였다. 히틀러와는 달리 그는 여기에서 민족주의적, 인종차별주의적 증오의 모든 독을 흡수하고, 트로츠키와는 달리 빈의 과격한 계급 대립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적 확신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영향력이 있는 부유한 시민계층과는 달리 데 가스페리는 근대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인간적인 원칙은 기독교 사회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결코 의심한 적이 없는 종교적 확신을 바탕으로 그는 [레오 13세 교황이 노동에 관하여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을 기준으로 삼고 고향으로 돌아와 트리엔트 민중당(Partito Popolare Trentino, PPT)에 가입하였다. 이 정당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하고 문화적으로 배척당하는 이탈리아 민중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의 제국의회 의원이 되고 1919년에는 이탈리아 민중당(Partito Popolare Italiano, PPI)의 돈 루이지 스투르조스를 밀어냈다. 그는 기독교 민주주의 좌파에 속하는 인물로, 경제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평생 아데나워보다 훨씬 더 비판적이었고, 문화정책적으로는 근본적으로 통합주의자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성직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넓은 의미의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이상의 추세를 따랐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 발전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에 공감하였다. 또한 이 두 사람 가운데 특히 데 가스페리가 아데나워보다 훨씬 먼저 근대 민족주의의 붕괴를 인식하고 있었다.     

1900년부터 데 가스페리는 언론인과 의원으로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킨 민족성의 문제에 대하여 상호 인정과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연방주의적 방법을 적극 옹호하였다. 1918년까지 그는 주로 과격한 범게르만주의자들과 대적하였다. 티롤 남부 지역이 이탈리아에 병합되고 나서는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위하여 싸우기도 하였다. 데 가스페리는 연방주의를 매우 강력하게 내세웠다. 그리고 국법에 관한 그의 확신은 192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아데나워의 유럽 [통합] 구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에 바탕을 둔 세련된 것이었다.     

사실 1921년에 이미 이 두 사람은 잠깐 만난 적이 있다. 돈 스투르조아와 독일 여행을 하는 동안 데 가스페리는 이탈리아인 무리에 섞여 쾰른시장의 영접을 받았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독일제국의 가톨릭 진영에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데 가스페리는 아직 독일 의회 건물인 팔라조 몬테치토리오 안의 젊은 의원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민중당(PPI) 대표로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와 맞서다가 16개월 동안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과 1943년 사이에는 바티칸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1945년부터 그는 이탈리아 정치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생사를 알면 아데나워가 1951년 6월 로마를 방문한 이후부터 데 가스페리에 흠뻑 빠진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이미 제네바 회의에서, 특히 리나 모리노와의 긴 대화를 통하여 아데나워는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얼마나 큰 활기와 조직력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감지하게 되었다. 1938년 3월의 선거에서 많은 이탈리아 신부의 지지와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기민당(Democrazia Cristiana Italia, DCI)이 공산주의자들을 격파하여, 아데나워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총선과 마찬가지로 전후 [이탈리아]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는 적절한 시기에 히틀러와 맺었던 주축동맹에서 탈퇴하였다. 국내적인 반대, 특히 프랑스 측의 반대가 많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이탈리아는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와 유럽평의회 회원국이 되었다. 전후의 모든 이탈리아 정권은 공산주의자들과 네니가 이끄는 사회주의자들을 모범 삼아 독일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여, 독일과 이탈리아가 한동안 함께 제국주의적 폭력 정치를 추구했었다는 사실을 세계가 잊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데 가스페리와 스포르차 백작은 이러한 노력에 반기를 들며, 민주주의 이탈리아의 주요 과제는, 새로운 독일을 문명 유럽 민족들의 공동체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프랑스-독일의 대립을 극복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 두 사람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와 유럽평의회에 독일이 동등한 자격을 지닌 회원국으로 가입하도록 하고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위하여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을 아데나워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심 어린 성대한 영접을 받자 감동하게 되었다.     

사실 자신이 정치세력을 잘 이해하고 자기 계산에 이용할 줄 안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데나워 또한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아야지만 사실을 온전히 파악하는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시벤게비르게, 곧 일곱 개의 언덕 뒤에 임시 수도를 둔 독일연방공화국처럼 서방 연합국 보호령의 통치를 받지 않는, 하나의 독립 공화국을 통치하는 기독교 민주주의 운동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제대로 된 국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는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다. 장식이 달린 투구를 기독교 민주주의사의 탑 앞에서 흑적황, 곧 독일 국기의 삼색 술이 달린 월계수 화환으로 아데나워가 엄숙하게 한화를 하였다! [이탈리아] 수상이 연설하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가 독재를 몸소 체험했기에 같은 가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서 아데나워를 외교적으로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나타냈다. 물론 여기에서 이탈리아의 이익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서유럽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연대였다. 사실 로베르 쉬망, 조르주 비도, 앙리 테이강도 기독교 민주주의 계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점령군 세력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데 가스페리와 소프로자 공작과 대화를 나누며 느낀 연대감을 그들과 나눌 수는 없었다.     

게다가 로마 자체도 아데나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북부 이탈리아에 여행을 다닐 때부터 그는 이탈리아에 매력을 느꼈다. 부유한 독일 시민계층은 누구나 이탈리아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문계 김나지움에서 그는 이 도시의 위대함과 미력에 대하여 배웠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느 정도 여느 독일인들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괴테 시대 이후 이 영원한 도시를 처음 체험한 모든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방문 첫날 저녁에 그는, 그 이후의 많은 국빈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수행한 딸 로테와 더불어 핀치오로 갔다. 그곳에서 아데나워는 차에서 내려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괴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던 피아자 델 포폴로는 이미 저녁 햇살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고고학자 루드비히 쿠르티스가 그를 포룸 로마눔과 콜로세움까지 안내하였다. 카피톨에 들어서면서 그는 이미 저녁 햇살을 받고있는 베드로대성전과 판테온의 황동으로 된 둥근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미 카피톨 거리의 실측백나무 위로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비오 12세 교황의 알현이 있었다. 아데나워는 그를 이미 1920년대부터 알고 지냈다. 그 당시 교황은 파첼리라는 이름의 독일 주재 교황대사로 일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곧 교황청 주재 독일대사의 종교와 정교 협정 문제에 관한 논의였다. 아데나워는 자신을 의심하는 개신교 인사들이 로마 방문에서 이 행사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아데나워는 나훔 골드만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본의 사람들은 그에게 독일연방 수상으로서 바티칸을 방문하는 것이기에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옆문이 열리고 교황 성하께서 매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내 앞에 서 계시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의식하기도 전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네.”     

성베드로대성전의 고고학 연구소장으로 있는 고위성직자인 카스 신부가 아데나워를 책상으로 안내하였다. 1933년 초 이후 많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다시 조용한 가운데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데나워나 데 가스페리나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나치게 긴밀하게 협력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축을 이룬 것을 유럽은 아직 잊지 않고 있던 때였다. 아데나워 이전에 로마를 방문한 [독일의] 마지막 외무장관은 요아힘 폰 리벤트롭이었다. 그도 지금 아데나워가 머물고 있는 그랑호텔의 국빈실을 사용하였다. 본에서는 이탈리아가 이 기회에 파리와 런던의 불신만 가중될 것이 뻔한 구체적인 협약의 체결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탈리아 정부와의 만남은 순수한 선린 방문 성격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매우 만족해서 귀국할만했다.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여전히 걸려있는 [과거의] 그물에서 유럽 [통합] 구상을 좀 더 구체화하는 것으로써 벗어날 수 있을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 문제에 관한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이 협상은 한편으로는 페테스부르크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파리에서 한 달 동안 진행되다가 예상치 못한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최고 사령관이 되는 유럽군 창설의 전망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미 아데나워는 독일의 동등한 권리와 [유럽] 방어 정책의 현실적 이유들로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정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유럽방위공동체(EDC)라는 다른 길로 흐르고 있었다. 이는 처음부터 프랑스가 강력하게 원하던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으로 마음을 돌린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은 1월 독일연방공화국을 방문하여 아데나워, 슈파이델 장군, 호이싱거 장군과 대화를 나누며 독일군의 명예 회복을 약속하였다. 아데나워는 아이젠하워의 약속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는 자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의 휘하에는 이류 군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아데나워는 무심코 독일의 정치적 지위도 [유럽] 방위 참여로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독일을 정복한 아이젠하워는 그러한 꼼수에 대하여 언짢아했다. 아이젠하워가 미국으로 귀국하여 트루먼 대통령 내각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에 관한 노골적 표현이 나온다. 곧 자기 휘하에 독일군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한 것이다. 독일군이 다시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군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독일 정치가에게 이 점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그는 독일 정치가들이 프랑스와 다투는 것에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그 문제는 독일과 프랑스가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이용하여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한 발언을 살펴보면, 아이젠하워가 독일 국민이나 아데나워의 어려운 정신적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가 승전한 장군으로서 분명하게 밝혔던 독일에 대한 깊은 반감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더 이상 아이젠하워에게 안보에 대한 프랑스의 두려움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맥클로이,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 데이비드 브루스, 장모네는 한결같이 독일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플레뱅플랜을 보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이젠하워가 워싱턴에 보고한 바대로 군사적 시각에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가 가능한 선택지이기에 거의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었다. 미국 정부가 결정을 수월하게 내리도록 아이젠하워는 1951년 8월에 자신이 잠정적으로 유럽 국방장관의 기능을 수행할 의사가 있다는 것도 밝혔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매력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미국의 대통령직이었다.     

사실 아이젠하워가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에 동의한 것은,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극렬해 반대하던 쥘 모슈가 프랑스 정부와 결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제 파리는 독일이 ‘소규모 사단’으로 [유럽 방위에] 최대한 참여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7월이 되자 워싱턴은 미국의 독일정책과 유럽정책의 기본이 되는 구상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구상은 1954년 8월 30일 프랑스 의회에서 좌절되었다. 미국은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유럽방위공동체(EDC)라는 복잡한 틀 안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정식 회원국이 되는 것도 추가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동시에 점령군규정도 자유로운 협상을 통하여 마련된 협약을 마련하기 위하여 폐지되어야 했다. 1950년 8월 말 이 두 문제에 관련된 건의서가 제출된 지 거의 1년 동안 아데나워는 자기의 구상을 [연합국 측에] 되풀이하여 제기하였다. 곧 독일과 연합국의 관계가 [공식] 협약을 바탕으로 설정되지 않는다면 그는 독일연방의회에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 안건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관리하는 서방 강국들은 4개 분야에서 그들의 통제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독일에 점령군을 주둔시키고 그 군대의 안전을 보장받을 권한, 베를린 문제, 독일의 통일과 이에 관련된 평화조약의 체결, 영토 문제가 포함되었다. 아데나워는 7월 5일 맥클로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령군규정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이 시기에 불가능하다는 조금은 성급하지만, 통찰력 있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에서 그는 국내 [정치] 불안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다는 말도 하였다. 이 불안은 결국 언젠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이날 이후 몇 달 동안 이어진 치열한 논쟁의 대상은, 서방 연합국 의견서가 최종적으로 마련되기 전에 이미 원칙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7월 3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그러한 해결책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 8월 말에 조심스럽지만 확실한 뜻이 담긴 아데나워의 제안서가 페터스베르크에 제출되었다. 그 제안서에서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구상을 추가적인 논의 안건으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어찌 되었든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이 협상에 앞서,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복잡한 조치들을 일단 시행 하는 것만이라도 합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사실 여전히 파리가 유럽방위공동체(EDC) 협상을 지연시키고자 한다는 근거 있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에 편승하여 점령군규정의 폐지도 지연시키고자 한다고 의심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는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문제를 협상 안건에서 제외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1951년 8월 26일 로베르 쉬망이 딘 애치슨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에서 이 프랑스 외무장관이 처음부터 독일의 가입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아데나워는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구상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그 당시에, [적어도] 1952년 초까지는 이 구상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워싱턴이 일단 이러한 길에 들어서면 다른 길로 나아갈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는 사실 그가 이해한 바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독일군이 유럽군에 무조건 편입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기에,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때부터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유일한 바람직한 구상이라는 매우 정치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프랑스가 그러한 노선을 실제로 택하고자 하는 의도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아데나워는 미국의 군대가 유럽 대륙에 지속적으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접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대두된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상을 지지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유럽통합 운동을 바라보면서 그가 원래 품고 있던 회의적인 생각도 줄어들었다. 그 당시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유럽연합회는 1951년 4월 루가노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유럽연방설립회의’의 정관을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설립하고자 하거나 예상하는 전문기관은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의 지도와 통제를 받아 설립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데 가스페리와 스포르자 공작과 나눈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된 바로는 이탈리아가 정치적 기구의 수립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삼국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구상이 제대로 탄력을 받게 될지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1년 유럽 [통합] 운동은 커다란 희망에서 힘을 받아 활기를 띠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다. 그 당시 데 가스페리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제안서를 작성하고 있던 알티에로 스페넬리는 이제 유럽이 연방 직전 단계에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 18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연방제도의 수립과 유사한 것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와 [독일의] 주권을 최대한 빨리 회복하는 것에 가장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 [소련과 미국의] 동서 간의 긴장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아데나워는 1952년 소련이 침공할 날짜가 언제인지에 대하여 더 이상 두려워하며 고민하지 않고 다른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1952년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일과 1953년 독일 총선 날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1952년이 시작되면 외교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1951년 6월 프랑스 총선 결과 우파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정부도 이전보다는 더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제발 쉬망이 다시 외무장관이 되기를!” 이렇게 아데나워는 프랑스 총선이 있기 얼마 전에 기자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늘이 돕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도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런던에서는 노동당이 물러났다. 10월 선거로 영국 보수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처칠이 수상이 되었다. 처칠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참여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이 구상을 긍정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조약 관련 작업이 논의되면서 제일 가능한 것부터 조인되어야 하는 데 필요한 시간 여유가 별로 없었다. 아데나워의 생각에는 가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1951년 12월에야 조약 절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 하원에서 그 조약이 1952년 여름 휴회 이전에 비준될 수 있을지에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보다 더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1952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미국] 공화당 측의 오하이오 출신의 상원의원인 태프트가 아시아를 중시하고 신고립주의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리에 속하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관철하게 될지는 1951/52년 겨울과 1952년 초반에 유럽에서 결정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에 연방주의적 해결책이 마련될지는 아데나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이 일이 신속하게 마무리되어야 모든 후속 조치도 따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데나워는 중요한 외무장관회의에서 자기 견해를 밝히고 유럽방위공동체(EDC)의 독일 대표단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이 대표단은 테오도르 블랑크를 단장으로 하여 1951년 10월 초부터 1952년 5월 9일까지 파리에서 협상에 참여하였다.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조직 구조는 광업연합을 모델로 수립되었다. 곧 고위위원회, 임명직 위원, 그리고 광업연합과 마찬가지의 9개 회원국과 복잡한 투표 규정, 장관위원회, 광업연합과 같은 의원회의, 재판소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장 모네가 광업연합을 실제로 구현할 것인지는 사실 아무도 몰랐다. [광업연합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결정으로, 당초에 의도한 형태의 초국가적인 방위공동체가 수립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궁극적으로 맺어지게 될 조약이 그 결정 과정을 즉각적으로 막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비록 그 조약이 비준된다고 하여도 말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보게될 일이었다. 아데나워가 보기에 중요한 일은 독일 사단을 배치하기 시작하고 이와 동시에 점령군규정을 외무부 문서고에 보관하는 [다시 말해서 그 규정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매우 중요한 1951년 12월 11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개최된 외무장관회의에서 데 가스페리가 되풀이하여 주장한 것이 분명히 옳았다. 곧 그는 연방주의적인 기초가 조속히 확립되지 않는다면 전체적인 구조가 공중 분해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내적 확신으로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예산 편성에서 이미 그 조짐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그러한 조직이 후속 정치 공동체의 전단계로 이해되면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했다.     

다른 나라 장관들의 반응은 얼마나 많은 꿍꿍이속이 이 계획에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베네룩스 삼국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관련 목적을 조약에 명기하는 것에 관한 결정을 일단 거부하였다. 이 국가들은, 서유럽의 대국들 중심의 유럽방위공동체(EDC) 안에서 독립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또한 로베르 쉬망도 모든 가능한 반대 의견을 제기하였다. 당연히 데 가스페리의 기본 견해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이렇게 논쟁이 격렬해지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발언하고자 하였다. 협상의 이 과정은 갑자기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모두 유창한 독일어로 발언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자주 활용하는 우아한 절차적 기술을 발휘하여 고착 상황을 해결하였다. 곧 문제의 해결을 미래로 미루자고 한 것이다. 다만 그리 먼 미래는 아니어야 했다.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되, 조약이 일단 맺어지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의 참석자들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유명한 ‘데 가스페리-제38조’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 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자문위원회는, 그 임무가 부여되고 나서 6개월 이내에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한 검토를 완료해야할 책임이 있었다.     

㉮ 민주주의를 기초로 치르는 선거를 통한 유럽방위공동체(EDC) 회의체의 구성

㉯ 그러한 회의체에 위임되는 권한

㉰ 개정, 필요한 경우에, 특히 국가들의 대표성을 적절히 보장하기 위하여 이 공동체의 다른 조직들이 이 조약의 규정에 대하여 요청하는 개정안.      

그러고 나서 계속 이어진 내용은 목적에 관한 규정이었다. 이에 대하여 데 가스페리와 아데나워의 견해는 같았다. “현재의 임시 기구를 대체하여 궁극적으로 수립될 조직은, 연방적인 형태를 지니고 무엇보다도 이원제로 운영되며 하나의 행정조직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조직들이나 앞으로 수립되어야 할 조직들과의 유대에 대하여 고려해 보는 일과 이 모든 조직에 관한 사항은 반드시 유럽방위공동체(EDC) 상임위원회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상임위원회는 그러한 제안들을 심의하는 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이리하여 연방주의적 희망이라는 펄럭이는 돛의 모양이 드러났다. 이 돛은 이탈리아의 생각에 따르면 [각 국가 의회의] 비준이라는 물결을 [순조롭게] 항해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데 가스페리 자신이, 처음에는 격렬했지만, 점차 줄어든 저항에 맞서 자기 제안이 적절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그렇게 강하지 않은 제안에 대하여’ 이제 그토록 많은 의견이 제시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슈트라스부르크 외무장관회의에서 돌아오면서 “플레뱅플랜은 1952년이 시작되면 실현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협상에서 본격적인 문제는 그 목적의 설정이 연방주의적인지 아니면 동맹주의적인지가 아니라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등한 자격과 이에 관련하여 독일의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가입이라는 사안에서 나타났다. 관계자 모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유럽방위공동체(EDC)라는 것이 회의 중심 외교의 인위적 조합의 산물로 [여기에서 결정된] 모든 것이 다시 한번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의결을 거쳐야만 할지 모를 일이었다. 베네룩스 삼국은 1951년 말까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도 자기 요구 사항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그래서 강국이 나서서 그 반대를 공식적으로 막아야할 정도였다. 아데나워 또한 이 논쟁에 관여했지만 결국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의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가입을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가 주장한 대로 독일이 유럽방위공동체(EDC)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동시 가입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에 아데나워는 먼저 강력한 협상 자세를 견지하고 이를 [독일 외무장관인] 할슈타인에게 공표하도록 하였다. 곧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1952년 1월 유럽방위공동체(EDC)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협력 회원으로 가입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40) 그런데 이러한 바람에 긍정적인 반응이 없었다.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협상 참가자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차라리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정회원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을 ‘개인’ 특사로 런던에 파견하였다. 블랑켄호른은 ‘비공식적으로’ 영국 외무부의 프랭크 로버츠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협력 회원’은 유럽방위공동체(EDC)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서 정당한 대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일단 할슈타인이 전달한 요구 사항이 1952년 1월 28일 파리회담 성명서에 반영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이제 막 수립 도중에 있는 [유럽]방위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이 북대서양조약 [곧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와 관련을 맺는 일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는 비상조치로 여겨졌고 아데나워는 그때부터 이 유럽 조직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의 국적선을 [타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대서방 선단에 포함하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만 유럽방위공동체(EDC)가 먼저 실현되어야 했다.   

   

대서방조약과 소비에트의 주도권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1951년 9월부터 1952년 5월까지 진행된 외교적 결정만큼 논란이 된 문제는 없었다. 점령군 규정의 폐지와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협상은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미국과 아데나워가 적극적으로 이를 이끌었고 런던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계속 반대하였다. 그러나 1951년에 있었던 어려움은 해소되고 이 일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어찌 되었든 처음부터 반대 기류는 강력했다. 아데나워와 페테스베르크의 고위위원회 사이의 협상, 그리고 파리에서 열린 유럽방위공동체(EDC) 대표들의 회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런 때 독일민주공화국(DDR) 인민회의는 동베를린의 소련대사관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1951년 9월 15일 서독 연방의회에 제안문을 보내왔다. 동독과 서독의 대표가 함께하는 논의를 통하여 평화조약 조인을 가속화하자는 제안은 새로운 것이 없었지만 한 가지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공동 토론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통일된 민주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독일의 건설을 위한 독일 전체의 자유선거 실시.” [동독의] 초대 수상인 그로테볼의 사절이 독일연방공화국 연방의회 의장인 엘러스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하였다. 곧 동독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제국의회 선거법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동베를린 당국이 조만간에 공표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마르브르로제궁에서 개최된 사전 회담 때 강력하게 드러났던, 고착 상태의 특징을 보이던 소비에트 연맹의 서방 정책이 이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앞으로는 서방의 협상이 모스크바의 폭넓은 주도권을 따르게 될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민주주의 정당들의 단합된 전선은 이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베를린 의회가 동베를린의 제안에 대응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그 첫 단계로 베를린 전체에서 자유선거를 치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의 제안은 아데나워와 사전 협의가 안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당황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제안에 동의한다면, 동유럽과 서독의 여론에 얼마나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인가! 그러나 모스크바는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준비가 아직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기회를 포기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의 위협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른스트 로이터와 같은 인물조차도 맥클로이와 대화하는 가운데 통일을 선택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곧 독일 사람들이 [독일이] 서방에 즉각 통합할지 아니면 자유로운 통일을 이루되 중립국가의 지위를 확보할 것인지를 놓고 진지한 선택을 하게 되면 말이다. 슈마허와 그의 연방의회 동료들은 이제 단순한 선전 활동 이상의 것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는 아데나워가 중요한 라디오방송 연설에서 주장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내각에서도 다시 의견 대립이 있었다. 야콥 카이저는 1951년 9월 25일 이제 사민당(SPD)이 전혀 달라진 상황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결국은 러시아와 현실적으로 진지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카이저는 본이 [곧 서독 정부가] 독일 전체, 곧 동독과 서독 모두를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를 발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연정에 참여한 [기사당(CSU)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그로테볼의 의견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아데나워는 자민당(FDP) 파벌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블뤼허는 러시아의 제안 때문에 독일 정책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폰 브렌타노는 서방 연합국들과의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 노선을 견지하였다. 일단 서방 연합국과의 협상을 신속히 진행하여 결과를 도출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전독(全獨) 정치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선거를 냉정하게 반대한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독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선거라는 문제는 이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독]연방의회에서 동베를린의 제안에 대하여 [전체] 독일을 대상으로 한 자유선거의 전제 조건들을 국제연합의 지휘 아래 있는 중립적인 국제위원회를 통하여 검증해 보아야 한다는 아데나워의 제안에 대하여 서방 열강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서방 열강은 이 일을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아데나워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동시에 연방의회는 전독 자유선거의 선거 절차를 수립해야 했다. 다시 한번 사민당(SPD)과 공통된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또한 사민당(SPD)도 아데나워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러한 통일전선이 공개적으로 와해되었다. 사민당(SPD)이 다수당 정부의 선거법 초안에 찬성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동베를린은 유혹과 위협을 더욱 강화하였다. 10월 말 에른스트 레머는 독일연방정부 수상에게 새로운 제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이번에는 동독의 외무장관인 데르팅거가 제안한 것이었다. 레머는 1947년 말까지 동독 기민당(CDU)의 당대표 직무대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데르팅거는 동독 기민당(CDU)의 원내총무였다. 이제 이 두 사람은 둘 다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하여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사실 레머는 자신이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 데르팅거는 세미요노프와 그로테볼이 알고 있는 가운데 사절을 파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제안은 진지한 것이었다. 모스크바가 배후에 있었다. [동독의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은 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어 보였다. 투표 절차는 물론 전독 선거의 감시까지도 말이다. 러시아도 공산주의식으로 추진되는 민족전선이 제대로 된 선거에 임하게 되면 패배가 불을 보듯이 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스크바는 통일된 독일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통일된 독일은 워싱턴이 정하는 대로 정치를 운영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해야 하였다! 독일이 통일되면 [동독과 서독] 양측은 각각의 점령군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소련은 독일이 중립 국가가 되는 대신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데르팅거의 생각에 어쩌면 소련은 독일이 유럽에 통합되는 것과 쉬망플랜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머가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하자 데르팅거는 위협을 가했다. 서방이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러시아도 이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서방이 핵공격을 감행하면 러시아도 뉴욕, 시카고, 워싱턴을 핵무기로 공격하게 될 것이었다. 세미요노프는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제 신경전이 본격화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동방의 공격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서방 연합국들과의 협상이 신속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아데나워와 고위위원회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가 1951년 8월에 세운 계획에서는 [각국의] 외무장관들이 1951년 11월 15일까지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와 독일과의 조약 작업에 관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12월 15일 그 조약들을 [독일] 연방의회에 상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맥클로이는 좀 더 신중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시간 여유를 두지 않으면 독일 측이 비이성적으로 지나친 요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맥클로이는 아데나워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다. 그는 1951년 9월 8일 한때 적국이었던 일본과 맺을 매우 합리적인 평화협정에 관한 협상 장소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마련한 계약과 유사한 것을 독일과 맺고자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1951년 두 번째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뷔르겐슈토크 고지에서 대규모의 전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날은 8월 1일로 스위스의 국경일이었다. 루체른호수 주변 모든 산간에는 불꽃이 타올랐다. 회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테오도르 블랑크와 더불어, 그라프 킬만세그 중령, 할슈타인, 블랑켄호른, 글롭케, 루스트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국제법 교수인 빌헬름 그레베도 처음 참석하였다. 그에게는 1951년 5월부터 점령군규정 폐지 관련 협상에 참여할 임무가 부여되었다.      

아데나워는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것과 유사한 ‘안보조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조약에는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 담겨 있었다. 주권[의 회복],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독일군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기,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가입, 독일연방공화국 영토 안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와 의무에 따른 서방 강대국들의 안보 보장. 또한 아데나워에게는 자문 관련 조항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 조항에 따르면 서방이 독일을 희생하며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려는 시도를 막거나 최소한 방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서방 강대국들은 [독일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다짐해야 했다. 또한 독일연방공화국의 경제적 미래가 확실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1952년 마셜플랜이 종료되기에 아데나워는 서방 열강이 조약을 통하여 약속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는 “기존의 독일에 대한 경제 원조를 지속하여 경제적 혼란과 실업,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전체주의 체제의 위험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연합국의 의도를 고려하여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제한권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베를린과 관련하여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는 일과 더불어 외부의 위협이나 내부의 혼란이 발생하는 경우 연합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하나의 제안서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미 8월 11일 고위위원회 미국 위원의 직무대리인 헤이즈 장군과 논의한 것이었다. 이는 사실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영국과 프랑스 고위위원들이 독일과 미국의 대화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헤이즈 장군은 약간의 수정을 요구하였고, 8월 20일 고위위원들은 독일 측으로부터 2차 제안서를 접수하였다. 여기에는 10개 조항이 담겨있었는데 아데나워의 생각으로는 11월까지 그 기본원칙에 대한 협상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9월 중순 워싱턴에서 개최된 외무장관회의의 성명서를 보면 프랑스가 다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임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매우 좋게 보였다. 협상의 시작은 아데나워가 더욱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이 협상은 뭔가 불길하게도 9월 24일 에르니흐성에서 열렸다. 거의 15년 전에, 나치비밀경찰에 감시받던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운이 나쁜 주일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 라인탈의 높은 지역에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는 프랑소와-퐁세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 무렵에는 상황이 거의 정반대였다. 라인란트 점령 때 아데나워가 간절히 주둔을 바라던 프랑스 군대가 이제는 이 지역에서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아데나워 자신은 더 이상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 정부 수반으로서 프랑스의 점령이라는 짐을 연맹 관계로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매우 나쁘게 전개되었다. 관계자 모두의 보고는 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곧 맥클로이가 워싱턴에 보고한 것, 아데나워가 《회고록》에 상세하게 묘사한 것 말이다. 동방의 공격이 이미 그 심리적 효과를 나타내던 시기에 서방 열강은 아데나워의 독일 국내 정치적 어려움에 대하여 조금도 배려할 마음이 없다는 뜻을 보이고 있었다.     

협상이 잠시 중단된 틈에 아데나워가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과 함께 서방 연합국의 초안을 간단히 검토하면서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가 마련한] ‘뷔르겐슈토크 초안’이라는 아름다운 꿈은 산산이 깨진 것이었다. 그는 점령군규정의 개정 제안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독일의] 주권 회복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 그 대신에 포괄적이고 불명료하게 정의된 서방 연합국의 규제권과 비상조치권만이 언급되어 있었다.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대사위원으로서 계속 머무르게 될 것이었다.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서 동등한 지위를 보장한다는 언급도 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통일정책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도 없었다!     

아데나워의 경각심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마치 발밑의 양탄자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독일의 여론은 요란하게 시작된 협상을 매우 초조한 기대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앞에 문서가 하나 놓여있는 것이었다. 그 문서를 내각이나 연방의회 외무상임위에도 제출하면 그의 체면과 그가 추구하던 정책에 치명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말하기를 조약이 초안대로 제시된다면 독일 정부가 도저히 독일연방의회에 비준을 요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맥클로이가 하는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그는 그 어떤 연합국 정부도 독일이 제시한 초안에 서명할 상황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협상은 일주일 지연되었다. 아데나워는 이 첫 논쟁 이후 매우 분노하여, 만약 협상의 형식과 내용이 이 첫 대결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칠게 이루어진다면 그 협상 자체를 파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맥클로이에 대하여 가장 분노하였다. 그가 양측의 입장을 먼저 미국의 생각과 조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인가? 이제와서 이러한 모욕을 당하다니! 더구나 맥클로이가 자기의 비판을 전달하는 방식도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맥클로이가 당시 미국 측에서도 일단 독일을 궁지에 몰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속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적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제국당(SRP)의 약진이 그의 의심을 돋웠고 그의 가족에 대한 암실 위협이 그의 기분을 매우 상하게 했다. 또한 이 무렵에 독일 군인연합회가 벌인 혐오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이 그를 신중히 처신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다른 외교관과 군인들은 맥클로이가 추구하는 엄격한 협상 스타일이 아데나워의 정적들과 미국 정책의 반대자들이 한패거리가 되는 일을 조장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였다. 여기에는 조지 P. 헤이즈 장군, 미국 국무성 독일담당부 부장인 헨리 바이로에이드, 또는 후일 주독 미국대사가 된 마틴 힐랜브랜드가 있었다.     

아데나워가 특히 화가 나게 된 것은 슈마허와 올렌하우어가 이미 연합국의 협상 문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다음날 그들에게 그 내용을 제대로 알려줄 요량이었다.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제기하였다. 만약 그가 이미 여러 차례 성사가 될 뻔한 대로 드골과 비밀 회담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 정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슈마허가 서방 연합국의 협상전략을 근거로 아데나워의 서방 정책을 따르지 않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사실] 독일 측의 견해는 갈라져 있었다. 매우 힘든 협상에 대부분 참여하고 있던 할슈타인은 국무회의에서 최대한의 조건을 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 것을 역설하였다. 게다가 독일연방공화국은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회원국 지위를 확보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다. 아데나워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내각이나 외무상임위에서 모든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을 주저하며 맥클로이에게 앞으로는 정보를 [독일 측에] 전달하는 정책에서 신중을 기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아데나워는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비밀 외교를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아무런 긍정적인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끈질긴 협상을 통하여 보다 나은 조건을 이룩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미 두려워한 대로 그저 부분적인 성과를 거둔다고 하여도 여전히 비밀 엄수는 지속될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합 정부의 다른 정당들이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모든 것을 좌초시키게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에게는 내각보다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반면에 아데나워는 조약이 체결되면 모든 반대를 그가 잘하는 방식대로 물리치게 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다만 조약 내용이 알려지는 때와 그것이 궁극적으로 비준되는 때의 간격이 짧아서 의회 안에서 폭넓은 반대 전선이 형성될 시간이 없어야만 했다. 이에 못지않게 그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블록의 선전에 맞서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 선전은 이 당시에 가장 극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는 것이 아데나워에게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평생 의회의 세력들에게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해야 모든 사실이 알려질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10월이 되자 연방의회 외무상임위의 소위원회에 서방 연합국이 [독일의] 주권 회복 문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슈마허도 이미 그렇게 보고 있었다. 슈마허는 맥클로이와의 대담에서 이미, 아데나워가 독일이 곧 온전한 주권을 회복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을 비난했었다. 당연히 슈마허는 베를린 문제와 소련과의 특별한 관계로 아데나워가 말한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야당은 정부 수반보다 약한 요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과 내각에 정보를 알려주는 일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매우 뒤늦고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였다.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조약의 특정한 구절이 누설되는 것을 특히 경계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전혀 문제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스탈린이 배후에서 주도한 [동독의] 화폐개혁 직전에 조약의 전체 내용이 1952년 5월에 불편한 제약과 더불어 공표되자 장관들과 연정 참여 정당들은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또는 그들은 무방비 상태인 척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서방 연합국이 기본조약과 더불어 모든 복잡한 추가 조약을 협상하겠다고 나서자 협상 내용에는 무수한 세부적인 문제까지 포함되었다. 예를 들자면 점령군의 사냥할 권리까지 다루게 된 것이다. 유럽방위공동체(EDC) 문제에 관한 협상에서는 당연히 그 비용에 관한 것이 가장 큰 논란이 되었다. 여기에서 [독일] 재무장관 쉐퍼는 처음에 벌목꾼 재주를 동원하여 국제 무대 [협상]에 임했다.      

연방정부 수상과 외무장관의 직무를 동시에 수행하게 된 덕분에 아데나워는 복잡한 협상 과정을 집중하여 이끌며 전략적으로 탁월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정부 안에서는 독일과 연합국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에 관한 협상에서 3단계로 조직이 운영되었다. 가장 밑바탕에서는 여러 전문가 집단이 활동하였다. 그 지휘는 빌헬름 그레베가 담당하였다. 이들의 업무는 할슈타인이 이끄는 지도회가 날마다 개최하는 회의에서 이끌고 조정하였다. 아데나워의 수석 조언자 역할은 할슈타인과 블랑켄호른이 담당하였다, 얼마 후에는 그레베도 아데나워에게 직언하게 되었다.     

파리의 협상단도 비슷한 구조를 유지하였다. 여기에서는 테오도르 블랑크가 이끄는 100여 명의 대표단이 있었다. 그리고 한스 슈파이델이 군부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 두 조직을 총괄하는 인물은 발터 할슈타인이었다. 그는 내각에서 계획을 수립하는 인사들을 이끌며 이 단계에서 블랑켄호른과 더불어 아데나워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일하고 있었다. 할슈타인은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유럽주의자’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는 올바른 호칭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질과 업무 스타일, 그리고 강경한 자세를 볼 때 이 라인-헤센 출신의 인물은 오히려 프로이센 사람이었다. 그는 아데나워 주변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의 목적에 매달렸다. 곧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서 독일을 다시 강국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 당시 서방과 유대를 협상하고 추진한 지도자 집단에 독일이라는 나라는 오직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이 중심이 된 국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서독은 서방에서 볼 때는 어느 정도, 상황을 현명하게 이용하여 동부지역의 미수복지인 동독을 흡수 통합해야 하는 [마치 이탈리아의] 피에몬트 지역과도 같은 나라였다.     

주요 협상은 아데나워가 직접 추진하였다. 전체적으로 아데나워는 30회나 개최된 장시간에 걸친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다. 그레베의 기억에는, 1952년 5월 17일 아데나워가 참석한 고위위원회 위원들과의 마지막 회의는 17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일반조약’에 관한 협상은 계속 [독일의] 주권 [회복]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연합국의 비상조치 권한 문제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그가 목적한 바를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독일 정부에서 ‘독일조약’으로 부른 일반조약이 1952년 실제적으로 비준된다면 독일연방공화국은 무거운 부채를 부담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유럽방위공동체(EDC) [수립이] 좌절되자 1954년 가을에 ‘뷔르겐슈토크 초안’에 원래 담겨 있던 목적을 반영하여 일반조약의 내용이 수정된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가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직접 가입하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아데나워는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독일의 동등한 권리라는 멋진 목적은 이러한 점에서 도달될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조약 비준 이후에 ‘저절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의도대로 해결될 것인지는 미결로 남아야 했다. 사실 아데나워는 2월 7일 [독일]연방의회에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었다. 그가 결국 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회원국 영토의 불가침성이나 정치적 독립, 또는 안보가 위협받을 때 조약 당사국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위원회와 유럽방위공동체(EDC) 위원회가 공동 회의를 개최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시하도록 한 것이다.     

무기 생산에 관한 규정도 마찬가지로 차별적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군용기, 민간 항공기, 전함, 핵무기, 화학무기를 생산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아데나워는 최소한 특정한 방공 로켓의 개발과 평화로운 원자력 연구에 필요한 화약 생산의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유럽방위공동체(EDC) 안에서 조직 차원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도 바라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프랑스가 식민지 주둔군, 지원단, [독일] 점령군 일부가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독일 측은 잘 알려진 모네의 규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곧 본에서 파병하는 독일의 첫 군대는 [독일군이 아니라] 유럽군 소속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회원국 차원의 동등한 자격은 전혀 얻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연방의회에서 야당이 이를 빌미로 그를 공격할 때 그는 그저 목적을 향하여 진행되는 일단 시작된 절차의 전개 논리를 변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내각이나 연정에 참여한 정당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아데나워는 궁지에 몰리면서도 주로 냉소적인 질문을 하곤 했다. 곧 독일과 연합국 가운데 누가 전쟁에서 패했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과 모인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모든 생각을 접고 정치적인 미래에 가장 무거운 부채를 질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바로 조약이 비준되기 전에 [미영불소의] 4강 회의가 다시 열리게 될지 모른다는 근심이었다.     

서방 연합국에 강제 규정으로 의무를 부여하고자 한 그의 의도는, 어떤 형태로든 4강 국가들이 독일을 통제하는 상황이 다시 나타나게 될지 모른다는 악몽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그 당시 협상에 참여한 모든 당사자에게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덜 바람직한 것으로 보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대연정을 이룬 민주주의적으로 합법적인 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4강 국가들이 여전히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은 평화조약을 지연시키는 새로운 변명거리를 늘 새로 들고나왔다. 4강 국가들과 협상에서 자문을 의무 조항으로 하는 것은 아데나워가 생각하기에는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의무 조항에 대하여 서방 연합국들은 처음에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엇보다도 독일연방공화국이 조약을 통하여 확보하고자 한 [국가] 지위에 비하여 그 경우에 [통일된] 전독(全獨) 정부가 받아들여야 하는 지위가 본질적으로 더 열악할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할슈타인이 자문회의에서, 독일의 평화조약과 [독일의] 통일에 관한 일반조약의 조항에 통일된 독일이, 현재 협상을 벌이고 있는 독일연방공화국 [곧 서독]이 누리게 될 권리에 비하여 덜한 권리를 누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바람을 표명하도록 하였다. 로버트 보위가 이끄는 서방 연합국의 협상단은 이에 대하여 역제안을 하였다. 곧 통일된 독일이 조약을 통한 권리를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 안에 포함된 의무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1년 11월 3일 처음으로 최고위층 차원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되자 아데나워는 정확한 [조약] 내용에 관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이미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11월 14일 다시 한번 그 문제가 논의되었다. 연합국 측은 막연한 의무 규정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독일과 연합국] 양측이 지켜야 하는 의무[조항]을 주장하였다. 최종적으로 합의를 본 [조약의]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서방 연합국] 3국과 독일은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통일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에 부여된 의무를 통하여 이 조약과 부가 협정, 그리고 공동체 규정이나 참가국들에 적합한 합의에 따른 통합 유럽 공동체 수립에 관한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아데나워는 이 점에서 합의에 도달하였다.     

쌍방 의무의 문제는 외무장관 차원의 후속 논의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모든 참가국이 그러한 고도의 정치적 문제에서는 조약을 통하여 매듭을 짓더라도, 여기에 참가한 서방 연합국이 그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전혀 확실한 [제재]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독일연방공화국은 최소한 한 가지의 거부권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계약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곧 독일연방공화국은 통일 독일에 다른 지위가 부여되어도 이에 동의해야 하지만 또한 그 통일 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지위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방해받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은 이론적으로 서방과 결합하든지 아니면 통일을 이룩하든지 선택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이에 비하여 서방 열강에는 아무런 규제 조항이 없는 상태에서 통일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통일된 독일이 동시에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가입한다면 말이다. 결국 서방 연합국은, 본이나 모스크바의 뜻을 물리치고 독일연방공화국을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가입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뜻을 관철하는 데에 아무런 규제 조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또한 매우 중요한 점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자발적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내용이 확정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통일에 관한 협상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를 탈퇴하고자 해도 서방 열강의 뜻을 거슬러 가며 이를 관철할 수는 없었다. 만약 독일연방공화국이 통일된 독일의 유럽방위공동체(EDC) 가입을 바란다고 해도 이는 오로지 서방 열강이 협상의 여지를 두고 승인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매우 이론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분명히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통일된 독일이 반드시 서방 민주주의 국가와 유대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몇 달 뒤에 협상의 전체적 맥락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결정이 협상에 관한 정치적 논쟁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여기에서 문제는 서방과의 조약이 [독일의] 통일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이 영향은 [부가] 조건 조항이 있든 없든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협상 과정에서 [독일의] 통일 문제는 아데나워와 서방 연합국 사이에서 어찌 되었든 또 다른 점에서, 특히 오더·나이쎄 국경선 동부에 있는 [과거] 독일 영토에 관하여 논쟁거리가 되었다.     

아데나워는 서방 연합국에 [독일의] 통일을 조약의 주요 목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매우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어떤 독일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에 관하여 11월 14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후에도 외무장관들이 논의하였다. 아데나워는 분명히 독일 통일의 ‘공동 목표’가 오더·나이쎄 강을 건넌 지역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 지역을 앞으로 소련과 협상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서방 연합국의 정책은 ‘기회주의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결국 연합국 측도 지금까지는 1937년 기준의 경계선을 놓고 [협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커크패트릭은 새로운 지배자의 소유권 주장을 받아들이자는 고전적인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폴란드와 체코를 러시아의 품으로 몰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데나워는 독일의 반응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커크패트릭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귀하에게 폴란드로 가는 통로를 다시 마련해 드려야 할 의무가 있나요?”     

맥클로이도 동부 국경선 문제를 확정 짓는 것은 논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프랑소와-퐁세는 일단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입장은 단호했다. 도대체 오더·나이쎄 강 건너편 지역에 관하여 공동 정책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문에 쉬망플랜이 좌절될 수도 있고 전체 유럽 차원의 구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논쟁이 이어졌다. 결국 프랑소와 퐁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프랑스 국민이 그러한 공동 노력을 무엇보다도 독일의 동부지역을 무력으로 수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런 것이 유럽통합의 의미가 되겠는가?      

그러나 아데나워는 느긋한 오기를 부리면서, 서방 연합국들도 독일 동부지역을 폴란드가 지배하는 것을 중단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법적 논거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독일] 연방의회나 독일 여론은 오더-나에쎄 국경 양 쪽 지역을 구분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한다면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 추방민들이 서방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사회주의 세력과 신나치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조약 관련 작업을 방해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올 결과는 독일이 중립국이 되는 것 뿐이었다!     

아데나워가 이 문제에 관하여 일단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겠다는 뜻을 서방 외무장관들과 최종 협상을 하기 위하여 파리로 떠나기 직전에 표명하였다. 그는 맥클로이에게 초안 한 개를 전해주었다. 그 초안에서 아데나워는 국경문제를 ‘대서양헌장의 정신’에 입각하여, 곧 민족들의 자기 결정권을 바탕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파리에서 열린 최종 협상에서 국경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아데나워의 어라한 입장에 대한 소식은 서방 국가의 의회에서 심각한 우려를 야기하였다. 사람들은 도대체 아데나워 수상이 어떤 의도에서 이러한 폭발성이 있는 문제를 하필이면 지금 건드린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나타내었다. 맥클로이는 아데나워가 단순히 그가 [협상에서 자기 주장을] 얼마나 내세울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자 한 것으로 여겼다. 아데나워가 후일 이 문제로 비판받게 된다면 서방 연합국에 그 책임을 전가할 속셈이라고 본 것이다. 애치슨, 이든, 쉬망은 독일의 [오더·나이쎄 강 동부지역의] 영토 요구에 대한 지지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독일 국민 스스로가 이러한 요구를 강력히 한다면 상황은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오랜 협상 끝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조약 제7조 1항이 나왔다. 이 조항에서는 1945년 8월 포츠담 회담에서 정해진 대로 독일과 평화협정에서 국경 문제를 최종적으로 확정하기로 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문제에 관해서 그토록 서두른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1946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또한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 정당이 그 당시에 주장한 생각을 그저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맥클로이가 [아데나워의] 동기로 추측한 것도 일종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추측은 다음과 같다. 아데나워가 오더·나이쎄 국경 문제가 소련이나 동독에 그 당시 협상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화의 씨앗인 동부 국경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데나워가 원치 않는 독일에 관한 동서 협상이나 동독과 서독 간의 대화를 용인하도록 앞으로 그에게 압력을 가할 생각이 있다면 모든 이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에 이 문제가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데나워가 그 당시 실제로 소련을 물리치고자 하였고 빼앗긴 지역에 대한 [반환] 요청을 적절한 시기에 할 생각이었던 것인가? 그는 분명히 이 시기에 자기 요구 사항을 언론에도 공개하였다. 그는 하필이면 베를린에서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더·나이쎄 국경 너머에 있는 땅은 우리 독일에 속한 것입니다.”     

많은 미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그의 논조를 잊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서방 정치가가 그 깊은 내면에서는 매우 냉정한 수정주의자여서 그가 소련과 폴란드를 서방의 도움으로 제국의 영토 밖으로 밀어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그 당시 아데나워의 논조는 일단은 서독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도록 하는 빌미를 서방 연합국에 제공한 꼴이 되었다. 아데나워가 비록 분명히 서방을 지향하는 매우 온건한 독일연방 수상인데도 그토록 확고한 자세로 [조약의] 수정을 요청한다면 도대체 그의 후계자는 어떨 것인가?!     

이와는 무관하게 모든 서방의 의원들은 아데나워가 모든 독일 정치가 가운데에서 그나마 가장 온건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한 아데나워와 최대한 빨리 협상을 맺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데나워를 적어도 의전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정치가들과 동등한 대접을 하여 그의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주자는 의견이 [서방 정치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51년 11월 22일 파리에서 일반조약이 맺어졌다. 처음으로 아데나워가 초대되어 서방 3개 연합국 외무장관들과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아데나워가 수상의 직위에 오른 지 2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애치슨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유럽에서는 4명의 외무장관이 동등한 자격으로 만난 사실이 그 회담에서 이룩한 구체적인 합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 것이다. 실제적인 동등한 자격은 사실 [아데나워가] 아직은 얻지 못하였다. 3개 연합국의 외무장관들은 아데나워에게 제시할 그들의 입장을 사전에 조율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고위위원회 위원들 사이를 양자 대담을 통하여 갈라 놓기 위하여 얼마나 조직적인 노력을 열심히 기울였는지에 대한 소문이 그동안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이들은 부차적인 조약을 다른 모든 조약, 특히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조약이 맺어지기 전까지는 보류하기로 합의되었다. 전체적인 조약이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다.     

이 1951년 11월의 회담에서 아데나워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방 열강이 독일을 희생하며 [독일] 통일에 관한 합의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자 하였다. 애치슨은 아데나워가 이 문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태도를 가장 우려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미국의 여론은 어떠했는가? 1년 후에는 미국에서 대선이 있을 예정이었다. 애치슨은 아데나워를 안심시켰다. 프랑스와 영국보다 미국인들의 소련과 중공에 대한 적개심과 거부감이 훨씬 크다고 말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큰 만족감을 보였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무장관들도 그를 마찬가지로 안심시켰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본으로 돌아와 차담을 나누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리회담의 최대 성과는 앞으로는 독일연방정부와 미리 상의하지 않고는 독일에 관한 그 어따ᅠ간 결정도 더 이상 내려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데나워는 서방 외무장관들과의 첫 만남을 마무리하자마자 런던으로 갔다. 영국인들은 그 당시 아데나워의 판단을 매우 존중했다. 비록 아데나워가 미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영국을 그 사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아데나워에게 가장 믿기 어렵고 어려운 상대는 프랑스였다. 비록 그의 유럽 정책 전체가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러하였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 자르지역 문제는 다시 한번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데나워와 쉬망이 유럽을 위한다고 아무리 대단한 맹세를 했어도 사정은 그러하였다.     

영국은 아데나워를 우군으로 이끌어 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파리에서 아데나워는 단 한 번도 국빈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1951년 12월 3일부터 7일까지의 영국 방문은 3개 전승국 가운데 한 정부의 초대로 이루어진 첫 공식 방문이 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국빈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예우를 갖춘 영접을 받았다. 그는 지나칠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본으로 돌아오면서 [영국의 대접이] “정말로 따뜻한 것이었다.”는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조지 6세 왕은 중병에서 회복되지 못했음에도 그를 맞이하였다. 1952년 2월에 아데나워는 다시 런던을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영국의 왕과 나란히 앉았다. 그러면서 그는 서방 정부 수장의 반열에 거의 오르게 된 것이다. 처칠과 이든과 긴 대화를 나누고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설도 하였다. 런던의 관리들은 아데나워의 지도로 독일연방공화국이 피점령국에서 연맹 국가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가 평생토록 매력을 느낀 옥스퍼드에서 6개 대학교의 초대를 받았다. 이제 아데나워는 유럽 대륙의 가톨릭 국가들만이 아니라 영국도 ‘서방·기독교 문화 공동체’에 속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영국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도 영국의 고위 정치가들이 그 당시 유럽 대륙의 정치가들 정도로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칠과의 대담은 격조가 있었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처칠이 독일에서 온 손님을 전쟁에 대한 기억을 모토로 대접한 것이다. 곧 ‘승자의 관용’을 발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처칠은 이미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블랑켄호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의 말투는 단속적이고 때로는 더듬거리고, 느릿하며 불명확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4~5개 문장을 쏟아내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건축물의 사각형 돌과 같았다” 때때로 그는 완전히 비외교적인 발언도 하였다. 어쩌면 아데나워가 유럽으로 화제를 돌리자 처칠이 아데나워에게 다음과 대답한 것은 의도적일 수도 있었다. “영국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독일은 프랑스보다 강한 나라입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프랑스의 편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까요?”     

기분이 상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런 생각을 다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독일을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독일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이때로는 어렵습니다. 독일은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종종 지나치게 이론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하여 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2년 후에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총선이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언급도 하였다. 독일과 프랑스의 합의가 “2년 이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일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독일이 만들어질지는 그 주체가 선할지 악할지에 달려 있습니다.”     

처칠은 이에 대하여 정치적으로는 바람직하였지만, 매우 이상한 답을 하였다. “저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나란히 행진하며 프랑스군은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이(La Marseillaise)를, 독일군은 [독불 전쟁 때 부른 비공식 독일 국가] ‘라인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을 부르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데나워는 ‘매우 사적으로’ [영국] 수상에게 유럽통합이 그의 생각에 통일의 전제 조건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였다. [유럽] 통합이 없이는 [독일] 통일은 없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데나워의 정적들은 이를 그가 통일을 반대한다고 공격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정부 수상은 사방에 대고 소련과의 동서 협상 문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처칠과 이든의 다짐을 받아냈다. 사실 그는 이를 받아내기 위하여 이 대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과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련과의 화해는 귀하의 동의가 있을 때만 이루게 될 것입니다.” 본에서 진행되는 협상을 염두에 두고 처칠은 이제 오더·나이쎄 국경에 대하여 언급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이든은 추가로 쐐기를 박았다. “독일이 이웃 국가를 위협하게 된다면 결국 [상황은] 소비에트 연방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서둘러 진화에 나서며 그도 폴란드와 선린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다짐하였다. 그러자 [영국 측은] 다시 한번 약속하였다. “영국을 완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귀하의 등 뒤에서 음모를 꾸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이어진 말은 다시 한번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협상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기력이 다한 처칠의 머리에 종종 과거의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난민 문제의 위험에 관하여 이야기하자 처칠이 갑자기 질문을 하였다. “귀하는 프로이센 국민입니까? 프로이센 사람들은 악당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데나워는 설득력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틀린 답을 하였다. 곧 그는 웃으며 그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생각은 벌써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센 사람들은 매우 훌륭한 전사의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론에서 처칠은 통속극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가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파괴될 것입니다. … 그렇지만 우리가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하여도 적어도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을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강자의 정치에 대한 믿음에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우리가 강해지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대담의 결론에서, 아데나워는 베를에 구금된 폰 만슈타인을 비롯한 200여 명의 전범 판결을 받은 독일군들의 석방에 관하여 비밀스러운 의견교환을 하였다. 처칠은 아데나워에게 폰 만슈타인의 변호사 비용을 분담하였다고 말하고 구속된 이들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방문의 결과로 보이도록 해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과는 있었지만 불편한 대화였다. 확실히 처칠은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모든 까다로운 문제를 이든과 협의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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