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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n 20. 2023

유럽 정치 지도자 2

1950~1952

1954년 TIME 표지를 장식한 아데나


세계사의 날개    

 

그런데 아데나워의 영국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다우닝가 10번지나 영국 외무부가 아니라, 클래리지스 호텔에 머물던 아데나워의 숙소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극비로 아데나워를 방문하느라 호텔 뒷문을 이용한 인물이 바로 세계유대인협회 회장인 나훔 골드만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서 ‘독일에 대한 물질적 보상 청구 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아데나워를 찾아왔다. 골드만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주요 회담들 가운데 이 회담이 정서적으로 가장 힘들었고, 정치적으로 아마도 가장 중요했던 것이었다.” 또한 아데나워에게도 1951년 12월 6일이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골드만은 아데나워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저는 세계사의 날개를 이 방안에서 감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에 대한 보상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에 아데나워는 매우 깊이 관여하였다. 이미 과거 쾰른에서 일할 때 [아데나워] 시장은 유대인에 호의적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는 다양한 정통 [유대교] 공동체들을 지원하였고, 그가 중요한 지원자로 여겨 존중한 루이스 하겐과 같은 유대인 인사를 받아들였으며, 유대인 교수들을 높이 평가하고, 유대인 음악가들의 연주를 즐겼고, 시온주의에 동조하였다. 게다가 그는 1933년에 유대인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인하지 않았던 대니 N. 하이네만은 어려움에 부닥친 아데나워를 도운 일부 사람들에 속하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히틀러의 반대유대주의에 1933년 이전부터 이미 적극적으로 반대해왔었다. 반유대주의는 미개함과 원시성의 표징이라고 한 것이었다.     

1945년 이후 아데나워는 [유대인] 보상 문제를 어떻게 여겼는가? 1933년부터 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출신 독일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독재 정부가 그 반대자들이나 특정한 집단에 가한 불의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는 이후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개념인 ‘불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곧 법질서를 어기는 것과 더불어 기독교에서 죄를 의미하는 개념을 시용한 것이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가 자행한 행패에 관한 그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국가가 자행한 불의의 희생자는 ‘보상’에 대한 권리가 있다. 여기에서 개별 경우에서 개인적인 권리가 침해되었고 명시적인 손해가 발생하였기에 그러한 손실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형법적 도덕적 의미의 죄는 ‘불의’를 지시하거나 직접적으로 관여한 이들에게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한 이들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인종학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무미건조한 ‘범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는 이에 관하여 자주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치의] 범죄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브라우바일러 교도소에서 돌아온 직후에 간략하게 했던 “나는 악이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말은 이 악행의 형이상학적 차원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해자들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 앞에서 책임을 져야했다. 이들은 먼저 세속의 재판관들 앞에 불려 나와야 했다. 범죄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인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래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종학살의 결과는 단순히 형법적인 방식으로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집단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을 조국으로 찾았다. [독일 정부는]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보상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독일 국가, 곧 독일 제국의 법통을 이은 독일연방공화국은 독일 정부가 자행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책임은 도덕적, 법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도덕적 측면에서 새 독일 정부는 죄를 느낄 수 없다. 이제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아데나워와 같은 정치가도 박해받았다. 민족 전체가 [나치] 정부의 악행에 대하여 책임질 수도 없다. 죄의 개념은 늘 구체적인 개개인과 연결해야 한다. 다만 정부의 악행과 독일 국민의 방관이 이 나라에 치욕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자행한 잔학한 행위에 대하여 국가가 보상하는 것은 명예에 관한 일이 된다. 아데나워가 보상 문제를 다루는 데는 ‘명예’가 핵심적 의미를 차지하고 있음이 눈에 뜨인다. 그는 중요한 첫 대담에서 나훔 골드만에게 다짐하였다. 보상은 “독일 민족의 명예에 관련된 의무입니다.” 치욕은 명예에 관련된 의무와 직결된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그러므로 새 독일은 보상을 제공하여 독일의 명성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아데나워의 말에는 늘 되풀이하여 ‘도덕’이라는 개념이 따라다녔다. “보상하고자 하는 저의 뜻은 확고합니다. 저는 보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도덕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정치적으로 보편적인 개념인 ‘도덕적’이라는 단어를, 정치계에서 흔히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보상이 ‘도덕적 문제’인 이유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악행이 도덕적 세계 질서를 손상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질적인 참회를 통하여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것은 유럽에서 그리고 독일인의 영혼 안에서 도덕적 범주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유대인에 대한 보상을 전후 독일 정치의 중요한 과제로 파악한 아데나워의 마음을 흔든 생각은 대강 이와 같았다. 주목할 점은 그가 이러한 노력을 세분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구두선이나 강제성이 없는 죄의식이 아니라 매우 명료한 범주였다. 여기에는 개인의 책임, 민족의 책임, 국가의 책임, 치욕과 명예, 희생자의 요청과 도덕률을 상징적으로 재건해야 하는 정부의 의무가 있었다.     

이 문제의 현실 정치적인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데나워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데나워가 추구한 것은 국가적 지혜의 명령이었다. 15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물질적 보상에는 정치적 책임도 [당연히] 따르는 것이다.      

1951년과 마찬가지로 1952년에도 협상 대상이 되었던 제국의 부채와 비교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제국의 법통을 내세운다면 원칙적으로 제국의 부채와 [연합국의] 점령 시기의 부채도 떠안아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독일의 신용을 회복할 길이 없었다. 독일의 도덕적 책임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서는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학살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도덕적 신뢰의 점진적 회복에는 보상이라는 명예에서 나오는 의무를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     

아데나워와 골드만의 만남은 이미 장기 협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유대인 조직과 이스라엘에서는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대가로 독일의 돈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손해배상은 다른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손해배상 문제를 조심스럽게 젖혀 놓았다. 그 덕분에 과거의 그림자가 작아졌다.  미국과 영국은 세계 경제질서와 평화로운 전후 질서의 건설에서 1919년부터 1932년에 했던 그릇된 손해배상 정책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이 일단 손해배상에 나선다면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스라엘이 아니라 파괴된 [주변] 국가들이 우선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1951년 3월 이스라엘은 연합국 정부에 보낸 성명에서 서독에 10억 달러, 동독에 5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청하였다. 서방 열강은 그러나 주저하였고 소련은 전혀 답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 국가는 대책 없는 재정 상황에서 독일에서 엄청난 돈을 받아내고자 한 것인데 이는 오로지 독일연방공화국이 자발적으로 지불할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에서는 냉정한 국가이성, 곧 국가 우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951년 유대인의 독일에 대한 물질적 배상 청구 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될 예정으로 이스라엘의 요구를 대변하는 나훔 골드만은 수개월 동안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여행해야 했다. 유대 극단주의자 집단이 그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이다. 사실 아데나워 자신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1952년 3월 소포로 위장된 폭탄으로 아데나워를 제거하려던 어설픈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런데 보상 문제는 부채 협상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데나워가 2개의 제안서를 제출했던 뉴욕 외무장관회의는 독일과 연합국 관계의 긍정적 발전을 [독일] 제국의 부채와 전후 부채 청산 문제에 결부시킴으로써 아데나워를 매우 실망시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에 관한 협상이 진행됐다. 독일연방공화국에서 헤르만 요제프 압스가 대표로 참석한 최초의 부채 관련 회의는 1952년 2월 런던에서 시작되어 1년간 지속되었다. 1952년 아데나워가 외무장관으로 점찍고 있었던 압스가 배상 협상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무리에 속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가 아데나워가 협상해야 할 보상금의 액수를 알고 나서부터 그러하였다. 런던 부채 협상에 임하는 독일의 협상 전략은 당연히 독일연방공화국이 부채 일부만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 대한 확실한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장기적인 분할 지불 조건으로 말이다. 최종적으로 합의한 부채 액수는 약 130억 마르크였다. 당초 유대인 측에서 요청한 보상금액의 두 배가 채 안 되는 액수였다.     

아데나워는 이제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이해 충돌에 당면하게 되었다. 부채 협상에서의 전략과 독일연방공화국의 지불 능력은 이스라엘과 세계유대인연합회에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액수로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1950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재정 적자는 6억 1백만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1951년에는 겨우 1억 8,600만 마르크의 재정 흑자를 이룩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유대인 측이 요구한 75억 마르크는 생각할 수도 없는 액수였다. 아데나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망설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블랑켄호른을 내세워 유대인 측과의 접촉을 조심스럽게 시도하였다. 블랑켄호른은 1950년 4월 처음으로 노아 바로우의 측근과 만난 다음 곧바로 바로우와 런던에서 만났다. 이 사전 접촉에서 나훔 골드만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해왔다.     

골드만은 1890년대 중반에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구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마을인 슈테틀에 살고 있던 랍비였다. 그의 부모는 그 당시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해 왔다. 1900년부터 1933년까지 나훔 골드만은 독일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평생 독일의 학문과 문학에 대하여 경탄하는 사람이 되었다. 젊어서부터 시온주의자가 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외무부 유대인 담당관으로 일하였다. 진보적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후에 언론인, 시온주의 단체의 연설가, [유대인 단체] 조직가로 활동하였다. 한때 그는 오버바이에른의 무르나우에서 살고 베를린에서도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유대 백과사전》을 출판하였다. 영리하고 현실의 모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지식인이었던 그는 단 한 번도 아데나워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1933년부터 활동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고 세계적인 유대인 지원 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정계와 재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매우 중요한 긴밀한 인맥을 형성하고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초에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데나워에 대하여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아데나워가 1951년 여름에 뷔르겐슈토크호프에 있는 파크호텔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는 아주 우연하게도 그 호텔의 [아데나워와] 100m 떨어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블랑켄호른이 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지만, 골드만은 독일연방정부 수상이 독일연방의회에서 사전에 승인한 보상 문제에 관한 성명을 제출하기 전에는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고 1951년 9월 27일 만장일치로 통과된 정부 성명을 확정하였다. 그는 유대인세계연맹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합의하여] 보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야만 “엄청난 고통에 대한 정신적 정화로 나아가는 길에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협상에 대한 일종의 정파를 초월한 백지수표를 받아 든 셈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유대인 측이 요청한 15억 달러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지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었다. 이는 엄청난 액수였다. 서독이 1948년 4월부터 1952년 6월까지 마셜플랜으로 받은 27억 달러의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1951년 12월 6일 런던의 클래리지스 호텔에서 논의할 내용이 이것이었다.      

아데나워는 1시간에 걸친 대담에서 수상으로서 내각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진행한 가장 중요한 결정들 가운데 하나를 여기에서 내렸다. 발언 말미에 그는 골드만에게 당장 비서가 있는 옆방에서 [비서가] 서류 초안을 받아 적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 아데나워가 오후에 노아 바루를 통하여 그 편지를 골드만에게 전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서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연방정부는, 이 협상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정부가 1951년 3월 12일 자 공지로 제시한 요청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다.”     

대부분의 국무위원들은 아데나워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들의 귀를 의심했다. 무엇보다도 연방 재무장관 쉐퍼가 격분하고는 아데나워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압스는 자신이 부채 협상을 하는 데에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느껴 액수를 낮추고자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데나워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력을 굳건하게 견디며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10억 달러에 더하여 유대인 단체의 요청에 대한 기본 금액으로 5억 달러를 책정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 중요한 대담은 독일조약과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최종 협상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다만 연합국 측은 이에 관하여 아무런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었다. 과연 1952년 6월 10일 아데나워 수상에게 5억 달러를 요청한 골드만의 추츠페, 곧 뻔뻔함과 엄청난 액수를 아무런 반론 없이 받아들인 아데나워의 만용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놀라운 일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골드만이 자기 회고록애서 묘사한이 장면은 아데나워의 가장 인상적인 일화가 담겨 있다. “아데나워 수상이 내게 [배상 금액 산정] 근거를 묻자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한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나치 희생자들의 정착을 위하여 왜 정확히 10억 달러를 독일연방정부에 요청하였는지를 물었다. ‘이러한 조치의 비용을 어찌 산출해 냈지? 어쩌면 몇백만 달러가 더 필요하거나 모자랄 수도 있을 것인데 말이야.’ 이에 대하여 다른 이스라엘 사람이 대답하였다. ‘내가 사는 슈테틀에는 식민지 물건 상인이 있어. 그 사람은 말더듬이야.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그에게 감자 1kg이 얼마냐고 물었어. 그 사람이 말했지. 20코펙, 곧 20분의 1 러시아 루불이오. 누가 묻든지 그는 한결같이 20코펙이라고 대답하는 거야. 그래서 한 여자가 놀라면서 왜 모든 물건을 20코펙에 파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상인이 대답했지. 그게 말하기 편해서요.’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더 보탰지. ‘제가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보상청구협의회와 여기에 그 대표들이 참가한 25개 유대인연합회에 가서 3억 달러나 3억 5천만 달러를 이야기하면 어떤 인상을 주겠습니까? 5억 달러는 딱 떨어지는 액수로 말하기가 더 편하죠.’ 그러자 [아데나워] 수상은 웃으면서 그럼 5억 달러로 정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악당 히틀러에게 몇 년 동안 눈이 멀어 모든 유대인 박해에 대하여 무심하게 눈을 감거나 동조까지 했던 독일인들이 마땅히 보상해야 할 노릇이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도덕적 동기로 충만한 관용으로 독일의 위신을 세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는 개인적으로 국제 유대인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신뢰’라는 자산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골드만은 그때부터 미국에서, 그리고 유대인의 여론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모이는 모든 자리에서 아데나워를 끊임없이 칭송하며 모든 공로를 자신이 아니라 아데나워에게 돌렸다. 아데나워 자신도 그 이후의 골드만과의 많은 만남에서 다른 때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그에게 듣게 되었다.     

그러나 1952년 아데나워는 그의 약속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과거 쾰른시장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힘든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그가 미래를 위하여 짊어지고 아데나워다운 패기로 정치적인 돌파를 감행한 책무는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부담이었다. 이제 독일연방공화국을 대상으로 제기된 요구는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952/53년의 국가 예산 가운데 130억 마르크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차원의 재무장과 연합국 군대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이는 독일 사회 총생산액의 10%에 달하고, 연방 정부 예산의 60%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1952년 독일 정부 예산은 230억 마르크였다.     

서방 연합국이 이러한 수준의 배상을 요구하는 냉혹함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 액수는 100억 마르크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독일 외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도 있었다. 압스는 외채를 첫 5년 동안 연간 5억 6,700만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합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연방 재정에 커다란 부담이 되는 액수였다.     

이와 동시에 독일연방의회는 추방민들을 위한 상당한 액수의 비용이 드는 부채탕감 규정을 통과시켰다. 이는 긴급한 필요에 대하여 정치적 지혜를 발휘한 것으로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약 1,300만 명의 추방민과 난민들이 과격해지는 것을 달리 막을 방안이 있었겠는가?! 재산에 부과되는 특별세로 그 재원이 마련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비용도 해마다 증가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상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아데나워의 외교와 국내 정치의 재정정책적 측면은 이러하였다. 곧 모든 의무에는 정치적, 도덕적, 상황적 필요에 따라, 쾰른시절에 대규모 계획을 추진한 것과 마찬가지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는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결국 최상의 상황에서나 지불이 가능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아데나워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쾰른시장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1950년대 초반에는 그 실제적인 규모를 상상할 수 없는 경제 기적이 많은 문제를 해결하였다. 게다가 수상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는 1956년에야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공공 재정과 경제에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만약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가 1952년에 이루어졌다면, [독일의] 경제 기적이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1952년에는 모든 책임자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쾰른시절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소문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실히 증명하게 되었다. 그는 일단 엄청난 부채를 얻고 나서는 그의 생각을 따르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조장한 다음에 주정부에 가장 커다란 짐을 떠넘기는 것이었다. 이는 연방정부의 재무부와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의 시각이기도 하였다. 1953년 총선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부담이 본격적으로 전가되었다는 것이 사태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연방정부 수상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방법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잘못하면 심각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위대한 아데나워의 시대가 아니라, 인플레이션, 과도한 세금, 사회적 곤궁, 재정 파탄에 빠진 비교적 단명하는 정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자민당(FDP), 독일당(DP), 기사당(CSU)이 보상법안에 반대하게 된 것이었다. 쉐퍼, 블뤼허,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는 약속한 [보상] 금액이 터무니없고 수상의 협상 방식이 매우 무책임하다고 여겼다. 또한 아랍과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관심이 있던 경제계도 [아데나워에게] 경고하였다. 아랍 국가들은 이미 본의 이스라엘 정책에 대하여 조직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아데나워가 이스라엘과 체결한 협정이 1953년 3월 연방의회에서 239표의 찬성으로 비준되기는 했다. 여기에는 사민당(SPD)의 표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연정을 하는 정당들에 속하는 의원 가운데 86명이 기권하였다. 24명 정도는 아예 투표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아데나워는 연방정부 재무장관인 쉐퍼가 이 협정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쉐퍼가 기사당(CSU) 지방당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겨우 과반수를 넘겨 통과되었지만, 아데나워는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그는 반대 세력을 완전히 무시했다. 보상조약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그는 마침내 1953년 초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예방할 수 있었다. 이미 9개월 전인 1952년 6월 17일 연방 국무회의에서 그 조약이 의결된 후에 우연히 같은 날 열린 주지사들과의 만찬 모임에서 세계 유대인과 맺은 이 조약이 독일의 주권 회복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였다. 주지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화답하였다.     


모스크바의 각서 공격에 대한 방어 전쟁     


1952년 초 독일의 주권 회복 문제는 아직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협상은 1952년 2월 매우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독일과 연합국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규정도 추가 조약에 관한 끈질긴 협상으로 정체 상태에 놓였다.      

이 이전과 이후와 마찬가지로 서방과의 조약에서 어려움이 나타날 때 아데나워는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그때까지 그저 뜻과 생각에만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곧 전혀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프랑스 외무부와 국회에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를 반대하는 이들은 전략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1952년 1월 말에 아데나워는 프랑스 외무부의 질베르 그랑발이 자르정부 대사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그는 고위위원회 위원으로서 자르지역의 총독으로 군림했었다. 그가 대사로 임명된 것은 프랑스 정부가 기존의 노선을 굳건하게 지속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모욕당한 느낌이었다.     

파리에서는 정권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소문에 따르면 로베르 쉬망이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설립 요구를 더욱 몰아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파리와 본에서 나오는 유럽에 관한 말은 더욱 공허하게 들렸다. 아데나워 또한 곤경에 처했다. 연정을 맺은 정당들 안에서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문제가 공개 논쟁을 야기한 것이었다. 할슈타인은 파리에서 개최된 유럽방위공동체(EDC) 회의에서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가입에 대한 바람을 잠정적으로 철회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아데나워는 2월 초에 유럽방위공동체(EDC) [가입에] 대한 동의를 자르지역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을 독일연방공화국과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관계 정립과 연계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에 맞서 일단 시간을 벌었다. DPA 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공식적인 부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아데나워가 이제 커다란 통나무에 쐐기를 박기로 결심했다고 보았다.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파리와의 갈등을 무마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파리에서는 정부의 운명을 가르는 커다란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흔히 연정을 맺은 정당들의 지도적 인물들도 함께하는 독일연방정부 내각에서 최소한 얼마 후에 벌어지게 될 독일연방의회 차원의 토론에서 그 주제를 다루는 것을 미루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한 정당, 곧 기민당(CDU)만이 아니라 자민당(FDP)과 독일당(DP) 소속 장관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몇몇 국무위원들은, 예를 들어 야콥 카이저와 토마스 델러는 늘 사민당(SPD)이 [독일의 유럽] 방어 참여에 동의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였다. 야콥 카이저는 당수가 다시 중병이 든 야당과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격렬한 논쟁에서도 현실에서는 미국의 여론이 독일의 여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길은 미국을 충동질하고 프랑스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워싱턴이 자르지역 문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르지역의 명목상 자율은 미국의 시각에서는 프랑스를 위한 상징적인 대가일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미국 국무성 측에서 자르지역 문제를 유럽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독일연방정부 내각은 자르지역이라는 다리를 유럽의 영역에 속하도록 하고 광업연합의 고위 관청의 주재지로 삼도록 하자는 제안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2월 7~8일에 있었던 독일연방의회의 토론에서 아데나워는 언젠가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정회원이 되고자 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적인 바람을 고수하였다. 사실 아데나워는 열이 나고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모든 다른 나라는 이 주간에 독일이 이제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요구 사항을 내세우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권[회복]’을 요청한 독일연방의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기에서는 잘 알려진 일부 단서를 달았다. 그럼에도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 소속 의원들 가운데 48명만이 여기에 찬성하였다. 정부 측의 분위기는 나빴고 매우 침울했다.     

프랑스 의회에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반대하는 세력이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결의가 정부의 손을 묶어 놓은 것이다. 곧 독일이 결코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는 순전히 방위를 위한 연합체이기에 영토에 관한 요구를 하는 나라는 결코 회원국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독일군이 유럽군에 편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일·프랑스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야 했다! 군사적 통일의 수립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로베르 쉬망은 여기에서 계속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정당이 독일에 맞선 [프랑스의] 안보를 우려하고 있었다. 유럽의 부흥은 거의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럽방위공동체(EDC)는 무엇보다도 독일군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거대조직으로 여겨졌다. 각계각층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는 이미 사장되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조약이 체결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협상 위기가 절정에 이를 무렵 [영국의] 조지 6세 왕이 사망하였다. 워싱턴과 런던은 이제 리스본에서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마지막 노력을 기울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예언가들은 이미 이 회의가 실패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아데나워는 영국 측으로부터 왕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그는 서방 외무장관회의에 그를 받아들여 줄지 알지 못한 채 영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쉬망은 애치슨과의 사전 협의에서 그의 설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일단 모든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공동 입장을 마련하기 위한 연합국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나서야 아데나워가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회고해 볼 때 아데나워와 애치슨은 이러한 즉석에서 소집된 회의가 사태의 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였다. 애치슨은 이 모임이 1950년 9월 뉴욕에서의 회담 이후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외무장관회의였다고 했다. 아데나워는 이것이 그가 참가한 것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회의였다고 말했다. 아데나워는 출국하기 전에도 여전히 건강이 안 좋았다. 열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런던에서 그는 기운을 찾아 고착 상태에 있는 회담을 애치슨과 함께 다시 끌어나갔다.     

결국 이제야 비로소 아데나워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상황이 무르익게 되었다. 곧 미국과 독일이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수립을 위하여 협력하게 된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절반은 유럽에 관련되고 [나머지] 절반은 대서방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요구 사항을 애치슨이 대부분 수용하였다. 애치슨은 아데나워를 점차로 존중하게 되었다. 이든은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견해를 같이 하였다. 쉬망은 사방에서 압력을 받게 되어 결국 중요한 사안들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아데나워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가입은 미루어졌고, 방위 분담금은 엄청나게 높게 책정되었으며, 군사 무기 생산에는 많은 제한이 가해진 것이다. 자르지역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 외무장관과의 밀담에서 이 문제를 다시 후일에 논의하기로 하였다. 쉬망은 유럽 차원의 해결책을 바랐고 아데나워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동의하였지만, 자신이 [프랑스] 외무부에서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인 협상을 하고 나서 귀국하자마자 아데나워는 외무장관직을 내려 놓으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대표인 폰 브렌타노는 이제 자신이 그 자리를 맡아야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국방장관이 훨씬 중요한 자리라고 대답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오래전부터 때가 되면 압스에게 외무장관직을 내주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자신이 이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던 런던회담 이후에 서방과 맺은 조약이 발효되면 외무장관직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가 외무장관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3년이 더 걸렸다. 그런데 이제 아데나워는 협상이 2~3개월 안에 마무리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비준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3월 9일 그는 공개 모임에서 1953년 여름을 시한으로 못 박았다. 그때까지 4~6만 명 규모의 군대를 서독 방위군으로 편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2년 3월 10일 소련의 각서가 등장하였다. 모스크바는 서방 연합국에 독일의 평화조약을 논의하기 위한 4자회담을 즉각 개최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여기에 조약 초안도 첨부하였다. 독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부는 이미 알려져 있고 일부는 놀라운 제안을 한 것이다. 이 새로운 제안에 따르면 통일된 독일이 자체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고 전쟁물자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또한 비교적 새로운 제안은 통일된 독일이 중립국으로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 각서에는 잘 알려진 서방의 요구 사항인 합당한 조건 아래에 자유선거 실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귀결되는 제안도 담겨있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아데나워의 일차 반응은 3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토 렌츠의 기록에 따르면 “야콥 카이저는 이 각서가 서방 정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이다. 수상은 그 각서가 무엇보다도 프랑스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랑스가 과거에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맺은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코 정책의 불안정으로 불신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이에 관한] 언론 보도를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야콥 카이저와 연방정부 수상 사이에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야콥 카이저는 독일 군대가 유럽 군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연방정부 수상은 유럽 국가들은 스스로 자신을 방위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펠릭스 폰 에크하르트와 테오도르 블랑크가 준비한 연방 기자회견의 논조는 이미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 각서는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련 전략의 궁극 목적은 변함이 없습니다. … 크렘린 정부는 독일 전체 지역이 진공상태로 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소련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고 무력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점으로 지적된 것은 소련이 오더·나이쎄 동부의 독일 지역을 [서독이]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끝으로는 독일 단독으로는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재정적, 기술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소련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독일이 동부의 국가들과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언론 보도에서는 소련의 각서에 자유선거를 언급한 부분은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이는 크렘린 정부가, 동부지역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할 조건이 마련되었는지 조사할 국제연합 위원회에 대하여 입국금지조치를 취한 것과 연장선상에 놓인 사안이었다.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는 과정이 아니던가! 아데나워가, 소련의 각서로 [독일] 통일 과정이 시작될 것인지에 대하여 오래 고민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오히려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통일된 독일의 지위에 관하여 각서에 나온 소련의 생각에 대해서만 반대하였던 것이다! 3년 동안 그는 소련이 [독일의] 중립국화를 제안하는 것으로 여길 때마다 단호하게 ‘늑대 같은!’이라고 외치곤 했었다. 이제 그 늑대가 코앞에 다가왔고 아데나워가 늘 상상했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데나워가 그러한 제안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국무회의가 개최된 날에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대담이 이루어졌다. 이에 관한 보고서는 이본느 커크패트릭이 잘 정리하여 제출하였다. 그는 런던에 소식을 전하면서 독일연방정부 수상은 러시아의 각서가 독일연방정부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하였다. 독일연방정부 내각은 이를 주제로 논의하고 나서 언론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였다. 사정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그 각서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각서의 궁극 목표는 독일을 중립화하는 것임에도 독일의 군대 창설을 제시하여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었다. 독일연방정부는 국군을 원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독일에는 그러한 군대를 창설할 자원도 부족하였다. 아데나워 수상이 보기에 이 각서에서 눈에 뜨이는 또 다른 점은 나치와 독일 군인에 대한 칭찬이었다. 아데나워는 서방측에 즉각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독일 여론에 심각한 혼란이 벌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서방 연합국이 4자회담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명백히 드러냈다. 여기에서도 소련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여론의 반응에 아데나워가 매우 민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틀 후 아데나워가 3월 12일 약 20명의 정부 기자단과 대담을 나눈 것에 대한 영국의 보고서가 나왔다. 아데나워는 이 대담에서 고위위원회 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기본입장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서방 연합국이 러시아와의 대화에 말려드는 것은 결정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스트랭의 보고에 따르면 이 대담에 참여한 기민당(CDU)이나 자민당(FDP)과 친한 저명한 언론인들 가운에 15~20명이 당시 아데나워가 내세우는 노선이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내부 여론의 상황을 볼 때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방에서 이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응답이 러시아와의 대화를 회피하려는 의도로 여겨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데나워의 추가 입장은 3월 14일에 나온 것이다. 국무회의에서 [소련의] 각서에 대한 논의가 또 있었다. 야콥 카이저가 라디오 대담에서 이 각서에 대하여 말한 것 때문에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 오토 렌츠가 전한 바에 따르면 “연방 수상은 조약에 대한 협상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이를 방해하려는 가장 커다란 시도가 바로 러시아의 각서라고 하였다. 이 각서가 프랑스 정부의 약점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최선의 방책은 침묵이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할슈타인이 미국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이다. …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야콥 카이저가 소련의 각서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카이저는 이에 맞서 자기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연방정부 공보실이 발표한 것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맥클로이와 프랑소와-퐁세도 자기 의견에 동의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 점에 관하여 연방정부 수상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모든 것은 아직 유동적이기에 침묵하기보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내각에서는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카이저가 이 경의를 어긴 것은 있을 수 없는 태도라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독일이] 그저 조용히 있으면서 다른 이들이 먼저 말을 꺼내도록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이 먼저 태도를 밝히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편할 수 있는 일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아데나워의 전략 노선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소련의] 각서에 반대하는 의견을 단독으로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방 정부 홍보실을 통하여, 여러 강연과 인터뷰로, 기자들과 만나 개인적인 배경 설명으로, 그리고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장관들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아데나워는 두 가지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곧 무조건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독일] 여론이나 서방 연합국이나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전략을 수정하였다.      

작은 변화는 기민당(CDU)의 개신교 계파를 대상으로 한 유명한 시겐 연설에서 보였다. 이 그룹은 3월 16일 시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기민당(CDU)에는 가톨릭 계파는 없었다. 그럼에도 매우 분명한 이유로 개신교 계파의 설립이 필요했고 아데나워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이를 승인하였다. 여기에서 아데나워는 주요 논점을 몇 줄로 기록한 종이를 들고, 전략적으로 유연한 노선을 개괄하여 말하였다. 잘 알려진 이유를 들어가며 그는 원칙적으로 [독일의] 중립화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사방과 맺을 조약을 협상하는 데에서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가되 동시에 평화로운 화해에 이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강자의 정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는 애치슨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계속 그렇게 나가면, 그리고 [유럽의] 서방이 미국과 힘을 합쳐 필요한 수준의 세력을 키운다면, 그래서 소련 정부와 맞먹는 힘을 기르게 된다면, 소련 정권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가 올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그다음 날 비슷한 뜻을 전달하였다.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대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물론 고위위원들이 보낸 전보에는 대담에 관한 더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여전히 4자회담을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이 회담이 [조약을] 계속 지연시키고 [유럽] 통합 과정과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설립을 방해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 여론의 반응도 신중하게 계산에 넣어야 했다. 이제 아데나워는 소련에 세부적인 질문을 역으로 제기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전체 독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수립될 것인가? 자유선거를 통하여? 국제연합 위원회가 동부지역에 입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제기할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연합의 금지가 무슨 의미인가? 쉬망플랜과 유럽방위공동체(EDC)와 평화로운 유럽통합에 대한 다른 계획에 반대하는가?     

에이즈 장군이 미국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이 대화에서 명시적으로 답변서에서 오더·나이쎄 국경에 관한 문제는 언급하지 말아 주라고 요청하였다. 이 문제는 폴란드가 자유로워지고 나서 나중에 합의해야 할 문제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커크패트릭의 반대 의견을 듣고 나서, 포츠담 협약이 오더-나이쎼 국경과 쾨니크스베르크합의를 확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데나워는 조약에 관련된 작업이 각서교환으로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히려 이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아데나워는 어느 사이에 서방 연합국들도 받아들이게 된 노선을 견지한 것이었다. 3월 21일 [서방] 3국의 외무장관들과 파리에서 가진 회담에서 합의가 도출되었다. [영국의] 외무성이 제안한 대로 답변서는 이제 ‘자유선거’를 매우 강조하고 그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독일의 지위와 더불어 국경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견해차가 있다는 점을 완곡하게나마 명시하였다.     

아데나워는 매우 만족해서 본으로 돌아왔다. 여당을 대상으로 그는 독일연방정부가 이제 각서 발송을 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초안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서방 열강이 유럽통합에을 분명히 생각하고 있으며 통일된 독일의 중립화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독일 국군의 창설을 반대하였다.     

[독일의] 중립화를 반대하는 것에서는 사민당(SPD)과 전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다만 사민당(SPD)은 소련의 제안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협상에서 검토해 보자고 요청하였다.     

이 단계에서 아데나워는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안건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곧 독일 문제와 소련 위성국가 전체의 새로운 ‘질서’의 관계를 화두로 제시한 것이다. 이 문제는 그 이후 몇 년 동안 독일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에서 점점 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러시아가 동유럽 지역에 대한 지배를 풀고 전체 동유럽 블록에 예상되는 반작용을 간과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는가? 아데나워가 기꺼이 자기 생각을 계속 여론에 전달했던 것에 관하여 《차이트》의 에른스트 프리드랜더와 가진 대담의 내용을 살펴볼 만하다. 1952년 6월 런던의 《타임》 발행인과 나눈 대담에서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일단 소련이 소비에트 지역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비밀선거를 통일된 독일에서 실시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리고, 이렇게 새롭게 수립된 독일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면, 소련은 위성국가에 대한 기존의 정책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조치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존재하는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많은 이에게 저항 정신과 해방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소련의 정책에 완전한 전환이 초래될 것입니다. 그러면 1945년 이후 전개된 모든 것이 되돌려지고 소련의 손에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유일하게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은 통합적인 해결책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을 모스크바가 받아들이게 하려면 서방이 더 강해지고 [소련의] 내부적인 어려움이 더욱 악화되는 것이 전제되었다. 영국의 방문객들은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였다. 곧 그러한 시기가 오는 것이 25년 만이 될지 아니면 100년 만에 이루어질 것인지를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아데나워는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5년 또는 10년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판단이 맞는다면 소련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 타당하였다. 그 제안이 진지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이 진지한 것이었다고 하여도 아데나워는 마찬가지로 이를 거부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아데나워에게 중립화된 독일은 너무 불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아데나워에게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야콥 카이저, 파울 세테, 루돌프 아우그슈타인, 한스 체러는 모두 이 시기에 아데나워가 협상을 거부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이었고 독일 문제와 동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연계하는 것을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것이 맞는다면 당분간은 독일문제를 통일을 통하여 해결할 가망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데나워가 소련의 각서 공격에 대하여 하필이면 이러한 복잡한 측면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오직 한 가지 결론만 내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시기에 협상은 전혀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탈린의 각서에서, 하느님의 옷자락이 [인간] 역사를 스치는 소리가 울려 나온다고 말하는 이들을 한심한 멍청이들로 여겼다.      

그의 《회고록》 2권에서 각서교환 사건을 자세히 돌아보면서 아데나워는 이 일을 독특한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곧 1952년 초반에 평생 한 번뿐인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치에서 이상적인 기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이는 역사에서 매우 놀라운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과연 이러한 기회를 인식하는 국가 지도자가 있고, 국민이 그를 따르게 되는가?”     

이 말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한 ‘하느님의 옷자락에 관한 연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가 1952년 초반 기회를 어디에서 찾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 통일의 ‘기회 상실’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의 서방정책이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할 뻔했던 것은 ‘서방의 자유 민족들과 확고한 유대를 맺는 놀라운 순간’이었고, 이러한 기회를 알아채고 활용하여, 동요하는 국민을 하나로 모아 이끈 국가 지도자는 당연히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사망하기 1년 전쯤에 그가 ‘상실한 기회들’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연합정권 내부적으로 아데나워는 [소련의] 3월 각서에 대한 자기 부정적인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전했다. 오로지 3월 12일 카이저가 라디오에서 한 연설을 통해서 여론은 정부 측에 이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이견이 연합정권 내부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특히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에 과연 그러한 이견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얼마나 강했는지는 오늘날에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연정회의 회의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에서 시대 연구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고위위원회의 미국측 위원들도 그 당시에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 뿐 아니라 야콥 카이저와도 [소련의] 각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맥클로이는 3월 15일 자 문서에서 이 두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해석차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그 차이가 카이저가 말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카이저는 그 [소련의] 각서가 실제로 맞는 것일 확률은 10%밖에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맥클로이의 생각이 옳았다. 곧 카이저가 아데나워를 반대하는 것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었다.     

맥클로이가 3월 29일에 보낸 전보에서는 좀 더 자세한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에서 정확히 묘사된 대로, 아데나워는 각서를 단호히 물리친 것이다. 그 주변에 있던 몇몇 러시아 전문가들은 크렘린 정부가 이제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으니 독일도 동방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식보다는, 스웨덴 방식은 아니라도 적어도 핀란드의 방식을 따르면서 말이다. 그들은 현재 상황이 1939년 여름 히틀러와 스탈린이 연맹을 맺는 것을 막으려던 서방 열강의 헛된 노력에 비견된다고 보았다. 그 당시 [서방 열강의] 노력은 스탈린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제안하자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w-Ribbentrop-Pakt, 역자주 – 흔히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불리는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상호 불가침을 목적으로 조인한 조약. 조약에 서명자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부름. 1941년에 독소 전쟁이 벌어져 이 조약은 파기됨]     

어찌 되었든 아데나워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 같다는 비난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국무위원 가운데 이 점에서 더 소심하거나 민족주의적 구호에 더 집착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집단은 대서방조약에 관한 협상의 속도를 차라리 늦추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라고 충고하였다. 이 집단은 그러나 그리 세력이 크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그저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부수상인 블뤼허와 기민당(CDU) 좌파에 속하는 인물들로 야콥 카이저와 폰 브렌타노가 있었다. 슈마허가 연정 내부에서 신중한 시간을 버는 전략을 선호하던 이 집단에 속하는지는 맥클로이가 3월 말까지는 확실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분명히 연정 내부에 견해차가 있었지만, 그것이 결코 위협적인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아데나워가 서방과 유대를 추구하는 정책이 정작 위기를 맞은 순간은 1952년 4월 9일에 소비에트 연방이 2차로 각서를 보낸 때였다. 모스크바는 여기에서 양독 정부의 수립을 위한 전제로 독일의 자유선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소련 정부는 국제연합 위원들이 동독에 들어오는 것은 계속 거부했지만 이에 관련된 해결책이 [독일을] 점령한 4개 점령국들이 마련해야 한다는 견해를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통일된 독일의 지위에 관해서 모스크바는 3월 10일 설명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소련의 의도를 좀 더 세밀하게 규정하거나 필요한 경우 수정하는 일은 그 당시 상황으로는 4강의 협상을 통해서만 기대할 수 있었다.     

각서의 신속한 응답과 강압적인 논조를 보면, 소련이 이와 관련된 회담에 즉시 응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서방과의 조약을 일단 지연시키거나 심지어 중단시키게 되자마자, 이 협상이 얼마나 길게 늘어지게 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또한 이제 아데나워는, 협상 과정을 지연시키는 모든 기도에 맞서기로 단호히 결심하였다. 그의 생각으로는 5월이면 서방과의 조약에 서명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국내 정치적으로 그는 새로 수립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첫 지방 선거로 그의 입지가 강화되었다고 느꼈다. 비록 바뎀뷔르템베르크 주의 정부 구성이 그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는 라인홀트 마이어가 이끄는 자민당(FDP)/독일인민당(DVP), 사민당(SPD), 추방민당(GB/BHE)으로 이루어진 연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기민당(CDU)이 거의 36%의 득표율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정당이었다.     

사민당(SPD)은 연방 차원의 정치를 주제로 선거전에 임했지만 참패했다. 오토 렌츠는 이제 알렌스바흐 여론조사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본 정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깊은 수렁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힘든 시기였던 4~5월에 이 수치를 그의 외교에 의구심을 가지는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그 당시 매우 정부 비판적이었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한스 바움가르텐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애치슨이 확고하게 이끄는 미국의 외교가 이제 1952년 초나 초여름에 대서방조약의 체결과 비준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모스크바의 각서가 도착하자마자 애치슨은 4월 11일 모든 서유럽 외무장관에게 조약 협상을 5월 9일까지 완료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는 [협상을] 지연시키려는 시도가 장기화 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아무리 늦어도 5월 중순까지는 미국 의회에서 군사 작전에 관한 결정이 내려지게 될 것이었다. 서유럽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 대하여 합의를 끌어내지 못할 때는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군사원조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유럽방위공동체(EDC)에 관한 것은] 최종안이 마련되지는 않더라도 결정에 이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독일과의 조약을 미국 의회에서 비준하기 위한 시간도 5월 9일 이후에는 겨우 몇 주만이 남게 될 일이었다. 미국 의회는 7월 3일로 지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국] 외무장관 이든도 마찬가지로 조약을 서둘러 마무리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가 [소련의] 새로운 각서를 [조약을] 지연시킬 명분으로 삼으려 하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4월 12일 고위위원회 위원과의 대담을 아데나워가 요청하였을 때 프랑소와 퐁세는 [소련의] 각서에 대하여 [아데나워] 수상과 논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커크패트릭은 자기 생각에 어느 정도 몰입되어 있었지만, 아데나워의 입장은 이상적이리만큼 분명하였다. 소련의 각서는 사실 그리 영리한 술책은 아닌 것으로 무엇보다도 독일의 여론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생각에는, [소련의] 응답 또한 무엇보다도 선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독일연방정부는 그 당시 일단은 공개적인 언급은 자제하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장관들에게 이번에는 또다시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는 당부하였다.     

아데나워는 자기의 잠정적인 구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로 서방 열강들은 독일의 여론을 염두에 두고 [독일의]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4자회담에 참여하는 데 근본적인 준비를 확실히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회담이 오스트리아 평화조약이나 한반도의 정전회담이 보여준 것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미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현실적인 결과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중요하다고 확신하였다. 독일이 앞으로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여기에는 독일이 자율적으로 [서방과] 연합하는 권리도 포함되었다. 독일 방위군이 유럽에 통합될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했다. 독일의 국경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 세 가지 문제에서 소련의 새로운 각서는 전망이 보이는 협상에 대한 아무런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양독을 대상으로 한 선거와 국제연합 위원회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그 응답의 말미에 독일의 여론을 반영해야 했다. 아데나워는 여전히 [선거 감시를 위한] 국제연합 위원회의 위원 파견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었다. 끝으로 4강이 자유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겼다. 러시아가 자유선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통일된 독일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자유선거의 문제와 어느 정도 분리시켜 보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두 문제가 서로 엉키게 될 위험이 어느 정도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데나워는 서방 열강이, 국제연합 위원회를 포함한, 자신이 제시한 요구 사항들을 답변 각서에 포함할 것을 강력히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들에 대하여 소련 측이 동의하지 않을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각서교환이 오로지 자유선거에만 초점을 맞추면 국내 정치적으로 사민당(SPD)과 여당 내의 그의 정적들과의 논쟁으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서방조약을 염두에 둔 선전전(宣傳戰). 이것이 바로 이러한 각서교환이라는 게임의 제목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상황에서, 양독 정부 문제에 관한 전권(全權)을 요청하는 것과 일반조약 제7조 3항을 받아들일 자세 사이에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흥미 있는 문제에 관하여 언급할 의도가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제7조 3항은 서방과 맺은 조약의 의무 조항을 인계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전독 정부에 위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관련 권리의 포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말이다. 통일된 독일 정부는 이론적으로 중립국, 서방과의 연합, 동방과의 연합 가운데 무엇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한 것이다. 다만 소비에트 연방의 생각에 통일 독일 정부는 중립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번에는 고위위원회의 위원 3인 모두와 가진 2차 회담은 4월 16일에 개최되었다. 이날 서방 연합국의 대표들은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아데나워는 이미 나흘 전에 개진한 자기 견해를 고수하였다. 맥클로이는 아데나워에게 소련의 외무장관 비쉰스키가 서방의 답변 각서를 전달할 때, 통일된 독일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는 정보를 전하였다.     

각서에 대하여 독일연방정부 수상과 논의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화를 낸 프랑소와-퐁세는 대화를 듣고만 있다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소련의 제안이 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 서방 열강이 조약의 체결을 서두르게 되면, 성급하게 군 것에 대하여 사민당(SPD)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소련이 보낸 최근의 각서는 슈마허의 입장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는가? 맥클로이는 사민당(SPD)이 이제 4자회담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곧 유감스럽게도 사민당(SPD)의 외교적 입장이 실제로 모스크바의 노선에 접근한 것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였고, 영국의 노동당과 프랑스의 사회당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성급하다는 의견에 맞서 그는 최대한 신속하게 [조약 관련] 사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서방과의 조약을 서두르면서 소련의 각서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예상하면서도 서방 강대국은 4월 26일까지는 신속한 답변을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도 말한 것이다. 이는 각서교환의 리듬을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무회의에서는 아데나워가, 4월 22일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소련의] 각서를 우호적으로 다루되 국제연합 위원회의 선거 감시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는 보고에 대하여 별 이견이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애치슨의 [조약을] 재촉하는 전문(電文)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소련의 각서가 워싱턴에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맥클로이가 아데나워에게 전하기로는 사민당(SPD)이 러시아의 진의를 협상에서 미리 파악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날 슈마허는 독일연방 수상에게도 사민당(SPD)의 새로운 노선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슈마허의 서한은 간청하되 단호한 어조를 띤 것이었다. “4월 9일 자 소련의 각서는 4강 국가들의 협상에서 [독일의] 4개 점령 지역과 베를린에서 자유선거를 치를 조건을 보장하는 것에 대하여 4강이 합의를 이룰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저의 생각으로는 소련의 각서가 독일의 자유로운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지를 철저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독일의 공통된 입장을 서방 3개 연합국 정부에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4강 국가들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실 “가까운 미래에 [독일이] 민주주의적이고 자유로운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 때부터 야당과 정부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게 되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과정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게 된 분야가 드러나게 되었다. 역사학자들도 이에 대하여 논란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때 미국에서 눈에 뜨이는 입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때까지 소련의 각서를 속이 뻔히 보이는 교란작전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해왔던 애치슨이 5월 초에 답변 각서 초안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초안에서 미국 국무부는 소련의 제안을 구실 삼아 전체 독일을 대상으로 한 자유선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위위원회 위원 대표들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베를린에서 모임을 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국제연합 위원회 [선거감시위원]의 파견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 대신에 미국은 [독일의] 자유선거를 1951년 9월 27일 독일연방공화국이 의결한 결정적인 14개 항 결의안을 바탕으로 치를 것을 원하였다. 미국 측에서 볼 때 이러한 제안에는 무엇보다도 자신감에 넘친 도박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 소련과 타협을 보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 있을 대서방조약의 비준에 관한 논의를 염두에 두고 러시아의 허세를 미리 밝히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아데나워는 혼란스러워했다. 맥클로이가 아데나워에게 미국 측의 초안을 보여주자 그는 그러한 회담이 [독일 국민이] 수용할만한 조건에서 [독일의] 통일을 원하는 서방 연합국의 진의를 독일 국민에게 전달하는 데에 실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그는 그러한 회담이 오로지 자유선거의 조건만을 논의하고 이와 관련하여 중립적인 국제위원회가 선거를 감시할 가능성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통일 독일의 선거에 관한 독일연방의회의 제안을 언급한 것은 독일 여론에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4강 국가들의 통제가 다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하였다. 그래서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그러한 회담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기존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조건을 내세운 찬성은, 여기에서 언급한 미국의 입장 전환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표명하자마자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5월 2일 맥클로이와 만난 논의를 하였다. 5월 3일 토요일에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인 조지 케넌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데나워는 케넌을 직감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가 독일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는 교양인인 데다가 독일 문화에 매우 활발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나중에 대립하게 된 것은 아직 먼 후일의 일이었다. 케넌과의 외교 조찬에는 맥클로이도 참석하여 [독일 선거] 문제가 다시 논의 되었다.     

아데나워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늘 그랬듯이 그는 잠을 설치면 이 문제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그는 다시 한번, 고위위원회의 서방 고위위원들과 소비에트연방의 고위위원인 추위코프가 회담하도록 하자는 맥클로이의 제안에 대하여 블랑켄호른과 폰 에크하르트와 논의하였다. 두 사람은 우려를 표명했다. 폰 에크하르트의 기억에 폰 에크하르트는 “러시아의 각서에서 자유선거와 다른 문제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올바른 지적을 하였다. 러시아가 그러한 회의에서 자유선거와 관련된 양보를 한다면 독일 여론은 이 문제에만 집중하고 소련의 각서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문제들을 뒤로 미룰 것을 요구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론과 의회가 일반조약, 추가조약,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서명을 뒤로 미룰 것을 요청하게 될 위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데나워의 신중한 조언자들은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문제에서 수상에게 그의 고전적인 노선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다. 아데나워는 블랑켄호른에게 방금 논의한 생각들을 즉각 고위위원회의 미국 위원 대리와 논의해볼 것을 지시하였다.     

고위위원회 안에서도 하루 전에 영국이 동일한 반론을 제기했다.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 측에서는, 그러한 식으로 4자회담을 베를린에서 개최하는 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망설이고 있는 독일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렇다면 본이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과 그 밖의 조약[의 체결을] 계속 지연한다면 서방 열강들도 4자회담으로 돌아갈 선택지가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을 노릇이었다.     

공식 만찬에 이어 아데나워는 케넌과 1시간 동안 대담을 나누었다. 케넌은 자기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그곳에서 [미국] 대사관저에 입주할 예정이었다. 케넌의 부인은 일단 본에 있는 베누스베르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남편이 러시아로 떠난 지 닷새 후에 출산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캐넌은 러시아 전문가였지만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전혀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곧 케넌은 미국을 떠나기 전에 딘 애치슨과 그의 휘하에 있는 고위 관리들과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워싱턴이 그 당시에는 독일에 관한 동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러한 길로 나아가는 대화도 전혀 바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본과 유럽방위공동체(EDC)와 맺는 조약이 먼저 완료되어야 했다. 그래서만 러시아와의 협의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 협의는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케넌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애치슨으로부터 조약들이 6주 아내에 체결되지 않는다면 미국의 유럽 정책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이러한 계획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케넌은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과 벌인 논쟁에서 강경파의 주동자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이미 긴장 완화 정책에 기울어져서 1952년 초에는 워싱턴을 지배하는 정신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1949년이나 1950년과는 달리 [미국]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감이 생기고 나아가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수소폭탄이 제작되어 1952년 11월 1일 대통령 선거 직전에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의 충격을 받은 결과 미국은 군사력을 다시 증강시킨 것이다. 경제는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케넌은 미국이 적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던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고 느꼈다. 미국이 막강한 힘을 지녔기에 적과 타협할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말아야 했다.     

케넌은 아데나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데나워는 케넌의 이야기를 내각에 알리고 명시적인 동의를 받았다. 케넌은 아데나워에게 전쟁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또한 그는 아데나워에게 러시아의 정책도 부분적으로 [미국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그래서 적당한 때가 되면 러시아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되었든 동서관계는 전체적으로 복잡한 문제였다. 그러나 케넌은 협상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자기 과제라고 설명하였다. 그가 이 기회에 아데나워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모스크바에 있던 대사관 가운데 단지 미국과 독일 대사관만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한 것은 아부가 아니라 진지한 확신이었다. 독일의 업적을 인정받는 것에 늘 집착하던 아데나워는 그러한 칭찬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어서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와 다시 한번 답신각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나중에 말하기를 종일 그리고 밤을 절반 새우며 생각한 끝에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곧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베를린에서 회담하도록 하자는 미국의 제안은 현재로서는 잘못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제안을 이제 하게 되면, 과연 소련의 제안한 [독일의] 자유선거가 진지한 의도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하기 전에 [독일] 내각이 자신에게 조약의 서명을 위임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야당이 이러한 요구를 제기할 가능성도 고려해야만 했다. 그러한 제안을 한다면 내각 관료들도 이러한 노선을 따르게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폰 에크하르트가 제기한 의견을 맥클로이에게 설명하였다. 곧 오로지 자유선거의 요청에 대한 협상에만 집중하게 되면 소련이 이를 양보하게 될 것이지만, 여론이 소련이 제안한 평화조약의 구조적으로 문제가 되는 측면에 주의를 소홀히 하게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독일 여론의 기대가 실제로 다가올 자유선거에만 집중하게 되면 서방과의 조약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된다고도 하였다.     

그의 전략적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곧 고위위원회의 [서방 3국] 위원들이 즉각 소련의 동료 위원인 츄이코프에게, 아직 대답하지 않은 자유선거에 관한 이전의 서한에 대하여 서면으로 주의를 환기해줄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이다. 츄이코프가 적절한 시기에 답을 해오면 여기에 대하여 다시 답변각서를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답이 없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로 진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답변각서에는 양독 정부가 광업연합, 유럽방위공동체(EDC), 그 밖의 유럽통합 계획에 참여해도 되는가라는 문제에 다시 주의를 끌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맥클로이가 5월 3일 워싱턴에 전문을 보내기 전에 런던의 지도부는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를 근거로 고위위원회 위원들의 회합 장소로 베를린을 선택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였다.     

서방의 답변각서가 5월 13일 완성되자 아데나워는 그 내용과 더불어 그 참석 방식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아데나워는 비망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각서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합니다.” 그는 렌츠에게 매우 과격한 표현으로 말하였다. 곧 서방 열강이 그 각서를 정말 제대로 잘 뽑아냈다고 한 것이다. 자기 같으면 그런 식으로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의 여론은 다시 서방과의 조약 협상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협상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돌파구대서방조약 체결     


아데나워의 삶에서 대서방조약의 체결하기 몇 주 전인 5월 26일과 27일에 승리와 패배를 연달아 거두게 된 것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또한 그의 협상 능력과 완고함이 이때만큼이나 확실하게 드러난 적도 없었다.      

4월 중순부터 딘 애치슨은 서유럽 국가 내각에 [조약의] 최종 기한을 전달하였다. 그는 그 조약이 늦어도 5월 중순에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쉬지 않고 벌이고 있던 일반조약과 부가조약에 대한 협상은 5월 하반기에 예정된 외무장관회의 직전까지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정상 회담에서 다루도록 해야만 했다.     

유럽피네방위공동체(EDC)에 관한 협정은 5월 9일 체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 관한 적업도 완료되지 못하여 외무장관 회담이 위기에 처할 것이 예상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측에서 매우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네덜란드는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조약이 무기한으로 미루어지게 된다면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탈퇴하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군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빠져나가면 앵글로·색슨의 강국들이 추가적인 [안보] 약속해주지 않을 경우 프랑스 피네 총리 내각이 조약에 서명할 의사가 있는지를 그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무렵에 국제 정치 상황이 부진해 보이자 연정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는 아데나워가 내각과 연정 참여 정당들이 복잡한 조약 협상에 관여하는 것을 상당한 기지를 발휘하여 잘 막아냈다. 그는 여기에서 헌법적 차원에서도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약 협상은 확실히 연방정부의 소관이 되었고 여기에서 연방정부 수상이며 외무장관인 아데나워, 그리고 테오도르 블랑크가 일을 주도하였다.     

처음부터 아데나워는 야당이 독일연방의회의 외교상임위를 장악하여 카를로 슈미트를 상임위 의장으로 내세워 기꺼이 외교 정치에 간섭하려는 의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또한 아데나워는 폰 브렌타노를 중심으로 오이겐 게르스텐마이어와 쿠르트 게오르그 키싱거와 같은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 정권의 몇몇 주도적인 외교정치가들이 [외교 문제의]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려는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느꼈다. 의회 외교상임위, 그리고 서방과의 조약을 다루기 위하여 수립한 소위원회의 활동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로부터 1년 후의 시점에서 과장되지 않은 분명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방의회는 구성된 지 얼마 안 되고 의원 대다수가 행정 분야에서 잃을 것이 조금도 없는 분야에서만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생각에 연방정부는 확신을 가지고 행정과 입법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는 사실 고위위원회나 연합국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해당된다.”     

사민당(SPD)이 [독일이 서방과 맺는] 조약에 맞서 싸운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좋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들어선 연방정부들도 매우 논란이 되었던 조약 협상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야당이 조약에 맞서는 것에서 너무 일찍 정보를 확보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정부 측의 주요 의원들에게만 비밀 정보를 전해주었다. 국무위원들조차도 협상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분명히 의도적인 조치였다. 비록 그가 민감한 협상자료를 공개하면 커다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생각에 기밀 정보를 여당에 공개한다면 그의 정책이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었다. 너무 많은 인사들이 과격하거나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도권을 내주면 모든 것이 쉽사리 망가질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아데나워는 여당 당파가 전국 차원에서 반대하고 있는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예산 문제에 집착하는 의원들의 근심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아데나워는 외교정책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장 심각한 재정적 부담도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다. 프리츠 쉐퍼는 무조건 서방과 유대를 맺을 것을 주장하였지만 예산의 부담에 관해서는 연합국과 아데나워를 믿지 못하고 최대한 반대에 나선 것이다.     

아데나워는 자민당(FDP)의 내분을 가장 걱정하였다. 자민당(FDP) 내부에서는 일부 지방당 조직이 1953년 총선을 염두에 두고 자민당(FDP)을 가장 강력한 우파 정당으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반면에 라인홀드 마이어스가 이끄는 서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기꺼이 사민당(SPD)과 연정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자민당(FDP) 우파는 독일연방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독일] 통일 문제, 자르지역 문제, 그리고 조약에 나오는 다른 민감한 문제에서 당연히 아데나워의 노선과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소수당인 독일당(DP)이 1953년 기민당(CDU)과 자민당(FDP)과 더불어 같은 유권자 계층을 놓고 표를 얻기 위하여 싸워야 하기에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는 또한 프랑스의 모범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국회의 외교상임위가 행정부에 맞서 매우 포괄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연정에 참여한 정당 소속 의원들의 은밀한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아온 카를로 슈미트가 본의 외교상임위에서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았다. 그 결과는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의회의 전체 회의에서 어렵지 않게 찬성을 받은 강제적인 결의안으로 제재받아왔다. 로베르 쉬망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1952년에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이에 반하여 [독일] 연방정부 수상이라는 인물은 미국과 영국 측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연정 소속 정당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와의 협상을 수년 동안 방해해온 지속적인 어려움이 여기에서는 없었다. 또한 서방 국가들에서 늘 존재하던, 아직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있는 서독이라는 나라의 외교정책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여전한 두려움이 그러한 이유로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사실 가끔 혼선이 발생되는 전략적 지원 체계를 수립하여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노선은 예측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점차 안심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데나워가 독일연방의회의 구심력을 발휘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약을 독일연방정부에 체줄하여야 하는 이 고난의 행군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폰 브렌타노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내부에 형성된 반대전선의 선두에 서서 계약 문서의 최종판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데나워는 사실 이 문서를 체결한 다음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브렌타노는 화가 날 대로 났다. 그가 제기한 외무부서에 대한 반대 의견을 얼마 전에 아데나워가 그가 바라던 대로 살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일반조약과 부가조약의 첫 요약문이 그의 책상 위에 놓이게 되자 그는 매우 실망하고 또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는 기민당·기사당 원내교섭단체(CDU/CSU Fraktion) 내부의 불만이 자민당(FDP) 내부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들끓고 있었다. 자민당(FDP)의 블뤼허가 더는 참지 못하여 그를 중심으로 여당 소속의 장관들과 의원들이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연정 내부 전체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예상이 되었던 결과가 바로 나오게 되었다.     

주말인 4월19~20일에 폰 브렌타노는 최초로 상세한 보고서를 받았다. 이미 4월 25일에 그는 페르드멩게스와 더불어 아데나워에게 연락하였다. 그는 아데나워에게 조약 내용이 이대로라면 독일연방의회에서 비준될 가망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가 여당이 5월에는 할 일이 넘쳐난다고 말한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였다. [전쟁] 부채배상법 의결이 곧 있을 예정이었다. 여기에서 여당 안의 추방민 계파와 커다란 충돌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추방민 단체회원 가운데 6만 명이 대규모 집회를 위하여 본으로 모였 들었다.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늘 다루기 힘든 기민당(CDU) 소속 추방민 대표인 리누스 카터가 위협을 실행에 옮겨 여당에서 탈당해버리면 총선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렇게 되면 정치 여정에서 가장 불안한 입지에 있던 추방민당(GB/BHE)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노조도 정부의 기업운영법에 반대하였다. 여당이 광업공동결정권에 관한 법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평화를 바라는 뜻에서 대기업에 평등한 공동결정권을 도입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경고파업의 결과로 하필이면 기대가 한껏 고조된 본의 외무장관회의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브렌타노는 이후 14일 이내에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간곡히 권유하였다. 아데나워가 정부 안의 다수의 생각을 모른 채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연방의회가 비준을 거부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정치의 종말이 될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자세한 생각이 확실히 나와 있는 4월 25일 자의 장문의 편지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안들이 언급되었다. 이 사안들은 그때부터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는 독일조약 제7조 3항, 위기 상황 관련 조항, 합병조약,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재정적 부담이 포함되었다. 재판받은 독일 전범들에 대한 사면 절차의 상황도 불만의 요인이 되었다. 브렌타노는 자기 입장을 매우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는 그러나 – 저는 사실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협상이 마땅히 진행되었어야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데나워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내용 작성 작업이 5월 9일로 예정된 체결 일을 단 사흘 남긴 시점에도 아직 자신에게 제출되지 않았기에 매우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연방의회의 최대 정당의 당대표와 독일 국민의 자존심을 책임지고 있는 정당의 대표조차 그 내용을 전달받지 못하게 된다면 말이다.”     

폰 브렌타노가 차마 용기를 내어 연방정부 수상에게 직접 보낼 수 없었던 편지를 파리에 있던 테오도르 블랑크가 대신 읽어보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저는 직무 위반만이 아니라 의회 권리 침해가 자행되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해야하겠습니다. 관료주의의 비밀 정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솔직히 이야기하고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결과에 책임을 질 용기를 지녀야합니다.” 그가 이 편지를 5월 7일 막 보내려고 할 때 프랑스 수도에서 데미지에르 중령이 와서 파리조약 문서를 전달해 주었다.     

같은 날인 4월 25일에 폰 브렌타노가 당 의장단의 일치된 지지를 받으며 아데나워의 비밀 정책을 공격할 때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마이어 주지사가 자민당(FDP)/독일국가인민당(DNVP), 사민당(SPD), 추방민당(GB/BHE)으로 구성된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아데나워는 매우 실망하였다. 연방잠사회에서 진행될 비준 절차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가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연방 정치 차원의 결과가 즉각 피부로 느껴졌다. 이미 5월 9일에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는 사민당(SPD)이 지배하는 주들과 연합하여 주정부의 소득세와 법인세 부담률을 27%에서 40%로 인상하고자 하는 연방정부의 입법 취지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데나워는 즉각 반발하였다. 독일 서남부에 주정부가 들어선 지 3일 만에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에게 추가조약에서 모든 동의가 필요한 조항들을 삭제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5월 8일 그는 또다시 경고하였다. 사실 얼마 안 가서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를 제대로 인식할 것을 권고하였다. 모든 것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나타난 것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방참사원에서 부결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이 사안에 대한 내각의 결정을 자신이 독단적으로 내릴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현실적으로 여기에서는 이전부터 상당히 논란이 되어왔던 것으로, 압류된 독일 재산의 보상에 관련된 복잡한 문제가 연관되었다. 그러나 고위위원회 위원들은 합의된 [조약] 내용을 고수하며 아데나워의 제안에 반대하였다. 아데나워는 문제가 되는 규정들을 수정하지 않고 모두 조약 초안에서 삭제하고 주정부 차원의 법률로 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맥클로이는, 아데나워가 끌어내고자 하는 동의에 필요한 1%의 찬성표는 독일 국민이 매우 안 좋게 생각하는 점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아데나워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은 차마 입 밖에 나오지는 못했다. 아데나워는 사실 일련의 문제가 되는 내용을 [미리] 제거하여 법률적으로 정해진 규정을 거부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위위원회 위원들 앞에 나설 수 있으며, 연방참사회의 다수파들의 악의를 비판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연방정부도 일반조약에서 연방정부에 유리한 규정대로 [조약을] 체결하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조약의 내용은 1953년 [독일]연방참사회에서 커다란 어려움을 야기한 채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결국 아데나워가, 연정 참여 정당들의 비판을 받는다는 인상을 주는 가운데 4월 말에 병합 조약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였기에 고위위원회의 의심을 더욱 북돋우게 된 모양이 되었다. 반면에 의원들은 너무나 큰 나무들에 시선을 빼앗겨 숲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행정협약의 내용 일부를 삭제하게 된다면 다른 일들은 훨씬 쉬워질 것이었다. 아데나워가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가서 그가 귀찮게 여기는 내용을 삭제하거나 완화하려고 한다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약 내용의 일부를 보완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별무소득으로 끝났다.     

중요한 점은 여전히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와 점령군 비용 지불의 문제에 대하여 아직 확실한 합의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서방 연합국은 추가로 독일의 [유럽] 방위 참여에 더하여 연합국 주둔 비용의 상당액을 [독일이] 부담하기를 바랐다. 게다가 독일 재산을 압수한 것에 대한 보상비용도 독일 협상 당사자에게 전가하고자 한 것이다. 프리츠 쉐퍼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를 표명하였다. 아데나워가 오토 렌츠에게 한 말에 따르면 이는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사실 쉐퍼는 자잘한 것에 신경 쓰는 협상 태도로 연합국을 극도로 짜증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우리 [독일] 측에 수백만 마르크의 손해를 입힌” 인물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나 쉐퍼는 5월 11일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재정적 자원을 논의하였다. 쉐퍼는 연합국의 지나친 요구에 대한 비판하였다. 그의 사직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앞으로 점령군 비용으로 지불하는 금액 가운데 5억 마르크 이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의 승인을 직접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만약 이를 연합국 측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연방정부 수상에게 자기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하필이면 바로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부수상 블뤼허도 수상을 비판하는 세력에 매우 노골적으로 가담하게 된 것 때문에 아데나워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사실 이 세력이 얼마나 단호하게 연정의 붕괴를 감수할지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아데나워가 자민당(FDP)의 지도부가 조약 내용의 개선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연정에서 탈퇴하기로 5월 초에 비밀 결의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5월 6일 블뤼허가 아데나워에게 보낸 편지에는, 기민당(CDU)과 기사당(CSU) 의원 일부와 독일당(DP)도 반대 세력에 가담하고 있기에 정부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연정 위기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었다.     

블뤼허는 일반조약의 상당 부분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위기 상황에 관련된 조약 제5조는 “동등권을 상당히 침해하는 것이기에 이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자민당(FDP)은 무엇보다도 제7조 3항을 가장 강력하게 걸고넘어졌다. 곧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블뤼허가 강제 조항에 반대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는 동부지역이 [곧 동독이]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할 길을 열어주게 된 것입니다. … 그 조약으로 동부지역은 통일된 독일에 관하여 전가된 의무의 구속력을 확보하고자 할 것입니다. 기존의 [초안에 있는] 제3항은 예상되는 소련의 주장을 정당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면 [독일] 통일에 관한 협상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에 한 마디 더 보탠 인물이 자민당(FDP) 의원인 에른스트 마이어였다. 그는 일번조약을 ‘항복조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일당(DP) 원내대표인 한스 뮐렌펠트는 자기가 소속한 당은 ‘제2의 베르사유조약’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중에 그는 이러한 입장 표명을 부인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도 《벨트》와의 인터뷰에서 ‘깊은 유감’을 표명하면서 새로운 협상의 개시를 요구하였다.     

아데나워는 강력한 논조의 서한으로 바로 부수상에게 반격을 가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데나워는 자신이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면 일단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의 어리석거나 바르지 못한 진행 방식을 비난하며 역공을 가하였다. [그의 생각에] 자민당(FDP)은 전체 수뇌부, 당내 수뇌부, 자민당(FDP) 외교위원회 대표가 일반조약에 관한 1차 논의를 개최하는 데 합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과 독일당(DP)이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가정해보면 우리는 제 생각에 4개의 각기 다른 회의체를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이 회의에 참여하는 인원은 총 100명에 이게 됩니다. 일단 독일 측에서 [조약] 수정 제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발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방식으로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 일이 진행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아데나워는 이를 어찌 여겨야 하는지는 차마 말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편지에 쓰기를, 게다가 이는 “매우 손실이 큰 일이었다.” 이 일로 외교정책 활동에 필수적인 비밀 엄수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또 하나의 독화살이 날아갔다. 자민당(FDP) 안에서 2월의 국방 문제 논의 이전에 일반조약에 관한 자세한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을 낭독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또한 국무위원들도 일반조약의 내용을 보고 받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작은 예절을 갖추어 애써 부드럽게 표현한 통렬한 비난이 숨어있었다. 이러한 절차는 “모든 합의를 완전히 거스르는 것이며 모든 것을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블뤼허의 편지를 보고 나서 거의 “외교정책을 끝장내고 말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국내정치적인 영향에 대하여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리하여 독일 외교 정책의 미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신사분께서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즐기시다가 우리가 처한 현실과 위험의 수준을 간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끝이 없어 보이는 국무회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5월 10, 11, 12, 13, 14,16, 20, 23일에 장관들과 정당 대표단이 늘 되풀이 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아데나워와 그의 대리인들은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대규모의 국무회의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대표단 차원에서 상당히 소란스러운 회의로 진행되었다. 매우 화가 난 폰 브렌타노는 아데나워에게 여당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여당은 정보가 부족하여 일치된 의견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는 협상이 좌절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경우 정부의 퇴진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가장 충격적인 공격이 될 것이었다!     

그러한 공격 앞에서 아데나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두 팔에는 습진 때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는 그러나 침착하게 앉아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하였다. “맥클로이는 내각과 여당과 논의를 하고 나서야 [조약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대규모의 내각 토론이 열린 5월 10일 아데나워의 몸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그의 팔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정치적 운명 전체가 걸려 있었지만 국무회의를 오래 끌지 않도록 하고서 동생 아우구스트의 80살 생일 찬치에 참석했다. 또 같은 날 연방 대통령으로부터 대연방철십자훈장을 받았다. 역사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연방정부 우정국 장관인 슈베르트는 [도청 장치가 있는지를 의심하여] 국무회의실을 철저히 조사해 보았다는 이야기로 참석자들을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도청 장치를 몰래 반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100% 보장은 아니었다.     

회의 시작 때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포괄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이끌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날 있었던 고위위원회 위원들과의 면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이 면담에서, 독일연방정부가 조약을 거부한다고 해도 새로운 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한 미국 [정부] 대변인 성명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물었다고 하였다. 아데나워가 국무회의 위원에게 설명한 바로는 그 대담에서 고위위원회의 3인의 위원들이 그를 매우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당연히 새로운 협상은 있을 수 없다고 한목소리로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독일연방의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 노릇이었다!     

그러고 나서 1년을 훨씬 넘어 지속된 협상에 임하는 서방 열강의 의도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서방 열강은 독일에 대한 애정에서가 아니라 러시아라는 나라에 압박을 느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에 대한 외국의 태도는, 적어도 미국을 제외하고 본다면, 여전히 별로 좋지 않았다. 나치의 악행에 대한 기억이 외국에서는 여전히 생생하였다. 게다가 독일이 경제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을 보며 외국은 독일인의 근면성에 대한 두려움도 지니게 되었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협상 결과를 들고 내각과 여당을 상대해야 했던, 아데나워의 후임 수상들과 마찬가지로 아데나워도 이 기회에 패전에 따른 청산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1949년 이후 독일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훌륭한 발전을 이루어 다시 동등한 권리를 지녀서 다른 자유 민족들과 견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독일연방의회가 비준을 안 한다면 점령군 규정이 다시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서방 연합국은 사실 패전국인 독일의 국민에게 일종의 편의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통제를 완화했던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아데나워가 지난 해 4월에 마지막으로 페터스베르크를 방문했지만 사실 언제든 그곳에서 아데나워를 다시 소환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런 식으로 [조약] 비준이 안 되면 초래될 결과에 대해 비관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는 서방 정책에 대한 자기의 장대한 구상에 사람들이 동의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독일이 서방의 방위[연합체]에서 탈퇴한다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의 방위 개념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될 노릇이었다. 또한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하는 방위 개념도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러시아는 독일의 산업 시설을 초토화하려고 할 것이고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중요한 것은 모두 파괴할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긴장은 지나갈 것이고 전쟁도 없을 수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생각에는 말이다. 또한 케넌의 생각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미국과 영국이 독일의 통일을 바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 통일되지 않으면 유럽에 평화도 있을 수 없을 노릇이었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만 그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합의는 전체적인 규정의 맥락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만약 동부지역, 곧 동독이 [소련의] 위성국가 연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독일 문제는 세계 차원의 그리고 유럽 전체의 동서 긴장 문제와 분리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조약 내용의 3분의 2는 평화에 관한 내용을 담아야 했다. 긍정적인 내용을 가장 강조해야 했다. 그리고 독일이 서방 연합의 회원국이 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였다. 우리는, 곧 독일은 패전국의 국민인 것이었다!     

조약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그의 논지의 주요 내용은 독일이 내린 결정이 미국의 여론에 미칠 파장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몇 주 전에 그는 내각에서 미국 국민이 군중심리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었다. 미국의 여론이 24시간 이내에 뒤집히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태프트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라도 한다면 당장 정책을 뒤집고는 유럽에서 미국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한 미국 상원의원이 아데나워에게 말했다. 그것은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아데나워는 이 자리에서 거대한 유럽의 미래 전망보다는 [조약을] 거부했을 경우의 결과를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유럽연맹이야말로 서방 문화의 몰락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갈파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회의 말미에서 할슈타인은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번의 조약은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 때와는 달리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연방정부는 연합국의 초안에 대한 130개 항목에 걸친 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하였다.     

이제는 단순히 자문 역할을 하게 될 뿐인 국무회의에서는 비상조치 조항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되었다. 폰 브렌타노가 이에 반대 논조를 펼치자 아데나워는 일단 독일군이 창립되고 나면 제5조에 따라 비상권이 독일연방전부의 동의 없이는 비상조치가 발동되지 않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이제 제7조 3항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할슈타인은 이에 관련된 배경 설명을 하였다. 로버트 보위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연합국을 하나로 묶고자 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서방 연합국이 하나로 단합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아데나워는 독일당(DP)의원인 폰 메르카츠의 제안을 물리쳤다. 그러고는 서방 연합국을 하나로 단합시킬 것을 바라는지 아니면 러시아를 고려하여 [독일의] 새 정부가 모든 [서방과의] 유대를 거부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하였다. 조약을 맺는 상대방들은 이 권리의 이양을 제안할 리가 없으니 우리가 그것을 쟁취해야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벨하우젠 의원이 이에 관하여 그렇게 할 경우 믿음직하지 못한 프랑스와도 단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자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문제는 우리가 곧 해결할 것입니다!”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수립과 일반조약의 발효를 동시에 시행하지 말자는 자민당(FDP)의 제안을 아데나워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니클라스 장관이 종일 진행된 회의로 졸도하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아데나워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렌츠는 회의 도중에 한 신문 기사를 아데나워에게 보여 주었다. 그 기사에는 아데나워가 [조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자신이 물러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렌츠는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에 남겼다. “그는 [아데나워는] 마치 그것은 [곧 퇴임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듯이 웃으며 그 신문 기사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다음날에는 재정에 관한 문제가 논의 되었다. 아데나워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결론을 내려야 하는 협상에 대한 논지를 전개하였다.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가 일단 의구심을 격렬하게 표명하였다. 기민당(CDU)에 친한 《쾰니셰 룬드샤우》가 국무회의에 참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부 기밀에 관련된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테오도르 블랑크가 유럽방위공동체(EDC) 계약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화학무기 금지 조치에 관한 논의에 이르자 블랑크가 말했다. “이러한 더러운 것을 우리가 생산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어서 호이싱거 장군이 발표한 것은 국무회의와 더불어 이 단계에서 더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그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는 정당 대표들에게 독일의 방위가 독일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독일당(DP) 소속의 헬베게 장관이 이른바 전범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면서 폰 만슈타인 장군과 같은 장교들이 구금된 한 독일 국민이 [독일을 위하여] 싸우기를 바랄 수 없다고 주장하자 아데나워는 [조약] 비준과 사면 문제를 연계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특히 이 점에 관하여 아데나워는 흥분하면서 나치 시대를 상기시켰다. 여기서 더 나가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가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무장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하여 다시 논의하게 되었을 때 아데나워가 한 이야기였다. 아데나워는 독일연방공화국이 중화기 문제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이 다른 국가들과 버금가는 무기를 확보할 수 없다면 군대를 창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현재와 같은 제한 규정으로는 합의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위기 상황에 관한 규정 때문에도 다시 한번 협상을 진행해야 하였다. 5월 13일 아침에 내각은 두 가지 논쟁이 되는 문제에 관한 수정안을 논의하였다. 아데나워가 이 회의에서 찬반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여전히 고집 센 나귀처럼 확고하게 주장한 것은 조약으로써 점은 서방 열강을 묶어 두는 것이었다. 독일을 희생하여 러시아와 합의를 이루는 일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또 다른 논지를 제시했다. 곧 제7조 3항의 수정을 제안하면서 매우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서방 국가에 독일연방공화국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서방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이러한 맥락에서 얼마 후에 예정된 미국 기자와의 대담을 언급하였다. 이 기자는 아데나워에게 [독일의] 사민당(SPD)이 정권을 잡아도 조약이 지켜질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하고자 하였다. 아데나워는 이에 대하여, 1953년에 결코 사민당(SPD)이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데, 10대 1의 확률로 내기를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국무회의에서 수정안에 관한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난 다음 이날 바로 고위위원회 위원들과 7시간에 걸친 협상이 이어졌다. 정부의 동의를 전제로 아데나워와 고위위원들은 제7조에 관한 매우 중요한 개정안에 합의하였다. 제7조 1항은 기존 안을 유지하되 2항과 3항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기로 한 것이다.     

“② 평화조약 규정의 체결에 이르기까지 독일연방공화국과 3개 강국은 공동 목표인 통일 독일을 평화로운 수단으로써 실현하기 위하여 협력한다. 통일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과 마찬가지의 평화롭고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수립하여 유럽 공동체에 통합된다.     

③ 독일연방공화국과 3개 강국은 이 조약, 추가조약, 통합된 유럽 공동체에 관한 조약에 따라 통일 독일이 독일연방공화국의 권리와 의무를 승계한다는 것에 합의한다. 그 규정은 이 조약들이 규정한 것이거나 이 개정안의 관계 당사자들 간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견해차를 해소하기 위한 이 회의는 밤 10시에 종료되었다. 모두가 지쳐있었다. 프랑소와 퐁세는 이런 자리에서 흔히 해왔듯이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독일국가를 개사하여 [통일, 법, 자유가 아니라] “철저, 법, 자유”를 넣자고 제안하였다.     

다음날 아데나워는 내각에 보고하면서 제7조와 관련하여 양보를 예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비상사태 조항과 관련하여 확실히 형식적인 개정이 관철될 수 있었다. 제7조 3항을 둘러싼 싸움이 다시 벌어졌다. 아데나워는 [이 조항에 관하여 독일이 제시한] 문구를 관철하는 것이 개정안에 관한 모든 논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콥 카이저는 아데나워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현실적으로 프랑스는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고자 하기에 기존의 문구를 찬성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에 아데나워는 카이저가 사민당(SPD)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사민당(SPD)은 양독을 대상으로 한 선거가 중요하니 그전에는 조약을 체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델러는 제7조를 둘러싼 논의에는 기존 정치의 근본적인 기초가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의 말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     

의견 대립은 매우 뚜렷하였다. 야콥 카이저는 결국 서방 열강과 확고한 유대를 맺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미해결로 남게 되는 상황을 강력히 막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그레베가 독일 측을 이끄는 실무 차원에서 특히 [점령군 권한을 독일에 넘기는] 양도조약에 관하여 치열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15일의 협상은 그다음 날 새벽 5시에야 끝이 났다. 아데나워가 5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협상 당사자 양측 모두 체결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황 파악이 긴급히 요청되었다. 이는 또한 외무위원회에 신속히 [진행 상황을] 보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의미하였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 조약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논의되고 나서 내각은 8시 30분에 다시 [조약] 제7조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또다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할슈타인은 서방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다시 초안으로 돌아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할슈타인은 다시 한번 전체적인 [조약의] 의도를 설명하고 사민당(SPD)은 [독일이 서방과] 유대를 맺으면 단지 러시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이유로 [조약을]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제 서방 열강의 5월 13일 자 답변 각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각서는 독일 정부가 협상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정신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블뤼허가 제7조 3항에 반대하는 발언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렌츠의 기록에 따르면, 이 조항에 대하여 이제 토마스 델러가 반대 발언을 하였다. 뒤를 이어 당대표인 폰 브렌타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쓰, 자민당(FDP)의 헤르만 쉐퍼가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반면에 독일당(DP)의 프리츠 쉐퍼와 폰 메르카츠는 찬성하였다.      

아데나워는 이 문제에서 자민당(FDP)과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의 중진 의원들의 반대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쉐퍼는 이와 관련하여, 아직 가능하다면 연방정부 수상에게 제7조 3항을 삭제하도록 건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이 문제로 연정이 흔들렸다. 5월 20일 오후에 서명 계획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데나워는 마침내 여당에 압력을 가하는 일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며칠 전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내각이 수긍할만한 조약 구문을 마련해왔던 렌츠마저도 이 항목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연방의회의 분위기로는 기존의 제7조 3항을 보존한 채로 일반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렌츠는 건전한 상식적 생각을 하였다. 아데나워가 바라는 대로 수립된 통일된 독일 정부라면 그 정부는 이 항목에 나오는 것을 다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제7조 3항도 전혀 족쇄가 될 리가 없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 렌츠, 글롭케의 삼자 대담에서는 글롭케가 기존의 조항 문구로 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오토 렌츠의 상황판단에 동의하였다.     

5월 20일 국무회의를 시작하면서 아데나워는 제7조 3항에 관하여 상황이 어떤지를 묻고는, 처음부터 다수의 의견에 자신도 따르겠다고 말하며 [반대파에] 항복하였다. 장관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데나워는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어서 블뤼허가 내각의 다수는 그 조항의 삭제를 바라고 있다는 설명을 하였고 이에 대하여 아데나워는 그런 이유로 그 조항을 삭제하되 야당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아데나워가 이렇게 하여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는 야콥 카이저의 정치적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카이저는 당장 이는 옳지 않다고 설명하였다. 카이저는 아데나워 자신이 그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어서 카이저가 독일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할 필요성에 대하여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필요성을 내각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뜻밖에 다시 가장 멋진 헌법 관련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7조 3항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먼저] 논지를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로베르트 레어, 한스-크리스토프 세봄, 프리츠 쉐퍼가 가담하였다. 자민당(FDP) 소속 장관 가운데에는 블뤼허와 델러가 삭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조항이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민당(CDU)에서는 야콥 카이저와 로베르트 틸만, 그리고 안톤 슈토르흐도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슈토르흐는 그러지 않으면 [곧 그 조항을 삭제하지 않으면] 다수의 찬성을 얻을 수 없다는 전략적 논거를 들었다.     

아데나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연정 참여 정당의 대표들의 입장이었다. 자민당(FDP) 소속 장관들의 거부 자세는 당의 일부만이 동조하였다. 독일당(DP) 소속의 17명의 의원들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폰 메르카츠는 조항을 유지하자는 측에 속했음에도 당대표인 뮐렌펠트의 편지를 아데나워에게 읽어 주었다. 뮐렌펠트는 그 조항의 삭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도 이 문제에 관하여 여전히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다. 폰 브렌타노는 당의 다수가 그 조항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조항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조인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며 삭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메르카츠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메르카츠는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줏대가 없다고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자기 당의 당대표단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두 실무단과 논의를 한 것으로 여겨졌다. 각 실무단에서 8명이 제7조에 찬성하고 2명이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그 자신은 관련 조항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당의 입장 표명이 전혀 안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결국 아데나워는 공식적인 투표를 진행했다. 단지 3명의 장관만이 조항의 페지에 찬성하였다. 이들은 바로 블뤼허, 델러, 야콥 카이저였다. 그러나 연방의회에서 사민당(SPD)이 [이 조항의 유지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기에 이 조항의 [유지에] 찬성을 얻어낼 수가 없어보였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그 조항을] 삭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다음날 서방 외무장관들이 본에서 회합을 가지기 전인 5월 23일 아침에 국무회의가 다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조항의] 삭제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전해야 했다. 독일 언론이 제7조 3항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다루는 바람에 이를 삭제하는 것은 마치 소련이 승리나 되는 듯이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의 주장에 따르면 연합국은 [독일을] 매우 불신하게 되었다. 아데나워는 외무장관들이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논의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슈마허도 [아데나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조약에 서명하는 자는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었다.     

딘 애치슨과 첫 대담을 나누기 직전에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측근들과 논란이 되고 있는 조항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여기에는 렌츠, 블랑켄호른, 글롭케가 참가하였다. 당대표단의 반대로 그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렌츠가 그들에게 가서, 제7조 3항의 개정을 요구하는 그들이 입장을 서면으로 표명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지시하였다.     

5월 25일 아침에 폰 브렌타노를 대표로 하는 일부 [독일] 연방의회 의원들과 미국의 국무장관인 딘 애치스과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이는 나중에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이 일요일에 진행된 대담이 아데나워의 사전 동의로 이루어진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애치슨은 법률가이자 매우 건전한 상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이 매우 이론적인 문제를 부풀린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어떤 제삼자가, 예를 들어 서방 3개 강국이나 독일연방공화국이 그 조약에 참여하지 않은 국제법적인 주체, 곧 [나중에 수립될] 통일된 독일을 규제하는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것인가? 당연히 이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한 조약은 통일된 독일의 자체적인 행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통일된 독일이 아니라 독일연방공화국과 서방 강국들만이 이 조약에 묶이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이 조약 [당사자들]은 필요한 경우에 상호 합의에 따라 조약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립 예수프는 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초안은 의원들의 승인과 다른 외무장관들의 동의도 받아야 했다. “통일된 독일과 관련해서 [서방의] 3개 강국은, 독일연방공화국이 이 조약과 추가조약을 바탕으로 누리는 권리를 합의가 필요한 조정을 거쳐 통일된 독일에 승계하는 것에 동의하고, 유럽 공동체 수립에 관한 계약에 기초한 권리들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승계하는 것을 승인한다. 다만 독일연방공화국이 3개 강대국에 대하여 수행하는 의무들, 또는 앞에서 언급한 조약들을 근거로 그 의무 가운데 일부를 승계하는 경우 그러하다.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앞에서 언급한 조약을 근거로 3개 강국들의 권리를  손상시키거나, 이 조약에 따른 독일연방공화국의 의무를 축소시키는 그 어떤 합의도 이룰 수 없고 협정을 맺을 수도 없다.”     

이제는 분명하게 규명된 독일연방공화국의 [서방과의] 유대만이, 법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미리 정해 놓은 통일된 독일의 [서방과의] 유대보다 정치적으로 덜 부담스러울 이유는, 원래의 조항 구절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새로운 구절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인 이들만의 비밀로 남게 될 것이었다! [사실] 통일된 독일이 조약에 명기된 의무 조항을 승계하려고 하지 않아서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 제7조 3항이 없이도 [어차피] 서방 정부들은 독일연방공화국이 통일된 독일에 편입되는 것을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서방 연합국과의 유대는 완전한 주권의 [회복을] 포괄하지는 못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지위 권리와 연계될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조약의 체결 이후에 독일연방정부는 유럽방위연합체에 가입해야만 비로소 독일의 지위가 열악해지는 것에 반대할 권리를 지니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의 의무는 어느 정도 불명료한 채 남아 있었다. 확실히 조약 전체의 내용은 매우 모호하게 작성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질 경우에는 즉각 견해차가 발생하여, 서방의 [계약] 위반에 대응할 완전히 신뢰할만한 보호 장치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강대국들이 조약으로 보장한 것이 완전히 믿을만한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아데나워가 [계약] 당사자들이 애치슨의 간섭에 대하여 여러 달 동안 원망을 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폰 브렌타노는 연방정부 수상이 5월 29일 조약에 서명하고 나자, 기민당·기사당연합(CDU/CSU Union)이  그 서명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아데나워에게 “매우 아름다운 장미” 꽃다발을 보내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어진 외무장관회의에서 새로운 [조약] 구절을 즉각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애치슨이 각국의 의회에서 비준된 조약문을 합의의 기초로 삼자고 제안하자 아데나워 수상은 이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였지만 3개 강국이 [독일과 마찬가지로] 의무 조항을 준수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자 즉각 이든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조약 초안에 한 서한을 ‘첨부 VI’로 추가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서한에서 서방 연합국은 ‘제2조 1c항’에 관련하여 약간 과장되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곧 연합국의 의무에 관하여 “3개 강국은 오늘 독일연방공화국을 상대로 서명하는 조약에서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해석할 권리가 없음을 보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도 여전히 불명료한 것이어서 아데나워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곧 독일연방공화국이 제7조 3항 2호에 따라 조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면 연합국에도 상응하는 의무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애치슨은 그러한 내용이 바로 서한에 담겨 있다고 권위 있게 설명하였다. 이에 할슈타인이 다시 한번 중간 발언을 하면서 [아데나워의] 우려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너무 지나치게 무리하지 말고 이정도 수준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치슨이 후일 자기 《회고록》에서 제7조 3항에 관련된 커다란 논쟁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는 아데나워 정부가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긴 벼랑 끝 협상을 이끌었다고 하면서 그저 비웃는 듯이 그것은 순전히 이론적 문제였을 뿐이라는 평을 달았다! 실제로는 [독일의] 통일 절차가 전혀 시작이 안 되었기에 이러한 회고적인 평가는 옳은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1954년 가을에 체결된 개정된 독일조약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제7조 3항이 삭제되었기에 그러한 평가는 논리적이기는 하였다.     

이 시기에는 [곧 1954년에는] 아데나워가 보기에 이 조항이 서방 당국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예방 조치의 보장이라는 그 목적을 이미 달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삭제해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아직] 1952년 초만 해도 세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독일 정책에 관하여 풀리지 않았고 풀 수도 없는 문제가 또 다른 분야에서도 제기되었다. 서방 열강은 독일과 연합국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문제에 관하여 ‘계약적 합의’(accords contractuel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독일 측은 [이미] 별로 아름답지 않고 불쾌한 것을 연상시키는 개념인 ‘일반조약’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데나워는 다른 표현을 찾고 있었다. 렌츠는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아데나워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협상의 마무리 단계에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이 이 명칭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부제를 다는 한이 있더라도 공식적인 명칭을 ‘독일조약’으로 하게 되면, 이 조약을 [독일 국민들에게] 선전하는 일의 어려움을 덜어줄 것으로 보인 것이다! 맥클로이는 이 문제는 외무장관 차원의 논의로 미루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의 뜻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프랑소와 퐁세는 아데나워에게 비꼬는 듯이 반발하였다. 독일조약이라고? 이 조약은 단순히 ‘서독’과 맺는 조약일 뿐이다. 그래서 독일 평화조약의 ‘부분[조약]’, ‘서주’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좋든 싫든 아데나워는 일단 자기 제안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고는 ‘부분[조약]’이라는 표현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소동으로 조약 초안의 모호함 속에 무슨 문제가 감추어져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별생각 없이 자신을 ‘독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당시 아데나워도 공식적으로는 실제로 ‘독일’ 정부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 논쟁은 상당 부분이 아직은 국제법적인 주체로만 존재하는 ‘전독’(全獨)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상황에 맞지 않는] 어색한 단어들과 마찬가지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제국을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조차도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제국을 동일시하는 것에 찬성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독’, 나아가 ‘통일된 독일’이 결국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단순히 헌법이 규정한 독일연방공화국인가? 빼앗긴 땅을 최대한 수복하고자 한 그 당시 대다수 독일인이 바라는 대로 동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독일을 의미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에는 근본적으로 제7조 3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독일연방공화국이 서방과 맺은 유대가 통일된 독일에도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통일된 독일이 전혀 새로운 국가에 해당되는 것인가? 전체 독일 국민의 선거를 통하여 수립되고 아마도 자체적인 헌법을 지닌 국가 말이다. 이것이 야콥 카이저와 정부 진영의 전독 지지 파벌이 생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민당(SPD)도 이리 생각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프랑소와퐁세의 확신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은 실제로 잠시 존재하는 현상에 불과한 나라일 뿐이었다. 따라서 통일된 독일을 미리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매우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서독과 공산주의 독일 민주 공화국 [곧 동독]이라는 두 개의 독일 국가가 합법적으로 존재할 권리를 내세울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서방 연합국들과 독일연방공화국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애매한 점을 꿰뚫어 보고 나면 그 대안은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전독으로 확대되든지 아니면 점령 세력이 마련한 틀에 맞추어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데나워 자신은 분명히 긴장을 고조시킬 의도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독일이 독일연방공화국 안에서 이미 바람직한 헌법정치적인 형태를 갖춘 것으로 여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람직한 외교적인 방향도 설정한 것으로 여겼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risorgimento, 1750~1870) 시절의 이탈리아와 비교해 보는 것은 논리적인 생각이다. 근대 이탈리아가 핵심 국가인 피에몬트에서 긴 과정을 통하여 발전해 나온 것처럼, 통일된 독일 또한 진화하는 모습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어느 정도 독일의 피에몬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부지역과 자르지역은 미수복지인 것이었다. 게다가 동쪽의 국경 문제는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식으로 본 외교정책은, 아무리 평화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해 보아도 근본적으로 수정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는 특히 독일 동부지역과 연계하여 보면 자명해진다. 분명히 동부지역과 연계된 협상에서 아데나워가 그토록 놀라울 정도로 집요하게 내세웠던 수정주의에도 많은 전략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국내 정치적으로 1,300만 명의 추방민을 고려한 전략이며 또한 외교 정책적인 전략이기도 하였다. 1951년에 국경 문제를 들고나오면서 아데나워는 독일 문제에서 소련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마키아벨리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1951년과 1952년 그 당시에 아데나워는 또한 동방정치에서도 수정주의자였다. 이는 그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정치가 모두 수정주의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로베르 쉬망은 1951년 가을 아데나워가 오더 나이쎄 국경에 관하여 발언한 것에 대하여 다른 많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실망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아데나워가 폴란드와의 합의에서 평화적이고 화기애애한 일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애치슨에게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만 해도 몇 년 후처럼 그리 절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실 내면적으로 그는 이미 독일 동부지역에서는 국제연합의 지휘 아래 확보되는 복잡한 [국가의] 지위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는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에서 폴란드의 요구 사항을 어떻게 해서든지 고려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끝까지 확정적이지 못했던 일반조약 체결에 겉으로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 안에 숨어 있었다. 애치슨은 결국 최종 협상에서 아데나워도 만족할 만한 솔로몬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일반조약은 아무런 공식적인 부제를 달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약에 서명한 각 국가가 알아서 공식적인 간편한 제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일반적인 부제가 형성될 것이었다.     

내각의 논의가 한창 고조에 이르는 동안 외무장관회의와 일반조약 서명 장소로 본이 최종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데나워는 비교적 일찍 이러한 흥분되는 소식을 알리고자 하였다. 한때 그는 헤이그를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이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두 개의 조약안이 두 도시에서 조인되도록 결정되었다. 곧 독일조약은 그 부속조약과 더불어 본에서 조인되고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은 파리에서 조인되도록 결정된 것이었다.     

국재 정치적 차원에서 그 조약을 관철하는 측면에서 본이 행사 장소로 결정된 것은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국제적] 지위의 변화를 아데나워가 3개 강대국의 외무장관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은 없었다.     

아데나워는 이제 대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다짐하였다. 이는 조약 비준이 이루어지는 날에 독일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인 호이쓰는 독일제국의 국가(Deutschlandlied)를 다시 [독일의] 국가(Nationalhymne)의 반열에 올리는 결정을 승인하는 조처를 내렸다. 오토 렌츠는 라디오 방송국이 조약 서명 이후 [독일] 국가를 처음으로 방송으로 내보내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사민당(SPD) 소속의 <북독라디오방송국>의 총감독이었던 아돌프 그리메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이 국가 제정을 선포하던 날인 5월 6일 이미 국가를 방송으로 내보냈다,     

독일연방 수상실은 조약 서명을 이용하여 긍정적인 여론을 끌어내기 위하여 기울인 또 다른 노력은 사민당(SPD) 주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조약 서명이 있는 날 휴교령을 내려 주어 달라는 부탁에 대하여 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데나워는 모든 주지사가 본으로 와서 서명을 지켜보도록 하는 일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사민당(SPD)이 지배하는 주정부의 수장들은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본에서 대규모 횃불 행진을 하려는 계획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조약안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커다란 논쟁이 있었기에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조차 너무 요란을 떠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조약 서명이 있기 전에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인물은 역시 쿠르트 슈마허였다. 그에 따르면 예정된 서명식은 “연합국의 교권주의적 연합이 독일 민족에 대하여 거둔 슬리의 경솔한 축제일 뿐이다. … 이 일반조약에 찬동하는 이들은 모두 바람직한 독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민당(SPD) 당원들조차도 이러한 말을 불편하게 여겼다. 최소한 사민당(SPD) 고위 당직자들은 쿠르트 슈마허가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조약 서명 직전에 세봄은 브레멘 시장인 빌헬름 카이저에게서 조약에 서명이 되고 나면 대연정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회담과 관련하여 아데나워는 처음에 추진했던 대로 조약 서명을 본에서 하고 커다란 축제를 여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에 대하여 점점 더 회의가 들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나쁜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최종 시점에 이르기까지 제7조 3항이 심각한 정권 위기를 불러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일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외무장관회의 며칠 전에 갑자기 일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네덜란드 측이 북대서양방위조약기구(NATO) 조약이 취소될 경우에는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미리 탈퇴할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애치슨과 이든은 회의 당일까지 네덜란드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애치슨이 5월 22일이 되어서야 유럽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든이 긴급 전보를 보냈지만, 애치슨은 본에서 개최되는 [외무장관] 회의가 커다란 파국으로 끝나지 않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자기 성품대로 애치슨은 매우 신중하게 트루먼 대통령이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의 득실을 따져보고 나서 트루먼이 일단 참석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일이 잘못되면 모든 것은 대통령이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애치슨은 책임을 모면하게 되었지만, 만약 본의 회의가 결렬된다면 아데나워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될 일이었다!     

그런데 워싱턴, 런던, 본에 있던 회의 참가 예정자들은 모두 프랑스 내각이 유럽방위공동체(EDC) 계약을 서둘러 체결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프랑스] 의회에서 벌어진 격론 과정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배제되는 것을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분명히 반대할 것인지가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사실 파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임기가 1년 정도 남은 [미국] 대통령의 보장이 거의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러나는 [미국] 정부가 계약을 통하여 보장할 것이라고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민주당이 11월에 예정된 총선에서 그런 부담을 국회에 남겨주고자 한다면 공화당에 선거를 헌납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랑스 측이 보장을 요청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프랑스 측은 모든 것을 지연시키거나 와해시키고자 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로베르 쉬망은 이 모든 것을 막을 힘이 거의 없었다. 그 배후에서 오리오 대통령이 이 음모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재무장을 결사반대하는 인물이었다.     

프랑스 측이 요구하는 각론들은 상당히 중요한 것들이었다. 여기에는 앵글로·색슨 측의 보장 (반대하지 않겠다는), [독일 내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를 유럽방위공동체(EDC)에서 제외시키기 (이는 평등권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배하는 것이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위원회의체와 장관회의체의 결정 규정 (이는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그 누구도 정확히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의 [전비] 배상(파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융통성을 두고자 하였다.) 문제가 있었다. 사실 이는 모든 안건과 연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로 파리 정계의 다수파는 서명하기도 전에 자기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곧 [프랑스 측이 보기에] 독일의 정치적, 군사적 재건이 너무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파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조약의 서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피네 총리 정부는 본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이러한 경고를 하였다. 둘째 선택지는 지연작전을 펴다가 결국에 조약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은 서명되고 나서 결국 1954년 8월 30일에 와해될 때까지 서서히 소멸했던 것이었다.     

분명히 프랑스는 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미국의 도움 없이는 이끌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조약안의 [서명이] 무산되어버리면 미국의 국내 정치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매우 힘든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 이룩해낸 유럽 국가체계의 안정이 새로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이는 비공산주의 국가인 프랑스 측에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정치가들이 항상 이성적인 계산만 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 그래서 외무장관들은 토요일과 일요일 본에서 협상을 벌이고 파리에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장관위원회가 거의 연속적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아데나워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매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데나워에게 국내 정치 차원에서 아직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조약의 서명이 이루어져야 할 본의 외무장관회의가 좌절되는 일 말이다! 주말인 5월 24일과 25일에 계속 아데나워 주변에 머물렀던 연방정부 대변인인 펠릭스 폰 에크아르트는 아데나워가 수상직에 오른지 얼마 안 된 매우 어려웠던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주말에 그의 [아데나워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의 성과가 달려 있었다. 조약의 서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면 아데나워는 정치적 게임에서 패배하는 것이 되었다. 이 분야에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온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러한 파국을 경험하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법이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조약이 파기되면 사민당(SPD)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다음 해의 총선에서 확실한 승자가 될 것이었다.”     

[외무장관] 회의는 5월 23일 금요일 밤에 애치슨과 쉬망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애치슨은 파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되었다. 쉬망은 기진맥진하고, 초조하고, 우울한 모습이었고, 내각과 외무부에서 아무도 그를 수행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자기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으나 애치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불쌍한 친구에게 용기를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장 힘든 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최종적인 외무장관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서방 연합국과 아데나워의 협상에 관하여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에 관한 결정이 내려져야 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은 이 회담이 점심 식사 이후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금 오후 4시로 회의가 순연되었다. 시간이 흘러 월요일 오전 10시까지 계약의 서명이 완료되면 이어서 4개국 당사자들이 모두 파리로 날아가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도 서명해야 했다.      

일요일 오후에 결국 중요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아데나워 주도로 이제 독일 측에서 단독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매우 합당한 법률적 생각을 제시한 할슈타인을 최대한 재촉하여, 딘 애치슨과의 훌륭한 협력을 이루어 샤움부르크궁에서 열리는 저녁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일을 완료하도록 하였다.     

아데나워는, 프랑스 의회의 방해로 전망이 매우 불투명해진 조약을 살려내기 위하여 최후의 순간에 일반조약과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되풀이 하였다. 그런데 쉬망은 프랑스 장관위원회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여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그는 결국 3개 강국이 서한으로 보장하는 것에 동의할 준비가 되었다. 그 서한에서 3개 강국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다른 강국이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수립에 관한 비준의 부당한 지연을 시도하게 된다면, 상황을 검토하여 이 조약이 발효되기 전에라도 조약에 담겨있는 특정 규정의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독일연방정부와 회담을 개최하기로 한다.” 예상한 대로 아데나워는 “부당한 지연”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는 “조치”라는 단어를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지닌 “규정”으로 바꾸는 정도의 성과만 거둘 수 있었다. 이 어려운 때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기는 불가능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프랑스의 장관위원회와 외무부의 압박을 받고 있던 쉬망은 [독일의 전쟁] 배상 문제를 다시 논의하자고 하였다. 사실 이는 모두가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쉬망은 프랑스가 독일과의 평화협정과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배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설명한 것이다. 다만 그는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하여 앞으로 배상을 청구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아데나워는 그러한 [쉬망의] 요구로 본에서 진행되는 비준 절차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된다고 보았다. 먼저 그는 잘 알려진 주장으로 반박하였다. 동독이 이미 배상 담보물로 [소련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평화조약 협상에서 배상을 요청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이제 제기되고 파리가 원칙적으로 그러한 요구를 하게 된다면 말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은 [독일의] 산업 해체와 해외 자산의 몰수로 [전쟁 피해] 배상을 원칙적으로 이미 포기하였다. 쉬망은 그러한 경우에도 모든 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치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조약 절차에 대한 [프랑스 내부의] 반대를 극복하고자 한다고 한 것이다. 아데나워는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였다. 결국 슈마허가 조약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데나워가 조약에 서명하게 되면 그를 훌륭한 독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이미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럽방위공동체(EDC) 병력에 관련된 국가들의 군대 [파견] 관련 조약에 관련된 문제에서 쉬망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밝혔다.     

만찬이 시작될 예정이던 저녁 6시 30분에 이 문제로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애치슨은 아데나워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제I조 1항 2호는 전문 실무진이 마련한 초안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프랑스의 요구 사항은 별도의 조문으로 삽입하기로 하였다. 쉬망은 아데나워가 재정 문제에 대하여 견해를 밝힌다면 협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당장 전문 실무진이 한시간 이내에 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드디어 샤움부르크궁의 홀에서 만찬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무장관 쉬망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프랑스의 국무위원회가 조약 서명에 동의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였다. 회의가 무산될 위험이 목전에 있어도 아데나워는 차분하게 만찬을 이끌었다. 스트레스가 있어도 삶을 즐길 줄 알았던 딘 애치슨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오페라 장면을 회고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었다고 한다. 아니면 그의 상상일 수도 있다. 곧 샤움부르크궁은 이전에 쾰른 대주교의 저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황제의 두 누이가 여기에서 살았다고도 하였다!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이 성 밖 계단에 모인 자리에서 바라보는 라인강의 낭만이 미국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원의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달빛이 강물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성 합창단이 아름다운 독일 노래를 불렀다. 이 장면에는 사절단 대표들의 최측근만이 알고 있는 반전 매력이 더 해졌다. 곧 언제든 파리에서 파국적인 소식이 전해져서 모든 것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아주 늦은 밤에 되어서야 회의가 무산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조약의 서명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의 참석자들 모두는 프랑스가 아직도 방해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쉬망이 외무장관으로 잘 나가던 때는 이제 지나갔다는 것이다. 1953년 1월에 그는 정적인 조르주 비달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애치슨과 이든은 프랑스 측의 [안전] 보장에 대한 요구를 요란한 성명서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오리오는 그 성명서가 단순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은 참고 문서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조약을 반대하는 측이 여전히 조약 과정을 뒤로 미루고 결국 무산시킬 힘이 있었다.     

애치슨은 이미 5월 11일에 파리 주재 [미국] 대사로부터 전문을 받았다. 이 전문에 따르면 [계약의] 조인의 전망이 매우 안 좋아 보인다고 하였다. 모리스 쉬망과 알팡드는 프랑스 의회에서 이 조약에 대한 동의가 과반수가 안 된다는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래서 사정에 따라 이 조약을 10월 이전에는 [프랑스] 의회에 상정할 수 없어서 최종 결정은 미국의 대선 이후에나 내려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데나워에게도 상황이 마찬가지로 비관적으로 보였다. 펠릭스 폰 에카르트는 파리의 외무부 건물에 있는 시계의 방에서 거행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의 조인식에서 그와 친한 프랑스 의원 곁에 서 있었다. 그 의원은 심각한 어조로 말하였다. “조약에 관한 일은 유감입니다. 프랑스는 그 조약을 결코 비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데나워는 일요일 의문의 여지가 있는 회의 결과를 예측하면서 5월 26일에 축제를 준비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이 노회한 시장은 멋진 행사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알맞은 준비를 지시하였다. 대표단은 연방참사회 회의실에 모였다. 1949년 5월 23일에는 이 방에서 아데나워가 주제하는 가운데 [독일]의 헌법이 공표되었다. 그나마 이 정도의 역사는 본도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3년이 지나서야 독일 여론은 그동안 [독일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전면 유리창 앞으로 무대가 설치되어 초대된 이들이 4개 국가의 대표들을 잘 볼 수 있었다. 이 대표들은 은회색 식탁보가 덮여 있는 긴 책상 앞에 앉았다. 로베르 쉬망은 자기 동료들을 대표하여 서방의 자유 국가들에 둘러싸인 독일에 인사하였다. 이러한 어조는 그 이후의 기자회견에도 이어졌다. 이러한 경우에 흔히 그러하듯이 이 조약 서명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념되었다.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일이 잘 진행되었다.      

문서에 서명하는 일 자체는 작은 책상에서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데나워가 서명하였다. 그에 앞서 간단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자유와 평화의 목적을 언급하고 독일 동부지역의 독일인들에게 다짐하였다. “우리는 이 조약으로 통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데나워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러 장의 조약서에 서명하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서서 간단히 차가운 음식을 먹은 다음에 구석진 마을들을 지나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에 서명하기 위하여 파리로 날아갔다.     

이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문의 장래는 결코 밝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단 목적을 이루고 나면 초주검이 되는 법이다. 아데나워는 지쳤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를 시켜 밤에 ‘브리스톨’ 식당의 굴과 샴페인으로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프랑스 외무부의 시계의 방에서 서명하면서 진행된 예식은 프랑스 정부가 피할 수 없는 일을 매우 억지로 처리했음을 잘 보여주었다. 너무나 서두르며 아무런 격식도 없었고 진행도 엉망이었다. 온 사방에 사진기자들이 하루살이처럼 들끓었다. 며칠 뒤 [독일] 국무회의에서 아데나워는 형편없는 프랑스 측의 행사 진행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의전 격식이 훨씬 좋았다고 하였다. 아데나워는 여러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3개 강국이 따로 모여 그들 간의 문제를 조율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던 본에서 진행된 회의 가운데 5월 24일에 전달된 소련의 각서에 대한 첫 논의도 진행한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독일을] 동등하게 대접한다고 다짐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서방의 [소련의 각서에 대한] 답변각서의 1차 초안의 내용을 아데나워는 6월 말에나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서방의 [독일의 문제에 대한] 제한권에 대하여 그가 늘 지녀온 불신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했다. 그동안 다짐해 왔던 소련에 대한 ‘공동 정책’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감정이 매우 격양된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고위위원회 위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가 보기에 서방 열강은 러시아와 독일의 평화조약에 관하여 협상을 먼저 한 다음에야 이것을 독일연방공화국에 제시할 요량이었다. 이것이 [독일과] 합의한 ‘공동 정책’이란 말인가? 이는 베르사유에서 맺었던 평화조약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아데나워를 몇 년 동안 괴롭혀 왔던 유령이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이제 고위위원회의 형편없는 우유부단함을 비판하였다. 곧 소련의 문제와 연관하여 독일연방정부와 서방 열강의 관계는 조약의 서명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5월 30일 국무회의에서 협상에 관하여 보고한 것은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오늘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가 특히 우려하던 것은 며칠 전에 그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 제7조 3항의 수정안이었다. 이 조항은 동방 [곧 소련과 동유럽]에 유리하게 수정되었고 통일 독일에 전권을 위임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제 아데나워가 최소한 독일연방 참사회에서만이라도 여름 휴회 이전에 조약의 비준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독일] 조약이 발효되기 전에 [승전국] 4자 회담이 개최될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는 반환점을 돈 것에 불과하였다.     

인제 와서 회고해 볼 때 확실히 알 수 있듯이, 국내 정치적으로나 국제정치적으로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1952년 5월 무렵에 오로지 두 가지 상황이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여론의 지지가 괄목할만하게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적들의 숫자는 뚜렷하게 감소하였다. 6월이 되자 아데나워는 맥클로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그의 정치에 대한 지지율이 53%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1년 전 만해도 지지율은 30%에 머물렀었다. 물론 그러한 숫자는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긍정적인 점은, 그가 6월에 언급한 대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다시금 ‘매우 열악해진’ 다음에 보인 영국과 미국의 태도였다. 4자회담에 관련하여 그는 영국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이 유럽방위공동체(EDC)와 간접적으로 맺은 관계는 그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조약 서명 얼마 후에 내각에 전한대로 독일과 영국이 유대를 맺은 것은 100년도 더 된 일이었다.     

협상 과정에서 이든이 아데나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여전히 처칠이 한 말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아데나워는 최소한 딘 애치슨을 믿어도 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애치슨에 대하여 감탄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애치슨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아데나워가 1953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프랑스 대통령 오리오는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 서명 이후의 한 대담에서 미국 국무장관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애치슨이 로베르 쉬망을 재촉하여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애치슨이 독일연방 수상을 강력히 지지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실망했었다. 애치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우리는 아데나워의 입장을 강화해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1953년 독일 총선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아데나워가 1953년 이전에라도 실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슈마허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지를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더 나은 해결책을 선택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952년 8월 20일 마침내 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슈마허가 본의 아니게도 그 당시에는 여전히 아데나워의 최고의 조력자가 되었다.     

애치슨이 5월 26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에서 조약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데나워는 다시 한번 자신이 유럽 차원의 정치가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그가 뛰어난 애국주의적인 협상가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 양보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세부적인 것이 집착하여 현실적인 위험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커다란 미래의 가능성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우리 곁에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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