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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한국 교회에 종교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교회가 쇄신되지 않는 한 전광훈은 죄가 없다.

by Francis Lee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는 아시아에서 매우 독특한 경우에 해당된다. 일단 신자 비율이 필리핀 다음으로 매우 높다. 기독교가 그렇게 노력했어도 아시아 전체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3% 밖에 안 된다. 일본은 아예 1%도 안 된다. 중국은 무늬만 신자가 있다.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3세기부터 중국 선교를 위하여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지금도 바티칸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선교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실 일본과 중국의 기독교 선교 역사는 한국보다 훨씬 길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만 기독교 세력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개신교의 주장에 따르면 '천만 명의 성도'가 있고 가톨릭도 500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조차 신자수가 500만 명 정도인 데 겨우 300년도 안 된 기독교가 3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평균의 열 배가 넘는다. 그리고 독특한 케이스인 필리핀을 제외하고 계산해 보면 그 이상의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 경험이 단 한 번도 없고 오히려 잡신을 믿는 일본의 식민국이었던 나라, 그것도 국민의 절반이 무신론자인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들이 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총'으로 여길 법도 하다. 물론 필리핀의 기독교 신자는 국민의 90%에 이른다. 그러나 필리핀은 오랫동안 서양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 국가가 된 것에 비하여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독특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2022년 현재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나쁘다. 종교가 없는 이들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 스스로의 의식 안에서도 이른바 ‘개독교’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매우 보수적인 색채를 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한국의 기독교가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나왔다. 그만큼 한국의 기독교는 극단적인 보수성을 띠고, 가부장적이며, 남녀차별적이고, 매우 배타적인 종교로 한국 사회에 자리매김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시작된 한국 가톨릭은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한국에 도입되어 자발적인 교회가 수립되었지만 이내 극보수적인 프랑스외방선교회가 기존의 교회 제도를 모두 무너뜨리고 로마 중심의 교계제도를 수립하였다. 이후 ‘무식한’ 한국 신자들은 ‘유식한’ 서양 성직자들과 전혀 다른 낮은 계급의 존재로 교회 안에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양성된 성직자들이 한국 가톨릭 교회를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로마를 최정점으로 하는 계급주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교회 안에 철저히 수립된 이른바 '교계제도'(hierarchy)와 성직자주의(clericalism), 곧 사제가 최고 권력을 누리는 서열 문화는 콘크리트화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교, 신부, 부제, 평신도로 구성된 철저한 서열을 유지하는 일종의 카스트 제도가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교회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수도회원들 곧 수사와 수녀도 실질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사제들의 아래 계급에 속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그나마 수도자들은 평신도보다는 위에 있다. 교황청에서 나오는 문서에는 늘 이러한 계급이 노골적으로 명기된다.

이와 관련된 공식 문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FRANCISCI

SUMMI PONTIFICIS

LITTERAE ENCYCLICAE

LUMEN FIDEI

EPISCOPIS

PRESBYTERIS AC DIACONIS

VIRIS ET MULIERIBUS CONSECRATIS

OMNIBUSQUE CHRISTIFIDELIBUS LAICIS

DE FIDE

현직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에 발표한 회칙 <신앙의 빛>의 제목이다. 그대로 번역해 본다.

신앙에 관하여

Summus Pontifex인

프란치스코가

주교와

사제와 부제와

남녀 수도자와

모든 평신도에게 전하는

회칙

신앙의 빛

여기에 가톨릭 교회 안의 계급이 줄 바꿈까지 정성스럽게 하면서 정확히 명기되어 있다. 교황은 스스로 'Summus Pontifex'라로 칭하는데 이는 원래 기독교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이교도적인 고대 로마 종교의 사제단의 우두머리를 'Pontifex Maximus'로 부른 것을 그대로 본떠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관습적으로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런데 원래 로마의 이교도적인 토속 종교의 사제단의 우두머리에게 부여되었던 이 칭호가 나중에 황제 제도가 수립되면서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63BC~AD14)부터 황제에게만 추가적으로 부여된 칭호가 되었다. 곧 황제가 동시에 '교황'이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래 정치지도자였으나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자신의 양부로 암살당한 시저(Gaius Julius Caesar, 100BC~44BC)를 신, 곧 '성부', 그리고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 곧 '성자'로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로마제국의 황제의 지위를 본떠서 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를 나중에 슬그머니 로마 가톨릭 교회가 관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교계제도의 우두머리가 황제와 맞먹는 존재가 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호칭은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오래된 건물을 보면 황제와 교황의 이름 앞에 공통적으로 'P. Max', 곧 Pontifex Maximus가 새겨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황제와 교황이 맞먹는 존재라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20세기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만이 아니라 21세기의 교황인 프란치스코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다만 프란치스코는 Pontifix Maximus 대신 Summus Pontifex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라틴어의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Maximus'보다 '최고의'라는 뜻의 형용사 'Summus'가 사실 더 위에 있는 어감을 주고 있기에 아무런 근본적 차이가 없다.


사실 기독교의 최고 사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다. 그러나 교회의 문서에서 공식적으로 예수를 Pontifex Maximus로 표현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도 예수와 삼위일체를 이루는 신의 종 가운데 으뜸 종(servus servorum Dei)이라고 '겸손하게' 스스로를 부르는 인간인 교황에게 그런 칭호를 부여하는 것도 모자라 그 아래 층층시하의 계급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교계제도'라는 프레임으로 고착시키고 있다. 정작 예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 사이에 계급을 갈라놓은 적이 없음은 물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차별 없이 모두 '형제자매'로 불렀음에도 말이다.

예수는 <마태복음> 12장 4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εἶπεν τῷ λέγοντι αὐτῷ, Τίς ἐστιν ἡ μήτηρ μου, καὶ τίνες εἰσὶν οἱ ἀδελφοί μου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는(예수는) 자신에게(예수에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했다. 누가 나의 어머니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

그러고 나서 그 아래 50절에서 자신이 한 질문의 답을 한다.


ὅστις γὰρ ἂν ποιήσῃ τὸ θέλημα τοῦ πατρός μου τοῦ ἐν οὐρανοῖς αὐτός μου ἀδελφὸς καὶ ἀδελφὴ καὶ μήτηρ ἐστίν


하늘에 있는 나의 아버지가 목적으로 하는 것을 실천하는 자는 모두 나의 형제와 자매이고 어머니다.

그렇다. 같은 신을 믿는다면 모두 예수의 부하가 아니라 부모이고 형제이고 자매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교회 안에서는 어떤가? 교황,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를 제외한 평신도만 형제요 자매로 부른다. 그리고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에 들지 못하는 사람만 형제요 자매다. 예수가 매우 귀하게 여긴 형제자매가 한국으로 들어오더니 교회 안에서 가장 천한 직분에 속한 평신도를 하대하는 칭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귤이 하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이 사회의 모든 자리에서 적용되는 신기한 나라라는 사실을 기독교도 정확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게다가 신라시대 17개의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어 본 골품제 때부터 이어져온 서열주의가 팽배한 한국사회, 그리고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도 없는 7등급에 이르는 존댓말 원칙으로 철저히 계급을 나누어야 속이 시원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예수의 평등주의에는 기독교 교회조차 '개 사과'나 주고 만다. 그래서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이 아니면 그저 평민이다. 그리고 교황, 주교, 신부, 부제, 수녀에게는 반드시 '님'을 붙이지 않으면 병이 날 것만 같다. 그러나 예수가 귀하게 여긴 형제자매는 평민이니 알아서 부르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일이 교회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통장만 해도 반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그런 세속 질서를 파괴하고 신 앞에서 모두가 형제자매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예수가 와도 꿈쩍도 않고 버티는 것이 바로 한국이다. 그 사회에서는 기를 쓰고 신분 상승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가 되고 검찰총장이 되고 대통령만 되면 황제가 부럽지 않는 사회 아닌가? 교회에서도 기를 쓰고 신부되고 목사되면 황제 대접을 받게 된다. 그러니 기독교라고 별수 있겠는가? 아무리 교주가 천하의 야훼의 독생자 인류의 구원자 예수라고 해도 평등주의를 강조한 예수의 말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 조차 씨알도 안 먹힌다. 그래서 신부나 목사는 반말 찍찍해도 평민들은 누구 하나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기독교 교회가 되어 버렸다. 물론 정치가 들 가운데도 습관적으로 아무데서나 아무에게나 반말 찍찍하는 패륜적인 인간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고도 사과를 죽어도 안 하고 윤리도덕과 예절에 '개 사과'나 던지는 자들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도 그 모양으로 예수의 평등주의에 '개 사과'나 던질 줄은 예수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카스트제도적인 교계제도의 계급은 신성불가침한 것이기에 에에 대한 저항은 곧 신성모독에 버금가는 일이 된다. 그래서 Pontifex Maximus라는 용어도 문자 그대로 최고 사제로 부르지 못하고 '교황', 곧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최고 사제'인데도 굳이 황제와 맞먹는 교황으로 의역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보다 먼저 기독교가 들어온 중국에서는 교종(教宗), 곧 교회의 우두머리로 번역하고 있지만 황제 제도를 유지하는 일본을 본받아 그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가운데 일본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기독교에도 반영이 된 것인가?

한국의 개신교의 경우도 별다르지 않았다. ‘문명국’인 서양의 기독교를 ‘미개국’인 조선에 선교사들이 예수교를 전달하면서 조선 사람을 동등한 지식과 교양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개화가 필요한 ‘미개인’으로 여기며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서양 출신의 선교사와 목사는 신자들과 전혀 다른 계급에 속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출신의 목사들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교역’을 하는 상황이 되어도 이 계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개신교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목사-장로-권사-집사-평신도로 이어지는 층층시하의 계급제도가 강력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의 교계제도를 통렬히 비난하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중개하는 자가 없어야 한다는 '만인제사장'(Priestertum aller Gläubigen) 교리를 주장했던 그 개신교가 말이다.


예수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인 신을 믿는 이는 예외 없이 당신의 형제자매라고 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그 누구도 자신의 부하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자신처럼 남을 섬기라고 강력히 권유하였다. 그런 예수를 교주로 삼는 기독교 안에서 왜 이런 엄청난 계급주의가 생겨나고 2,000년 가까이 강력하게 유지되어 온 것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계급 사이에 단계별 진급 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진급이 결코 성직자와 평신도의 강을 넘지는 못한다. 그 사이에 놓인 거리는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다. 게다가 기도교의 그 성직자들은 예수가 강력하게 비판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와 거의 차이가 없는 삶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2)


예수 생전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이후 세워진 기독교의 초대교회에서는 신자들 사이에 위아래의 계급은 없고 오로지 각자 다양한 은사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교회와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교회가 더 이상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행정 제도에 맞춘 조직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는 모든 인간이 인종, 재산, 남녀, 학력, 계급과 전혀 무관하게 형제자매로 살아갈 것을 가르친 예수의 참 뜻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예수가 죽고 나서 교회가 세워진지 100년도 안 되어 예수의 간절한 평등주의적 가르침을 버린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한 계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연히 그 조직의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권위주의로 조직원을 제압하여 상명하복을 강요하고 평신도에게는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조직에서 진정한 형제자매의 우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전혀 복종을 요구하지 않았던 예수를 교주의 자리에 앉혀놓고는 실질적인 주인의 자리를 극소수의 성직자가 차지하고 대다수의 평신도의 충성만을 강요하는 제도화된 교회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인권적 가치로 여기는 21세기의 시대정신만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가 원래 바란 에클레시아로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칭호가 이제는 사회적 일상어가 되어 버린 한국에서 더욱 그렇다. 2,000여 년 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누리는 하늘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근본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궁극적 목표다. 이런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가 거듭나지 않는 한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외치고 자기의 아들이 ‘독생자’라고 선포하는 이른바 ‘빤스 목사’로 불리는 전광훈 같은 자도 죄를 그 어떤 기독교 성직자도 물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전광훈이 아무리 날뛰고 신성모독적 발언을 해도 교회는 참 조용도 하다. 그는 한국 기독교 교회의 세속주의와 계급주의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보다 '우리 목사님'의 '말씀'이 더 거룩한 교회 아닌가? 예수가 다시 오면 이 모양이 된 한국 교회를 보고 뭐라고 할까? 예수의 평등 정신으로 사회를 거룩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 사회를 따라 더 계급주의적으로 변한 그 교회 말이다. 그 교회는 더 이상 신자들이 모여 예수를 기억하며 기다리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마치 회사처럼 운영되는 법인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헌금을 포함한 수익에 대해 세금을 안 내는 법인 말이다. 이것도 신의 은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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