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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절과 교회가 사라지는 날이 언제 오나?

그날은 이미 시작됐고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이다.

by Francis Lee

<매일경제>에 나온 뉴스를 보니 한국의 법당과 교회가 곧 문을 닫을 모양이다. 다음은 기사의 요약이다.

“불교 조계종 출가자는 지난해 6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991년 517명에 달했던 출가자 수는 2015년 204명으로 줄었고, 2020년에는 131명으로 100명대로 내려왔다. 2021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출가자 100명 선이 깨졌다. 천주교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작년 7개 교구 입학 신학생 숫자가 처음으로 100명을 밑돈 75명을 기록하며 1년 새 36명이 줄었다. 10년 전의 절반 수준이다. 개신교에서도 위기가 감지된다. 올해 신입생 모집에서 총신대학교는 목회학석사 과정 신입생 343명(특별전형 포함)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321명에 그쳐 미달을 기록했다. 1980년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올해 전국 신학대학원 10곳 가운데 신입생 충원에 성공한 신대원은 장로교신학대 신대원 단 한 곳뿐이었다.”(출처: https://v.daum.net/v/20231011141808098)


이러한 ‘출가자’의 감소는 저출산과 사회의 세속화로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서양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 현상이 지나치게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을 뿐이다. 교회든 법당이든 지금 당장 가보면 온통 아줌마와 할머니뿐이다. 남자는 물론 젊은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잘 안 보인다. 젊은 종교인을 찾으려면 이단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기껏해야 '신천지' 같은 곳에나 가보아야 한다.


이른바 ‘성직’을 추구하는 이들의 숫자와 더불어 종교 자체에 관한 관심을 지닌 사람의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다. 과거 종교는 진리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자기 종교를 믿는 ‘거룩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속된’ 이들을 갈라서 배척하는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종교 단체를 보호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정치세력과 갈라서는 이른바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이후 기독교나 불교나 가리지 않고 홀로서기에 실패하는 모습만 보여 왔다. 특히 최근 기독교나 불교 성직자의 패륜적인 행위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이들에 대한 실망으로 종교에 대한 무관심, 더 나아가 적개심이 더욱 강화되었다. 승려가 술과 도박은 물론 간음하고, 목사도 축재와 간음을 하다가 법의 심판을 받고, 신부도 아동 성추행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들을 더 이상 거룩하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 종교의 힘이 병을 물리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신앙보다는 과학을 더 신뢰하게 된 젊은이가 늘어나면서 종교는 더욱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한 가정의 자녀가 거의 1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아이를 ‘출가’시키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에 거리를 두는 가정이 늘게 되었다. 현실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종교를 뭐 하러 믿으며 돈까지 갇다 바친단 말인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 말이다.


물론 이런 사회적 상황이 세속화되어도 종교 자체의 매력이 있다면 적어도 성직자를 지망하는 이들의 숫자는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성직자 지망생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데에는 종교 자체의 문제에 더 큰 원인이 있다. 과거 불교나 기독교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고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학문, 특히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위의 질문에 대한 더 합리적인 답을 과학이 줄 수 있게 되면서 종교는 점점 미신에 가까운 지위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성직자들의 추문이 계속 터지면서 사람들은 종교가 자기도 못 지키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종교를 무시하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는 이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매력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불교나 기독교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 이른바 꼰대 조직이라는 낙인을 찍혀 현대의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젊은이들에게 더욱 매력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종교 전문가는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변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기독교나 불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속성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이기에 그러한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물론 성공회와 일부 개신교의 경우 여성이 고위 성직자가 되는 길을 마련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과 매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권위주의의 극복만으로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살아남는 길은 무엇인가? 이른바 과거에 존재한 ‘순수한’ 종교의 형태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변형된 형대로 존속될 뿐이다.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변형의 대표적인 경우를 바로 개신교의 전광훈, 불교의 법륜, 가톨릭의 황창연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6년 경북 의성 출신인 전광훈은 자타가 공인하는 ‘빨갱이 사냥꾼’이다. 그의 지위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일고 있지만 현재 어엿한 정식 한국의 대표 개신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개신교 목사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 발언을 거침없이 하면 실질적으로 현재 한국 ‘뉴라이트’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의힘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보수 진영 정치가들이 앞다투어 그의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전광훈은 ‘빨갱이’를 저주할 뿐 아니라 동성애와 이슬람교도 철저히 반대한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의 극우 세력의 전위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 이슬람교, 동성애를 싫어하는 세력은 전광훈이 앞장서서 자기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을 좋아한다. 전광훈과 같은 이른바 ‘극우’ 목사는 이미 미국에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정치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전광훈도 그런 미국의 목사를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특히 미국과 한국에서는 극우 기독교 목사들이 강력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여 자기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예수가 말한 원수에 대한 사랑, 자기희생, 헌신, 용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을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서슴없이 해대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바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21세기 기독교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전혀 무관한 정치적 주제인 공산주의, 이슬람교, 동성애라는 뜨거운 주제를 선점하여 치고 나가는 시대정신을 읽는 전광훈의 동물적 감각이 그의 교회와 종교를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1953년 울산에서 최석호라는 속명으로 태어난 법륜은 1969년 출가했으나 조계종의 승적이 없는 승려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토회를 설립하여 사회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불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그가 시작한 즉문즉설 강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상처를 달래주는 멘토로 지금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단체에서 여러 상을 주기도 하였다. 법륜은 불교의 종교적 철학적 진리보다는 수행 자체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토회의 법당에는 승려가 법륜과 유수 2명밖에 없고 정토회 조직은 실질적으로 재가자 곧 평신도가 운영하고 있다. 일반적인 불교가 승려와 신자로 나눈 계급주의에 집착하고 있는데 법륜은 이런 상하관계를 타파하고 평등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불교와 기독교가 보이는 기복주의에도 반대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 150개, 외국에 30개의 법당을 두어 상당한 ‘성공’을 거둔 종교 단체가 되었다. 흔히 개인의 노력으로 득도하여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을 궁극 목표로 삼고 있다고 알려진 불교가 시대정신에 적응하여 성공을 거둔 경우라고 하겠다.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마치 틱낫한의 자두마을 공동체를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다.


1965년 수원에서 태어난 황창연 신부는 위의 두 사람과는 달리 1992년 베네딕토의 세례명으로 사제서품을 받은 이른바 ‘정통’ 성직자다. 2004년부터 성 필립보 생태마을 관장으로 활동하며 가톨릭평화방송의 <황창연 신부의 행복 특강>으로 저잣거리의 명사가 되었다. 가톨릭 내에서는 거의 아이돌 수준의 명성을 누리며 김태희 결혼 때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의 강의는 주로 나이가 든 아줌마와 할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이들의 구체적인 현실적 문제에 대해 매우 탁월한 언변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법륜과 마찬가지로 대중을 대상으로 한 현실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주도하는 생태마을은 이른바 친환경 생태 영성을 모토로 영적 휴식과 교육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가톨릭교회의 위계질서에 철저히 맞추어 실질적 소유와 관리는 수원교구가 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가톨릭을 내세우는 모든 조직이 교회의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삶의 행적을 보이고 있지만 이른바 ‘정통’ 교회와 법당에서 활동하는 통상적인 ‘성직자’와는 많이 다른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법륜이나 황창연 신부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 두 사람을 전광훈과 비교하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비정통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성직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플레이로 ‘무너지는’ 종교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성직을 지망하는 이들의 숫자가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개신교처럼 늘 학교와 신학생의 자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독교나 불교가 현재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누릴 가망성은 제로에 가깝다. 물론 인재가 없어도 종교 단체는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서양, 특히 유럽에서 기독교는 19세기말부터 몰락의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잘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참고로 독일의 경우 신부가 되자고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이 2021년 기준으로 56명에 불과하다. 그것도 2020년 54명에서 2명이 늘어난 숫자다. 2007년만 해도 201명이 신학생이었다. 2022년 50만 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가 교회를 떠났다. 이러한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한 마디로 교회의 몰락이다. 독일 개신교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지 않는 한 살아날 길은 없을 것이다. 불교는? 결국 마찬가지의 길을 갈 것이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세계는 결국 콩트가 예언한 대로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거쳐 실증적 단계로 나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 세계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이 전지전능한 종교의 자리에 들어선 상황에서 종교가 설 자리는 거의 없다. 그래서 극단주의나 개인의 심리상담 차원에서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제도로서의 종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과학이 이미 모든 문제의 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빅뱅 이후에 생성된 물질세계에 머무는 존재로 반물질 세계로 갈 수 없으며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 안에서 태양이 백색왜성이 되기 전 적색 거성이 될 때 소멸하는 지구와 더불어 사라지게 된다.


사후 체험을 포함한 영적 체험에 대한 의문은 결국 뇌 생리학에서 답을 주었다. 다만 ‘왜 사는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과학도 주지 못한다. 그저 ‘각자도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과거 수많은 종교가와 철학자가 그 질문에 그럴듯한 답을 제시했지만, 그 어느 것도 이데올로기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종파에 따라 그리고 이념에 따라 다양한 답을 제시하는 상황에서 결국 개인이 자기 취향에 맞는 답을 선택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이제 철학이나 종교는 마트에서 상품을 고르듯이 내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신자가 교회나 법당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법당이 사람을 찾아다니는 세상이 곧 오게 될 것이다. 전광훈, 법륜, 황창연 세 사람이 그러한 진리를 몸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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