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가 죽인 것은 정치가만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이 미국에 이민한 아버지 덕분에 히틀러의 광기의 희생자가 되는 불행을 면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히틀러의 광기 덕분에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인공이 되어 아인슈타인만큼이나 스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과학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에 내로라하는 학자가 단지 학문 세계만이 아니라 세간에서도 스타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오펜하이머다.
그의 생애에 관한 영화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면서 한국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회자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2~3달이 지나면 오펜하이머가 누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질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기억 상실이 발생하기 전에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한번 훑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빨갱이 딱지’가 범람하기 시작하는 이 대한민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말이다.
오펜하이머가 과연 ‘빨갱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한 길은 정확히 3.03cm이니 그 정도 깊이면 대뇌 피질이나 심장 근육에 이를 정도는 되겠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여전히 모를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더구나 그 마음이 뇌 어디쯤 있는지도 아직 정확히 모르니 누가 감히 알 수 있겠나?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추측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혀 단죄해 버린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빨갱이 딱지’ 붙이기다. 일단 권력자가 그런 딱지를 붙이면 군중은 그 주홍글씨를 받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매도한다. 이른바 군중심리다. 이를 잘 아는 정치가들은 늘 이런 식으로 ‘적’을 파멸시켰다.
이런 식으로 군중심리를 조작하여 ‘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주로 독재 국가에서 잘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적은 대부분 매국노나 반역자의 죄목으로 처단되었다. 이런 짓을 한 것은 소련의 스탈린, 독일의 히틀러, 스페인의 프랑코, 중국의 마오 만이 아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에만 벌어진 일도 아니다. 지금도 세계 여기저기에서 이런 종류의 흑색선전은 지속되고 있다.
오펜하이머도 그런 ‘빨갱이 사냥’의 전형적인 희생자였다. 물론 그의 여자 친구, 아내, 동생이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 자신은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한 사실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를 그를 빨갱이로 몰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을 확실히 종식하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세간의 영웅이 되었던 오펜하이머를 하루아침에 빨갱이 딱지를 붙여 매국노로 몰아붙인 것이다. 워낙 정치판이라는 곳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비열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선두에 섰다는 미국에서, 지겨운 전쟁을 종식한 애국자를 하루아침에 매국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사실 충격 아닌가? 미국의 ‘애국적’인 ‘반공’ 정치가들은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빨갱이 딱지’를 붙여 버리고 그다음은 민중이 알아서 그를 매국노로 매도해 버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하는 짓이 어쩌면 그리도 공산주의 독재 국가에서 하던 인민재판과 똑같은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상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을 학자들이 평가할 때 중국에서 마오가 촉발한 문화대혁명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미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산 독재 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마녀사냥의 광기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근본적 원인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광기, 사익의 추구, 그리고 타인에 대한 증오다. 인간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감염’되고 나면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과 타인에 대한 증오와 결부되면 무서운 무기가 되어 버린다. 내가 미워하던 놈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군중이 알아서 인민재판식으로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도록 하면 권력자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손 안 대고 코 풀게 생겼으니 말이다. 사실 일반 군중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독재와 같은 개념의 역사와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 그저 누군가가 미워서 죽겠는 판에 ‘빨갱이 딱지’만 붙여주면 옳다구나 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군중심리의 광기는 이미 한국의 근대사에서도 여러 번 목격된 일이다.
사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와 싸우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손을 잡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미국의 언론에서는 소련을 옹호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여론을 조성하느라고 혈안이 되었다. 그 당시 소련은 스탈린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자가 통치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소련이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소련과 연합할 때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관용적이던 미국이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급진적인 반공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미국 안의 파시스트를 색출하고 몰아내는 일을 한 반미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HUAC)가 공산주의자를 색출 처단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바로 이 위원회를 만든 미국 하원의원 딕스틴(Samuel Dickstein)이 바로 소련의 돈을 받고 간첩질을 했단 자다. 빨갱이가 빨갱이 색출을 한 꼴이다.
그러나 매카시즘이 먹힌 이유는 이런 빨갱이 사냥이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서가 아니라 ‘빨갱이 괴담’이 민중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1947년부터 1957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서는 ‘Reds under the bed’라는 구호가 말해 주는 ‘빨갱이 광풍’이 불었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맘에 안 드는 놈은 모조리 ‘빨갱이 딱지’를 붙여서 매장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중국에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광기와 정확히 같은 프레임에서 벌어진 일이다. 미국의 ‘빨갱이 광풍’ 때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나 ‘불온서적’이 불태워졌고 매국노와 반역자들은 실질적인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오펜하이머도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그의 명성과 업적을 질투한 미국 원자력위원회의(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AEC) 위원장이 오펜하이머를 빨갱이로 몰아간 것이다. 개인적인 질투를 이데올로기와 애국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이다. 결국 오펜하이머가 암으로 사망한 다음에야 미국 정부는 오펜하이머를 간첩으로 몰았던 잘못을 인정하였다. 결국 그가 간첩이 아니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빨갱이 광풍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홍위병의 문화대혁명의 그림자도 안 보인다. 그런데 대한민국만이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빨갱이 타령을 한다. 그리고 노사연이 대통령 부친 조문을 갔다고 해서 그의 부친이 과거 보도연맹에서 활약하면서 양민까지 학살했다는 자료를 들어 싸잡아 비난한다. 이른바 연좌제다. 현재 대한민국은 좌나 우나 다 이데올로기 귀신에 씌어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이 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되었나? 이런 식으로 우리 국민끼리 서로 이데올로그 프레임을 씌어 다 죽으면 좋은가? 누구 좋아하라고 이런 짓을 하나?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면서 미국은 걱정이 안 되는데 한국 걱정이 많아지는 날이다. 이데올로기는 오펜하이머가 만든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무서운 무기다. 그 사실을 대한민국이 언제나 깨닫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