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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Dec 13. 2023

‘사쿠라’의 나라에서 이탄희가 설 땅은 정말 없나?

이탄희와 용혜인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

<조선일보>가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하는 ‘운동권 내로남불’”이라는 제목의 ‘사설’씩이나 되는 글로 한 때 진보 세력의 아이콘이었던 김민석, 송영길, 조국을 콕 집어서 비판하고 있다.(링크: https://www.chosun.com/opinion/editorial/2023/12/13/Y77TPA76G5CSTGGGUTVON6BJ4A/) 언제나 그렇듯이 이 글 또한 ‘조선이 조선했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접한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무엇보다 초점이 안 맞는다. 김민석이 이낙연을 ‘전형적인 사쿠라’라고 비판한 것을 두고 김민석 자신이 ‘사쿠라’, ‘철새’로 비난을 받았던 ‘아픈 상처’를 건드린다. 송영길은 한동훈을 ‘어린놈’, ‘건방진 놈’으로 욕했는데, 송영길이 30~40대에 국회의원이 되어 60대 이상의 국민의 ‘뇌가 썩었다.’ ‘투표 안 하고 쉬라’고 말했다고 뭐라 한다. 조국에 대해서는 별 근거 없이 ‘내로남불’의 덫을 씌운다. 그래 놓고는 느닷없이 이른바 운동권의 ‘선민의식’과 ‘내로남불’을 비꼬는 문장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런 수준의 글을 천하의 <조선일보>가 사설이랍시고 싣고 월급을 주다니. 자기도 창피한 것은 아는지 무기명 사설이다. 글에 책임을 도저히 질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하나 건질 문장은 김민석이 이낙연을 두고 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지금 시대정신은 윤석열 독재를 견제하라는 것인데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당내 문제에 돌리는 것은 전형적인 사쿠라” 이 말은 인용이니 사설을 쓴 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한 글에서 쓸만한 문장이 남의 것을 베낀 것이라니 천하의 <조선일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사설에서 친절하게 ‘변절자’로 해석까지 해준 ‘사쿠라’는 바로 <조선일보> 아닌가? <조선일보>가 설립된 이후 오로지 권력만 보고 해바라기처럼 변절에 변절을 거듭한 것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닌가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왕을 찬미 찬양하고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잔뜩 핏대 올려놓고는 해방되고 나니 갑자기 민족지를 자처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으로 서울을 빼앗기자마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친 것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다시 이승만이 세력을 잡자, 친일 행보를 지속하더니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나자 다시 민주 투쟁의 선봉에 선 듯이 행세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니, 권력의 딸랑이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빨갱이 타령’으로 독재자를 빨아준 대가로 광화문 거리의 호텔을 선물로 받지 않았나? 그것도 모자라는지 짝퉁 군사독재자 전두환이 권력을 잡자 아예 대놓고 민주 투쟁 세력을 빨갱이도 모자라 ‘용공 분자’ ‘친북 세력’으로 몰면서 언론계 강자로 우뚝 서지 않았나? 권력과 돈을 따라 변절에 변절을 거듭한 <조선일보>야 말로 ‘원조 사쿠라’ 아닌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김민석, 송영길, 조국의 잘못도 있다. 김민석은 ‘김민새’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변절을 거듭한 자다. 그리고 김민석은 우상호, 송영길과 더불어 2000년 5월 17일 5.18 전야제 행사 참석 후 광주 그랜드 호텔 옆에 있는 ‘새천년 NHK’라는 단란주점에서 ‘접대부’를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인 ‘죄’가 있다. 더구나 이 장면을 다름 아닌 ‘통일의 꽃’인 임수경에게 들켜서 만천하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 당시 <중앙일보>는 ‘5·18 전야에 술판 벌인 '두 얼굴 386’’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 내용을 자세히 알렸다. 그 자리에 있던 우상호가 자기들을 비난하는 임수경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는 사실도 세상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 임수경은 정치판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이 사달의 장본인인 김민석, 우상호, 송영길은 여전히 목에 힘주는 자리에 있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한국의 정치판이 워낙 더러운 곳이니 ‘접대부 끼고’ 술 좀 마신 것이 뭐 대수냐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세 사람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주홍 글씨’인 것은 분명하다.      


조국은 아내와 공모한 아들딸의 입시 비리 죄와 더불어 자본시장법 위반의 죄를 저질러 법원의 판결까지 받았다. 물론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겠지만 이미 조국마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무죄를 주장하기에는 이미 명분이 없다. 조국과 그 가족은 분명히 도덕적인 기준만이 아니라 실정법을 위반한 죄인이다. 그러니 조국도 주홍 글씨가 이마에 새겨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영논리에 빠진 국민이 조국 패밀리를 무조건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들을 진보 진영의 이념을 위해 희생당한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 찬미 찬양하는 이른바 ‘팬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진보 세력의 팬덤만큼이나 이들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수구 세력층에 속하는 이들도 만만치 않다. <조선일보>라는 대표적인 ‘사쿠라 신문’이 낸 사설 같지도 않은 위의 글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앵무새처럼 운동권과 민주당에 대한 욕을 배설하는 자들의 꼬리글이 넘쳐나는 사실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조국 패밀리의 ‘팬덤’이나 조국을 증오하는 이들도 다른 모든 건전한 시민과 마찬가지로 내년 총선에서 똑같이 1표를 행사할 권리를 지닌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이런 세력으로 국론은 처절하게 분열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국론이 분열된 상황에서 내년에 치러지는 총선 과정에서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를지는 불 보듯 훤한 일 아닌가? 그러나 양 진영은 한 치의 양보도 할 생각이 없다. 마치 철천지원수나 되는 듯이 서로를 증오하고 물어뜯는다. 그 과정에서 이편도 싫고 저편도 싫은 이른바 중도층은 양 진영에게 자기편에 들지 않는 이른바 ‘회색분자’라며 두들겨 맞는다. 한국의 정치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네 편 내 편을 갈라놓고 서로 싸워야 속이 시원한 이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이편저편도 아닌 중도를 지키는 사람을 ‘기회주의자’로 욕하고, 막상 어느 편을 들면 바로 ‘사쿠라’, 곧 변절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진영논리에 빠져 극도의 분열 현상을 보이는 사회의 병리 현상을 치유할 ‘어른’은 고사하고 ‘인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용혜인이니 이탄희와 같은 ‘희망’이 한국의 정치판에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극소수이고 무엇보다 이들을 지지하는 ‘팬덤’의 세력이 조국 패밀리 팬덤이나 전광훈 패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하다. 더구나 아예 이탄희는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현재 정치판에 그가 설 땅이 없다는 말이다. 용혜인은 민주당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는데 그러면 바로 수구 세력에서 ‘사쿠라’ 딱지를 붙일 것이 뻔하다.     


이탄희나 용혜인이 한국 정치판에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국민이 마음으로만 지지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조국 팬덤과 전광훈 태극기 부대를 능가하는 지지 세력이 모이고 구체적인 조직과 자금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원이 모두 팬덤 문화와 패거리 문화에 ‘소모’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탄희와 용혜인이 설 자리는 사실상 없다. 사실 이렇게 양분된 정치판에서 이 두 사람은 앞으로도 살아날 가망성은 거의 없다. 양당제가 굳건히 자리 잡은 한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양당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양당제가 자리 잡은 모든 나라에서 한국과 같은 극도의 국론 분열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 것에서 제도 자체라기보다는 결국 국민의 의식 수준이 문제라는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올해의 사자 성구가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소식이 들린다. 물론 이는 중국 고전 <논어>의 ‘헌문 편’에 나오는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비틀어서 한 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子路問成人子曰若臧武仲之知公綽之不欲卞莊子之勇冉求之藝文之以禮樂亦可以爲成人矣曰今之成人者何必然見利思義見危授命久要不忘平生之言亦可以爲成人矣     


직역하면 다음 정도의 뜻이 되겠다.     


자로가 완성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장무중의 지혜와 맹공작의 탐욕하지 않음과 변장자의 용기와 염구의 재예에 예악으로 문채를 낸다면 또한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공자가 말했다. “오늘날 완성된 사람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익이 보여도 의로움을 먼저 생각을 하고, 남이 위험에 빠지면 자기 목숨을 바치고, 아무리 힘들어도 평소에 자기가 한 말을 지킨다면 이 또한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무중, 맹공작, 변정자는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고위 관리였고 염구는 공자의 제자였다. 그런데 이들은 위에서 말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단점도 있었다. 장무중은 독선적이고 맹공작은 능력의 한계가 있었고 변정자는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고 염구는 우유부단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완성된 사람이 될 수가 없고 그들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완성된 사람이 된다는 말이 된다. 결국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들을 은근히 비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완성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게다가 타락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판치고 기회주의자가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공자가 말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구요불망평생지언(久要不忘平生之言)을 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견리사의’를 할 수 있어 보이는 이탄희나 용혜원이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현실이 그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내년 총선을 단순히 선거가 아니라 거의 선과 악의 대결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정치라는 것이 최악과 차악의 대결이고 그나마 lesser evil, 곧 덜 악한 것을 뽑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상황에서 크게 바랄 것은 없어 보인다. 언제나 견리사의와 견위수명을 하는 성인(聖人)은 고사하고 성인(成人)이라도 되는, 곧 사쿠라가 아닌 정치인을 보게 될까? 지금 봐서는 그날은 안 올 것만 같다. 오늘 날씨처럼 한국의 정치판에도 어두운 구름이 잔뜩 끼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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