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김명수 합참의장 후보자가 핵잠수함의 군사적 효용성이 충분히 있다고 했지만, 사실 현재의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일부 정당과 국민이 핵잠수함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망상이다. 윤 대통령과 바이든의 '워싱턴 선언'으로 한국은 핵잠수함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 선언을 번복하면 한미 간 분열이 일어나 북한에만 이롭다. 비용, 기술, 전략적 현실을 보아 한국이 핵잠수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 한국이 겁나면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와야 한다.”
미국의 현직도 아닌 전직 관리가 한 주권 국가의 국방에 대해 오만방자하게 감 놓으라 대추 놔라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언제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다. 한국을 ‘해방한’ 미국은 이승만 정권이 맘대로 북한을 침략할 것이 두려워 한국군, 정확히 말해서는 그 당시 ‘국방경비대’의 규모를 10만 명 이하로 유지할 것을 ‘명령’했고 이승만은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여 징병제를 폐지했다. 이미 그때부터 한국의 보수 정권은 미국이 시키면 다 따라 할 수밖에 없는 허수아비였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해 유지되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말을 안 들으면 미국 원조가 끊기고, 원조가 끊기면 정권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미국은 한국군의 무장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명령에 불복하여 한국에서 지역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미국의 national interest, 곧 국익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한국군은 자력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맞이한 한국은 8월 대구 징병사무소를 개설하여 길가는 젊은이를 강제로 잡아가 일주일 정도 기초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바로 전선에 투입했다.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이승만 정권은 전시 동원 체제를 수립하여 징병제를 복원했다. 이때에도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군대에 들어가려고 하는 젊은이가 많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길에 지나가는 젊은이를 마구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자, 집에 숨어 있는 젊은이가 많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집을 뒤져서 강제로 잡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급히 모은 군대, 곧 국민방위군이 약 70만 명이 되었다. 기초 군사 훈련이라고 해봐야 겨우 소총을 분해 결합하고 발사하는 것을 배우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태로 전선에 투입된 신병이 문자 그대로 ‘총알 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상황을 정리한 <나무위키>의 글을 인용해 본다.(링크: 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20%EA%B5%AD%EA%B5%B0/%EC%97%AD%EC%82%AC)
“신성모 국방장관의 제멋대로 한강 인도교 폭파로 국군 서부전선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하여 버리는 등 사실상 그때가 국군의 최고 위기였으며 북한군에게는 도망칠 수 없는 포로들을 대거 획득하게 도와주는 형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실제 6.25 전쟁 초기 북한군 홍보영상에서의 한국군 포로들 대거 획득에 대해 선전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는 국군 병사들도 중화기는 없고 오로지 개인화기 하나만 들고 온 것이 태반이었다. 한강 방어선에서 김홍일 중장이 이끄는 시흥 전투지구사령부에서 한강 방어를 하는 동안 징집한 신병들은 전시임을 참작해도 고작 2~3일 동안 훈련 같지도 않은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어서 싸워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채명신 예비역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신병들은 제식 소총인 M1 개런드 소총을 장전하는 법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총알이 날아오면 참호 속에서 숨어서 장전된 총알을 다 쓰고 나서 선임병에게 다 쐈으니 장전해 달라고 전투 중에 들고 올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야간경계도 몰라서 수하 절차도 안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시 한 에피소드로 한신 대령이 주둔지 경계 중에 이와 같은 일이 나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를 꾸짖자, 병사가 하는 말이…. 서 있으라니까 서 있는 거 아닌가요? 한마디로 미군 등을 통해서 군복과 총정도나 지급했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신병들을 전장 한가운데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군대의 부패로 그렇게 모아놓은 한국의 젊은이가 굶어 죽고 얼어 죽기까지 했다. <나무위키>가 인용한 김재명의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에 나온 글을 재인용해 본다.
“전쟁의 혼란 속에 제 발로 스스로 군대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를 강제로 데려가고, 집을 뒤져 데려가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모인 국민방위군이 70만 가까이 됐다. 하지만 이들을 통솔하던 일부 군 간부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과 군복을 빼돌려 암시장에 내다 팔아 배를 불렸다. 그로 말미암아 5만 명(일설에는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잃은 사람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의 80%가 신체적, 정신적 상처 탓에 전투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이 비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승만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문제의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은 총살형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비극을 쉽게 잊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병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링크: https://namu.wiki/w/%EB%8C%80%ED%95%9C%EB%AF%BC%EA%B5%AD%20%EA%B5%AD%EA%B5%B0/%EC%97%AD%EC%82%AC)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른바 목에 힘주는 집안의 젊은이는 군대에 ‘잡혀가지’ 않았다. 힘없는 서민의 아들들만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군대 끌려가면 죽는 데 누가 자발적으로 죽으러 가고 싶을 것인가? 지금도 군대 가면 ‘X뺑이 치는’ 것이 엄연한 현실에서 군대에 가고 싶겠나? 더구나 윤석열 대통령조차도 부동시를 명분으로 군대에 안 간 것을 비롯하여 목에 힘 좀 주는 많은 ‘실력자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군대 기피 전통은 70년이 훨씬 넘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후 1950년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될 때 부족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워낙 전면적인 비상이 풀린 상황에서 당한 기습이었기 때문에 국군은 상당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휘부 간의 갈등(채병덕과 이형근의 갈등 등)이나 국군통수권자였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인 신성모는 서울에서 도망칠 궁리나 하는 등의 문제라든지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며 오직 미군 개입의 희망 한 가닥만을 안고, 소련의 지원을 업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현대화된 군대인 북한군과 싸워야 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제멋대로 한강 인도교 폭파로 국군 서부전선의 전력이 사실상 와해하여 버리는 등 사실상 그때가 국군의 최고 위기였으며 북한군에게는 도망칠 수 없는 포로들을 대거 획득하게 도와주는 형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실제 6.25 전쟁 초기 북한군 홍보영상에서의 한국군 포로들 대거 획득에 대해 선전하고 있다) 한강을 건너는 국군 병사들도 중화기는 없고 오로지 개인화기 하나만 들고 온 것이 태반이었다.”
이때 이승만은 3일 만에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서는 대전 찍고, 대구 찍고, 부산으로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세울 궁리나 하고 있었다. 이런 이승만 기념관을 세운다고 지금 난리인데 도대체 그 기념관에 이런 만행을 전시해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전선이 고착되고 양쪽의 피해만 늘어가자, 한국전쟁을 끝내려고 미국이 주도하여 정전협정에 돌입하자 이승만이 갑자기 북진통일을 내세우며 정전협정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심지어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방해하기 위해 1953년 6월 미군 지휘하에 있던 ‘반공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이라는 사달까지 일으켜 미국을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 이승만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미국은 한국을 배제하고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정전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전협정 문서에는 정작 죽을힘을 다해 싸운 한국군 대표의 사인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미래가 한국을 배제하고 결정된 역사가 시작된 것도 오로지 이승만의 미친 짓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력으로 북진 통일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이승만이 오로지 권력 유지를 위해 벌인 사달이었다. 정전협정 후에도 미국이 한국을 지켜달라고 난리 치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국이 정전협정을 맺는지 얼마 안 된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맺은 것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링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616)
“한국과 미국 가운데 한 나라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인정할 때 언제든지 양국은 협의한다. 각 당사국은 상대 당사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통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 미국은 그들의 육·해·공군을 한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한국은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미국은 비준에 앞서 양해 사항에서 한국에 대한 외부의 무력 공격을 제외하고는 원조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에 더해 무엇보다 한반도에서의 전작권은 한국에 없고 미국에만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외국이 한국을 침략하면 방어만 할 수 있는데 그 방어도 오로지 미국의 판단으로 미국의 지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연 세계의 주권 국가 가운데 이런 처지에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세계 10대 경제국이라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쪽팔림’을 한국 국민이 알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주국방이 주요 화두가 되지만 특히 우파 정권은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툭하면 항공모함, 핵잠수함 운운하며 립 서비스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극우 세력은 핵무기 생산까지 운운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무기 체계를 갖추려면 미국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툭하면 핵잠수함, 항공모함, 핵무기 타령을 하는 이 자칭 ‘애국 시민’ 세력을 어찌해야 하나? 한국의 자주국방을 막는 나라가 바로 미국인데 이런 ‘애국 시민’은 툭하면 미국의 성조기를 들고 시청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 자들을 바라보면 정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자주국방은 법적으로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인데 북한은 이제 정찰 위성도 자력으로 하늘에 띄워 놓고 한반도 감시에 들어갔다. 핵무기는 최대 100기까지 완성하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도 확보했다. 그런데 한국은 입으로만 자주국방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 전에 상황 판단을 전혀 못한 무식한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전쟁이 나면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나고 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자, 한강 다리를 폭파하게 시키고 국민은 내버려 둔 채 대전 찍고 대구 찍고 부산 찍은 것이 이 나라 국군통수권자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이승만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국민을 살리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로지 종신 권력을 위해 말도 안 되는 북진통일을 외쳤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자칭 ‘애국 보수 계층’은 그런 자를 위한 기념관을 짓자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 입으로는 핵잠수함, 항공모함, 핵무기를 들먹이며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날은 추운데 참으로 답답하여 속에서 열불이 난다. 언제나 정신이 제대로 박한 정치가가 나와 이 나라를 바로 이끌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