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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Nov 23. 2023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무죄라고?

 ‘토착 왜구’를 한국 고유의 상황을 초월하여 이해할 수는 없다. 

 세계 대학 서열을 정하는 것으로 유명한 ‘Times Higher Education’(THE)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났다. (링크: https://www.timeshighereducation.com/news/historians-comfort-women-trial-was-cancel-culture-steroids?utm_source=newsletter&utm_medium=email&utm_campaign=asia-weekly&spMailingID=27801048&spUserID=MTAxNzcwNzUwODY4NgS2&spJobID=2351484022&spReportId=MjM1MTQ4NDAyMgS2)     


“Historian’s comfort women trial was ‘cancel culture on steroids’”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역사학자의 위안부 소송은 ‘지독한 ‘취소 문화’였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학자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 ‘토착 왜구’의 딱지가 붙게 된 박유하를 지칭한다. ‘취소 문화’는 낯선 단어다. 그러나 그 뜻은 간단하다. 예를 들자면 내가 좋아했던 어떤 가수가 마약을 사용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좋아했던 마음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지는 사회적 현상을 말한다. 한 마디로 박유하에 관한 법적 분쟁이 법이 아니라 한국의 독특한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사 내용도 박유하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한국 사회가 지독히 분열되어 이 사건은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박유하와 관련된 소송은 1심 무죄, 2심 유죄 판결이 났고 마침내 2023년 10월 26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파기환송 판결이 났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다. 아직 최종 판결이 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기사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THE는 이 사건을 학자의 학문의 자유의 관점에서만 파악하고 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출판된 이후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박유하의 학문의 자유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미국의 저명한 좌파 지식인인 놈 촘스키마저 박유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국제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마치 한국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한 ‘힘없는’ 학자의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는 무지몽매한 나라나 되는 듯이 매도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난리다. 그런데 과연 박유하의 학문의 자유가 대한민국과 일본의 길고 긴 역사적 원한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문제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논리다. 물론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도 않고 그를 욕하는 일에 먼저 나서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박유하는 스스로 주장하는 대로 위안부 할머니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기 위해 그 책을 쓴 파렴치한 인간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학문의 자유라는 잣대로만 바라본다면 이른바 터널 증후군에 걸리게 되어 버린다. 곧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태를 파악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시각으로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나 학문의 자유가 모든 잣대 가운데 가장 지고지선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박유하의 아버지는 여수 어머니는 순천 출신으로 이른바 전라도 출신이다. 그런데 여순사건 직후 서울로 올라와 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박유하도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고 학사, 석사, 박사도 일본에서 마쳤다. 전공은 일본 문학이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세종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런데 박유하가 쓴 책의 제목은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화해를 위해서>, <제국의 위안부> 등 한국인의 역린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것이 많다. 물론 박유하의 논리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장이었던 한국, 그것도 ‘전라도 출신’으로 살기 힘들었던 한국을 일찌감치 떠나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에서 공부한 그의 처지에서는 정당할 수도 있다.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일본과 화해해서 잘살아 보자, 더 나아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리가 훌륭한 것이어도 시기가 맞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연합국에 맞선 전쟁 발발국으로서 전범 국가가 되었던 일본이 여전히 과거의 악행에 대해 조금도 사과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먼저 나서서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일본에서 살다 온 한국 사람이 한다는 것은 더욱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토착 왜구’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유하의 가장 문제가 된 <제국의 위안부>는 현재 ‘분노한’ 박유하의 결정으로 온라인 github에 무료로 배포되어 누구나 읽어 볼 수 있다.(링크: https://voiceofearp.github.io/website/books/%EC%A0%9C%EA%B5%AD%EC%9D%98%EC%9C%84%EC%95%88%EB%B6%80/) 그 전반적 내용은 박유하가 주장하는 대로 ‘학문적’ 분석이 담겨 있다. 그리고 공개된 내용은 법원에서 지적한 부분을 ‘oooo’으로 처리한 것이라 법적 문제도 없다. 그래서 박유하의 주장대로 그 책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더 정확히는 반일 감정으로 읽어내는 것이 그에게는 억울할 수 있다. 이른바 가치중립적인 역사 연구물을 왜 감정으로 평가하냐고 반박하면서 말이다. 학문의 자유에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 ‘기치 중립’이다. 박유하는 결국 궁극적으로 바로 여기에 의존하여 자기만의 주관적 논리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해석에 객관적 시각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박유하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는 흔히 ‘가치중립’을 표방한다. 자신의 연구는 이데올로기나 민족, 인종, 성의 편견을 뛰어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 되는 교만이다. 모든 인간은 타고나면서 그리고 살아가면서 편견을 지니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지식을 배우고 객관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 객관적인 연구를 해도 어느 한 인간이 내놓은 연구물은 늘 편견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탈이데올로기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는 자기가 탈이데올로기적인 연구를 했으나 이데올로기에 물든 ‘무지몽매’한 자들이 자기를 매도한다는 피해의식에 절게 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조차 이데올로기나 편견을 넘어설 수는 없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도 개인의 출신과 경험 그리고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 지식, 객관적 학문은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의 해석은 늘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지배하는 집단의식이나 시대정신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다.    

  

중요한 기준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해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한국과 한국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거짓이다. 한국과 한국인이 사라지고 나서 존재하는 진리가 한국과 한국인에게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흔히 이런 주장에 맞서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학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과연 그 학자는 한국과 한국인과 무관한 일본인이나 미국인, 더 나아가 안드로메다인이란 말인가?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을 하면서 학문의 자유를 내세우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마치 부모의 집에 얹혀살면서 부모를 욕하고 부모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식 아닌 자식의 패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짓을 늘 외국서 공부한 자들이 학자연하면서 자주 저지른다. 마치 자기는 그 나라 국민이 아닌척하면서 말이다. 뼛속까지 한국인인데 이렇게 머리만 안드로메다로 출장 간 자들이 의외로 한국에 넘쳐나고 있다. 독일에서 오래 공부한 경험으로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학문의 자유가 어떻게 민족과 국가의 생존과 자존감을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그 학문이 보편타당한 진리도 아닌 역사적 해석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국인 사이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학자들 가운데 의외로 박유하와 같은 논리를 펼치는 자들이 많다, 더 나아가 아예 친일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일본이 좋으면 일본으로 건너가든지 귀화해야 할 것인데 절대도 그런 짓은 또 안 한다. 결국 한국에 주저앉아서 이른바 ‘토착 왜구’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다. 박유하처럼 일본이나 미국의 ‘지식인’을 끌어들여, 지지를 확보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신라시대 때부터 한반도의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고전적으로 사용해 온 수법이다. 무지몽매한 한반도 주민들의 의식을 뛰어넘는 선진국의 논리와 더 나아가 보편적 학문적 진리로 무장하여 자기가 속한 민족을 깎아내리는 사이비 엘리트 의식에 물든 ‘토착 왜구’의 사고방식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해소할 수 없다. 이들을 박멸하는 것은 빈대나 이를 죽이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까지 불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토착 왜구’를 박멸하는 일은 지난하지만 멈출 수 없고 멈추어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유교를 매우 싫어하지만, 맹자가 묵자의 겸애를 비판한 것에는 동의한다. 사해동포주의는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 더구나 인류 평화를 위해 내가 속한 국가와 민족에게 피해를 준 전범 국가를 먼저 용서하고, ‘가치중립’적인 학문적 잣대로 우리 국가와 민족의 피해를 무마하려 든다면 이는 역적이고 패륜이다. 학문의 자유가 모든 가치를 능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비록 법적으로 박유하나 그 비슷한 부류가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민족의 이름으로 내리는 역사적 심판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부처와 예수가 나와서 보편적 진리를 설파했어도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민족주의가 모든 가치 판단에서 가장 상위의 척도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자기가 속한 국가와 국민을 폄하하는 학자가 내세우는 '가치중립'은 기만이기에 그의 '학문의 자유'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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