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포퓰리즘의 끝은 파멸이다.
“인플레에 시달린 아르헨 민심…포퓰리즘 좌파 심판했다” 아르헨티나 대선 결과에 관한 오늘 <한국경제>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링크: https://v.daum.net/v/20231120184803300) 한경이나 매경이나 피장파장 재벌 나팔수이니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지만 아르헨티나의 선택은 이제 파멸로 치닫는 기차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말기 암 환자처럼 돌팔이 협잡군에게 모든 것을 거는 짓을 지금 아르헨티나 국민이 마지막 몸부림친 것을 두고 이런 제목을 꺼내는 노유정의 글솜씨가 어떤가 하여 자세히 읽어보았다. 첫 문단이 다음과 같다.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온 아르헨티나가 차기 대통령으로 급진적 자유주의 정치인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후보(53)를 선택했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살인적인 고물가를 초래한 기성 정치권을 아르헨티나 국민이 심판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대체 왜 아르헨티나 국민은 밀레이의 무슨 말을 믿고 그를 찍었나? 이어지는 기사를 또 인용해 본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밀레이는 2021년 하원 의원에 당선돼 중앙정치에 입문했다. 정부 지출을 줄이겠다며 이번 대선 유세 현장에 전기톱을 들고 나오는 등 튀는 언행으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렸다. 대선 공약으로 아르헨티나 통화인 페소 대신 달러화 도입, 중앙은행 폐쇄, 장기매매 합법화 등을 내놨다. 중국과 브라질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취임식은 다음 달 10일 열린다.”
정치에 발을 들인 지 이제 2년밖에 안 되는 애송이를 대통령을 뽑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배포가 놀라운 것인지, 아니면 좌절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뽑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1차 투표에서는 과반을 넘지 못해 결선투표까지 간 끝에 12%p라는 큰 차이로 승리를 거둔 것을 보아 밀레이의 말빨이 먹힌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밀레이는 자신을 ‘무정부 자본주의자’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13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막장에 이른 아르헨티나 경제 문제를 무정부주의로 해결한다고? 대표적인 좌파 포퓰리즘인 페론주의를 또 다른 극우 포퓰리즘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실험을 이제 아르헨티나가 시작했다. 현재 아르헨티나 국민의 40%가 빈곤층이다. 물가는 폭등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빈곤층과 실업률이 하늘을 찌르는 청년층의 인기에 힘입어 밀레이가 당선되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아르헨티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독일, 이탈리아는 물론 한국에서도 경제적 타격을 입은 빈곤층과 청년층이 우파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그 대열에 아르헨티나가 참가한 것뿐이다. 정권 교체까지는 아니어도 현재 세계 많은 국가에서 우파, 극우파 포퓰리스트들이 권력의 중심부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그리고 좌파 세력이 몰락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와 코로나 사태가 가져온 세계 경제 붕괴다. 그런데 <한국경제>처럼 파당적 이익에 눈이 어두운 찌라시의 기레기들은 이조차 이데올로기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알뜰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역시 경제 논리를 추구하는 찌라시다운 짓이다.
아르헨티나 페론주의의 주인공인 페론은 원래 군인으로 쿠데타에 가담한 다음 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어 실질적 권력을 잡은 후 좌경화한 특이한 정치가다.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바로 ‘에비타’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이다.
페론이 권력을 잡기 전 아르헨티나는 자원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빈곤에 허덕였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과 결탁한 극소수의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의 착취였다. 이에 분노한 국민의 지지로 쿠데타에 성공한 페론은 국민의 복지 정책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정책을 완전히 바꾸었다. 미국의 자본을 끊고 미국의 회사가 지배한 아르헨티나 기업을 국유화하고 임금 착취를 당하던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가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미국 자본가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미국 정부, 특히 CIA와 대자본가의 음모로 일으킨 쿠데타로 페론은 정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이라고 별수는 없었다. 부패는 만연했고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군부 정권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1973년 페론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페론주의를 다시 살리기도 전에 1974년 죽고 말았다.
미국 정부와 대자본가와 결탁한 군부독재 정부와 페론주의의 대결에서 결국 아르헨티나 국민은 늘 페론주의를 선택했다. 그런데 군부독재 시대가 종말을 고한 다음에 등장한 정부의 무능으로 페론주의는 반대파에서 늘 물고 늘어지는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았다. 곧 아르헨티나 경제의 위기가 페론주의 때문이라고 덤터기를 씌우곤 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페론주의가 아니라 아르헨티나 정치가의 무능과 부패가 더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아시아의 변두리에 있는 한국의 자본가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경제>라는 찌라시의 기레기들은 이런 저간의 사정은 건너뛴 채 그저 좌파 때려잡기에만 골몰하여 마치 페론주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듯이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그 목적은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윤석열 정권에 아부하는 길이니 말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좌파’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빈자리는 이번 아르헨티나나 트럼프의 미국처럼 중도우파가 아니라 극우 포퓰리스트가 메우고 있다. 게다가 좌파는 분열하면서 자멸하고 있다. 좋은 예가 독일 좌파다.
독일의 좌파당(Die Linke)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원내교섭단체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좌파당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온 사라 바겐크네흐트가 지지 의원을 이끌고 좌파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 1969년 당시 동독 도시인 예나에서 태어난 바겐크네흐트는 구동독의 공산당인 SED와 통독 이후 PDS를 거쳐 Die Linke로 바뀐 좌파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다. 동독 시절부터 확고한 공산주의자였던 바겐크네흐트는 탁월한 언변과 카리스마로 독일 사회주의의 상징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환생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통독 이후 공산주의 색채를 벗고 의회주의 좌파 노선을 추구했다. 그 결과 2004년부터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약했고 2009년 마침내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이후 바겐크네흐트는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 정치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바겐크네흐트는 게오르그 기시와 더불어 독일 좌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좌파당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아예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당을 떠나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독일 좌파당은 생존 자체를 두려워할 처지에 몰렸다.
사실 사회주의가 한 때 유럽의 지성인만이 아니라 사회에 희망의 등불이었을 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착취 구조가 내적 모순으로 자본주의의 자멸을 가져오고 노동자 독재를 거쳐 모두가 공평하게 사는 공산주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언은 착취를 직접 당하고 있던 노동자 계층에게는 희망의 빛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세운 소련이 붕괴하면서 국제 사회주의 연대도 무너졌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사회주의 연대를 버리고 과거의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중국은 국가 사회주의에서 국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경제 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모조리 후진국이다. 아무리 이상이 높아도 배가 고프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로 이행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언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로의 이행이었으니 180도의 전환, 문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평등하게 산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이기주의자고 욕심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런 인간의 본질을 무시하고 능력과 성향과 무관하게 물질적으로 평등한 삶을 약속하는 것 차제가 사기다. 공산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매우 심각한 사기였다. 그러나 고전적 자본주의는 잉여 이익을 위해서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악한 제도였다. 그래서 착취를 당하던 노동자들이 공산주의가 약속한 평등한 사회를 꿈꾸게 된 것이다. 이 노동자와 함께 이상적 사회를 꿈꾸는 학자와 정치가들이 결합하여 세계 공산주의 연대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자본가와 우파 정치가들은 타협하여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춘 복지국가의 탄생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었다. 전통적인 좌파인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가 들어서면서 ‘제3의 길’을 허울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 독일에 신자유주의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복지 축소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독일마저도 생존을 위해 국가적 구조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2008년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긴 것은 분명하지만 부동산 가격과 물가 폭등, 빈부 격차의 심화로 사회적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중동과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분쟁으로 발생한 난민이 독일로만 몰려들면서 사회적 갈등 요소가 더해졌다. 그러자 독일 국민은 기존 정당이 이런 문제 해결에 무능하다는 판단에서 이른바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라는 극우 정당에 표를 몰아주기 시작했다. 이 당은 나치를 연상시키는 수준의 외국인 배척과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일 국민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결국 일부 주에서는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단 기존의 집권당이 무능하면 국민은 야당에 권력을 넘겨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야당마저 무능하면 국민은 자동으로 극우 포퓰리즘에 기울게 된다. 근세 역사에서 이는 늘 반복되어 온 일이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극우 포퓰리스트가 득세하게 된 이유다. 기존 정당은 무능한 데다 부패하기까지 하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우 포퓰리스트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든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나 아랍의 민족주의자들도 국민을 오히려 도탄에 빠트리고 지속적인 분쟁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벌이는 분쟁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다. 한국은 단 한 번도 유럽이나 아르헨티나 수준의 복지국가에 이른 적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복지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면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복지로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를 피운다. 한국의 복지 재정 지출은 OECD 회원국 평균을 여전히 밑도는 후진국 수준이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는 물론 <한국경제>와 같은 그 아류 찌라시들은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느라고 한국이 복지 정책 때문에 망할 것 같이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이동관이 가짜뉴스를 엄단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데 정작 이런 ‘진짜’ 가짜뉴스는 왜 처단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파나 극우 포퓰리즘의 종말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보여준 것과 같은 파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러는 것인가?
이런 가짜뉴스에 속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다. 국민이 올바른 정보를 습득하고 합리적인 식별과 판단을 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저 <조선일보>와 그 아류 찌라시들이 무차별적으로 퍼뜨리는 가짜뉴스를 듣고는 무슨 기독교의 복음이나 되는 양 ‘믿습니다. 할렐루야!’라고 광신도처럼 날뛰지 말고 말이다. 언제나 한국이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까? 참으로 답답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이름 그대로 깨끗하고 향긋한 좋은 바람이 불어 거리에서 탱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